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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현화는 남대문시장에서 제법 큰 옷가게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닮아서 남편복이 없는지 술주정뱅이 남편과 이혼하고 두 남매의 뒷바라지를 하며 과부로 살고 있었다. 늦은 저녁이라 가게엔 마침 손님이 없었다.
미래보다 다섯 살 손아래지만 어렸을 때 고향에서 함께 자란 추억이 있었고 동명이인인 데다가 생김새며 성격도 비슷해서 친형제처럼 흉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남편이 세상 떠나고 나서 직장에만 왔다 갔다 하고 친구나 친척들과 한동안 담을 쌓아서 현화란 존재가 있다는 것도 잊었다. 현화를 만나 보면 꼭 이미래 자신을 보는 듯 쓸쓸하고 서글프고 애처로운 자괴감 같은 걸 느낀다. 도매업자 사장은 레텔이고 껍질을 벗겨 보면 어둡고 외로운 인생이 이미래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현화를 보면 두 개의 닮은 그림자가 만나는 것 같다. 어둠의 색깔이 비슷한 두 여자였다.
용감하게 잘 사는 언니가 부럽다고, 내 팔자는 왜 이러냐고 병든 육신을 원망하며 훌쩍거릴 때 미래도 따라 울고 싶었다. 현화 팔자나 미래 팔자나 오십보 백보였다. 돈 많고 겉보기만 화려하면 뭘 하는가?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그래도 형부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 않냐고, 사랑 한번 뜨겁게 못해 본 자신의 무미건조한, 파란만장한 삶을 한탄하지만 사랑이 뜨거울수록 아픔은 그 몇십 배 몇백 배 크다는 걸 현화는 모른다.
그들 자매는 장사하면서 우연히 재회하여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는 사이가 됐어도 각자의 깊은 상처까지 나누어 가질 수는 없었다. 각자의 숨겨 둔 비밀이 있었다. 현화는 그걸 미래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다. 어린 이복동생을 버린 죄악감. 그 동생이 전과자가 되어 거리를 배회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죄악감 때문에 동생 앞에 얼굴 들고 나서지 못하는 또 하나의 형벌 같은 죄악감. 그 슬픔은 흉허물없이 지내는 육촌언니에게도 고백할 수 없었다.
"이복동생이 있다는 걸 왜 내게 말하지 않았니?"
현화를 만나 대뜸 화부터 냈다. 준식이 미래가 친누나인 줄 알고 회사에 찾아왔더라고 하자 현화는 쿤 비밀이 탄로나기라도 한 듯 깜짝 놀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며 언니에게 미안하다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사람을 시켜서 도와줄까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일이 꼬이더라고요. 아들이 교통사고를 내든가, 딸이 못된 놈 아기를 배서 자살소동을 빚지를 않나. 정신없이 살았어요. 장사도 잘 안 되고."
"그 사고가 버린 동생을 찾는 것보다 그리 중요하더란 말이냐? 그리고 동생과 자식들 문제가 무슨 상관 있어? 동생은 동생이고 자식은 자식이지."
"나도 언제 죽을지 몰라요. 오늘도 항암주사를 맞고 왔어요. 폐결핵이 폐암으로 진전했어요. 항암주사를 안 맞으면 이 장사도 못하고 문 닫을 거예요."
"누군 항암주사 안 맞은 줄 알아? 남편과 사흘이 멀게 암병원에 다니고 내 손으로 그이 혈관에 그 주사를 놓기도 했어. 그이가 의사를 믿지 않고 병원을 싫어해서 말이야. 나는 어쩐 줄 알아? 여자의 상징이라는 자궁이 없이 빈 깡통이야. 자궁암에 걸려 죽지 않으려고 자궁을 잘라냈기 때문에. 병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거야. 약 좋고 의사 좋은 세상에 뭐가 걱정이니? 문제는 마음가짐이야."
"자궁암과 폐암은 달라요."
"초기니까 잘 치료하면 낫는다고 했다면서? 의사를 믿어야지. 그래서 정신이 중요하다는 거야. 병을 낫겠다는 의지. 우리 남편도 그 의지 하나로 칠 년 간 생명을 더 연장했단다."
