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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6-28
공의로운 재판정에서 / 손상률 목사
본문 성경에는 희대의 명군 솔로몬의 재판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 집에서 같이 사는 창기 두 여인이 삼일 간격으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잠결에 아이를 덮쳐서 죽게 하고는 자기의 죽은 아이를 다른 여인의 산 아이와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침에 아이가 바뀐 것을 알아차린 산 아이의 어미가 자기 아이를 데리고 가려하자 다른 여인은 산 아이가 자기 아이이라고 하며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두 여인이 솔로몬 왕에게 와서 서로 죽은 아이는 다른 여인의 아이고, 산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하며 왕의 판결을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왕은 칼을 가져와서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서로 반반씩 가지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왕의 말이 떨어지자 한 여인은 그것이 공평한 판결이라고 말하였으나,
다른 여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왕에게 간청하기를 산 아이를 저 여인에게 주고 아무쪼록 죽이지는 말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두 여인의 반응을 보고 왕은 대번에 산 아이의 어미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그 여인에게 산 아이를 돌려주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솔로몬의 명 판결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를 발휘한 첫 번째 사례로써 이후부터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어디서든지 분쟁이 있고 이를 조정하는 재판제도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나 재판은 공정하여야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만인 공지의 법이 시행되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민주사회에서는 이해당사자가 재판 결과를 승복할 수 있도록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일을 우선으로 합니다. 아무리 심증이 가고 정상을 참작하더라도 세상 법정에서는 증거가 없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 솔로몬의 재판도 세상법정에서 채택할만한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솔로몬 스스로 “이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하고(23절) 난감해 하였습니다.
그가 칼을 가지고 아이를 절반씩 나눠주라고 했을 때 그 여인들의 나타난 반응을 보고 산 아이의 어미와 죽은 아이의 어미를 분별할 수 있었지만, 이것도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는 불완전한 증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공의로운 재판관이라고 합니다(시 7:11).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신 분이어서 사람들이 말하는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시 139:1-4).
또한 하나님은 선과 악을 구분함에 있어서 그의 법을 가장 공정하게 적용하십니다(욥 8:3). 다만 하나님께서 적용하는 법의 기준이 사람들의 기준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만약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기준이 적용되지 않았다면 여기 산 아이의 어미가 쉽게 자기 아이를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Ⅰ. 진실이 적용됩니다.
솔로몬의 재판은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두 여인이 산 아이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우겨대는데, 나타난 정황만 가지고는 생모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혈액 검사나 유전자 감식 같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쉽게 구별할 수 있었겠지만 그때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받았던 솔로몬이기에(왕상 3:9), 뛰어난 순발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왕의 입에서 칼을 가져오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진실과 거짓을 갈라놓는 틈새가 생겨났고 순간을 포착하여 재치 있게 판결을 하였습니다.
(1) 가장 확실한 증거는 진실입니다.
한 사건을 놓고 이해 당사자가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할 때 옳고 그름의 기준은 진실입니다. 원고나 피고가 다 자기의 주장만이 진실이라고 하겠지만 이때 재판장은 그 진위를 찾아내는 기지를 발휘하여야 됩니다. 사람은 겉으로 나타나는 말과 행동만 보고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거나 상대방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데 대한 증거를 제시하도록 요구합니다. 대부분 세상 법정에서는 증거 제일주의로 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무리하게 증거를 조작하는 사례도 흔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관입니다(시 7:11). 하나님께서 판결하시는 증거의 기준은 진실입니다. 로마서 3:4에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고 하였습니다.
(2) 진실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성경에서 ‘진실’이라는 말(ἀλήθεια)은 ‘참’, 또는 ‘진리’라고 해석되는 말이며 ‘올바르다’는 뜻과 ‘믿음’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적용되었고(요 17:17), 예수님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여졌습니다(요일 5:20). 진실 또는 진리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너무나 확실하여 거짓된 것으로 조작하거나 어떤 기교도 가미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닙니다. 곧 유일성(唯一性)과 불변성(不變性)과 영원성(永遠性)을 뜻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진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길이나 진리나 생명은 오직 하나뿐이라는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진리의 유일성을 설명하면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행 4:12). 진실은 시대나 환경에 따라서 변하거나 그 능력이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성격을 진리의 불변성과 영원성이라고 합니다(히 13:8).
(3) 하나님은 진실을 찾아내십니다.
사람들은 흔히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십니다.
요한복음 2:25에 보면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솔로몬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왕상 8:39).
사무엘상 16:7에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로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히 4:13). 세상나라에서는 재판정에 나온 사람이 자기임의대로 증거를 만들어서 제시하고 거기에 따라 진실과 거짓이 뒤바뀔 수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다윗은 세상나라의 왕이나 관리들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을 보고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시 2:4). 하나님의 의로우신 재판정에서는 진실만이 승리를 하게됩니다.
