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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의 한국 나들이]
5.혈연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천공일년 오월 이십 칠일 아침, 우리는 큰 누님을 따라 표값 이만 천원씩 주고 고향 강진으로 가는 고속 뻐스에 올랐다. 고향에 가 형제들을 만나봐야 하고 숙부님 숙모님들께 인사를 올려야 한다. 비록 그 다수는 만난적도 없지만 근 20년간 서신 래왕이 있었고 누님께서 고향에 내려가실 때마다 “시동생님은 왜 안 오이우?”하며 기다려 주는 형수님들이 계신다.
나는 어려서부터 누님과 자형님들의 사랑을 한몸으로 받으며 커왔지만 형님과 형수님들의 사랑은 하냥 그립기만 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님께선 두살 사이로 딸 셋을 본 후 아들을 보려고 셋째 딸 이름을 삼남(三男)이라고 지었었다. 삼년 후, 형 재만이가 태여났고 두해 후 내가, 또 두해 후 동생 재선이, 이렇게 삼남이 태여났다. 헌데 형님 재만이는 내가 두살 때 저세상으로 가고 형제로는 재선이와 나, 둘만 남았다. 고향에 가면 죄다 나의 형과 형수님이실게다. 저도 몰래 가슴 벅차오른다. 중국에선 형님은 고사하고 동본 김씨 하나 찾을 수도 없었다.
엊져녁 우리는 누님을 따라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에 사는 큰 고모님네 집으로 인사 하러 갔다. 93년 여름 부부간이 연길에 오셔서 우리 같이 백두산에 올랐었고 나와 함께 북경에까지 놀러갔던 윤현형님네 집이다.
부천시는 서울시와 한시가지나 다름이 없었다. 시내뻐스를 타고 둬역전을 가서 지하철을 갈아 타고 몇역전 지나 구로동에서 내린다. 한 자그마한 정자가 (丁字街)에 자리한 윤부(尹府)는 몇해전 윤현형이 땅을 사고 직접 지은 자그마한 5층 빌딩이다. 2층에는 미장원을 경영하는 셋째 흥현동생이 살고 3층은 건설회사에 다니는 둘째 문현형(미장공)이 살고 있었으며 4층은 순심누나가 살고 있었다. 5층엔 맏이인 윤현형님이 나의 고모님을 모시고 살고 우체국에 출근하는 막내 인현이는 따로 아빠트를 장만 하였기에 1층은 남에게 세를 주고 있었다.
매일마다 로인정에 나가신다는 나의 고모님께선 83세 같지 않게 정정하셨다. 고모님께 큰 절 올리고나서 가지고 간 잣알, 도라지, 고사리, 상황버섯같은 토산품과 우황청심환등을 조금씩 례물로 내놓았다. 고모님은 “느그들 보닝께 내 오라버니 올케 보듯이 반갑다. 몸 성히 잘 댕겨 가그라. 뭔 일 있으믄 여그 형한테 말하고 잉.” 하며 반가워 하셨다. 우리들은 잠시간 소주 두 석잔씩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뵈는 얼굴들이지만 한피줄이라서인지 집에서 동생이나 누님들과 둘러 앉아 이야기 나누듯 외람이 없었다.
이튿날 일찍이 고향으로 떠나야했기에 우리는 인사를 남기고 빌딩에서 나왔다. 작고 아담한 빌딩이다. 십 여년전, 그러니 89년도부터 동생과 함께 공장을 하면서 돈 조금 버는 날이면 산 좋고 물 좋은 곳에다 아빠트 하나 지어놓고 우리 일곱 형제 자매가 한자리에 모여 오손도손 재미나게 잘 살아 보리라고 꿈 꿔 오던 우리들이다. 현재 비록 한시가지에 모여 모두 남 부럽지 않게 살고 있지만 윤씨 빌딩을 보니 옛 꿈이 다시금 가슴을 친다.
