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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 겨울호
반경환 명시감상
---문태준, 현순애, 이영식, 이승애, 이서빈의 시
꽃
문태준
당신은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세요
조심스레 내려가
가만히 앉으세요
그리고
숨을 쉬세요
부드러운 둘레와
밝은 둘레와
입체적 기쁨 속에서
---문태준 시집, {아침은 생각한다}에서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이고, 이 ‘사유의 꽃’은 몽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몽상-상상 속에서는 그 모든 슬픈 일이거나 괴로운 일을 다 잊고, 어느 누구나 다같이 더없이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문태준 시인의 [꽃]은 사유의 꽃이며, 그는 그 꽃봉우리 속으로 들어가 조용히 앉는다. 그리고, 아주 편안하게 숨을 쉬면서 “부드러운 둘레와/ 밝은 둘레와/ 입체적 기쁨 속에서” 영원불멸의 삶을 산다. 어깨에서 소나무가 자라나고 구렛나루에서 새들이 둥지를 트는 것도 모르고, 천년, 만년을 하루같이 산다.
처 자식들과 싸울 일도 없고, 이웃들과 싸울 일도 없다. 전기차를 탈 필요도 없고, 우주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너무나도 엄청난 헛수고를 할 필요도 없다. 장수만세를 위하여 인공심장을 달 일도 없고, 돈과 명예와 권력을 위하여 너무나도 더럽고 추악하게 악마에게 영혼을 팔 일도 없다.
하루 하루가 ‘몽상-상상의 시간’이고, 이 ‘몽상-상상의 시간’ 속에서 ‘나’의 ‘사유의 꽃’이 피어난다. 꽃은 아름답고, 꽃은 향기롭고, 이 ‘사유의 꽃’ 속에서 나는 나의 ‘사상의 열매’를 맺는다.
사유의 꽃, 만인들의 존경과 찬양을 받는 사유의 꽃, 내가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지 않으면 피울 수 없는 사유의 꽃----.
오늘날의 ‘시의 위기’는 ‘인문학의 위기’이며, ‘인문학의 위기’는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철학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과학의 시대’가 온 것이지만, 이 과학의 시대는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제거하고, 너무나도 무섭고 잔인한 악마의 씨앗을 심어 놓았다. 악마의 씨앗은 돈이고, 돈은 부모형제도 모르고, 처 자식도 모른다. 낭만도, 꿈도 모르고, 사상도, 자유도 모르고, 무차별적인 탐욕으로 ‘이기주의의 꽃’을 피워나간다.
원자폭탄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돈이고, 무차별적인 고소-고발과 소송전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잔인한 원자폭탄의 대폭발과도 같다.
돈, 돈, 돈 하는 자본주의의 악마들은 날이면 날마다 ‘인간의 씨앗’을 말리는 ‘원자폭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곶감을 꿈꾸다
현순애
바람 넘나드는 문간방 처마
그늘에 매달려
아픔 말리고 있다
허공에 상처 부벼
껍질 만드는 일이다
흔들어댄 바람도 손 놓아버린 감나무 가지도 야속해
저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을 때
“괜찮다, 괜찮다”
제격인 찬 바람과 생각의 모서리에서 만난 햇살이
다독였다
배고픈 새도 염탐하는 곶감
벌써 일주일
눈물 빠져 자신을 추스르는 속내
서리 내린 하얀 분 피워올리며
뭉친 근육 주무르듯
상처난 속내 주무르고 있다
곶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조과일로 단맛이 아주 풍부한 영양간식이라고 할 수가 있다. 비타민과 미네랄과 식이섬유도 풍부하고, ‘탄닌’이라는 성분도 아주 풍부하며, 따라서 기관지와 혈관과 항균 등에도 아주 효능이 뛰어나다고 한다. 가을에 감의 꼭지는 그대로 두고 껍질을 모두 깎아낸 다음 곶감걸이에 걸어서 2~3주 동안 말려주면 천하제일의 곶감이 탄생하게 된다.