"십 년을 더 살면 뭘 하고 덜 살면 뭘 하오?"
"십 년을 더 산 것과 더 일찍 죽는 게 같나고 보니? 같다고 봐? 지금 네가 죽으면 자식들이 결혼해서 잘 사는 걸 보겠어? 네가 뿌린 씨앗들이 잘 되는 걸 봐야지. 그게 엄마의 의무이고."
"죄송해요 언니."
미래는 현화의 두 손을 꼭 잡고 눈가에 그렁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겉으로 화사해 보이는 남대문 옷가게 주인도 속에는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도 그걸 모른다. 또 알게 해서도 안 된다. 상인은 항상 웃고 손님을 즐겁게 해 줘야 한다. 옷 한 벌이라도 팔려면.
"잘하잖아? 지금까지 잘해 오고 있잖아? 언니 보니까 응석을 부리고 싶은 거지? 쯧쯧, 혹 떼려 왔다가 내가 혹을 붙였지. 준식이 문제는 어떻게 할래?"
화제를 준식이 문제로 돌렸다. 본론을 꺼내니까 현화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몸이 또 후들거리는 품이 보기에도 안타까웠다.
"준식이는 언니가 내 육촌언니란 걸 아나요?"
"내가 다 얘기했지. 그랬더니 이해하더구나. 너 있는 곳을 전혀 모른 것처럼 말하지 않았으니 안심해도 좋아."
"고마워요. 그렇지만 머잖아 만날 것만 같아요. 어떻게 그 애 얼굴을 보죠? 죽고 싶어요."
"네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했겠니? 다 팔자소관인 걸."
"준식이는 어디 있어요?"
현화는 갑자기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럴 때의 현화는 아이 같았다.
"우리 집에 있다. 오갈데 없으니까 그 수밖에 더 있니? 내가 가짜 누나란 걸 알고 떠나겠다는 걸 지금까지 붙잡아 두었어. 다행히 걔에게 운전 면허증이 있어서 수송팀에 부탁했더니 열심히 잘하고 있대. 소매점에서 주문한 옷을 배달하는 심부름이야. 오토바이 실력도 꽤 있는 것 같아."
"오토바이 도둑질?"
"얘는? 내가 설마 동생에게 도둑질을 시킬까? 때론 관공서나 회사에서 부탁받은 제복을 퀵서비스할 때가 있는데 오토바이 운전자가 필요하단 말이야. 준식이가 그걸 척척 잘해낸다는 거야. 서울 지리에 아주 훤해."
6
신학기 개강을 앞두고 모 여고에 납품할 제복 대금 관계로 교장과 입씨름하고 있을 때 손태흔 사장한테서 점심 대접을 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점심이 아니면 저녁이라도 사겠다고 부득부득 떼를 썼다. 급한 업무가 있어 나중에 통화하자고 해도 전화를 끊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사업상 상대를 기다리지 않게 하려고 두 대의 전화를 동시에 받는 게 습관이 되어 사업 전화인 줄 알고 교장과 통화 도중에 손 사장 전화를 받았는데 교장 선생님께 미안했다.
"교복 관계로 교장 선생님과 통화하고 있으니까 이따가 전화해 주세요. 손 사장닙도 참! 그럼 좀 기다려 주세요. 지금 바쁘니까요. 교장 선생님, 죄송합니다. 대금은 그 이상 깎아 드릴 수 없습니다. 다른 데 알아보시면 알 거예요. 우리는 공장을 직접 상대하기 때문에 많은 마진을 붙이지 않습니다."
"알아요 알아. 내가 오죽하면 사장님께 이렇게 사정하겠소? 한두 해 거래한 것도 아니고 십년 단골 아닙니까? 우리 학교는 가난한 애들이 많은 학교라 선배들이 입은 헌옷도 구하기 어렵습니다. 물려받은 걸 또 물려받고 하니까요. 그레서 사정하는 거니 개당 이만원씩만 깎아 주십시오."
"그러면 포장비도 안 나오는데, 알겠습니다. 우리가 좀 손해보더라도 애들을 위해서 깎아 드리겠습니다."
교장과 통화를 끝내고 다른 손의 전화를 받았다. 손 사장 들으라고 일부러 그의 전화를 안 끊고 기다리게 한 것이었다.
