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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61:1-4 하나님이여
이 시편은 다윗이 심한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입니다.
본 시편의 중심은 다윗이 절박한 위험에서 체험한 기적적인 구원에 대한 감사입니다.
또 다윗은 자신을 왕좌에 세우신데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 본문 1-2절은 “(1)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2)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입니다.
이 시가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살롬의 반역음모의 시기로 돌리는 자들과 의견을 같이 합니다.
다윗이 추방되지 않았다면 땅 끝에서 부르짖는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르짖는다’ 는 말로 다윗은 자신의 열망이 강렬한 사실을 암시합니다.
다윗이 큰 소리로 기도했든, 낮고 억압된 어조로 했든 심령의 열정을 표현합니다.
반복법은 다윗이 부지런히 끈기 있게 기도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은 단련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즉각 눈에 띄게 보여주시지 않았다고 약해지거나 용기를 잃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땅 끝”은 다윗 자신이 추방되어 밀려난 처소를 가리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주의 성전과 주께서 내신 왕의 성읍에서 축출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여기 언급된 시기가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의 광포가 두려워 도망하여 마하나임 광야나 외진 장소에 몸을 숨겼을 때라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시온산은 언약궤가 놓여 있던 곳으로 왕의 보좌였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중요하고 가장 바람직한 장소에서 추방됐습니다.
그 때 다윗은 마치 자신이 땅의 끝으로 쫓겨난 것 같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합법한 법률의 그늘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께 속하는 특권을 가질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열려진 길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사단이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방해를 부수지 못한다면 우리의 행위는 정녕 핑계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 같이 교회에서 쫓겨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성례가 없는 신자들은 다윗의 본을 따라 외로운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꾸준히 부르짖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시편 61 편
다윗은 자신의 근심과 번민을 계속 말합니다.
다윗이 도피할 길이 모두 막혔다는 사실을 덧붙인 것은 자신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보다 분명히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눌리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ףטע(아타프)는 때로 ‘덮다’ 나 ‘싸다’ 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다윗이 하나님과 대화하는데 환난으로 인하여 방해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 삽입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다윗이 성소에서 멀리 떨어져서 당했던 외적 시련을 주시했습니다.
또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일어나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사실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이 마음의 근심과 번민으로 인한 심한 내적 투쟁을 깨닫고 냉정한 채 무감각하게 있을 수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영적 고통에 무겁게 눌려 있을 때 하나님께 접근하는데 방해 되는 장애물을 부수기 위해 보다 많은 불굴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신자의 의무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마치 자기가 그곳에서 쫓겨난 것처럼 보이는 이전의 그 안전함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반석’ 또는 ‘성(城)’ 이라는 말로 다윗은 일반적인 안전한 보호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바로 이 안전한 보호가 자기에게 막혀서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들어 올리지 않고서는 그곳에 이를 수 없다고 하소연합니다.
다윗의 주변을 돌아보건대 모든 은신처와 안전한 처소가 다윗의 머리 위로 높이 올려져서 접근할 수 없게 된 것과 같았습니다.
다윗은 모든 도움이 막혀 구원의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만 그의 손을 뻗쳐 주신다면 자기가 안전할 것을 믿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 구절의 평범한 의미로 비록 모든 다른 도움이 철회되고 전 세계가 자기와 구원을 갈라놓더라도 하나님은 위험에서 자신을 건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진지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진리입니다.
하나님께 구원을 찾을 때 우리는 마땅히 지각의 암시에 복종하기를 주의해야 합니다.
또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항상 보이는 외적수단으로만 일하시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이성이 헤아릴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해서 우리를 건지신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일의 진행에 대한 어떤 특별한 선을 긋고자 시도한다면 우리는 다만 제멋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제한하게 됩니다.
2. 본문 3-4절은 “(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이는 주께서 나의 소망이시었음이요 - 칼 빈)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4)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입니다.
시편 61 편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다윗이 전에 받은 은혜를 상기시키든, 다윗이 즉시 체험한 구원을 자축하는 것입니다.
둘 중 어떤 가정도 가능합니다.
주께서 과거에 베푸셨던 선함을 회상함보다 우리 소망에 활기를 주는 것은 없습니다.
다윗의 기도 가운데는 이러한 회상에 잠기는 일이 빈번합니다.
한편 본 시편의 나머지 부분은 내용이 바뀝니다.
그것은 다윗이 현재 받고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먼저 3절 말씀은 감사의 시작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이는’ (칼빈)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접속사는 오히려 긍정적인 의미로 ‘확실히’ 또는 ‘분명히’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음 4절에서 다윗은 자기가 이때부터 주의 성소에 거할 확신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미래에 회복될 것을 예상함으로서 자신의 슬픔을 누그러지게 한다기보다 오히려 이미 얻은 회복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실은 계속되는 문맥을 생각해 볼 때 더 분명해 집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다윗이 추방된 곳에서 돌아와 왕궁을 세운 지금 다윗의 마음이 왕의 부, 찬란함, 기쁨 등에 쏠리기보다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데로 향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다른 기록에서도 이런 증언을 봅니다.
다윗은 자신이 겪었던 최악의 재난 중에서 체험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종교 의식을 행할 수 없었던 쓰라림과는 비교될 수 없었다는 증언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자기가 왕의 보좌에 앉는 것보다 제단 앞에서 애원자로 엎드리는 것이 더욱 고상한 기쁨이라고 여깁니다.
다윗은 자기가 무지한 사람들처럼 종교의 외형에 미신적으로 달라붙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안전을 “하나님의 날개 밑에”서 찾았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자들은 하나님이 성막에 갇힌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을 믿음의 영적 단련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했습니다.
다윗이 주의 날개 그늘을 말할 때 그룹(cherubim)에 대한 암시도 있습니다.
우리가 명심 할 점은 다윗이 세상 요소인 육적 의식에 머무르는 게 아닌 사실입니다.
다윗은 그 의식들을 통해 예배할지라도 그 의식들을 초월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올려놓아 주신대로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까지 나아갔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61 편
시61:5-8 하나님이여
다윗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5절).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은혜는 다윗을 압살롬의 반란에서 구원해 주신 일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악하여서 남의 죄는 잘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쉽게 잊어버립니다.
사람이 과거에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무한하신 인자와 진실성을 깨닫습니다 또 하나님이 영원히 그의 인자와 진실하심으로 구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생애에 제일의 목적으로 가졌습니다.
다윗이 장수하기를 원하는 것도 하나님과 함께 있을 목적이었습니다(6, 7상반).
다윗이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 곧 진실하신 속성에 의한 구원으로 보호받기를 원한 것도 주님을 영원히 찬송하며 주의 뜻을 순종하기 원해서였습니다(7하반, 8).
다윗에게는 하나님 밖에 좋은 이가 없었습니다(시16:2, 73:25).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신자로 하나님 앞에 무엇을 약속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면 영원히 하나님을 찬송하며 매일 서원을 이행하겠다고 합니다(7, 8).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은 약속은 다윗의 신앙 용단이겠습니다.
다윗이 약속을 실행할 은혜도 주실 줄 믿기에 하나님 앞에서 그런 약속을 할 수 있었습니다.
1. 본문 5절은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주께서 내 서원을 들으셨으므로 - 칼 빈)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날개 밑에 거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근거를 보입니다.
