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9일 목요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루카 2,22~35)
When the days were completed for their purification according to the law of Moses, the parents of Jesus took him up to Jerusalem to present him to the Lord,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아는 사람은 계명을 지킨다. 그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안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 하느님의 계명은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안다(제1독서).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정결례를 바치러 갔다가 성전에서 시메온을 만난다. 시메온은 예수님을 안고 감격스러워하며 계시의 빛이신 구원자 주님을 뵈었다고 고백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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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모든 것은 지나간다!” 마음속에 이런 말 한마디 간직하고 살면 어떨지요. 이 말은 다윗 임금이 세공사를 시켜 자신의 반지에 새기고 다닌 글귀라고 합니다. 큰 승리를 거두어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고, 기쁨에 도취하여 자만하지 않도록, 반대로 큰 절망에 빠져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낙담하여 좌절하지 않도록 다윗 임금은 이 글귀를 보며 마음을 다스렸다고 하지요. 우리 교회에서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비슷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성녀의 말씀을 노랫말로 만들어 아름다운 곡을 붙였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팔에 안아 든 시메온의 모습을 묵상하면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이런 아름다운 글귀가 생각납니다. 시메온은 한평생을 살면서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긴 세월을 살아도 인생의 끝자락에 서면 한평생이 하룻저녁 꿈과 같은 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시메온은 영원한 진리이신 분, 구원의 주님을 품에 안고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살아온 시간은 모두 사라졌지만 주님만이 영원하시기에 이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기쁘다고 기쁨에 매이지도 말고 슬프다고 슬픔에 잠겨 있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하고 외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 영원한 것이 보입니다. 시메온이 품에 안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한 주님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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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성전에서 봉헌식을 해야 했습니다. “사내아이를 낳았을 경우,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레위 12,2-3)는 성경의 기록 때문입니다. 마리아께서도 이런 이유로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러 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메온을 만납니다. 그는 나이 많은 예언자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예수님을 팔에 안고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 이제는 당신 종이 평화로이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눈으로 구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 뵈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할아버지 시메온이 예수님을 안고 있는 모습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욕심이 많아집니다. 그런데 시메온은 달랐습니다.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살아왔기에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사는 것은 이렇듯 사람을 순수하게 합니다. 우리 역시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미구에 맞이할 죽음입니다. ‘빨리 돈을 모으고, 아이들을 혼인시키고 그럴싸한 집도 마련해 줘야 할 터인데! 그러기 전에는 죽어선 안 되는데!’ 이렇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시메온 할아버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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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메온 예언자는 아기 예수님을 뵙고 감격합니다. 그는 구세주를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러한 믿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의롭게 살면서 신앙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는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졌음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파브르’는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곤충 학자입니다. 그가 남긴 『곤충기』는 초등학생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명작입니다. 그런데 그는 10권으로 된 이 책을 56세 때 집필하기 시작해, 84세 되던 해에 완성합니다. 무려 30년 가까이 걸려 완성한 작품입니다. 그는 가난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교사가 되었지만, 평생을 곤충을 관찰하며 살았습니다. 학교에서 은퇴하자 곧바로 쓰기 시작한 책이 『곤충기』였습니다. 열정을 가진 사람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시메온은 구세주를 만날 것이란 염원을 지녔기에 죽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건강한 삶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파브르 역시 집념을 가졌기에 ‘30년의 결실’을 84세의 나이에 완성합니다. 후회 없는 삶을 실현한 것입니다. 누구나 시메온 예언자가 될 수 있고, ‘파브르의 삶’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열정과 아름다운 집념으로 살아가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가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양승국신부-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교 전통 안에서 첫 번째 것에 대한 중요성이나 의미 부여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과일이나 농작물의 첫 번째 수확은 무조건 하느님께 먼저 바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각 가정에서 키우고 있던 가축들의 맏배 역시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각 가정의 첫 아들 역시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당연지사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첫 아들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하려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어서 가난한 서민들이 주로 바치곤 했던 비둘기 두 마리를 제물로 바치며 정결례를 거행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며 크신 자기 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만사를 주관하시고 우주를 지배하시는 만왕의 왕, 성전의 참주인, 정결례의 주관자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정결례도 비둘기 두 마리도 전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가난한 가정의 아기와 똑같이 모세의 율법에 순종하시며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묵묵히 규정을 준수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아기 예수님의 신원과 진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보물 중의 보물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메온은 남달랐습니다. 그는 이제 나이가 들어 세상 뜰 날이 얼마 남지 않는 노인이었는데, 루가 복음사가 표현에 따르면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은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에 시메온은 즉시 성전 안으로 들어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며 가까이 다가오시는 메시아를 향해 안테나가 고정되어 있었던 시메온이었기에 아기 예수님 안에 깃들어있던 신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 즉 구세주 하느님을 자신의 두 팔에 받아 안은 시메온의 마음은 얼마나 감개무량했겠습니까? 시메온은 감동과 감격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가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주님의 구원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시메온이었기에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평생의 소원이었던 하느님의 강생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였고, 그분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았으며, 그분께서 발하시는 생명의 빛이 자신을 감쌌기에 시메온은 일말의 아쉬움이나 두려움 없이 이 세상을 떠나가는 것입니다.
머지않아 우리에게도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예언자가 바로 시메온입니다. 그는 비록 늦었지만 참으로 하느님을 만났기에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품에 안아보는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기에 아무런 아쉬움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도 평화로운 얼굴로 이 세상을 떠나갑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과제 한 가지가 주어집니다. 적당히, 설렁설렁, 대충 대충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을 우리가 만져보는 일입니다. 우리 품 안에 안아보는 일입니다.
