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0년 무렵 완성된 명동촌의 약도. 1899년 김약연 선생을 비롯 함북 종성 오룡천의 5현으로 불리는 다섯 가문 142명이 집단이주해 황무지에 개척한 북간도 첫 조선인공동체이자 항일민족운동의 기지였다. 5현은 규암 김약연, 소암 김하규, 문병규(문익환 목사의 조부), 남위언, 윤하현(윤동주 시인의 조부) 등 다섯 선비를 일컫는다. 일제는 1920년 10월 경신대토벌 때 명동학교와 명동촌을 불령선인 양성의 책원지로 지목해 교사를 불태우는 등 탄압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구한말 조선인들이 개척한 만주 북간도 지역이 ‘항일 민족운동의 기지’였음을 입증해 주는 유물들이 새로 공개됐다.
간도 사료 연구가 김재홍(60)씨는 1919년 연변의 용정 일대에서 벌어진 3·13 만세운동 현장과 기와의 막새에 새겨진 태극기 무늬 등을 3일 <한겨레>에 공개했다. 김씨는 1899년 함북 종성에서 길림성 화룡현의 장재촌(현 용정시 지신진)으로 집단 이주해 첫 조선인 공동체마을 ‘명동촌’을 일군 규암 김약연 선생의 증손자다.
» 1919년 3월13일 북간도 용정의 해란강변에서 수만명의 조선인들이 독립 만세를 부르고 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 1919년 3월13일 만주 용정에서 벌어진 ‘3·31 독립만세 운동’ 당시 일본 무장관헌의 총격으로 사망한 명동학교 학생을 비롯 수십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돌봐준 것은 캐나다선교회가 운영하던 제창병원이었다.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1941년 용정의 모든 외국인들에게 퇴거령을 내리면서 캐나다선교회도 철수했다. 사진은 1941년 3월 당시 용정의 일본영사관 바로 뒷편에 있던 규암 김약연 목사의 자택에서 송별회를 하고 기념으로 찍은 것이다. 1983년 김재홍씨가 캐나다에서 만난 제창병원 수간호사 배외도(레배카)의 후손으로부터 3·13 만세 현장 사진과 함께 전해 받았다. 맨앞줄 왼편부터 제창병원장 육장안(블랙), 은진중학교장 부레수(부르스), 김약연 목사, 노아력, 노은혜, 제창병원 수간호사 배외도, 명신여고 교장 안도선 등이다. 안도선 뒷줄 왼쪽으로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모자 쓴 이)와 오른쪽 문익환 목사(안경 쓴 이)의 모습도 보인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 1941년 3월 일제의 외국인 퇴거령으로 용정을 떠나 캐나다로 돌아가게 된 제창병원 수간호사 배외도(오른쪽)와 명신여고 교장 안도선(오른쪽 두번째)을 김약연 목사(왼쪽 두번째) 가족들이 전송하면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가장 눈길을 끄는 사진은 1919년 3월13일 용정의 해란강변 서전대야(들판)에서 조선인 수만명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장면이다. ‘3·13 봉기’로 불리는 이날 만세 사건은 간도의 민족 지도자 17명이 서울에서 전달받은 독립선언서를 포고문 형식으로 발표한 뒤 용정의 일본영사관을 향해 시위를 한 것이다. 서대숙 전 하와이대 석좌교수는 <북간도지역 한인 민족운동>에서 “애초 3만명이 운집한 이날 시위는 당시 중국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았으나 일제의 무장관헌들이 총격을 하는 바람에 17명이 숨지고 3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서굉일 한신대 명예교수는 “봉기 직후인 5월부터 정의단을 비롯한 항일 무장단체들이 본격투쟁에 나서는 기폭제가 됐다”고 의미를 평가했다.
김씨는 “당시 사망자와 부상자를 돌봐준 용정 제창병원의 수간호사 배외도(레베카)를 83년 캐나다에서 만나 이 사진을 구했다”고 말했다.
» 조선인마을 명동촌의 기와 막새에 태극기와 십자가 무늬가 새겨 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 태극기와 무궁화 무늬의 기와 막세가 남아 있는 지린성 명동촌의 한옥. 1920년대 이후 김약연 선생을 비롯한 개척민들 대부분이 용정으로 이주하면서 쇠락해진 명동촌에서 보기 드물게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집이다. 함경도를 포함한 북방형 살림집의 전형으로 가운데 정주간(부엌)을 두고 서쪽에 전(田)자 형으로 방을 배치했으며 동쪽에는 외양간과 방앗간을 둔 양통형이다. 왼쪽으로 최근 복원한 명동교회의 지붕과 그 너머로 명동촌의 상징 지표인 선바위가 보인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 1900년대초 지어진 북간도 명동촌의 한옥 기와지붕의 용마루에 ‘수복’(壽福)과 태극기 무늬(양쪽 옆 원형)를 새긴 막세가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1899년 두만강을 건너 용정촌 남쪽 40리 화룡현 지신향 장재촌에 집단이주한 김약연 선생 일행 142명은 ‘동방을 밝힌다’ 뜻으로 마을 이름을 명동촌(明東村)이라 짓고, 기와집의 용마루도 동쪽을 향해 지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지금도 명동촌에 남아 있는 한옥의 지붕에 쓰인 기와의 막새 부분에 새겨진 태극기와 무궁화 무늬도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004년 현지 답사에서 이 기와 막새를 확인한 김성구 당시 국립광주박물관장과 제와장인 한형준(무형문화재 제91호)씨 등은 “1900년대 초기 태극기와 무궁화가 새겨진 막새는 국내에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의 팔괘와 달리 우리 고유의 사괘가 뚜렷해 3·1 운동 때 쓰인 태극기의 원형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길림성 동북부 라자구의 동굴 벽에 태극기와 독립군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 2004년 중국 지린성 왕청현의 나자구 태평촌 신선동에 있는 동굴을 찾아낸 김재홍씨가 동굴벽에 검정색으로 적힌 태극기와 독립군들의 이름 앞에 서 있다. 이 곳은 1910년대 중반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던 인근 나자구사관학교(동림학교) 학생들이 은신했던 곳으로, 50년대말 북한의 항일사적조사단이 발견해 사진은 남겨뒀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연길시 당국은 2008년에야 이 곳을 문화재로 등록해 보호에 나섰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김씨는 북간도와 러시아 접경지역인 길림성 왕청현 라자구의 동굴벽에 그려진 태극기와 4명의 독립군 이름 사진도 공개했다. 태극기 그림의 바로 위쪽에 쓰여진 ‘이준, 량희, 지승호, 장태호’ 4명은 1914년 항일 무장투쟁을 지휘하던 이동휘 선생이 세운 동림학교(나라구사관학교) 소속 학생들로 밝혀졌다. 이 태극기 벽화는 연변에서도 사진으로만 알려져 있었으나 2004년 김씨가 현장조사 끝에 동굴을 찾아냄으로써 존재가 확인됐다.
김씨는 “그동안 학계에만 알려진 자료들인데, 올해 3·1 운동 90돌이자 명동촌 건설 110돌의 뜻을 살리고자 공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 사진들을 포함해 김씨가 기증한 명동촌 사료 1천여점은 오는 4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