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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장 주백통을 구한 황약사
유대덕이 놀라 소리쳤다.
"왜, 왜 나를 해코지 하는 것이지?"
양효비는 여유롭게 너털웃음을 웃었다.
"너를 그렇게 만들어놓지 않으면 난 당장이라도 모용세가의 종이 될 게 뻔하거든. 그래서
그런 것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고 모용협을 원망해라."
일이 이렇게 되자 상황이 확 달라졌다. 방금까지도 모용세가가 호풍환우할 정도로 우쭐거렸
는데 지금은 오독방 패거리가 신명이 나 야단치게 되었다.
오자겸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그는 양효비에게 두 손을 맞쥐어 보이며 읍까지 했다.
"장세시체성의 대지대용(大智大勇)으로 우리 집 노소(老少)를 구하게 되었으니 정말 고맙습
니다."
"오타주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양효비는 이렇게 사양의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오군영 때문에 이러는 거지 오군영
이 아니면 너희들 일에 내가 왜 고생을 할까' 하고 뇌까렸다.
모용협은 소제갈을 한 쪽으로 끌어다가 수군거렸다.
"선생,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소제갈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저도 속수무책이외다. 양효비 저 자식이 저런 짓을 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제는
저것들을 놓아주는 대가로 해독약이나 얻어서 유대덕 형님의 목숨부터 구하는 게 급선무입
니다."
"그러나 인골염주가 양효비 수중에 있는데 어떻게 놓아준단 말이오?"
"놓아주지 않으면 해독약을 구하지 못할텐데 그러면 유대덕 형님의 목숨은 어떻게 구합니
까? 그 인골염주는……. 우리가 후에 천천히 방법을 강구해 봅시다. 양효비를 와불산에서 떠
나지 못하게만 한다면 조만간에 양효비는 붙잡을 수 있습니다."
모용협은 그냥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하지 않았다.
"이봐 모용협. 수하들을 물러서게 하지 않고 거기서 뭘하는 거냐?"
그러더니 양효비는 붉은 환약 한 알을 꺼내 보이며 약을 올렸다.
"이게 뭔지 알아? 유대덕의 목숨이 이 환약 한 알에 달려 있거든. 그런데 이 환약을 먹을
복이 유대덕에게 있는지 모르겠군."
양효비에게 붙잡혀 요 며칠 동안 학대받은 유대덕은 투지를 잃고 죽음이 겁나 어쨌든 살 욕
심만 남았다. 그는 모용협 앞으로 가서 가련한 모습을 보이며 애원했다.
"공자, 날 구해 주오. 날 꼭 구해 주오."
모용협은 무슨 큰 결심을 내린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대덕은 모용협이 동의하는 줄 알고 만면에 화색이 가득하여 양효비에게 소리쳤다.
"공자가 너희들을 놓아주기로 대답했다. 어서 해독약을 가져 오너라. 어서 해독약을 이리로
가져와."
"진짜 우리를 놓아준다면 해독약은 당연히 줄 것이다. 그런데 네 말보다 우린 모용협의 말
을 직접 들어 봐야겠다."
양효비의 말에 유대덕은 모용협을 보며 조급히 독촉했다.
"공자, 어서…… 어서 우리 사람들을 물러서게 해야지."
그러나 모용협은 그런 명령은 내리지 않고 도리어 유대덕에게 엉뚱한 질문을 했다.
"유대덕 형님, 우리 육형제가 의형제를 맺은 다음 지금까지 이 아우가 형님 대접을 어떻게
했다고 생각하시오?"
"그거야 더 말할 나위 있나? 그냥 나를 친형님처럼 대접하며 우리 부모처자까지도 부중에
들여다가 복을 누리게 했으니 그 은덕을 잊을 수 없지."
모용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은 이 아우의 평생 소원이 뭔지 아시겠지요?"
"그거야 대업을 이룩하려는 거지. 난 공자의 그런 영웅적인 기백에 탄복되어 모용세가를 위
해 조그마한 힘이라도 바치는 거네."
그러자 모용협이 유대덕의 두툼한 어깨를 투닥거렸다.
"형님도 우리 육형제가 결의하여 다진 맹세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기억하다마다. 동년 동월 동일 생은 아니나……."
"그 마지막 구절 말입니다."
"대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만번 죽어도 서슴지 않는다."
유대덕은 그 말을 내뱉고는 가슴이 철렁해서 얼굴색이 달라졌다.
모용협은 빙긋 웃었다.
"참 훌륭한 형님이라니까."
그리고는 그의 귀에다 대고 무어라고 수군거리는데 그 말을 듣는 유대덕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종국에는 새까맣게 변했다.
"형님의 부모님도 친부모님처럼 대접하고 형님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형수님은
친누이처럼 모시겠소."
모용협의 말에 유대덕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가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옛날부터 충효는 겸비하기 어렵다 했으니 난 더 할 말이 없네. 공자가 내 대신
효도를 다 해주게."
이렇게 힘없이 몇마디 던지고는 천천히 부중으로 들어가버렸다.
"이봐, 모용공자."
모용공자의 뜻을 짐작한 위방성이 불렀다. 그러나 모용공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서릿발같이
차디찬 목소리로 단호한 명령을 내렸다.
"여봐라. 저 오독방 요귀들을 몽땅 잡으렷다."
그러자 벽사신군이 좋다고 웃어대며 뱀들을 몰아오고 양쪽에 선 능소와 부방의 무사들이 협
공해 왔다. 앞에는 모용협과 위방성 그리고 숱한 보초들이 노리고 있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오자겸은 또 당황했다.
"장세사자님, 글쎄 저 모용협이 자기 의형제 유대덕의 생사도 전연 돌보지 않고……."
기실 양효비도 모용협이 그럴 줄은 뜻밖이었다.
모용협을 인의를 지키고 속이 관대한 젊은 협객으로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다. 생각
밖으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독한 인간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런데 오군영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아버지, 우린 어떻게 하죠?"
오자경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고 있었다.
"모두 장세사자 말만 들어라."
양효비는 사방을 둘러보고 낮은 목소리로 오자겸에게 말했다.
"소염라 부방의 무공이 제일 약하니 그쪽으로 돌파해 나갑시다. 거와장 고수 스무 명은 뒤
를 막게 해주시오."
오자겸이 데리고 온 고수 스무 명은 모두 오자경의 심복이었다. 그는 이 고수들을 방패로
내놓기가 아까웠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니 그 제안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스무 명의 고수들에게 뒤를 막으라고 명령했다.
양효비와 오씨네 부자 이렇게 셋은 부방을 향해 쳐나갔다. 부방은 용감하게 삼고강차(三股
鋼叉)를 꼬나들고 양효비를 찔러왔다.
부방은 거와장에서 양효비를 처음 봤다. 그는 양효비가 오독방 삼대 사자들 중의 하나임은
알고 있었으나 양효비의 무공이 높으면 얼마나 높겠는가 하고 업신여겨 먼저 양효비부터 공
격했다.
그러나 양효비는 지난 날의 양효비가 아니었다. 부방 같은 건 아주 만만히 보고 있었다.
양효비는 일 같지 않게 부방의 삼고강차를 빼앗아서는 그 삼고 강차로 부방을 찔렀다.
부방은 어떻게 삼고강차를 빼앗겼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얼떨떨해 있는데 양효비가 삼고강
차로 찔러왔던 것이다.
부방은 황망히 피하느라고 피했으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가슴 에 구멍이 뚫려 죽고 말았다.
양효비가 단번에 부방을 죽이는 것을 본 무사들은 그만 간담이 서늘해져 맞서 싸울 생각을
못했다. 양효비, 오자겸, 오군량, 오군영 넷은 연거푸 모용세가 놈들 몇을 쓰러뜨리면서 쉽게
포위를 뚫고 나갔다.
