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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장 주석
대제사장들의 음모 (마태복음 26:1-5)
여기에 보면,
1.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이 가까이 이르렀음을 그의 제자들에게 주지시키신 것(1, 2절)과
2. 그의 원수들이 그를 괴롭힐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그의 고난이 머지 않아 있을 것임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으며, 여기에서는 그 고난이 바로 가까이 다가 왔음을 말씀하고 계시다. 즉 "이틀을 지나면" 오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이전의 많은 고난에 대해 주시한 다음에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고난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가 이러한 경고를 하신 "시기"는 "그가 이 말씀을 다 마치신 때"였다.
[1] 그가 마치시기 전까지는 모든 말씀을 하셔야만 하였다(그가 하셔야 할 말씀이 있는 한 그것은 끝마친 것이 아니다─역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증거자들은 자신들의 증거를 끝마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다 마치셨을 때 제사장으로서의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시는 일이 시작하셨다.
[2] 그가 바로 앞에 있는 말씀들을 마치신 후에 그의 제자들에게 서글픈 시간들과 속박들과 고통들을 기대할 것을 명하셨으며, 그 때에 그들에게 "인자가 팔리우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이 대우했던 것보다는 덜 대우를 하게 될 것과 또한 그의 고난이 그들에게서부터 찔리게 될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기독자는 고난받으시는 그를 생각함으로써 큰 용기를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2)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유의하도록 하신 것은 "인자가 팔리우리라"는 것이다. 그 일은 확실하고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행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아직 닥쳐오지 않은 고난들을 현재 우리 앞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는 사실이다. 그가 팔리우신 것은 유다가 그 때에 그를 배신하기 위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백성의 장로들이 꾸민 음모(3-5절).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많은 음모가 일찍이 행해졌었다. 그러나 이 음모는 지금까지의 어떤 것보다 더욱 심각하게 세워졌다. 왜냐하면 귀족 고관들이 모두 이에 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문제들을 관장하였던 대제사장들, 소송문제를 심판하였던 장로들, 율법학자로서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의 고문이었던 서기관들, 이들은 나라를 다스렸던 산헤드린 또는 큰 공의회를 구성하였으며, 또한 이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데 있어서 결속이 되어 있었다. 몇 가지로 살펴보면,
(1) 그들이 모였던 "장소." 그 곳은 이러한 사악한 음모에 있어서 그들의 연합한 모임의 주동자였던 "대제사장의 아문"이었다.
(2) 음모 그 자체. 그것은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이기 위한"것이었다. 그의 피, 즉 그의 생명의 피 이외에는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원수들의 계획은 그와 같이 잔인하고 피흘리는 것이었다.
(3) 그 음모자들의 정책. "명절에는 하지 말자."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시기의 거룩성을 생각하거나 또는 그 날의 종교적인 예배가 방해를 받게 될까봐 그렇게 했는가? 아니다. 그것은 "민요가 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절기와 큰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던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이 모두가 선지자로 여긴 그리스도에게 난폭한 행동을 한다면 백성들이 자기들을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명절에 그 일을 해치우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이스라엘로 하여금 보고 두려워하도록"하기 위하여 악행하는 자, 특히 반역자나 사기꾼을 세 절기 중의 어느 한 절기가 사형에 처하는 것은 유대인의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절"에는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베다니에서 기름부음을 받으심 (마태복음 26:6-13)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선한 여자가 우리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에게 대한 단순한 호의를 나타냄(6, 7절). 그 일은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리 않은 "베다니"에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있었다. 아마도 문둥이 시몬은 우리 주 예수님에 의해 이적적으로 자신의 문둥병을 치유 받은 자이며 그리스도를 환대함으로써 그에 대한 감사를 나타내려고 한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고 또한 그와 함께 식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다. 그는 깨끗케 되었지만 아직도 "문둥이 시몬"이라고 불리웠다. 추잡한 죄를 범한 자들은 비록 그 죄가 사함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에 대한 비난이 그를 따라다니며 또한 완전히 없애지 못하게 될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일을 행하였던 여자는 마르다와 나사로의 동생인 마리아가 아닌가 한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그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매우 귀한 향유한 옥합"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식사하실 때 그것을 그의 머리에 부으셨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물건은 이상한 진상품(compliment)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에 가장 값진 것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그 냄새는 매우 상쾌한 것이고 또한 그 기름은 머리를 참신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의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았다(시 23:5; 눅 7:46). 그런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1. 우리 주 예수님을 기름 부으신 자인 그리스도, 즉 메시야로 믿는 신앙의 행동으로써 그녀는 그를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신 그의 기름 부으신 자로 믿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하여 기름을 부었으며 또한 그를 자신의 왕으로 삼았다. 그들은 "한 두목을 세우게 될"(호 1:11) 것이다. 이것은 "그 아들에게 입맞추는"것이다.
2.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한 행동으로써,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 여자는 처음에 "많이 사랑하여 눈물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었던"(눅 7:38, 47) 바로 그 여자이며, 또한 그녀는 첫사랑을 버리지는 않았으며 지금도 그녀가 초신자였을 때 했던 것처럼 장성한 기독자가 되어서 그 봉사를 애정이 넘치게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한 참된 사랑을 가진 사람은 그에게 드리기에 너무나 아까운 좋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Ⅱ. 그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화를 내며 행한 공격. 그들은 "분을 내었다"(8, 9절). 즉 그들이 다른 곳에 씻으면 더 좋을 것으로 여기는 이러한 기름들을 이렇게 허비하는 것을 보고 화를 내었다.
1. 그들이 이것을 보고 어떻게 자신들의 분노를 나타내었는가? 그들은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내고 있다.
(1) 그녀의 과잉 친절(그렇게 생각되었다)이 낭비일 것이라고 해석한 나머지 이 선한 여자에게 대한 호의가 결여됨. 자비는 우리들에게 그것이 지니게 될 모든 것을 특히 "선행을 하는데 있어서 열렬히 감동을 받은" 자들의 말과 행동을 비록, 우리가 그러한 것들이 전혀 신중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될지라도 그것들을 최선의 것으로 해석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잘하는 일에 도에 넘치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우리는 극단으로 치우쳐 다른 사람의 비방을 받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기를 배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려분별이 부족한 것으로 돌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사랑의 한 본보기로 받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너무 많이 일한다. 그 사람은 우리보다 더 많이 일한다"고 말하지 말고 우리들도 그들이 하는 것만큼 더 일할 수 있도록 목표를 세워야만 한다.
(2) 그들의 주인에 대한 존경심의 결핍. 우리가 최대한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주인이 육신의 모든 즐거움에 대하여 완전히 죽은 자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 많이 근심한"자를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는"것(암 6:6)을 개의치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즐거움이 그들 가운데서 그의 즐거움을 취하지 않으셨던 자에게 잘못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주님께서 그것을 친구의 사람의 표식으로써 인정하시고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허비"하고 부른 것은 합당한 일이 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다른 사람이나 우리자신에 의해 주님께 드려진 것을 허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조심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봉사에 사용되는 시간을 허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또한 경건한 일에 투자되는 돈을 허비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물이나 강에 던져지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러 날 후에" 유익하게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있을"것이기 때문이다(전 11:1)
2. 그들은 그것을 보고 분노한 것에 대해 어떤 구실을 붙여 변명을 하였는가?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나쁜 감정을 특별한 덮개 아래에 감춘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못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사람들이 경건의 일들을 자선이라는 미명하에 덮어두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 못된다.
Ⅲ.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이 이 선한 여자에 대해 분을 내는 것을 보고 그들을 책망하심(10, 11절).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선한 사람들의 선행이 비난을 받고 오해를 받는 것은 그들에게 큰 괴로움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신다. 비록 제자들이 그 나름대로의 어떤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그의 제자들보다는 이 선하고 정직하고 선의를 지닌 여자의 편을 들고 있다. 주님께서는 진심으로 "업신여김을 당한 소자들"(마 18:10)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그의 이유를 살펴 보라. "가난한 자들은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선을 베풀거나 행하는 어떤 기회가 있는데, 그러한 것은 항시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잘 향상시킬 수 있도록 늘 유의를 해야만 한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들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안식일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가난한 자들도 항상 우리와 말게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선릉 행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결코 기회가 부족하다는 불평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자는 이스라엘 땅에서 결코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신 15:11).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인 우리의 자비로운 원조를 구하는 자, 그가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것으로 간주하시게 될 그리스도의 가난한 지체들을 보지 않을 수 없다.
2. 선을 베풀고 행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있는데, 이것은 매우 드물게 생기며, 짧으면서도 불확실하며, 그것들을 향상시키는데는 특별한 근면이 필요하며, 또한 다른 것들보다도 먼저 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나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하라."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영구적으로 계시는 것은 기대될 수가 없다. 그가 떠나실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성체"(역주:천주교에서는 그가 떡과 포도주로 존재하신다고 함) 가운데 "실제로" 계신다는 것은 맹신적이고도 근거 없는 생각에 불과하며 또한 그가 여기에서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과 모순이 된다.
(2) 종종 경건과 헌신의 특별한 릴들이 자비의 일반적인 일들에 대신해야만 한다. 가난한 자는 그리스도를 도적질해서는 안 된다(그를 빙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믿음의 가정"에 대해 선을 베풀어야만 한다.
Ⅳ. 그리스도께서 이 선한 여자의 호의에 대해 시인하시고 칭찬하심. 그의 종들과 그들의 봉사가 사람들에 의해 시비가 되면 될 수골 그는 그들에 대해 자신이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더욱 타나내신다. 그는 그것을 "좋은 일"(10절)이라고 부르고 계시며 또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칭찬을 그에게 하고 있다. 특별히,
1. 그 의미는 신비적인 것이었다(12절). 이 여자는 내 장사를 위하여 그 일을 하였다.
(1)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녀는 그와 같은 "의도"로 그 일을 하였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과 고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사도들보다 더 잘 이해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의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으로 보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2) 어쨌든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그렇게 해석하셨다. 또한 그는 언제나 그의 백성들의 선의의 말과 행동들을 기꺼이 만족하려고 하신다. 이것들은 말하자면 그의 몸에 향유를 바르는 것이었다. 그가 죽으신 후에 그렇게 기름을 바르려고 해도 부활로 말미암아 그 일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앞서 이 일이 행해진 것이었다. 비록 그가 죽음에 의해 승리하게 될 것으로 보였을 때에도 그가 여전히 메시야이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것이 어떤 때에 행해져야만 한다. 그 제자들은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허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다. "만일 너희의 나라의 관습대로 죽은 시체 위에 그렇게 많은 기름이 부어진다면, 너희는 그것을 아까워하거나 또는 그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실제적으로는 그러한 것이다. 그녀가 기름을 부은 몸은 죽은 몸이나 다름이 없으며 또한 그녀의 호의는 그 목적에 매우 어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허비라고 부르지 말고 값있는 것으로 여기도록 하라."
2. 그것에 대한 기념은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13절). "이 일을 말하게 기념하라." 이 믿음과 사랑의 행동은 매우 탁월한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전파자들과 그의 고난 역사에 대해 영감을 받아 기록한 저자들은 이 구절에 특별히 유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기사를 선포하고 그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러한 기록들에 채택되었으므로 그것은 마치 "쇠로 된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바위에 새긴 것"과 같으며 또한 능히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이름이 있는 나팔수도 영원한 복음과 같이 크게 그리고 오래 소리를 낼 수는 없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비록 비극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복음이며 좋은 소식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2) 복음은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유대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와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전파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요기를 주기 위하여 그들의 목소리가 땅 끝까지 이를 것임을 주지시키고 계신다.
(3) 그리스도에 대한 영공이 원래 복음 속에 의도되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성도들과 종들에 대한 영광이 완전히 간과된 것은 아니다. 그 여자에 대한 기념은 그에게 성전을 봉헌하거나 그녀를 위해 연례적인 축제를 하거나 그녀의 깨어진 옥합의 단편을 성물함에 보관함으로써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역주:천주교나 정교회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 대한 본보기로(히 6:12) 복음을 전파할 때 그녀의 신앙과 경건을 언급함으로써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영광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되돌아가고 있다. 그는 이 세상에서나 장차 오는 세상에서 "그의 성도들 가운데서 영화롭게" 되실 것이며 또한 "믿는 모든 자들 가운데서 찬미를 받으실" 것이다.
가룟 유다의 배신 (마태복음 26:14-16)
그리스도에게 행해진 가장 큰 호의의 한 실례가 보여지고 난 다음에 즉각적으로 가장 큰 불친절의 한 실례가 뒤따르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가운데는 선인과 악인이 이렇게 혼합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각각 신실한 친구들과 거짓되고 위선적인 자들을 거느리고 계신다.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그리스도를 팔기 위하여 그들과 더불어 여기에서 체결한 이 계약들보다 더 비열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Ⅰ. 그 배반자는 가룟 유다였다. 그는 그의 비행이 더욱 두드러지도록 하기 위해 "열 둘 중의 하나"라고 말해지고 있다. "제자들의 수가 더하여 갈"(행 6:1) 때 그들 중에는 수치와 고민거리가 된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도 놀라워할 것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열 둘 중에서 하나가 "마귀"였다고 한다면 정녕 우리는 이 지상에 있는 어떤 단체가 완전히 순수하다고 기대해서는 안 다니다. 열두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은혜의 특권을 가진 그의 선택된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그를 따르는 자들로서, 그와 더불어 가장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무엇보다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신실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의 한 사람은 그를 배반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의무나 감사의 쇠사슬이 귀신을 가진 자를 붙잡아 맬 수 없다(막 5:3, 4)는 사실이다.
Ⅱ. 여기에는 유다가 대제사장에게 제의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너희가 나에게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15절). 그들이 유다에게 사람을 보내거나 또는 그에게 제의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자신의 제자들 중의 하나가 그를 배반할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가운데에도 어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더 사악하며 또한 그것을 보여 줄 기회만을 노리는 자가 있다.
1. 유다는 무엇을 약속하였는가?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라. 나는 너희에게 그가 있는 곳을 가르쳐 줄 것이며, 또한 너희가 아무런 소동이나 소란 없이 그를 붙잡을 수 있도록 적당한 시간과 장소에 너희를 그에게로 데려다 주겠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잡아죽이려고 했을 때 그들이 주저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4, 5). 그들은 공중 앞에서 그에게 덤벼들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를 개인적으로 찾을 수 있는 장소를 알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그 일은 잠시 중단되었고 그 어려움은 극복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유다가 와서 그들에게 조력을 제의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귀가 인도하는 대로 자신을 내어 맡겨버린 자들은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들이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순조롭게 마귀의 일이 진행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비록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힘과 세력으로써 그를 그들의 손아귀에 넣을 때에 죽일 수 있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의 제자가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면 결코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사람들이 신앙 고백을 더욱 훌륭하게 하고 그들이 그것을 연구하고 봉사하는데 전념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그들이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기회는 더욱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만일 유다가 사도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배반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의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면 그것을 함부로 오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라." 유다는 그들이 증거를 필요로 했을 때 그리스도를 거스리는 증거자로 자청하거나 또는 그들이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을 설득하지도 않았다(59절).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가 사기꾼이라는 증거를 내세울 만한 어떤 구실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을 가장 잘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은 유다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활 태도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를 배반한 그 자신의 제자인 유다도 비록 그것이 그 자신의 배반을 정당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그가 어떤 죄를 지었다고 고소할 수는 없었다. 이 사실은 우리 주 예수님의 무죄성에 대한 명확한 증거이다.
2.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 대가로 그는 무엇을 요구하였는가? "너희가 나에게 얼마나 주려느냐?" 이것이 바로 유다가 그의 주인을 배반했던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여 돈을 벌려고 하였다. 그의 주인은 그가 "마귀를 가졌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 조금도 화를 내지 않으셨다. 아마도 그는 다른 제자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유다에게 동일한 친절을 나타내어 보였으며 또한 그에게 노여움을 살 수 있는 불쾌한 표정도 짓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그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자리에 앉혔다. 가지 그를 돈 맡은 자로 삼았다. 그리고 그가 비록 공금을 착취했다고 할지라도(왜냐하면 그는 "도적"이라고 불리우기 때문이다. 요 12:6) 우리는 유다가 그것을 계산하도록 호출을 당하는 위험에 직면했었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그가 복음이 속임수라고 의심했다는 사실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아니 그것은 그의 주인을 미워하거나 다투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돈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유다를 배반자로 만든 것이었다.
"얼마를 주려느냐?" 그는 무엇을 원하였는가? 그것은 먹을 빵이나 입을 옷이나 일용품이나 도구가 아니었다. 그는 그의 주인이 있는 곳에서 영접을 받지 못하였는가? 그는 받아야 할 대우를 잘 받지 못하였는가? 그는 베다니에 있는 문둥이 시몬이 집에서 바로 지금 풍족한 대우를 받았으며 바로 조금 전에는 마르다가 시중드는 식사를 들면서 환대를 받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욕심 많은 가엾은 유다는 이에 만족할 수 없었으며, 비열하게 제사장들을 찾아가 굽신거리며 "얼마를 주려느냐?"고 말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만악의 뿌리, 특히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배교의 뿌리는 돈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데마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딤후 4:10). 사탄은 우리 주님을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는 미끼를 가지고 유혹을 하였다. 그러나 유다는 그것에 스스로 미혹될 것을 자청하고 있다. 그는 마치 그의 주인이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상품인 것처럼 '얼마를 주려느냐?"고 묻고 있다.
