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서풍부(西風賦)
김춘수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온통 풀 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20》
순명(順命)
김춘수
처서 지나고 땅에서 서늘한 기운이 돌게 되면 고목나무 줄기나
바위의 검붉은 살갗 같은 데에 하늘하늘 허물을 벗어놓고
매미는 어디론가 가 버린다.
가을이 되어 수세미가 누렇게 물들어 가고 있다.
그런 수세미의 허리에 잠자리가 한 마리 붙어 있다.
가서 기척을 해봐도 대꾸가 없다. 멀거니 눈을 뜬 채로다.
날개 한 짝이 사그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내 손이 그의 몸에 닿자 긴 꼬리의 중간쯤이
소리도 없이 무너져 내린다.
《21》
인동(忍冬) 잎
김춘수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22》
정
김춘수
외로운 밤이면
자꾸만 별을 보았지.
더 외로운 밤이면
찬란한 유성이 되고 싶었지.
그토록 그리움에
곱게곱게 불타오르다간
그대 심장 가장 깊은 곳에
흐르는 별빛처럼
포옥 묻히고 싶었지.
《23》
쥐 오줌 풀
김춘수
하느님,
나보다 먼저 가신 하느님,
오늘 해질녘
다시 한 번 눈 떴다 눈 감는
하느님,
저만치 신발 두짝 가지런히 벗어놓고
어쩌노 멱감은 까치처럼
맨발로 울고 가신
하느님, 그
하느님
《24》
처용
김춘수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 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본다.
남의 속도 모르는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
《25》
흔적
김춘수
망석이 어디 갔나
망석이 없으니 마당이 없다
마당이 없으니 삽사리가 없다
삽사리가 없으니
삽사리가 짖어대면
달이 없다
망석이 어디 갔나
꽃을 위한 서시
김 춘 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 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처용단장(處容斷章)
김 춘 수
삼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 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쪽 바다,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첫댓글 좋은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늘 감사합니다... 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