진정으로 가난한 이웃을 섬겨보면 그 이웃 안에 하느님이 계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바보 같은 겸손으로 못마땅한 이웃을 큰마음으로 포용하는 순간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것입니다.
금세기의 천재를 뽑는다면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인슈타인’을 꼽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재 아인슈타인에게 이러한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하네요.
그가 한 번은 버스를 탔는데 차장이 차표를 검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옷을 아무리 뒤져도 차표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한참을 뒤적거리는데, 차장이 누군가 하고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아인슈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차장은 그만 됐다고 말하면서 더 이상 뒤지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요.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호주머니 속을 뒤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차장은 자신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괜찮다는데 왜 계속 그러십니까?”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인슈타인이 큰 소리로 답했다고 하네요.
“당신이야 필요 없지만 나에겐 꼭 필요한 거라오. 차표가 있어야 내가 어디서 내려야 할이지 알 것 아닌가 이 사람아!!”
천재라는 소리를 듣던 그였지만 그는 심한 건망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공부하는 학문에 대해서는 놀라운 집중을 가졌고 또한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세기의 과학자, 천재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아인슈타인의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도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질, 지위, 또한 많은 능력과 재주까지도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딱 한 가지,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만을 가져야 하고, 이 사랑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바로 ‘사랑’ 때문에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고, 이 사랑을 통해 진정한 구원을 얻게끔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육화되어 오셨습니다. 이 사랑만을 잊지 않고 내 마음 깊숙이 간직해야 하는데, 우리들은 끊임없이 이 사랑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께 얼마나 많이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시메온이라는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뵙게 될 것이라는 성령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 오랜 기다림 끝에 그리스도를 자신의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갓난아기라 말을 할 수도 없었을 텐데, 이 갓난아기가 어떻게 그리스도라고 확신을 할 수 있었을까요?
주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곧바로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었고,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불러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 계신 주님을 알아 뵐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받아서 삶을 꾸려 나가고, 주면서 인생을 꾸며 나간다(윈스턴 처칠).
기다림의 보상
-안용태 신부-
성령이 그 위에 머무르는 사람 시메온, 그는 어떻게 다른 이들은 알아보지 못하였던 아기 예수님이 하느님의 그리스도임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소위 ‘신기神氣’가 있어서일까요?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능력이나 은총이 있었을까요? 하느님의 업적을 알아보는 데 필요한 것은 ‘신기’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굳은 신뢰와 기다림입니다. 노인 시메온은 아마도 우리가 다니는 성당의 수많은 할아버지들과 같은 모습일 테고,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 남다른 점이 있었다면 ‘의롭고 독실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렸다.’는 것뿐입니다. 제1독서는 그런 모습을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된다.’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이 없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기다림이 없으면, 설령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해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의 성탄도 내 곁의 일이 아니라 먼 옛날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는 잠든 사람입니다. 다시 한 번, 하느님의 나라(다스리심)는 지금 우리의 일상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볼 눈 있는 사람들
-홍성민 신부-
미국 유학 시절MoMA라는 뉴욕현대미술관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사실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뉴욕에서 부전공으로 미술을 공부하던 친구가 유명한 곳이니 꼭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 친구와 함께 간 것은 저에게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마치 미술관의 큐레이터처럼 작품 하나하나에 대해 이야기 해주고, 또 그림에 담긴 화가의 인생 이야기나 일화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의미가 달라 보이고 전에 없던 감동까지 느꼈습니다.
오늘 복음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아마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시메온과 한나라는 예언자 단 두 사람뿐입니다. 왜 똑같은 모습의 예수님을 다른 사람은 알아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 시메온과 한나는 한평생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살았던 사람이라 표현됩니다. 예수님을 뵙기 전에 이미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술품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미술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뵙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나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신앙과 실천이 없는 기도는 신앙생활을 지루하게 만들고 의무감과 죄책감만 들게 합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뵙고 기뻐했던 시메온과 한나처럼 우리도 삶에서 예수님을 뵙고 기뻐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미워하지 않는 아주 쉬운 방법
-김찬선신부-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계명을 거스르는 것은 단지 계명만을 거스르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을 주신 바로 그분을 거스르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분을 적극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가운데는, 아니 저에게는 계명과 계명을 주시는 분을 분리하는 마음과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지는 않았지만 당신을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와 같지요. 정말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러나 매우 궁색합니다. 변명이고 합리화일 뿐입니다.
사랑을 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그분을 알기만 하는 정도라면 계명도 아는 것으로 그치고 지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지 않는 앎이란 저 아프리카에도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고, 그 아프리카 사람도 우리와 같다는 것을 아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나로서 살고 그는 아프리카에서 그로서 살 뿐입니다. 알지만 관계가 없습니다. 알지만 거리가 있습니다. 당연히 만남도 하나 됨도 없습니다.
이에 비해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도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분리적입니다. 아무리 꽃이 아름다워도 그가 없는 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늘을 사랑한다 해도 그를 제쳐놓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봐도 그것 안에 그가 있고, 무엇을 해도 그가 원치 않는 것 내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싫어하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그가 좋아하는 것을 어찌 아니 합니까?
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무얼 좋아하는지 아는데 어찌 그것을 아니 하고 그가 무얼 싫어하는지 아는데 어찌 그것을 할 수 있습니까? 사랑 없이 아는 것은 알아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랑으로 아는 것은 아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강제입니다. 사랑하는 그가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내가 강제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하도록 강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이고, 그 계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한 사랑을 사랑할 것이고, 사랑을 사랑하는 한 절대로 미움을 사랑치 않을 것이며, 미움을 사랑치 않는 한 미워할 일도 없고 무관심 할 수는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미워하지 않으려 애쓸 필요 없습니다. 사랑을 사랑하면 됩니다. 아주 쉽습니다.