체험했던 갑작스런 기쁨이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으셨다는 사실에서 솟아오릅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사실은 어둠에서 빛을 비치게 했습니다.
다윗이 “서원” 이라고 한 말을 우리는 다윗의 기도로 이해합니다.
그 이유는 부분이 전체를 대신하는 표현의 일반적 비유에 따른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기도 중에 서원을 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다시 왕이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 능력의 간섭에 힘입었다고 자인했습니다.
결코 자신이 군대를 신속하게 소집할 때 보여주었던 놀라운 솜씨나 제사장의 호의와 군인들의 분투에서 얻어진 어떤 도움도 힘입은 것이 아닌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만일 ל(라멧)이 “경외”로 번역한 יאדי(이레) 라는 히브리어 앞에 접두사로 쓰였다면 뒤이어 나오는 말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기업을 주셨다는 취지에 대한 일반적인 확언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시편 61 편
그 의미는 하나님이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기업을 다윗에게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자기 종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신앙을 단련시켰던 투쟁과 고통을 영원한 복으로 간직케 하신다 입니다
이 말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인해 잠깐 번영을 누렸을 때 그들이 빠졌던 그 보증 없는 확신에 대한 비난을 함축합니다.
자기들을 우쭐케 하는 성공은 단순히 상상에 불과하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이 사용한 “기업”이란 하나님의 백성이 보다 견고하고 지속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들의 순간적이며 짧은 생애의 고난은 다만 영원한 복을 촉진한 결과를 갖게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이 며칠동안 즐길 초라한 특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지극한 복의 영원한 유업이 보장된다고 말씀합니다.
이 진리야말로 결코 의문시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악인들은 어쩌면 그들에게도 분배되어 있을지 모르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소유하지 못하기에 매일 매일을 약탈한 물건으로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복을 참되고 합법적으로 즐기는 자는 주를 경외하는 자들뿐입니다.
2. 6절은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이 감사의 말을 자신과 관련해서 사용합니다.
다윗은 지극히 오래 살았고 기한이 차서 죽었습니다.
또 다윗은 왕국을 안정된 상태로 그를 계승한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윗도 한 사람의 생애를 초과하지 못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다윗은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계속되는 위험과 걱정으로 보냈습니다.
다윗이 말하는 일련의 해(年)와 나이도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뻗쳐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진정한 왕국의 상태 때문인데 하나님이 그들을 한 머리 밑에 있는 한 백성으로 보존하시며 흩어진 때에도 다시 결합시키신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계승이 여전히 우리 자신들과 관련되어 존속됩니다.
마땅히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까지 그의 지체 안에서 살아계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이사야는 비유로 “누가 그의 세대와 시대를 선포할꼬”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로 이사야가 예언한 것은 교회는 원수들의 공격으로 끊임없이 파멸의 위험을 당하고 많은 폭풍에 의해 공격당함에도 모든 시대에 걸쳐 생존하리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그 왕국의 중단 없는 계승이 그리스도의 때까지 계속될 사실을 예언합니다.
시편 61 편
3. 본문 7-8절은 “(7)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8)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입니다.
1) 먼저 이 말씀은 4절에서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보다 단순한 표현입니다
다윗은 자기 생명을 충분히 보존하실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즐거움을 누리게 될 안전과 평안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면전’(칼빈 ; 하나님 앞 - 한글)이라는 말씀으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배려와 섭리를 뜻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시지 않는다면 우리를 둘러싼 위험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한 순간도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복된 생애의 안전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데 있습니다.
2) 다음에 하나님이 왕의 보호를 위해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라는 기도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첫째 인자와 진리가 나라의 최선의 보호정책이기에 다윗이 여기서 자기 보좌를 견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자와 진리를 구한다고 보는 것은 참으로 합당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의미가 더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왕을 보호하기 위해 인자와 진리로 준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어 נה (마나)는 ‘예비하다’ 뿐 아니라 ‘양도하다’, ‘임명하다’의 뜻도 있습니다.
다윗은 그 나라의 보호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에서만 발견될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은 ‘예비하다’ 또는 ‘명하다’라는 표현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보호에 필요한 수단을 얼마나 쉽게 공급하실 수 있는가를 보입니다.
3) 끝으로 다윗은 자기가 했던 서약을 이행하겠다는 생각을 확증합니다.
더불어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찬양을 계속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감사와 찬양이 이 기도의 두 부분 사이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재난에 눌려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중에서도 옛날에 구원을 체험했던 때를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시62:1-2 나의 영혼이
본 시편의 대부분은 묵상입니다.
다윗은 이 묵상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바라도록 격려합니다.
또 다윗은 유혹을 대적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견고케 합니다.
우리 모두는 멸망해서 사라져 버릴 세상의 사물들이 우리 지각에 끼치는 영향으로 하나님에게서 쉽게 떨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의 어리석음을 우리에게 자주 보임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전적으로 성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교훈하십니다.
1. 본 시편의 주제는 “다윗의 시, 영장으로 여두둔의 법칙을 의지하여 한 노래”입니다.
악장들(chief singers) 중에 여두둔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본 시편이 그 여두둔이 노래 부르도록 그의 손에 맡겨졌다고 생각했습니다(대상9:16, 16:38, 41, 25:1).
39편에 붙은 표제가 주는 암시는 그 가족 중 누군가가 음악가였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39편의 사실이 본 시편의 경우와는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본 시편은 여두둔이 (“으로” to)했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 시편은 여두둔에 “의지하여”(upon)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이 말이 당시 잘 알려진 노래의 시작을 구성한다는 견해를 갖게 합니다.
또 히브리어 불변화사 על(알)은 우리가 “의지하여”(upon)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쓰인 히브리어는 gms히 “for”, “to”, “before” 의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본 시편이 여두둔의 후손에게 맡겨졌다고 추측될 수도 있습니다.
2. 본문 1-2절은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영 혼이 잠잠히 하나님을 향함이여 - 칼빈)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2)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 니하리로다” 입니다.
만일 다른 번역을 받는다면 본 시편은 갑작스레 시작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시편 62 편
이는 감동적인 종류의 작시법에 흔히 있는 문체입니다.
이러한 예는 73편에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가지 의심으로 요동되어 있던 선지자는 갑자기 마음의 결정을 고정시키고 계속 논쟁이 될 주제들을 모두 잘라 버리는 태도로 외칩니다.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선하시다’(칼빈)라고 외칩니다.
우리는 본 시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백성들이 마음의 혼란에서 전혀 면제될 정도의 침착에 항상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주의 말씀을 복종하는 태도로 받아들이기 원합니다.
또 그들은 주의 치료하는 손 밑에서 잠잠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어이없는 감정이 저희 마음을 차지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신앙 단련과 복종의 훈련으로 겨우 얻은 평화가 깨어집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서 조급하게 된 현실을 봅니다.
그 때에 그들은 이러한 조급함을 하나님 앞에 발설합니다.
이런 현상이 사실상 그들 자신에게 많은 고통과 불안을 조장합니다.
불변화사 אך(아크)는 가끔 배타적 의미로 사용되기에 ‘오직’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또한 확언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진실로’ 또는 ‘확실히’ 등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크게 요동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단이 다윗의 감정에 소요를 일으키고 그 마음에 어느 정도 조바심을 넣음으로 다윗은 이제 그 조바심을 억제하고 “잠잠히”라고 그의 결심한 바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십자가의 온순하고 복종적인 인내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나님께 항의하는 태도에 빠지게 하는 심령의 열기와는 정반대입니다.