오독방 패거리들이 달아나는 것을 본 모용협은 즉시 추격했으나 오자경이 데리고 온 고수
스무 명이 결사적으로 막아섰다. 모용협과 위방성은 각기 치명상을 입히는 초식들을 써 연
거푸 열여 덟 명을 쓰러뜨리고서야 길을 열고 오자겸 일행을 추격하게 되었다.
풍자귀와 소이선생이 그 뒤를 따라가고 주명은 대문 앞에서 독전을 했다. 그는 모용협 등이
숫적으로 열세에 처할까봐 벽사신군을 시켜 급히 뱀을 몰고 추격하게 했다. 벽사신군은 입
으로 괴상한 소리를 내며 뱀을 몰고 부랴부랴 달려갔다.
경공이 높은 양효비와 오자겸은 몇 번 날아 벌써 10여 장 밖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오군량
은 경공이 시원찮았다. 그리고 그의 누이동생 오군영은 십수일 결박 당해 있었기에 두 다리
의 혈맥이 잘 통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소판관 염통에게 혈도를 눌렸던 탓으로 자기의 경공
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군량과 오군영은 뒤에 처지게 되었다.
오자경과 양효비는 하는 수 없이 오군량과 오군영을 기다렸다가 날아가곤 했다. 모용협과
위방성이 점점 더 가까이 쫓아왔다. 하는 수 없이 양효비는 오군영의 허리를 끌어안고 오자
겸은 아들 오군량의 손목을 쥐고 끌며 달아났다. 모용협과 위방성은 계속 추격해 왔다.
이렇게 20여 리를 달려왔다. 오자겸은 자꾸만 처졌다. 모용협과 위방성은 오자겸을 바싹 쫓
아왔다. 기껏해야 삼십보나 되었을까? 모용협이 소리쳤다.
"게 섰거라. 너희들은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양효비는 뒤를 흘낏 돌아보고나서 머리를 굴렸다.
'저것들은 둘인데 우린 넷이잖아. 한번 싸워 보면 혹시 이길 수도 있겠는데.'
이렇게 생각한 양효비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른 셋도 멈춰섰다.
그것을 본 모용협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핫하하, 왜 그냥 달아나시지?"
양효비는 일행들 세 사람에게 눈짓을 했다.
"우리가 왜 달아나? 너희 두 놈 편하게 하려고 달아날까?"
넷은 모용협과 위방성을 에워싸고는 결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모용협은 앙천대소를 했다.
"그래 그 주제에 우리한테 맞서 보겠다는 건가?"
양효비는 두말없이 쌍검을 빼들더니 아래 위로 모용협을 내찔렀다. 모용협은 얼른 옆으로
피했다.
오군영이 장을 쳐왔다. 모용협은 얼른 한 장으로 막고 다른 한 장을 오군영에게 내쳤다. 오
군영은 감히 맞장은 못치고 뒤로 훌쩍 날아 물러섰다.
양효비의 쌍검이 또 모용협의 인후와 아랫배를 찔러왔다. 모용협이 급히 피하는데 양효비의
쌍검이 어느새 가위같이 엇바뀌며 모용협의 허리를 끊어버리려 는 듯 사납게 덤벼들었다.
허허실실. 예상할 수 없는 무서운 초식이었다. 오독방의 괴이한 검법이 쌍검에도 적용될 줄
은 모용협은 미처 몰랐다. 이렇게 쓰는 쌍검은, 쌍검이 모두 실제적인 동작일 수도 있고 쌍
검이 모두 허위 동작일 수도 있었으며 또 쌍검이 일허일실(一虛一實)로 각기 다를 수도 있
어 검 하나를 쓰는 것보다 더욱 신기하고 괴이하여 그 위력은 배가 되었다.
모용협은 급히 한옥검을 뽑아 휘두르며 양효비를 대적했다.
남방의 가을 날씨는 그래도 더운 날씨였다. 그런데도 한옥검을 휘두르자 주위엔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씽쌩 일었다. 오군영은 양효비와 연합해 싸우려 했지만 무공이 제대로 회복
되지 못해 한옥검의 찬 바람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고 게다가 손에 쥔 무기 조차 없어서 멀
리 물러났다. 그러다가 틈이 보이면 장풍을 내치 든가 주먹질을 하곤 했다.
오자겸과 오군량은 각기 장검을 휘두르며 위방성과 싸웠다. 아까 모용부 앞에서 위방성과
싸워 승부를 가리지 못한 오자겸은 스스로 체면이 깎인 것 같았기에 이번에는 고송검을 휘
두르며 사 정없이 공격했다. 위방성은 손목의 철갑으로 검을 막으면서 공격은 여전히 금장
공을 썼다.
위방성의 무공은 오자겸과 엇비슷했으나 그래도 조금 힘이 모자라는 축이었다. 게다가 오군
량의 검까지 막아야 했으니 점점 힘이 부쳐 삼사십 합을 싸우고나니 몰리기 시작했다.
오자겸은 기뻐 소리쳤다.
"얘 군량아! 우리 부자가 힘을 더욱 늘려 단 칼에 이 놈을 요절내고 말자."
모자겸 부자의 검은 더욱 빨라졌다.
위방성은 점점 더 궁지에 몰려 사지로 끌려갔다.
기실 일대 일로 싸운다면 양효비는 모용협의 적수가 못된다. 그런데 모용협은 수시로 오군
영을 막아야 했다. 불시에 내치곤 하는 오군영의 주먹질은 보통 주먹질이 아니었다. 주백통
에게서 배운 칠십이로공명권이었다. 이렇게 되니 모용협은 신경을 양쪽으로 써야 했다. 양효
비는 또 오군영 덕으로 모용협과 계속 싸울 수가 있었다.
모용협이 쓰는 한옥검이 일으키는 찬 바람은 상대방의 진기를 눌러버리는 효능이 있었다.
반면 양효비는 쌍검으로 상대방의 정신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기괴한 이형검법을 썼다. 각
자의 특징이 있어 누가 누구를 어쩌지 못했다.
그런데 이 때 풍자귀와 소이선생이 당도했다.
"둘은 맏형님을 도와 오씨네 부자를 족치시오."
모용협이 소리쳤다.
"공자님은 괜찮겠습니까?"
소이선생이 물었다.
모용협은 싸우면서 대답했다.
"날 이길 솜씨를 양효비는 아직 못 배웠소."
풍자귀와 소이선생은 위방성을 도우려고 병장기를 꺼냈다.
풍자귀가 쓰는 병장기는 두 자 길이의 사룽철자 한 자루와 등 나무줄기로 만든 방패 하나였
는데 설사 적을 거꾸러뜨리지 못한다 해도 적에게 쉽사리 해를 입지 않게끔 공격과 방비가
겸비되어 있었다.
풍자귀는 뛰어들어 방패로 오군량의 검을 막으면서 사룽철자로 오자겸을 내찔렀다. 오자겸
은 급히 피하면서 풍자귀의 옆을 검으로 내찔렀다. 그러나 어느새 풍자귀의 방패가 그 검을
막아 내쳤다. 오자경이 연속 내찔렀지만 매번 풍자귀의 방패에 막혀버리곤 했다.
소이선생은 한 장이나 되는 연편(軟鞭)으로 오자겸의 배후를 공격했다. 전후 협공을 받는 바
람에 오자겸은 궁지에 몰렸다.
상황이 불리함을 눈치챈 양효비가 오군영의 손목을 끌고 달아났다.
"아버지와 오빠는 어떡해요?"
하는 수 없이 양효비를 따라 달아나면서 오군영이 걱정스런 말을 했다.
