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일에 쓴 글입니다. 오늘도 疋女의 삶을버티어 내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여성들에게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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疋女
40 여년 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기가 수필가로 등단했다고 하더니만 얼마 후 시인이 되었다고 하였다. 내가 글을 쓰는 수필가인줄 알고서 반가운 마음에서 자랑 아닌 자랑을 했을 것이다. 나는 '괜한 짓을 했다'는 소리가 입안에서 뱅뱅 돌았지만 잘했다고 격려해 줬다. 그는 울산에서 작은 공장을 경영하고 있다.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기업도 못되는 소기업 사장으로 한평생 살아낸 일이 쉽지 않았을 터, 시를 쓰든 수필을 쓰든 문학이 그에게 작은 위로라도 되었으면 좋은 일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후 한 참 세월이 지나 어저께 퇴근하여 집에 오니, 친구가 보낸 시집이 한권 우송되어 왔다. 『다빈치 구두를 신다』였다. 이 친구 또 괜한 짓을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다빈치가 구두를 신는 그 자체부터가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도 나를 친구라고 책을 보내준 정성을 생각해서 축하한다는 전화를 했다.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으니 건성으로 들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그를 시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든다섯 편으로 묶어진 그의 시집에는 인생 밑바닥을 살아낸 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냈다.
“『다빈치 구두를 신다』 시(詩) 좋다. 60평생의 삶이 녹아든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필녀(疋女) 같은 삶이지만 필녀(疋女)는 정말 이 세상 모든 인간에게 꼭 필요한 사람(必女)인지도 모르지. 내 친구가 시인이라는 게 자랑스럽네!”
疋女*/박진한
저 아래 길바닥
허름한 의자로 태어났다
제 것처럼 앉았다가
낌새도 없이 떠나갔다
혼자 있을 때가 제일 편했다
외로움은 사치품이 되었고
파트타임은 본업이 되었다
몸뚱이만으로 살아왔고
몸뚱이로 또 하루가 늙어간다
어쩌다 물려받은 단 하나
어머니 같은 재량으로
품안 온도만 마구 흔들었다
그리고 기척 없음에
이 시대의 마지막 천민에겐
침묵이 가장 어울릴 뿐이었다
*疋女 : 필녀(아래 下 + 사람 人), 아주 천한 여성으로 지은 이름.
품안의 온도만 마구 흔들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땅의 모든 필녀(疋女)들이 정말 소중한 필녀(必女) 임에도 필녀(必女)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모두가 모른 체하는 침묵 속에서 천민으로 견뎌내야만 하는 그 아픔이 내가 살던 이 시대를 마지막으로 끝이나주기를 시인은 간곡히 기도하고 있다.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평생을 타인으로 살아낸 다음 시를 읽으면 산업화 현장에서 처절하게 살아낸 아픔들이 떠올라서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가 없다.
타인으로 살다/박진한
- 카페의 화장지
인간쓰레기
딱 한 번 뜨거움으로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버렸다
그림자의 뒤가
엎질러진 양주로 젖어가는 나를 숨겼다
매캐한 늙은 곰팡이가 위로했다
인생은 젖은 쓴맛이라고
세상이 동강나듯 고음만 들려왔다
유리창엔 불길 같은 어둠이 솟구치고 있었다
또 구역질나는 인간들에 의해
앞날이 돌돌 말려버린 친구들이
욕구의 미와 추한 미를 숨겨주었지만
주름진 고함에 질려 버림받은 떼거리로
일그러진 나를 무겁게 덮쳤다
온몸 얇게 찢어지는 절규로
비뚤어진 그들의 마음을 닦고
굳어버린 괴로움을 지워주었지만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도 한낱 일회용일 뿐이었다
진한이 친구!
이 세상살이의 긴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인 모습으로는 통과하기 어렵지
나 역시 그래~.
자네 정말 멋진 시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