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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포레 격월간평
일상의 문학적 승화, 싱싱한 자각의 회복
-<에세이포레> 를 읽고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고리끼는 일찍이 ‘내 필생의 사업은 인간학이다.’라는 유명 한 명제를 내놓았는데, 문학은 곧 인간학이다. 포에르바하는 ‘예술이 갖는 지고무상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다.’라고 했다. 어떠한 학문도 철학도 ‘인간’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란 ‘인간의 삶’을 전제로 해서 가능한 개념이다. 모든 수필은 ‘인간의 삶’에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내적 필연성이 항구적으로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문학이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문제라는 것이다. 인간을 떠나서는 문학은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이다. 수필 속의 모든 재료는 인간의 상관물이요, 인간 자신이 투영된 것이어야 한다.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그것을 문학적 눈으로 봐서 표현하는 것이 수필이고, 그것은 일상의 삶이 문학적으로 승화된 것이다. 수필이 인간의 내면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 본질 자체의 속성이 내면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는 창조되어질 수 있는 작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행위에서 오는 창조, 다시 말해서 창조자가 자신의 창조적 행위에서 삶의 상승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설파한 바 있다. 이는 작가는 자신이 하는 작업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창출해야 한다는 말과 통한다. 인간의 삶은 자기표현에 그 의미가 있고, 자기표현으로써 그 삶은 비로소 형식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일종의 창조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하겠다. 우리가 언어를 부리는 것은 자동화된 일상세계를 낯설게 만들어 일상적인 삶이 놓치고 있는 싱싱한 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삶에 대한 표현은 본질적으로 직접적으로 자기 관찰을 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 문학적 표현에는 인간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그를 실현하기 위한 작가 나름의 노력이 작품 속에 내재되어야 한다. 체험과 표현 그리고 의미부여라는 삼 요소의 내적인 연관 관계에 의해 수필이 되는 것이다.
II.
노혜숙의 <이소移巢>에 주목해 본다. 노혜숙의 수필을 읽으면, 그녀가 추구하는 수필의 본령이 무엇인지 쉽게 드러난다. 그녀는 쓰는 행위를 ‘의미부여하기’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수필은 단절과 소외라는 현대적 특성을 정조준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문학성이 주제의식을 ‘어떻게’ 표현해 내는가에 있다면, 이 수필은 그 조건에 한 치 오차도 없이 부합한다. 현대성에 대한 터치는 좋은 수필의 조건이기도 한 ‘공감할 수 있고 가치 있는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에 일단 이 수필은 성공적이다. 작가정신의 입장에서 볼 때, 근대적 성찰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닌가. 우리 시대 이렇게 의식 있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가, 박수를 보내면서, 이 수필의 발단에 눈길을 둔다.
‘낯선 거리에 홀로 서서 반쯤 남은 꽃잎들이 속절없이 지는 걸 보는 일은 쓸쓸하다. 길 건너 우뚝한 집들은 표정 없이 완강하고, 꼬리를 감추며 사라지는 차량들은 제각기 외로워 보인다. 더듬어 마음 줄 곳을 찾는 내 모습이 한 점 구름처럼 정처 없다. 두고 온 것들은 벌써 그립고 호명을 기다리는 옛 추억처럼 아득하다.’로 시작하는 서두 문장을 유심히 읽어 보면, 원래 서두 기능인 전개예고와 주제의식의 상상화가 너무나 완벽하다는 걸 알게 된다. 수필은 발단의 예술이다. 발단부의 주위 배경과 심정 묘사가 서정의 옷을 입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전개부를 긴장과 호기심으로 찾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전개부에 해당하는 두 번째 문단 처음 시작은 ‘이사온 지 세 달이 넘도록 나는 앞집 여자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문장이 차지하고 있다. 작가는 아파트 구조 변경 때문에 앞집 여자를 만났지마는 그 여자는 작가와 끝내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몸을 사린다. 이런 단절을 특성으로 하고 있는 근대적 삶의 폐해를 작가는 ‘혈육의 죽음을 타인의 신고를 통해 알게 되는 삶이 과연 좋기만 할까.’라는 의문으로 비판하고자 한다.