"말씀하세요, 손 사장님. 전화를 안 끊었으니까요."
"바쁜데 미안하요만 오늘은 내 소원을 들어 주시오. 점심 약속이 어려우면 저넉이라도……꼭 오늘이어야 합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데요?"
"이미래 사장의 기빠진 날 아닙니까?"
"어머, 제 생일을 어떻게 기억하세요?"
"인수와 둘도 없는 친구란 걸 잊으셨소? 사업의 친구, 인생의 친구. 사랑하는 친구를 먼저 보낸 제 심정도 알아주셔야지요."
"남편과 저와 무슨 상관 있어요?"
"상관이 있습니다. 친구가 부인을 끔찍히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부인을 통해 친구의 체취를 찾아내려는 거지 다른 목적이 있겠소?"
"망칙해라. 늙은 여자의 체취를 맡아서 뭐 한대요?"
하고 이미래는 까르르 웃었다. 손 사장의 식사 제의를 한두 번 받고 사절한 게 아니어서 그의 소원을 한번 들어 준다고 해서 죄될 건 없었다. 그러나 대학 동기 친구인 오하림에게 미안했다. 손 사장은 오하림의 남편이었다.
"하림이가 자기 신랑 꾀어서 밥 사게 했다고 질투하지 않을까요?"
"그 사람은 그럴 여자도 아니오. 남성복 디자인 전문이라 남자들만 상대하니까 남편에겐 흥미도 없어요."
"남성복이 남자인가요? 이상한 말씀을 다 하셔. 좋아요. 점심은 선약이 있어 어렵고 저녁에 시간을 내 보죠."
"제가 퇴근 시간에 맞춰 모시러 가겠습니다!"
손 사장은 좋아하며 전화를 달그락 끊었다. 전화 끊는 에티켓이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먼저 전화를 끊고 나서 수화기를 놓아도 좋지 않았을까? 미래는 소심하고 세심한 여자였다.
남편의 친구였던 손 사장의 식사 대접을 받는 게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으면서 별로 달갑지 않아서 몇 번 사양했는데 오늘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남자의 체면을 세워 줘야 한다. 남편의 친구에게 너무 비싸게 굴면 지하의 남편이 섭섭해할지 모른다.
준식이 직장을 그만두고 종적을 감추어서 마음이 울적했다. 어젯밤에 현화를 만나고 집에 와 보니 그가 기거했던 방 안이 말끔히 정돈돼 있고 그의 옷과 소지품들이 보이지 않았다. 침대 위에 쪽지가 놓여 있었다.
<누나, 이렇게 떠나서 미안해요. 나 같은 놈을 살붙이라고 믿고 먹이고 잠 재워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편한 직장도 맛있는 음식도 저에겐 사치스럽기만 합니다. 현화 누나를 찾아 끝없는 방랑길을 떠나렵니다. 내 누나를 찾기 전엔 죽어도 눈 감을 수 없습니다. 저는 혼도 넋도 다 빠진 알맹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누나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을. 저 자신에게 원망도 해 봅니다. 도대체 왜 그 누나를 잊지 못하느냐? 자신에게 물어 보면, 병든 엄마를 대신해서 우유 먹여 주고 기저귀 채워 키워 줬던 그 사랑의 추억 때문일 거라고 대답하네요. 사랑을 들먹일 자격도 없지만요. 준식이는 다시 자유로운 방랑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아름다운 이미래 사장님의 마음씨에 감동하여 다시는 죄 짓지 않고 착하게 살렵니다. 기회가 오면 또 만나 뵐 날 있겠지요.>
한발만 더 빨랐어도 준식이를 붙잡고 제 누나의 품에 안겨 줬을 텐데. 그들을 헤어지게 한 운명의 신은 더 긴 기다림의 시간과 슬픔을 준식이에게 부여할 모양이었다. 현화에게 준식이가 떠났다는 말을 아직 하지 않은 것은 현화 마음이 준식이보다 더 아플 것 같아서였다.
