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을 풀어라
"여보, 오늘은 이것 좀 어떻게 해봐. 골치가 아프네."
"왜 골치를 앓아야 하나요. 기껏 잃어봐야 냄비뚜껑 하나인데...그것도 잃지 않을 수도 있는데
서비스센타 직원이 출근할 동안만 기다려요."
"어제 전화 하기로 해놓고 안했쟎아."
"그 사람들은 관공서 지시사항 처리하듯 정확히 시간 맞추어가며 친절하게 해주지 않아요. 다치지 않을 만큼 느긋한게 잘 사는 법이랍니다."
이리하여 기상시간에서부터 9시까지 느긋함을 확보하였다.
조리기구가 날로 새롭게 개발되어 유행에 둔한 주부는 부엌살이에서도 젊은이들과 차이가 느껴진다. 제품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물건이 생겨도 사용해보지 않은 물건은 낱낱이 주의사항을 읽고 대처해야 하기에 쉽게 접근하게 되지 않는다.
나는 최근에 경품으로 해피콜이란 냄비셋트를 받았다. 요리하기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도 특별한 그릇이 생기고나니 그것에 요리를 해보고 싶어서 전골을 끓였다. 손잡이를 밀면 뚜껑이 들썩거리지 않게 눌러주는 특성이 있는가 하면, 국이 끓어도 진공상태가 되어 내용물이 잘 무르고 변질될 가능성이 적다.
그러나 지나치게 진공이 잘 되어 요리가 끝났는데 뚜껑이 열리지 않는다. 그 순간부터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하는데 나보다 내 남자가 더 하다. 문제가 어떻게 해서 생겼으며 어떻게 해야 해결이 될 지에 대해서 연구를 하지 않고 우격다짐으로 뚜껑을 올려본다거나 뜨거운 물을 끼얹어 본다거나 하면서 끙끙거리다가 미해결 상태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진공상태이므로 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 있다.
어떻게 해야 진공이 풀리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나는 냄비를 요리조리 보다가 답을 얻었다.
망쳐봐야 바킹 하나 망가지면 그 뿐이니 제발 화요일까지만 기다리라고 해도 급하게 버리거나 해결하거나 해야 할 것처럼 졸라 대더니 급기야 꿈 속에서 조차 냄비가 등장하더라고 한다.
금요일날 저질러진 상황인데 그 다음 주 화요일이 되었다. 서비스센타에 전화를 하여 문의한 결과 답은 단순하다. 뚜껑 가운데 바킹을 세게 잡아당겨 뽑아버리면 공기가 주입되어 자연스럽게 뚜껑이 열린다고 한다. 아주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하루만 더 기다렸다면 아마도 그 냄비를 깼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진공이 잘 되어서 문제가 생긴 것은 진공을 풀면 해결되고 그 문제를 푸는 키는 어딘가에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안과 밖을 소통하기 위한 장치를 읽을 줄은 알고 사용했어야 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문제점에 닥쳐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주의 사항을 읽어가며 사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우리는 대가족 사이에서 자란 사람들에게서 종종 발견한다. 다양한 문제와 접해가면서 살아서 어지간한 문제 해결법은 그들 머리에서 나온다. 어른들에게서 물려받은 지혜와 성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의 지혜가 합쳐지면 인간사 서로 사이에 진공상태가된 것처럼 불통이 되어도 느긋하게 풀어갈 수 있다.
세상 어디에나 소통구는 있기 마련이다. 다만 찾는 자와 찾지 않거나 찾지 못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첫댓글 기다리는 미학
조리기구를 구입하고 몇달은 잘 쓰는데 사용기간이 지나면 부억 한 구석에 잘 모셔두는 날이 많아요.
가능하면 적게 가지고 특식은 사 먹기로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