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편 4절-6절: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셀라)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4절: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셀라).’ 장막이 뭐냐? 장막은 천막인데, 광야생활을 하는 데 필요하다. 장막은 광야에서 비바람이나 눈보라나 뜨거운 햇빛을 피할 수 있다. 광야는 신앙적으로 보면 세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의 장막’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사건 환경의 비바람과 눈보라를 피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그러면 여기가 어디냐?
광야에서 천막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대로 옮겨 다닐 수 있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데, 이걸 신앙정신 사상 면으로 보면 이 세상은 뭐다? 광야다.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입을 수 있는 곳이 장막이다. 장막이 있으면 광야에서 옮겨 다니며 생활을 할 수 있듯이 우리가 말씀으로 무장하고 있으면 광야 같은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종 모세를 따라 출애굽한 선민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갈 때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설계해 주신 성막 또는 장막이 있었다. 이건 역사적 측면의 얘기다. 이 성막 안에서 지정된 제사장이 반차를 따라, 순서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사함을 위한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심의 증거로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인 성막 또는 장막이 있기 때문에 위안이 된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장막은 글자대로 보면 천막인데, 천막은 비바람을 맞으며 1, 2년이 지나면 찢어진다. 그런데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라고 하는 것은 다윗이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거다. 영원히 하나님의 보호를 입고 싶어서, 영원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서, 영원히 하나님과 인격적 결합적 애정적 수수관계로 살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거다.
이 세상에서 이 맛을 본 사람은 다윗처럼 그렇게 영원히 살고 싶다는 소원이 생긴다. 육신적으로 영원히 살고 싶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한 번 맛을 본 사람은 주님의 품 안에 영원히 거하고 싶고, 영원히 주님을 만나고 싶은 소원성이 생긴다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땅에 살면서 이런 맛을 봐야 한다.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셀라).’ 주님에게 날개가 있느냐? 병아리가 어미의 날개 밑에 숨어있으면 보호를 받는다. 어미의 날개 밑은 포근하고 따뜻하다. 그런 것처럼 주의 날개 밑의 신앙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신앙이다. 하나님의 보호를 입으면 평안하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는 평안과 기쁨과 사랑이 있다.
그러면 예수 믿는 나는 어디로 피하고 싶으냐? 어디에 거하고 싶으냐? 그리고 어떤 게 주의 날개 그늘 아래냐? 그늘 아래 있으면 시원하고 비를 안 맞고 보호를 받는다. 자기가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있게 되면 평안하고 기쁘고 보호를 받게 된다. 그러면 뭐가 주님의 보호냐? 진리 안에, 말씀 안에 거하는 게 주님의 보호 아래 있는 거다.
거짓 종들도 다 이런 말을 하는데, 어떻게 해야 실질적으로 주님의 보호가 되는 거냐? 전쟁이 났을 때 예배당 안으로 들어오면 폭탄이 떨어져도 보호가 되는 거냐? 말씀 안에, 진리 안에 거하는 게 주님의 보호가 된다고 하는 것은 맞는 말인데 어떻게 해야 실질적으로 주님으로부터 보호가 되는 거냐?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은 말로만이 아니라 정신 사상적으로 이룰구원으로 살아간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이룰구원으로 사는 거냐? 자기가 겪는 모든 사건 환경 가운데서 모든 결과를 이 땅이 아닌 천국에 두고 해 나갈 때 이룰구원이 되어지는 거다. 이 이룰구원은 인인 연관관계성 가운데서 되는 건데, 말로는 ‘이룰구원, 이룰구원’ 하면서 맨날 욕심 부리고, 형제들과 싸우고, 남편과 싸우고, 교인들끼리 싸운다면 이룰구원이 안 된다.
5절: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다윗의 서원이 무엇이겠느냐?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라고 했으니까 앞 절을 보면 다윗의 정신 사상이 어떤 것인지 보인다.
다윗은 어떤 종교적인 사업을 이뤄드리겠다는 서원이 아니었다. 이런 서원은 성도들에게 주는 기업이 아니다. 다윗은 물질성에 대한 서원이 아니라 ‘네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해 주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을 인격적으로 믿고 어떤 환경과 사건의 바람 속에서도 신앙이 변질되지 않고 진리생명의 말씀에 정로로만 걸어가겠다고 했던 서원이 분명하다.
이래야만이 기업이 얻어지는 거다. 이런 신앙이라야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받게 되고, 이런 신앙사상이라야 미래적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는 거다. 다윗은 이런 신앙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셨고, 다윗은 이런 정신으로 이스라엘을 신정통치의 나라로 이끌었다. 그러니까 이 사상이 아니면 신정통치자가 안 되는 거고 하나님의 허락된 약속이 없는 거다. 이게 믿어지느냐?
‘목사가 되겠다. 앞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종이 되겠다’ 라는 마음이 있다면 뭘 해야 하겠느냐? 말씀의 약속을 믿고 목숨을 걸고 그 정로로 걸어가는 거다. 그러면 이 약속이 미래적으로 이뤄질 것이고, 현재적으로 맛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 이 정로로 걸어가면 날마다 편안할 것 같으냐? 그렇지 않다. 그런데 고통을 못 견뎌서 그만 옆으로 튀어나간다면 이 사람은 지도자감이 안 되는 거다.