봉헌
- 김혜림 수녀-
나의 부모님, 특히 아버지께서는 어릴 때부터 우리 5남매를 두고 늘 “자식 다섯 중에 한 명쯤은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지 않겠느냐 ?” 라고 말씀하셨다. 막내인 내가 봐도 언니 · 오빠들 중에는 별로 수도나 사제성소의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았다. 만일 우리 중에 누군가가 성소를 받는다면 가장 착한 내가 아닐까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아버지께서는 은근히 내 관리에 들어가시는 듯했다. 대학생 때 혹시라도 늦게 들어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다 큰 게 늦게 돌아다닌다.” 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어쩌다 남학생에게 전화라도 오는 날엔 “쪼그만 게 무슨 남자친구냐.” 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장단에 맞출 수 있었겠는가 싶지만 지금은 아버지를 놀리는 하나의 추억거리가 되었다.
결국 결정적 봉헌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학 2학년 때 맹장염에 걸린 것을 모르고 하루를 꼬박 참다가 맹장이 터져버렸다. 병원에서 수술 전에 의사는 “비키니를 입을 거냐 ?” 고 물었다. 의아해 하는 내게 의사는 놀리듯 말했다. “배를 세로로 가르면 수술이 더 깨끗하게 되지만 비키니를 입겠다면 가로로 갈라주겠다.” 나는 순간 별 생각 없이 “상관없어요.” 라고 대답했다.
마취에서 깨어나자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네가 수술을 받는 동안 주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 아이에게 수도성소를 주시려면 깨어나게 하시고, 수도성소가 없다면 이 순간 그냥 데려가시라고.” 기가 막혔다. 요즘 세상에 맹장수술 받다가 죽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아버지는 생전 책도 안 읽던 내가 언제부터인가 교회서적을 읽는 것을 보고 성소의 뜻이 있나 넘겨짚으신 것이었는데 과다하게 펄쩍 뜀으로써 더욱 확신을 드리게 되었으니 내 꾀에 내가 넘어간 꼴이 되었다. 확실한 증거는 바로 배를 이리 가르든 저리 가르든 상관이 없다고 대답한 나의 말 때문이었으니 이 또한 내가 흘린 정보가 아니던가.
예수님은 온 인류를 비추시는 빛이 되실 아기였고,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이 계획하신 자유와 생명으로 인도할 구원자로 세상에 보내신 귀한 분이셨다. 시메온의 말을 들은 아기의 부모는 감격을 하였지만 그 감격과 경탄은 평화롭고 감미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성모님은 아기의 탄생을 기뻐하기도 전에 세상을 위해 예견된 고통의 삶을 살아야 하는 아드님의 봉헌을 어떻게 감당하셨을까 ?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녀를 독립시킬 때 자신의 몸에서 날개가 떨어져 나가는 듯이 힘들어 한다. 자신들의 분신인 자녀에게 더 이상 부모의 직접적인 보살핌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심리적인 독립은 부모 편에서 더 어렵게 되는 것이다. 부모들에겐 자녀를 양육하는 순간순간이 봉헌 행위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눈을 감는 순간까지 노심초사하며 그렇게 힘겹게 부모의 역할을 다하는 분들이 아니신가. 순간순간 일상의 삶에서 수없는 봉헌이 이루어지는 부모님들께, 또 돌아가신 부모님들을 위해 이 해가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다.
몇 년 동안 백혈병으로 고생하던 한 소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병실을 정리하던 중에 소녀가 몰래 기록했던 일기장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오늘도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 엄마를 건강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햇살이 환했어요. 감사합니다.’
‘간호사 언니가 활짝 웃었어요. 뭔가 좋은 일이 있었나 봅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니 놀라운 일이에요.’
소녀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망 대신 감사드리는 일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습이 과연 어떠한가요? 아름답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화장을 하고, 예쁘고 멋진 옷으로 자신을 꾸밉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성형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외적으로 꾸미는 것보다 더 큰 아름다움, 진실한 아름다움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내적인 아름다움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늘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내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환자촌을 방문했는데, 마침 한 수녀님께서 나환자의 상처를 씻어주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인상을 찌푸리며 구역질을 참으면서 수녀님께 말했지요.
“저는 수천 금을 준다 해도 수녀님처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수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요.
“그런가요? 저 역시 수천 금이 아니라 수만 금을 준다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이 일을 할 수가 있답니다.”
사실 돈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은 이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욱 더 각박해지고 살기 힘들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오히려 사람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지고, 더욱 더 열심히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이웃들에게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갓난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시메온 예언자처럼, 이 세상 안에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찬미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는 둥글고 종착점으로 보이는 곳이 출발점이 될 수 있다(아이비 베이커 프리스트
거울에 비추어 보기
-손영순 수녀-
신앙생활을 하면서 거울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신분과 상관없이 그 사람 앞에만 서면 나의 모든 부끄러운 면이 드러나는 것 같고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되고 그 사람을 모델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이가 많으신 어떤 주교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일곱 살짜리 어린이라도 그가 나보다 성덕이 높으면 기꺼이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누구를 모델로 하고 살고 있습니까? 돈 많은 사람, 출세한 사람, 사회적으로 명예를 지닌 사람…. 이런 이들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까? 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계십니까? 신앙인으로서 본받아야 할 사람 한두 명쯤을 마음에 두고 그와 같은 삶을 살아보겠다고, 날마다 결심하고 행동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는지요. 자녀들에게 성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런 이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십시오. 우리의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날마다 우릴 비추어주시는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또한 타인의 모델이 되고 타인들을 비춰주는 것과 같은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게 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세상의 어둡고 숨겨진 생각들을 드러내고 거울처럼 비춰주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둔 밤의 빛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 노인은 태어난 아기 예수를 알아보고 이교 백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라고 증언 합니다.
