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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국가에서 각종 복지혜택을 통해서 여러 가지 지원금을 참 많이 지급하고 있습니다. 차량을 구입하려고 해도 이제 국가정책적으로 밀고 있는 전기차나 수소전기차를 구입하려고 할 때 지원을 하기도 합니다. 또는 국가에서 없애려고 하는 노후경유차에 대해서도 차량을 개조한다든지 폐차할 경우에도 지원금이 나옵니다. 아동양육비를 지급하기도 하고 생활보조금을 지급하기도 하고 학업지원금을 주기도 합니다. 한부모가정에 대해 임대주택입주지원이나 자립촉진수당지급 혹은 각종 양육비용지급등을 국가가 해주기도 합니다. 정말 다양한 복지정책을 쓰고 있고 이런 복지정책을 통해 나라에서 주는 혜택을 보고 소속감을 느끼며 좀 더 공동체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지혜택이 많이 있는데 무조건 받는 것이 아니고 이런 혜택을 위해 증명해야할 서류들도 많고 자격조건이 많이 까다로운 것을 보게 됩니다. 저도 얼마 전 바우처혜택을 신청하기 위해 팔탄면 사무소에 방문하여 복지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이런 저런 서류를 작성하는데 정말 까다롭고 복지담당자도 혜택을 받을 자격이 되는 지를 살펴보며 접수받는 일을 하는 하는데 정말 자격에 관련된 매뉴얼책자의 두께가 엄청나서 책을 살피면서 공부도 많이 하고 실제적으로 그런 복지혜택접수도 받아보고 경험이 있어야 자격조건을 잘 이해하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제자로 살아가야할텐데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제자들이 해야할 자격 요건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정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이며 하나님의 백성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 정말 주님의 백성으로서의 참된 자격요건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된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첫째로 모든 인간관계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가족의 문제를 내려놓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크게 부담이 되는 것이 바로 가족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도 부모가 반대하는 경우가 많고 배우자가 반대하는 경우가 많고 자녀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어제 고주리에 우리가 들어와서 사역하게 되면서 하나님께서 귀하게 연결시켜주어서 종종 저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와~우리교회 집사님 한 분이 찾아오셔서 기도제목을 나누며 함께 식사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도제목을 들으면서도 정말 가장으로서 큰 부담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돈은 좀 되지 못해도 본인이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대로 뭔가 일을 해보고 싶은데 그래도 자녀들이 대학교를 다니고 아내되시는 분이 일을 하면서 온 가족이 재정적인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가장이기에 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고 자신이 신앙적인 것을 고려하며 직장생활하고 싶은 부분 마저도 뒤로 미루고 돈을 먼저 생각하고 가족부양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족이 그렇게 부담을 주는 것 같지는 않지만 본인 스스로 가장이고 책임져야한다는 생각이 앞서니 신앙을 조금 접어두고 당장 어떤 일이든 돈되는 일부터 해야하지 않을까라는 의중을 가진 것을 느끼며 참 안타까운 마음과 서글픈 마음과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가족을 돌보고 가족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을 돌보는 것이 정말 그리스도인이 해야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속에서는 무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심지어는 자신을 미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바로 이것은 집착과 책임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간혹 그것이 참된 가족사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집착이나 책임감을 정말 참 사랑인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갈 때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약 4년전 쯤에 뉴스에서 한 여성이 죽은 남편을 매장않고 7년인가 함께 지내며 남편이 살아있을 때처럼 생활했다고 해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일명 방배동 미라사건이라고 불리는 내용입니다. 이 여자분은 약사라고 알려졌는데 남편이 죽자 남편을 썩지 않도록 약품처리하고 집안에 그대로 둔 채 자신이 밥을 먹을 때도 시체옆에서 함께 먹고, 출퇴근 인사도 하고 심지어 아이들에게도 살아있는 아버지처럼 대하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정신병자같은 행동이야 드물지만, 배우자의 죽음은 엄청난 충격을 주어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하는 등 여러 부작용을 낳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로 집착이 나타나게 될 때 그것은 절대 참 사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사랑하기에 집착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오히려 참 사랑이 안 될 수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신앙과 인간의 운명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결과보다 가족을 더 위하는 삶으로 나타나게 될 때는 가족이 우상과 같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가족을 미워해야한다는 표현으로 가족사랑과 신앙관계를 극단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3장 12,13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우리가 정치를 하거나 공직에 있을 때 간혹 가족의 일을 봐주다가 결국은 가족으로 인한 비리로 인해 공직을 망치고 정치를 망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우리가 결국 객관적인 위치에 서야하는 상황속에도 가족 때문에 결국 사업을 망치고 일을 망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권력을 가지고 명예를 가지게 되었을 때 정말 조심해야할 것이 가족관계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참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가족관계속에서 신앙의 길을 잘못 행하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또 어떤 경우 정말 신앙적인 헌신을 하려고 하는데 가족이 반대하는 경우도 생기기도 합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가족들도 목회자의 길, 선교사의 길, 사모의 길을 가겠다고 할 때 반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가족을 위해서 비전과 사명을 잃기보다 정말 주님의 사랑으로 가족을 대하며 주님의 은혜를 가족들에게 보여주며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제자의 자격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족을 진정 위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깨달으면서 주님의 제자로 바로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족의 마음만 좋게 만드는 것이 참된 제자의 삶이 아니고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행하면서 그 길이 축복의 길인 것을 보여줄 때 우리는 진정 주님의 참 제자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족을 진정 사랑하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된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둘째로, 모든 자신의 유익과 괘락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4장 27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오늘 본문에서 제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십자가는 세상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고 이제는 고난의 그 길을 걸어간다는 말씀입니다. 