그러나 양효비가 미처 대답할 사이도 없이 모용협이 어느새 따라와 그들의 앞을 막았다. 모
용협은 한옥검을 꼬나들고 외쳤다.
"달아나? 어디로 달아나?"
양효비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간사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해독약을 달라고 이러는 거지?"
그리고는 양효비는 주홍색 환약 하나를 꺼내 모용공자에게 던져주었다.
"자, 이젠 우리를 놓아줘야지."
그러나 모용협은 해독막을 받고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양효비는 이상한 듯 눈을 끔벅거렸다.
"왜? 또 어쩌겠다는 거지?"
"난 다른 물건을 요구하오."
모용협의 말이었다.
"다른 물건? 이 양효비과 몸에 있는 것이라면야 달라는대로 즉시 내주겠소. 도대체 뭣이
오?"
"난 원래 내게 있었던 물건을 되돌려 달라고 할 뿐이오."
"참 무슨 소리인지. 내 몸에 모용세가네 물건이 있을 턱이 있나. 헤헤, 내가 모용부에 몰래
들어간…… 그러나 난 그 때 동전한닢도 안가지고 나왔는데."
모용협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삼년 전 그 일은 난 말도 하지 않소. 난 당신이 훔쳐간 그 물건을 되찾자는 거요."
양효비는 그 말에 억지웃음을 지었다.
"허 참, 무슨 말인지. 내가 도적인가? 남의 물건을 도적질하게. 천하의 가장 유명한 도적놈
도 모용공자 무공에 눌려 모용세가 물건은 훔칠 엄두도 못낼건데 하물며 내가 어떻게……."
"정말 안 내놓겠다 이건가?"
"도대체 무얼 가졌다고 그래요?"
오군영이 양효비에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
양효비는 두 손을 벌리며 비실비실 웃었다.
"정말 난 무용세가네 물건을 도적질한 일이 없소. 내가 양과로 가장해서 다닌 적이 있는데
혹시 양과가 그랬는지도 모르지. 그런 걸 모용공자자 사람을 잘못 보고……."
"생사불명한 양과를 거론하지 말아요."
오군영의 말이었다.
양효비가 그냥 시치미를 메자 모용협은 검으로 위협하면서 소리쳤다.
"어서 못 내놓겠나?"
양효비는 그래도 눈을 부릅뜨며 뇌까렸다.
"내놓긴 뭘 내놓으라는 거야? 뭐 검을 휘두르면 내가 겁먹을 줄 아느냐."
그때 오군량이 소리쳤다.
"아버지가 위급하다. 동생, 어서와!"
오군영이 언뜻 돌아보니 아버지는 검술이 문란해지며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오군영은 급히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여보, 군영!"
양효비도 모용협도 그 쪽으로 달려갔다.
무림 고수 여덟이 한군데 엉켜 어지럽게 싸우기 시작하니 실로 아슬아슬하고 그 소리는 천
지를 진동할 듯했다.
그런데 이때 산허리에서 누군가 껄껄거리며 호탕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그
웃음소리는 순식간에 백보 앞까지 이르렀다.
머리칼도 수염도 눈썹도 모두 눈같이 희나 얼굴색은 어린 아이 처럼 울긋불긋한 노인 하나
가 날아왔다.
그 경공은 세상 당할 자가 없는 듯했다. 모두들 놀라서 싸움을 멈췄다. 먼저 양호비가 반가
워 웃으며 소리쳤다.
"사부님, 사부님!"
그리고는 달려가 굽신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제자 양효비 인사 드립니다요."
모용협이 자세히 보니 날아온 노인은 노완동 주백통이었다. 모용협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거 오늘 재수 사납군. 양효비 사부인 주백통이 오다니.'
주백통은 양효비를 부축해 일으키며 웃으면서 투덜거렸다.
"이놈아,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 그래 어디 있었지? 쥐굴에 숨어 있었냐?"
이젠 주백통의 성미를 속속들이 아는 양효비였기에 웃으며 역시 농담으로 그 말을 받았다.
"글쎄 말입니다. 사부님과 그냥 술래잡기를 하려는데 막아서는 자가 있지 않겠어요. 그러면
서 또 하는 말이 '노완동이 무슨 물건짝인줄 몰라? 그런 물건짝을 다 사부님으로 삼아?'이
러더란 말입니다. 제자가 듣고 어찌 가만 있겠습니까? 사부님을 모욕하는걸 듣고도 가만히
있는 놈은 제자가 아니지요. 그래서 전 사생 결단 싸웠지요."
"어느 놈이 날 욕해? 내 그 놈의 귀뺨을 단단히 쳐야겠다. 어느 놈이냐, 가보자!"
주백통이 그러자 양효비는 모용협을 손가락질을 했다.
"바로 저 자예요."
주백통은 모용협에게 눈을 부라렸다.
"보긴 멀쩡하게 생긴 위인이 이 노완동을 왜 함부로 욕하지?"
모용협은 허리를 잔뜩 굽히며 예부터 갖췄다.
"선배님, 양효비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소생은 선배님을 욕한 적이 없습니다."
주백통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런 상스런 욕을 할 젊은이 같진 않은데."
"사부님, 저 자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아시나요?"
양효비가 급히 나서서 사부의 말을 잘랐다.
"왜 그런 말을 하지?"
"저 자가 사부님을 욕했다고한 내 말을 거짓말이라 했잖아요? 그러니 사부님 제자가 거짓말
쟁이라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실은 사부님을 또 욕하는 겁니다."
주백통은 눈을 끔벅거렸다.
"네 말은 듣고도 잘 모르겠다."
"모르다니요? 저 자가 사부님 제자가 거짓말쟁이라고 한 셈이죠? 사부님 제자는 모두 정정
당당한 사내 대장부인데 거짓말 할 수 있나요? 사부님이 거짓말하도록 가르쳤나요?"
"음∼ 그래 네 말이 옳다. 이 노완동의 제자들은 어떻게 가르친 제자들인데 거짓말을 할
까?"
주백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모용협에게 또 눈을 부라렸다.
"그래, 네가 또 날 욕했구나? 넌 남 욕하는 재간이 보통이 아닌데."
노완동의 위인이 어떻다는걸 모용협이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수하들이 있는 데서 그런 말을
듣고 참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자기의 위업이 바야흐로 이루어지려는 이 마당에 두려워할
게 무엇이냐? 모용협은 담을 키워 노완동에게 쌀쌀히 말했다.
"선배님이 그렇게 노신다면 소생도 달리 설명해드릴 수가 없군요."
"뭐, 놀아? 너 진짜 욕을 하는구나. 가만, 이 주백통이 모용세가라면 쩔쩔맬 줄 아느냐?"
그러더니 주백통은 다짜고짜 모용협의 뺨을 후려쳤다. 귀청이 째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주백통은 좇아서 박장대소를 하며 어린애처럼 팔짝팔짝 뛰기까지 했다.
"안되겠지? 안되겠지? 네가 내 장을 피해? 그러려면 아직 삼 십 년은 더 수련해야 돼. 알겠
어?"
그러자 양효비가 곁에 있다가 좋아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떠들었다.
"사부님 잘해요. 우리 사부님 잘한다."
"흐흐흐, 이게 아주 절묘한 초식이란다. 황약사를 만나면 한번 써볼까 벼르던 참인데…… 그
래 너도 배우고 싶냐?"
"예, 배우고 싶다마다요."
"좋아. 내 당장 가르쳐주지."
주백통은 이에 양효비의 귀에다 입을 갖다대고 수군거리며 그 초식을 가르쳐 주었다. 양효
비는 이 초식도 아주 기괴한 초식인줄 알고 구미가 바짝 동해 명심해 들었다. 총명한 그는
즉시 그 비 결을 파악했다.
주백통이 모용협을 손가락질하며 양효비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이젠 저 모용협을 한번 쳐봐."