여기서 의도하는 침묵은 신자가 침착히 복종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묵묵히 따르면서 하나님의 주권에 고개를 숙이며 불만에 대한 모든 내적 불평을 억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잠잠히”로 번역한 דומיה (두미야)를 어떤 사람들은 명사로 봅니다.
그렇게 되면 보잘것 없는 번역이 됩니다.
2절에 나오는 אך(아크)라는 불변화사를 우리는 1절에서와 같이 번역합니다.
신자들은 한번 시험을 만나 승리하더라도 곧 다른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고통에서 헤어 나온 다윗도 남아 있는 난관들과 계속 투쟁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 똑같은 불변화사를 여섯 번이나 발견합니다.
이 말은 다윗이 하나님께 적용하는 여러 칭호들을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각 칭호를 하나님이 유혹자의 공격을 막아 주는 격퇴기로 여깁니다.
시편 62 편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는 다윗이 고통에 압도 상황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다윗이 자기가 인간의 공통된 운명에서 면제를 요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다윗에게는 이와 같은 고통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도움으로 자기를 전복시키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다윗은 많은 말을 한 후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기도에서 담대하여 고통을 경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표현들이 두 곳 (2, 6절)에서 같은 의미로 취해졌는지도 모릅니다.
진리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신자는 잠시 동안 전복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신자가 넘어지기가 무섭게 하나님께서 그 신자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신자가 넘어진다고 말하는 일은 타당치 않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영의 후원을 받기에 아주 넘어지거나 패배하지 않습니다.
시편 62 편
시62:3-6 넘어지는 담과
다윗은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일파의 운명이 길지 못할 것을 내다봅니다.
극악자(極惡者)들의 운명은 언제나 길지 못하다는 사실이 그 철칙입니다.
다윗은 그들의 실패가 담이 넘어져 가는 것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습니다(3).
그들의 일어남은 벌써 그들의 넘어짐이었습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다윗을 그 지위에서 떨어뜨리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4).
그러나 다윗의 지위는 하나님이 주셨으니 만큼 진리에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음모는 진리에서 탈선된 모든 거짓 행위였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멀지 않아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이 시편 초두의 말씀과 같은 뜻을 거듭 말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의 첫 신념을 강화합니다.
5절은 1절 말씀과 유사합니다.
1절의 “구원”이 5절에서는 “소망”이란 말로 썼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최후까지 소망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소유하면 할수록 나중에는 우리에게 불만과 비애(悲哀)를 가져옵니다.
그것들 중에 우리의 가장 애착하던 것이 필경 우리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토록 만족케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하신 소망이십니다(시39:4-7).
1. 본문 3절은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너희가 어느 때까지 ....... 행악을 계속하겠느냐 - 칼빈)입니다.
‘행악을 계속하다’인 תהותתו(테호테투)를 ‘행악을 생각하다’, ‘꾀하다’로 번역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조롱의 표적으로 말을 발설하는 비유로 생각합니다.
문맥의 의미는 ‘너희들이 한 사람을 대적하여 악을 생각하기를 언제까지 하며 그 사람을 완전히 파멸시키기 위해 악한 책략을 언제까지 지속하겠느냐’ 입니다.
다윗은 그 원수들의 끈질긴 악행, 곧 자기 파멸을 위해 모든 돌을 운반하며 그 파멸을 효과 있게 하기 위해 날마다 새로운 계획을 수립한다는 점을 염두에 둡니다.
시편 62 편
다윗의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은 우리 원수들이 지칠 줄 모르는 잔인함을 보이며 우리를 멸망시키려 하고 악마에게 자극받아 우리를 핍박하기 위해 끊임없이 교묘한 술책을 꾀할 때도 우리는 마땅히 인내를 연마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추가된 비유의 의미를 주의해 봅시다.
어떤 이들은 악인들이 “넘어지는 담”에 비유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 담이 언제 넘어질지 몰라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또 악인들은 자기들이 짓는 죄로 점점 쇠퇴하여 급기야는 멸망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는 다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담” 이 본래 잘못 세워지면 중앙이 부풀어서 실제 폭에 두 배나 커집니다.
그런데 그 벽은 속이 비어 있기에 곧 넘어져 허물어집니다.
악인들은 교만으로 부풀어 올라 자기들 생각을 가장 방대한 모습으로 가장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마치 잘못 세워져서 내부가 텅 빈 담이 갑자기 허물어지고 자체의 무게 때문에 수 천 개의 조각을 내며 부서지는 것처럼 악인들도 예기치 못한 채 전적으로 파멸되리라고 예언합니다.
“울타리”로 번역한 גדר(가데르)는 보잘것없고 불충분한 재료로 지어진 울타리입니다.
다른 명칭이 첨가됨으로서 원수들의 실패가 보다 맹렬하게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 원수들이 아무리 높은데 있고, 또 그들의 위협이 아무리 교만히 과장되어도 그들은 졸지에 심하게 ‘타격받은 벽처럼’ 전복되리라는 사실입니다.
2. 본문 4절은 “저희가(그럼에도 저희가 - 칼빈)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여전히 אך(아크)를 반어적 의미로 번역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의 약속에 꾸준히 머무를 것을 결심하면서 스스로를 격려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늘 그 성격이 잔인하고 오만하며 교만하고 거짓말하는 원수들의 음모와 정면으로 부딪쳐 괴로워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다윗이 ‘그 원수들은 자기들의 모든 시도로 스스로 실패를 촉진할 뿐인데도 그들은 여전히 광란과 분노를 일으켜 나에게 저희 음모를 계속한다’고 한 말입니다.
다윗은 원수들의 공격이 자기에게라기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마치 거인들의 우화 속에서 시인들이 불경스럽게 보여준 장면과도 같습니다.
원수들은 자기들이 하늘위에 올라가는 일 외에는 아무것에도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신을 3인칭으로 말합니다.
시편 62 편
또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높여진 것으로 말합니다.
비록 여기 3인칭이 직접 하나님을 의도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그 원수들이 하나님이 높이시고 존귀하게 세우시려 했던 한 사람 다윗의 전복을 목표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도를 훼방 놓으려 꾀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해 싸웁니다.
곧 이어 나오는 “거짓을 즐겨하니” 라는 말은 같은 내용입니다.
원수들은 다윗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원수들은 계속 부패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결국 원수들이 세운 계획은 자기들에게 돌아와서 당황케 만들고 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해서는 4편2절에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라고 하였습니다.
“거짓을 즐겨하니” 라는 표현은 원수들이 하나님의 성도를 박해할 때 사용했던 은밀하고 기만적인 수단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곧이어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라는 말이 덧붙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다윗이 그 원수들의 모든 배신과 음모와 사악을 하소연하면서 단 한 가지 생각, 곧 자기 도움은 하나님 안에 있고 모든 반대 수단은 결국 헛된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견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3. 본문 5-6절은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영혼 아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 - 칼빈)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6)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 리로다” 입니다.
