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천관산)
육해공(陸海空) 풍요의 땅 대덕은 간암공 후손의 보금자리이다.
대덕읍은 북쪽과 서쪽은 천관산, 양암봉, 천태산, 부곡산, 공성산, 오성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과 동쪽은 연정천, 신월천, 분토천이 있어 농사지을 평야가 많은 풍요의 땅이다. 더구나 간척사업으로 농토는 더욱 확대되었다. 대덕중학교 교사로 정년을 마친 우리 문중 위계후 前장천문계장은 간척사업을 관리한 산 증인이기도 하다. 매화, 감태, 매생이, 김, 굴, 천관봉, 유자, 키위를 비롯해 한우, 봄나물 등 바다와 육지가 주는 풍부한 특산물이 즐비한 곳이다. 특히 대덕 한우는 대덕의 주요산업으로 육성되어 한우하면 대덕한우를 생각나게 하는 대명사가 된 지 오래다. 또한 말 사육 여건이 제주도를 능가하는 환경조건을 갖춘 지역이라 평가되어 몇 군데의 말사육장이 성업 중이며 국내 유일 한국말산업고등학교라는 특수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천혜의 자연과 더불어 천관산문학공원과 정남진수목원, 이청준 문학탐방길은 대덕의 대표적 관광명소이다. 35개의 자연마을이 행정구역상으로는 9개 마을로 나뉘어 있다. 신라와 백제의 흥망성쇠 그리고 간암공 초당마을의 신월리, 샘이 있는 연정리, 허연지 설화 연지리, 관청이 있던 자리 도청리, 잠두리, 만리성의 애환 분토리, 개매기축제가 열리는 신리, 매생이의 최대산지 내저 마을의 옹암리, 이시대의 선비 방촌학 저자 위이환이 기거하는 가학리로 나누어져 있다.
계사공의 대덕은 숨은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고을이다.
계사공(휘 성호/34세, 덕원부사공파)께서는 계사소고집 지명고찰편(220쪽~250쪽)에서 대덕에 대한 숨은 이야기를 실었다. 조선시대 신경준의 산경표를 인용 서쪽으로 감돌아 천관산을 이루니 대덕의 진산은 사실상 천관산으로 정의하고 있다. 고흥으로 귀양간 산, 천관기녀가 백마타고 자취감춘 산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연지리 마을의 유래에 대해 4가지 설화가 있다. 특히 고려시대 몽고와 관련되고 장흥신문 240호, 241호, 257호를 빌려 박형상 변호사의 ‘잃어버린 땅, 잃어버린 왕비’라는 제목에서 장보고의 딸에 얽힌 설화를 고증해보길 권유하고 있다. 또한 연지, 연동, 탑산사, 동종(銅鐘), 연화동천, 대흥사, 낙산의 어원 등을 불교와 관련짓는다. 정(亭)자 돌림의 마을이 많고 가학리는 득도성선(得道成仙)을 설명한다. 또한 신월리는 백제와 신라의 흥망성쇠로, 내동은 쑥 래(萊), 축내는 소의 등, 간암공께서 처음으로 이거한 초당(草堂)은 어등산(漁登山)으로 설명하면서 벼슬한 사람이 많아 초당이 되었다고 한다. 도청리, 도동, 도서 등의 만가촌은 일을 맡아보는 청사가 있어서 지명이 되었고 분토리도 만리성(萬里城)의 축조, 장보고에 대한 설화로 신라와 도자기를 만드는 흙과의 연관성을 중시하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을 담고 있다. 인간이 자연과 살다보면 설화를 비롯 많은 숨은 이야기가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계사공은 유학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대덕(大德)을 고을 지명으로 사용하는 대덕주민을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대덕은 우선 그 이름부터 크고 성스럽다. 대덕이란 불가에서는 비구 중에서도 장로 또는 불보살의 최고 경칭이며 고승에 대한 존칭이다. 공자는 중용에서 순임금이야말로 대효로서 대덕으로 성인이 되었고 존귀함으로 천자가 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청준 작가와 박형상 변호사가 말하는 남면(南面) 천관산은 대덕의 산이다.
이 고장 출신 작가 이청준은 위문과 인연이 깊다. 그의 누님께서 초당 위문으로 출가하여 어린 시절 누님 시댁인 위두량 사무국장의 친가에서 지내기도 했다. 어쩌면 대덕에 이청준의 ‘정남진 문학탐방길’이 조성된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청준의 마지막 작품 ‘신화의 시대’에서 천관산을 소개하기도 한다. 아래는 이청준님과 박형상님 두 분의 대화를 다소 수정하여 올린다. 관산 천관산인가, 대덕 천관산인가. 산은 모름지기 남면(南面)이다. 바다에 나가 천관산을 바라보라. 진목에서 대덕읍 쪽으로 나가면서 그 큰 산을 다시 보라. 산은 남면이라야 진면목이다. 남면은 한비자(韓非子)에 나온다. 군주(君主)는 북극성에 비유되며 남쪽을 바라보고 앉는다. 남녘을 지켜보는 제왕의 산, 남면 천관산. 고흥, 장흥, 강진, 완도 남쪽 바다를 제압한다. 물러날수록 잘 보이는 남면 천관산. 결국 천관산은 대덕에서 최고의 자태를 드러내 보인다. 어린 존재 위백규를 큰 산 북쪽으로 이끌어 준 간암 위세옥의 산으로 규정하고 있다.
