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7] 정대화 (鄭大和) - 내조자로서의 한평생
5. 참부모님 모심의 생활 1 이강칠 권사님을 도와 참부모님 성혼식 때 두 자 높이의 상을 처음으로 차리고, 성혼식 후 양위 분께 첫 진짓상을 식장으로 올려 드린 꿈같은 영광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다. 2 참부모님 성혼식 후 참어머님께서는 3일 동안 신혼살림을 하시는 기간이 있었다. 설비도 나쁜 부엌에 내려오셔서 손수 진지를 준비하셨다.
3 나이 어리신 어머님이라곤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항상 사용하며 익혀 온 살림같이 척척 움직이시며 닭찜이며 감자 크로켓 등을 만들어 내시는 걸 보고 감탄했다. 참어머님께서 오신 후로는 식단도 다양해지고, 간도 점차로 싱거워졌고 “무엇을 해드릴까요?” 하고 참어머님께 여쭈어볼 수도 있었다. 4 참아버님께서는 가끔 안방에서 부엌문을 열고 내려다보시며 “힘들지 대화야! 그러나 일선에 있는 식구같이 배는 고프지 않지? 밥은 먹을 수 있으니까.” 하시며 위로해 주셨다. 5 축복을 받고 나서도 나는 모심의 생활을 계속했었는데 개척 당시의 어려운 교회 생활은 참부모님 가정의 부엌에도 반영이 되었다. 자녀분들께 마음껏 반찬이나 간식 음료수를 드릴 수 없었던 것이 지금도 돌이켜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6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 하나님의 날, 참부모님 탄신일 상차림을 3가정이 맡아 해야 한다고 하여, 장 보기로부터 차리고 정리하는 것까지 내가 맡아 주관하였다. 이문원씨가 많이 도와주었다. 7 예진님으로부터 국진님까지 출생 시에 직접 간접으로 돌볼 수 있는 영광도 있었다. 참어머님께서는 예진님을 청파동 김인철 회장 집에서 출산하셨다. 김신욱 선생이 받았는데 박보희 선생은 교회에 모인 식구들에게 찬송을 하게 하고 ‘왕자님 오시네!’라며 노래를 많이 하였다. 모두들 왕자님으로 믿었고 공주님일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8 자녀님들 출생 때의 일들 중 잊을 수 없는 것이 혜진님 때의 일이다. 참어머님께서는 혜진님을 청파동 참어머님방에서 낳으셨다. 그 방은 다다미 6조보다 좁은 출입문과 천정 밑에 들창문이 하나뿐인 방이었다. 부엌과 복도 사이에 있는 방이었기 때문에 매우 불편한 곳이었다. 9 그때는 병원보다는 성별된 방에서 우리 식구 산파를 중심한 식구들이 둘러싸인 집에서 해산하도록 했었다. 김신욱 선생이 혜진님을 받으셨는데 나는 따뜻한 물을 준비하고 잔심부름을 하며 도와드렸다. 혜진님은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많이 우셨다.
10 김신욱 선생이 밤에 혜진님을 모셨고 나는 낮에 모셨다. 그런데 혜진님이 계속 우셨기 때문에 나중에 병원에 모시고 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어른들은 자녀님들이 병원에 가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너무 심하게 울자 병원으로 모시고 갔던 것이다. 그런데 태어난 지 8일째 되던 날 승화하셨다.
11 혜진님이 유난히 혀가 길었는데 어떤 기도하시는 분은 혜진님이 언어의 천재적 소질을 타고나서 살아계셨다면 9개 국어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12 국진님이 세 살 때 전 가족이 미국으로 가셨는데, 그때까지 한경자씨, 조명원씨, 심명옥씨, 정영희씨와 함께 참부모님과 참자녀님들을 모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