현순애 시인의 [곶감을 꿈꾸다]는 ‘출발- 모험- 싸움(시련)- 탄생’이라는 영웅신화에 기초한 서정시라고 할 수가 있다. “바람 넘나드는 문간방 처마/ 그늘에 매달려/ 아픔 말리고 있다”와 “허공에 상처 부벼/ 껍질 만드는 일이다”라는 시구는 고통의 지옥훈련과정을 끝낸 전사와도 같고, “흔들어댄 바람도 손 놓아버린 감나무 가지도 야속해/ 저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을 때/ “괜찮다, 괜찮다”/ 제격인 찬 바람과 생각의 모서리에서 만난 햇살이/ 다독였다”라는 시구는 그 고통의 지옥훈련과정 끝에 스승과 부모형제와 그의 이웃들을 원망하면서도, 그들의 무한한 애정과 성원에 보답하고자 하는 자기 수양의 과정을 뜻한다고 할 수가 있다. 백전백승의 최고급의 전사가 되려면 고산영봉을 자유자재롭게 뛰어다닐 수 있는 육체가 있어야 하고, 천하제일의 영웅이 되려면 그 모든 지식들을 발효시켜 최고급의 사상(곶감)으로 창출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고,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깃든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훌륭한 영웅들은 어떠한 사람들일까? 그들은 어떻게 태어났고, 무엇을 이룩했으며, 어떻게 죽어갔을까? 모든 영웅들은 부처와 예수처럼 영웅의 표지를 지니고 태어났으며, 그들은 그가 소속된 사회와 국가와 인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단 하나뿐인 몸을 희생시켜 나갔던 성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 인간들은 사회적 동물인 만큼 사회성을 제거하고는 그 어떤 신화도 창출해낼 수가 없다. 도덕도, 법률도 이타적인 희생정신에 기초해 있고, 교육도, 문화예술도 이타적인 희생정신에 기초해 있다. 이타적인 희생정신이란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목숨을 버리라는 것을 뜻하고, 이 사회적 명령의 극단적인 예가 ‘자살특공대’라고 할 수가 있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는 임전무퇴의 희생정신이 그것이고, 이 ‘임전무퇴의 희생정신’은 ‘자살특공대’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좀 더 세련되게 순치시킨 말에 지나지 않는다.
호머라는 곶감, 셰익스피어라는 곶감, 광개토대왕이라는 곶감, 태조왕건이라는 곶감, 세종대왕이라는 곶감, 보들레르라는 곶감, 랭보라는 곶감, 베토벤이라는 곶감, 모차르트라는 곶감, 서울이라는 곶감, 청주라는 곶감, 대한민국이라는 곶감, 니체라는 곶감, 쇼펜하우어라는 곶감, 공산주의라는 곶감, 염세주의라는 곶감, 낙천주의라는 곶감----.
곶감은 과일이고 상징이며, 기호이다. 곶감은 시인이고, 영웅이고, 영토이다. 곶감이 기호인 한 상징이 될 수도 있고, 우리는 이 상징을 통해 수많은 사상과 이론들을 창출해낼 수도 있다. 고귀하고 거룩한 말이 담겨 있고, 크고 위대한 뜻이 담겨 있다. 아름다움과 훌륭함의 뜻이 담겨 있고, 순수하고 순결한 뜻이 담겨 있다. 맛이 좋고 영양가가 풍부한 뜻이 담겨 있고, 모든 좋음과 행복한 뜻이 담겨 있다.
시는 사상의 꽃이고, 사상은 시의 열매(곶감)이다. 시와 사상, 영혼과 육체가 하나일 때, 이 ‘곶감의 철학’ 속에 모든 새들이 군침을 흘리고, “서리 내린 분”이 하얗게 피어나며, 새로운 지상낙원이 열리게 된다.