간암공(휘 세옥, 1689~1766)께서는 대덕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
대덕의 옛 지명은 대흥(大興)이다. 조선시대 때는 대흥면, 이후 대덕면 현재는 대덕읍이다. 간암공께서는 대덕에 최초로 이거한 선조로 기록되어 있다. ‘장흥위씨요람’의 저자 圓山 위정철 씨족문화연구소장은 이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일부 직계후손과 종인들은 간암공이 대흥면으로 이사하지 않았다고 주장 한다. 그러나 간암공의 대흥면 향약설행은 분명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간암공께서 대흥면과 관계없이는 이 기록 또한 잘못된 기록일 것이다. 간암공은 환갑이전에 방촌 간암정에서 대덕 초당으로 이거해 화훼농업을 선도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이는 장천재에서 담론하며 매일 함께 지냈던 잉여옹(剩餘翁)에게 보낸 편지(1751년, 간암선생문집 20쪽)에서 밝혀지고 있다.
그러면 간암공께서 대덕을 지극히 사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公이 대흥면 향약을 설행한 이후 장흥부사에게 올린 글과 대흥방약서(大興坊約序)에서 잘 나타난다. 이 시기는 1754年으로 公의 나이 66세 때이다. 당시 대덕의 상황은 무질서하며 도덕적 타락에 대해 ‘순량하고 인정 많은 고로(古老)들은 거의가 다 죽고 가난에 시달린 후생(後生)들만 점점 사악한 무리에 물들어 가면서 일정한 주거도 없이 날뛰면서 염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악(惡)한 자가 심한 경우 부모를 부모로, 자식을 자식으로, 남편을 남편으로, 부인을 부인으로 여기지 않으며 노소와 존비, 귀천과 상하간의 명분마저 없어지고 거침없이 흘러가는 풍조를 따라 가고 있으니 극히 잘못된 풍속이 사람들에게 전이된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향약에서 찾고 있다. 대흥방약서(大興坊約序)에서 대덕에 사는 백성들을 계몽하기위해 면약계(面約契)를 만들어 시행케 한 것이다. 여씨향약과 우리나라 율곡선생의 사약(社約)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계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 강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학을 현장에서 실천한 참 지식인 간암공은 말미에서 ‘면의 폐단을 구제하게 하였다. 정서를 좌측에 남기어서 열람하는 사람은 살펴 볼 수 있게 하였다. 모든 면민(面民)들은 이를 보고 교본으로 삼아 실천하기를 바라노라’라고 하여 농촌 계몽운동가의 애국애민사상이 곳곳에 깊게 배어 있다.
풍요의 땅 대덕은 인재의 보고(寶庫)이다.
유독 대덕출신들이 사회 각계각층에서 성공한 이유는 바로 풍요의 땅 대덕의 자연과 독특한 향우 문화에서 기인하고 있다. 대덕 출향민들은 회진면을 범 대덕으로 생각한다. 생각 뿐 아니라 늘 함께한다. 회진면을 떼어준 지 20여년 밖에 안 되어 어린 시절을 같은 학교(대덕중학교)에서 함께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년 5월 5일에 서울에서 열리는 천관가족축제는 대덕과 회진이 함께하여 2000여명이 모이는 자타공인 전국최대규모의 읍면단위 향우행사이다. 올해로 32회째로 30년을 넘는 전통을 자랑한다. 이들은 천관 명칭을 공동명칭으로 사용한다. 천관가족축제, 천관장학회, 월간천관, 천관산악회, 천관골프동호회 등. 대덕과 회진의 공통어를 찾다가 천관산을 바라보며 살아왔기에 자연스레 공통어가 되었다. 이것은 관산 출향민들에게 반감을 사기도 한다. 천관가족문화를 주도하는 것은 천관가족축제 뿐아니라 지난 4월호로 311호째 1회 5000부 발간되는 향우소식지 ‘월간천관(편집장 위두량)’이 뒷받침한다. 대덕출신 저명인사로는 김옥두 前국회의원(14대~16대), 이귀남 前법무부장관, 김만흠 청치평론가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 등이 있다. 우리 문중 내에서도 위계춘 前장흥종친회장의 형제인 위계점 행정학 박사는 공무원 학원계 행정학 독보적 1인자 강사이며, 위계찬 법학박사는 한양대 로스쿨 교수이다. 또한 위이환 장원봉 산악회 감사, 위희량 위씨네카페 대표, 위계정 재경청장년회 감사, 위윤환 대종회 부회장 및 위두량 대종회 사무국장 등 대덕출신 종친들이 종친회 각 분야에서 적극 활약하고 있다. 현재 간암공 세거지 대덕읍 초당에는 위계춘(전 장흥종친회장) 대덕읍 노인회장, 간암공 종손 위광량, 그리고 위덕량, 위양국이 조상의 숨결과 발자취를 지키고 있다. (편집실)
우리 문중 최고의 지식인 간암공께서는 대덕을 누구보다 사랑하셔서 직접 농민속에 들어가 농사기법을 체득하시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펼치셨습니다. 또한 계사공께서는 대덕을 장흥 최고의 마을로 손꼽기도 하셨습니다. 역사의 고장이요, 문중 인재의 보고로서 숨은 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풍요의 땅입니다.
위문중 조상님의 옛발자취와 역사공부를 하고 천관산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공부하고 갑니다.
열에 아홉은 천관산을 관산산이라고 하던데요~ ㅠ
너무 잘 읽었습니다.
관산에서 본 관산의 진산 천관산.
야운 위이환 님
천관산 문학공원을 대덕에 세운 것은 아마 대덕과 천관산의 역사적 밀접성에서 기인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