여기에는 약간 모순이 있어 보입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앞서 이미 잠잠하라고 선포해 놓고 이제 다시 잠잠하라 하며 자신을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잠잠했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여전히 요동한 것같이 “잠잠” 이란 말을 왜 다시 해야 하는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모든 내적 불안을 갖지 않을 만큼 완전한 침착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큰 물결에는 삼켜지지 않는다 해도 미풍 앞의 바다처럼 늘 동요를 느낍니다.
성도가 그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투쟁 없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어떻게 순종적인 정신에 보다 완전한 복종을 부과하는가 입니다.
시편 62 편
다윗은 자신이 모든 육적 성향을 억제하고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킬 때까지 스스로를 격려하여 이 침묵의 은혜로 한걸음 더 나아갔던 것입니다.
더욱이 사단은 완전히 없어진 것처럼 보였던 그 불안을 얼마나 자주 다시 일으키는가?
우리 모두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피조물입니다.
또 수천의 여러 다른 영향들을 쉽게 감당치 못하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계속 반복하여 자신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이 이미 얻은 것처럼 보였던 하나님 앞에서의 평온을 두 번씩이나 자신에게 평온을 보존하라고 말하더라도 놀랄 이유가 없습니다.
육신의 불안한 활동 중에는 완전한 침착이란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험은 새 환란이 일어날 때 우리가 누리던 내적 평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다윗의 본을 따라 그 안에서 우리를 더욱 견고케 할 필요를 잃어버립니다.
다윗은 자신의 평온의 근거를 덧붙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즉각적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랐습니다.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라고 다윗은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결코 자기 성도들의 참을성 있는 기다림을 좌절시키지 않으실 것이고 내 평온은 틀림없이 그의 보상을 받으며 나는 스스로 억제하여 내 구원을 방해하는 서투른 경솔함을 보이지 않겠다’ 라고 말한 셈입니다.
시편 62 편
시62:7-10 나의 구원과 영광이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서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만 의뢰하라고 합니다(7-10).
다윗은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을 누리기 원합니다.
1. 본문 7-8절은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 로다” 입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표현에 다른 표현이 부가되었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다윗이 우리로 하여금 그릇된 행동으로 미끄러지기 쉽게 하는 허약한 기질을 억제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일시적으로 이따금씩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하나님의 도움에 부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우리는 그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모든 방면에 분주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불신앙을 내보입니다.
다윗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충족성을 표현하려고 사용한 다양한 말들은 자신의 절개에 대한 많은 논증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의존하고 싶은 육욕의 외고집에 다윗이 진단해 보고 싶은 점검 사항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다윗이 자기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는 방법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다윗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을 불러 같은 투쟁에 들어오게 해 같은 승리를 획득하게 하는 사실을 봅니다.
다윗에게서 “백성” 은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방인들은 아직 참 종교와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믿음과 종교적 소명의 대상은 오직 유대인뿐이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주의 택한 백성을 주변 이방인들과 구별시켜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였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고 특별히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배은망덕한가를 보여줍니다.
“시시로” 라는 표현은 번영할 때나 역경 중에 있을 때를 모두 의미합니다.
시편 62 편
환경의 변화에 요동하며 굴복하는 자들은 책망 받을 만하다는 점이 암시됩니다.
다윗의 교훈은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을 고통으로 단련시키더라도 지조와 용기를 갖고 살라는 점입니다.
번영이 자신의 머리에 비출 때만 하나님을 크게 찬양하는 위선자들은 첫 시련의 도래로 마음이 낙담하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을 최대로 제한시키는 해로운 말을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손상시킵니다.
우리는 최대의 극한 상황에 처할 때에도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함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에 존귀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환난이 더하여 하나님에 대해 마음을 격분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의 고통을 가슴속에 품고 있기 너무 쉽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우리의 염려를 하나님께 풀어 놓는 것밖에 더 바람직한 기대는 없다고 제안합니다.
마음이 고통의 무거운 짐에 억눌릴 때는 기도의 자유란 없는 법입니다.
시련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깊이 생각해서 자신을 위로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배려에 상황을 맡기면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고통이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 넣을 때까지 그 고통을 우리 가슴에 담아 두려는 해로운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것이 모두 필요 이상의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사람들은 환난을 피하기 위해 많은 걱정을 하고 많은 재간을 피웁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존전을 멀리하는 한 그들은 난관의 미궁 속에 빠질 뿐입니다.
다윗은 우리 본성 속에 병들어 깊이 뿌리 박힌 원리를 보여줍니다.
이 나쁜 원리가 우리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슬픔을 숨기게 합니다.
또 우리에게 근심만 생각나게 해서 기도와 하소연을 통한 구원을 못 이루게 합니다.
이로서 생기는 결과는 우리가 고통으로 인해 점점 더 괴롭게 되고 맙니다.
우리가 소망 없는 낙담 상태로 몰입하게 됩니다.
하반절에서 다윗은 자신에 대해 개인으로 한 말을 백성들에게 관련시킵니다.
다윗은 그 백성들의 안전은 하나님의 보호아래서만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2. 본문 9절은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아들들도 헛되고 - 칼빈)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입니다.
만일 우리가 אך(아크)라는 불변화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분명히’ 또는 ‘확실히’의 의미로 본다면 이 구절은 앞 절에서 표현된 진리에 대한 확증이 됩니다.
시편 62 편
따라서 다윗은 대조법에 의해 논증한 셈입니다.
인간이 헛된 것보다 더 보잘것없기에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모든 기대를 하나님께 둘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앞서 말했던 진리가 그릇된 소망에 항상 쉽게 의존했던 백성들에게 거의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거룩한 열정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칼빈)라고 외칩니다.
다윗은 여기서 인간들 중에 그토록 만연된 맹목적 불신에 대해 꾸짖습니다.
이 불신앙은 여호와의 약속을 믿게 하기보다 거짓된 허무로 자신을 속이게 합니다.
다윗은 아브라함의 택한 자손 가운데서도 이런 수많은 허무를 발견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주저없이 모든 인류 일반이 거짓된 기만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부사 יחד(야하드 ; 모두)는 모두가 예외없이 치우친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철저한 정죄는 몇 사람의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은 인간이 헛된 것보다 더 보잘것없다고 선포함으로 인간 본성에 이릅니다
만일 이것이 정말이라면 우리의 자랑할 만한 이성과 지혜와 자유의지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자들이 여기 정죄되는 것에서 구출된 사실에는 반박해도 소용없습니다.
신자들이 거짓과 허무에서 구원받은 것이 성령의 중생의 덕택이라면 그들도 자연 상태에 있을 때는 이런 거짓과 허물에 굴복했었다는 사실은 인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첫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고결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으로 우리들은 타락의 깊은 곳에 빠지게 되었고 본래 주어졌던 빛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만일 인간 안에 아직도 무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든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선물이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함으로서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물이 제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인간은 죄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진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지식과 관련될 때만 위에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실제로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별문제라 해도 이런 선물들은 죄의 전염으로 손상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 안에 본래의 정직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모든 사람이 헛되고 무가치하다고 한 말은 충분히 타당합니다.
시편 62 편
3. 본문 10절은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포학과 탈취한 것을 의지하지 말며 - 칼빈)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 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운 교훈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많은 수단인 헛된 모든 확신을 제거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참되게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우리에게 이런 경향을 가진 것은 무엇이나 멀리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좇아내고 들어앉은 모든 악한 욕망을 일소하라고 명합니다.