시메온은 어떻게 갓난아기를 보고 즉시 구원자요 계시의 빛임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우리 표현으로 하면 神氣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의 외할머니는 굿이나 푸닥거리는 하지 않으셨지만 신이 내린 분이셨습니다. 신기가 있으셔서인지 정말 대단한 직관력을 가지셨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미래가 어떨지 내다보는 눈이 있으셨습니다. 잡신도 영은 영이기에 얼마든지 그럴 능력이 있는 것이지요. 악령도 예수님을 알아봤으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도 시메온에게 영이 머물러 있음을 얘기합니다. 그는 의롭고 구원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인데다 그에게 머물러 계신 성령이 구원자를 보게 될 것이라 알려주셨기에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을 때 즉시 아기가 누구인지 알아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메온이 예언한 아기 예수는 계시의 빛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유보되는 계시의 빛이 아니라 이교 백성에게도 열려있는 계시의 빛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에게 볼 수 있게 하는 빛입니다.
하느님은 보이시는 만큼만 우리가 볼 수 있는 분이십니다. 보이시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나타내 보이신 하느님이고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하는 영의 빛, 계시의 빛이십니다. 나타내 보이신 하느님 없이 우리가 하느님을 절대로 볼 수 없고 영의 빛, 계시의 빛이 없이 하느님을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한국에서 저를 찾아온 분들이 있어서 같이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곳을 들렀는데 그 중의 한 곳이 “Lost Sea”였습니다. 말하자면 지하호수인데 한참을 내려갈 정도로 꽤 깊었습니다. 그 깊은 지하에 뱃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호수가 있다는 것도 놀랍고 인상적이었지만 더 인상에 남는 것은 지하로 내려가는 중에 한 체험이었습니다. 그들이 붙인 이름은 “Absolute Darkness Experience”입니다. 절대 암흑 체험이지요.
한참을 내려간 어느 지점에서 불을 완전히 껐습니다. 그야말로 빛이 하나도 없는 칠흑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칠흑 같은 밤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보였는데 빛이 정말 하나도 없으니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보려 해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처음 깨달았습니다. 나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 내가 눈을 감아서 보지 못하거나 나의 시력이 약해서 보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아무리 보고자 해도 그래서 눈을 부릅떠도 그리고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빛이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이 보게 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은 분명 나의 눈이지만 빛에 의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보려고 하고 보는 것은 능동태이지만 보게 되는 것은 수동태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도 있고 영적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둔 밤도 있습니다. 바로 이때 그리스도는 보게 하시는 계시의 빛이십니다.
새벽을 열며
두 마리의 염소가 좁은 산길을 가고 있었는데, 한 마리는 위로 오르려 하고 다른 한 마리는 내려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길이 너무 좁아서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자리가 있을 뿐이었지요. 그리고 길옆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였고요. 결국 두 마리는 도중에서 만나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두 마리는 서로 바라보다가 꼿꼿이 서서 마치 한 판 싸움이라도 벌일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두 마리의 염소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면서 싸울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두 마리의 염소 중의 한 마리가 길옆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한 마리만 무사히 그 길을 지나가던지, 아니면 싸우다가 두 마리 모두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래쪽에서 올라가던 염소가 길 위에 누었거든요. 아래로 내려가던 염소는 그 등을 딛고 내려갔고, 그제야 누운 염소는 일어나서 제 길로 올라갔습니다.
싸움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싸워서 힘들게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낮춤으로 인해 더 쉽게 쟁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힘없는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그것도 가장 초라한 마구간의 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들이 만든 법칙인 정결례를 따르는 모습까지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힘이 없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힘으로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사랑’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낮추는 하느님의 사랑에 시메온 예언자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제가 신학생 때 가장 존경했던 영성지도 신부님이 계십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신부님의 영성지도 방법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영성면담을 하는데, 신부님께서는 도무지 말씀을 안 하세요. 말씀 좀 하셔서 제가 올바른 영성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으면 하는데, 신부님께서는 저 혼자만 말을 하게 합니다. 당시 저는 신부님의 이 모습을 직무유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지요. 사실 말로 지도하는 것처럼 쉬운 것이 없거든요. 하지만 그 방법으로는 올바르게 인도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말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들어만 주실 뿐이었던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말을 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데 있다는 것. 즉 사랑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낮추어 상대방을 받아들이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내 자신을 계속 낮추어서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주님의 사랑이 뿌리 내릴 수 있습니다.
말하기보다는 들어주세요.