흥현동생이 가지고 있는 미장원은 그들이 거주하는 빌딩에서 도보로 오분 거리도 안되는 곳에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자리 헐망한 오두막 안에서 깨여진 거울 하나와 찌그러진 의자 하나 놓고 머리 깎기를 해오던 것이 얼마전 낡은 집들을 허물어버리고 새 아빠트가 일떠서면서 뜨르르한 현대식 미장원이 생긴 것이다. 흥현이는 1.9메터 되는 키에 인물 또한 출중하였고 태권도도 구단이나 된다고 한다. 남들 보기엔 인물 체격에 맞지 않게 보잘것 없는 리발쟁이라지만 게으름 없이 꾸준히 하노라면 이같이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우리가 앉은 뻐스는 고속이였다. 진동도 없고 소음도 없고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고 눈을 지그시 감으니 더없이 편안하여 단잠이 절로 몰켜 온다. 뻐스엔 중국과는 달리 승무원이 따로 없이 운전기사 한사람 뿐이였다. 발차 후 도중에서 오르는 승객은 하나도 없었고 종착역에 거의 닿기 전에 몇사람 내린 외엔 모두 끝역 강진이였다. 서울 고속뻐스 터미널에서 아침 일곱시에 떠나 오후 한시경에 강진에 도착 하였다. 이천 사백원을 내고 택시차로 작은 외숙님 집에 이르렀다. 약속이나 한듯이 우리가 차문을 여는데 외숙님은 대문밖에 자전거를 세우고 있었다. 논물코를 돌아보고 금방 돌아와 자전거에서 막 내리는터였다.
“외숙님!ㅡ”
택시에서 내려 보짐도 돌볼사이 없이 소리지르며 달려갔다.
“어어? 이것이 누구라냐?”
“제가 제진입니다. 외숙님, 안녕하셨어요?”
“오냐, 오냐! 느그들 온다더니 참말로 왔구만 엥?”
언제 보나 상냥하고 쾌활하신 일흔 한살 나그네, 일찍 외숙모님 저세상에 보내시고 홀로 계시는 보토리 늙은이, 괴로움과 외로움인들 그 얼마리오만 항상 실눈 쪼프리며 웃음으로 맞아주는 나의 외삼촌! 삶의 거울이 나를 비춰주는듯 하다. 5년전 연길에 놀러 오셨을 때 우리들은 착하고 건강하고 고운, 외숙님 고독을 풀어드릴 외숙모님 한분 찾아드리려고 여러번 말씀 드렸었으나 아니시라 시치미 떼시는통에 성사하지 못하였다.
그길로 고향 칠량에 내려가련다고 하니 외숙님께선 퍼그나 섭섭해 하셨지만 꼭 만류하진 않았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터미널까지 따라와 소고기, 막걸리, 과일 따위 고향에가 쓸 부식물 사는걸 도와주고 오렌지쥬스 한병씩 손에 쥐워 뻐스에 앉히였다. 마치 처음 먼길을 떠나는 어린자식을 바래여 주듯이…
칠량면 동백리(冬柏里)! 수십년을 들어오며 생각하고 그리던 곳, 조상님들 누워 잠드시는 땅! 정다웠다, 상상하던 것처럼 아름다웠다. 오후 다섯시쯤, 큰 바위를 가져다 (冬柏)이라 새겨 세워놓은 국도(国道)가에 우리를 버리고 뻐스는 제 갈길을 계속 갔다. 동쪽 멀리로 푸른 바다가 둥글게 보이고 180도로 돌아서 보니 지척에 푸른산이 병풍처럼 둘러 섰는데 그밑에 오붓하게 모여 앉은 기와집들이 한눈에 안겨온다. 실로 찾아보기 힘든 한폭의 산수화 같은 선경이다. 한 봄날 가을의 단풍마냥 붉게 타고 있는 무더기들은 바로 푸른 대나무 숲속에서 붉은 열매가 익어가는 동백나무들과 푸른 기와집 사이에 지어진 몇몇 붉은 기와집이다. 산밑이라 지형 그대로 앞 집은 낮고 뒷 집은 높고 웃 집은 웃쪽으로 썩 돌려지고 아래 집은 아래쪽으로 돌아 앉고 모두가 제멋대로이고 자연적이다.