여기서는 한 두가지 죄만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마음의 참된 의도와 진지함으로 하나님께 매달리기 전에 마땅히 버려야 할 모든 헛되고 적대적인 믿음들을 말합니다.
“포학” 과 “탈취한 것”은 폭력으로 훔치는 행위 자체와 훔친 물건으로 이해됩니다.
이 문맥의 의도는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인간을 속여 악을 행하고도 벌을 받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하기 쉬운 죄의 뻔뻔스러움과 주제넘음을 경고합니다.
다윗은 도둑질한 것을 자랑하는 자들의 얼빠진 자만을 정죄하면서 그것은 다만 그들이 스스로 속고 즐거워하는 마음의 단순한 환각이라고 적절하게 부릅니다.
다윗은 먼저 철저히 악하고 적극적으로 사악한 그 욕망들을 비난합니다.
다윗은 정직하게 얻은 재물이라도 비정상적인 애착을 갖는 일에 경고합니다.
재물에 “치심치”라는 말은 단순히 재물의 소유를 갈망하는 것 이상입니다.
이 말은 재물들 때문에 그릇된 자만으로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면 ‘높은(교만한) 마음을 품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주는 교훈은 날마다의 관찰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번영과 풍부함이 교만한 정신을 낳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그 몸가짐을 주제넘게 하며 그 동료 피조물들에게 거침없이 해를 끼치는 것은 공통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말 이와 같은 종류의 맹목적이며 억제되지 않는 정신에서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최악의 결과는 외적으로 커지는 것에 도취되어 우리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를 잊어버리고 거만하고 오만불손하게 하나님보다 우리자신을 높이게 됩니다.
시편 62 편
시62:11-12 하나님이
이 구절들은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만 믿어야 될 것을 결론합니다.
그 이유는 권능과 인자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1-12절은 “(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12)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입니다.
다윗은 인간이 의지하기 쉬운 헛된 현혹에서 그 마음을 억제하기에 효과적이고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판단에 전적으로 확고부동하게 따르는 길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원래 다방면으로 동요되거나 적어도 주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다만 그들이 세상의 변하는 사물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손히 바라보라고 권면할 때는 인간의 행위 규범을 위해 보다 분명한 원리를 주목하게 합니다.
하나님 자신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딤전6:16) 계셔서 믿음으로 밖에는 아무도 그분에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우리의 주의를 하나님의 말씀에 돌려 하나님의 의로운 세상 통치 진리를 증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신앙으로 세워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에 속한 의심 없는 확신으로 향합니다.
문맥은 두 가지 해석을 인정하나 문맥 내용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모순 없이 행동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것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다윗이 곧 “하나님께서 한두 번 말씀하심으로서 자신의 능력과 자비에 대한 분명하고 반복적인 주장을 통하여 모든 모순의 가능성을 초월하는 진리를 확언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욥기33장 14절에도 같은 취지의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고 다만 접속사만 삽입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한번 말씀하셨고 나는 이것을 두 번 들었다”(칼빈) 입니다.
시편 62 편
이 해석은 문맥과도 일치하며 대단히 중요한 실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이 한번 말씀을 내셨으면 결코 취소하지 않으신다는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우리들의 의무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오랫동안 신중히 숙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섭리의 빛 가운데서 꾸준히 역행하지 않고 깊이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또 다윗은 자신의 행동을 그 말씀과 연관시켜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혹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말씀이 자신의 기억에서 사라질까봐 그 말씀을 계속 반복하여 묵상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단순하고 좋은 해석은 하나님이 한 두번 말씀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한번은 율법 가운데서 말씀하시고, 두 번째는 선지자들 가운데서 말씀하셨다는 암시가 이 말씀 속에 있는 것으로 보는 독창적인 추측에 결코 무리는 없습니다.
최상의 의미는 언급된 진리가 되풀이 선포되어 보통 확실하고 고정적인 것으로 여겨졌기에 그 진리가 충분히 확인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모든 말씀은 반드시 절대적인 권위와 함께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의 두세 곳으로부터 뒷받침을 받을 수 없는 한 어떤 교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관습에 대해 여하한 관용도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교리를 거절하는 행위가 우리들 중에서 파렴치한 이단들에 의해 옹호되어 왔습니다.
이들은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와 은밀한 섭리의 교리를 전복시키려 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말씀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을 반복해야 할 필요성에 매여 있었다고 말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의도는 단순히 명백하고 투명한 용어로 선포된 진리의 확실성을 주장합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하고 있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숭고한 존경과 유의를 자신에게 좋은 예로 제시합니다.
우리는 하반절에서 다윗이 특별히 주목하도록 뽑아낸 특별한 교리를 함께 취급합니다.
우리가 시험에 대항해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하는데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에 대한 생각을 알맞게 높이는 일입니다.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고 그가 전능하신 만큼 또한 자비로우시다는 확고부동한 확신보다 더 효과적으로 우리를 빗나가지 않고 곧바르게 보존하는 것은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 안에서 말씀으로 교훈을 받았다고 선포합니다. 이로서 존경심으로 말씀에 복종하는 문제에 관해 자신이 한 말을 끝까지 지킵니다.
어떤 이들은 다윗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할 능력을 갖고 계시며, 다윗 자신에게 이것을 행할 수 있게 하는 자비도 갖고 계시다고 말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시편 62 편
그러나 다윗의 의도는 하나님이 악인들을 억제시키시며 그들의 교만하고 사악한 계략을 부술 만큼 강하시나 자녀들을 보호하고 옹호하심에서는 항상 선하시다 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개념에서 분리시켜서는 안 될 두 속성을 응시하도록 단련받은 사람은 시험의 가장 맹렬한 공격 속에서도 요동치 않고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모든 충족성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첫 시험에 부딪칠 때 넘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세상적 견해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게으르고 무관심한 방관자로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뜻하지 않은 해를 당하게 될까봐 두려워 떨고 자신들을 우연이 지배하는 운(運)의 놀림거리로 여기게 된다고 이상할 것이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감독하신다는 진리에 만족하지 않거나 또 우리 생명과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없다면 어떤 안전도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바라봐야 할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배려에 내맡길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이 확실한 피난처가 되신다는 철저한 확신입니다.
이것과 더불어 우리 마음의 다른 한편에서 생길지 모르는 걱정스러운 생각을 막기 위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확신을 연결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의심을 갖게 합니다.
곧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통치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들처럼 가치 없는 대상에 관심을 갖는 일이 과연 있는가?” 입니다.
다윗이 주의 권능과 인자함을 짝짓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까지 날 수 있게 하는 두 기둥입니다.
위험이란 어느 곳에서든지 발생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해를 제거할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감정이 우리 마음에 가득 찰 때 환난은 그 권능 앞에 어김없이 굴복할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는 두려워해야 하는가, 우리를 그 날개의 그늘로 덮어 주시는 하나님께서 고개를 한번 끄덕이심으로 우주를 다스리시고 악마와 악인을 은밀한 쇠사슬로 묶어 두시며 그들의 계략과 음모를 효과적으로 지배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실진대 우리가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다윗은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라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세상을 그 섭리에 따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의로 심판하시리라고 선언하면서 자신이 의도했던 내용으로 보다 가까이 향하게 합니다.