Ⅲ. 여기에는 대제사장들이 그와 더불어 맺은 계약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은 삼십을 달아 주었다." 은 삼십은 약 3파운드 8실링, 또는 3파운드 15실링이 된다고 한다. 아마도 이 금액은 유다가 제안한 금액인 것 같으며 그들은 기꺼이 주려고 하는 것을 받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다음에 더욱 형편이 나빠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처음에 준 것을 받고 있다. 유다는 큰 장사를 해 본 일이 없다. 그러므로 작은 돈도 그에게는 큰 효과가 있었다. 율법에 의하면(출 21:32)은 삼십은 노예가 값이었다. 이 값은 그리스도가 평가된 적절한 가격이었다(슥 11:13). 시온의 아들들이 좋은 금에 비유되었지만 시온의 왕 자신이 이와 같이 과소평가가 될 때 흙으로 다니 주전자에 불과하게 될 것임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그에게 달아 주었다." 즉 Vesthsan ─그들은 지불하였다(appenderunt).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를 안심시키고 격려하기 위하여 그의 손에 노임을 쥐어 주었다.
Ⅳ. 여기에는 유다가 그의 계약을 수행하기 위해 애쓰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16절). "그가 예수를 넘겨 줄어들 기회를 찾더라." 즉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것인가를 궁리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범죄한 기회를 찾거나 악행을 저지른 궁리를 하는 것은 매우 사악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에 악을 행하거나 고의적인 악행을 저지를 생각이 가득 차 있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2. 비록 사악한 것이라고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유다가 사악한 계약을 맺고 난 다음에도 그는 회개하거나 또는 그것을 철회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계약에 의해 마귀는 그가 가졌던 것보다 하나 더 밧줄을 그에 대하여 가졌으며 또한 헤롯이 요한을 "맹세 때문에" 목을 베어야만 했던 것처럼 비록 그것이 자기의 주인을 배반하는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마귀는 유다를 향해 자신의 말을 지킬 것을 말하고 잇다.
그리스도께서 유다의 배반에 대해 예언하심 (마태복음 26:17-25)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유월절을 지키신 기사에 대해 읽어 볼 수 있다. 율법 아래에 놓이셨으므로 그는 율법의 모든 규율에 순응하셨으며 또한 무엇보다도 이 유월절에 순응하셨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출된 것을 기념하는 백성들의 생일이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그들은 메시야의 날들 중에서 특히 애굽에서 나오다니 바로 그 날에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행사를 시작했던 유월절 다음 날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Ⅰ. 그리스도께서 유월절을 잡수신 시간은 하나님에 의해 지정되고 또한 유대인들에 의해 준수되었던 일상적인 시간이었다(17절). 즉 "무교절의 첫날"이었는데, 이 날은 오늘날의 목요일에 해당하는 그 주간의 다섯째 날에 행하여졌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일찍이 이 날에 유월절을 축하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식가인 휘트비 박사는 이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Ⅱ.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의 물음에 대답하여 지시하신 장소(17절). 그들은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물었다. 아마 유다도 이 질문(그가 어디서 유월절을 먹게 될 것인가)을 한 자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는 그가 자신의 계획을 잘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알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나머지 제자들은 늘 그러했듯이 자신들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하여 그렇게 물었다.
1. 그들은 주님께서 이때에 대제사장들에 의해 박해를 받고 또한 그의 생명이 그들에 의해 수소문되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유월절을 잡수실 것이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겼다. 그들은 외부의 협박과 내부의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임무를 회피하시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많은 고민거리들과 원수들을 가지고 있고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성만찬, 즉 우리의 복음적 유월절에 참예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두려움을 해소시키거나 두려움을 위안시키고 그들의 원수들을 용서하는 데 도움을 주며 자신들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기 위하여 그러한 예식들을 더욱 필요로 해야만 할 것이다.
2. 그들은 유월절을 위하여 준비를 해야만 하며 또한 준비를 하는 것이 그의 종으로서의 사명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엄숙한 예식이 있기 전에 엄숙한 준비가 있어야만 된다는 사실이다.
3. 그들은 주님이 유월절을 잡수실 그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지 않으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도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우리 때문에 가난해지셨다." 시온의 모든 궁전에는 시온의 왕을 위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요 1:11 참조).
4. 그들은 주님의 명령이 없이 그 장소를 선정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에게서 그들은 명령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아무 사람"(18절)에게 그들을 보내셨는데, 아마 그는 주님의 친구나 제자였으며 또한 주님과 그의 제자들은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았던 것 같다.
(1) "내 때가 가까웠다"고 그에게 말하라. 때는 그의 죽음의 때를 의미하고 있는데, 그 이외의 곳에는 "그의 때"(요 8:20; 13:1)라고 불리우고 있다. 즉 그때, 그 시간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정해진 때로써 여기에 그의 마음이 놓여져 있고 또한 이 때에 대하여 그는 자주 언급하셨다. 주님께서는 그 때가 가까웠음을 아셨으며 따라서 매우 분주하게 되셨다. 우리는 "우리의 때를 알지 못한다"(전 9:12). 그러므로 우리의 경각심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그의 때가 가까웠으므로" 그는 "유월절을 지키시려고" 하셨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죽음이 점점 임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가능한 모든 기대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데 열심을 다하여야만 한다. 우리의 때가 가까워졌고 영원히 바로 우리 앞에 놓여져 있지 않은가? " 그 때에 우리는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절기를 지키도록 하자."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님께 이 선한 사람의 집으로 초청하도록 할 때 그는 자신의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알리도록 하셨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은 그를 자신의 마음속에 영접하는 자들과 함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요 14:21; 계 3:20 비교).
(2)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그에게 말하라. 이것은 "주인"이신 그의 권위의 한 실례로써, 아마 이 사람도 그것을 인정하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이 집을 사용하도록 간청하시지 않도록 명령을 하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마음속에 들어오실 때, 그는 마치 그 마음을 소유하시고 거부당할 수 없는 주인과 같이 허락을 명령하시며 또한 마음을 지배하시고 항거 받을 수 없는 자처럼 허락을 받으신다. 만일 그가 "내가 이러한 영혼 속에서 절기를 지키려 하노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는 그렇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일하고 계시며 또한 아무도 그 일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백성도 기꺼이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만드시기 때문이다.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킬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께서 영접되시는 곳은 어디든지 그는 그의 제자들도 함께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삼을 때 우리는 그의 백성들을 우리의 백성으로 삼게 된다.
Ⅲ. 제자들에 의해 행해진 준비(19절). "제자들은 예수의 시키신 대로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복음적인 유월절에 그리스도께서 자신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의 규칙들을 엄격히 준수해야만 하며 또한 그가 명령하시는 대로 행해야만 한다. "그들은 유월절을 예비하였다." 그들은 성전 마당에서 잡은 어린양을 취하여 그것을 구웠으며, 쓴 나물을 준비하고 빵과 포도주를 마련하였으며, 유월절에 입을 옷을 챙겨 두었고, 그밖에 이 엄숙한 절기에 소용되는 모든 것을 빈틈없이 예비하였다.
Ⅳ. 그들은 율법을 따라 유월절을 먹었다(20절). 그는 한편으로 비스듬히 눕는 자세(역주:유대인이 식사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시고 일상적인 식사 자세인 앉은 자세를 취하셨다. 왜냐하면 그러한 눕는 자세는 먹거나 마시는데 불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 낮게 앉으셨기는 하셨을 것이다. 이 말은 다른 식사 때에 그가 취하신 자세를 묘사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마 9:10; 눅 2:37; 마 26:7).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허리에 띠를 두르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가지고" 먹은 것은 애굽에서의 첫 유월절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도 앉은 자세로 먹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앉으셨다는 것은 마음의 평온함을 나타내며, 그 때에 그는 이 의식을 본격적으로 집행하셨다. "그는 열 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으며" 유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열 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으며" 유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율법에 의하면 그들은 "각 가족대로 식구를 위하여 어린양을 취해야만"(출 12:3)하였다. 그것은 열보다는 많지만 열 둘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의 식구들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의 식구들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가족들을 맡기신 자들은 그들과 함께 자신들의 집을 하나님을 섬기는 곳으로 삼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Ⅴ. 유월절 식사 때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심. 이 예식에서 일상적안 대화의 주제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출된 내용이었다(출 12:26, 27). 그러나 이제 위대하신 유월절 어린양은 드려질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것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삼키고 있다(렘 16:14, 15). 여기에 보면,
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중에서 있게 될 배반할 제자에 대해 암시를 주심(21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아셨다. 우리는 어떤 고통이 우리에게 떨어질지 또는 그것들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아셨다. 이것은 그의 진지성을 입증할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을 돋보이게 한다. 즉 그는 그에게 일어날 모든 일들을 아셨지만 그대로 내버려두셨다. 비록 그가 그들 가운데 유다가 있었음을 아셨지만 그에게 주어진 자들을 잘 보살피셨다. 또한 주님께서는 어떤 자가 "그들의 사신 주님을 부인"할 것인가를 아셨지만 우리의 구속의 대금(속전)을 지불하려고 하셨다. 그는 자신의 피가 "불결한 것으로 발아래 짓밟힌"것이라는 사실을 아셨지만 그 피를 흘리셨다.
(2)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게 하셨다. 그는 종종 그들에게 인자가 팔리 우리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제 그는 그들 중의 하나가 그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이는 그들이 이 사실을 보았을 때 덜 놀라게 할뿐만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그 안에서 위로를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요 13:19; 14:29).
2. 이 때의 제자들의 느낌(22절).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1) "저희가 심히 근심하니라."
[1] 그들의 주님이 팔리 울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들은 매우 근심을 하였다. 베드로가 맨 처음 그것에 대해 들었을 때 그는 "그리 마옵소서"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그렇게 팔리우는 것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말을 들었을 때 베드로와 그 나머지 사람들은 매우 근심했을 것은 틀림이 없다.
[2] 그들 중의 하나가 그 일을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더욱 근심하였다. 한 사도가 배반자임이 입증된다는 것은 한 단체에 대한 비난이 될 것이며 이것이 그들을 괴롭게 하였다. 은혜 받은 영혼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 특별히 평범한 신앙고백 이상의 것을 한 자들의 죄에 대하여 근심을 한다(고후 11:29).
[3] 그들을 무엇보다도 더욱 근심하게 한 것은 그들 중의 누구가 이 일을 할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하사엘이 말한 것처럼(왕하 8:13) 그가 바로 "이런 큰 일을 행한 개"가 되지나 않을까 하여 가자가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유혹하는 자의 힘과 간교함, 또한 그들 자신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알고 있는 자들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다.
(2)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1] 그들은 쉽사리 유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비록 그는 "도적"이었지만, 아마도 그는 자신의 일을 그럴 듯하게 수행하였기 때문에 그와 친근한 자들은 그에 대하여 질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도 유다를 바라보며 그라고 생각하거나 "주여, 그 사람이 유다입니까?"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외식자는 능히 눈에 띄거나 의심을 받지 않고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나쁜 돈(위조지폐)이 교묘하게 모조 된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2] 그들은 자신들을 의심하였다. "주여, 내니이까?" 그들은 그러한 경향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알아차리지는 못하였지만(이러한 생각을 그들은 전에 가져 본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최악의 상태를 두려워하였으며, 우리 자신들보다 우리에 대하여 더 잘 아시는 주님께 "주여, 내니이까?"라고 물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언제나 특히 시험의 때에 경건한 경계심을 가지고 자신에 대하여 방심하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강력하게 시험을 받게 될 것인가와 또한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를 내버려두실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두려워해야만" 한다. 주목할 것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자신을 시험하고 판단하여 그 떡을 먹고 그 잔을 마실 것"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들에 대하여 이러한 시험과 의심을 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이다.
3. 이 일에 대하여 그들에게 계시하신 또 다늘 교훈(23, 24절).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1) 그 배반자는 친근한 친구이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 즉 나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너희들 중의 하나이다. 그가 이것을 말씀하신 것은 그 배반이 더욱 큰 죄임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거룩한 성례식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외적인 교제를 하는 것은 그에 대한 우리의 잘못을 한층 더 심화시킨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으면서도 그를 파는 것은 파렴치한 행동이다.
(2) 이것은 그렇게 할 것이라는 성경 말씀 대로였다. 시편 61편 9절에는 그렇게 기록되었다. 즉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우리가 고통 중에 성경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 고통들을 더욱 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3) 그것은 배반자에게 매우 소중한 계약임을 입증할 것이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가 이것을 말씀하신 것은 유다의 양심을 일깨우고 그로 하여금 회개하고 그의 계약을 취소할 것을 깨닫게 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 유다처럼 죄를 짓지 말것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범죄에 의해 자신의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하실 수 있으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죄인들의 상태를 덜 무서운 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를 파는 자들에게 뒤따르는 파멸은 너무도 큰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전혀 나지 않은 편이 더 바람직하다는 사실이다.
4. 유다의 깨달음(25절).
(1) 그가 "내니이까?"라고 물은 자신이 침묵을 지킴으로써 범죄 했다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유다는 그것이 바로 자기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러한 음모를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나타내기를 원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자신의 양심이 자신을 정죄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정당화시키려고 노력하며, 또한 "주여, 내니이까?"라고 말함으로써 좋은 얼굴을 나타내 보이려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자신의 위엄을 더 많이 신뢰하였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는 이것을 감추어 왔으며 건방지게 그로 하여금 이를 말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너무도 불신의 세력 아래에 놓여져 있었으므로 마치 "여호와가 보지 못할 것이라"(시 94:7)고 말하면서 "그가 능히 어두운 구름을 통해 심판하시겠느냐?"고 반문한 자들처럼 그리스도가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2) 그리스도께서는 곧 이 질문에 대답하셨다. "네가 말하였도다." 즉 네가 말한 대로이다. 이것은 나단이 말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처럼 명백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은 그를 깨닫게 하기에 충분하였으며, 만일 그의 마음이 그렇게 강퍅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정체가 주님에게 탄로가 났을 때 그 음모의 계획을 능히 취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를 팔려고 노력하는 자들은 언젠가 자신들을 팔게 될 것이며 또한 "그들 자신들의 혀가 자신들에 대해 말하게 될 것이다.."
성만찬의 제정 (마태복음 26:26-30)
우리는 여기에서 위대한 복음적인 성만찬의 예식이 제정된 것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주님께 받은 것이다. 몇 가지로 살려보면,
Ⅰ. 성만찬이 제정된 시기 ─ "저희가 먹를 때에." 그 상이 치워지기 나아가 유월절 식사의 마지막 때에 제정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희생 제사를 드리는 유월절이 그 예식을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구속을 이루신 유월절 희생 제물이시다(고전 5:7).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 예식은 우리들에게 유월절 식사이며,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출된 것보다 더 큰 구출에 대해 적용이 되고 기념이 되는 것이다. 속죄를 위한 율법적인 모든 제사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결산이 되고 폐지가 되었으므로 즐거움을 위한 모든 율법적인 절기들도 이 성례식에서 결산이 되고 폐지가 되었다.
Ⅱ. 성만찬의 제정. 성례식은 제정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도덕적인 예배의 한 부분이 아니며 또한 자연의 빛에 의해 지시된 것도 아니며, 신적인 제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고 따라서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례식을 명하신 것은 계약을 제정하신 자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 예식에 대해 언급하면서(고전 11:23 등) 계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도 "주"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계약의 "주"로서, 교회의 "주"로서 그는 이 예식을 제정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1. 그리스도의 몸은 떡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이전에 "나는 생명의 떡"(요 6:35)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비유에 근거하여 이 성례식은 제정되고 있다. 육신의 생명이 떡으로 말미암아 공급이 되듯이(그러므로 떡은 모든 육체의 영양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 4:4; 6:11). 영혼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중개에 의해 공급되고 유지된다.
(1) "떡을 가지사." to.n a;rton ─ 즉 떡덩이 즉, 그 목적에 적합한, 이미 손에 드신 어떤 떡덩이, 이 떡덩이는 아마도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상황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몇몇 희랍 정교회가 하는 것처럼 누룩 없는 떡으로만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는 엄숙하게 떡을 가지셨으며, 아마도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이 볼 수 있도록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행하신 것은 그 제자들이 그 예식을 행하는 데 있어서 평범한 것 이상의 것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속을 수행하기 위하여 신적인 사랑의 의도를 가지시고 시작하셨다.
(2) "축복하시고." 기도와 감사로써 이 일을 시작하셨다. 우리는 이 경우에 그가 사용하신 어떤 정해진 문귀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말씀하신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손에 들고 있는 직무, 즉 이 예식에 의해 확증되고 비준된 새로운 계약에 알맞은 내용의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 칠일 축복하신 것"(창 2:3)과 같았으며, 이 날(제 칠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 구별되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 날을 축복된 날로 준수하도록 되었다. 그리스도는 축복을 명령하실 수 있으시며 또한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축복을 간구 할 수 있다.
(3) "떼어." 이것은 아음과 같은 뜻을 나타내고 있다.
[1] 우리가 쓰기에 좋도록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떼어 주시는 것. "그는 곡식이 부숴 지는 것" 같이 "우리의 불법 때문에 부숴 지셨다"(사 28:28). 비록 "그의 뼈가 꺾이우지는 않았지만"(왜냐하면 그가 모든 것이 꺾이워진다고 영약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몸은 "다시 꺾고 다시 꺾었으며" 그의 상처는 더욱 많아졌으며(욥 9:17; 16:14), 그것이 그를 고통스럽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죄인들의 "음란한 마음"(겔 16:14)으로 깨어진 것을 한탄하시며 또한 그와 맺은 우리의 계약이 깨어짐으로 그의 율법이 깨어진 것을 한탄하신다. 이제 공의는 "파상은 파상으로 할 것"(레 24:20)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그 요구를 만족시키시기 위하여 꺾이우셨다.
[2] 가정의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떡을 떼어 주듯이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에게 떼어 분배됨.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떼어 주실 것은 우리가 손쉽게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수여와 그의 은혜의 작용에 의해 우리들을 위해 예비 되어 있다.
(4) 그는 가정의 주인으로서 또한 이 줄어들기의 주인으로서,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비록 그들은 사도들이었으며 이전에도 종종 그렇게 불리웠지만 그것을 "사도들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지 않고 "제자들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은 이 의식을 행할 자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의 제자가 된 자는 그 특권을 소유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오병이어를 가지고 떡을 나누어주시던 것처럼 그들에게 나누어진 떡이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나누어지도록 떼어 주셨다.
