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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 우리의 큰 대제사장 예수님 말씀/ 히브리서 4:14-5:10 요절/ 히브리서 4:14 | 2023. 2. 5 | |
히브리서 제 4 강 |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어제가 입춘이었고 남쪽 지방에서는 매화꽃이 피었습니다. 벌써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생명이 약동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내일부터 전국학생수양회가 열립니다. 우리 청년 학생들이 이번 수양회를 통하여 생명의 말씀을 받고 예수님의 참 제자로 세워지고 새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떤 점에서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되시는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론과 같은 인간 대제사장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큰 대제사장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알고 그 은혜를 힘입음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자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까? 4:14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당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정부와 유대교의 핍박으로 인해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굳게 붙들지 못하고 유대교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고난을 택하기보다 쉽고 편한 길을 택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권면합니다. 이 권면은 한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된 권면입니다. 믿는 도리를 굳게 잡는 것이야말로 핍박과 유혹을 이기는 비결이요 모든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믿고 의지해야 할 분은 누구입니까?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자는 예수님이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큰 대제사장은 위대한 대제사장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 대제사장과는 구별되신 분이시요 역사에 존재했던 어떤 대제사장보다 탁월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예수님은 큰 대제사장이십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신 분이시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을 정복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만유를 다스리시고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며,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고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어떤 유혹이 찾아오더라도 예수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매순간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신앙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이 힘들다고 율법주의나 유대교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완성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늘보좌에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큰 대세자장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예수님이 중보자로 우리에게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큰 대제사장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의 대세사장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셨기에 인간의 삶을 완전하게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셨고 인간의 모든 한계를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실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인간성을 입으신 예수님은 갈등과 유혹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때마다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유혹에 굴복하고 사단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어떤 죄도 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혹을 받아보았기에 유혹에 저항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연약함으로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동정하실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위로받을 수 있고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은혜를 얻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은혜의 보좌’는 은혜가 흘러넘치는 보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 확신 가운데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왕의 보좌는 탐욕의 보좌요 독재의 보좌입니다. 세상 왕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은 왕 앞으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상처를 받고 괴로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좌는 은혜의 보좌입니다. 하늘보좌에 앉으신 왕은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때 우리는 거절당하거나 진노를 맛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들고 나아가든지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즉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해결해 주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우리를 돌보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5:1-3은 대제사장이 어떻게 직무를 감당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에게는 두 가지 직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사람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대속죄일은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는 지성소에 인간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날에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은 인간에 불과했고 그 스스로도 연약에 휩싸여 있었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속죄제를 드리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섯 가지의 제사제도를 정해 주시고 예물과 속죄제물을 가져오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요 무식하고 미혹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 아래 있고 본능적으로 죄를 짓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대제사장이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은 자신이 맡은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그의 중보가 없다면 사람들은 죄 가운데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자리는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합니다. 모세의 형인 아론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대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아 섬겼습니다. 옛언약의 대제사장들이 스스로 존귀를 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영광을 얻었듯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2:7 말씀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임명으로 대제사장이 되셨고 그 자격요건을 완전하게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자기 자신의 죄를 위하여 희생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유대인 대제사장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레위 지파의 일원으로 태어나지 않으셨고 아론의 후손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레위 지파만 제사장이 될 수 있었고 아론의 자손들만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저자는 시편 110:4를 인용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아론 계열의 제사장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하늘의 대제사장입니다. 아론 계보의 대제사장은 영원한 제사장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입니다. 또한 아론의 후손들은 제사장이기는 했지만 왕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이시면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셨기에 연약함에 싸여 있는 우리와 공감하실 수 있었습니다.
7-10절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온전한 구원자가 되셨는지 보여줍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밤이 새도록 기도의 씨름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 다시 말해 하나님 아버지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 소원을 고집하지 않고 아버지의 소원을 붙들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히브리서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동일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죽음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으면 죽음의 고통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의 소원을 관철하기보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기도의 씨름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고 자발적으로 그 고난의 길을 갈 수 있기까지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들으심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절대적으로 믿었고, 기도를 통해 그 믿음은 더욱 깊어지고 견고해졌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의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예수님에게 내적 확신과 평강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시험을 받으셨지만 어떤 죄도 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삶은 온전하셨고 흠이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아들이시기 때문에 고난을 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황태자의 신분을 가진 자라면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도 왕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황태자였지만 받으신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삶 속에 들어와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특히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피하지 않고 그 길을 가고자 기도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셨고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드리심으로 온전한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에 대한 모델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지상생활은 각본대로 따라가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유롭게 선택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 고난과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순종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철저하게 순종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울 수 있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자녀들이 초등학교 때에는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중학생만 되면 부모님에게 반발하고 자기 뜻을 앞세웁니다. 요즈음은 권위가 무너진 시대이기 때문에 순종을 가르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인데 순종을 가르치기 어려운 오늘의 현실을 볼 때 제자양성은 구호로 끝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순종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압력을 가해서 순종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마음으로부터의 순종이요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순종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순종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적인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질병의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자녀로 인해서 속이 타고 괴로워하고 있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말 안 듣고 은혜를 배반하는 양들로 인해 마음 고생하는 목자들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갑질하는 상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직장을 그만 두고 싶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고난 앞에서 나의 연약함과 한계를 느끼고 하나님께 나아가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게 됩니다. 그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이끄시고 우리를 순종의 사람으로 빚어주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순종은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으로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은혜 받고, 믿고 축복 받는데서 끝나지 않고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움으로서 더 깊은 구원을 맛보고 삶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고통이라는 우리의 경험을 공유하심으로써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근원이십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처럼 순종하는 자들만 얻을 수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구원은 보장되고 더욱 풍성하게 됩니다.
모든 인간 대제사장들은 죽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 뒤를 계승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자기를 위해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자기의 목숨을 희생제물로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고 그 이후로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누구도 예수님의 뒤를 계승한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우리를 중보하고 계시는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힘입어 언제 어디서든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