당연히 품어야 할 이런 기대는 우리 마음을 가라앉히고 초조감을 덜어주며 우리의 손해에 대해 분개하고 복수하려는 성향을 점검함에서 복된 결과를 얻게 할 것입니다.
시편 62 편
다윗은 하나님의 거대한 막대기 앞에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앉히고 앞으로 올 구원의 소망으로 자기 마음을 격려하며 원수들의 핍박을 경멸하도록 자신을 가르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를 부인할 수 없듯이 심판주가 되시기를 멈추실 수 없는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의 행위가 심판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부당한 처사가 심해도 악인들이 우리를 만물의 찌꺼기나 폐물로 여겨도 하나님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증인이시요, 적합한 때에 간섭하셔서 우리의 끈기 있는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리라는 확신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 말씀과 또 유사한 구절로 교황주의자들은 칭의와 구원은 선행에 달려 있다는 그들의 교리를 변호하는 논증거리로 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들의 추론에 대한 오류를 물리쳤습니다.
행위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가 무섭게 교황주의자들은 그 표현에 매달려 하나님은 공로 때문에 인간에게 보상하신다는 말을 산더미처럼 덧붙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약속하신 것은 전혀 다른 의도입니다.
성령의 의도는 우리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복종하게 하고 구원을 그 뿌리째 뽑아 버리는 자만심을 부채질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행위에 따른 심판에서 그 행위의 가치와 평가가 있습니다.
첫째 행위의 가치는 하나님이 죄인을 화목케 하신 값없으신 죄용서에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그 행위의 모든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봉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겸양과 관대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완전하고 순수하게 죄 없이 여겨질 수 있는 우리의 행위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받는 어떤 보상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말씀이 성도들에게 보상을 약속하는 것은 다만 그 신자들의 마음을 고무시키고 영적 전쟁에서 그 신자들을 격려하려는 의도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손상시키려는 엉뚱한 의도가 없으십니다.
그러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공로에 따라 받을 만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교황주의자들에게 있는 부조리입니다.
악인들의 경우 율법의 위반자들로 그들에게 수여되는 엄격한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논박하지 못합니다.
시63:1-4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본 시편은 기도보다는 여러 가지 경건된 묵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데, 이러한 묵상은 다윗의 마음을 위험과 걱정, 그리고 심한 환난 가운데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본 시편에는 또한 다윗이 하나님께 했던 서약이 들어 있는데 다윗은 그가 처했던 불안한 환경에 의해 생긴 고통 중에서 이 서약을 했습니다.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
다윗은 종종 사울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유다 지파에 속한 외진 사막으로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잔인한 박해자가 열심히 다윗을 찾았을 때 다윗의 발자취를 추적해 보면 그가 해렛 수풀(삼상22:5)과 심 황무지(삼상23:14), 마은 황무지(삼상23:24,25), 그리고 엔게디 황무지(삼상24:1) 등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유다 지파에 속해 있었습니다(수15:55, 62).
이 시편의 작성 시기를 다윗이 사울에게 핍박당할 때로 봄에 있어서 일어나는 유일한 반론은 11절에서 다윗이 자신을 왕으로 부른다는 점인데, 핍박시에는 사울이 여전히 이스라엘의 홀을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칼빈이 11절에서 관찰한 대로 다윗이 스스로를 이 왕의 칭호로 부른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성취하실 때 자기를 보좌에 세우시리라는 사실을 확신 있게 말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또한 다윗이 사울이 길보아에서 죽기 전까지는 어떤 지파도 다스리지 못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사울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다윗을 왕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이들은 본 시편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로 도망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때 쓰여졌다고 생각합니다(삼하15:23, 16:2, 17:29)
1. 본문 1절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입니다
1) 다윗은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합니다.
특별히 그 하나님이 다윗 자신과의 관계에서 어떠하심을 말합니다.
그분을 아는 지식으로 그분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이 바른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바른신앙이 바른기도며 찬송이며 헌상이며 바르고 열정적인 헌신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시편 63 편
2) 본 시편의 표제와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라고 언급된 유다 광야는 다만 ‘십’광야일 가능성이 있는데 다윗은 이곳에 숨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방황했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시련 중에 있었던 단련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그 진실된 기록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다윗이 자기 기도를 하늘에까지 들어올리는 것과 하나님의 약속에 확고하고 항구적인 신앙으로 머무르기까지 그 시련에게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대단히 경미한 시련에 공격을 당할 때도 전에 우리가 가졌을지도 모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한 위로를 잃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에 유의하고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환난 아래서도 확신을 유지하도록 투쟁하기를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단순한 기도 그 이상으로 지금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자기 하나님으로 주님을 자기 앞에 모시는 것은 그가 모든 염려를 주저없이 주님께 던져 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황폐하고 쓸쓸한 광야로 초라하게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돕는다는 확신에서 나타난 다윗의 신앙은 그가 기대했던 은혜를 계속적으로 열렬히 기도하도록 그를 자극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3)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한다는 말에서 다윗은 자신이 광야에서 처했던 궁핍과 빈곤을 넌지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비록 그가 일상적인 생활 수단은 빼앗겼지만 자기 모든 갈망을 하나님께 향하면서 하나님을 자기 음식과 음료처럼 기대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자기 영혼이 갈망하는 것으로 말하고 육체가 굶주리는 것으로 말했다고 해서 우리는 여기 영혼과 육체의 구별에 대한 어떤 미묘하고 난해한 시도를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은 단순히 자기 영혼과 몸이 모두 하나님을 갈망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몸이란 저절로 욕망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알기로 영혼의 느낌은 마음속에서부터 광범위하게 몸에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2. 본문 2절은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입니다.
이미 암시한 바와 같이 분명한 것은 다윗의 생각에 비록 자기가 광야에 궁핍하게 방황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늘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와 같이” 라는 말은 강조적 입니다.
시편 63 편
다윗이 그토록 황폐하고 소름끼치는 쓸쓸한 곳에 머물러서 그곳의 무서움 때문에 자기 묵상이 산란해질 정도가 되자 마치 성소에 있었던 때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보도록 자신을 단련했습니다. 전에 그가 장막에 머무를 수 있었을 때에는 하나님 예배에 대한 그런 요소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기 헌신에 성소와 같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런 특권으로부터 두절된 지금 다윗은 그래도 자기 마음이 상징적인 것들이나 단순한 외적 종교 의식에 빼앗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쁘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을 영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시대와 관련된 신앙 행위로 많은 유익을 얻었나 하는 증거를 제시합니다.
무지하고 미신적인 사람들은 그들이 종교의식에 접촉하는 동안에는 열심과 열정으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식이 사라지게 되면 그들의 진지함도 곧 사라지게 된다는 점은 현저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다윗은 이러한 외적 의식에서 쫓겨났을 때 그것들을 기억하여 계속 회상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움을 입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망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은혜의 외적 수단과 기회를 빼앗겼을 때, 그 최악의 상황에서도 우리 신앙의 눈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상징들이 우리 시야에서 사라질 때마다 하나님을 잊지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영적 중생이라는 위대한 진리는 비록 우리에게 세례로써 단 한번 나타나지만 전생에 걸쳐 우리 마음에 확고히 남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딛3:5, 엡5:26).