빠다킹신부
운전을 하면서
-조명연 신부-
운전을 하며 어디를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아침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산했고, 그래서 속도를 내는 차들이 상당히 많았지요. 그러나 저는 규정 속도로만 운전했지요. 왜냐하면 얼마 전에 속도위반 딱지를 하나 받았거든요. 저를 추월하는 수많은 차들…. 괜히 저만 어리석게 규정 속도를 지키는 것 같았고, 다른 차들이 저를 초보로 보지는 않을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듭니다. 사실 규정 속도로 운전을 하는 것과 과속을 하면서 운전하는 것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단지 몇 분의 차이인 것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자 하는 욕심, 그리고 남이 자기보다 앞에 있는 것을 못 참는 이기심으로 인해서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또한 남들에게 앞자리를 포기하면서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깨달았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시메온이라는 예언자가 나옵니다. 그는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랜 기다림에 지칠 만도 할 텐데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아드님을 직접 보는 영광을 얻게 되지요.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굳게 믿으며, 구원의 날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목격자
-허영엽 신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2월 나치 독일군한테 체포되어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 어느 날 콜베 신부가 있던 감방에서 탈출자가 생겼다. 독일군은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 중에서 열 명을 뽑아 굶어 죽이는 형벌을 당하게 했다. 그때 뽑힌 유다인 한 명이 자신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죽을 수 없다고 울부짖었다. 그때 콜베 신부는 그 사람을 위해 대신 죽겠다고 자원했다. 그 행동은 독일군한테도 큰 감동을 주었다. 결국 콜베 신부는 그 사람을 위해 대신 형벌을 받고 죽었다. 콜베 신부는 사제로서 그리스도의 고통과 십자가 죽음의 길을 기꺼이 따랐던 것이다. 콜베 신부는 스스로 희생과 사랑의 제물이 되어 죽었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보는 순간 성령이 그의 입을 움직였다. “주님,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님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저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시므온은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대표다. 믿음이 충만한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서 본 아기가 구세주임을 알아보았다. 성령의 비추임을 받았기에 시므온은 구원의 사건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시므온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자세, 곧 적극적인 수동의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영성적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으로 충만히 살아가는 시므온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우리도 주님의 뜻을 식별하고 볼 수 있는 은총, 그리고 그 뜻을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양승국신부-
<끝까지 기다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가 정한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당시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일정기간 부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정결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더불어 아이는 할례를 받습니다.
또한 첫아들은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총,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다시 주님께로 돌려드려야 한다는 관습에 따라 주님께 봉헌토록 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의롭고, 신앙심이 돈독했던 시메온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서 표현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위로 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습니다. 이 말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성령께서 시메온의 위에 머물러 계셨다는 점입니다. ‘과연 죽기 전에 꿈(메시아를 직접 뵙는 일)을 이루기나 할 것인가?’ 의심하던 시메온에게 성령께서는 '꼭 그렇게 될 것이다’고 확증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성령께서 시메온을 성전 안으로 이끄셨습니다. ‘성령의 인간’ 시메온이 드디어 평생의 소원을 성취하는 기쁨을 맛보게 될 순간이 온 것입니다.
시메온은 드디어 그가 평생에 걸쳐 애타게 기다려온 메시아를 자신의 두 팔에 안아보는 기쁨을 누립니다. 평생의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인생의 최종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감격의 정도, 감개무량의 정도가 지나치면 할 말을 잃습니다. 메시아를 자신의 품에 안은 시메온은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맙니다. 겨우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시메온은 이렇게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가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살아생전 자신의 눈으로 하느님을 직접 뵙는 기쁨,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은총이 아니지요. 그저 그렇게, 물에 물 탄 듯이 적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은총입니다.
시메온이 어떤 연유로 이런 기쁨을 맛보게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는 다른 무엇에 앞서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독실한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로웠습니다. 한 평생 성전 가까운 곳에 살면서 열렬히 기도하며 지냈습니다. 또한 메시아 오심을 늘 깨어 기다렸습니다. 이런 시메온이었기에 성령께서 늘 함께 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군요. 성령께서 시메온과 늘 함께 하셨기에 그는 독실한 신앙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에 의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에 한 평생 기도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에 자신의 눈으로 메시아를 직접 뵙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생에 걸친 소원의 성취는 꽤 늦게야 이뤄졌습니다. 거의 세상을 떠나기 직전이었습니다.
많은 경우 하느님의 뜻은 끝까지 기다려봐야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개입은 상당히 더디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회개합니다. 임종직전에 이르러야 하느님께 돌아서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기다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활동이 너무나 미미한 듯 보일지라도 인내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답답할지라도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히 바닥으로 내려간 그 이후에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할 때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포기한 그 시점에서 당신의 활동을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떻게 해서든 성령 안의 삶을 회복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성전 안으로 발길을 옮기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따뜻한 체온을 시메온처럼 가까이 느끼게 되길 간구합니다.
아기를 주님께 바치다.
-강영구 신부 -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그대에게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규정(탈출13,11-12)에 따라서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奉獻)합니다.