그러나 양효비는 머뭇거렸다. 그 법수가 기묘하다고는 하지만 자기보다 무공이 나은 모용협
에게 써서 효과를 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왜 머뭇거리지? 어서 쳐보지 않고."
주백통이 재촉했다.
양효비는 내가 네 귀뺨을 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네가 날 어찌 진 못하리라 하면서 이를 사
려물고 모용협에게로 다가갔다.
주백통에게 귀뺨을 불이 나게 얻어맞은 모용협은 화가 머리끝까지 끓어올랐지만 주백통의
신기한 무공에 눌려 보복을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양효비가 다가오자 그 화풀이 할
대상이 찾아온다고 내심 별렀다.
"자, 내가 임자 귀뺨을 치러 왔어. 알겠지?"
양효비는 그러고는 손바닥으로 모용협의 뺨을 후려쳤다. 미리 방비를 한 모용협은 양효비의
손바닥을 막으려 얼른 한 손을 내밀었다. 주백통이 양효비에게 비결을 가르쳐주는걸 보았기
에 모용협은 이번에 온 힘을 다 쏟았다. 그러나 양효비의 손이 언뜻하고 중도에서 피하는
바람에 모용협의 손은 빗나가버렸다. 모용협은 자세를 다시 가누려고 했으나 어느새 양효비
의 손바닥이 그의 귀뺨을 번개같이 후려쳤다.
주백통이 좋다고 박장대소를 했다.
"노완동의 제자는 다르긴 다르구나. 핫하하, 한번 가르쳐주면 당장 익혀 써먹거든, 얘, 또 한
번 쳐 봐. 재미 나는데."
양효비가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이번엔 속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저 내가 가르친대로만 해. 백발백중일 거다."
양효비는 사부가 시키는대로 또 모용협의 귀뺨을 후려쳤다. 그런데 이번엔 모용협도 악심을
먹었는지라 양효비가 후려쳐오는 손바닥을 한 손으로 막으면서 다른 한 주먹으로는 양효비
의 가슴을 죽어라고 내질렀다. 네가 내 귀뺨을 치면 난 네 목숨을 빼앗겠다는 기세로…….
그런데 그 찰나 주백통이 번개같이 덮쳐오는 것이 보였다.
'아차, 내가 또 놈들의 꾀에 빠지는구나. 양효비를 내치는 사이 주백통이 날 죽이려는 수작
이었구나.'
이런 생각에 모용협은 멈칫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양효비의 손바닥이 모용협의 귀양을 또
불이 나게 후려쳤다.
그러나 주백통이 가르친 이 초식은 치명상을 입히는 초식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모용혈은 귀뺨을 세 번이나 얻어맞았어도 상한 데는 없고 단지 얼굴이 붉어졌을
뿐이었다.
양효비는 모용협이 분한 김에 자기에게 결사적으로 달려들까 봐 얼른 뒤로 물러났다.
"이봐, 모용협!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모용세가의 수령으로 자처하겠어?"
모용협은 격분에 얼굴이 벌개지고 치를 떨었다. 그는 한옥검을 뽑아들고 이를 갈았다.
"양효비와 주백통은 들으라. 너희 사제들을 죽이지 못하면 모용세가가 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는 주백통과 양효비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소이선생이 모용협의 허리를 황급히 끌어안으며 말렸다.
"공자님, 고정하십시오. 대장부는 굴신(屈身)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신도 남의 가랑이 밑
을 지나는 치욕을 참았습니다. 하물며 공자님은 견식이 한신 백배이신데 남의 꾀에 걸리겠
습니까?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을 기한다고 합니다. 꼭 오늘 복수를 해야 합니까? 저 놈들은
조만간에 공자님의 칼에 죽을 겁니다."
모용협은 분노를 가까스로 짓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의 말을 따르리다."
풍자귀도 다가와서 모용공자를 끌었다.
"공자님, 저 소인배들과 다루지 마시고 집으로 돌아갑시다."
그런데 이 때 소름끼치는 스르륵하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 왔다. 벽사신군이 뱀을 몰고
온 것이었다.
"공자께서 사람이 모자랄까봐 주선생이 시켜서 왔습니다."
벽사신군의 말이었다.
'이거야 말로 설중송탄(雪中送炭)이로구나. 주선생이 우리를 살리는구나.'
모용협은 기뻐하면서 손으로 노완동을 가리켰다.
"어서 독사들을 내몰아 저 자들을 공격하시오."
주백통은 그만 혼비백산해 어쩔줄을 몰랐다. 본래 뱀을 제일 무서워 하는 그인데다가 거와
회의에서 벽사신군이 친 사진에 혼이 난 적이 있는 그는 황급히 나무 위로 날아올라갔다.
벽사신군이 코웃음쳤다.
"나무 위에 올라가면 무사할까? 뱀이 나무 위를 못 올라가는 줄 아는가보지."
벽사라는 독사들은 이미 오자겸 일행을 에워싸고 있었다. 벽사 두 마리가 주백통이 오른 나
무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봐 효비야, 나좀 살려!"
얼이 나간 주백통이 다급히 소리쳤다.
'내 발등에 떨어진 불도 못 끄겠는데 저를 살려줄 사이가 어디 있어?'
양효비는 이러며 한 장밖에 높이 솟아 있는 큰 바위를 쳐다보았다. 그 곳만이 살 곳이었다.
그는 오군영의 손목을 끌고는 두 발을 굴러 몸을 솟구쳤다.
"어서 저 위로 올라가오,"
경공이 괜찮은 그는 손쉽게 오군영을 데리고 바위 위로 날아올라갔다.
오씨네 부자들도 선후로 바위 위로 날아올랐다.
주백통이 있는 나무 위로 벽사 두 마리가 계속 기어올랐다. 주백통의 발에서부터 이젠 한
자 거리밖에 남지 않았다. 주백통은 부랴부랴 나무꼭대기로 올라갔다. 벽사 두 마리도 마냥
따라 올라왔다. 뱀에 쫓긴 주백통은 종국에는 나무 맨 꼭대기 가지까지 올라갔다. 가는 가지
가 휘어져 흔들리며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같았다. 그래도 주백통은 그 위에 아슬아슬하게
그냥 서 있었으니 재간은 정말 재간이었다.
이런 경공에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서 또 그런 재간을 가지고 있는 주백통이
독사에게는 꼼짝도 못한다는 것이 한편으론 우습기도 했다.
"사부님, 어서 이리, 이리로 와요."
양효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주백통은 그리로 날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 곳으로 날아가려면 두 발을 굴려 그 반
작용으로 몸을 솟구쳐 올려야 하는데 디디고 있는 이 가는 나뭇가지를 굴려 가지고선 다섯
장이 넘는 그 거리를 날아갈 수 있도록 몸을 솟구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중도에서 떨
어지면 수백 마리 벽사들이 진을 치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속에 떨어져 뱀밥이 되고 말
것이 아닌가?"
아이고 사부님, 저 봐요. 뱀이 사부님 발밑까지 왔어요."
주백통이 내려다보니 뱀 한 마리가 거의 발밑에 닿을 듯하였다. 주백통은 우는 소리를 냈다.
모룡협은 나무 아래서 쾌재를 불렀다.
"노완동, 무공만 스스로 폐해버리시오. 내가 살려 주리다."
주백통은 얼이 빠졌다. 그는 우는 소리로 애원했다.
"먼저, 먼저 뱀부터 물려주게. 뱀부터 말이네."
모용협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지 말고 내가 시키는대로 당신이 갖고 있는 무공부터 폐하라니까요."
"내가 이 나무 끝에서 스스로 무공을 폐하면 어떻게 되나? 당장 나무꼭대기에서 떨어질텐데
그러면 뱀에게 죽기 전에 머리가 터져 죽겠네."