(5)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26절). 그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1]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계시다. "받아 먹으라. 그리스도가 너희에게 주어진 것처럼 그를 받으라. 속죄를 받으라. 그것을 시인하라. 그것에 동의하라. 그 특권이 너희에게 제의된 조건을 타협하기 위하여 오라. 그의 은혜와 그의 지배에 순응하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를 받아들이는 것"(요 1:12)과 "그를 먹는 것"(요 6:57, 58)으로 표현되고 있다. 고기를 바라보기만 한다고 영양이 되거나 또는 아름답게 꾸며진 접시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반드시 먹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교훈도 이와 같이 먹어야 한다.
[2] 그들은 왜 그것을 가져야만 하는가? "이것이 내 몸이니라." outoj ─즉 이 떡이 아니라 touto ─즉 이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믿음은 우리의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든 효력을 가져다준다. "이것"은 영적으로나 의식적으로 "내 몸"이다. 즉 이것은 내 몸을 의미하며 나타낸다. 주님은 이와 같이 의식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계시다(출 12:11). "그것은 주님의 유월절이다." 이 말들의 의미들을 왜곡한 나머지 로마 교회는 터무니없는 화체설(化體設)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설에 의하면 단지 떡만이 남는데도 불구하고 그 떡이 그리스도의 몸의 본체로 변화한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며, 성례식의 본질을 파괴하고, 우리의 감정을 속이는 것이다. 우리가 태양의 빛을 받게 되는 것은 우리가 손을 태양의 몸 전체에 넣기 때문이 아니라 그 광선이 우리에게 비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참예하는 것은 그의 은혜와 또한 그의 몸을 떼신 축복된 열매에 의해서이다.
2. 그리스도의 피가 포도주로 묘사되어 있다. 완전한 축제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여기에는 힘을 내게 하는 떡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27, 28절) 포도주가 있다. "그는 잔" 즉 은혜의 잔을 "가지셨다." 이 잔은 유월절에 유대인의 습관을 따라 감사를 드리고 난 후에 마시기 위하여 준비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취하셔서 성례잔으로 만드셨으며, 따라서 그 용도를 그와 같이 변경하셨다. 그것은 "축복의 잔"(유대인들은 그렇게 불렀다)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과 "그들"이 축복하는 축복의 잔과를 열심히 구별하려고 하였다. "그가 사례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모든 예식에서만 아니라 예식의 각 부분에서도 하나님만을 목표로 할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이 잔을 그는 제자들에게
(1) 명령으로써 주시고 계시다. "그것을 받아 먹으라." 이와 같이 그는 자신이 탁자에 온 그의 손님들을 환영하고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그의 잔을 마실 것을 요구하고 계시다. 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마실 것과 또한 다른 예식의 부분보다 이 점에 대하여 더욱 강조하여 명령하시고 계시는가? 분명히 그것은 오랜 후에 이 의식에 그 명령에도 non obstante ─즉 불구하고라는 표현에 의해 평신도에게는 잔을 금지함으로써 해체될 것임을 주님께서 미리 아셨기 때문이다(역주:천주교에서는 오늘도 그렇게 한다).
(2) 설명하시면서 주셨다. "이것은 새로운 언약의 피"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갈망하고 즐거움으로 마시라.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좋은 감로주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피는 동물의 피, 즉 실제적인 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그 피가 실제로 흘러진 이후로 그것은 포도의 피, 즉 상징적인 피로 묘사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예언에서도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창 49:10, 11).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성례식에 제시된 그의 피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이것은 나의 새로운 언약(신약)의 피니라." 옛 언약(구약)은 "송아지와 염소의 피"(히 9:19, 20; 출 24:8)에 의하여 확증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언약(신약)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확증되었다. 이것은 여기에서 그것과 구별되고 있다. "이것은 나의 새로운 언약의 피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맺기를 기뻐하시는 언약과 또한 그것의 유익과 특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에 기인하고 있다.
[2] "흘리는 바." 그 피는 그 다음 날에 흘려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흘려지는 상태에 있으며 또 흘린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너희가 이 예식을 반복, 또 다시 행하기 전에 그 피는 흘려지게 될 것이다." 그는 "지금 드려질 준비가 다 되었으며" 또한 속죄를 이루는 희생 제물의 피와 같이 자신의 피가 흘려질 준비가 다 되었다.
[3]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언약"(단 9:27)을 굳게 정하시며 또한 그의 죽음의 취지가 인정받도록 하기 위하여 오셨다. 구약의 피는 몇 사람을 위하여 흘려졌다. 그 피는 주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맺은 언약"(모세가 한 말)을 확증하였다(출 24:8). 그 속죄는 다만 "이스라엘 자손만을 위하여" 행하여졌다(레 16:34).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다(요일 2:2).
[4]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바," 즉 우리를 위하여 죄를 면제하도록 하기 위하여 흘리는 피니라.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된 구속(속전)은 "죄를 사하는 것"이다(엡 1:7). 그리스도의 피에 의하여 얻어지고 확증된 새 언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케 하기 위한 용서의 헌장이며, 면책의 행동이다. 왜냐하면 죄는 분쟁을 이룬 유일한 원인이었고 또한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기"(히 9:22) 때문이다. 죄사함은 주의 만찬 때에 모든 참된 신자들에게 부여된 위대한 축복이다. 그것은 모든 다른 축복의 기초이며 영원한 위로의 샘이다(마 9:2, 3). 이제 포도나무에서 난 열매는 먹지 않는다고 말해지고 있다.(29절).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지금 구약과 신약의 축제에서, fibula utriusque Testamenti ─ 즉 두 언약 사이를 연결하는 띠에서 많은 위로 가운데서 함께 즐기고 있다. 이 초막은 얼마나 온화하였는가 ! 여기에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 이 식탁에 있는 것과 같은 지상천국에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영구히 지속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그는 그들에게(요 16: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셨으며, 이것은 여기에서 설명되고 있다.
첫째, 그는 이러한 교제를 작별하고 있다. "나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마시지 아니하리라." 즉 이제부터 나는 이 세상에 있게 되지 않을 것이다(요 17:11). 나는 그것을 충분히 먹었으며 또한 그것을 떠날 생각을 하니 즐겁다. 즉 이것이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하니 즐겁다. "이 포도나무의 열매," 이 유월절 잔, 이 성례식의 포도주여, "잘 있거라." 임종하는 성도들은 성례식과 또한 그들이 이 세상에서 즐기던 다른 교제의 예식들에 대하여 작별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들어가게 될 즐거움과 영광이 그것들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태양이 떠오르면 촛불들은 작별을 해야만 한다.
둘째,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마침내 그들을 만나게 될 것을 확신시키고 계시다. 그것은 오랜 작별이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작별하는 것이 아니다.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이다.
1. 어떤 사람은 이것이 그가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가는 첫 단계인 그의 부활의 후에 제자들과 함께 가졌던 상면(interviews)에 대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비록 그는 40일 동안에 제자들과 더불어 전과 같이 그렇게 계속적으로 대화를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그러나 "그는 그들과 더불어 함께 먹고 마셨다"(행 10:41). 이것은 그들의 믿음을 굳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의 마음을 크게 위로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를 보고 크게 즐거워했기 때문이다(눅 24:41).
2. 어떤 사람은 이것이 여기에서 "포도주의 연회"의 즐거움에 의해 기술된 주 예수님과의 영원한 교제 가운데서 모든 성도들이 참예하게 될 미래의 즐거움과 영광에 대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나라에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 그 나라는 그에게 맡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위안의 포도주"(렘 16:7)는 오래 보관된 포도주처럼 맛이 없거나 신 것이 아닌 언제나 새로운 것일 것이다. 또는 과음한 자에게의 포도주처럼 매스껍거나 불쾌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신선한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그 즐거움에 참예하실 것이다. 그것은 "그 앞에 놓인 즐거움"이었으며, 그는 이 즐거움을 바라보셨으며 또한 그의 모든 신 친구들과 추종자들은 그와 함께 이 즐거움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기에는 찬미로 맺은 엄숙한 끝마침이 기록되어 있다(30절). 그들은 "찬미"나 시편을 노래하였다. 유대인들은 대개 유월절 식사를 마칠 때에는 시편을 노래하였다. 유대인들은 대개 유월절 식사를 마칠 때에는 시편을 낭송했는데, 그것을 "위대한 할렐"이라고 불렀는데, 그 시편은 113편과 그 이후의 다섯 편이다. 또한 이 경우에 어떤 새로운 찬미가 불리워졌는지는 불확실하다. 나는 앞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것이 새로운 것이었다면 요한이 그것을 빠뜨렸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시편을 찬미하는 것은 복음적인 예식이다. 그리스도께서 유월절의 끝에서 주의 만찬의 끝으로 찬미를 옮기신 것은 분명히 그가 이러한 예식이 그의 교회에서 계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명백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 찬미가 의식적인 법으로 말미암아 생기지 않는 것과 같이 그것은 그 법과 함께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2. 그 찬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즐거움을 나타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위대하신 사랑에 대해 감사하는 표식으로써 주의 만찬 후에 불러진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다.
3. 그 찬미를 슬픔과 고난의 때에 부르는 것은 매우 합당하다. 제자들은 슬픔 가운데 있었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고난 가운데로 들어가고 계셨다. 그렇지만 그들은 함께 찬미를 부를 수 있었다. 우리의 영적인 즐거움이 외적인 고통으로 말미암아 좌절되어서는 안 된다.
이 일을 마쳤을 때 그들은 "감람산으로 나아갔다." 주님께서는 그 집주인에게 고통을 주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그 집에 더 이상 머물어 있으려고 하지 않으셨다. 또한 그가 성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으신 것은 민요가 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인접한 곳에 있는 감람산으로 가셨는데, 이 산은 다윗이 고통 가운데서 "울며 올라 갔던"(삼하 15:20) 바로 그 산이다. 그들은 이 때에 달빛을 받으면서 걸어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언제나 만월 때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성만찬을 지낸 다음에는 기도와 명상을 하거나 또는 하나님과 더불어 홀로 있기 위하여 물러가 있는 것이 좋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도망갈 것을 예언하심 (마태복음 26:31-35)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시는 도중에 그들과 더불어 대화하신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Ⅰ.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이제 함께 거쳐야 할 시련에 대한 예언. 그는 여기에서,
1. 그들을 흩어버릴 불운의 폭풍이 이제 일어나고 있음을 예언하고 계신다(31절).
(1) 그들은 "그 밤에 그를 인하여 다 실족하게 될 것이다" (역주:개역 성경에는 "다 나를 버리리라"고 되어 있음). 다시 말하면 그들은 모두 그 고난에 대해 매우 놀라기 때문에 그와 함께 있을 용기를 가지지 못하고 다 비겁하게 그를 떠날 것이다. "오늘 밤에 나 때문에," 즉 evn evmoi evn tmnukti tauth ─ 즉 나 때문에, 오늘 밤 때문에 그렇게도 읽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밤 내게 일어나는 일 때문에,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실족케 되는 일이 시련과 유혹의 때에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약하고 사탄은 분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실족케 되는 일을 허락하신다. 마음이 올바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종종 실족하여 넘어지게 된다.
[2] 몇몇 유혹과 실족케 되는 일이 있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흔히 일반적으로 저지르는 일들이 있다. "너희가 다 실족케 되리라"라 그리스도께서 조금 전에 제자들에게 유다의 배반에 대해 알게 하셨다. 그러나 그 나머지는 안전할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배반자는 한 사람에 불과할 것이지만 그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버리는 자"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가지도록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3] 우리는 삽시간에 엄청나게 닥쳐 올 급작스런 시련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평안함과 고요함 가운데서 함께 그들의 식사를 잘 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밤이 이러한 실족의 밤으로 입증되었다. 얼마나 빨리 폭풍은 일어나고 있는가? 우리는 언제 어느 밤에 생기게 될는지를 모르며 또한 임신한 태 속에 잠시 동안에 어떤 큰 일이 일어날는지를 알지 못한다(잠 27:1).
[4]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의 제자들로 간주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거침돌이 된다. 그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며(고전 1:23). 또한 우리가 지고 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 십자가를 지셨다(마 16:24).
(2) 여기에서 그 성경말씀은 성취되고 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슥 13:7)."
[1]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심으로써 목자가 매를 맺은. 그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에 대하여 그의 진노의 검을 일으켜 세우고 계시며, 그는 매를 맞고 있다.
[2] 이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도망감으로써 그 양들이 흩어짐. 그리스도가 그의 원수들의 손에 붙잡히셨을 때, 제자들은 혹 이 길로, 혹 저 길로 뿔뿔이 도망쳐 버렸다. 자기 힘으로 변통해 나가는 것은 각자의 책임이었으며 십자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자가 가장 안전한 자였다.
2.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러한 폭풍이 지난 후 다시 함께 모일 수 있을 것이라는 위로를 주고 계시다(32절).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가리라. 너희가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넘어질지라도 나는 너희가 마지막까지 넘어지지 않도록 돌볼 것이다. 우리는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며, 나는 목자가 양보다 앞서 가는 것처럼 너희보다 먼저 가리라." 어떤 사람은 그 예언(슥 13:7)의 마지막 부분, 즉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는 말씀을 여기에 있는 말씀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손이 데려 오지 않고서는 그들을 다시 데려 올 수 없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구원의 대장은 그들이 겁을 먹어 뿔뿔이 헤어졌을 때에도 다시 그의 군대들을 정렬시키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Ⅱ.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위신을 지킬 것이라고 베드로가 장담함(33절). "다 주를 인하여 실족할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실족치 않겠나이다"(개역 성경에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로 되어 있음). 베드로는 큰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어느 경우에든지 혼자 앞장서서 말하였다. 그것은 종종 주님께 호의를 나타내기도 하였지만 여기에서와 같이 그를 실망시킨 일도 있었다. 여기에서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는 자신이 결코 그런 그리스도를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굳게 하였다. 오늘밤 뿐만 아니라 어느 때에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만일 이 약속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겸손히 신뢰함으로써 맺어진 것이었다면 그것은 매우 훌륭한 말이었을 것이다. 주의 성만찬 전에 그리스도의 대화는 그들로 하여금 "주여, 내니이까?"라는 말로 자신들을 "시험하도록"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준비해야 할 의무가 되기 때문이다. 예식을 마치고 나서 그의 대화는 가까이 걸어가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이끌어 나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계속적으로 해야 할 의무가 되기 때문이다.
2. 베드로는 그 자신이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유혹을 물리칠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그의 약점이요 어리석음이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것은 하사엘이 말한, "무엇이라고요 ! 당신의 종이 개라고요" 보다 더 나쁜 것이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 일이 그렇게 하기 힘든 것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떤 사람," 아니 "모든 사람이 실족케 될 수는 있어도 그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잘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놓여있는 유혹이나 타락에서 안전하게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자만과 자기 신뢰를 입증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실족케 된다면 역시 우리도 그렇게 될 위험이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흔히 보면 자신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쉽게 의심한다(말 6:1 참조).
Ⅲ. 베드로가 한 말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경고하심(34절). 베드로는 시험받을 때에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더 잘 실패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경고는 엄숙한 서언(誓言)으로써 시작되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즉 네가 자신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너를 잘 알고 있는 내 말을 들으라." 주님께서는 그에게,
1. 그가 자기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베드로는 결코 그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얼마 못되어 그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그 일을 행하였다.
2. 주님께서는 그가 얼마나 빨리 그 일을 행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계시다. 즉 "오늘 밤, 내일이 오기 전에 아니 닭 울기 전에" 사탄의 유혹은 "화전"(엡 6:16)으로 비교되고 있는데, 그 화전은 우리가 알기 전에 상처를 내고야 말 것이다. 즉 "사탄은 갑자기 쏘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 고통을 받게 될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언제 범죄 하게 될는지를 알지 못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두신다면 우리는 언제나 위험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3. 주님께서는 그가 얼마나 자주 이 일을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계시다. 즉 "세 번," 베드로는 자신이 이런 일을 한 번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여러 번 그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발이 한 번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다시 일어서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죄의 시작은 물을 엎지르는 것과 같다."
Ⅳ. 베드로가 자신의 확고한 결심을 되풀이함(35절).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베드로는 그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 유혹이 매우 강한 것임을 예상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그것이 더 강한 것임을 예상하고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쓸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그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보다는 그와 함께 죽는 것이 제자 된 도리(눅 14:26)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의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곧 입증이 되었다. 멀리서 죽음에 대하여 담대하게 또는 무관심하게 말하기를 매우 쉬운 일이다. "나는 이러한 일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고 싶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가 닥치고 죽음이 본색을 드러낼 때는 자신의 말한 대로 행하기를 쉬운 일이 아니다.
베드로는 한 말에 대하여 나머지 제자들도 동조하였다.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선한 사람들 마음속에도 자신의 힘과 견고성에 대해 지나치게 자만하는 과오가 있다. 우리는 자칫하면 자신들이 강한 시험과 더불어 맞붙어 싸울 수 있으며, 어려운 일을 능히 해낼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려운 고통들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자신들을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2. 자신에 대해 큰 자심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종종 더 빨리 그리고 더 비열하게 넘어진다. 가장 안심하는 자가 가장 불안정하다. 사탄은 이렇게 미혹하는 데 가장 활동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계를 가장 소홀히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겸손케 하시려고 내버려두신다(고전 10:12 참조).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민 (마태복음 26:36-46)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준비들을 봐왔다. 이제부터 우리는 피흘리는 장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에서는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안에서 고민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님에게 있어서 슬픔의 시작이었다. 이제 "여호와의 검"은 "그의 친구였던 자"를 향하여 일으켜 세우시기 시작하였다.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것을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 구름이 잠시 동안에 모여 검게 보여졌다. 주님께서는 몇 날 전에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요 12:27)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이제 폭풍은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의 원수들이 자신에게 어떤 고통을 주기 전에 자신이 이 고통을 맛보려고 하셨는데, 이는 그 자신 자발적인 번제물이심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의 생명은 억지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셨다"(요 10:18).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Ⅰ. 이 위대한 고민을 하신 장소. 그 곳은 "겟세마네라 하는 곳"이었다. 겟세마네라는 이름은 torculus olei ─ 즉 감람 공장, 즉 포도주 틀과 같이 감람나무 열매를 누르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서 사람들은 "감람나무 열매를 짓밟았다"(미 6:15). 감람산의 밑 부분에 있는 이 곳은 이러한 일을 하기에는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거기에서 우리 주님은 자신의 수난을 시작하셨다. 그 곳에서 주님은 자신을 부수고 깨뜨리심으로써 신선한 기름을 모든 사람들에게 흘려 보내셨으며, 우리로 하여금 "좋은 감람유"의 근원과 부요함에 참예케 하셨다. 거기에서 그는 그의 아버지의 진노의 포도주 틀을 혼자서 밟으셨다.