준식이를 찾아야겠다. 이 서울 장안 어딘가에 숨바꼭질하는 아이처럼 틀어박혀 있겠지. 현화 누나가 서울에 산 줄 알 테니까 서울을 떠나진 않을 거야. 신문 광고에 내고 방송사에 부탁해서라도 꼭 찾아야겠다. 미련한 자식. 누나를 지척에 두고도 모르고 내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할 게 뭐람. 나도 제 누나가 아닌가?
저녁에는 손 사장을 만나서 술도 마시고 울적한 마음을 풀어야겠다. 손 사장에게 준식이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면 더 빠르겠군. 그 사람은 언론사와 방송사에 친구가 있으니까 부탁만 하면 준식이를 찾는 건 시간 문제야.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손 사장이 내 걱정을 덜어 주려고 식사 대접 제의를 했나 봐.
7
그런데 간단한 저녁 식사 대접이 아니었다. 미래를 태운 손 사장의 승용차는 한강변을 벗어나 교외 도로로 달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요?"
"소양강으로 갑시다."
"그렇게 멀리?"
"멀지 않소. 천천히 가면 두 시간 잡으면 될 거요."
"손 사장님하고 춘천까지 가는 것 싫다. 더구나 이 밤에, 단둘이."
"싫어도 이미 가고 있어요."
"그러면 제가 져야죠."
손 사장의 넙죽한 얼굴이 백미러에서 코를 실룩거리며 웃었다.
"신학기가 되면 학교에서 교복 주문이 많이 들어옵니까?"
"그전부터 거래하던 학교가 서너 군데 있어요. 교복 도매는 마진이 없어서 안하려고 했는데 우리 매장이 싸다고 교장들이 직접 부탁을 해요. 모두 인수 씨의 학교 선배나 스승들이죠. 한때는 거래하던 학교가 삼십 곳이 넘을 때도 있었어요. 그때는 교복을 전문으로 제작해서 납품했으니까요. 우리 매장이 교복으로 유명해졌죠. 제가 직접 디자인도 하고요. 지금은 교복 전문 업체가 많이 생겨서 서로 가격 경쟁을 하고 학교와 업자들이 짜고 가격 비리, 가격 담합을 한다고 소문이 나서 특별한 경우 외에는 주문을 받지 않아요."
"특별한 경우란 남편과의 옛날 의리를 생각해서 거의 마진 없이 주문을 들어 주는 거구만?"
"그렇죠. 이익 없어도 학교와 거래한다는 자긍심이 있어요. 제가 디자인한 교복을 입고 발랄하게 웃고 까부는 학생들을 볼 때 그 환희감, 희열은 말로 표현 못해요. 옛날 학창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그때 제 꿈이 그거였으니까요. 제 손으로 디자인한 교복을 우리 이세들이 입고 즐겁게 공부하는 모습. 저는 시골에서 여고를 다녔기 때문에 그렇게 멋진 교복을 입지 못했어요. 사촌 언니의 헌옷을 물려받아 꿰진 곳을 땜질해서 입고 다녔지요."
"나는 옷을 물려받을 형제도 없어서 오일장터에서 파는 싸구려 기성복을 입고 다녔다오. 그 기성복은 다리미질을 해도 주름이 펴지지 않고 밝은 데서 보면 싸구려 기성복 티가 나서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게 겁이 났어요. 그래서 운동장에서 놀 때는 위통을 벗고 놀았지. 내가 케케묵은 소시쩍 얘기를 하는군."
"지금은 옷 걱정 돈 걱정 없는 부자 아닌가요?"
"부자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죠. 이미래 사장에 비하면 새발의 피고."
"자기가 더 부자이면서!"
"내가, 왜?"
"이렇게 비싼 외제 차를 굴리고 강원도에까지 나가서 식사를 하니까요."
"아주 특별한 경우요. 외제 차는 처남에게 돈을 좀 빌려줬더니 그 보답으로 처남이 사 준 거고, 여간해서 식사는 외부로 나가지 않습니다. 나도 깍쟁이거든. 곧 봄이 올 것 같은 밤의 전원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것도 좋지 않아요?"
"이제 조금 좋아졌어요."
미래는 손 사장 말에 맞장구치면서 명랑하게 웃었다.