부드러운 저녁 해살을 안고 국도에서 대개 한키로메터쯤 떨어진 마을을 향해 걸었다. 콩크리트 길 량켠은 네모 반듯한 밭논들이다. “밭논”은 박식한 내가 손수 지어낸 명사라 사전에도 없을게고 누구나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보리는 밭에 심고 벼는 논에 심는건데 보리를 베여내고 즉각 물을 대여 벼모를 꽂으니 그땅 밭논이라 그것이다. 논밭이라 여기에 쓰면 보고있는 경작과 꺼꾸로 된것이고 또한 자고로 논밭이라 부르면 벼만 심는 땅인줄로 사람들은 오식하고 있기에 새 단어가 부득불 등장하게 된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방정맞게도 우리가 찾아간 5월말 6월초는 일년중 고향에선 “부지깽이도 뛰고” “고양이 발도 빌어 쓴다”는 가장 바쁜 때라고 한다. 띄염띄염 밭들에선 노오란 보리 이삭들이 미풍에 설레이며 수확을 독촉하고 띄염띄염 논들에서는 파아란 벼모들이 잔잔한 물위에 머리를 내밀고 키돋움을 시작한다. 한쪽 밭에서 수확기가 보리를 거두는데 한쪽 논에서는 차양기가 벼모를 내느라고 돌아친다. 모내기를 제때에 못한다면 감산 될 것은 물론이요, 보리란 놈도 일찍 베여도 늦게 베여도 안되는 까다로운 놈이였다. 조금 익찍이 베면 감산이 되고 조금만 늦게 베면 그이삭들이 해풍의 습도로 검은색을 띠여 등급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수익을 높이는 것이 산량과 등급 이 두가지가 아니겠는가? 금년엔 보리농사 대풍이라 사람마다 땀동이를 쏟으며 웃음통이 확 터져버렸다.
오늘 사람들은 참으로 행운이 아니랄 수 없다. 옛날 아버지 어머니들은 꽛꽛한 보리밥에 꽛꽛한 잎싹지(무우잎 김치)를 비벼 보리고개를 겨우 넘겼다. 그때는 “울며 넘는 보리고개”라 하였다. 오늘은 웃으며 춤추며 넘는 고개가 보리고개이다. 선인들이 피와 땀으로, 뼈와 살로, 한숨과 눈물로 걸군 이땅에 보리를 심어 돈을 번다. 보리밥이나 잎싹지는 기아를 몰아내고 연명하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맛으로 영양가치로 향수로 조금씩 먹는다. 그럼 저처럼 많은 보리로 밥을 한다면 뉘가 다 먹을고? 의문 했는데 알고보니 전부다 맥주공장에서 계약하고 사간다는 것이다. 기신형님 집에만도 200여 주머니, 대개 800kg이라 적게 쳐도 800만원어치라고 한다. 이제 그자리에 벼를 심어 또 800여만원이라 그 수입은 상당하다. 그러니 “기신네 걷보기와 달라, 진짜 알부자여, 애들두 잘 길러냈구 말이여…”라고 하시던 광주에 재옥형님의 말씀이 틀리지 않는다.
마을에 들어서 볼라니 세멘트 바닥인 길 량변에 몽땅 다 길다란 검은색 비닐포를 펴고 그 위에 노오란 보리를 널어 말리고 있었다. 마침 기신형님께서 경운기를 몰고 집모퉁이에 나타났다. 형수님을 뒤에 앉히고 말린 보리 걷으러 가는 길이였다. 차를 그자리에 세워두고 우리들을 집으로 안내 했다. 당숙모님(기신형님 모친)께 큰 절 올리고 형님과 형수님께도 큰 절을 드렸다.
“당숙모님, 안녕하세요? 제가 옛날 북간도에 간 김 세환의 큰 아들놈 재진입니다.”
“오냐 오냐, 니가 나 조카라냐? 워메 워메, 그 먼디서 어떻게 왔을꼬 잉? 어멈은 잘 계시제? 워메 워메, 오래 사니 느글 다 본다 잉…”
손을 꼭 잡고 어깨를 끄당기며 얼굴을 쓰다듬어 준다. 뺏뺏이 여위셨으나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이다. 92세 고령이신데 시청이 맑으시고 행동 장애 하나 없으실 뿐더러 정신상태 놀랍게도 포만하셨다. 기신형의 아버지는 나의 당숙님, 나의 아버지와 사촌 형제이다. 그러니 기신형은 나의 륙촌 형님이시고 나보다 14세 위이시다. 그래도 십년은 더 젊어보여 기색은 나보다 썩 더 나았다.