그리스도와 그 지체 사이에 존재하는 신비스러운 결합은 우리가 성만찬으로 주님의 식탁에 앉아 있을 때만 아니라 언제나 숙고해야 할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성찬 예식이나 우리의 영적 행복을 증진시키는 다른 수단들을 폭력에 의해 빼앗긴다고 가정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열심히 응시하지 못하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이와 같이......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라는 표현은 다윗이 그 대상에 여념이 없어서 자신이 이것에 모든 묵상을 쏟되 진지하게 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그가 성소에 반영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3. 본문 3-4절은 “(3)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입니다
1) 물론 이 상반절이 분리되어져서 앞 절 뒤에 붙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지만, 3절을 이렇게 연결된 형태로 읽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시편 63 편
아마 다윗이 자기가 하나님을 왜 그토록 진지하게 갈망했는가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는 “생명” 이라는 말을 인간이 자기 유지와 보호를 위해 사용하는 모든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도 여러 가지 필요한 물건을 잘 공급받는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호소하고 싶은 생각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존재’(‘생명’을 이렇게 본다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너무도 육적인 도움에 의존하여 하나님을 잊으려고 하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여기서 우리가 마땅히 생명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나 그렇게 보이는 것에 의존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의존해야 한다고 확언합니다.
인간이 자기 만족에 빠져 안일해지기 쉬운 안정된 번영 상태와 그렇게 빠지고 망할 때를 예비하여 준비된 지주(支柱)이자 모든 결핍을 보충(이 표현을 써도 된다면)하기 위한 유일한 효과적 치료책인 하나님의 인자하심 사이에는 명백한 대조가 있습니다.
2) “생명” 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가 복수이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여기에 철학적이고 독창적인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원래 복수는 아주 흔히 단수의미로 사용되었으므로 그의 말은 근거 없는 것입니다.
(1) 어거스틴은 ‘생명들’ 이란 말이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진리와 관련되어 사용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곧 각각 다른 사람들이 각각 다른 생활을 취하는데 어떤 이들은 재물을 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쾌락을 추구하며, 또 어떤 이들은 사치를 갈망하고 이 세상의 명예를 바라며 한편 성욕에 빠져 있는 자들도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구절에 이런 여러 종류의 생활과 영생의 대조가 “인자” 라는 평범한 표현 방법을 통해 나타나 있는 것으로 여겼는데 그 이유는 “인자”가 공로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은혜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시편 기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습니다.
곧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들이 만든 어떤 생활방식이나 다른 모든 도움을 합한 것보다 더 신뢰할 좋은 근거가 되기 때문에 인간이 번영을 얼마나 많이 누리는가나 일반적으로 생활을 안정케 한다고 여기는 수단들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의 인자하심(ךדסה : 하스데카), 곧 주의 넘쳐흐르는 자비는 생명(םייחמ : 메하임) 보다 낫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인간 생존의 무수한 시대보다 낫거나 혹은 그 이상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주의 백성들이 아무리 가난이나 인간의 부당한 폭력이나 갈망에 맥이 빠져 시달리거나 또는 굶주림과 목마름 그리고 수많은 생활의 환난과 걱정으로 고통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행복한 것입니다.
시편 63 편
그들에게는 인자라는 말의 가장 좋은 의미인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친구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불신자들의 경우, 비록 모든 세계가 저희들에게 미소를 보낸다하더라도 그들은 비참한 것이라는 사실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의 원수시며 저주가 필연적으로 그들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본문 3절 하반절에서 다윗은 당연히 생기는 결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는 결심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할 때면 우리 입술을 열어 감사하기 마련입니다.
4) 다윗이 의도하는 바는 다음 4절에서 보다 명백하게 암시되어 있습니다.
(1) 여기에서 그는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확실히 하기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라는 표현 중에 “이러므로” 라는 말은 그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를 앞서 언급한 말로 들리는 듯한데, 이는 그가 인간의 방법대로 사는 것보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을 훨씬 좋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므로” 라는 말의 의미는 “이와 같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조건 속에서도” 가 될는지 모릅니다.
다윗은 자기가 방황했던 광야에서도 여전히 자기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했다는 사실을 이미 암시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평생” 이라는 말을 하나님이 간섭하심으로 보존되어 온 다윗의 생애로 볼 것이냐 혹은 이 문맥의 의미를 다윗이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뜻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전자의 의미가 가장 충분한 교훈적 요소를 주며 문맥과도 일치합니다.
곧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생존하게 되었고 계속 안전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송축하겠다는 말입니다.
이와 유사한 감정은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115편 17-18절, 118편 17절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2) 4절 하반절의“내 손을 들리이다”라는 말 가운데는 기도와 서원에 대한 암시가 있습니다 다윗이 암시하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께 감사할 뿐만 아니라 덧붙여 자기 간구에 확신을 얻어 부지런히 계속 기도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게 되면 그 체험이 한편으로는 우리를 자극시켜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며 동시에 그 체험은 우리의 장래 소망에 힘을 주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이 시작하신 은혜를 완성하시리라는 확신에 찬 기대를 갖게 합니다.
시편 63 편
시63:5-11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같이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이 시편 제목을 “광야에서 주님께 부르짖는 기도”라 하였습니다
Ⅰ. 그리고 그 내용을 대략적으로 강요하였습니다.
1. 이 시편을 저술한 다윗은 하나님을 갈망하여 찾았습니다(1, 2).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하나님인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절에 말한 대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란 믿음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자기에게 최상의 방패요, 상급으로 여기게 하였습니다. 또 저렇게 간절하게 만들었습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법입니다(마6:21).
가장 좋은 것을 찾는 자가 미온적인 태도로 찾는다면 그것은 모순된 일입니다.
오늘날 신자들 중 하나님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다고 하면서 그것을 소유하기 위한 노력이 매우 적은 것은 불합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2. 다윗은 비록 건조무미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생명보다 나은 주님의 사랑(인자)을 체험하게 될 것을 내다보고 그 때에 찬송하리라고 합니다(3-7).
이 세상에 속한 간절한 소원은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도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소원은 언제나 만족을 얻습니다.
다윗은 이런 체험을 벌써 많이 하였기 때문에(7절 상반) 이렇게 주님을 사모하는 그의 소원이 성취될 것을 확실히 내다보았습니다.
그가 장차 주님을 찬송하되 주님의 완전성에 대하여 깊은 느낌을 가지고 할 것도 여기에 미리 말하여 둡니다(6절).
자연에 대해서도 깊이 관찰하지 않을 때에는 그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에게 대하여 소홀하게 대하는 자들이 어떻게 그의 위대하심을 깨달으며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시인은 말하기를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그를 찬송하리라고 합니다.
3. 이 시인 다윗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며 즐거워하며 믿는 자(주로 맹세하는 자)가 필경 승리하고 성도를 박해하는 자는 마침내 망하리라고 예언합니다(8-11)
시편 63 편
Ⅱ. 이제 본 시편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 보겠습니다.
1. 본문 5절은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입니다.
앞 절에서 언급한 말씀에 따라서 다윗은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는 재물과 모든 풍부한 축복을 얻으리라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
이 시편을 작성할 때 다윗은 이미 안정과 풍부를 만끽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광야에서 가난과 궁핍으로 헤매던 때에 그가 이와 같은 확신을 품었다고 생각해도 충분한 근거는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강한 믿음을 명백히 보이려 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이 실제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그리고 장차 나타날 은총이 현재 전혀 그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에, 그 하나님의 은총을 미리 기다려야 만 할 것입니다.