현순애 시인의 [곶감을 꿈꾸다]의 주인공은 우리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 속에 전인류의 스승으로 그 날개를 얻게 될 것이다.
꽃을 줄까 시를 줄까
이영식
꽃나무가 물었다
꽃을 줄까 시를 줄까
시인이 대답했다
꽃 보고 거둔 자리
네가 품은 꽃씨를 주렴
싹 내고 꽃 피워서
시를 받아 적을 게
----이영식 시화집詩畵集 {꽃을 줄까 시를 줄까}(근간) 전문
꽃은 아름다움의 이상적인 원형이고, 이 세상에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꽃은 지혜의 꽃이자 용기의 꽃이고, 그리고 꽃은 성실함의 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꽃의 공화국과 꽃의 삶은 지혜의 산물이고, 수많은 비바람과 중상모략과의 싸움은 용기가 담당하고, 피와 땀과 눈물로 꽃을 피우는 것은 성실함이 담당한다.
모든 동식물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최단의 행로(절약의 법칙)를 선택하고, 그 무슨 변화가 필요할 때에도 논리적인 비약을 하지 않는다(연속의 법칙). 최단의 행로는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이어지는 삶을 말하고, 연속의 법칙은 종의 번영과 그 역사적인 삶을 말한다. 모든 동식물들의 삶에는 절약의 법칙과 연속의 법칙이 작용을 하고 있고, 이 두 법칙 속에서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진다.
나무의 결정체도, 풀의 결정체도 꽃이고, 소녀의 결정체도, 소년의 결정체도 꽃이다. 엄마와 아빠의 결정체도 꽃이고, 어린 아기와 어린 왕자의 결정체도 꽃이다. 말과 웃음의 결정체도 꽃이고, 시인과 가수의 결정체도 꽃이다. 꽃은 그의 마음이고 천성이고, 꽃은 그의 삶이고 그의 모든 역사이다. 이영식 시인은 ‘꽃의 시인’이며,
시를 읽거나 문장을 갖는다는 것은 초목에 꽃 피는 일과 다름이 아니지요. 햇빛 비타민처럼 활력을 더하여 인생을 무지갯빛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가슴에서 뛰노는 시 한 수 읽으면 한 주일이 흐뭇하고 순금 같은 시 한 편 쓰고 나면 한 달이 행복하니까요. 좋은 시집은 곁에 두고만 있어도 향기가 묻어나는 법이랍니다.
라는 [시인의 말]에서처럼, 그 꽃의 향기로 만인들을 초대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시는 시인이 피우는 꽃이고, 시인은 시가 맺는 열매이다. 시인은 꽃나무가 되고, 꽃나무는 시인이 된다. “꽃을 줄까 시를 줄까”라고 꽃나무가 물으면, “네가 품은 꽃씨를 주렴/ 싹 내고 꽃 피워서/ 시를 받아 적을 게”라고 이영식 시인은 대답한다. 꽃 앞에는 만물이 하나가 되고, 이 세계는 만물이 참여하는 꽃의 축제가 된다. 이영식의 시인의 [꽃을 줄까 시를 줄까]는 시인과 꽃나무가 손을 잡고 만인들을 초대한다. 시인과 꽃은 아름다움의 최정점이고, [꽃을 줄까 시를 줄까]는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자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라고 할 수가 있다.