작가는 이런 이웃간의 단절로 소외된 자신을 위로하고자 베란다에 화초를 들여 키운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화초에 자신을 투사시켜 서정의 극대화를 꾀하는 데 성공한다. ‘낯선 토양에 뿌리를 내리느라 몸살을 앓고 있었다.’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물아일체를 이루어 세계와 자아를 동일화시켜낸 탓에 우리는 서정수필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얼마나 설득력을 얻을 것인가. 작가는 주제의식의 고양과 설득력을 위해, 한 지인의 이야기를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위해 전개부 마지막 즈음에 수놓기로 한다. ‘십 년을 마주보고 산 이웃이 온다간다 말도 없이 떠난 걸 한 달 후에야 알았다고 했다. 이것저것 살갑게 챙겨주던 터였는지라 적잖이 허망하더라고 했다.‘는 진술이다. 결말부에 가서는 작가는 ’그동안 베란다의 화초는 원기를 회복했고, 나도 녀석을 찾는 횟수가 차츰 줄어들었다.‘라는 문장을 앞세워, 삶은 자동화의 원리로 인해 시간이 가면 환상이 깨어지고 만다는 것과, ’환상을 걷어내고 보는 현실은 삭막하지만 그 현실을 보듬고 어루만지며 사는 건 결국 내 몫일 터였다.‘는 진술로 아팠던 기억들도 시간의 경과에 의해 추억의 옷을 갈아입고 평정된다는 진리를 말해준다. 작가는 이런 현대적 단절과 소외를 ’서로 다른 물길이 섞이는 일이 어찌 순탄하겠는가‘라는 말로 간접화하면서, ’엎치락뒤치락 에돌다 마침내 완만하게 합수되는 그날까지 느긋하게 흐를 일이었다.‘는 성찰의 결과를 내어 놓는다. 대단한 쾌미다.
수필은 자아를 찾아 나서는 작업이다. 근대적 성찰을 통해 단절과 소외로부터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성찰 속에서 자신을 찾아 바로 세우는 작가의 수필적 생활이 돋보인다. 수필의 멋은 냉철한 이성과 논리보다도 오히려 체험의 구체화를 통한 작은 깨달음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이 글은 나의 체험을 어떻게 표현하여야 문학적 감동에 이르게 하는가의 중요성을 느끼게 하기에 감동을 준다. 수필은 인간의 가슴과 가슴을 이어가면서 흐르는 강물과도 같은 것이다. 문학이 담당해야 할 사명 중에 하나가 인간성 회복이라면, 그 첫 번째로 할 일이 이웃이란 말이 갖는 의미를 부활시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상호간에 가치 있는 목표에 조력함으로 서로를 조각하는 미켈란젤로 이펙트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한 편의 완벽한 서정수필로 잘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김은주의 <황홀한 경작>은 역설적인 제목 설정이 재미를 더한다. 여기서 ‘황홀한’이란 형용사도 ‘경작’이란 명사도 실제적 의미 이상의 뜻을 나타낸다. 제비집처럼 붙은 가게 뒤편에 녹두전만한 마당밭에서 재배한 갓이니, 황로한 경작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허름한 삶의 터전에서 옹색한 모습으로 푸른 갓과 싱싱한 파를 다듬을지언정 식구를 먹이고 입혀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저버리지는 않고, 김치가게 아주머니를 도우며 성실하게 묵묵히 일만 하면서 아비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사내에게 후한 점수를 주며, 작가는 일상 속의 평법한 이야기를 감동이란 물감으로 칠하고 있다. 작은 것을 현미경의 눈으로 크게 보고, 프리즘의 눈으로 풍경을 절경으로 만드는, 이런 자기만의 초월론적 현상학적 인식이 바로 세계의 자아화다. 향일암 가는 길목의 김치가게 앞에서 작가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은 한 사내다. 각시를 위해 종일 파를 다듬는 사내를 보는 작가의 마음이 든든하다. 작가가 찾아낸 이런 아름다운 모습, 사내의 모습이 아름다운 시가 되기도 하고, 꿈이 되기도 하고, 노래가 되기도 해 허세 가득한 남정네들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올려 세운다.