여기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는 이 예(例)로부터 우리가 마땅히 배워야 할 점은 사악한 자들이 이 세상의 풍부한 물질에 탐닉하여 방탕하는 한편 우리 자신은 궁핍으로 쇠약하게 될 때에도 이런 상황에서 낙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으로 인하여 절망에 빠질 수도 있었으나 그는 하나님께서 굶주린 영혼을 채울 수 있으시며 자기가 하나님의 은총에 신용을 두고 있는 한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생에서 여러가지 고통으로 우리의 인내를 단련시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모든 요구가 풍성히 만족을 얻을 때까지 온유한 우리에게 행해지는 부당한 처사들에 대해 인내하도록 하십시다.
다윗이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할 때에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곧 다윗은 악인들이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마음을 잔인하게 만드는 그 무절제하고 과격한 방종을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다만 자신을 재촉하여 보다 신속하게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절제 있는 즐거움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2. 6-7절은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입니다
1) 이 구절은 또한 ‘내가 주를 기억할 때(또는 기억할 때는 언제나) 내가 밤중에 기도하오리니’ 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시편 63 편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 불변화사는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로 쓰일 뿐만 아니라 때때로 긍정을 표시하는 부사로도 쓰이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용납하는 번역을 지지합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이 하나님을 “기억하며” 라는 말은 그가 하나님을 묵상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한 하반절은 다만 상반절에 표현된 감정에 대한 반복이 됩니다.
만일 이 불변화사를 때를 나타내는 부사로 본다면 이 말의 의미는 다윗의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이 다시 떠오를 때마다 그 이름을 기쁨으로 말하고 그분의 선하심에 대해서 이야기하리라는 뜻이 됩니다.
다윗은 특별히 “밤중”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는 동료 피조물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바로 이러한 밤중에 우리는 우리를 걱정케 했던 것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우리 생각이 보다 자유롭게 다른 주제들에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2) 7절에는 다윗이 방금 선포한 점, 곧 자기가 보존되어 온 것은 하나님 덕택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면 우리는 찬양과 기도할 마음이 생깁니다.
다윗은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시5:7) 라고 합니다.
3) 7절 하반절에는 다윗을 활기 있게 만들었던 강렬한 소명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날개 그늘 밑에서 즐거워하고 승리할 것을 결심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함으로써 그가 지금까지 가졌던 평안감과 만족감에는 아무 위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8절은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나의 영혼이 주께 단단히 붙어 있사 오니 - 칼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입니다.
1) 히브리어 동사는 특별히 여기서와 같이 구조상 전치사와 연결되어 있을 때 그 의미가 ‘이해하다’ 또는 ‘따르다’ 라고 해도 되므로 이 구절을 ‘내 영혼이 주를 꼭 붙들다, 혹은 따르다’ 로 번역해도 매우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 번역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더라도 이 구절의 의미는 다윗의 마음이 꾸준히 하나님께 헌신적이었다는 뜻입니다.
‘주께’ 라는 말은 강조적 표현으로 다윗이 아무리 그 길이 멀고 난관으로 가득 차고 장애물이 놓여 있어도 또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 임재하심을 철회하신 것처럼 보인다 해도 자기는 지칠 줄 모르는 절개로 주님을 따르겠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2) 하반절은 그가 계속 받아왔던 것으로 언급한 그 구원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윗이 자기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완전히 보존되어 왔다는 사실을 생각했을 때 이것은 그에게 약해지지 않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시편 63 편
그러나 이 말이 보다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 다윗이 여기에서 성령께서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인내의 은혜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만일 다윗이 자기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한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리라는 말을 덧붙임으로 자기주장에 자격을 부여하지 않았다면, 그가 흔들리지 않는 목적으로 하나님께 붙어 있겠다고 한 말은 자랑하는 헛된 소리와 같은 것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4. 본문 9-10절은 “(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 칼의 세력에 붙인 바 되어 시랑(豺狼)의 밥이 되리이다” 입니다.
1)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이 보다 확실한 자신감으로 일어나 마치 승리를 얻은 것처럼 개가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물론 그가 난관에서 벗어나 본 시편에 기록된 대로 평화와 번영의 상태에 있었으나 그가 다만 자기 생명이 그토록 절박한 위험에 있었던 그 아슬아슬한 기간에 자신이 실제로 느꼈던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2) 다윗은 자기 생명을 끈질기게 찾는 그 원수들이 기어이 꺾이고 말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으로 집어던지실 것이라고 말합니다(9절).
3) 또 그들의 시체는 매장되지 않는 채 버려질 것이라고 확신 있게 선언합니다(10절) “시랑의 밥”이 된다는 말은 ‘들짐승’ 에게 찢기우고 삼키우도록 내버려진다는 말과 같습니다. 악인들이 칼로 망하고 늑대나 개의 밥이 되어 무덤에 묻힐 권리조차 없이 되는 일은 종종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으로 선언됩니다.
이것은 가장 훌륭했다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겪어왔던 운명입니다.
악한 자뿐만 아니라 선한 자도 일시적인 악에 타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4) 그러나 다음과 같은 구별은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흩어진 먼지 같은 자기 자녀들을 감찰하사 다시 모으시고 멸망에 대한 아무런 고통을 주지 않으실 것이지만 반대로 악인이 죽임을 당하여 그 뼈가 돌판에 흩어지게 될 때 이것은 영벌에 대한 한낱 서곡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5. 본문 11절은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로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입니다.
1) 다윗이 받은 구원은 한 개인으로서 다윗 자신에게 미친 것이라기보다 전 교회의 행복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마치 머리에 안전히 붙어있는 몸의 행복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자기와 함께 즐거워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한다는 점에 타당성이 있습니다.
시편 63 편
또한 우리는 비록 다윗이 자기 주변에 위험으로 들러 싸여 있을지라도 그의 거룩한 관용을 찬미하며 그를 주저 없이 왕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데, 이는 다윗이 왕의 영예를 실제로 소유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그것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은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라는 말로 자기가 느끼는 감사를 표현합니다.
동시에 그는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면서 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신자들의 공동체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당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안전은 다윗의 통치와 그 번영에 불가분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가지 비유로써 우리 행복과 영광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3) “주로 맹세한 자”라는 말로 다윗은 모든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통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을 증언하시고 판단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장엄한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맹세” 는 제유법이라고 부르는 표현법에 따라서 일반적으로 신앙 고백을 하기 위해서 행해집니다.
4) 그렇다고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다 자기 종으로 여기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11절 끝에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들의 입술에 들먹이되 다만 가장 악한 위증으로 그 분의 이름을 더럽히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경박하고 쓸데없는 맹세를 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무시합니다.
또 위선자들은 악하게도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함으로 죄를 면할 수 없게 됩니다.
5) 그러나 다윗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주를 즐거워하거나 자랑하는 자들은 사려 깊게, 그리고 존경심으로 주께 맹세하며, 자기들이 선포한 것을 마음으로 응답하는 그러한 자들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윗이 하반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자들과 “거짓말하는 자”를 대조시키는 점으로 볼 때 더욱 명백해집니다.
“거짓말하는 자” 라는 말은 단순히 배신적이고 기만적인 인물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짓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