결국은 인생의 모든 권한을 다 포기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며 우리의 모든 인생의 쾌락과 인생의 모든 삶의 즐거움을 포기하며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기 목숨까지 미워한다고 표현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우리의 생각이 충돌하면 우리는 대개 어느 쪽을 따릅니까?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만이 충돌의 순간에 예수님께 즉각 순종할 수 있습니다. 왜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합니까? 자기 목숨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 의미입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돈올 벌고, 지식을 쌓고, 명예를 쌓고, 또 권력까지 가지려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돈이 있어야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종교인은 우월한 도덕성이 있어야지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지식과 지혜를 쌓으면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 어떤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아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신랑 후보자들이 있어도, 결국 신랑이 한 명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은 하나는 죽고 하나만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배타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도 이러한 배타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이 배타적인 사랑의 관계는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것, 즉 죽는 것과 맞바꾸는 것입니다. 옛날의 연인인 자기는 미워하게 되고, 새로운 연인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바로 영적인 원리입니다. 성도는 어떤 명분이나 원칙을 인격체이신 살아계신 예수님보다 더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바울과 바나바가 “주님이 세워주신 이 안디옥 교회를 나는 평생 섬길 것이다!”라는 명분과 원칙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선교 사역으로 바나바와 바울을 부르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에 따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제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못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오스왈드 챔버스가 말한 ‘자기 신조’와 ‘자기 신념’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자기 신념과 신조에 따라 살면 대의명분을 따지게 되고, 인격적인 존재로 예수님께 헌신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 역시 인격적인 존재인 예수님과의 관계보다 자기 목숨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다니면서 마치 자신이 세상의 찌꺼기 같은 인생처럼 되어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세상에서 찌꺼기 같은 존재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돈, 지식, 명예, 권력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바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것의 함정이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은 지식이 많을수록 행복한 것이 아니라 더 괴롭다고 했습니다. 즉 자기 목숨 을 사랑해서 자기 존재 기반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큰 공허감과 허탈감을 경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며, 인격적인 예수님보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염려와 걱정이 더 충만해집니다. 예수님보다 자기 신조와 신념을 앞세우면 자기 목숨을 더 사랑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명령을 자기 신조와 신념의 틀 안에서 내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하면 살아계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와는 일치되지 못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어떠한 대의명분이나 원칙들도 예수님보다 우선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선교 사역에서 ‘아시아로 가는 전도의 길’을 대의명분으로 삼고 고집했다면 주님의 인도를 따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격체이신 예수님이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 사랑’을 경험하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빛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가는 길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빛나게 하여 그의 생명이 나와 이웃에게 흘러넘치게 하는 생명 사역의 길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리스도인은 딱딱 한 신조가 아닌,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 일치되는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 빛나게 높임을 받으실 때에만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 일치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정말 주님의 따른 제자로서의 자격을 위해서는 우리의 쾌락, 우리의 즐거움,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를 다 십자가에 죽이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고통과 고난이 따르는 길이라도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된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지막 셋째로, 자신의 가진 것에 의존하지 않고 가진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4장 33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가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보통 우리는 성도도 그렇고 뭔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재산을 좀 가지고 자신에게 오기를 원합니다. 어떤 조직을 만들려는 목적이 있는 사람들은 뭔가 소유가 많은 사람이 오는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재산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별로 안 좋아하십니다.