하나님은 나무에게 무릎을 주지 않으셨다
꽃과 향기로 세상을 아름답게 수놓고
그가 맺어놓은 열매 또한 유익하니
누구에게도 무릎 꿇을 일이 없기 때문이리라
----[무릎] 전문
이영식 시인은 제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절망을 하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이며, 그는 자기 자신의 ‘꽃마음’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무에게, 시인에게 “무릎을 주지” 않으셨고, “꽃과 향기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수놓게” 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 인간들이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고, 이 세상이 더욱더 아름답고 행복한 것은 수많은 시의 열매들이 너무나도 맛있고 영영가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둥근 방
이승애
애초에 한 방울의 물이었다
둥둥 몸을 감싸는 물과 섞이지 않고
홀로 자라는 물이었다
꽉 막힌 방,
어둡지만 환한 그곳에서
나는 파랗게 움이 트고 있었다
밀물과 썰물이 찍힌 서해와
달의 숨소리가 높은 동해와
조릿대 사분대는 대관령을
보지 않아도 볼 수 있었다
바다와 바람의 호흡만으로
눈 대신 귀가 환하게 열렸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말랑한 뼈가 하나씩 돋았다
부드러운 손이 바깥에서 나를 어루만질 때
온몸이 따뜻해졌다
그때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어디선가 만난 것만 같았다
아늑하지만 안개 속 같은 방
발길질을 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꾹 참고 기다리고 있었다
꼭 만나야 했다
퉁퉁 부은 발을 어루만지며
태명을 불러주던 다정한 그 사람을
---이승애 시집, {둥근 방}에서
이 세상의 근본물질은 무엇일까? 탈레스에게는 이 세상의 근본물질이 물이었을 것이고, 헤라클레이토스에게는 이 세상의 근본물질이 불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근본물질이 공기였을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근본물질이 흙이었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물 속에서 태어나 물 속에서 살다가 물 속에서 죽어갈 수도 있고, 모든 생명체는 불 속에서 태어나 불 속에서 살다가 불 속에서 죽어 갈 수도 있다. 모든 생명체는 공기 속에서 태어나 공기 속에서 살다가 공기 속에서 죽어 갈 수도 있고, 모든 생명체는 흙에서 태어나 흙 속에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오늘날 이 세상의 근본물질은 원자로 밝혀졌고, 이 원자는 만물의 근본물질인 에너지(불)라고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물질은 에너지이고, 에너지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보존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형체만 바뀔 뿐, 이 에너지가 소멸되는 법은 있을 수가 없다. 물도 에너지이고, 불도 에너지이다. 공기도 에너지이고, 흙도 에너지이다. 원자와 원자가 결합하면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나고, 원자와 원자가 분리되면 그 생명체는 물과 불과 공기와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 모든 유기체와 무기체는 생물학적으로, 또는 화학적으로 한 가족이며, 어떤 생명체도 이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우주도 둥글고, 지구도 둥글고, 달도 둥글고, 태양도 둥글다. 물이 불이 되고, 불이 공기가 된다. 공기가 흙이 되고, 흙이 물이 된다. 모든 것이 가고 모든 것이 되돌아오는 이 윤회의 법칙도 둥글고, 요컨대 자연의 법칙은 둥글게 원을 그리며, 끊임없이 자전과 공전을 되풀이 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애 시인의 [둥근 방]은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한 ‘둥근 방’이며, 엄마 뱃속의 ‘태아의 꿈’을 매우 아름답고 뛰어나게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시인은 “애초에 한 방울의 물이었”고, “둥둥 몸을 감싸는 물과 섞이지 않고/ 홀로 자라는 물이었다.” 