이 수필을 읽으며 평자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을 통하여 오늘을 소중히 아낄 줄 알고, 그 어제를 부끄럼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의 사랑이 넘치는 사랑의 문학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김은주는 이런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한 작가다. 이 수필의 핵심 메시지는 부부간의 진실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랑과 행복이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의미 있고 소중한 것이 부부와의 만남이 이루어내는 사연이다. 특히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 부부의 연으로 맺어진 관계 속의 그 절절한 사랑은 무엇에 비교할 수도 없다. 이 수필은 사랑이 있다면, 또는 사랑의 의미를 아직 모르고 있다면, 그 사랑에 도전해 보고 싶은 욕심을 내게 한다. 인간의 가슴과 가슴을 이어가면서 흐르는 강물과도 같은 수필의 멋을 잘 포착해서 리얼하게 전해준다. 문학이 담당해야 할 사명 중 하나가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할 때, 그 첫 번째로 할 일이 부부가 갖는 의미를 부활시키는 일일 것이다. 각시의 고단한 마음밭을 갈아주는 사내의 마음을 작가는, 서로의 영혼이 융합되는, 서로의 가슴에 소롯이 남아 절벽을 헤치며 굽이 도는 강물에 비유하고 있는 것 같다.
수필의 특성도 자조보다도 관조에 초점을 맞출 때 더 문학적 향취를 거둘 수 있는 법이다. 수필 창작은 본 것, 느낀 것만으로 기록되는 단순한 체험의 배열이 아니라 경험을 넘어 사라가는 것의 본질적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탐색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이 수필은 보여준다, 결국 수필을 쓴다는 것은 어떤 대상으로부터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인 것이다. 작가는 한마디로 새로운 의미부여하기 차원에서 수필에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활인의 단순한 인식을 넘어 서서 수필 소재에 담긴, 또는 묻힌 가치를 유의미하게 다듬어 가는 관조의 힘이야 말로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작가 자신의 숨결인 것이다. 이 수필이 갖는 멋은 대상의 본질을 멋지게 태질하는 데 있다. 작은 것의 의미들을 한데 모아 응축하는 솜씨가 돋보인다. 누군가를 위한 신명이 예술적 생명력으로 표출되는 것일까. 별 것 아닌 것에 큰 의미를 설득력 있게 전개하는 솜씨가 쾌미를 준다고 하겠다.
이은희의 <더덕꽃, 울리다>는 하늘 가까이 솟은 초고층 아파트 테라스에 꽃을 피운 더덕에 관한 상상을 적은 글이다. 더덕이라고 하면, 몸에 좋은 약초 정도로 생각하지 꽃에 포커스를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작가는 더덕 뿌리에 전혀 관심이 없다. 이 수필은 중심보다는 주변부에 시선을 놓는 이런 타자철학이 피워낸, 낯설게 보기의 소산이라 하겠다. 작가는 왜 ‘더덕꽃, 피다’로 하지 않고 ‘더덕꽃, 울리다’라고 했을까. 이런 점에 착안해서 우리는 이 수필의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작가는 종 모양의 더덕꽃을 보기 위해 더덕에 엄청난 애정을 쏟는다. 꽃 모양에서 생뚱맞게 산사의 풍경소리를 떠올리기도 한다. 이 수필에서 중요한 것은 그 종 모양의 유혹이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을 설득적으로 전달하는 데 있다. 작가는 종 모양의 꽃이 사람을 끄는 이상한 힘을 가졌다고 보며, 그 모양의 진면모를 상상력으로 잘 전달하고 있다.