Ⅱ주님께서 이러한 고민을 하실 때 그와 함께 간 동반자.
1. 주님께서는 이 때에 다른 일에 채용되어 분주했던 유다를 제외하고 모든 제자들을 동산으로 데리고 가셨다. 비록 늦은 밤, 잠을 잘 시간이 거의 된 밤이었지만 그 제자들은 달빛을 받으면서 그와 함께 계속하여 걸었다. 이는 마치 엘리사가 그의 주인이 머지 않아 들어올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인도를 받으면서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간청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이 제자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뒤따라갔다.
2. 그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그가 고민을 하신 동산 어귀로 돌아갔다. 주님은 그 나머지 제자들은 얼마간 떨어진 곳, 아마 동산 입구에 남겨 두시면서 "내가 저기 가서 인도할 동안에 너희가 여기 앉아 있으라"고 분부하셨다. 이는 아브라함이 그의 "사환들"(창 22:5)에게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저기 가서 경배하리라"고 말한 것과 흡사하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근래에 그의 제자들과 기도하셨지만(요 17:1) 지금은 홀로 기도하러 가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가족들과 함께 기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은밀한 기도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2)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여기에 앉도록 명령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가지기 위하여 물러가 있는 자들을 방해하거나 소란케 하지 않도록 유의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 세 제자를 대동하신 것은 그들이 변화산에서 변형되실 때 그 영광을 목격한 증인(마 17:1, 2)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을 자신의 고민에 대한 종으로 준비시키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믿음으로 그의 영광을 보고 또한 거룩한 산에서 영광스럽게 된 성도들과 교제를 가진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도록 예비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와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 또한 만일 우리가 그와 함께 왕노릇하기를 원한다면 왜 우리는 그와 함께 고난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아니하는가?
Ⅲ. 그가 처해 있던 고민. "그는 고민하고 슬퍼하셨다." 그것은 번민(눅 22:44), 즉 고통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그가 처해있는 것은 어떤 육체적인 고통이나 괴로움은 아니었다. 그를 손상시킬 것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 이었든지간에 그 고민은 속으로부터 연유하였다. 그는 민망히 여기셨다(요 11:33).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매우 강조적이다. 그는 lupeisqai kai adhmonein ─ 즉 슬퍼하시고 당황하셨다. 후반에 있는 단어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슬픔을 나타낸다. 그는 자신의 심령에 무거운 납덩이를 매단 것과 같으셨다. 의사들은 이 말을 학질에 걸린 사람이 어지러워하거나 열이 시작할 때에 유사한 말로 사용하고 있다. 이제 시편 22편 14절에 있는 말씀이 성취되었으니, 곧 "너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 녹았나이다." 또한 다윗이 자신의 영혼의 슬픔에 대해 불평하고 있는 시편에 있는 모둔 구절들이 성취되었다(시 18:4, 5; 42:7; 55:4, 5; 69:1-3; 88:3; 116:3). 또한 요나의 불평이 성취되었다(욘 2:4, 5).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고민 가운데로 들어가게 했는가? 예수님이시여, "어찌하여 당신은 내던짐을 받으셨으며,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셨나이까?' 분명히 그것은 그의 아버지에 대해 실망하거나 불신하는 것이 아니었고 더욱이 그와 논쟁하거나 말다툼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그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사랑하셨던 것처럼 또한 그가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셨기 때문에 사랑하셨다. 그러나,
1. 그는 어두움의 세력과 맞붙어 싸우도록 고용되었다. 그는 그와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눅 22:53).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그는 바로 전에 그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다(요 14:30, 31). "이 세상 임금(역주:마귀)이 오고 있다. 나는 그가 자신의 군대를 정렬시키고 일반 공격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있다.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며, 그의 세력에 대항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거나 또는 그와 은밀하게 손을 잡을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그의 시도가 아무리 맹렬하다고 할지라도 무익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직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되었든지간에 나는 그와 더불어 싸우지 않으면 안 되며, 그 전투는 정정당당하게 수행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전쟁터로 서둘러 가자. 그리하여 원수를 만나도록 하자. 지금은 미가엘과 용이 막상막하의 결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다." 이제 위대한 판결은 이미 결정되었으며 대세도 높이가름이 났으므로 "이 세상의 임금"은 분명히 "내어 쫓김을 당하게" 될 것이다(요 12:31).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이루실 때에 그는 들판을 빼앗은 용사로서 묘사되고 있다(사 59:16-18). 이제 뱀은 여인의 후손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하고 있으며 그의 심장에 사망이 침을 꽂고 있다. animamque in vulnere ponit ─ 즉 그 상처는 치명적인 것이다.
2. 주님은 이제 아버지께서 지워 주신 "불법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슬픔과 놀라움으로써 그 임무에 순응하셨다. 그가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그 모든 죄는 그에게 맡겨졌으며 그는 그것을 아셨다. 우리가 우리의 특별한 죄를 인하여 슬퍼해야만 하는 것처럼, 그는 우리 모두의 죄를 인하여 슬퍼하셨다. 피어슨 주교(Bishop Pearson)는 그와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가 지금 계셨던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열국들을 모으고," 그의 아들 안에서 "그들을 국문하셨다." 그는 그에게 지워진 사악한 죄악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성내게 하며 얼마나 사람을 멸망케 하는가를 아셨다. 이 모든 죄악들이 그의 앞에 진열되어 있고 또한 그에게 지워져 있으므로 그는"고민하시고 슬퍼하셨다." 이제 그것은 "그에게 맡겨진 불법이었으며," 따라서 그는 그에 대하여 예언된 것처럼 "우러러 볼 수도"(시 49:7, 12) 없으셨다.
3. 주님께서는 그의 앞에 놓여 있던 모든 고난들을 분명하고 충분하게 예견하셨다. 그는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 유대인들의 악의와 그들의 배은망덕을 미리 알고 계셨다. 그는 이제 몇 시간 안에 채찍으로 맞고 침뱉음을 당하여 가시 면류관을 쓰시며 십자가를 지셨다. 죽음은 무서운 얼굴과 위엄을 갖추고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특별히 그가 슬퍼하신 것은 그가 대속하기 위해 지신 무거운 죄의 짐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았던 순교자들이 이러한 고민이나 당황함이 없이 큰 고통과 무서운 죽음을 감수했으며 또한 그들의 감옥을 즐거운 과수원으로, 불붙는 침상을 장미의 침상으로 여겼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때에,
(1)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가졌던 후원과 위로를 거절하셨다. 즉 그는 스스로 그것들을 거절하셨으며, 고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임무에 대한 공의 때문에 "그의 마음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셨다. 십자가 아래에서 그들의 즐거움은 신적인 은혜에 기인하며, 이 은혜는 당분간 주 예수님에게서 중단되었다.
(2) 그의 고난은 그들 순교자들의 것들과 본질상 다른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성도들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로 드려질 때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것, 즉 속죄하는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경우이다. 성도의 십자가에는 축복이 선포되어 있으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 아래에서 즐거워하게 한다(마 5:10, 12).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저주가 첨가되어 있으며, 이것은 그로 하여금 아래에서 슬퍼하게 하고 무겁게 하였다. 십자가 아래에서의 그의 슬픔은 그 아래에서의 즐거움의 근원이 된다.
Ⅳ. 이 고뇌에 대한 그의 불평. 주님께서는 그 자신이 수난 가운데 있는 것을 발견하시고 그의 제자들에게로 나아가셨으며(38절), 또한
1. 주님께서는 자신의 심정을 그들에게 토로하셨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흉금을 털어놓거나 자신의 슬픔을 토로할 수 있는 친구를 가진다는 것은 괴로움을 당하는 영혼에게 약간의 위안을 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1) 그의 슬픔의 좌소(seat)는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계신다. 지금 괴로워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참된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범죄를 하였다. 둘 다 죄를 지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잘못을 저절렀다. 그리스도는 육신과 마음으로 고난을 받으셨다.
(2) 그의 슬픔의 정도는 어느 만큼이었는가? 그는 "심히 고민하였다."perilupos ─즉 사방에서 슬픔으로 에워쌈을 당하였다. 그것은 죽음에까지도 이른 극도의 슬픔이었다. 그것은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슬픔이며 보통 사람은 참거나 살아 남지 못할 슬픔이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이미 각오하였으며, 그것들은 죽음의 슬픔(고통)이었다.
(3) 그 슬픔의 기간. 그것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내 마음은 그것이 육신 안에 있는 한 슬퍼하게 될 것이다. 나는 죽음 이외의 돌파구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고민하기 "시작하였으며" 그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기까지는 그것이 결코 끝나지 않았다. 즉 동산에서 시작된 그 고통은 그때에야 비로소 끝난 것이다. 그가 "슬픔의 사람"(사 53:3)이 될 것이라는 것은 미리 예언되었다. 그는 계속적으로 고통을 당하셨으며, 우리는 그가 웃으셨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그의 모든 고통은 지금까지의 이러한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극심한 것이었다.
2. 주님께서는 그들이 동반하고 수행할 것을 넌지시 말씀하고 계시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주님께서는 그들 제자들의 보잘 것 없는 위로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이러한 부탁을 하신 것은 분명히 도움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성도들의 교제의 이점을 우리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셨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는 언제든지 우리의 형제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며 또한 그것을 청하는 일도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그가 "깨어 있으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막 13:37)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것이다. 그가 장차 오실 것을 기대하면서 깨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재 일을 수행하면서 그와 함께 깨어 있어야만 한다.
Ⅴ. 주님께서 이러한 고민 가운데 있을 때 그와 아버지 사이에는 어떤 교제가 있었는가?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는 기도하셨다." 기도는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되며 특히 고통 중에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가 기도하신 장소. 그는 "조금 나아가셨다." 즉 그들에게서 물러가셨다. 이는 "내가 홀로 포도주 틀을 밟았다"는 성경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그는 기도하기 위하여 물러나셨다. 괴로움을 당하는 영혼은 한숨과 비탄의 상심한 말을 이해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 말씀에 대한 칼빈의 경건한 주석은 새겨 둘 가치가 있다.
utile est seorsim orare, tunc enim magis familiariter sese denudat fidelis animus, et simplicius sua vota, gemitus, curas, pavores, spes, et gaudia in Dei simum exonerat ─ 즉 따로 떨어져 기도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그때에 신실한 영혼은 더욱 친밀하게 기도할 수 있으며 또한 보다 단순하게 하나님의 가슴속으로 그 간구와 신음, 염려, 소망, 기쁨을 쏟아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로써 우리들에게 은밀한 기도가 은밀하게 행해져야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주님께서 동산 입구에서 남겨 두신 제자들까지도 그의 기도 소리를 귓결에 들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심한 통곡"(히 5:7)으로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2. 그의 기도 자세. "그는 얼굴을 땅에 대셨다." 그가 땅에 기대어 기도하신 것은,
(1) 그가 처해 있는 고통과 그의 극심한 슬픔을 나타낸다. 욥은 큰 고통 중에서 "땅에 엎드렸다." 큰 고통은 "띠 끌에 구르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미 1:10).
(2) 그의 기도 가운데서의 겸손을 나타낸다. 이 자세는 그가 이러한 기도를 드린 그의 eulabeia ─즉 경외심(히 5:7)을 나타낸다. 또한 이와 같이 그 자신이 순종하신 것은 그가 "육체에 계실 때," 즉 그의 겸손의 신분에 계실 때였다.
3. 기도 그 자체. 여기에서 유리는 세 가지 일을 살펴 볼 수 있다.
(1) 그가 하나님께 붙인 명칭. "내 아버지여," 구름이 짙게 드리워 있었지만 그는 그 사이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실 수 있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우리는 아버지, 가지 우리 아버지이신 그를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은 특별히 우리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 이러한 때에 "내 아버지여"라고 부르는 것은 하프(harp)의 아름다운 줄과 같은 것이다. 어린아이가 고통을 당하게 될 때 자기 아버지 이외에 누구에게로 갈 것인가?
(2) 그가 간구하고 있는 호의.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주님께서는 그의 고난을 "잔"이라고 부르고 있다. 강이나 바다가 아니라 곧 밑 부분을 볼 수 있는 잔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놓여 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을 가장 적은 것으로 여겨야만 하며 그것들을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 그의 고난이 "잔"이라고 불리 울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성찬식을 거행하실 때 각 사람에게 놓여졌던 것처럼 그 고난이 그에게 할당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잔이 그에게서 "지나가기를," 즉 그가 임박한 고난들을 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시고 있다. 또한 적어도 그 고난이 짧게 되도록 기도하고 계시다. 이것은 그가 실제적으로 참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인간으로서의 그는 고통과 고난을 반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감각적으로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에서 벗어나려고 하거나 또는 그것이 제거되기를 희망하는 것은 사람의 의지의 처음이며 단순한 행동이다. 자기를 보존하려는 법칙은 사람의 솔직한 성품에 새겨져 있으며 어떤 다른 법칙에 의해 취소될 때까지 그 성품 속에서 지배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임을 나타내기 위하여(히 5:1), 즉 "우리의 연약함"(히 4:15)을 몸소 느끼시고 또한 "죄는 없으시지만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는 자이심"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거절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고통에 대한 신앙의 기도는 고통 가운데의 소망의 인내와 매우 잘 일치가 될 수 있다. 다윗은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라고 말하고 나서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시 39:9, 10)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단서에 대해 유의하라. 즉 "할 만하시거든." 만일 하나님께서 그가 이러한 쓴 잔을 들지 않고서도 영광을 받으시며 사람을 구원하시며 그의 임무의 목적들이 응답 받게 될 수 있다면, 그는 면제되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으로 안전을 도모할 수 없는 것을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하셨다. Id possumus quod jure possumus ─ 즉 우리는 우리가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며, "하게 되지도" 않는다.
(3)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의 완전한 복종과 순응.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뜻이 거룩하신 뜻을 저항하거나 거스리지 않았다. 그는 첫 번에 그 뜻과 달리하셨지만, 두 번째는 완전히 그 뜻에 순응하셨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우리 주 예수님은 비록 그가 수행하려는 고난의 쓰라림을 재빨리 간파하셨지만,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그 고난에 순응하셨으며, 또한 "우리를 위해 그 자신을 내어 주셨다."
[2] 그리스도께서 그의 고난에 순응하신 것은 그의 아버지의 뜻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원대로"(39절). 그는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기초하였으며, 전적으로 그 뜻에 순응할 것을 결심하고 계시다. 그가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하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시 40:8). 그는 종종 이 일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이며 그가 전적으로 수행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이다"(요 6:39, 40). 그는 이것을 찾으셨으며(요 5:30), 그것을 행하는 것이 그의 "양식"(요 4:34)이었다.
[3] 그리스도의 이러한 본을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에 맡기신 쓴 잔을, 그것이 아무리 쓰다고 할지라도 마셔야만 한다. 본성이 거스린다고 해도 은혜는 일임되어야만 한다. 비록 혈통이나 육정에 거스리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로 완전히 녹여야만 한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행 21:14).
4. 기도의 반복. "또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셨으며"(42절) 또한 세 번째 기도하셨다(44절). 이 모든 기도는 동일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두 번째와 세 번째 기도에서는 첫 번째 기도에서 한 것처럼 이 잔이 그에게서 지나가도록 명백하게 기도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그 기도는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고통을 없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용건과 강조점은 그가 우리에게 그 고통을 잘 참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고통들을 없애도록 하는 그것들을 인정하고 또한 그것들에 대해 만족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그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체념을 고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자신에 대해 하나님께 아뢰고 또한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우리의 방법과 일을 그에게 맡기는 것은 결국 응답 받는 기도가 되게 할 것이다 세 번째 그는 ton auton lo.gon─ 즉 동일한 말씀 동일한 내용이나 요지로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동일한 목적으로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이 그가 말씀하신 것 전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40절에 보면 그는 고통 가운데서 "한 시 동안"을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내용을 더 말씀하셨든지간에 실제로 그는 다가오는 고난을 지나가게 해 주실 것과 또한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응하실 것을 기도하셨으며, 그러한 표현들을 살펴 볼 때에 우리는 그가 위축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기도에 대해 어떤 응답을 받았는가? 분명히 그 기도는 헛된 기도가 되지 않았다. "언제나" 그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그 기도를 물리치시지 않으셨다. 그 잔이 그에게서 지나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간구를 철회하셨으며 또한 그것을 강조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그것을 요구하셨다면, 내 생각으로는 그 잔이 지나갔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을 받으셨다. 왜냐하면,
(1) 그는 간구하는 날에 "그의 영혼이 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시 138:3). 또한 그것은 실제적인 응답이었다(눅 22:43).
(2) 그는 그가 두려워하는 것에서 구출을 받으셨는데, 그가 성급함과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그의 아버지를 버리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히 5:7). 그의 기도에 응답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가 넘어지거나 용기를 잃지 않도록 준비하셨다.