양수 속의 물방울이었고, “꽉 막힌 방/ 어둡지만 환한 그곳에서/ 나는 파랗게 움이 트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물 속에는 철과 염분과 인과 칼슘과 단백질 등의 모든 물질들이 다 들어 있었고, 나는 이 [둥근 방]에서 “밀물과 썰물이 찍힌 서해와/ 달의 숨소리가 높은 동해와/ 조릿대 사분대는 대관령을/ 보지 않아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바다와 바람의 호흡만으로”도 “눈 대신 귀가 환하게 열렸”고, “나를 부르는 소리에 말랑한 뼈가 하나씩 돋았”던 것이다. 요컨대 엄마 뱃속의 [둥근 방]은 모든 생명체의 기원이자 삶의 터전이었고, 산과 바다와 하늘과 땅과 모든 생명체들이 살아 움직이는 대우주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애초에 한 방울의 물이었지만 홀로 자라는 물이었던 나, 꽉 막힌 방, 어둡지만 환환 그곳에서 파랗게 움이 트고 있었던 나, “밀물과 썰물이 찍힌 서해와/ 달의 숨소리가 높은 동해와/ 조릿대 사분대는 대관령을/ 보지 않아도 볼 수 있었던 나”, “바다와 바람의 호흡만으로/ 눈 대신 귀가 환하게 열”리고, “나를 부르는 소리에 말랑한 뼈가 하나씩 돋았”던 나----. 하늘 기둥은 떡잎부터 다르듯이, 시인의 꿈을 꾸고 있는 태아는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는 ‘둥근 방’ 밖을 무한히 살펴보고 성찰할 수 있는 역사 철학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태아의 꿈은 시인의 꿈이고, 시인의 꿈은 새로운 세계를 상징과 은유로 연출해낼 수 있는 [둥근 방]의 꿈이라고 할 수가 있다. 꿈은 꿈을 허위가 아닌 진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을 때 모든 기적이 일어나는 것처럼, “부드러운 손이 바깥에서 나를 어루만질 때/ 온몸이 따뜻해”졌고, “그때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어디선가 만난 것만” 같았던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우연이 아닌 필연의 쳇바퀴를 굴리며 태어나듯이, 엄마와 나는 이처럼 생물학적고도 화학적인 끈으로 이어졌던 것이고, 그 결과,
아늑하지만 안개 속 같은 방
발길질을 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꾹 참고 기다리고 있었다
꼭 만나야 했다
라는, 참음과 그 의지 하나로, “퉁퉁 부은 발을 어루만지며/ 태명을 불러주던 다정한 그 사람을” 만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승애 시인의 [둥근 방]은 언어로 씌어진 존재의 집이고, 이성애 시인의 ‘상상력과 상상력’으로 쓴 시이며, 나와 당신과 우리 인간들 모두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태아의 꿈’을 들려주기 위한 노래라고 할 수가 있다. 둥근 방----, “해의 시간을 걸러 내린/ 만장일치의 발효”([술 익는 소리])와도 같은 둥근 방----, 이승애 시인의 [둥근 방]은 사적인 ‘나’와 ‘나의 꿈’을 ‘우리’와 ‘우리들의 공적이고도 신화적인 꿈’로 승화시키며, ‘둥근 방’의 기원과 그 역사를 오랜 시간에 걸쳐 ‘만장일치의 기적’으로 발효시킨 것이다.
이 세상의 근본물질은 물이고, 물 속에는 불과 공기와 흙 등, 그 모든 원자들이 다 들어 있다. 너와 나, 남과 여, 진리와 허위, 적과 동지, 물과 불, 공기와 흙 등의 이분법은 상대적이지만, 그러나 이 상대성마저도 ‘만물일여萬物一如’의 둥근 방, 둥근 우주 속의 아주 작은 현상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승애 시인의 [둥근 방]은 모든 생명의 기원이자 첫 시작이고,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삶이자 죽음인 ‘윤회의 쳇바퀴’이라고 할 수가 있다.
지렁이 하혈하는 밤
이서빈
여보게
지렁이 흐느끼는 소리 들리지 않는가
죽은 지렁이 혼 땅에 내려앉지 못하고
산허리 강발치 자욱한 안개로 떠돌고 있네
세상 불 켜지고 꺼지는 일, 모두 지렁이 환영幻影일세
징그러운 몸뚱이라 희롱하지 말게
죽은 영혼에 쌀 한 숟가락 넣어주듯
종種 영혼 한 톨 부활위해
밖을 숨기고 흰배로 중력을 걷어내며
꿈ڪ 틀ڪ 꿈ڪ 틀, 제 안의 온도 이식하는 것 좀 보게
누가 자신의 몸 저 지렁이인 줄 알겠는가
살충제 먹은 지렁이 하혈소리 지구를 적시고
속이 타 땅위로 올라오다 땡볕에 녹아
여기저기 시체 끌고 가는 불개미 운구 행렬 보이지 않는가
마당 한 쪽 흙,흑흑 바싹 말라 푸석한 지렁이 눈물소리
그건 세상에 위험이 급물살로 달려오고 있다 위급 알리는 통곡일세
만물의 영장 인간 파릇파릇 숲
모든 생명체는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모퉁이 안쪽에서
지렁이가 종야終夜 토해낸 눈물 한 점일 뿐이란 걸
자네는 아는가!