"시간에 쫓겨 교복 납품하느라 많이 바빴겠소. 오전에 바쁘신 줄 알면서 전화해서 미안하오. 그때 전화하지 않으면 식사 약속을 안해 줄 것 같아서……고단하실 텐데 한숨 자시오. 내가 말을 너무 많이 시켰소."
손 사장이 말하는 사이 미래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준식이를 찾는 문제를 얘기해야겠는데 얼른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것은 이 자리에서 말을 꺼내기 어려운 슬픈 화제이기 때문이다. 잠깐 졸다가 눈을 떠 보니 언젠가 와 봤던 소양강변의 한 호텔 앞이었다. 그 호텔 식당의 바닷가재 요리가 값싸고 맛있기로 소문나 있었다.
호텔은 꼭 남녀가 잠자는 곳만은 아니다. 그곳은 소양강의 경관이 아름다운 관광지이고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남녀가 밀회를 즐길 수 있는 은밀한 곳은 아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두렵다면 구태여 번화한 관광지를 찾을 필요 없다. 그들은 연인도 아니고 타인의 이목을 두려워할 행동을 하려는 사람들도 아니다. 미래는 손 사장의 인격을 믿고 있다. 그래도 남자, 친구의 남편과 함께 호텔에 오니 멋쩍었다.
비싸지도 않은 맥주 곁들여 남자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창 밖으로 내다본 소양강의 야경은 미래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다. 아름다움은 인간의 심리를 사랑의 감정으로 변화시키게 한다. 이 남자가 내 남편이라면. 내 남편이 살아서 그와 마주앉아 식사를 했더라면. 꼭이 소양강변이 아니라도 좋고 뒷골목의 중화요리집이라도 좋다. 그러나 이 사람은 범할 수 없는 내 친구의 남편이다. 내가 범해서도 안 되고 그가 범할 수도 없는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 하면은 시간이 흐를수록 손 사장과 함께 온 목적이 저녁 식사만은 아닌 다른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미래의 상상일지 모른다.
남편의 친구이자 또한 대학 친구의 남편이라는 인간 관계 외에, 가까이해 본 적이 없는 이 사람이 어느 날 미래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또 다른 관계로 비약할 수 있는 요지를 다분히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망상이었다. 그런 망상을 지우듯 미래는 손 사장이 따라 주는 맥주를 망설임 없이 받아 마셨다. 맥주병이 세 병째 비워졌다. 음식은 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8
"왜, 음식이 맛이 없소? 난 맛있게 잘 드실 줄 알았는데."
"점심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배가 고프지 않네요."
"그때 친구와 왔을 땐 맛있게 드셨지 않소? 내 아내가 덜어 준 것까지 다 잡수시던데."
"그날은 왜 그렇게 게걸스레 잘 먹었는지 몰라요. 마치 허천난 것처럼. 저도 소식 체질이거든요. 하림이보다 더 입이 짧아요. 오늘은 그 맛있던 바닷가재가 저를 보고 싫어하네요. 아주 진귀한 음식인데. 요리 그 자체보다 더 가치 있는 손 사장님의 마음이 이 속에 녹아 있을 텐데."
"별말씀을 다 하시오. 우리 밖으로 나갑시다. 실내 공기가 너무 탁하요. 공기가 안 좋아서 입맛이 그런가."
두 사람은 잔에 남은 술을 다 비우고 일어서서 호텔 밖으로 나왔다. 호텔 밖이 강이었다. 나무 계단을 따라 강변을 나란히 걸어 내려갔다. 가로등이 환히 켜져 있어서 얼굴 표정, 눈빛까지 다 보였다. 손 사장의 표정은 담담하고 눈빛은 소년같이 온순했다.
미래는 술기운이 돌아 얼굴빛이 주황색이었고 숨을 헐떡거렸다. 그녀가 가쁜 숨을 내뿜을 때마다 하얀 입김이 가로등 불빛을 타고 허공 속으로 파랗게 날아갔다. 길섶의 나무와 수풀들은 메말라서 습기를 요구하고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두 사람은 벤치에 걸터앉아 찰랑거리는 수면의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친구(인수)가 강남 도매상가에 있는 그 팔층 건물 건체를 임대 받아 확장 개업한 기념으로 우리 부부를 초대하여 자축 파티를 열었던 곳이오. 단순한 식사가 아니고 파티였지."