Ⅵ. 이 때에 그와 그의 세 제자 사이에는 어떤 대화가 있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1. 그들이 범한 실수. 주님께서 고통 중에서 슬퍼하고 고민하시면서 애써 기도하고 있을 때 그들은 이에 대하여 너무도 소홀히 여긴 나머지 깨어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셨다"(40절). 그들은 마땅히 "이 이상한 광경, 즉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기 위하여 돌이켰어야"만 하였다. 더욱이 주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관심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밀접하고 주의 깊게 그를 따르도록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우둔하였기 때문에 깨어 있지를 못하였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처럼 졸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우리의 구원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의 손에 주어진 것은 우리에게는 실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그의 제자들에게서 어떤 도움을 기대하시는 것처럼 그와 더불어 함께 깨어 있도록 분부하셨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고 있었다. 분명히 그것은 매우 불쾌한 것이었다. 다윗이 이 감람산에서 울고 있을 때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그와 함께 울었다(삼하 15:30). 그러나 다윗의 후손이 여기에서 울고 있을 때 그를 따르는 자들은 졸고 있었다. 그를 항상 주시하고 있었던 그의 원수들은 완전히 깨어 있었다(막 14:43). 그러나 그와 함께 깨어 있어야 할 그의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주여, 사람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께서 내버리신다면 훌륭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고통 중에 계실 때 부주의함과 육적인 안도감은 누구에게나 큰 허물이 되며, 특히 그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는 밖으로는 싸우고, 안으로는 두려움을 가지며 고통할 때가 종종 있다. 그 때에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 전혀 무관심했던" 갈리오와 같이 되거나 또는 "안심을 하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한 자"(암 6:6)들 같이 졸고만 있을 것인가?
2.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보이신 호의.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은 자칫하면 그들 주위에 있는 자들과 다투거나 불평을 하게 되기가 쉬우며 또한 그들이 자기를 멸시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마음이 괴로워지기 쉽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는 여전히 전과 같이 온유하시며 또한 그의 아버지를 대하시는 것처럼 그의 추종자들에게도 한결같이 온유하게 대하시며 무엇이든지 나쁘게 여기지 아니하신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를 이렇게 멸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에,
(1) 그는 마치 그가 그들에게서 어떤 위로를 받으려고 기대한 것처럼 "그들에게로 오셨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부활과 영광에 관하여 그에게서 들은 것을 기억했다면 아마도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위로하는 대신에 그들은 주님의 슬픔에 오히려 고통을 더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한 것보다 더 그들을 돌보시기 위하여 그들에게로 오셨다. 그는 매우 분주하셨지만 그들을 돌보시기 위하여 오셨다. 왜냐하면 그에게 주어진 자들은 사나 죽으나 그의 마음 곳에 있기 때문이다.
(2) 그는 그들을 은근히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사랑하시는 만큼 책망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그들을 위해 "말하였던"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셨다. 그 책망은 매우 인정에 넘치는 것이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주님께서는 그들을 보고 놀란 사람처럼 어리둥절하게 말씀하고 계시다. 엄밀히 생각한다면 각 낱말은 이 상태가 더욱 악화된 성질의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몇 가지로 생각해 보면,
[1] "그들은" 누구였는가? "너희들 ─ 내 제자요, 나를 따르는 너희들은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만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한다면, 즉 만일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다면(슥 1:11) 그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서 보다 나은 일들을 기대하였다."
[2] "그"는 누구였는가?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만일 너희들 중의 어떤 사람이 아프거나 고통 가운데 있다면 그와 함께 깨어 있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불친절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너희를 잘 돌보았고, 너희를 인도했으며, 너희를 양육했으며, 또한 너희를 가르치고 너희와 함께 참은 너희의 선생과 함께 깨어 있지 않는다는 것은 불충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너희는 이와 같이 그에게 보답하지 않겠느냐?"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마 8:26) 그들을 돕기 위하여 잠을 깨셨다. 그가 지금 "그들을 위하여" 고통 가운데 계시면서 고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특별히 고려한다면 적어도 그에 대한 자신들의 선의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깨어 있을 수 없었던가? Jam tuares agitur ─ 즉 나는 너희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3] 그가 그들에게서 기대한 것은 얼마나 사소한 일이었는가? 그것은 단지 "그와 함께 깨어 있는 것"이었다. 만일 주님이 그들에게 어떤 큰 일을 명령하셨다면, 그와 함께 고통 가운데 함께 있거나 그와 함께 죽을 것을 명하셨다면,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단지 "그와 함께 깨어 있을 것"(왕하 5:13)을 원하셨을 때 그것을 하지 못하였다.
[4] 주님께서 그가 기대하신 시간은 얼마나 짧은 것이었는가? 그것은 불과 "한 시"(one hour) 동안이었다. 그들은 선지자들처럼(사 21:8) 온 밤을 깨어 있도록 명령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한 시" 동안을 명령받았다. 종종 그는 "온 밤을 지새우시면서 기도하셨다." 또한 그 때에 그는 그의 제자들이 그와 함께 온 밤을 깨어 있도록 원하지도 않으셨다. 단지 그가 기도할 수 있는 이 한 시간 동안만 그와 함께 깨어 있기를 원하셨다.
(3)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좋은 충고를 하셨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41절).
[1] 시험의 때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괴로워하신 것은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를 불신하고 떠나며 그와의 모든 관계를 포기하려는 시험을 받는 것이었다.
[2] 그들이 시험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은, 마치 덫이나 함정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이 위험한 것이었다. 그들이 그 시험과 교섭을 시작하거나 그것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지거나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그것에 동의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것은 그 시험에 의해 넘어지려고 나아가는 첫 발걸음이다.
[3]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깨어 기도할 것을 권고하고 계신다. "나와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하라." 그들이 졸고 있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기도에 연합하는 특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너희가 깨어 있어 기도하라. 너희가 깨어 있기 위하여 기도하라. 하나님의 은혜로 너희가 깨어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라. 지금이 바로 그렇게 할 때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졸음이 오거든 어느 훌륭한 기독자가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이 졸음 마귀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도다 !"라고 기도해야만 한다.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의 길에 소생케 하소서." 또는 "너희가 공격받게 될지도 모를 더 큰 시험을 극복하기 위하여 깨어 기도하라. 이 죄로 말미암아 더 많은 죄를 짓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시험 가운데 빠져 들어가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깨어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4) 주님께서는 친절하게 그들을 위해 변명해 주셨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우리는 그들이 스스로 이야기했다는 사실에 대해 읽어볼 수 없다(그들 자신의 연약성이 그들의 입을 막아 버렸다). 오히려 그 때에 주님 자신이 그들을 위하여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대언자의 직분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는 "많은 죄악들을 덮어두시는" 사랑의 모본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계시다. 그는 제자들의 체질(성질)을 아셨으며 그들을 책망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이 한낮 육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저희는 육체 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시 78:38, 39).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 있는 한 육신과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남아 있는 타락의 원리와 지배하는 은혜의 원리를 함께 가지고 있다. 이는 마치 야곱과 에서가 같은 태 속에, "가나안과 이스라엘"이 같은 땅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갈 5:17, 24).
[2] 제자들의 육신이 경건과 헌신의 일을 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영혼들과 보조를 맞 출 수 없으며 또한 시시때때로 구름과 장애물이 그들에게 놓이게 된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있어서 실로 불행하고 부담을 주는 것이다. 즉 마음은 좋은 일을 하려고 하지만 육신이 저항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탄식하고 있다. "그런 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우리가 하나님을 봉사하는 데 무기력한 것은 우리의 본성의 큰 불법이요 불신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언제나 고통과 짐이 되는 이러한 비참한 타락의 흔적에서부터 비롯된다.
[3] 그러나 우리 주님이 이것을 은혜스럽게 여기시며 마음의 자발성을 받으시며 또한 육신의 연약성을 용서하신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혜 아래 있고, 불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5) 제자들은 계속적으로 둔감하고 졸았지만, 주님께서는 그일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날마다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는 언제나 우리들을 책망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 그가 두 번째 그들에게 나아 오셨을 때 우리는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아무 것도 찾아 볼 수 없다(43절). "다시 오사 보신 즉 저희가 자니."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깨어 있을 것을 충분히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졸릴 때 정신을 깬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육신적인 안도감은 그것이 한번 우세해질 때는 좀처럼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이것은 그들이 될 수 있는 대로 눈을 뜨려고 하나,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다'(아 5:2)고 말한 술람미 여자처럼 오히려 피곤하여 눈이 감겨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님은 동정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셨다.
[2] 주님께서 세 번째 나아 오셨을 때 그는 그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알리시면서 그냥 자도록 내버려두셨다(45, 46절). "이제는 자고 쉬라." 이것은 반어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만일 너희가 할 수 있다면 지금 자라. 너희가 감히 할 용기가 있다면 지금 자거라. 만일 유다와 그의 무리들이 너희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너희를 방해하지 않겠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안도감에 의해 굴복된 자들을 어떻게 취급하시며 또한 그것에서 깨우려고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종종 주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자도록 내버려두신다. "이제는 자라." 잠을 자려고 하는 자를 여전히 자도록 내버려 두라. 영적인 잠을 자는 자에 대한 저주는 그 죄에 대한 당연한 형벌이다(롬 11:8; 호 4:17).
둘째,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 자들을 일깨우시기 위하여 가끔 깜짝 놀라게 하는 심판을 내보내신다. 이성이나 논리에 의해 경고를 받지 않는 자는 그들이 안도감 가운데 멸망 받도록 내버려지는 것보다 검이나 창에 의해 경고를 받는 편이 오히려 더 나을 것이다. 믿지 않으려는 자들로 하여금 느끼도록 하라.
여기에 있는 제자들에게,
1. 그들의 주님께서 그의 원수들이 거의 다가 왔음을 알리셨다. 아마도 그 원수들은 지금은 보고들을 수 있는 거리에 와 있으며(왜냐하면 그들은 횃불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또한 큰 소음을 냈을 것이다.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그는 다시 한 번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에게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그가 어떻게 언제 받을 것인가를 잘 알고 계셨다. 이 때에는 그의 고뇌의 절정이 이미 수그러진 다음이었거나 적어도 기분이 전환되었었다. 주님께서는 용사처럼 겁을 내시지 않고 다음의 결정을 말씀하고 계신다.
2.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일어나서 갈 것을 분부하셨다. "일어나라. 위험을 피하여 도망가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일어나라. 그리고 그것과 맞부딛치기 위하여 가자"고 말씀하셨다. 기도하시기 전에는 자신의 고난을 두려워하셨지만 지금은 그 두려움을 극복하셨다. 그러나,
3. 주님께서는 그들이 준비해야 할 시간에 졸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계시다. 이제 그들은 준비하지 않은 것이 드러났으며, 이것은 그들에게 두려운 일이었다.
유다의 배신 (마태복음 26:47-56)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붙잡히셨으며 감금되어지셨는가를 찾아 볼 수 있다. 이 일은 "그가 말씀하실 때에" 즉각적으로 뒤따라 일어났다. 그의 수난의 시작에서 끝마칠 때까지 그는 숨돌리실 시간도 없으셨으며, "숨을 내쉴 만한"사이도 없으셨다. 지금까지 그의 괴로움은 자신 속에서만 일어났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장면이 바뀌고, 이제 불레셋 사람들은 삼손에게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애 4:20).
그러면 주 예수님이 체포되신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이 일을 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1. 이 파렴치한 무리들의 대장 곁에는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인 유다"가 있었다. "그는 예수 잡는 자들을 지도한 자였다(행 1:16)." 유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들은 이렇게 한적한 곳에, 주님을 찾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보고 기이히 여기라. 즉 그의 원수들과 함께 맨 처음으로 나타난 자는 한두 시간 전에 그와 함께 떡을 먹었던 그의 제자 중의 하나가 아닌가 !
2. "그와 함께 큰 무리가 있었다." 이는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시 3:1)라는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다. 이 무리들은 로마 총독에 의해 안토니아 수비대에 배치되었던 호위병들 가운데서 선발되어 파견된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죄인들," 즉 이방인들이었다(45절). 그 나머지는 대제사장의 하속들이었으며, 또한 그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서로가 여러모로 다른 자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데는 일치가 되었다.
Ⅱ. 그들은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어떻게 무장하였는가?
1. 그들은 어떤 무기들로 무장하고 있었는가? "그들은 검과 뭉치를 가지고" 왔다. 틀림없이 로마 군병들은 검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사장의 하속들, 즉 검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뭉치나 곤봉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Furor arma ministrat ─ 즉 그들의 분노는 그들의 무기를 대신하였다. 그들은 정규적인 군대는 아니었으며, 다만 소란한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왜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가? 그들의 숫자가 열 배가 더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순응하지 않으신다면 그를 붙잡을 수가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자신을 버리실 시간이 다 되었으므로, 실제로 이 군대들은 필요가 없었다. 짐승을 잡는 백정이 양을 도살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거나 무장을 하고 달려드는가?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군대는 하나님의 양을 잡기 위하여 동원되고 있다.
2. 그들은 누구의 보장을 받고 무장을 하였는가?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되었다." 이 무장된 무리들은 그들을 파송한 자의 심부름을 받고 왔다. 주님께서는 산헤드린 공의회의 미움을 받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고 거기에서 보내 구속영장에 의해 체포되셨다. 로마 총독인 빌라도는 그들에게 그를 수색하라는 영장을 발부하지 않았다. 즉 그는 그리스도를 질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를 구실 삼아 교회 일을 관장하는 자들로서 이러한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고 그리스도의 원수들 중에서 가장 사악한 무리들이었다. 그것은 그가 신적인 힘에 의해 지원을 받는다는 표식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적인 세력들에 의해 버림을 받고 거부를 당하였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그러한 권세로써 그를 비방하였다.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요 18:35).
Ⅲ. 그 일은 어떻게 행해졌으며, 그 때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1. 유다가 어떻게 그를 배신하였는가? 유다는 효과적으로 자신의 일을 수행하였으며, 이러한 사악한 일을 그가 결심한 것은 좋은 환경 가운데 있으면서도 실수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몇 가지로 살펴보면,
(1) 유다가 군병들에게 제시한 암호(48절). "그는 그들에게 군호를 짠 것"은 그들 제자들이 그를 위해 기꺼이 죽을 것이라고 조금 전에 말하는 것을 유다가 들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대신에 제자 중 한 사람을 실수하여 체포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를 놓치지 않으려는 세심한 배려를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자가 바로 그이니." 또한 그들이 그를 놓치지 않고 잡도록 하였다. "그를 잡으라."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4장 30절에 있는 것처럼 그를 안전하게 붙잡았다고 생각한 자들에게서 종종 피하셨기 때문이다. 성전을 자주 왕래하였던 유대인들도 그를 잘 알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로마 군병들은 더욱이 그를 보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군호가 주어진 것이다. 유다는 그들이 자기 뒤로 와서 그를 붙잡는 동안 그리스도에게 입을 맞춤으로써 그를 구별시키고 떼어놓으려고 하였다.
(2) 유다가 그의 주님에게 행한 위선적인 인사. 그는 예수님에게로 가까이 나왔다. 분명히 지금 그는 자신의 사악한 마음이 누그러졌을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보려고 가까이 왔을 때 그의 위험을 보고 놀라거나 그 아름다움에 이끌렸을 것이다. 그를 배신하기 위하여 그가 감히 그의 면전에 나타날 수 있을까?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했지만, "그가 돌이켜 그를 바라볼" 때 즉시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러나 유다는 그의 주님의 얼굴 앞으로 다가와서 그를 배신하고 있다. Me mihi (perfide) prodis? me mihi prodis? ─ 즉 불성실한 자여, 네가 나를 배신하느냐? 그는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라고 말하고 "입을 맞추었다." 아마도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잠시 여유를 주는 시간에 유다가 신을 배반하는 데 사용했던 입맞춤을 위하여 그들에게 뺨을 돌리셨던 것처럼 그의 제자들에게도 친밀감을 주기 위하여 그러한 것을 허락하셨을지도 모른다. 입맞춤은 신의와 우정의 표시이다(시 2:12). 그러나 유다는 자신이 사랑과 의무의 모든 법들을 깨뜨렸을 때 이 신성한 표식을 자신의 목적에 사용함으로써 더럽혔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입맞춤"으로써 또는 "주여,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를 영화롭게 한다고 하면서 그의 나라의 권익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Mel in ore, fel in corde ─ 즉 입에는 꿀, 마음에는 쓸개. katafilein ouk esti filein,─즉 포옹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Philo Judaeus 요압의 입맞춤과 유다의 입맞춤은 매우 유사하였다.
(3) 그의 주님은 그를 환대함(50절).
[1] 주님께서는 그를 "친구"라고 부르고 있다. 만일 그가 유다를 "악인"이나, "배신자," "라가," "미련한 놈," "마귀의 자식"이라고 부르신다고 그것이 그를 "잘못" 부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남에게 악한 말을 하지 말고 온유함을 보여 줄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계시다. "친구여"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이전에 친구였으며, 친구가 되어야 했으며 친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는 아브라함이 지옥에 있는 부자를 "아들"이라고 부른 것처럼 그를 책망하고 있다. 또한 그가 "친구여"라고 부르신 것은 유다가 자신의 고난을 촉진시켰으며 따라서 그를 "도왔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부르셨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고난을 방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2] 주님께서는 유다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가? 유다야, 화평을 주려고 왔는가? 네 스스로 설명해 보아라. 만일 네가 원수로서 왔다면, 이 입맞춤은 무엇을 뜻하느냐? 만일 친구로서 왔다면 이 검과 몽둥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느냐? 내가 너에게 어떤 해로움을 끼치더냐? 내가 너를 어떻게 피곤케 하더냐. eFV w pa,rei ─ 즉 네가 어찌하여 나타났느냐? 어찌하여 너는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나를 놓치지 않도록 감시함으로써 내가 있는 곳을 그들에게 알게 하느냐?" 그가 이러한 사악한 일에 앞장을 서고 또한 뻔뻔스럽게 나타난 것은 실로 파렴치한 일의 한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배교자들이 오히려 기독교에 대하여 가장 악랄한 원수가 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쥴리안(Julian)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유다는 자기가 할 일을 해치웠다.