"그래도 그렇게 죽는 게 뱀에게 물려죽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그런 말같지 않는 소리 하지도 말게. 무공을 자폐해서 떨어지면 뱀 무리 속에 떨어지는데
뱀들이 가만 있을까? 뱀에게 뜯겨 살점하나 안 남을 게다."
그러는 사이에 뱀은 주백통의 발을 물려고 입을 확 벌렸다. 단 한순간도 지체할 수가 없었
다. 주백통은 죽기로 작정하고 진기를 써 그 큰 바위를 향해 몸을 솟구쳤다.
한 넉 장들 날아갔을까? 주백통은 더 날아가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벽사신군은 뱀을 몰고와 기다리고 있었다. 벽사들은 대가리들을 꼿꼿이 세우고 주백통이 떨
어지면 포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백통은 번개같이 입고 있던 헌 적삼을 벗어 아래로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 반작
용으로 다시 두어 자 넘게 날아올랐으며, 손바닥을 아래로 누르면서 또 그 반작용으로 얼마
를 날아올라 겨우 큰 바위 위 모서리에 이르렀다. 양호비가 손을 잡아 끌어올렸다.
아슬아슬하면서도 절묘한 장면이었다. 모용협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경탄했다.
주백통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이 봐 모용협, 안되겠지? 그 잘난 뱀으로 날 어쩌겠다구? 꿈도 꾸지마."
모용협은 바위 위로 등나무 줄기들이 줄줄이 뻗어오른 것을 보고 벽사신군에게 뱀을 바위
위로 기어오르도록 시켰다.
뱀들이 등나무 줄기를 타고 바위 위를 향해 기어오르는 것을 본 주백통은 또 안색이 변해
벌벌 떨었다.
"이걸 어떻게 하지? 아이고 이걸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뭐 어떻게 해요? 이렇게 하면 되죠."
양효비가 히쭉 웃으며 검으로 등나무 줄기들을 툭툭 죄다 끊어버렸다. 반반한 석벽 밖에 남
지 않았다. 그러자 뱀들은 더 올라 올 수가 없었다.
"진짜, 노완동의 제자로구나. 총명해! 핫하하, 대단히 총명 해."
모용협은 그래도 벽사신군을 시켜 뱀들로 바위 밑을 겹겹이 에워싸게 했다. 그리고는 바위
위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어서 투항해라, 죽지 않으려거든."
"투항? 재간이 있으면 어디 올라와봐!"
양효비가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어디 너희들이 내려와 봐라."
모용협은 코웃음을 쳤다.
소이선생도 고함쳤다.
"이 봐, 양효비야. 이젠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지. 도망가긴 어디로 도망가. 내려오지 않으면
그 위에서 굶어죽는다. 주백통 선배님은 벽사가 아주 두렵다면서요? 이제 굶어 어질어질하
다가 잘못해서 아래로 떨어지면 역시 뱀한테 뜯겨 뼈도 안 남아요. 그러기 전에 어서 내려
와 고스란히 투항하시오."
주백통은 하하 웃더니 아래를 내려다 보며 놀려댔다.
"아이고 무서워라! 정말 무서워 죽겠다. 그런데 이 노완동은 근래 열흘 보름을 굶어도 배 고
픈줄 모르고 기운이 나는 그런 무공을 배웠으니 그 사이 떨어지는 염려야 없겠지."
모용협은 양효비 일행을 당분간은 어쩔 수가 없어서 소이선생에게 수군거렸다.
"저것들이 사나흘이 되어도 안 내려오면 어쩔까? 내일 모레면 교주가 전세하여 태어나는 때
인데 여기 그냥 남아 있을 수도 없고. 이거 큰 일이 아닌가?"
소이선생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공자께서 염려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양효비가 지니고 있는 인골염주가 아닙니까?"
"그렇소."
모용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인골염주 하나를 만들어 그 때 가서 진짜로 가장하면 누가 알지 못할 겁니다."
"만일 그 사이 오독방의 대부대가 쳐들어와서 양효비를 구해 가면 어쩌겠소? 그러면 만사가
다 틀려진단 말이오."
소이선생은 그 말에 웃었다.
"여기는 심산벽골입니다. 집도 없습니다 그러니 오독방이 여기로 올 기회는 아주 적습니다.
오독방 대부대가 어떻게 알고 여길 오겠습니까? 우리 이럽시다. 벽사신군을 시켜 독사들로
그냥 에워싸고 있으라고 합시다. 괄월 열닷새만 지나 우리가 전세한 교주를 데리고 서역에
가서 신교를 통제한다면 양효비가 여기를 벗어난다고 해도 그 때는 이미 행차 뒤의 나팔이
란 말입니다.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군요."
모용협은 벽사신군과 풍자귀에게 명하여 여기 남아 양효비 일행을 지키게 하고 자기는 위방
성과 소이선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모용협이 간 것을 보고 오자경이 말했다.
"장세사자님, 저것들이 그냥 우리를 이렇게 가둬놓을 모양인데 이걸 어쩐단 말이오?"
사실 양효비는 일행 누구보다도 더 조급해 하고 있었다. 만약 이 바위 위에서 팔월 열닷새
만 넘긴다면 그가 계획하고 있던 일이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그러나 양효비는 아
무리 궁리 해봐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질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라."
오직 주백통만은 태평무사 아무런 근심이 없었다.
"여기가 참 좋구나. 바람이 슬슬 통하니 시원하기도 하고 이런데서 아예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난 왜 이전엔 이렇게 좋은 곳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마치 세상에 없든 낙원이나 찾은 것처럼 기뻐했다.
오군영이 양효비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낭군님" 하고 "낭"자를 떼다가 말고는 물었다.
"양공자님, 무슨 방법이 없나요?"
자기와 양효비 사이의 일을 부모들은 아직 모르고 있기에 아버지와 오빠 앞에서 양효비를
차마 낭군님으로 부르진 못했다.
고민 중에 있던 양효비는 오군영이 묻는 것이 성가셔서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방법? 당신이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봐."
오군영은 그 말에 기분이 상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본 양효비는 내가 너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여보, 근심 마오. 내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 낼거요."
"근심은 내가 무슨 근심을 하겠어요."
오군영도 쌀쌀하게 대답했다.
양효비는 자기의 퉁명스러운 말에 오군영이 뾰루퉁해진 것을 보고 다가가 오군영의 허리를
껴안았다.
"여보, 내가 잘못했소. 나도 너무 조급해서 그랬소. 양해하시오."
오군영은 아버지와 오빠가 보는 것 같아 얼른 얼굴을 붉히며 양효비의 팔에서 벗어났다.
오십 인생을 살아온 경험으로 오자겸은 딸애와 양효비가 다시 화해를 하고 서로 좋아하는
눈치를 느꼈다.
오군량도 누이동생을 한쪽으로 끌고가 물었다.
"얘, 너와 양효비는 다시 그렇게 됐냐?"
"오빠는 무슨 허튼소릴……."
오군영은 얼굴을 붉혔다.
"허튼소리라니, 이 얘 좀 봐. 내가 네 오빠인데 네 종신대사에 관심을 가지는 거야 당연한
일 아니냐?"
"옳아요. 옳은 말씀이외다. 그럼 형님, 이 매부가 인사 드립니다."
양효비가 오군량에게 허리를 잔뜩 굽히며 인사를 했다.
"아니 이거, 이건 왜 이러지?"
"군영이와 저 사이의 일을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오군량은 놀라서 말했다.
"혼인이란 종신대사인데 애들 장난인 줄 아나? 예물도 안 보내온 처지에 결혼을 했다고 말
할 수가 있나? 그러니 아직까지는 내 매부가 아니네."