봉헌(奉獻)이란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생명(生命)마저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몸, 소유물과 지식, 지위와 명예 따위는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봉헌(奉獻)은 ‘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되돌려드린 봉헌물은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이 드러나는 거룩한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예수, 하느님께 봉헌된 요셉과 마리아, 하느님께 봉헌된 돈과 재물, 하느님께 봉헌된 시간, 하느님께 봉헌된 지식과 능력, 하느님께 봉헌된 사제, 하느님께 봉헌된 수도자, 하느님께 봉헌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룩합니다. 그 거룩한 봉헌물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이 드러납니다. 한편, 자기 것인 양 혼자 움켜쥐고 누리려는 사람들의 탐욕과 인색(吝嗇)함을 통해서 온갖 부정과 악취가 풍겨 나와 세상을 더럽히고 어지럽힙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 봉헌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인류는 봉헌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당신의 오늘도 하느님께 봉헌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김정용 신부 -
◆”제 아들은 제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 말은 초등학생 자폐아를 둔 어느 어머니의 말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얼마 동안은 그 사실을 모르다가 나중에야 자폐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마음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마음으로 어려움을 마다않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습니다. 때때로 깊은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지금도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계속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 어머니는 오히려 아들을 통해 삶을 배우고 인생을 알게 됐다고 할 정도로 예전의 시각과는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아들은 이제 마음의 그늘이 아니라 삶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선물은 참으로 많습니다. 다만 우리가 삶의 축복과 선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하찮게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더욱이 조금이라도 고통이 따르게 되면 그것을 선물로 여기기는커녕 생각조차 하기 꺼려합니다. 그러나 세상엔 고통이 따르지 않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마치 삶과 죽음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이듯이 말입니다.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던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 안에서 사랑(구원)과 고통, 생명(아기)과 죽음(십자가)을 동시에 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성취뿐만이 아니라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픈 고난까지도 함께 읽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시므온의 심안을 꼭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적지 않은 본당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상을 부활하신 예수님상으로 바꾼다고 합니다. 어둡고 우울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이미지가 신자들이 누려야 할 부활의 기쁨을 감소시킨다는 이유에서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부활의 영광과 기쁨의 원천이 바로 십자가로부터였다는 것을 영영 보지 못할까 봐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온 생애 동안 메시아의 강생을 기다린 시메온
-경규봉신부-
율법에 의하면 자녀를 낳은 산모는 일정한 기일(레위 12,1-5 : 남아 40일, 여아 80일)이 지난 후 사제에게 가서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정결예식으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출산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하기 위하여 양 한 마리를 번제로 드렸고, 출산으로 인한 부정을 없애기 위하여 비둘기 한 마리를 속죄제로 바쳤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번제로 바쳐야 하는 양 대신 비둘기를 바칠 수 있었다(레위 12,1-8). 이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배려인 동시에 부유한 자나 〕??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하느님을 경배하고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율법에는 가축의 수컷 맏배를 하느님께 드리도록 규정하고 있는데(탈출 34,19; 신명 15,19), 사람의 경우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레위 지파를 성별하심으로써 대신하도록 하셨다. 이때 장자의 수가 레위인의 수보다 많을 때에는 한 사람당 다섯 세겔씩을 속전으로 지불하도록 하셨다(민수 3,11-13.40-51; 8:16-18). 이러한 율법에 근거하여 예수님께서 장자이시므로 하느님께 봉헌된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메온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의로운 사람으로서 하느님을 열심히 공경했을 뿐만 아니라 독실하여 율법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왔다. 그는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어 위로를 받을 때가 오리라는 것을 굳게 믿으며 끈기 있게 기다렸다. 성령께서는 그러한 시메온 위에 머물러 계셨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메시아의 강림을 위해 기도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그를 어여삐 여기시어 성령을 통해 메시아를 보게 되리라고 계시하셨다. 성령께서는 시메온을 인도하시어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시메온은 성전에 온 많은 아이들 - 그 중에는 품위 있고 고상해 보이는 부모들이 데리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겠지만, 그 가운데 초라하고 볼품없는 시골뜨기 요셉과 마리아가 데리고 있는 예수님을 보고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아보고, 하느님께 찬양을 드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을 미리 보았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 자체가 이미 인류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에 구원은 벌써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고 세상 끝까지 미칠 그분의 영광과 은총을 찬양한다. 구원의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세계만방으로 확장될 것을 미리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조그마한 어둠도 없으신 참 빛으로서 인종과 신분 등 모든 인간적 장벽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에게 빛을 비추시는 분이시며,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예수님님을 찬양한다.
시메온은 온 삶을 바쳐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며,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나가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공경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 사랑과 공경은 곧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1요한 5,3)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3,24)는 말씀처럼 계명을 지켜야 한다. 나아가 우리 눈앞에 빚어지는 타락과 불신의 흐름에 휩쓸려가지 말고, 이 세상을 넘어 저 세상까지 바라보는 영적인 눈을 떠서 매일 매일을 하느님 앞에서 새롭게 결단하고 인내하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성탄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도 시메온처럼 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경건하게 살면서, 온 삶을 바쳐 주님을 기다리고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자.
- 정성훈신부-
제가 신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면 잘 들어주셨는데 유독히 응답을 해 주지 않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북한의 평화통일입니다. 북한 주민들에게도 하루 빨리 주님의 은총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지금까지도 계속 기도를 하고 있지만 쉽게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코 포기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직 하느님의 은총의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저의 기도가 꼭 이루어질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그날이 오면 가장 먼저 북한 주민들에게 주님의 구원 소식을 전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또는 사제나 수도자로서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가장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바람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단 한번만이라도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일"일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분의 현존을 뚜렷하게 한번 체험한다든지, 그분의 음성을 확실하게 한번 듣는 일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복직관(至福直觀)하는 은총일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바람이나 심정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시메온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별히 시메온은 성경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아주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충실했던 신앙인이었습니다. 마침내 시메온이 그토록 고대해왔던 메시아께서 마리아와 요셉에 의해 인도되어 성전에 도착했을 때, 이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시메온의 기쁨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메시아를 자신의 두 팔에 안은 시메온은 너무나 기쁘고 감격했던 나머지 큰 목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가 이렇게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평생을 메시아 오시길 고대하며 성전에서 기도하며 의로운 삶으로 기다려왔기 때문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친애하는 애청자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하느님 나라를 찾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의 자세, 생활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요셉과 목동들, 그리고 박사들과 시메온처럼 의로운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세주 예수를 만날 수 없고 옆에 두고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2천 년 전에 보았던 아기의 모습으로 구세주를 만날 수는 없겠지만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 이웃을 통해서 우리는 언제나 그분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웃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셨듯이 나의 이웃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하느님과 만날 수 없고, 사랑해 드릴 수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웃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이정표와도 같습니다. 그 표시를 잘 따라간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하느님께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나의 이웃은 나에게 있어 얼마나 큰 하느님의 선물인지요! 이 은총의 선물을 못 보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이웃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시메온이 구세주를 만날 수 있었던 삶의 자세처럼 우리도 이제는 이웃이라고 하는 너무나 좋은 선물을 통하여 하느님을 뵈올 수 있고,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는 의로운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마침내는 아기 예수님을 지복직관하시길 바랍니다.