인사를 마친 후 나의 안해는 누님과 함께 만찬 준비를 하고 나는 형님네를 도와 길가의 보리를 거두어다 전기로 바람 일궈 알곡 다듬는 기계로 다듬고 주머니에 담아 포장하는 일을 거들었다. 일하는 사이 여러 동네분들ㅡ형님 형수님들이 일부러 들려 인사를 나누었다. 먼곳에서 찾아온 한피줄의 형제라고!
보리 포장도 끝내고 저녁상 준비도 다 되고 밭일군들 거개가 귀가 했을 때 우린 재량형님 집에 가 인사를 한다음 재정형님 집으로 갔다. 재정형님께선 면장으로 일보다가 년세가 넘어 얼마전에 자리를 냈다고 하는데 66세라는 분이 쉰 세살인 나보다 더 젊어 보였다. 그형님은 95세 고령이신 나의 당숙모님을 모시고 계셨다.
집집마다 보면 젊은이와 어린애는 하나도 없고 그대신 바른벽마다엔 자손들의 사진을 꽉 박아 걸어 놓았다. 사진이라도 보면서 그리움을 달래고 혈육의 정을 감수하려는 늙은이들의 애틋한 심정이 한눈에 안겨오며 코마루가 찡ㅡ저려난다. 사진속에는 서양식 드레스와 양복을 입은 부부도 있고 우리 민족 풍속대로 두건에 저고리, 저고리에 치마를 입고 맞절하는 부부가 있는가하면 사각 검은 모자에 검은 도포를 걸치고 흰 종이말이를 가슴 앞에 쥐고 찍은 사진도 있다. 자식들마다 모두 출세하여 광주나 서울에서 잘 살고들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명절이나 부모님의 진일에만 올가말가 하는 자식들이 언제나 만사 태평하고 전화라도 자주 걸어주었으면 하는 가련한 부모님들의 바램이다.
“형수님, 몸도 썩 좋지 않으신데 인젠 농사일 그만두시고 서울 가셔 손자나 보며 편히 보내시지 그럽니까?” 보리 포장 할 때 내가 말씀 드렸더니 형수님께선
“안되우, 그럼 좋것지만. 그렇잖아두 애들의 소원인데두 말만 꺼내면 온 집안을 박산 낼 지경으루 날리라우. 원체 성깔은 더러워요, 더러워.”라고 하신다.
남도치 남자들 성격은 나도 어려서부터 보아왔으니 아는바다. 허지만 마음이 악해서 그런것이 아니다. 말 습관과 가부장제적인 대 남자주의 의식은 얼마나 기나긴 세대를 내려오면서 굳어진 것인지 모른다. 물론 이미 많이 고쳐졌고 다음 세대엔 완전히 달라질 것이지만 70나이 어른들은 그일부를 저세상까지 갖고 가야 할 것이다.
마을에 인사 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기신형님네 담모퉁이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섰는 형수님들을 만났다. 일밭에서 돌아온 그들은 소식을 듣고 우리와 인사라도 나누고자 모처럼 찾아 오신 분들이였다. 이름 모를 형님 한분도 끼여계셨다. 기신형님네 앞집 분인데 어머님께서 말씀 하시던 오동 숙모님의 아드님이신지 헤여질 때 까지도 묻지를 못했다. 나는 그와 함께 한켠에서 일찍 세상 뜨신 나의 삼촌 영환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분들은 성질이 괴벽한 우리 청주김씨 가문에 시집이라구 오셔서 얼마나 고생들이 많으십니까?”라고 누님의 인사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고소대회나 여는듯 누구라 할것 없이 남편 흉 보기에 입에 침이 마를 지경이였다. “이집 양반은 안 그러우…”하고 누군가가 문득 말머리를 돌리며 재량형님댁을 가르키자 너나 없이 모두들 그렇다며 고소대회가 일시에 재량형님에 대한 표창대회로 바뀌였다. 그러니 남도치라고 모두가 무뚝뚝한 것만은 아니다.