2. 그 하속들과 군병들은 그를 어떻게 체포하였는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그들은 주님을 죄수로 만들었다. "그들은 얼마나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손을 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 야만스러운 무리들이 그리스도를 붙잡은 그 손이 얼마나 비열하고 잔인한 것이었는가를 쉽사리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잡으려고 할 때마다 종종 좌절을 당하였었기 때문에 그를 더욱 혹독하게 다루려고 했을 것이다. 그들은 주님 자신이 순응하지 않으셨다면 또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지 않았다면(행 2:23), 그를 체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의 기름 부은 종들에 관하여 "그들을 만지지 말며 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분(시 105:14, 15)은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주셨으며," 또한 "그 능력 된 자를 포로에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셨다"(시 78:61). 욥이 불평한 "하나님이 나를 경건치 않은 자에게 붙이셨다"(욥 16:11)는 구절을 살펴보고 그리스도의 모형인 욥을 그것과 다른 구절들에 적용시켜 보라.
우리 주 예수님은 죄수가 되셨다. 왜냐하면 그는 매사에 악행자로 취급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우리의 빛에 멍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의하여 주 예수님의 목에 매어졌다(애 1:14). 그가 죄수가 되신 것은 우리를 자유스럽게 하려 하심이다. 왜냐하면 그는 "만일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요 18:8)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자유롭게 하신 자는 참으로 자유롭게 되신다.
3.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떻게 싸웠으며, 또한 그의 노력은 어떻게 저지되었는가? 여기에서는 그가 단지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라고만 기록되고 있으나, 요한복음(18:10)에는 이 경우에 나섰던 것이 베드로라고 기록되어 있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베드로의 성급함(51절). "그는 검을 빼었다." 그들 제자들은 단지 두 개의 검을 가지고 있었는데(눅 22:38). 그것들 중의 하나는 아마도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베드로는 이 때야말로 그것을 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마치 자신이 어떤 큰 일을 행하려는 것처럼 주님을 위하여 맹렬히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이라고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것뿐이었다. 아마도 베드로는 그 종이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서서 주님을 붙잡았기 때문에 그의 목을 베려고 한 것이 잘못 내리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만일 베드로가 칼을 내리치려고 했다면 아마 내 생각으로는 오히려 유다를 목표로 했을 것이며, 또한 그를 무뢰한으로 주시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그의 주님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며, "그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도 버릴 수 있다"고 장담을 하였다.. 그렇다. 그는 하려고 하였다. 지금 그는 자신의 말과 같이 자신의 생명을 주인을 위해 감히 바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가 그리스도와 그의 명예와 안전을 위하여 큰 "열심"을 가졌던 것은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에 따른" 것이거나 또는 신중하게 행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1] 베드로는 그 일을 허락을 받지 않고 행하였다. 제자들 중의 어떤 사람은 실제로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눅 22:49)라고 물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대답을 듣기 전에 칼을 휘둘렀다. 우리는 검을 빼들기 전에 우리의 동기가 선한 것인가, 우리의 요구가 분명한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무슨 권세로 그 일을 하며 또한 누가 그것을 주었는가를 나타내 보여 주어야만 한다.
[2] 베드로는 무분별하게 그 자신과 동료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들의 격분을 사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두 자루의 검만을 가지고 그 일단의 무리들과 어떻게 싸우겠다는 것인가?
(2) 우리 주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책망(52절).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주님께서는 그 하속들과 군병들에게 자신을 대적하기 위하여 빼어든 검을 도로 집어넣을 것을 명령하고 있지 않으시며 그들을 외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계시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의 검을 다시 집어넣을 것을 명령하고 계시며, 그가 행할 일에 대하여 참으로 책망하시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한 뜻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님은 그의 무기를 더 이상 사용할 것을 금지시키시고 다시 꺼냈던 그 칼집으로 집어넣을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들어오신 것은 화평케 하고자 함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며,"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비록 그들이 그의 군병이라고 할지라도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다"(고후 10:3, 4)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자연법이나 국가법을 폐기시키지 않는데, 그러한 권리는 단지 인권이나 자유를 보호할 목적이나 또는 종교(위의 것들과 섞이지 않을 때)를 수호할 목적이 있을 때에 한한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법은 일개인(qua tales - 즉 이와 같은 사람)이 권세를 저항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공적인 평화와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 마련되고 있다. 아니, 우리는 "악한 것을 대적하지 말라"(마 5:39)는 보편적인 규율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종교를 무기의 힘으로 전파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Religio cogi non potest; et defendenda non occidendo ─ 즉 종교는 억지로 강요될 수 없다. 또한 그것은 죽임으로써(by killing)가 아닌, 죽음으로써(by dying) 지켜져야만 한다(Lactantii Institut).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권세의 검을 금하셨으며(마 20:25, 21), 여기에서도 전쟁의 검을 금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그의 검을 집어넣을 것을 명하셨다. 그러나 그가 다시 그것을 꺼낼 것을 명령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베드로가 여기에서 책망들은 것은 그가 그 일을 무분별하게 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아 죽으실 시간이 가까웠으며,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그것을 알고 있음을 잘 아셨다. "여호와의 검은 그를 치기 위하여 꺼내어졌다"(슥 13:7).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검을 꺼낸 것은 "주여, 그리 마옵소서"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이와 같이 책망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베드로가 자신의 검을 뺀 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동료들에게 위험한 것이 될 것이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은 폭력에 의해 넘어질 것이며 또한 사람들은 피비린내나는 자기 보호의 방법에 의해 자신의 고통들을 재촉하고 증가시킬 것이다. 칼이 주어지기 전에 그것을 잡는 자는 즉 어떤 명령이나 사명 없이 칼을 쓰는 자는 전쟁이나 권력의 검에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위험하게 된다). 주 예수님의 특별하신 배려와 섭리가 없었더라면, 내 생각으로는 즉시로 산산조각이 되었을 것이다. 그로티우스는 여기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데, 즉 검으로 망할 것이라는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잡으려고" 검을 가지고 왔던 하속들과 군병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검으로 망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야, 너는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네 검을 뺄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머지않아, 엄격하게 그들을 청산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붙잡기 위하여 로마인의 검을 사용하였으며, 또한 로마인의 검으로 말미암아 머지 않아 그들과 그들의 거주지와 국가는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우리는 "친히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기"(롬 12:19)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고통을 이겨내어야 한다. 왜냐하면 박해자들은 자신의 보응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계 13:10 참조).
[2] 베드로가 그의 주인을 방어하기 위하여 검을 빼는 것은 쓸 데 없는 일이다. 그는 만일 원하신다면 모든 천군 천사들을 호출하실 수 있으시다(53절).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하늘의 막강한 후원자들을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베드로야, 만일 내가 이 고난들을 피하려고 한다면 네 손이나 네 검이 없이도 쉽사리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이나 봉사, 또는 우리의 범죄(역주 :유다의 예)가 없이도 자신의 목적을 수행할 수 있으시다. 우리가 주님을 봉사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력을 불신하거나 믿지 않는 것임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어도 자신의 일을 수행하신다. 만일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고 그가 거기에서 얼마나 섬김을 받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쉽사리 "비록 우리가 의로울지라도" 그는 우리에게 신세를 지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욥 35:5, 7).
그리스도께서는 연약함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그것은 자발적인 연약성이었다. 그가 죽음에 순응하신 것은 그가 어쩔 수 없었으므로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다투지(둘레지)않으시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거침돌을 제거하며, 또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심을 입증한다. 그가 깊은 고난 중에 있는 지금에도 그는 천군 천사들의 도움을 요청할 수가 있으시다. "지금," arti ─ 즉 지금도, "비록 그 직무는 멀리 멀어져 있지만, 나는 상황을 일변시킬 수 있는 말을 발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하고 계신다.
첫째, 주님께서는 그의 아버지께 대하여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가? "나는 아버지께 구할 수 있으며 그는 성소로부터 나를 도우러 보내실 것이다." 나는 parakalesai ─즉 내 아버지께 이러한 후원자를 요구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권세 있는 자와 같이" 기도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방에서 원수들에게 에워쌈을 당하게 될 때 그들에게 하늘로 향하는 길이 열려져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그들은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그에게 기도할 수 있다. 항시 기도를 많이 하는 자는 고통의 때가 올 때에 기도함으로써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그에게 이러한 많은 천사들을 보내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만일 그가 그것을 구하신다면 그것을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우리의 구속의 일을 짊어지셨지만, 만일 그가 해방되기를 원하셨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를 도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이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임무에서 해방되실 수도 있으셨지만,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셨으며 그렇게 하려고 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줄로 제단에 묶이셨다.
둘째, 주님께서는 천군 천사들에 대하여 어떤 관심을 가지고 계셨는가? "그는 지금 열두 영(약 72,000명)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실 수 있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수많은 천사들의 무리"(히 12:22)가 있다. 열두 영 더 되는 지대는 우리를 봉사하기 위하여 예비 되어 있으며 또한 보좌 주위에 둘러 서 있는 그들에게는 하등의 오류도 없게 될 것이다(단 7:10). 그들은 잘 훈련된 군대들처럼 정확한 규율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며, 그들은 오합지졸이 아니라 정규군대들인 것이다. 각자는 자신들의 위치를 알며 명령을 준수한다.
2. 이 허다한 천사들의 무리는 모두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배치되어 있으며 또한 그의 기뻐하시는 것을 행한다(시 103:21)
3. 이러한 천사들의 무리는 만일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시거나 원하신다면 그를 도우러 올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히 1:6, 14 참조). 그들은 엘리사에게 "불병거와 불말"이 되었던 것처럼 주님에게도 그러한 것이 되어 그를 보호하고 또한 그를 핍박한 자들을 불사를 수 있다.
4.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천군 천사들의 모든 봉사에 있어서 그들이 바라보는 대상이 되시며 인정함을 받으신다. "그는 그들을 나에게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듣는 이는 천사가 아니라 천사들의 주님이시다(시 91:11).
5. 주 예수님, 봉사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천사들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매우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하늘의 군대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자는 "땅의 거민들" 가운데서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다. 그는 "지금" 그들을 나에게 보내실 수 있다. 아버지께서, 기도를 들으실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살펴 보라. 그들은 자발적인 종들이며, 날개 달린 천사들이며, "빨리 날아간다." 이것은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영예와 그의 교회의 부귀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큰 위로를 준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이 가진 것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3] 그 때는 어떤 저항을 하거나 또는 그러한 싸움을 피하거나 할 때가 아니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54절). 그리스도께서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사 53:7). 만일 주님께서 자신을 도울 천사들을 호출하셨다면 도수장으로 끌려가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만일 그가 제자들이 싸우는 것을 허용하셨다면, 양과 같이 항거하지 않고 잠잠히 끌려가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그의 제자들은 예언의 성취에 순응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모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의 계획을 종결시켜 주는 것이 되어야만 하며, 또한 성경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가로막는 그 어떤 일도 행해지거나 시도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의 고통을 쉽게 하고 우리의 속박을 깨뜨리며,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성경 말씀의 성취와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이루어지며, 그의 법이 우리들에게는 어떠하든지간에 고귀하고 영화롭게 될지어다"라고 말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비대장으로 자처하고 일어났을 때 그를 저지하셨다.
4.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잡으러 온 자들과 더불어 변론을 하고 계시다(55절).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저항하시지 않으셨지만, 그들과 더불어 이치를 따지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윗이 사울에게 한 것처럼(삼상 24:14; 26:18)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우리의 원수들이나 박해자들을 조용히 설득시키는 것은 기독자의 인내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1) "너희는 나를 강도를 잡는 것처럼," 마치 내가 공공질서를 파괴시킴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하는 원수처럼 분노와 살기가 등등하여 "잡으러 가느냐?" 강도들은 실로 공통적으로 악평을 받을 만하다. 모든 사람들은 강도를 막는 데 힘을 다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그리스도를 만물의 찌꺼기로 여겼던 것이다. 만일 그가 그의 나라의 말썽꾸러기(the pague)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난폭하게 붙잡히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2) "너희가" 법을 어기고 권세를 무시하고 반역죄를 저지른 가장 사악한 강도를 잡으려는 것처럼 이러한 권세와 군대를 동원하여 "나를 잡으려고 왔느냐?" 너희는 마치 저항할 위험이 있는 것처럼 검과 몽치를 가지고 강도를 잡는 것처럼 왔도다. 한편 너희는 "옳은 자를 죽였도다. 그러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않았도다."(약 5:6). 만일 그가 기꺼이 고난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온 것"은 실로 어리석기 한이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도저히 그를 정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저항할 마음을 가지셨다면, 그는 그들의 쇠붙이를 한낮 지푸라기로, 그들의 검과 몽둥이를 소멸하는 불 앞의 가시나무처럼 여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기꺼이 고난을 받으려고 하셨으므로 그들이 이와 같이 무장하고 나온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처신해 왔으며 또한 그들은 그에게 어떤 행동을 해왔는가를 회상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충고를 하고 계신다.
[1] 그의 공공연한 출현에 대하여.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또한
[2] 그들의 공공연한 묵인에 대하여.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면 이러한 변화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대하는 데 있어서 매우 무분별하였다.
첫째,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를 강도로 여길 만한 동기를 제시한 일이 없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성전에서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의 가르치심이나 또한 그의 가르치심의 태도는 이러하였기 때문에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를 악한 사람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러한 은혜로운 말씀들은 강도의 말이나 귀신들린 자의 말들은 아니었다.
둘째,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에 자신을 잡으러 올만큼 그가 몰래 도주해버릴 자로 여김을 받을 만한 동기를 제시한 일이 없으셨다. 만일 그들이 그에게 말한 것이 있었다면 언제나 모든 도전들과 비난에 대응할 태세를 가지고 있는 그를 언제나 성전에서 찾을 수가 있었을 것이며, 또한 그들은 거기에서 자신들이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성전을 관리하고 있었으며 거기에 있는 호위병들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께서 한적한 곳에 물러나 계셨을 때 이와 같이 은밀하게 그를 찾아 온 것은 실로 비겁한 행동이었다. 그리하여 가장 위대하신 영웅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얼굴을 바라보기를 두려워한 자에 의하여 구석에서 악랄하게 암살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56절). 이것들이 이 이야기에 대한 주해로써 경건한 역사가의 말들인지, 아니면 그것을 지적하는 곳을 구약 성경에서 찾아 이것과 비교하라고 기독자에게 지시하신 것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가 이러한 야비한 취급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방금 자신에 대해 언급하신 선지자들의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54절) 그것에 순응하신 이유로써 말씀하신 것인지 말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경 말씀은 날마다 성취되며 또한 메시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러한 모든 성경 말씀들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사실이다.
5. 주님께서는 이러한 고통 중에서 어떻게 수치스럽게 그의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으셨는가?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56절).
(1) 이것은 그들의 큰 잘못이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던 그들이 이제 와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그를 버린 것이야말로 실로 큰 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주님과의 관계로 보나 그에게서 받은 호의로 보나 그가 지금 처해 있는 비참한 처지를 보더라도 그것은 매우 불친절한 일이었다. 또한 그것은 매우 충성치 못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엄숙하게 그를 따를 것과 또한 결코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의 안전한 행동을 부탁하셨다(요 18:8). 그러나 그 제자들은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으며, 불명예스럽게도 도망가고 말았던 것이다. 죽는 것이 두려워 그들 자신이 "생명의 근원"(요 6:67, 68)임을 알고 있었고 또한 인정하였던 분에게서 도망가버린 이 사실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주여, 사람이 무엇입니까?"
(2) 이와 같이 주님께서 버림을 받으신 것은 그의 고난의 일부분이었으며, 그의 쇠사슬의 고통을 더 하여 주었다. 이것은 마치 욥에게 한 것과 같다. 즉 "그가 나의 형제들로 나를 떠나게 하셨다"(욥 19:13). 또한 다윗에게 한 것과 같으니,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 하였나이다"(시 38:11). 그들은 주님을 보좌하고 그를 후원하기 위하여 그와 함께 머물렀으며 또한 유사시에는 그가 시련을 당할 때 증인이 되려고 그와 함께 머물렀다. 그러나 그들은 패역스럽게도 그를 버렸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첫번째 대답할 때 아무도 그와 함께 있지 않았다"고 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신비적인 것이 있었다.
[1]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버림을 받으셨다. 사냥하기 위해 소유자의 화살이 겨누어진 사슴은 즉시로 모든 목자에 의해 버림을 받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사악한 자로 버림을 받으셨다.
[2] 영혼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놓자가 되셨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어떤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도움을 받지 않으셨다. 그는 모든 것을 참으셨으며, 또한 그 자신이 모든 것을 담당하셨다. 그는 혼자서 포도즙 틀을 밟으셨으며, 또한 "붙들어 주는 자가 없을 때 그 자신의 팔이 구원을 이루셨다"(사 63:3, 5).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홀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으며, 또한 그들은 "가만히 서서 이 큰 구원을 바라보기만 하였다'(신 32:12).
대제사장의 집에 끌려가신 그리스도 (마태복음 26:57-68)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주 예수님이 교회 법정인 산헤드린 대공의회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Ⅰ. 재판관이 입석 함. 사람들이 잠자리에서 곤히 잠든 깊은 밤중이었지만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함께 모여 있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들의 사악함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스스로 육신적인 휴식을 거절하였으며 또한 온 밤을 지새우면서 유다와 그의 부하들이 "잡아다" 줄 미끼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모여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훌륭한 교사인 "서기관들"과 유대교회이 주요 통치자인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우리의 가장 위대하신 교사이며 통치자이신 그리스도를 가장 악랄하게 괴롭히는 원수들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주님이 그들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 자인 것처럼 그를 몹시 시기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 서기관들과 장로들 중의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에 대해 악한 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행동을 일치하기 위하여 그들은 스스로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이제 "악한 무리가 나를 에워쌌나이다"(시 22:16)라는 성경 말씀은 성취가 되었다. 예레미야는 반역자의 무리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또한 다윗은 "그를 치기 위하여 함께 모여 있는 원수들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시 35:15).