"강호인들이 그런 세속의 예절을 다 지켜야 하오?"
그러자 오자겸이 수염을 내리쓸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장세사자 말이 옳은 말이야. 장세사자는 기실 5년 전에 벌써 내 딸 군영과 혼사를 치렀지.
그 사이 소소한 일로 반목이 생기긴 했지만 오늘 다시 화해가 되어 사이 좋게 되었으니 이
또한 경사가 아닐손가?"
그러자 약삭빠른 양효비는 얼른 무릎을 끓고 큰 절을 했다.
"장인 어르신 절 받으십시오."
오자겸은 기뻐서 양효비를 부축해 일으켰다.
"됐네 됐어, 어서 일어나게."
그는 딸애가 끝내 직위 높은 남편을 얻었다고 흐뭇해서 싱글벙글 웃었다.
"임자는 방주의 신임을 두텁게 받는 심복이 아닌가? 앞으로 우리를 위해 방주 앞에서 좋은
말 많이 해주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양효비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장인, 사위가 이렇듯 친밀함을 본 오군영도 내심의 기쁨은 말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부끄러
운듯 얼굴을 붉혔다. 오자겸은 오군영을 양효비 곁으로 끌어다놓으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장세사자를 지성으로 모셔야 하느니라."
오군영은 얼굴이 확 달아올라 아버지 품에 안기며 응석을 부렸다.
"아버지도 참……."
오자겸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요 깜직한 것아, 부모도 모르게 종신대사를 맺는 법이 어디 있니?"
오군영은 고개도 못들고 허리를 꼬았다.
"아버진 또 그러시네."
아버지 앞에서 응석을 부리는 오군영의 모습을 보는 양효비는 당장이라도 오군영을 품에 끌
어안고 마음껏 애무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래에서 풍자귀가 비아냥거렸다.
"핫하하, 거 참 보기 좋다. 부부끼리 좋아서 정신이 없구만 그러지 말고 당신들이 처한 작금
의 처지나 잘 생각해 보시오."
그 말에 바위 위에 있는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있던 기분은 삽시에 사라져버렸
다.
"이 장세사자가 여기를 벗어나기만 해봐라. 제일 처음 네놈부터 죽이라라.
양효비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풍자귀는 앙천대소를 했다.
"날 겁주는 거냐. 나 풍자귀는 남이 겁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다. 그런 엄포는 시들
방귀로 여긴다. 핫하하, 이 양가야, 그런 소린 작작하고 죽기 전에 남길 말이나 있으면 어서
말해. 있다가 염라대왕에게 가서 이러니 저러니 하소연 말고."
풍자귀가 어떤 사람인가? 남에게 종래로 손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말싸움에서도
남이 한마디 하면 자긴 열마디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수림 속엔 어둠이 깃들고 이어 밝은 달이 떠올랐다. 바위 위에 사람
들은 물론 바위 아래 사람들도 지쳤다. 모두들 앉아 말이 없었다. 정적이 깃들인 사방엔 이
따금씩 뱀들이 기어다니는 스르륵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노완동 주백통은 그 지경에서도 한잠 푹 자고 일어났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떠들었다.
"이거 배고파 죽겠다. 배고파 죽겠네."
그리고는 바위 아래로 날아내려 가려고 했다. 먹을 것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다
언뜻 생각난 것이 있었다. 밑엔 뱀천지가 아닌가? 거기로 뛰어내렸다간 뱀 밥이 되지. 그는
몸서리를 치며 양효비를 꾸짖었다.
"이봐 효비야, 네가 스승을 이같이 대접하느냐?"
"사부님, 왜 그러세요? 배가 고파 그러세요?"
양효비는 짐짓 느릿느릿 대답했다.
주백통은 자기 배를 툭툭 쳤다.
"자식, 배 안에서 회충이 다 운다. 꾸르륵 창자 요동치는 소리 도 못들었어?"
"아니, 사부님께서 배가 고플 수 있습니까? 사부님께선 근래 열흘이고 반달이고 밥 한 끼
안먹어도 배고프지 않는 무공을 수련하셨다고 했잖아요?"
주백통은 조그만 눈을 부릅떴다.
"이놈아, 넌 왜 그렇게 사람이 둔해졌니? 바보같은 소리만 하고 앉았구나."
그리고는 잠깐 뜸을 두더니 낮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너 그 말을 정말로 믿니? 모용협 일당을 속이느라고 꾸며낸 말이야. 그것도 몰라?"
"허― 그래요?"
"임마, 이 노완동은 정말 배 고파 죽겠다. 통닭구이가 먹고 싶구나."
그는 기름이 번지르르 도는 구수한 통닭구이가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아 군침을 꿀꺽 삼켰
다.
"아이고 사부님도 여긴 돌 밖에 없는데 어디 가서 통닭구이를 구해오라고 성화예요?"
양효비는 한숨을 쉬었다.
배고프다는 소리를 하게 되니 주린 배가 정말 자꾸 요동을 쳐 주백통은 더는 참을 수가 없
었다. 그는 미친듯이 양효비의 멱살을 한손으로 거머쥐고 한손을 높이 쳐들었다.
"어서 통닭구이를 못 구해오겠냐? 내게 귀뺨 한 대 맞아봐야 정신차리겠냐?"
"아이고 사부님, 귀뺨이 아니라 목을 벤다고 해도 통닭구이는 못 구해 온다니까?"
그러자 오군영이 달려와 주백통의 팔에 매달리며 애걸했다.
"선배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
"얘, 이 손 놔라 놔. 네가 아무리 애걸해도 소용없다. 통닭구이를 못 구해오면 난 가만 안있
겠다. 난 꼭 이 자식을 두들겨 패고야 말겠다."
주백통은 계속 고집을 부렸다.
"정 그러시려면 저 분 대신 날 때려요."
오군영이 또 사정했다.
"내가 내 제자를 때리는데 넌 중뿔나게 웬 참견이냐?"
그 바람에 오군영은 얼굴이 새빨개져 무릎을 끓었다.
"저에게도 칠십이로공명권을 전수해 주셨잖아요. 저도 어르신 절반 제자는 되는 셈이니 저
를 때려요."
주백통은 들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해도 여자를 때릴 수야 없지 않은가?
"할 수 없지. 옥봉 독을 치료해준 네 일이 고마워 양효비를 잠시 용서해둔다."
오군영은 기뻐 연신 몇 번 머리를 조아렸다. 양효비가 오군영을 부축해 일으켰다.
"고맙소."
오군영은 부끄러워 대답을 안했다.
양효비가 눈을 도르르 굴리더니 주백통을 보고 빙긋 웃었다.
"사부님, 내게 방법이 있어요."
"방법? 무슨 방법?"
주백통은 귀가 번쩍했다.
"사부님 그저 눈 꼭 감고 입을 벌려 구수한 닭고기가 입으로 들어간다 생각하면서 꿀떡꿀떡
삼키는 흉내를 내보십시오. 그러면 허기가 싹 달아날겁니다."
주백통은 그 말대로 눈을 감고 입을 벌리며 몇 번 삼키는 흉내를 내보았다. 그러더니 눈을
떴다.
"이놈아, 찬 바람이 배로 들어가니 시장기가 더 나서 죽겠다.
네 이놈, 스승을 놀리는 수작이 아니냐?"
양효비는 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제자가 감히 죽지 못해 스승님을 놀리겠습니까? 제자는 매번 배가 고
프면 그런 방법을 쓰곤 해서 시장기를 멈추곤 했다니까요. 그래서 스승님에게 진언……."
"그런데 난 왜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느냐?"
양효비는 눈을 끔벅거렸다.
"아마 스승님 무공이 세상 둘도 없으니 스승님 위도 제자보다 몇십 배 큰 모양입니다. 그래
서 그런 방법이 소용없는 모양입니다."
