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Ω‥‥‥스크랩┃펌 스크랩 되새기는 6월항쟁
오월의햇살 추천 0 조회 478 12.06.07 08:1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1987년 6월 항쟁은 전국적으로 500만명 이상이 참가해 20여일 동안 진행된

반독재민주화투쟁이었습니다. 노동자, 농민, 학생들 뿐만 아니라 지식인,

예술가, 종교인을 포함한 전국민이 하나로 뭉쳐

독재정권에 항거한 시민운동이었습니다.

 

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민중의 피를 밟고 등장한 살인마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영원한 독재를 폭압 철권통치를 자행합니다.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노동관계법, 국가보안법 등을 개악하여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정치적 반대세력을 더욱 강력히 탄압합니다.

 

또한 1980년 말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언론기본법을 만들어 언론을

권력의 시녀로 전락시켜 '땡전뉴스'를 통해 국민의 눈과 귀를 막아버립니다.

 

아래 땡전뉴스 영상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전두환의 장기집권 음모가 노골화되어 갈수록 민중의 저항의지 또한

그에 비례해서 한층 높아갑니다. 

 

 

그러다 저항의 불씨에 불을 붙이는 사건이 터집니다.

1984년 1월 14일 박종철 열사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살인을 당합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성명서 발표와

추도미사및 기도회 항의농성 시위가 들불로 번집니다.

국민들은 이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합니다.

 

 

 4월 13일 영원한 독재의 꿈을 버리지 못한 전두환은 국민의 직선제 요구를

무시하고 자신의 거수기인 대통령 선거인단으로 대통령 선거인단으로

대통령 선거를 연내에 실시하고 개헌논의를 서울 올림픽 뒤로 미루겠다는

'413호헌조치'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413호헌조치는 즉각 거센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각 계층속에서 호헌조치를 반대하는 서명과 농성이 계속됩니다.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의 7주년이 되는 그날,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사건이

터집니다. 광주민중항쟁 7주년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당국은 철저하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했고 그 과정 일체도 조작해서 국민을 다시한번

속였다"며 고문한 경관이 모두 다섯명임을 폭로합니다.

 

'호언철폐, 독재타도' 구호가 전국적으로 퍼져 일어납니다.

 

5월 27일 이러한 여망을 딛고 마침내 광범위한 민주세력을 묶어 세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탄생합니다.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을 규탄하고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국민대회를 6월 10일

대규모로 벌이기로 결정합니다.  그날은 민정당의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던 날이었습니다.

 

6월 5일 국민운동본부는 국민대회 행동강령 요강을 발표합니다.

 

이런 움직임에 당황한 정부는 6.10대회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경찰병력을 총동원하여 이를 원천봉쇄하려고 사럭을 다합니다.

 

 

6월 7일부터 주요 대도시에서 검문검색이 강화되었으며 인쇄소등에 대한 경찰의

경계와 수색도 심해집니다. 전국 경찰에 갑호비상을 발령하고 버스, 택시 회사에

경음기를 떼어내는 쇼도 벌어집니다. 심지어 행인들의 애국가 합창을 막기위해

오후 6시에 시행하던 애국가 옥외 방송도 금지시킵니다. 그리고 대회 전날인

9일부터는 민주인사에 대한 가택연금을 실시했으며

전국 110개 대학을 전격 수색하여 시위용품을 압수하기도 합니다.

 

6월 9일 '6 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렸습니다.그곳에서

이한열 열사가 전경이 쏜 SY-44직격 최류탄에 맞고 쓰러집니다.

 

 

이한열 열사의 피격사건은 전국으로 알려졌으며 결국 87년 6월 항쟁의 불꽃을 당기게

됩니다.6월 10일  '6 10고문살인은폐 규탄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개최 장소인

성공회대성당이 원천봉쇄당합니다. 오전 11시 15분 서울시 송파구 잠실 체육관에서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후보로

선출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전두환이 노태우와 손을 잡고 연단 앞쪽으로 걸어나가 번쩍

치켜들면서 신군부와 독재계승의 축제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오후 12시 성공회 대성당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합니다. 잠시후 종탑

꼭대기에지선스님과 소설가 유시춘이 나타납니다. 국민운동본부 지도부를 대표하여

스님이 마이크를 잡고 성명서를 낭독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오후 6시 거대한 함성이 도심을 울립니다. '호언철폐 독재타도' 학생들이 먼저

나서고 시민들이 속속 동참하기 시작합니다.

 

 

차들은 일제히 경적을 울립니다.

 

 

6 10국민대회는 전국 22개 지역에서 24만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가두시위로

발전하였습니다.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시위가 점차 격화되면서 시청한곳,

파출소 15곳, 민정당 지구당사 2곳 등이 파손됩니다.

 

 

 

 

경찰은 그날 전국에서 3831명 연행했다고 발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6월항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저녁 명동성당에서 800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농성을 시작합니다.

6월10일 밤부터 시작되어 15일까지 5박6일동안 진행된 명동성당 농성은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희망이었습니다.

 

 

시민들은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사람들에게 성금은 물론 빵 음료수 의약품등을

전달하고점심을 먹으러 나왔던 회사원들은 그 자리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남대문 시장상인들도 성당에서 농성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옷을 보냅니다

 

 

6월 18일 국민운동본부는 '최루탄 추방대회 개최' 장소를 원천봉쇄했음에도

불구하고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 열사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상황에 분노한

시민들이 전국적으로 150만명이상이 참여하게 됩니다.

 

 

 

 

6월 29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 평화 대행진'이 진행됩니다.

노태우가 갑자기 TV에 나와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및 양심수 석방,

국민의 기본권과 언론자유보장, 지방자치제 실시,

대학 자율화' 등의 내용을 담은 소위 '6 29선언'을 발표합니다.

 

 

 

노씨는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모든 공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히고 비장한 표정으로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생쑈를 감행합니다. 바로 다음날

전두환은 노씨의 모든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합니다.

이로써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더 대한민국의 민주화 투쟁은 그 막을 내리고

국민의 눈과 귀는 헌법개정과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틀에 갇히게 됩니다.

 

 

7월 9일 백만이 넘는 인파가 모였던 시청광장의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은

6월 항쟁의 폐회식이었습니다.

 

 

운구차가 떠난 후의 경찰의 폭력진압에되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헌법을 고치고 민주세력의 승리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젖어 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6월 항쟁은 독재정권 타도의 완전한 승리가 아닌

직선제 개헌이라는 반쪽짜리 승리에 그쳤습니다.

 

그 결과 민주세력의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더욱

극심해졌지만 함께 싸웠던 중산층은 노동자의 탄압에는 외면했습니다. 

 

전국민이 한마음으로 싸웠으나 영호남은 결국 지역주의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지역주의가 고착화 되는 단초가 됩니다.

 

 

 

 

  • 1966년 8월 29일 출생
  • 1982년 광주 진흥고 입학
  • 1986년 연세대 상경대학 경영학과 입학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동
  • 1987년 6월 9일 '6 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 시위도중 최루탄에 피격당해 쓰러짐
  • 1987년 7월 5일 새벽 2시 5분 세브란스 중환자실에서 뇌손상으로 27일동안 처절하게 투병하다 운명
  • 1987년 7월 9일 '애국학생 故 이한열열사 민주국민장' 거행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대한민국을 위하여 - 윤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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