2. 그들은 어디에서 모였는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모였다. 그들은 음모를 꾸미기 위하여 이틀 전에 그 곳에 모였으며(3절) 이제는 그것을 실행하기 위하여 다시 소집을 하였다. "대제사장"은 Ab-beth-din ─즉 재판소의 아버지었지만, 그는 지금 사악한 것을 보호하는 자가 되어 있다. 그의 집은 무고히 압제 당하는 자의 거룩한 장소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법의 보좌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굴혈이 된 것에 비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못된다.
Ⅱ. 죄수가 법정에 세워짐. "예수를 붙잡은" 자들은 "그를 끌고," 의심할 여지없이 강제로 그를 이끌고 그들이 승리의 트로피처럼, 제단에 바칠 희생 제물처럼, 이끌어 갔다. 그는 "양문"이라고 불리운 곳을 통하여 예루살으로 인도되어 왔다. 왜냐하면 문은 감람산으로부터 성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였기 때문이었다. 그 문이 양의 문이라고 불리운 것은 희생 제물로 지정된 양이 그 통로를 거쳐 성전으로 데려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 죄를 없이하실 하나님의 어린양이 그 통로로 인도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는 먼저 대제사장에게로 인도되었다. 왜냐하면 율법적으로 모든 희생제물들은 먼저 "제사장에게로 끌고 와서 그의 손에 넘겨져야만" 하기 때문이다(레 17:5).
Ⅲ. 베드로의 비겁함과 연약한 마음(58절). "그러나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를 쫓았다." 이 사실에 여기에 기록된 것은 그가 주님을 부인하는 이야기를 다음에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주님이 붙잡히셨을 때 다른 나머지 제자들처럼 그를 버렸다. 여기에 그가 주님을 따랐다고 말해진 것은 그를 버린 사실과 벗어나게 조화가 된다. 이렇게 따르는 것은 그를 버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왜냐하면,
1. 그는 주님을 따랐지만 "멀찍이" 따랐기 때문이다. 그의 주님께 대한 사랑과 관심이 어느 정도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를 뒤따랐다. 그러나 오히려 그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두려움이 더욱 앞섰기 때문에 그는 멀찍이 그를 뒤따랐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자들이 그러한 자로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며 또한 천망이 흐리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부인은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그를 멀찍이 따르는 것은 점점 그에게서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서거나 뒤를 돌아다보는 것은 위험하다.
2. 베드로는 주님을 따랐지만,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기" 때문이다. 그는 마땅히 뜰로 가서 그의 주인에게로 나아가 그에게 나타났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좋은 불이 있는 곳에 가서 종들과 함께 앉아 그들의 비난을 일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숨겼다. 이것은 베드로를 유혹에로 밀어 놓은 동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호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자신을 따를 수 없다고 말씀하셨으며 특별히 "오늘밤" 그의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사악한 패거리들 가운데 들어가려고 하였다. 다윗이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악인과 더불어 앉지 않은 것"은 자신의 고결성을 지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3. 베드로는 주님을 따랐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결국을 보기 위한"것이며 그의 양심에 의한 것보다는 호기심에 이끌려 뒤따른 것이었다. 그는 제자로서보다는 오히려 느릿느릿한 관찰자로서 뒤 따라 온 것이다. 베드로는 마땅히 그리스도에게 어떤 일을 해드리거나 또는 그가 고난 중에 어떻게 처신하는가를 직접 목격함으로써 그 자신이 어떤 지혜나 은혜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안으로 들어갔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지 그를 구경하기 위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이적적으로 그의 핍박자의 손에서부터 빠져나와 도망가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아 보인다. 가지 그리스도께서는 방금 그를 잡으러온 자들을 때려눕히신 다음 심판석에 앉아 잇는 자들을 죽도록 때려 주기를 기대하였으며 그는 이것을 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신 것보다 다른 어떤 결국(end)을 보려고 생각한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그 결국이 어떻게 되었든지간에 그것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의심스럽게 묻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준비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 일은 하나님에게 그 의무는 우리에게 있다.(역주:모사재인, 성사재천)
Ⅳ. 그리스도께서 이 뜰(법정)에서 심문 받으심.
1. 비록 그들은 옳든지 그르든지간에 그를 정죄하기로 이미 결심이 되었지만, 그를 거스릴 증거를 심리하였다. 그것을 한층 더 강조하기 위하여 그들은 그를 정죄할 증거를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들의 법정에서 적당히 납득할 수 있을 만큼 날조한 죄목은 거짓 교훈과 모독한 죄였다. 그들은 이것을 그에 대한 증거로 포착하려고 애썼다. 여기에서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들이 증거를 포착하려고 함. "그들이 그를 칠 증거를 찾으매." 그들은 그를 붙잡아 묵고 때렸으며, 마침내는 그를 고소할 어떤 구실을 찾았으나 그에게 해당되는 죄목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아는 지식으로 그를 칠 증거를 그럴듯하게 꾸며대기를 고대하였다. 또한 그들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그를 중상할 자를 모색하였으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생명을 없애버릴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는 것"이다(잠 16:27). 여기에서 그들은 "예레미야를 칠 계획을 꾸몄던"(렘 18:18; 20:10) 그들의 조상들의 전철을 밟았던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법정에 있는 죄수를 거스릴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선포하였으며 또한 즉각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제공하였다(60절). 만일 "관원이 거짓말을 신청하면 그 하인은 다 악하며" 또한 그에게 거짓된 이야기를 가져 올 것이다(잠 29:12). 이것은 아래서 종종 찾아 볼 수 있는 악이다(전 10:5). 만일 나봇이 제거되어야만 한다면 그를 치려고 맹세한 벨리알의 아들이 있다.
(2) 그들이 드디어 거짓 증인을 찾는 데 성공함. 그들이 여러 번 시도를 해보았으나 실패하였으며, 그들 가운데서 거짓 증인들을 찾았다. 몇 사람이 그들을 도우려고 왔으나 그들은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증거를 찾을 수 없었으며, 또한 그것과 일치되는 어떤 참된 진리의 색채를 첨가할 수도 없었다. 아니 심판관인 그들 자신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진술된 사실들은 논박하기 위해 자신들이 궁리한 곧 거짓임이 드러날 거짓말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그를 모욕하고 있는 지금에 오히려 그리스도의 존귀를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은 "두 사람"의 증인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증인들은 아마도 그들의 증거와 합치되었으며 따라서 바로 그 요점이 얻어지기를 기대하면서 경청되었던 것 같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칠 증거로 제시한 것은 그가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61절). 이것으로써 그들은 그를 고소하려고 했는데, 그 내용은,
[1] 그가 성전에 대한 원수이며, 또한 그것을 파괴하려고 애쓰는 자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듣고 그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전"을 가치 있게 여겼으며 또한 그들이 다른 우상들을 저버렸을 때, 그들은 성전을 완전한 우상으로 삼았다. 스데반은 "이 거룩한 곳을 거스려 말한 죄목으로 고소를 당하였다"(6:13, 14).
[2] 그는 마술을 행하거나 이러한 부당한 요술을 부리는 자로서, 이것에 힘입어 삼일 안에 이러한 성전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종종 그가 바알세불과 연합한 자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하여,
첫째, 그 말들은 잘못 인용된 것들이었다. 그는 "이 성전을 헐라"(요 2:19)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분명히 그의 원수들이 파괴하려고 하는 성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들은 나아와서 또한 그가 마치 성전을 파괴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 성전을 "내가 파괴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맹세를 하였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삼일만에 그것을 일으키리라." - egerw auto.n ─ 이 말씀은 살아있는 성전에 대해 적절하게 사용된 말씀이다. 즉, "내가 그 성전을 소성 시킬 것이다." 그들은 나아와서, 그가 말하기를 oivkodomhsai ─ 즉 내가 그것을 세울 수 있다고 하였다고 서약하였다. 이 말은 성전 건물에 대해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다.
둘째, 그 말씀들은 잘못 이해되었다. "그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요 2:21). 아마도 그는 "이 성전"을 말씀하실 때에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키시거나 만지셨을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이 거룩한 장소인 "하나님의 성전"을 말씀하였다고 서약하여 말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 자들이 있었으며 또한 지금도 있다는 사실이다(벧후 3:16).
셋째, 아무리 그들이 노력을 해 보았지만 그들 자신의 율법으로도 그것은 그렇게 큰 죄가 못되었다. 만일 그것이 그렇게 큰 죄였다면, 그가 몇 해 전에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말씀하실 때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야만 했을 것이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아니, 그 말씀들은 칭찬 받을 만한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또한 이와 같은 것은 성전에 대한 호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만일 그 성전이 파괴되었다면, 그는 끝까지 그것을 다시 세우실 것이다. 그러나 범죄로 보여진 어떤 것은 그들의 사악한 일을 수행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위증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하나이다"(시 27:12)는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다. 또한 시편 35편 11절을 보라. "내가 저희를 구속하려 하나 저희가 나를 거스려 거짓을 말하였다"(호 7:13). 우리는 당연히 고소를 당하는 상태에 있으며, 율법은 "우리를 고소하고 있다"(신 27:26; 요 5:45). 사탄과 우리 자신의 양심은 우리를 고소하고 있으며(요일 3:20), 피조물들도 우리를 거스려 부르짖고 있다.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모든 고소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에 순응하심으로써 부당하게 그리고 거짓되게 고소를 당하셨다. 그의 고난을 힘입어 우리는 모든 도전에 대해 승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롬 8:33, 34). 그가 고소 당하신 것은 정죄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일 어느 때에 우리가 이와 같이 고난을 당한다면 즉 갖은 악한 말로 "우리를 욕하고 거스려 말한다고"한다면, 우리는 우리 주님보다도 더 좋은 대우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3) 그리스도께서는 재판관들이 놀라워할 정도로 이러한 고소 사실에 대해 침묵을 지키심(62절). 재판관인 대제사장은 열을 올리며 일어나사 말하기를, "아무 대답도 없느냐? 법정에 선 너 죄수여, 나오라. 너는 너를 거스려 말하는 고소를 들었는데, 너는 그 점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겠느냐? 너는 어떤 변호를 할 수 있는가? 이러한 고소에 대해 너는 무엇이라고 변명할 것인가?" 그러나 예수님께서 "잠잠하신 것'(63절)은 그가 우울하시거나 또는 정죄를 받거나, 놀라거나 혼동이 되셨기 때문이 아니며, 또한 그가 어떤 것을 말하기를 원하거나 그것을 말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했기 때문이다(사 53:7). "털 깎는 자"나 도살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는 그가 다윗의 후손이 되기 위함인데, 다윗은 그의 원수들이 그를 거스려 사악한 말을 할 때에 "그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였다"(시 38:12-14). 그가 잠잠하신 것은, "그의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가 그 고소를 부인하려고 하지 않으신 것은, 그 판결에 기꺼이 순종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전에도 여러 번 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그들을 쉽게 잠잠케 하거나 수치스럽게 할 수 있으셨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유구무언"(마 22:12)이 될 것이며,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욥 9:3).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죄인이 되셨을 때," 그는 잠잠하셨으며 또한 그의 피가 그것을 말하도록 내버려두셨다(히 12:24). 그가 이 재판장에서 잠잠하게 서 계셨던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재판정에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방법은 좋지 않다. 즉 aal aggrendum est via ─ 즉 의뢰(recourse)는 다른 사람에게 방편(expedient)이 되어서는 안 된다.
2. 그들은 우리 주 예수님을 exofficio(직권에 의한)와 같은 서약에 근거하여 심문하였다. 또한 그들은 그를 고소할 수 없었으므로, 공평의 법과는 어긋나게 주님이 그 자신을 고소하도록 노력하였다.
(1) 대제사장이 그리스도에게 질문을 함.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질문 그 자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즉 "너는 그런 사람인 것처럼 자처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실제로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위로"이셨으며, 구약에서 그에 대하여 영광스러운 일들이 언급되었지만, 그들은 이상하게도 자신들의 부당한 권력과 위엄을 위협하는 어떤 것에 대해 질투심을 가지고 완전히 이에 미쳐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조사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가 혹 메시야인가를 한 번 이라도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 자신이 그렇게 부르기를 원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를 사기꾼으로 고발하려고 했던 것이다. 자만이나 사악은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가?
[2] 그 사실을 엄숙하게 제의함.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그것은 대제사장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하여 관심을 가지셨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것에 불과하다. 다만 이와 같이 함으로서 그는 주 예수님에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게 되기를 원하였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고 그의 위엄에 대해 존경을 한다면, 우리들에게 이것들을 말하라."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말에 답변하기를 거절하셨다면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한다고 고소를 하려고 하였다. 선한 사람들은 박해하는 자들은 다니엘의 원수들이 그의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그를 거스려 행하였던 것처럼, 종종 자신들의 양심에 의해 그들을 거스리도록 한다.
(2)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64절).
[1] 주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고 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즉 "네가 말한 것과 같다." 마가복음에서는 "내가 그니라"고 되어 있다. 지금까지 그는 드물게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교훈의 취지가 그것을 나타내었고, 그의 이적 기사가 그것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밝히 나타내려고 하셨다. 그 이유는,
첫째, 그것이 자신이 세상에 증거 하러 오신 진리를 부인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이 그의 고난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인데, 그 때에 주님은 이러한 것이 그를 거스리려고 하는 원수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주님께서 이와 같이 하신 것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사람 앞에서 그를 시인하도록" 불리움을 받았을 때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용기를 내게 함과 동시에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모본을 따라 그들은 더베의 순교자들(Euseb. Hist. 1.8, c.9)처럼, 주님을 고백하는 것을 인하여 그들이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기독자임을 쉽사리 고백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가야바가 모독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용하면서 맹세하여 질문한 것에 대해 무관심한 채로 대답하신 것은,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단지 마귀의 입에서 나오는 맹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막 5:7).
[2] 주님께서는 이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의 재림과 그의 완전하신 승귀의 신분을 말씀하고 계시다. 아마도 그들은 주님께서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조롱 섞인 불쾌한 미소로 바라보면서 "보무당당하게 위엄과 권세를 갖추시고 오실 것으로 기대되는 메시야와 흡사해 보이는 하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이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가 지금 이 낮고 비천한 신분 가운데 있는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자신을 메시야라고 부르는 것이 어리석은 일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른 신분으로 나타날 때가 가까이 이르고 있다"
"이후에, avpV a;rti modo ─ 즉 머지 않아 곧." 왜냐하면 그의 승귀는 며칠 안에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급속도로 그의 나라는 세워지기 시작하였는가 ! "이 후에 인자가 심판하기 위하여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을 너희가 보게 되리라." 유대 민족은 그가 머지 않아 오셔서 심판하시고 파괴하는 일에 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심판날의 두려움은 가장 완고한 불신자에게 느낄 수 있는 깨달음이 될 것인데, 이는 회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그 때는 회심하기에 너무 늦은 시기이다) 영원한 멸망을 위한 것이다.
첫째, 그들은 누구를 보게 될 것인가? 그들은 "인자"를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비천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시인하시면서, 또한 승귀의 신분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말씀하고 계시다. 왜냐하면 그는 한 인격 안에 두 개의 다른 신분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인자)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시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인가?
1. 메시야에 대한 예언(시 110:1), 즉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는 말씀대로 그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장차 높임을 받게 될 위엄과 지배를 나타낸다. 비록 그가 지금은 법정에 서 있지만, 그들은 머지 앉아 그가 심판 보좌에 앉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2.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게 될"것이다. 이것은 "인자"에 관한 또 다른 예언(단 7:13, 14)을 말하고 있는데, 이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멸망하러 오셨을 때 그에 대하여 적용되고 있다(눅 1:33). 그 심판이 매우 무서운 것이며, 거기에 있는 어린양의 진노의 표시가 매우 감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시적(visivle)인 현현"이라고 불리워질 수도 이을 것이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일반적인 심판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이 심판 날에 그는 그들을 자기 앞으로 나오게 하여, 현재 그들이 하는 것에 대해 보응을 하실 것이다. 그는 조금전에 그의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 심판 날에 대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며 또한 그것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면서 "그들의 머리를 들라"(눅 21:27, 28)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는 그의 원수들을 두렵게 하기 위하여 심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보다 더 의인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도 없으며, 또한 악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Ⅴ. 이 심문에서 그에게 유죄를 인정함. "이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목격하거나 그러한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이 흔히 하는 습관에 의한 것이다(사 36:22; 37:1; 행 14:14). 가야바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생각하였을 것이다("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한 그의 열심을 보라").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처럼 행세하였지만, 실제로 그는 가장 큰 모독자였던 것이다. 그는 지금 만일 우리가 이것이 예외의 경우라고 상상하지 않는다면 여하한 경우에도 대제사장이 자신의 옷을 찢지 말 것을 명시한 율법을 망각하고 말았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를 유죄로 인정한 죄목은 "참람한 말"이었다.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도다." 즉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하여 모독적으로 말하였도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모독이란 말에 대한 개념이다. 우리는 범죄함으로써 주님을 비난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우리를 위해 범죄한 것으로 여겨지셨을" 때 그가 그들에게 말한 진리에 대한 모독자로 정죄가 되었다.