오씨네 부자 둘과 오군영은 양효비가 스승 주백통을 놀리는 것을 보고 웃음을 참느라고 야
단이었다.
주백통은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참, 모르겠어. 하긴 이 노완동의 무공이 세상 일등이니까 그 잘난 찬바람 몇번 마셨다고 허
기가 멎을 리 없겠지."
바위 아래에선 벽사신군과 풍자귀가 모용협 제자들이 가져온 술과 고기를 맛있게 먹어대기
시작했다. 구수한 술냄새와 고기냄새가 바람에 실려 바위 위로 날아왔다. 가뜩이나 허기에
주린 배를 안고 있는 바위 위의 다섯 사람은 입에 군침이 돌아 견딜 수 가 없었다.
주백통은 침을 흘리며 바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헤헤하고 실없는 웃음을 몇번 웃고
는 아래에다 대고 애걸하듯 말했다.
"이봐, 벽…… 벽사, 이봐, 뱀귀신! 그 술과 고기를 좀 이리 보내게나. 이 노완동과 같이 좀
나눠먹게나."
주백통은 벽사신군이란 호가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생각하다가 벽사실군의 몸이 새파란 게
벽사와 같은 것을 보고 아예 뱀귀신이라고 호칭했다.
벽사신군은 자기를 뱀귀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제일 질색이었다. 그는 노완동을 향해 지껄여
댔다.
"늙은 두상 죽지는 않고, 내가 뱀귀신이야?"
"그럼 뭐라고 부르나?"
주백통은 그래도 웃어보였다.
"네 조부(祖父)라고 불러."
'네 조부? 세상 네라는 성도 다 있나? 모르지. 세상이 하도 넓으니 네씨 성도 있겠지.'
주백통은 이런 생각을 하고 말했다.
"네 조부라? 그럼 네 조부, 술과 고기를 이리 좀 보내게."
벽사신군은 대노하여 또 주절거렸다.
"이 늙어도 죽지 않는 주가야. 네 조부는 네가 굶어죽도록 놔두겠다. 술 한방울도 안주겠
다."
'가만, 저 자가 날 늙어도 죽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지? 늙어도 죽지 않으면 무병장수란 말
이 아닌가? 아무리 늙어도 죽지 않는다, 거 참 듣기 좋은 말일세. 그 자식 내게 아첨하는 것
인가?'
노완동은 기분이 좋아서 웃었다.
"난 노완동이야. 늙어도 죽지 않는 사람이라니 참 반가운 소리 네만 아무리 무병장수할 사
람이라도 굶으면야 안죽는 법이 있나. 여보게 네 조부 이 사람아, 그런 빈말로 존대만 하지
말고 거 술 과 고기를 이리 좀 보내게. 내가 공짜로 먹겠다는건 아니네. 돈을 준다니까. 은
자를 준다니까."
그리고는 주백통은 은자를 한움큼 아래로 던져주었다.
그러나 벽사신군은 이것을 자기에 대한 모욕으로 느끼고 올려 보며 욕을 했다.
"내가 네 조부다. 은자는 소용없다. 난 너를 굶어죽일테다."
"헤헤, 안다니까 그러네. 거기가 네 조부인줄 난 다 안다니까. 은자는 소용없다고? 그럼 금
괴를 줄게."
주백통은 금괴를 내던졌다. 열 냥짜리 금괴였다.
벽사신군은 발을 동동 구르며 욕했다.
"이 늙어도 죽지 않는 두상탱이야……."
"그래 그래. 난 늙어도 죽지 않는 장생불로하는 노완동이지."
풍자귀가 보다 못해 벽사신군을 잡아당겼다.
"여보게 벽사신군. 그런 실성한 인간과 실랑이 할 게 뭐 있나? 술맛 털어지네. 술이나 먹
세."
벽사신군은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주백통은 이 뱀귀신이 왜 저렇게 성을 내는지 알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은자를 줘도 싫다 금괴를 줘도 싫다. 그래 네 조부는 도대체 뭘 줘야 술과 고기를 이 노완
동에게 주겠다는 건가?"
풍자귀가 올려다보며 고성을 질렀다.
"주백통 선배님, 정말 술이 먹고 싶소?"
"물론이지, 먹고싶다마다. 이거 배가 고파 죽겠다니까."
주백통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풍자귀는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술과 고기는 여기 많소이다. 쇠고기도 삶은 편육이 열 근이나 있고 술은 여아홍이 한 단지
나 있소이다. 우리 형제 둘이선 내일 새벽까지 마셔도 못다 먹겠소."
"그런데 왜 좀 이리 안올려보내나?"
"심산유옥에 또 깊은 밤이라 술과 고기 값이 비싸진다는 말이 있잖소? 그 도리야 선배님이
우리보다 더 잘 알게 아니오?"
"그래서 내가 금괴와 은자를 얼마나 많이 내려보냈나."
풍자귀는 노완동이 내려보낸 금괴와 은자를 손바닥에 놓고 추스려보면서 말했다.
"금은이야 체외지물(體外之物)인데 금은 가지고서야 이 비싼 술과 고기를 못 바꾸지요,"
그리고는 그 금과 은을 주육을 갖고 온 제자에게 상으로 내주며 분부했다.
"어서 가 모용공자님에게 아뢰렷다. 주백통 선배님께서 굶어 세상 하직하게 되었다고 말이
다."
두 제자는 시원하게 대답하고 떠나갔다.
주백통은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엇을 내야 술과 고기를 주겠다는 거지?"
풍자귀는 일부러 소리가 나게 술 한잔을 쭉마셨다.
"카―, 말씀드려도 아까워서 내려고 할까?"
"내 목숨만 내놓으라고 하지 않으면 다른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내놓을 수 있네."
풍자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건 그만두고 주백통 선배님 제자를 내놓으시오. 내놓으시겠소?"
"뭐? 제자를? 아니, 양효비 말인가? 양효비를 가져선 뭘 하겠는가? 양효비가 돈인가?"
풍자귀는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 그건 상관하지 마시고 술과 고기를 드시려거든 제자를 내려보내시오. 혈도를 눌러 아
래로 던지면 즉시 술과 고기를 올려보내지요."
주백통은 양효비를 돌아보았다.
'저 녀석의 혈도를 눌러 내던지면 당장 뱀밥이 될 게 아닌가?'
그런데 밑에선 풍자귀가 술을 먹으면서 머리를 흔들며 타령까지 했다.
"인생이 얼마더냐? 술 없인 못 살겠네. 살아 생전 술 한 잔이 죽어 제삿상 백 잔보다더 나
으리. 먹다 죽은 귀신 원이 없고 주려 죽은 귀신 신선이 되어도 울음 뿐이라네."
주백통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돌아서 양효비를 불렀다.
"이봐, 효비야. 어서 어서 내려가. 이 스승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하려면 네가 아무래도 내려
가야겠다."
양효비는 사색이 되어 우는 소리를 했다.
"사부님, 저 자들의 꼬임에 빠지지 마세요. 저 자들은 내가 미워서 죽이려고 그러는 거예요.
난 내려가기만 하면 저 자들에게 죽어요."
"스승을 위해 하는 일인데 그런 고집이 어디 있어? 어서 내려 가."
주백통은 한숨을 지으며 손을 뻗쳐 양효비를 거머쥐려 고 했다.
양효비는 사색이 되어 오군영 뒤에 가 숨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저 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니까요."
오군영도 소리쳤다.
"선배님, 저 자들의 궤계에 빠지면 안됩니다."
오자경과 오군량도 달려와 양효비를 보호하고 나섰다.
바위 위에서 난리가 났다고 풍자귀는 싱글벙글하며 외쳤다.