“농민이 없으믄 나라도 망하고 누구도 못 사는거여…”
길바닥의 보리를 거두어 담으면서 기신형님게서 하신 한 보통 농군의 소박하면서도 긍지에 넘치는 말씀이다. 중국으로부터 값싼 보리를 많이 수입해 오는데 정부에서는 자국 농민들의 리익을 돌보아 중국 보리 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자기들 보리를 수매 한다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값을 높혀 주었지만 맥주공장과 같은 수매부문에서 제멋대로 등급을 엄청 높이니 농민들 불만이란다. 농협이 나서서 교섭도 해보고 하지만 공급자와 구입자 즉 생산자와 사용자 지간의 모순은 해결책이 없는거고 생산자만 손해보게 되여 있다는 것이다. 하여 등급에 오르려고 철기를 놓칠세라 일손을 다잡는다는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한국엔 소고기가 비싸다”는 소리를 나는 중국에서 많이 들었다. 한근에 만 오천원(당시 환률로 인민페 백원)좌우이니 그것이 그것이다.
“오빠! 소고기는 볶아요? 국 끓여요?” 누님이 기신오빠를 불렀다.
“그 비싼걸 뭘하러 사왔어? 이리 갖고와봐, 내가 갈켜줄게.” 기신형님은 퇴마루에 걸터 앉으며 이렇게하라 저렇게하라 시켜준다. 그리고는 나를 불러 마주 앉힌다. 소주 한잔 쪽 들고 생신한 소고기 한점을 가루소금 섞은 깨기름에 똑 찍어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건데 천하 별미라 맛만 본다는것이 많이 먹었다. 당숙모님도 함께 많이 드셨다. 옛날 나의 부친님도 소고기를 사오기만하면 먼저 술 한잔에 생고기 한점을 소금에 찍어 잡수시곤 하셨다.
저녁 술상을 벌리였는데 너근 소고기를 몽땅 썰어서 깨기름에 찍어 먹었다. 남녀 모두가 그것을 제일로 삼았고 돼지고기 볶음채 같은건 건드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형수님들 열명가량 오셨고 형님들 네분 오셨다. 모두 일이 바빠서 못 오신다는 것이였다. 기신형님은 저녁전에 나와함께 몇잔 드시더니 먼저 사랑방에 가 누우셨다.
우리는 둬시간 가량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잔씩밖에 안 마시고 사양하니 강권 할 도리도 없는 것이고 그냥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면장 재정형님은 한잔도 안 드시고 쥬스만 두모금 마셨다. 일에들 지쳐 피로해 하심이 확연한데 체면에 먹고만 가버릴 수 없으니 억지로 자리를 늘굼이 환히 보였다. 그렇다고 “형님네들 인젠 가십시오” 할 수도 없는 거북한 내 처지이다. 형님들은 그래도 두시간쯤이니 일찍이 자리를 뜬 셈인데 형수님들은 중국 손님의 노래를 들어야 간다고 자리를 벋히였다. 노래를 한돌개하고 사진도 찍었다.
면장형님은 너무 적어 미안하다면서 돈 5만원을 내손에 기어이 쥐워주었다. 모두가 70을 바라보는 형님들인데 술을 억제하고 담배를 피우지 않음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원래부터 술 담배 안하셨어요?” 나도 극력 한국말투를 본따보노라 애를 썼지만 참으로 “남강북조(南腔北调)”라 서글펐다. 몇년전까지만해도 그이들 역시 술도 많이 마시고 담배도 피우셨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해롭다는 도리리를 안 후로 자각적으로 끊은 것이라 한다. 같은 성씨 한 피줄을 타고난 나는 왜 할 수 없는거냐고 자문 하게된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형님과 함께 식전일을 좀 하고 소고기 미역국에 아침을 먹었다. 물론 형수님이 부어주는 반지술도 맛나게 마셨다. 밥상을 차린 후 형님 내외는 서로 네가랴 내가랴 하시더니 우리가 떠나 나올 때 로비에 보태 쓰라고 돈 10만원을 주었다. 저금소가 문을 열지 않았기에 우리가 아침밥 먹는 사이 형수님이 꾸어 온 것이였다. “일 편한 철이믄 메칠 묵어 놀겠츠럼 못가게 할란디 농사 땜세 그러닝께 그리 알거라 잉.” 형님들의 말씀이다.
전날 저녁 술상 차리기전에 기신형님은 우리부부를 정방에 불러 앉혔다. 생소고기 안주에 술 몇잔 마셨겠다, 누님도 그랬고 형수님도 말씀했듯이 성질 괴벽하시다더니 이 동생한테 무슨 욕이나 하실라고 부르는게 아닐가? 나의 혼자 생각이였다.