꽃의 생성을 줄곤 지켜보며 나의 상상력은 오로지 종소리에 닿아 있다. “우리는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볼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만 보이지 않는다.”라고 어린 왕자는 말하지 않았던가. 덩굴줄기가 길게 뻗어 올라 꽃이 피어나길, 종의 울림을 고대한 것이다. 그러다 문득 꽃의 전생이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거대한 종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더덕을 애지중지 가꾸며 마음에 종소리를 키운 것이다. 드디어 자연이 수놓은 덩굴줄기에 종 모양 꽃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린다. 집안에 청아한 울림이 가득 퍼지리라. 그 울림으로 온갖 고통과 시름을 지우고, 덧없는 일상에 잠자던 감각과 의식을 일깨운다. 삶에 긍정의 꽃으로 향기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더덕꽃. 이제 고대하던 꽃이 피었으니 여러 날 은은한 종소리에 파묻혀 살리라.*
평자는 더덕을 키우며, 마음에 종소리를 키웠다고 하는 작가의 말에 주목한다. 이 수필이 문학일 수 있는 근접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미적 취향을 가진 예술가라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그 상황을 외면하는 작가도 있을 것이고, 즐기는 작가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후자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종 모양의 신비한 생명성을 보면서 그녀는 인생의 새로운 의욕과 활기를 되찾고 싶은 것이다. ‘그 울림으로 온갖 고통과 시름을 지우고, 덧없는 일상에 잠자던 감각과 의식을 일깨운다.’고 하는 결말부 문장에는 그녀의 세계관과 인생관이 드러나 있다. 자연의 모든 물상에는 하나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속에는 삶의 환희와 생명력이 내재해 있다. 자신의 삶에 솔직한 작가는 그 무엇을 힘껏 치닫는 생명력이 번득이는 종 모양의 더덕꽃이 내는 청아한 울음의 싱그러운 잔치 속에서 긍정의 미학을 꿈꾼다. 차분한 묘사와 사색, 그리고 관조는 작가의 뛰어난 문재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감동을 준다.
이 작품의 우수성은 ‘문득 꽃의 전생이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거대한 종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상상력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내면을 꿰뚫어 보는 비범한 시선에 있다. 꽃에 대한 느낌이 아주 절제된 감성으로 그려지고 있어 감동을 준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한 어린왕자의 말을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위해 끌고 온 전략도 유효했다. 긴장을 놓지 않도록 하면서 마지막까지 상상력으로 힘차게 밀고 가서 주제의 의미를 찾아내도록 하는 측면에서 이 대목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작품의 우수성은 더덕꽃과의 아름다운 만남을 긍정의 미학으로 연결시켜 독자에게 문학적 향기를 전해주는 데 있다.
빛나는 상상력과의 만남으로 성립되는 소중한 관계가 정겨운 강물처럼 출렁이고 있어 어떤 수필보다도 감동을 준다. 이 글의 문학적 향기는 철저하게 ‘종소리’ 중심으로 전개되는 데 있다. 작가가 펼치는 종 모양의 더덕꽃에 관한 상상력은 절대적이다. “선덕대왕신종의 울림이 이만하랴‘는 작가 특유의 개성적 문장이 빛을 발하면서 상상적 음미의 여지를 크게 남기고 있다. 총체적 경험의 산물로 얻어지는 정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크나큰 의미를 발견하는 교감의 세계가 빛난다고 하겠다.
III.
수필을 사랑함은 인간을 사랑함이다. 수필을 쓰는 일은 Logos와 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인은 이 시대의 지팡이다. 그러므로 문인은 문인다워야 하고, 글다운 글을 지어내야 한다. 체험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는 창조성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병든 사회일수록 문인들에게는 더욱 막중한 사명이 있다.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수필만이 구원이라는 사명에 접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룬 수필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일상적 삶을 문학적 언어로 잘 표현하고 있다. 주제의식의 간접화로 하나 같이 여운의 미학을 구축하면서 멋과 맛 그리고 향기를 낸다. 이들 작가처럼 삶 속에서 발견한 의미들이 보석처럼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관’이 중요하다. 글을 쓴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글을 그린다는 자세로 수필을 써야 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본다. 하지만 창조적 천재들은 그림을 ‘듣고’ 음악을 ‘본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피아노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머릿속으로 음악을 ‘그리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그는 산과 강, 바위를 보며 전투장면이나 기이한 얼굴을 연상하는 등 한 가지 형상에서 무한히 다양한 대상을 그려냈다. 마음의 눈으로 관찰하고, 머릿속으로 형상을 그리며, 모형을 만들고, 유추하여 통합적 통찰을 얻었다. 우리 수필가들이 새겨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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