----이서빈 외,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시집, {함께, 울컥}에서
숲은 이산화탄소를 들이마시고 산소를 토해낸다. 모든 동물들은 산소를 들이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뱉어낸다. 이처럼 대자연은 상호 보완적인 공생의 관계 속에서 만물의 공동 터전이 된 것이다. 자연이란 인간이나 그 어떤 신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우주적인 질서라고 할 수가 있다. 자연은 거대한 그물망처럼 점조직으로 짜여져 있으며, 하나의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룬다. 이 선과 선들이 면을 이루고, 이 면들이 입체를 이루고, 이 입체와 입체들이 대자연의 우주가 된다. 대자연에는 어느 것 하나 우연히 존재하는 것도 없고, 어느 것 하나 더 하거나 뺄것도 없다. 물과 불과 바람과 흙의 균형과 조화, 산과 강과 바다와 들과의 균형과 조화, 태양과 달과 별과 은하계와의 균형과 조화, 산소와 이탄화탄소와 수소와 음과 양 등의 균형과 조화를 생각해보면 대자연은 너무나도 완벽하고 경이로운 체계와 질서로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빙하기에는 수많은 탄소들이 지하에 매장되어 있었고, 그래서 바다의 수위가 오늘날 보다 120m나 낮았다고 한다. 동식물들의 사체에 지나지 않는 화석연료를 너무나도 많이 채굴해낸 결과, 오늘날에는 남, 북극의 빙하들이 다 녹아내리고, 지구는 점점 더 더워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지구촌의 위기는 화석연료, 즉, 에너지 과다 사용의 위기이며, 자연의 법칙에 도전한 우리 인간들의 만행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은 본래 어느 악마보다도 더 월등하게 악질적인 악마이며,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돌대가리 중의 돌대가리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연이 거대한 그물망처럼 점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 모든 것이 균형과 조화 속에서 존재하고, 따라서 자연은 만물의 터전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나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순간, 우리 인간들은 모든 동식물들과 함께, 지구촌 대참사라는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게 된 것이다. 만일, 호랑이와 곰들에게 총과 칼을 쥐어준다면 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종의 균형과 자연보호 차원에서 지구촌 인구의 60억 명 정도는 다 죽여버릴 것이다. 모든 동식물들이 ‘대자연 만세’를 부르고, 너도 나도 춤을 추며, 더없이 기뻐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이서빈 시인의 [지렁이 하혈하는 밤]은 그가 이끌고 있는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시집, {함께, 울컥}에 수록되어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여기 열다섯 명의 시인이/ 앓고 있는 지구의/ 말을 번역했다”, “지구의 신음을 찍어 한 자 한 자 시를 엮었다”, “지구는 한 번도 인간을 헤친 적 없고/ 인간은 한 번도 지구를 떠나서 산 적 없다”, “동물의 숨소리 식물의 숨소리가/ 봄을 뚫고 튀어나와/ 싱싱해 지는 그날까지/ 우리는/ 생태계를 새파랗게 키워낼 것이다.”(이서빈, {함께, 울컥}, 머릿말)