"생생히 기억해요. 엊그제 일처럼 가슴에 젖어 오네요. 그뒤로 사업이 승승장구해서 은행빚을 내어 그 건물을 매입하게 됐지요. 지금은 빚도 다 갚고 빚독촉하는 사람 없어 자유롭고 홀가분해요."
"망하든 흥하든 빚이 없다는 건 행복이고 사업가들의 소망이지. 사업의 제일 목표는 부채에서 탈출, 부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해요. 나는 친구처럼 사업 수완이 없어 남의 건물을 빌려 장사하고 빚도 좀 있소. 부채에서 탈출하기가 그렇게 어렵디다. 어떤 땐 회의를 느껴요. 이렇게 끝장나면 어쩌나? 내가 추구했던 인생의 목표가 부채만 남기고 끝나 버리면 내 사후에 우리 자식들이 애비의 부채를 감당하려고 고생할 게 아닌가. 장사를 집어치우고 그만두자니 그 부채가 더 커질 것 같고, 그 부채가 내 평생을 옭아맬 것 같고, 부채에 치어 죽을 것 같은 두려움. 나는 그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다오. 겉보기는 화려한 사장이지만 빚진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말이오. 이것은 내가 꿈꾼 사업가, 내가 목표하고 달려온 정상이 아닌데 말이오."
"사업에는 다 그런 고민이 있지 않겠어요? 아직 젊고 건강하시니까 힘내세요. 저는 건강한 사람이 제일 부러워요. 우리 남편같이 애써 자기의 꿈 이룩해 놓고, 이렇게 아내에게 짐만 남겨 놓고 죽어 버리면 무슨 소용 있어요? 제가 손 사장님의 부채를 갚아 줄 여력이 있다면 도와 드리고 싶네요. 저에게 그런 힘이 없어서 죄송해요."
"말씀이라도 고맙소. 친구와 나는 전에도 약속했지만, 친구가 어려울 때 금전적으로 돕지 말고 마음으로 돕자고 했소. 서로 잘하려고 경쟁하면서 말이오. 마치 마라톤 선수들이 장거리 레이스에서 지쳐 있을 때 서로 격려하듯이 말이오. 만약에 우리가 한푼이라도 돈거래를 했더라면 우리 우정은 깨졌을지도 몰라요. 난 친구를 존경하고 부인을 존경하오. 누구보다도 존경하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 슬픔을 극복하고 꿋꿋이 헤쳐나가는 부인이 정말 존경스럽소. 아프지 말고 건강하셔야 합니다. 몸에 이상이 느껴지면 병원에 가시고. 친구처럼 병을 방치하면 안 됩니다. 건강은 돈으로도 못 사요."
이 우직하고 텁텁해 보이는 사나이가 오늘처럼 고독하고 진실해 보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그의 얼굴을 다시 보았더니 손태흔 사장 그 사람이었다. 친구 아내와 진실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저녁 식사를 사겠다고 핑계를 댄 것 같았다. 주변에 친구는 많아도 속을 털어놓고 말할 수 있는 진실한 벗은 찾기 어려웠다. 항상 밝고 유쾌하고 고민거리라곤 없이 즐겁게 살던 그에게 어두운 인생 그늘이 있다는 것은 의외였다. 미래는 마음이 아팠다. 이럴 때 남자의 마음을 달래 줄 사람은 여자밖에 없었다.
언젠가 하림이 단둘이 차를 마시면서 남편을 즐겁게 해 주지 못하는 불감증 환자란 말을 했을 때 그때는 대수롭잖게 흘려들었었다. 그것은 병이 아니고 심리적인 이상증세인 줄만 알았다. 오늘 그 말이 생각났다. 남편과 잠자리를 싫어하는 여자와 사는 남자는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까? 남자는 여자보다 육체적 본능을 참기 어렵다는데.
미래는 남편 죽고 나서 한번도 육체적으로 외롭다거나 성욕 때문에 고민한 적은 없었다. 남편의 죽음은 슬픔 그것이었다. 그녀의 생활은 육체와 멀어져 있었다. 오늘은 웬지 그 육체로 돌아가고픈 충동을 느꼈다. 술 때문이 아니었다. 손 사장이 친구 남편이기 때문에, 남편의 둘도 없는 사업 친구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더 가깝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마치 남편의 빈자리를 손 사장이 채워 주고 있는 것처럼 착각되었다.