마태복음 19장 21,2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영국에 살던 어떤 부유한 사람이 임종할 때가 되어 어느 목사님이 그를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부자가 죽어 가는 침대 곁에서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엄숙한 시간에 목사님은 부자의 손을 잡고 기도하자고 하였더니 그 사람은 손을 뿌리치며 거절하였습니다. 끝내 임종기도를 받지 못하고 그는 힘없이 손을떨구며 임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굳은 두 손엔 금고의 열쇠가 쥐어져 있었는데 손이 식으면서 금고의 열쇠도 빳빳하게 식어지고 굳어졌습니다. 그 부자의 마음은 죽는 순간까지 돈에 대한 미련을 두고 있었지만 결국 그는 어느 곳도 이 땅에서 가지고 갈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대 최고의 명작 영화중 하나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의 남자 주인공 클라크 케이블이라는 배우가 있습니다.
그가 돈을 벌기 위하여 눈코 뜰 틈이 없이 영화를 찍고 육체를 돌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한 신문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돈을 꽤 많이 모았을텐데 왜 그렇게 겹치게 출연을 합니까?”
그러자, 클라크 케이블은 임신하여 배가 불룩한 아내를 가리키며 “머지 않아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 아이를 위해서도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합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그가 그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재산을 정리하니 백만 달러가 넘었다고 합니다. 한국 돈으로 약 10억원 정도이지만 약 80년전에 10억원이면 지금가치로는 약 1000억원은 족히 될 것입니다. 그런 돈을 가지고도 더 돈을 갖고 싶어하는 욕심 때문에 그는 죽지 않았을까요?
디모데전서 6장 10절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히브리서 13장 5절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돈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돈이 우리의 신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우리의 신입니다. 우리의 삶이 돈에 속한 것이 아니라 돈이 우리의 삶속에 있는 것이고 우리가 돈을 모으고 쓰고 돈이 우리의 삶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고 돈이 우리를 죽이고 살리고 돈이 우리를 울리고 즐겁게 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돈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돈에 대한 강박관념을 내려놓고 돈 때문에 우리의 감정이 이랬다 저랬다하는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주님을 따르며 돈에 대해서는 있으나 없으나 다 주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 참된 그리스도인,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오스왈드 샌더스 목사님이 쓰신 “제자, 거룩한 열정으로 부르심”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원래 “그리스도인”과 “제자”는 바꿔 쓸 수 있는 말이었으나 오늘날은 그렇게 쓸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엄격한 제자의 조건에는 따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시종 변함없이 따르기를 원하셨다. 양보다는 질을 더 바라셨기 때문에 더 많은 회원들을 끌어들이려고 자격요건을 낮추지 않으셨다.
콜럼바는 A.D. 563년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 고향 아일랜드를 떠난 복음주의자였다. 그는 큰 어려움에 부닥치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혹을 느낄 것을 알았다. 그래서 타고 온 배를 바닷가의 해변의 둑에 묻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무언의 간증이었다. 그는 어떠한 단서도 달지 않은 제자가 되기로 헌신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과 동시에 “제자”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신앙인은 다르고 신앙인과 헌신자는 다르다고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과 목회자는 다르고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는 다르고 일반 신앙인과 헌신된 사역자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구분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과 동시에 우리는 사역자요, 헌신자요, 제자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제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아갈 때 세상의 걱정을 모두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시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가족의 문제, 나의 인생의 즐거움과 쾌락, 나의 소유와 모든 가진 것을 다 내려놓고 그 모든 것의 주관자가 우리 예수님이시라는 생각으로 오로지 주님을 따르며 그 모든 것에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