지렁이는 빈모강에 속하는 환형동물이며, 습기와 유기물이 충분한 토양에서 산다. 대부분 토양의 표면에서 살지만, 추운 겨울에는 약 2m의 굴을 파고 들어가고, 몸길이는 약 10cm 정도이며, 체절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무엇을 보거나 들을 수도 없고, 빛과 진동에 민감하며, 부패한 생물체를 먹고 살아간다. 지렁이는 토양에 공기를 유통시키고, 배수를 촉진시킨다. 유기물질을 빠르게 분해하여 영양이 풍부한 물질을 제공해주고, 또한, 수많은 어류들의 미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서빈 시인의 [지렁이 하혈하는 밤]은 생태환경 측면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지렁이 한 마리의 흐느낌에서 지구촌의 신음소리를 듣는 시인만이 쓸 수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여보게/ 지렁이 흐느끼는 소리 들리지 않는가”라는 시구는 지렁이를 하찮은 미물이라고 폄하하는 우리 인간들의 마비된 의식을 일깨우고, “죽은 지렁이 혼 땅에 내려앉지 못하고/ 산허리 강발치 자욱한 안개로 떠돌고 있네”라는 시구는 죽어서도 정처없이 떠도는 지렁이의 너무나도 안타까운 비명횡사를 말해준다. 이 세상에 “불 켜지고 꺼지는 일”은 모두가 “지렁이 환영幻影”이며, 이 세상의 지렁이가 사라지면 모든 동식물들이 다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어느 누가 감히 지렁이를 징그러운 몸뚱이라고 희롱할 수가 있겠으며, 어느 누가 “죽은 영혼에 쌀 한 숟가락 넣어주듯/ 종種 영혼 한 톨 부활위해/ 밖을 숨기고 흰배로 중력을 걷어내며/ 꿈ڪ 틀ڪ 꿈ڪ 틀, 제 안의 온도 이식하는” 지렁이의 삶의 철학과 그 예술 앞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들의 탐욕과 만행에 의해 “살충제 먹은 지렁이 하혈소리 지구를 적시고/ 속이 타 땅위로 올라오다 땡볕에 녹아/ 여기저기 시체 끌고 가는 불개미 운구 행렬”을 보게 된다. 요컨대 이서빈 시인과 지렁이는 둘이 아닌 하나이며, 나는 그 지렁이와 함께 피를 토하듯이 한 자, 한 자 온몸으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서빈 시인의 [지렁이 하혈하는 밤]은 검은 잉크로 쓰지 않고 붉디 붉은 피로 쓴 시이며, 또한, 그 시는 손으로 쓰지 않고, 지렁이처럼 “꿈ڪ 틀ڪ 꿈ڪ틀” 온몸으로 쓴 것이다.
마당 한쪽의 흙이 바싹 말라가면 흑흑하는 지렁이의 눈물소리가 들려오고, 지렁이의 눈물소리가 들려오면 그것은 세상의 위급을 알리는 통곡소리가 된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파릇파릇한 숲만을 보지, 이 파릇파릇한 숲이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모퉁이 안쪽에서/ 지렁이가 종야終夜 토해낸 눈물 한 점”의 소산이라는 것을 모른다. 부분은 전체와 관련이 있고, 전체는 부분과 관련이 있듯이, 지렁이 한 마리의 힘이 모든 생명체를 다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지렁이 하혈하는 밤]은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들’과 이서빈 시인이 하혈하는 밤이며, 대자연의 푸른 숲과 모든 생명체들이 다 죽어가는 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의 탐욕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특권으로 포장되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특권이 ‘돌대가리 중의 돌대가리들’인 악마들의 잔혹극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아, 이서빈 시인이여,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동물의 숨소리 식물의 숨소리가/ 봄을 뚫고 튀어나와/ 싱싱해 지는 그날까지/ 우리는/ 생태계를 새파랗게 키워낼” 수가 있단 말인가?
돌대가리들 중의 돌대가리들인 악마들이 더 많은 특권과 더많은 돈을 벌기 위해 모든 생태환경을 다 파헤치고 저렇게 지랄발광을 하고 있는 이 시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