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박민항, 신채호, 유동하, 유상근, 박희광, 조도선 선생 등
안중근 선생은 한말의 교육가·의병장·의사(義士)로 1907년 이전에는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 계몽운동을 벌였고, 그뒤 러시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1909년 초대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조선침략의 원흉으로 지목하여 하얼빈[合爾濱]에서 사살했습니다. 의거 직후 여순 감옥에 수감된 안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사형당했습니다.박민항은 독립운동가로 1928년 베이징에서 손기업(孫基業)·이상일(李尙逸) 등과 함께 중국 각처에 흩어져 활동하던 혁명동지들을 규합해 조선혁명당총연맹(朝鮮革命黨總聯盟)을 조직했으며, 1930년 손기업·이창용(李昌用)·최윤식(崔潤植) 등과 같이 톈진[天津]의 일본조계를 기습했습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이창용·최윤식과 더불어 봉천으로 급파되어 일본전권대사 부토[武藤信義]를 암살하고, 관동군사령부를 폭파하기로 했습니다. 중국 구국단(救國軍)과 연락하여 장학량(張學良)의 협조로 폭탄을 확보하고 이창용·손기업과 함께 장춘·봉천 등지를 전전하면서 부토의 뒤를 따라 다니며 암살기회를 엿보았으나 장춘에서 이창용과 함께 일본헌병대에체포되었고, 손기업은 텐진에서 체포되었습니다. 10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여순감옥소에서 복역중 옥사했습니다. 신채호는 독립운동가·역사가·언론인로 한말 언론·교육·신민회(新民會) 활동을 통해 계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중국 망명 후에는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노선을 견지하면서 외교론 중심의 상해 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활동했으며, 1920년대 중반 이후 무정부주의 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또한 역사연구를 통해서 한국근대역사학의 방법론과 인식을 성립시켰습니다. 1928년 5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선전잡지 발간과 폭탄제조소의 설치자금 마련을 위해 활동하던 중 타이완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으로 이송되었습니다. 1930년 5월 다롄 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 감옥으로 이감되었습니다. 복역중이던 1931년 신백우와 안재홍(安在鴻)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에 〈조선사〉·〈조선상고문화사〉가 연재되었습니다. 1936년 2월 감옥에서 뇌일혈로 죽었습니다. 유동하는 독립운동가로 이명은 강로(江露)이며 함경남도 덕원 출신입니다. 1909년 10월 노령 코트지로의 자택에서 아버지와 안중근(安重根)·우덕순(禹德淳)·조도선(曺道先)·김성화·탁공규(卓公奎)와 더불어 구국혁신을 맹세하는 ‘7인동맹’을 조직하였습니다. 1909년 10월 21일 이토(伊藤博文)가 열차편으로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하얼빈(哈爾濱)에 오는 것을 탐지하고 도착일자가 1909년 10월 26일 아침임을 확인하여 채가구(蔡家溝)에서 대기하고 있던 안중근에게 전보를 쳐서 안중근의거를 성공할 수 있게 도왔습니다. 이 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1909년 11월 안중근을 비롯한 우덕순·조도선 등과 함께 여순(旅順) 감옥으로 이송되고 1910년 12월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1918년 가을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애국청년들과 함께 볼셰비키혁명군에 가담하여 백계노군(白系露軍)의 축출활동을 하고 있을 때 이를 가장한 일본군에 붙잡혀 사말리야강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고 합니다. 유상근은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강원도 통천(通川) 출신입니다. 1918년 통천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가족이 북만주 연길현 용정(延吉縣龍井)으로 이주하게 되자, 그 곳 동명중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연길현 백평리 봉밀구 갑산촌(百坪里蜂密溝甲山村)으로 이사한 뒤로는 부득이 학업을 중단하고, 야학과 소년단을 창설하여 후배교육과 항일사상 고취에 주력하였습니다. 1927년 갑산촌에 조사차 나온 일본경찰과 충돌한 뒤 이곳을 떠나 상해(上海)로 망명하였습니다. 김구(金九)의 지시로 1932년 한국교민단 의경대원(義警隊員)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 해 5월 대련(大連)에서 김구의 지령으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동료단원 최흥식(崔興植)·이성원(李盛元) 등과 함께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만주에 온 것을 계기로 일본의 관동군사령관·남만철도총재 등 침략 원흉을 폭살하고자 활약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관동청재판소(關東廳裁判所)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련·여순(旅順)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광복을 하루 앞두고 순국하였습니다. 박희광은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밀양입니다. 1910년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1912년 4월 아버지를 따라 만주 펑톈 성[奉天省]으로 건너갔으며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해 제5중대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펑톈 성에 있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일민단(日民團) 등이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재만동포들을 위협하자, 이들을 숙청하기 위해 김광추(金光秋)의 지휘하에서 특공대원으로 활약했습니다. 1923년초 푸순[撫順] 방면의 고등계 첩자이며 조선인회 서기인 친일파 정갑주(鄭甲周) 부자를 사살하고, 1924년 6월에는 만주에서 가장 이름높은 일제 앞잡이인 보민회 회장 최정규(崔晶奎)의 집을 습격했으나, 최정규를 살해하는 데는 실패하고 그의 장모와 서기 박원식(朴元植)을 죽였습니다. 이들을 사살한후 대서관(大西關)의 요리집 금정관(金井館) 주인이 제공한 군자금 300원을 가지고 펑톈 성 밖으로 피신했습니다. 이들은 계속해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그와 김병헌은 중국경찰에게 체포되고, 김광추만이 피신하여 본대(本隊)에 전말을 보고했습니다. 김병헌과 함께 일경에게 인도된 그는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뤼순 고등법원[旅順高等法院]에서 징역 20년형을 언도받고 여순감옥에서 복역중 감형되어15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했습니다. 조도선은 독립운동가로 1895년 러시아로 건너가 이르쿠츠크 등지에 머무르면서 세탁업, 러시아어 통역 등에 종사하다가 1909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하얼빈[哈爾濱]으로 갔다. 10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대장대신(大藏大臣)과 회견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기회에 이토를 사살할 것을 결심하고, 안중근(安重根)이 러시아어에 능통한 그에게 조력을 요청하자 쾌히 승락했습니다. 그는 우덕순(禹德淳)·유동하(劉東夏)와 함께 채가구역(蔡家溝驛)에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하면 거사하기로 하고,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거사하기로 약속한 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특별열차가 채가구역을 그냥 통과하여 이곳에서의 거사는 미수로 그쳤으며 하얼빈 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뤼순[旅順]에 있는 관동도독부감옥서에 이송되었습니다. 1910년 2월 14일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복역했습니다.
첫댓글 안중근의사 유해관련 자료가 빨리발굴 되길 기원하면서 올린글 입니다
역사를 배워도 이렇게 조국을 위해 희생한 분들에게 특히 중점을 두고 가르쳤으면 좋겠습니다.
높이 뜨는 님 항상 좋은글 감사 하게 생각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