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온기는 남아 있었네!
솔향 남상선/수필가
‘그림이 무어냐’고 묻는 김홍도의 질문에 신윤복은 말하기를 ‘그림은 그리움’이라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TV를 시청하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제목의 방송이었는데 ‘부산의 고흐’라고 알려진 김송자(77세) 할머니 그림 얘기였다.
할머니의 그림은 소문대로 강한 색채로 그려진 섬세한 화폭들이었다.
마치 강렬한 색감의 화가 고흐의 작품과 유사하게 보였다. 할머니가 부
산의 고흐가 된 것은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할머니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오른쪽 눈을 실명하여 의안을 하고 있었고,
왼쪽 눈도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사물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고 흐릿
한 눈으로 그림을 그리려면 어쩔 수 없이 강한 색채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잘 보이지도 않는 한쪽 눈으로 그림을 그린 이유는 할아버지에 대한 그
리움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금슬이 좋았던 할아버지와 3년 전에 사별하고, 그 허전함과
빈자리가 견딜 수 없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어쩌면 내가 수필을 쓰게 된 계기와 사정이 유사한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도 아내 보내고 실의에 빠져 힘들었던 고분지통(叩盆之痛: 아내 잃은 슬
픔)이었지만 수필을 쓴다는 집념 하나로 어려운 시간을 감내할 수 있었다.
아내의 빈자리를 잊기 위해 수필을 쓴 것이 근 500편에 달하게 되었다.
9월말에 나오는 6권 째 수필집 - ‘보은의 오찬에 제자가 달아준 훈장’- 이
바로 그것이리라.
연상수법 덕분이었던지 아내와 같이했던 세월의 모습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
갔다. 내가 덕산고등학교 근무할 때 처남 처제가 월하빙인(月下氷人 :중매인 )이
되어 아내 될 여인과 처음 만났던 것이 예산의 향천사였다. 사찰 주변은 진주홍
물이라도주르르 흘러내릴 듯한 단풍의 아름다움이었다. 아내 될 여인은 그보다도
더 아름답고 기품 높은 여인으로 보였다. ‘제 눈의 안경’이라는 말도 있듯이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같다.
11월 11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날 약혼식 마치고 그림 같은 산사 단픙
속을 거닐다 결혼하게 될 여인의 손을 살며시 잡아보았다. 잡은 손도 잡힌 손도
모두 떨고 있었지만 체온이 통하는 마음 설레는 시간이었다. 강산이 여러 번 바뀌고
아내는 소풍길 떠난 지 오래지만 아직도 그 때의 손을 잡았던 온기는 살아 숨 쉬고 있다.
뭐가 그리 급했던지 우리는 11월 11일 약혼하고 12월 19일 결혼했다.
과거지사로 살이 숨 쉬는 게 어디 그 뿐이겠는가!
결혼한 지 4년이 돼도 우리부부는 아기를 낳지 못했다. 그러다가 5년째 아들
을 낳고 기뻐하던 일, 아들(영민) 서울 대 합격 소식을 듣고 밥상머리에서 부
부가 눈물 흘리던 그 시간, 내 집 마련까지 29번이나 이사할 때마다 아내 혼
자 이삿짐을 싸던 모습, 딸애(보라) 생명의 은인인 방소아과 원장님을 32년 만
에 찾아뵙고 우리 부부와 딸애가 보은하는 보람을 느끼던 일,
내 도솔산 산책길로 걸어서 유성고등학교 출근할 때, 땀나면 수업 못한다고
정수장 울타리까지 내 책가방을 져다 주던 내 반쪽. 자신의 생일만 되면 자기
가 축하받기보다는 어머니가 힘드셨던 날이라 어머니께 미역국이라도 끓여드
여야 한다며 친정으로 달아나 평생 생일 한 번도 없었던 아내, 7남매 장남한테
시집와 그 어려운 일 다해가면서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바가지 한 번 긁
지 않아, 고3 담임 29년에, TJB 교육대상까지 받게 해주었던 현모양처라 해도 무색
하지 않을 애들 엄마, 개략적인 것만 열거했는데도 눈시울이 붉어져서 더 이상 못
쓰겠다. 아내한테 면목이 없어 자책감에 마음만이 무거워지고 있다.
시경에 ‘해로동혈(偕老同穴)’이란 말이 있다.
‘살아서는 같이 늙고 죽어서도 한 무덤에 묻힌다는 뜻’이니, 우리 부부가 그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그걸 못하고 가슴에 한으로 못질만 해 놓았다.
또 비익연리(比翼連理)라는 말이 있다. 비익조와 연리지라는 뜻으로 부부가
아주 화목함을 이르는 말이다. 비익조는 한 새가 눈 하나와 날개 하나만 있어
서 두 마리가 서로 나란히 함께해야 두 날개로 날 수 있다는 전설의 새이고.
연리지는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접하여져 나무가 합쳐진 가지다.
그 둘을 합쳐 '비익연리'라 함이니 우리 인간에게는 화중지병(畵中之餠)에 불
과한 말이 아니겠는가!
아직도 온기는 남아 있었네!
떠난 사람 온기가 남아 있어 뭐 하겠는가!
비익연리가 좋다지만
‘있을 때 잘해!’ 만
못 하다네.
나는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고 있는지
자성에 빠져 볼 일이로다.
첫댓글 벌써 6번째 수필집이라니 참 대단하십니다. 그 꾸준함에 박수를 보냅니다.
온화한 한국 여인의
참 미인...
사모님께선 언제나 잔잔한 미소를 갖고 계셨지요.
한복이 참 잘 어울리셨던
모습이 눈에 선 합니다.
신의 질투로 먼져 떠나셨지만 남편의 곁을 항상 지켜주실 따뜻한 사모님.
열심히 수필집을 내시는 선생님께 매우 흐믓한 미소를 보내실것
같습니다.
여섯번째 수필집 탄생.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