겨울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 그 첫 자리는 ‘눈’(雪, snow)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눈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요? 다시 질문을 던지면 눈의 원료는 과연 무엇일까요? 높은 하늘에서 수증기가 얼어 땅에 떨어지는 것이니까 당연히 물이 눈의 원료라고 생각하시겠지요? 더군다나 눈을 녹으면 물이 되니까 당연히 눈의 원료는 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분이 계실까요?
그런데 10Cm의 눈을 녹이면 물은 1Cm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라진 9Cm는 무엇일까요? 바로 공기입니다. 따라서 눈의 원료의 90%는 공기이고 나머지 10%만이 물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분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눈의 원료가 공기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눈을 통해 우리가 보고 있는 것도 이렇게 사실이 다를 수가 있다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이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저 사람은 이런 저런 사람이야.’라고 겉으로 보이는 부분을 가지고 판단을 내리지만, 그렇게 규정한 것이 그 사람 전부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히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나아가 하느님에 대한 판단은 어떨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판단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하느님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판단합니다. 그래서 타협의 말을 종종 하지요.
‘주님, 제 소원만 들어주신다면 제가 열심히 성당 나가겠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계시기는 한 겁니까? 왜 저의 소원을 늘 무시하십니까? 주님, 당신의 사랑을 도저히 못 믿겠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의롭고 독실한 믿음으로 인해서 그는 항상 성령과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서, 그는 아주 연약한 갓난아이인 예수님을 보고서 곧바로 메시아이신 구세주를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알고 하느님의 일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시메온과 같은 의롭고 독실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섣부른 판단과 불안전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 한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진실을 우선할 것인지, 말것인지 여부에 따라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존 몰리)
기다림의 미학
-심종민 신부-
오랜 기간 시험을 준비한 사람들은 마음 고생이 많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합격이라는 선물은 그 고생의 세월을 오히려 축복의 시간으로 돌려놓습니다. 심마니가 온갖 고생 속에서도 산을 떠나지 못함은 산삼이 주는 기쁨이 그 고생보다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신앙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 부활이 있듯이, 밤의 끝자락에 서광의 빛이 있듯이, 준비 없는 참기쁨은 없어 보입니다. 시메온은 생의 끝자락에서 주님을 만났지만 그 기다림이 무의미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고생 끝에 오는 기쁨이 더 값지듯이, 갑자기 그리고 무상으로 찾아온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무작정 서두르고 재촉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얻게 될 은총을 기다리면서 그 기다림에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다림은 게으름이 아닌 은총의 시간을 위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 끝에서 우리는 은총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천히 우리를 인도하시며
- 황지원 신부-
요즘 세상을 보면 마치 육상 선수가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열심히 달리듯이 빠른 것이 미덕인 사회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나오는 디지털 기계는 물론이고 일상 전반의 문화가 ‘빨리 더 빨리’라는 구호 아래 숨을 헐떡이며 서로 앞다투어 경쟁하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빠른 성장과 발전 아래에 더 풍요하고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우리 모습은 예전보다 더 행복하고 편안한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저 역시 휴대전화가 생기고부터 사람들과 약속을 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더 조급해지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집니다. 약속시간이 되면 바로 휴대전화를 보고 조금 망설이다 전화를 걸어 조급증을 드러내는 제 모습을 봅니다. 휴대전화가 없을 때는 약속 장소를 서점이나 한적한 곳으로 정해 책을 읽으며 기다리는 여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문명의 좋은 혜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맞춰 살기에 급급한 현대인의 모습이 조금씩 제 몸과 마음에도 배어 있는 것을 봅니다. 시메온은 하느님의 기약 없는 약속을 기다립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는 그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한 해 두 해, 아니 십 년, 이십 년이 흐르면서 그 약속을 의심하기보다 더 큰 희망과 기대로 오히려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빨리빨리 우리를 채워주시기보다 천천히 우리를 인도하시며 하느님이 이루어 주시는 순간을 온전히 맞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희망이 무르익을 무렵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대보다 더 큰 것을 보여주는 분이십니다. 시메온의 인내와 믿음은 조급하고 의심 많은 우리의 부족함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두 팔에 받아 안고
-장재봉신부-
성탄의 축복을 거듭 전합니다.
생각하면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다리던
어릴 적 성탄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귀한 기다림의 자세이며
가장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꼽아 기다리던
아기 예수님께 무엇을 얻으셨는지 여쭙겠습니다.
어떤 선물을 받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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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평생 동안 메시아를 기다렸던 사람, 시메온을 만납니다.
하루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특별한 대림기간이 정해진 것도 아닌 상태에서
무조건
주님의 약속을 믿으며 기다려야 했던
시메온의 평생이 수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루해를 넘길 때마다
마음이 초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약속,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예언은
자꾸만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연로해지는 자신을 느끼면서
더 깊고
멀게 여겨졌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직 믿고
기다리는 자세만으로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하느님께 보여드렸던
시메온을 통해서
진지하지만,
여유를 잃지 않는 신앙의 자세를 배웁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의 의로움은
끝없이 기다리는 자세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르시는
독실함이란
흔들림 없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새깁니다.