그들이 그를 유죄라고 단정한 증거.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우리가 더 이상 "증거"를 포착하려고 애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주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했던 사실을 인정하셨으며, 그들은 그것을 모독하는 죄로 여기고 이것에 근거하여 그를 유죄로 단정하였다. 대제사장은 그가 설치해 놓은 덫이 성공한 데 대하여 승리의 개가를 불렀다. "지금 나는 내가 그에 대한 용건을 다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그들의 재판정에서 "그 자신의 입으로 하신 말씀에 의해 심판을 받으셨다. 우리도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는 우리를 거스릴 증인들이 필요가 없다. 우리 자신의 양심들이 수천의 증인들을 대신하여 우리를 고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Ⅵ. 이 유죄에 근거하여 그에게 내려진 선고(66절). 여기에 보면,
1. 가야바가 배석한 판사들에게 질문함. "생각이 어떠하뇨?" 그의 비열한 외식과 편견성을 보라. 그는 조급한 결정을 내렸으며 그리스도를 모독한 자로 판결을 했었지만, 그 때에 그는 자신이 충고를 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그의 동료 판사들의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간사하게도 자신의 악한 생각을 공의라는 허울 속에 감추어 두었지만 언젠가는 그것이 깨어지게 될 것이다. 만일 그가 공평하게 판결을 하려고 했다면, 그는 마땅히 "순서대로"(seriatim)판사들의 의견을 모으고, 배심원들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의 권세로 말미암아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완전히 묵살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자신의 판결을 내렸으며, 그들도 자신의 마음과 같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시인하신 것"(pro confesso)을 유죄로 인정하고 있는데, 재판정에서는 "일치된 판결"(pro concesso)이 있을 때 그것을 유죄로 인정한다.
2. 그들이 대제사장의 의견에 동의함. 그들은 "저가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아리마대 요셉이 거기에 참석했더라면 그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며(눅 23:51), 또한 니고데모도 그리했을 것이며, 그밖에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어쨌든 대다수가 대제사장의 의견과 동일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비상회의이든지 또는 비밀회의였으므로 이에 동조하지 않을 것으로 그들이 알고 있던 자들로 하여금 이 회의가 소집되는 것을 모르게 하였으며, 따라서 이 일은 "만장일치로"(nemine contradicente) 가결되었을 것이다. 그 판결은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율법적으로 그는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비록 그들은 사형을 시킬 권세를 지금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이와 같은 판결로써 그들은 그를 "사회에서 버림받은 무법자"로 만들어 버렸다(qui caput gerit lupinum ─ 즉 그는 이리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고대법은 무법자를 그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를 스데반의 경우와 같이 격분한 군중들의 소란의 와중에 내놓았으며, 또한 통치자 앞에 억지로 끌고 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의 주님께서는 죽을자로 정죄를 받으셨는데, 이는 그를 통하여 "우리가 정죄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Ⅶ. 그 판결이 내려진 후 주님에게 가해진 온갖 능욕과 모독(67, 68절). 그가 유죄로 판결이 난 그때, 그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를 사형시킬 권한이 없었으며 또한 그들이 집행자인 로마 총독을 설득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으므로 그들이 그리스도를 일단 손아귀에 넣은 지금에 있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해악을 그에게 입히려고 하였다. 정죄받은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법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으므로 안전하며, 또한 모든 문명 국가는 부드럽게 그들을 대하여 왔다. 이 형벌도 그렇게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주 예수님에게 판결을 내렸을 때 마치 지옥이 그에게로 터져 나온 것처럼, 그는 "사형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것이 그에게는 마땅한 것이며 또한 그는 가장 사악한 사형자들에게 보여지는 동정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처럼 혹독한 취급을 받으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다." 이렇게 야만스러운 행동을 했던 자들은 누구였던가? 아마도 그에게 판결을 내렸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제사장들이 먼저 이 일을 행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놀리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하며 악한 주인에게 좋게 보이려고 하는 종들이 그에 대하여 조롱을 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그를 혹사하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그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이로써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는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다. 욥은 그에게 행해진 이러한 모욕에 대해 불평을 하였는데, 여기에 그리스도의 한 전형이 있었다(욥 30:10). "내 얼굴에 침 뱉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침 뱉는 것은 가장 큰 멸시와 모욕의 표현이다. 즉 이것은 그들이 침을 뱉는 땅보다 더 하찮은 존재로 그를 여겼던 것이다.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렸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것(민 12:14)과 같이 그녀에 대해 모욕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자기의 형제의 후사를 남겨 주려고 하지 않는 자는 이러한 수치를 당하도록 되어 있었다(신 25: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인류의 대가족의 썩은 부분을 고치려고 하셨을 때 순응을 하셨다. "사람의 자녀들보다 더 고왔던" 얼굴, 즉 "희고도 혈색이 좋은" 얼굴, 천사도 흠모하는 얼굴이 가장 사악하고 비열한 사람들의 자녀들에 의해 이와 같이 더럽혀졌다. 그의 얼굴에 이와 같이 더러운 것들이 쏟아졌던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수치와 멸시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의 복스러운 이름을 지금 모독하고 있는 자들은 그의 거룩한 것들 중에서 그의 말씀을 모독하고 그의 형상을 미워하는 것이다. 침 뱉는 것 이상의 어떤 일을 그들은 행할 수 있는가? 만일 그 일을 자신들이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서슴치 않고 그 일을 하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2. "그들은 주먹으로 치고 혹은 때렸다." 이것은 수치에 큰 고통을 더하여 주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죄와 더불어 들어 왔기 때문이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들이 이루어졌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사 50:6),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애 3:30). "그는 비난을 받으셨으나 잠잠하셨도다"(28절). 또한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미 5:1). 여기에서 난주를 보면, "그들은 막대기로 그를 때렸다"라고 되어 있다. 왜냐하면 evrra,pisan 는 그와 같이 뜻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이에 기꺼이 순응하셨다.
3. 그들은 먼저 그를 가리우고 누가 그를 때렸는가를 말하려고 하였다.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1)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행했던 것처럼 그를 조롱하였다. 사람들이 불행에 처한 사람을 보고 그것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실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성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종교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어 주는 가장 타락하고 속화된 인간 성품의 한 실례가 있었다.
(2) 그들은 그의 예언적인 직무에 대하여 조롱하였다. 그들은 그가 "선지자"라고 불리운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더욱이 그는 이적 기사를 행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들어 그를 비난하였으며, 또한 그것을 시험하는 구실을 만들려고 하였다. 마치 신적인 전능성이 어린아이들의 한 유희에 굴복해야만 하는 것처럼 그들은 그를 조롱하였다. 벨사살의 잔치에 성전 기명들이 사용된 것처럼, 성경을 모독하면서 조롱하고 거룩한 것으로 쾌락을 즐긴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동일한 모욕을 퍼부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함 (마태복음 26:69-75)
우리는 여기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다는 이야기를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일부분이 되고 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지금 심문을 받지 않고 잠시 휴식 상태로 대제사장의 뜰에 계셨다. 그 때에 그가 가까이에 있는 그의 친구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약간의 위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를 제외하고는 그의 주위에서 그 어떤 친구들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그가 얼마간의 거리에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어떻게 떨어졌으며,회개함으로 어떻게 다시 일어섰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Ⅰ. 그의 죄는 여기에서 편견 없이 공평하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성실하게 다룬 성경 기자의 명예를 위한 것이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베드로의 범죄의 직접적인 동기. 그는 뜰 밖에서 대제사장의 종들 가운데 앉아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나쁜 친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범죄케 하는 동기가 된다는 사실이다. 필요 없이 그 속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마귀의 땅으로 가서 그 무리들에게 어울리며, 또한 베드로와 같이 미혹되어 덫에 걸리거나 조롱을 받고 미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들이 죄를 짓거나 슬픔을 맛보지 않고 이러한 무리들에게서 빠져 나올 수는 거의 없다. 하나님의 계명들과 그 자신의 계약을 지키려고 하는 자들은 행악하는 자들에게 "나를 떠나라"(시 119:15)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베드로가 그의 새로운 개심자들에게 "패역한 세대에서 자신들을 구할 것"을 경과한 것은 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 가운데 한번 들어감으로 멸망을 받을 뻔하였기 때문이다.
2. 범죄에로의 유혹. 베드로는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는 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첫 번째 한 비자(여종)가, 다음에는 또 다른 비자가 그에게 이 사실을 들어 말하였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9절). 또 다시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71절). 또 다시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네가 갈릴리 사람임을 표명한다"(73절)고 말하였다. 갈릴리 사람들의 말소리와 발음은 다른 유대인들의 그것과 달랐다. 말소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던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진실하고 거룩함으로 말미암아 은연중에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낼 수 있는 자는 얼마나 행복한가 !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모욕적으로 말하였는가를 살펴 보라. 그들은 그를 "갈릴리" 사람 예수, "나사렛"예수와 같이 그이 출신지인 고향을 들어 비난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에 대해 얼마나 모욕적으로 말하였는가. 그들은 베드로를 "이 사람"(This fellow, 이 친구, 이 녀석)이라고 불렀다. 마치 그들은 베드로가 그들 가운데 있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비난거리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그에 대하여 고소할 만한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들은 베드로가 수상하고 무엇인가 꺼림직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였다.
3. 범죄 그 자체.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의 하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을 부인하였으며, 자신이 그러한 제자라고 시인하는 것을 수치스러우면서도 두려운 것으로 여겼으며, 또한 갖은 수단 방법을 사용하여 그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며 그에 대하여 어떤 호의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믿도록 하려고 하였다.
(1) 맨 먼저의 비난을 받고 그는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회피하는 대답이었다. 베드로는 비자가 말하고 있는 "갈릴리 사람 예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는 그녀가 말하는 "그와 함께" 있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낯선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1] 이와 같이 어떤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이해나 생각들 그리고 감정들을 허위 진술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즉 우리가 이해하고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생각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한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 어느 것보다 더 범하기 쉬운 거짓의 일종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 점에 대해 쉽게 논박을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그 자신 이외에 누가 알리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계시며, 우리는 그를 두려워함으로써 이러한 악행을 억제해야만 한다(잠 24:2).
[2] 우리가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부름을 받았을 때 그리스도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그에 대해 시치미를 떼거나 그에게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를 꺼려한다면 그것은 실로 큰 잘못이다. 그것은 실제로 그를 "부인"하는 것이다.
(2) 그 다음 질문 공세에도 그는 여전히 명백하게 "나는 그를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했으며, 이를 맹세로 뒷받침하였다(72절). 이것은 실제로 "나는 그를 시인하지 않는다. 나는 기독자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베드로는 그렇게 하였는가 ? 당신은 법정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보며, 그를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 당신은 그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았는가? 당신은 그의 모임에 참석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당신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그를 더 잘 알지 못하였는가? 당신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당신은 그에게서 받은 호의와 온화함과 또한 그와 더불어 가졌던 교제를 모두 잊어버렸는가? 당신은 그를 정면에서 바라보면서 그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3) 세 번째 질문 공세를 받자, "그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하였다(74절). 이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사악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범죄의 방법이 졸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저주하고 맹세한 것은,
[1] 그가 말한 것을 뒷받침하고 그 말에 신임을 얻기 위함이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또다시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그것을 "말"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맹세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은 거짓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성급한 맹세와 저주로써 뒷받침된 것들에 대해 그 진리성을 의심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마귀가 말한 것 이외에는 마귀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모독하지 말라는 셋째 계명을 지키지 않으려고 하는 자는 그의 형제를 속이지 말라는 아홉째 계명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2]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에 대한 증거가 되기를 원하였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의 일상적인 어법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주와 맹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그의 원수들의 일상적인 어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쓰여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베드로가 범죄하였던 것과 같은 유사한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함이다. 즉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구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속전을 거절하거나 그의 성령을 거부하거나 그에 대해 모른다고 하거나 그 자신과 그의 말씀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또는 그리스도와 그의 고난받는 백성들과 더불어 고난받기를 두려워함으로써 그를 부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4. 이 범죄의 악화. 이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우리는 동일한 범죄를 우리가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생각해 볼 것은,
(1) 베드로는 누구였던가? 그는 처음 세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사도로서, 어느 때든지 그리스도의 명예를 위해 앞장을 서서 말하였던 사람이었다. 우리가 더욱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면 할수록, 우리가 만일 합당치 못한 일을 한다면 우리의 죄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2) 주님께서는 그에게 닥쳐 올 위험한 사태에 대하여 분명히 경고를 하셨다. 만일 그가 이 일이 자신에게 닥쳐 올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였더라면 그는 결코 유혹 가운데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3) 베드로는 이 밤에 그리스도를 결코 버리지 않겠노라고 엄숙히 약속하였다. 그는 거듭하여, "내가 결코 당신을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아니, 내가 맨 처음으로 당신과 함께 죽겠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약속들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말았으며 또한 그의 말은 "예" 했지만 "아니오"가 되고 말았다.
(4) 그는 주님과 더불어 식사를 하고 난 다음 재빨리 이러한 범죄에 빠져들었다. 거기에서 이와 같이 구속의 사랑에서 넘쳐 나온 지극한 축배를 받고서도 아침이 오기도 전 바로 그 밤에 그의 구속자를 버린 것은 실로 "재빨리 돌이킨 것"이었다.
(5) 시험은 비교적 약한 것이었다. 그에게 예수의 제자라고 고발한 것은 재판장이나 판사들 중의 어떤 사람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한 두 사람의 하녀(비자)였다. 아마도 그 하녀는 그를 해칠 목적이 없었으며 또한 그가 그 사실을 인정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아무 일도 행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보행자와 함께 달리는 것"(렘 12:5)에 지나지 않았다.
(6) 그는 그 사실을 여러 번 되풀이하였다. 베드로는 닭이 한 번 운 후에도 계속적으로 시험 가운데 빠져들었으며, 두번째 세 번째도 역시 그러하였다. 이 사람이 베드로인가? "당신은 어떻게 떨어지고 있는가 !"
이와 같이 그의 범죄는 점점 악화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이렇게 된 것은 그가 "경겁 중에"(시 116:11) 말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베드로가 범죄한 것은 유다처럼 고의적으로 하지 않고 경겁 중에(놀라서)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그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매우 사악하게 말을 했지만 그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엉겁결에 한 것이다.
Ⅱ. 이 범죄에 대한 베드로의 회개(75절). 앞의 것은 우리로 하여금 범죄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하여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만일 어느 때든지 우리가 넘어지게 된다면, 여기에 기록된 말씀들은 우리로 하여금 급히 회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베드로를 회개케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1) "닭이 울었다"(74절). 이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경고하실 때 닭이 울 것을 말씀하셨으며, 이것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을 되찾게 해 주는 수단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가 즐겨 사용하시는 표정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중대성을 부여하실 수 있으시며, 또한 그 말씀으로써 자기의 백성들의 영혼들을 매우 유익케 만드실 수 있는 것이다. 닭 우는소리는 베드로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목소리인 세례 요한의 대신으로 사용되고 있다. 양심은 우리가 잊어버렸던 것을 생각나게 하는 닭 우는소리가 되어야만 한다. 다윗의 마음이 "자신을 때릴"때 닭이 울었다. 비록 현재에 시험에 의해 압도당한다고 할지라도 영혼 속에 살아 있는 은혜의 법칙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곁길에서부터 그것을 회복하려고 하실 때는 약간의 암시라도 그것을 기억해 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여기에 영혼을 회심케 하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준 닭 우는소리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닭이 울 때" 자비를 행하신다.
(2) "그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였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제 정신을 차리게 했으며, 또한 경건한 슬픔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그가 자신을 배반하며 경솔히 여길 것을 자비스럽게 경고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회개케 하는 데 강력한 동기가 될 것이며, 범죄하려고 하는 마음을 분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회개치 않은 자에게 그가 주 예수님의 은혜와 그의 사랑의 표시에 대해 범죄하였다는 사실 이상으로 고통을 주는 것은 없다.
2. 그의 회개는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1) 그의 고통(슬픔)은 은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온 것을 괴로워하면서 그 곳을 빠져나갔으며, 지금 그가 있는 곳에 어떤 함정이 있는가를 알아차리고서는 급히 그 속에서 나왔다. 그는 조금 전에 있던 앞문(71절)으로 나갔다. 만일 그가 앞문까지만 갔더라도 두 번째, 세 번째 부인은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앞으로 나갔었다. 지금 그는 밖으로 나갔으며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골짜기의 비둘기와 같이"(겔 7:16; 렘 9:1, 2) 자신을 "한찬"할 수 있는 은밀한 어떤 장소로 나아갔다. 그가 밖으로 나간 것은 이러한 슬픈 경우에 자신의 기도를 하는데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대화와 사업에서 가장 자유스럽게 될 때에 하나님과 더불어 가장 자유스럽게 교제할 수 있다. 죄를 통회할 때에 우리는 가족들이나 아내를 따로 해야만(슥 12:11, 12) 할 것이다.
(2) 그의 슬픔(고통)은 심각한 것이었다. "심히 통곡하니라." 죄에 대한 통회는 독자를 잃었을 때 하는 것과 같이 크고도 깊은 것이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머지않아 죄는 쓰라린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깊은 통회가 필요한 것은, 신적인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눈물의 바다도 그것을 할 수 없다) 죄를 미워하고 사죄를 구하기 위하여 회개의 본질인 마음이 참된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에 대하여 그렇게 심히 통곡하였던 베드로는 결코 또다시 그를 부인하지 않았으며, 위험에 처해 있을 때나 언제든지 공중 앞에서 그를 "시인"하였다.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는 말과는 전혀 다르게 그는 "이스라엘의 집들로 하여금 바로 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도록 하였다. 어떤 죄에 대한 참된 회개는 우리가 이와는 전혀 상반된 은혜와 의무를 풍성히 가짐으로써 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표징은 심하면서도 진지하게 통곡하는 것이다. 옛 사람들 중의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베드로는 살아 생전에 닭 우는소리를 들을 때마다 통곡하지 않은 때는 없다고 한다. 죄에 대해 참으로 애통하는 자들은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애통을 할 것이다. 그것을 감추는 것보다는 오히려 들추어 낼 때에 그들은 하나님과 또한 그의 자비와 은혜 가운데서 기뻐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