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카 2,14-17; 마태 12,46-50
+ 오소서 성령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自獻)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셨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2세기경 쓰인 ‘야고보 원복음서’라는 책에 성모님의 봉헌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자식이 없었던 요아킴과 안나는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은 후, 성모님을 낳게 되자 매우 기뻐하며 성모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합니다.
이후 등장한 다른 전승들을 보면, 성모님이 세 살이 되셨을 때 요아킴과 안나와 함께 성전으로 가셨는데, 성모님 스스로 계단을 올라가며 하느님께 자신을 기쁘게 봉헌하셨다고 합니다. 이후 성모님은 성전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지내셨다고 전승은 전합니다.
서기 543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곳 근처에 성모님을 공경하는 성당이 세워졌는데요, 이 성당의 위치가, 성모님께서 성전에서 오래 생활하셨음을 전하는 성모님의 자헌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여 동방교회는 오늘의 기념일을 지내게 되었고, 서방교회 즉 가톨릭교회는 1472년부터 공식적으로 기념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동방교회와 서방가톨릭교회가 이렇게 일치하여 같은 신비를 기념한다는 것이 무척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인데요, 한 줄 한 줄이,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전한 말씀들을 연상하게 합니다. 우선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라는 말씀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와 비슷합니다.
이어서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는 즈카르야서의 말씀 역시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그리고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즈카르야서는 계속해서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라고 말하는데요, 이는 가브리엘 천사가 말한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라는 예고와 비슷합니다.
제1독서는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라는 말씀으로 맺습니다. ‘침묵’이라는 말과 ‘일어난다’라는 말은,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곧 개입하시리라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복음에서 성모님은 예수님의 친척 형제들과 함께 예수님을 만나러 오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물으신 후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 등장하시는 다른 복음 말씀들도 많은데, ‘꼭 이 말씀을 성모님 자헌 기념일에 복음으로 읽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가만 묵상해 보면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오늘 기념일의 의미와 어울립니다.
첫째, 우리가 하느님께 자기를 봉헌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드린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뜻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실 때뿐만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이 가시려던 길의 방향을 바꾸십니다.
둘째, 자기를 봉헌한다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가장 우선으로 두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마리아에게는,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셨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셨기 때문에 복되십니다. 마리아는 당신 태중에 모신 육신보다 마음에 지닌 진리를 더 열심히 간직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왜 이리 파격적인 말씀을 하셨을까요? ‘성모님을 나와 상관없는 분으로 여기며 멀찍이 서서 칭송만 하지 말고, 성모님께서 하신 일을 너도 하라’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하신 일이란,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신 것입니다.
봉헌은 자신의 것을 하느님께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자기의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본래 모두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봉헌은, 자신의 것인 줄 착각해 왔던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봉헌, 즉 자헌은, 자기 자신이 하느님 것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돌려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티치아노, 성모님의 자헌, 1534-1538년
출처: Presentation of Mary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