신앙 사상적으로 정로로만 걸어가는 이것은 물질서원이나 행동서원보다 더 어렵고 값진 신앙이다. 이런 사람은 물질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서원을 하던 안 하던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해 여건이 허락되는 대로 자원하여 나오게 된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질적으로 하나님의 성품 쪽으로 들어가는 거다. 속화된 교회에서 물질로 서원을 하게 하고, 물질을 기준으로 신앙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된 거다.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주를 경외하는 것에는 이룰구원이 들어있다. 이룰구원이 없는 경외성은 경외가 아니다. 주님의 성품으로 자체화 인격화 사상화 되는 게 주를 경외하는 거다. 그러면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에게 어떤 기업이 참 기업이겠느냐? 1. 어떤 기술을 상속받는 거다? 2. 농토를 상속받는 거다? 3. 재물을 상속받는 거다?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거다? 4. 신령천국을 상속받는 거다?
네 가지 중에 이방인들은 어느 상속을 원하느냐? 4번 외에 다 원하느냐? 그러면 그것을 다 받는다면 그것을 언제까지 가지고 있느냐? 이 땅에서 만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허락이라야 하루를 가지던, 열흘을 가지던, 십 년을 가지던 가질 수 있는 거다. 하나님은 이런 불에 타지는 것을 상속해 주겠다는 게 아니라 영원에 속하는 거다.
믿는 우리는 신령천국을 상속받는 것은 필연적이고, 더 나아가서 신령천국을 상속받아서 영능의 실력대로 그 천국을 다스리고 누리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영능의 실력을 닦아야 한다. 영능의 실력을 닦은 열두 사도가, 사도바울이, 엘리사가 주님의 축복을 받았듯이, 주님의 보호를 받았듯이 우리도 영능의 실력을 쌓아서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보호를 받아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말로만이 아니라 정신 사상 면에서 가치 가치판단 평가성, 모든 이해타산이 신령천국에 내려져 있어야 한다. 이게 없이는 자기가 하는 말이 자기에게 아무런 효력을 주지 못한다.
자기 속에 말씀의 부요성, 하나님의 사랑의 부요성을 가져야 물질적으로 가난할 때 이 가난성을 참는 게 아니라 이겨낼 수 있다. 이게 안 되면 물질적 가난 때문에 믿음도 까먹고 주일도 까먹고 하게 된다. 말세가 될수록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으니 삼일예배는 직장이나 거리 등의 이유로 빠질 수도 있는 거지만 주일예배는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빠지면 안 된다. 이를 위해 생업을 갖는 것도 지혜롭게 가져서 할 수만 있으면 날마다 모일 수 있는 쪽으로 머리를 써야 한다. 이런 게 이룰구원의 사상이지 예수 믿으면서 갈 데 다 가고, 할 거 다 하느라고 예배시간도 빠진다면 믿는 정신이 어디 있는 거냐?
믿는 사람이 세상을 사랑할수록 그만큼 고통이 들어가는 거다. 예를 들면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는데 이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미쳐버린다. 왜 그러냐? 그만큼 자식을 사랑했다는 거다. 자식을 우상을 삼았다는 증거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하나님 다음이다. 그래서 자식을 하나님 앞에 교육적으로 바로 세워야지 정을 들일 필요가 없는 거다. 정을 들여놓으면 정을 들인 만큼 그 자식이 고통을 주게 되어있다.
자녀가 어릴 때부터 지혜적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게 교육을 해야지 육적인 정이 꽉 들면 못 쓴다. 크면서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할 수 있게 하고 공부도 자기가 알아서 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생활을 할 때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그걸 이겨나가게 된다. 세상은 항상 바람이 부는 곳이다. 세상에 속한 것은 바람 불면 다 날려간다. 바람에 안 날려가는 것은 신앙정신 사상밖에 없다.
우리는 교회에서 무엇을 주고 받고 있는지 영의 눈을 가지고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서원과, 얻을 기업과, 우리 신앙의 성격과 성질과 정신과 사상이 하나님의 것과 본질적으로 단일성으로 직통이어야 한다. 교회에서는 이를 위해 진리본질로만 나가야 하고, 성도들은 자기가 진리본질에 단일이 되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신앙은 자기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고치며 올라가는 거다. 그래야 신앙이 커진다.
6절: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장수는 오래 오래 사는 건데, 오래 사는 것을 인간의 복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냥 오래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장수냐? 왕으로서 오래 사는 게 참 장수다.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왕으로서의 통치성이 대대로 견고히 연속이 되는 것을 말한다. 다윗의 통치는 진리로 되는 신정통치인데, 이 통치성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주역이 되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이 왕 계통을 통해서 그 백성들을 잡고 구원운동에 그 시대의 주역으로 쓰신다.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이냐?
이 축복의 신정통치를 역사적으로 다윗 왕으로 통해 보여줬다. 교회 인도자들은 이 통치를 눈여겨보고 성도들로 하여금 이 통치를 영원히 받게 하고, 주님의 재림 때까지 갈 수 있게 하고, 하나님의 본질적인 이 신앙이 천국에까지 직통되게 해야 한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하는 것은 직통을 말하는 거다.
교회의 신앙은, 목사님들의 메시지는 그 사상이 진리본질이면서 하나님께 직통이 돼야 한다. 직통의 성질 성격을 가져야 한다.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이게 신앙의 세계요, 이게 교회요, 이게 하나님의 나라요, 이게 하나님의 왕국이요, 이게 신정통치를 받는 교회다. 그런데 말세 때는 이게 아닌 교회가 많다. 그래서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서 진리를 받으라는 거다. 그래서 말씀을 받는 일에 빠지지 말라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