“느그들 눈으로 직접 봤드시 우리는 고향에서 같이 도우며 잘 살고 있다.”
형님께선 욕이 아니라 상냥한 어조로 입을 여셨다.
“느그들은 먼 땅에서 얼마나 고생이 컸겄냐? 여그서는 느그들 그냥 외웠어라, 오늘 이초롬 만나니 참말로 반가웁고 고맙고, 그 먼디서 형제라고 찾아 왔으닝껭. 그라고 어쩔 예정이냐? 느그 보기엔 내가 검디검은 놈 어떨런지 몰라도 차려입고 척 나서면 인물이여 인물, 못하는 일 없어야 없어! 큰 소리 치는거 이니여, 그라니 느그들 여그서 눌러앉어 우리 같이 살라냐, 도루 갈라냐?”
직심의 말씀이였다. 나는 혈연의 정에 가슴이 뭉클해나고 목이 꺽 메였다.
“형님, 매우 감사합니다! 형님의 말씀 알겠습니다. 우리들도 늘 고향에 계시는 친척들을 외우며 그리워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늦은대로 뵈러 온겁니다. 이제 서울 가서 로비나 조금 벌어갖고 중국에 돌아가 어머님 모시고 살랍니다. 그곳치고는 우리들 다 잘 사는 편이니 안심 하십시오.”
“오냐, 알겄다. 가서 열심히 잘들 살거라. 됐으니 이젠 일어들 나거라.”
아주 간단한 대화였으나 너무나도 뜻 깊은 순간이라 하겠다. 주제는 국적과 일자리 문제이다. 우리들이 한국에서 살고저 한다면 형님께서 척 차려입고 나서서 모든것을 해결해 주겠노라는 뜻이였다. 강진군수 로부터 광주나 서울까지 나의 형님들이 여러분야에서 큰 일들을 맡아보고 계셨으니 기신형님의 말씀은 전혀 빈소리가 아니였다.
촌 사무실(마을회관) 마당에서 우리들은 발길을 멈췄다. 정문 오른켠에는 “범죄(犯罪) 없는 마을”, 왼켠엔 “경로(敬老) 모범 마을”이라는 나라에서 내려준 커다란 간판이 걸려 있었다. 범죄가 없고 로인을 존경하는 모범 마을, 정직하고 선량한 고향 사람ㅡ 나의 형님 형수님들이시다!
지금 동백마을엔 스물 두집이 살고 있는데 두집만이 다른 성씨이고 나머지 20집은 여전히 청주 김씨, 팔촌 이내의 나의 형님들이라 한다. 옛날부터 다른 성씨 두집을 두었는데 지금과는 달리 옛날엔 그 두집은 쌍놈이고 여자는 여자일 남정은 남정일 집집을 돌며 일 해주고 벌어먹는 머슴 심부름군이였다고 한다.
우리는 회관 앞에서 웃는 얼굴을 카메라에 담은 후 마을 뒤켠 서쪽 둔덕에 자리한 우리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손수 지의신, 큰 누님께서 태여나신 집이다.“계시세요?”를 몇번 웨쳤으나 대답이 없었다. 원채는 대나무 숲으로 우거진 푸른산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여 앉았는데 원채의 오른 손 켠에 사랑방이 있고 원채의 맞은편엔 창고가 지어진 “ㄷ”자형 가원이다. 원채의 양마루에 서서 동으로 바라보면 마을의 기와지붕들이 가까이 발밑에 이리저리 질서 없이 널려 있고 그앞에는 반듯반듯 질서 정연한 밭논들, 그다음은 검은 갯벌을 지나 푸른바다가 하늘이 맞붙은 곳까지 활짝 펼쳐졌다. 저 갯벌에서 아버지랑 어머니랑 반지락도 줏고 맛도 뽑고 계도 잡고 하셨다지…
밭논을 곧게 꿰질러 간 세멘트 도로위에서 트럭 한대가 남으로부터 북으로 질주 한다. 그뒤로 큰 뻐스 한대가 바싹 추격한다. 강진읍에서 칠량면을 거쳐 멀리로 가는 아침 뻐스이다. 연해 도로라서 날리는 먼지 한점 없다.