Ⅱ. 사랑이 적용됩니다.
로마서 12:9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하였습니다. 법정에 선 원고와 피고가 제각기 자기를 옹호하며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고자 하는 살벌한 현장에서도 사랑의 속성은 작용합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은 사랑을 최고의 윤리요 모든 율법의 기준으로 보십니다(마 22:40).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놓고 옳고 그름에 대한 감정을 하실 때 여러 가지 법적 조문과 거기 따르는 정황을 살피시지만 결국 사랑이라는 최고의 법이 지켜지는 것을 보면 그것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약 2:8).
이 재판정에서 솔로몬 왕이 칼을 가지고 아이를 반씩 나누라고 했을 때 산 아이의 어미는 마음이 불같아서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소서’하고 왕에게 애원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 자식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했을 때 동물적인 본능이 발동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모성애입니다. 솔로몬 왕은 이 거짓 없는 사랑을 확실한 증거로 삼았습니다.
(1) 사랑은 분쟁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잠언 10:12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가 믿음의 모든 소양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 위에 반드시 형제 우애와 사랑을 공급하여야 된다고 말했습니다(벧후 1:5-7). 로마서 12:10에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15:17에는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 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기록하면서 사랑을 윤리의 최고의 덕목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3:13).
(2) 성경적 사랑의 특징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사랑이 나타나집니다. 가령 친구간의 사랑, 이성간의 사랑, 형제나 가족 간의 사랑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하나의 조건과 이유가 있는 사랑이지만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닌 특수한 사랑이 있습니다.
소위 아가페(αϒαπη)라 불리는 성경적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은 상대적이고 조건적인데 반하여 이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한1서 4:7-8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9절에는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현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감정(鑑定)하십니다. 인간의 사랑은 위선적인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만 보아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실체이기 때문에(요1서 4:16) 거짓 없는 사랑을 구별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 산 아이의 어미가 불붙는 것 같은 마음으로 그 아이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할 때 그것은 조건 없는 사랑이요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서 하나님 사랑의 성격을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의 내용을 묻는 율법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설명하시고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2:37-40). 로마서 13:10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재판장으로서 율법의 완성이요 최고의 기준인 자기 희생의 사랑이 실천되는 것을 보실 때 그 앞에서는 어떤 허물도 다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4:8).
사도 바울은 우리를 송사하고 정죄하는 세력이 아무리 무섭더라도 공의로운 재판장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을 해 버렸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롬 8:33). 그는 또 그 이김의 비결을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였습니다(롬 8:37).
Ⅲ. 양보가 적용입니다.
여기 산 아이의 어머니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였습니다. 26절에 “그 산 아들의 어미 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어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자기 아들을 다른 여인에게 양보하였습니다.
(1) 잃는 자가 얻게 됩니다.
여기 산 아이의 어미는 순수한 모성애로 돌아가서 자기의 권리나 자존심을 포기함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한 것도 다 내어주고 그 아이의 생명을 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막 10:45).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리는 지위와 모든 영광을 다 포기하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빌 2:6-7).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죄와 죽음아래 신음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포기하였습니다(마 27:46).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족이나 재물이나 심지어 목숨까지도 잃을 각오를 하라고 하였습니다(마 19:29).
옛날 야곱은 애굽에 내려갔던 아들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가려할 때 “너희가 나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에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고 하며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창 42:38). 그러나 그는 끝내 베냐민을 내어놓기로 양보하면서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하고 결단을 내렸습니다(창 43:14). 그 결과 베냐민을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작 잃어버렸던 아들 요셉까지 찾게 되었습니다(창 46:30).
(2) 죽으면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골 2:1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요 11:25).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먼저 그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누가복음 9:22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죽으심의 의미를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한 과정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24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진리가 그리스도인에도 적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 16:24-25).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딤후 2:11-12).
(3) 하나님의 긍휼이 있습니다.
며칠 전 우리나라에서는 십 육년 전 남편의 손에 살해당한 여인이 억울하게 간첩의 누명까지 썼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것도 국가기관에서 조작한 증거에 따라 재판부가 잘못 판결을 내렸던 것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아무리 확실한 증거에 공정한 재판을 한다 해도 이러한 허점이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나타난 증거가 없어도 가장 공정하고 의롭게 판결하시고 적절하게 보상하십니다.
솔로몬이 자기 자식을 포기하는 친 어미의 중심을 알았기에 산 아들을 그에게 돌려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양보하고 희생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보상하여 주십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양심선언을 한 사람이 재판정에 서야 되고 벌을 받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때때로 정당한 일을 하고도 죄인 취급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가는 사람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마 5:10-12). 사도 베드로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벧전 2:19).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어 종의 모습이 되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시고 높이 들어 세우셔서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빌 2:6-10).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나 어떤 환경에서나 진실과 사랑과 양보가 승리하게 하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