"바람이 찬데 그만 돌아갑시다."
손 사장의 쉰 듯한 목소리에 미래는 아이처럼 몸을 흔들며 도리질했다. 왜 그런 동작을 했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잠시 전까지 하지 않았던 생각이고 자신과 한 약속을 배신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밤 열 한 시까지는 집에 돌아가는 걸 철칙으로 삼고 있었다. 전부터 지켜 온 규칙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홉 시 십 분 전이었다.
"나,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갈래요."
"아미래 사장을 떼어놓고 나 혼자 돌아가란 말이오?"
"손 서장님은 공처가니까 돌아가셔야지요. 나는 기다릴 사람이 없어요."
"빈말이 아니죠? 후회하지 않기요."
미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끄덕끄덕. 야무지게.
손 사장은 허허 웃고 알았단 듯이 앞서서 걸어갔다. 호텔 프론트에서 돈을 지불하고 방열쇠를 받아 쥐고 누가 볼세라 핑핑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미래가 따라오건 말건 자기 행동만 했다. 그래서 십사층 높은 방에 들어섰을 때 미래는 뾰루퉁 토라져 있었다.
핸드백을 내려놓고 코트를 벗자 미니스커트 아래로 허연 허벅지살이 눈부시게 드러났다. 손 사장은 고개를 돌리고 자기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숙녀를 놔두고 혼자서 돌아가시려구요?"
"나는 공처가니까 돌아가야겠소. 편히 주무시오. 지혜 씨한테 전화해서 내일 아침 모시러 오라고 하겠소."
"그렇게 하세요."
미래는 옷을 훌훌 벗고 내의와 스타킹도 벗었다. 그녀가 빠른 동작으로 침대에 벌렁 드러누울 때까지 손 사장은 나가지 않고 문 앞에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팬티와 브래지어만 입은 미래의 알몸은 화사할 정도로 싱싱했다. 미래는 핸드백에서 껌을 꺼내 씹으며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의 전원을 켰다.
텔레비전 화면이 잘 켜지지 않고 영문 글자만 나타났다. 남자라면 나를 두고 혼자 돌아가진 않겠지. 친구 남편에게 한 번쯤 열어 주면 어때? 그게 큰 죄악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를 갖고 싶은 걸. 나는 여자야. 이성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모든 인간에게 다 있는 거야.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다음 일은 생각하지 말자.
텔레비전 화면에서 사람 소리가 나고 화면이 정상으로 켜지자 미래는 리모컨을 놓고 남자를 기다렸다. 껌 씹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실내를 울렸다. 커튼을 제치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까 그들이 걸어왔던 나무 계단이 보이고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강물이 어둠 속에 반짝거렸다. 강 건너편은 도시였다.
미래는 기다리다 지쳐서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손 사장은 보이지 않고 도어는 닫혀 있었다. 돌아간 것 같았다. 미래는 크게 실망하고 일어나서 옷을 다시 입었다. 옷을 입다가 생각해 보니 이대로 가면 숙박비가 아까울 것 같았다. 혼자서 잘 수밖에 없었다.
텔레비전이 저 혼자 떠들어대고 있었다. 무슨 인간들이 나와서 뭐라고 하는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기나긴 불면의 밤을 어이할꼬.
샛강의 끝없는 갈대밭이 생각났다. 주말이 기다려진다. 이번 주말엔 거기에 가서 그 팬션에서 한숨 푹 자고 오리라. 남편의 체취가 숨쉬는 곳. 그 밀물 같은 아삭거림. 자연의 향연. 바람의 냄새. 버들가지에 새움이 트고 들새 물새 노래하겠지. 그녀가 편히 잠잘 수 있는 공간은 거기밖에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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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들
이미래(53)……의류 도매업자, 사장
준식(40)……현화의 이복동생
현화(48)……미래의 육촌 여동생
임인수(죽은 남편)
손태흔 사장(남편 친구)
하림(친구, 대화 속에 등장)
지혜(여비서)
팬션 주인내외
낚시꾼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