우리는 집 뒤의 대나무 밭도 돌아보고 먼 산머리로부터 우리집 사랑방 뒤벽을 핥으며 졸졸 흐르는 맑고 시원한 개울물에 손도 담궜다. 네모 반듯한 앞마당에 다시 나왔을 때 모두 일밭에 가고 비였으리라 여겼던 방문이 빠금히 열리더니 90세 쯤 돼 보이는 할아버지가 흰머리를 밖으로 내밀더니 흰 오강을 앞세워 밀며 앉음 걸음으로 나왔다. 나는 달려가 그이를 부축하여 양마루에 앉히고 인사를 올렸다.
옛날 이집을 짓고 살다 만주로 간 김 세환의 아들이라고 엿쭈었더니 머리를 끄덕이신다. 양마루 기둥에 걸려 있는 내 아우 이름과 똑 같은 문패를 가르키며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로인은 자기 가슴을 가르켰다. 그러니 그이도 우리같이 “재”자 돌림을 가진 나의 형님벌 되는 사람이다. 오강을 부셔드리고 “안녕히 계시세요”를 하니 소주 한잔만 하고 가라고 만류 한다. 운신도 제대로 못 하는 형님의 초대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경환삼촌의 조카집에 들려 본 후 귀로에 올랐다. 이제 돌아서면 언제 또 다시 올런지 기약 못 할 길이라 나는 뒷걸음질로 천천히 고향 마을과 멀어졌다.
호계리 작은 외숙집에 다시 피끗 들렸다가 집앞 길가에서 차를 잡아타고 군동면 중산리로 작은 고모님 뵈러 갔다. 고모님은 남새 팔러 장에 가고 없고 고모부만 누워 계셨다. 일으켜 앉히고 절을 올렸다. 제정 때 포목을 질머지고 만주 우리집에까지 갔다 왔었노라고 이야기를 시작 하였다. 파리가 득실거리는 방에서 우리절로 정심을 챙겨 먹었다. 전날 큰 누님께서 오늘 뵈러 오리라고 전화까지 쳤건만 고모님은 상관 없이 광주리를 이고 장으로 가셨다. 소고기 안주에 소주 한잔 권했더니 고모부는 취하셨다. 방에 누워 “죽자니 청춘이요, 살자니 고생이라…”를 몇 십번 곱씹으신다.
햇살 좋은 날이라 마당에서 머리도 감고 걷옷도 빨고 하는데 어느덧 세시가 되여 고모님께서 돌아오셨다. 인사 올리고 떠나려는데 돈 4만원을 로비에 보태라며 기어이 밀어 주려 하였다. 그집 형편을 뻔히 보고서야 어찌 그돈을 받을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되려 조금도 보태드리지 못하고 돌아서려니 안타까웁기가 끝이 없는데야.
한시간가량 도보로 외가마을 군동면 안풍리에 닿았다. 강진에서 순천으로 가는 큰 길과 강을 사이두고 중산리는 동산밑에 안풍리는 서산아래에 45도각으로 마주하고 있다. 그러니 안풍이 중산보담 읍과의 거리가 몇리 더 가까운셈이다. 큰 길가에서 서쪽으로 일리가량 콩크리트 길을 따라 들어가면 어머님의 고향인 안풍리 오씨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마을 입구에 반듯한 정자를 짓고 커다란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은 비록 명확히 읽을 수 없었지만 안풍마을과 해주 오씨에 관하여 뭐라고 적어 놓은 듯 하므로 력사를 가진 마을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큰 외숙모님께 인사 올리고 둘째 외숙님집에 찾아가 인사를 올렸다. 큰 외숙모님 집에서 저녁을 들춰 먹은 후 호계리로 돌아와 작은 외숙님 곁에서 밤을 잦다. 잠자리에 들기전 소주 한잔씩 마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외숙님은 원래 술을 즐기시는 분이셨다.
작은 외숙모님께선 팔년전에 별세 하셨고 큰 아들 갑배와 그 동생 광재는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회사에 들어갔으며 두 딸도 멀리로 시집 갔다. 외숙님께선 다년간 홀로 계시지만 의식주가 깨끗하시고 정신이 포만하시고 쾌활하시며 옥체가 건강하셔 71세이신 로인이 61세도 안 되여 보인다.
외삼촌과 나는 잠자리에 누워 밤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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