"주백통, 어서 양효비의 혈도를 눌러 내던져요. 그러면 즉각 술과 고기를 올려보낸다니까요.
야, 그 술맛 좋구나. 핫하하, 그 고기 구수하구나!"
굶주리다 못해 정신이 잘못된 주백통은 술과 고기만 눈 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두 손을 앞
으로 허우적거리다가 오씨네 부자를 밀어놓고 또 공명권을 써 오군영까지 넘어지게 하고서
는 양효비 를 거머쥐려고 달려들었다.
양효비는 당황해서 장을 내치며 주백통을 막기도 하고 또 이리 저리 피하기도 했다. 이에
대노한 주백통은 자기 진짜 재간을 써서 양효비를 후려쳤다. 양효비는 한 옆으로 얼른 피했
다. 그런데 어느새 주백통의 다른 손이 대금나수(大擒拿手)로 후려오며 양효비의 뒷덜미를
덥석 움켜쥐는 것이었다.
노완동 주백통의 좌우호박지술은 천하에 당할 자가 없었다. 한 손으로는 공명권을 씀과 동
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대금나수를 쓰자 양효비 재간으로는 피할 수가 없었다. 양효비는 뒷
덜미 대혈 을 움켜쥐여 옴짝달싹을 못하게 되었다.
주백통은 양효비를 선뜻 쳐들고 바위 모서리로 가서 내던지려고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양
효비는 바둥거리며 밑을 내려다보았다. 달빛 아래 퍼런 빛이 반짝반짝하는 게 온통 벽사 천
지였다. 양효비는 죽는다고 아우성을 쳤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오군영이 목멘 소리를 질렀다.
"어마나 선배님, 어서 우리 낭군님을 놔주세요. 제발."
그러다가 오군영은 그만 까무라쳐 넘어졌다. 오군량이 급히 동생을 일으켜 앉히고 진기를
넣어 응급처치를 했다. 그것을 본 풍자귀는 좋다고 일어서서 떠들었다.
"주백통 선배님, 어서 손만 놓으시오. 그러기만 하면 이 술과 고기는 몽땅 선배님 것이외
다."
주백통은 두 눈이 벌개져서 소리쳤다.
"속이지 않겠지? 거짓말이 아니겠지?"
"거짓말이라니요? 주백통 선배님이 어떤 분이라고 제가 감히 거짓말을 해요? 주백통 선배님
무공이 천하무적인데 그 주먹에 맞아죽지 못해 거짓말 할까요? 그런 걱정 절대 마십시오.
내 말에 신용이 없다면 그저 한 주먹으로 날 쳐죽이시오."
그런데 이때 깨어난 오군영이 주백통에게 미친듯이 달려들어 주백통의 팔을 죽어라고 앞으
로 당겼다. 그러나 주백통이 어떤 사람인가? 수십 년 무공을 닦은 사람인데 오군영의 힘으
로야 끄덕도 안했다. 오군영은 급한 김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는 모르나 주백통의
귀뺨을 죽어라고 후려쳤다.
짝 하는 소리가 먼 곳까지 들렸다.
바위 위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양효비마저도 아우성소리를 뚝 그쳤다.
무림 선배이고 일등 고수인 노완동이 가만 있을까? 가뜩이나 굶주려 발광을 하고 있는데 잘
못하면 오군영을 갈기갈기 찢어죽일 것이다.
모두들 숨소리도 못냈다.
오군영도 스스로 한 짓에 놀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양효비를 구하기 위해 모
든 것을 각오하고 노완동을 날카로운 목소리로 꾸짖었다.
"스승이란 분이 이게 무슨 짓이죠? 그 잘난 술과 고기가 탐나 제자를 죽여요? 어서 내 낭군
님을 내려놔요, 어서요!"
그런데 생각 밖으로 주백통은 오군영의 말대로 양효비를 당겨 다가 바위 위에 천천히 내려
놓는게 아닌가? 그리고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정말, 자칫했으면 제자를 죽일 뻔했구나. 위험했어."
그는 창피스러운듯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죽을 뻔했던 양효비는 오군영을 와락 끌어안으며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 고마워. 앞으로 절대 잊지 않을거야. 잊는다면 천벌을 받을거야."
양효비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오군영이 얼른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런 불길한 소린 왜 하죠?"
풍자귀는 그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위에
다 대고 소리쳤다.
"노완동, 정말 굶어죽을 작정이시오?"
주백통은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장탄식을 했다. 그리고 휘파람을 길게 한번 불었다.
"이 노완동이 하마터면 너에게 속을 뻔했다. 내 이제 이곳만 벗어나면 너를 절대 가만 두지
않을테다. 가죽을 벗기고 힘줄을 뽑고 뼈를 탕쳐서 기름에 튀겨 개 먹이로 줄 테다."
노완동은 풍자귀를 내려다보며 입에 담지도 못할 악담을 퍼부었다.
그런데 노완동의 긴 휘파람 소리에 이끌어 왔는지 갑자기 구성진 퉁소소리가 들려왔다. 처
음은 몇 리 밖에서 들려오는 것 같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퉁소 소리는 수림으로 다가왔다.
애간장을 끊는듯 애절한 퉁소 소리였다. 누구도 그 소리에 나오는 눈물과 서러운 마음을 걷
잡을 수가 없었다. 각자는 자기의 진기를 운행시켜 이 심상찮은 퉁소 소리가 가져다 주는
비애를 막느라고 야 단이었다.
퉁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들려왔다. 바위를 둘러쌌던 뱀들 이 괴로워 못 참겠는지 몸을
비비꼬며 구불덕거렸다. 벌써 몇 마리는 슬렁슬렁 달아나기 시작했다. 벽사신군은 뱀들이 퉁
소 소리 에 그러는 줄을 알았다. 그는 큰 소리를 쳐 달아나는 뱀들을 막으려고 했다.
노완동이 갑자기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또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퉁소 소리도 화답이나
하는듯 음향을 높였다.
"동사 황약사다!"
주백통은 기뻐 부르짖었다.
퉁소 소리를 참을 수 없어 뱀 무리들은 점점 남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벽사신군은 뱀들
을 막으려고 악다구니를 지르며 날 뛰었지만 허사였다. 높아가는 퉁소 소리에 뱀들은 벽사
신군의 소리는 아랑곳 하지 않고 뿔뿔이 남쪽으로 홑어져 번개같이 달아났다.
대경실색한 벽 사신군의 안색은 말이 아니었다.
"형님, 어서 뜁시다. 필시 어느 고인이 암암리에 저것들을 돕는 것 같습니다."
벽사신군은 풍자귀를 잡아끌었다. 그렇게 믿었던 뱀 무리들이 없어지니 둘은 끈 떨어진 망
석이 되었잖은가? 바위 위에 있는 무리들이 내려오면 둘은 영락없이 죽고 말 것이다. 둘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주백통 일행은 바위 위에서 뛰어내렸다.
"여보게 황약사, 그러지 말고 어서 나오기나 해."
주백통이 황약사를 불렀다.
"이봐, 황약사. 안나오겠어? 그럼 내가 들어가 붙잡는다."
그러나 수림 안에서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이 노완동아, 이번에 네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이 다음엔 날 성가시게 굴지 말게."
"핫하하, 과연 황약사가 틀림없구나. 자네가 날 구해주었다구? 모를 말이지. 자네 무공이 나
보다 못한데 날 어떻게 구해?"
그리고 주백통은 수림 속으로 쫓아 들어갔다.
"정말 두통나는 사람이라니까."
수림 속의 음성은 신속히 멀어져 버렸다. 모두들 혀를 찼다. 오군량은 한참 있다가 한숨을
지었다.
"언제 가야 난 저런 귀신 같은 재간을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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