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시메온에게 머무르시며
힘을 돋워 주신 이유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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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오신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이 갖고 오신 평화를 이웃과 나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기다림이 길고 지루할지라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예기치 않았던 고통 안에서도
하느님을 결코 놓치지 않아야할 까닭입니다.
우리 품에 안긴 그분이
곧 구원이시니
그분을 안은 두 팔에 힘을 돋웁니다. 아멘
-박태정신부-
한 신비가가 주님의 방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주님은 문을 열지 않고 닫힌 문 안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뭐라도 가지고 왔느냐?” “네, 제게는 저의 덕행이 한 자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문을 열어주시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그는 또 주님의 방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네, 주님 저의 좋은 행실과 거룩한 공적이 한 자루 있습니다.” “아주 고무적이야. 하지만 아직 문을 열어 줄 수 없네.” 다음에 그 신비가가 또 주님을 찾아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저의 명상과 간절한 기도가 한 숟가락 있습니다.” “너 참, 생각이 깊어졌구나. 하지만 아직 문을 열어 줄 수 없구나.” 신비가는 며칠을 지나 다시 주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발 들여보내주십시오.” 주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뭐라도 가지고 왔느냐?” 그러자 신비가는 이렇게 말합니다.“주님 저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어오너라.”
나의 덕, 나의 선행, 나의 기도 이 모든 것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교훈을 알려주는 예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하나 되고 일치하는 삶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오직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길이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과 요셉 성인께서는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십니다. 나의 뜻, 나의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들은 첫째 독서도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 5.) 우리들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감으로써 우리 안에 사랑을 완성시켜가야 하겠습니다. ‘나’라는 사람을 내세우기 보다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멘.
자신의 눈으로 구원을 보다.
-박상대신부-
루가복음은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명명, 그리고 아버지 즈가리야의 노래를 끝으로 선구자의 삶을 절대 침묵과 고독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의 선구자적 역할이 부각될 것이다. 이에 비하여 루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후 세 가지 사건과 연결시킴으로써 예수의 성장과정을 철저하게 하느님의 안배와 손길에 묶어두고 있다. 그 세 가지 사건은 첫째로 단 한 구절로 요약된 예수의 생후 팔일 째 거행된 할례예식와 명명(2,21), 둘째로 아기의 성전봉헌 예식(2,22-38),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의 12살 소년시절의 에피소드(2,41-52)이다. 오늘 복음은 아기의 성전봉헌 예식과 함께 어머니 마리아의 해산으로 인한 부정을 벗는 정결예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세가 정한 율법에 의하면 산모는 아들을 낳은 경우 40일, 딸을 낳은 경우 80일 동안 불경하다. 해서 그 불경을 벗는 정결례(레위 12,1-8)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치러야 하고, 부모는 첫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예식(출애 13,1-16; 민수 18,15-16)을 출생 30일 안에 회당이나 성전을 찾아가 제관 앞에서 치러야 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루가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예수의 봉헌예식을 한데 묶어 같은 날에 치러진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22-24절) 이는 루가가 이중효과를 노리는 의도인데, 예수의 부모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동시에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 등장시킴으로써 예수를 ‘자기 궁궐(성전)에 나타나는 상전’(말라 3,1)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루가는 분명 늘그막에 아들을 얻은 엘카나와 한나가 젖을 뗀 아들 사무엘을 실제로 성전에 갖다 바친 이야기(1사무 1,24-28)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루가가 보도하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아기 예수의 봉헌예식은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이스라엘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으로 간주된다. 즉, 루가의 관건은 마리아의 정결례와 예수의 봉헌예식이라는 율법준수의 틀을 통하여 아기 예수를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야훼 하느님이 현존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으로 현현(顯顯, Epiphania)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마태오는 같은 의도를 동방박사들의 예방사건(마태 2,1-12) 안에서 다루고 있다. 루가는 이러한 예수 현현(顯顯)의 목적을 두 예언자를 통하여 성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자신을 봉헌하여 밤낮으로 성전에서 기도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던 예언자 시므온과 안나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의 메시아성과 신성을 공적(公的)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 시므온은 첫눈에 아기 예수를 메시아요,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의 구세주로 알아본다. 물론 시므온의 예지(叡智)는 성령에 의한 것이다.(25절, 27절) 아기 예수를 두 팔에 안아든 시므온의 예언은 하느님께 대한 찬양의 말씀(29-32절)과 마리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34-35절)으로 짜여 있다. 물론 예언의 전체 내용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하느님 자신의 계시이다. 따라서 시므온이 자신의 예지를 통하여 예수를 메시아로 통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메시아로 드러난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이다. 볼 것을 본 시므온은 이제 평안히 눈을 감게 되었고 메시아이신 예수는 이방인의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우뚝 서신 것이다. 그러나 빛과 영광 속에는 반대와 갈등과 고통이 함께 들어 있다. 예수의 탄생과 구세주의 도래로 위기가 세상에 들어왔고 예수에게 이스라엘과 모든 백성들의 운명이 달렸다. 예수탄생을 축하하러 왔던 목자들의 말을 이미 마음에 새기고 있던(2,19) 마리아는 오늘 시므온의 예언도 마음 깊이 새기면서 예수와 함께 하는 고통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자기에게 약속된 놀라운 하느님의 계획을 하나씩 배워하고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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