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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리의 용산 땅이름 순례 (8) 원효로2동
목월공원과 함석헌 공원
공로를 기려 원효로-산천동에 공원을 세우다
서울 용산구 원효2동 일대에는 유명 인사를 기리는 2개의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하나는 박목월 시인을 기리는 목월공원이고 다른 하나는 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공원이다.
목월공원은 원효로3가 옛 전차 종점 부근이다. 성심여고 근처에 있는 이 공원은 목월 선생을 기리기 위한 공원인데 근처 주민들의 좋은 쉼터가 되고 있다. 이 공원에는 목월 선생의 시가 적힌 여러 개의 표목이 붙어 있다. <나그네>, <청노루>, <윤사월> 등 주옥같은 시가 공원 가장자리 벽에 붙어 있는데 찾는 이로 하여금 그의 시상(詩想)에 젖게 만든다.
목월 선생은 본명이 영종(泳鐘)이다. 1915년 경주에서 난 그는 고향에서 1946년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인 1947년 원효로4가 옛 전차종점 부근에 터를 잡고 작품 활동을 하였다. 세상을 떠나던 1978년까지 이곳에 머물며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많은 서정적 시를 남긴 그는 1939년 문단에 등단했고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활동하며 시집 <청록집>을 발간하였다. 그 공적으로 아시아 자유문학상과 서울시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하였다. 세상을 떠나자 용산구에서는 1998년 그가 살던 집 근처에 그를 기념하는 이 공원을 마련하였다.
그가 살던 집은 성심여고 바로 아래쪽에 있는데, 그가 작품 활동을 하던 옛집은 헐리고 그 자리에 청노루빌라라는 5층 건물이 들어섰다.
목월공원 근처는 일제 때는 일상 ‘전차종점’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왔다. 근처의 만초천 양쪽으로 ‘뚝방길’이라 불리는 둑이 길게 형성되어 있었고 건너쪽 철도국(철도공작창)으로 건너는 다리가 4개 있었다. 그 중 1개는 나무판으로 임시로 놓은 쪽다리였지만 철도국과 이촌동쪽으로 직접 건너는 다리여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공원은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다. 원효2동 주민센터 부근인데 법정동으로는 산천동이다. 이 공원에는 그의 어록과 일대기를 적은 표석 등이 서 있어 그의 거룩한 행적에 마음을 숙연케 한다. 그가 살던 집은 이 공원 근처였으나 옛집은 헐리고 빌라 건물이 들어셨다.
함석헌 선생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민주화 운동의 산파 역할을 한 그는 1901년 평북 용천 태생으로 1956년 용산구 원효로4가 70번지에서 1982년까지 26년 동안 거주하였다.
4.19혁명 10돌을 맞은 1970년 4월 19일 자택에서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였고 폭력에 대한 거부, 권위에 대한 저항 등 평생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89년 2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의 공로로 2002년 건국훈장을 수상했고,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으며 2006년 세상을 뜨자 대전 국립현충원 독립 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공원 앞으로 효창원로가 지나는데, 근처는 옛날 비변사 우물이 있어서 ‘비변사우물길’이라고 불러 왔다. 심원정, 용산문화원, 성심여고(후문) 등이 근처에 있다. ///
배우리의 용산 땅이름 순례 (7)
후암동과 두텁바위
남산 산비탈에 두꺼비 모양의 바위가 있어
치마바위, 꾀꼬리바위, 구경바위, 잠두바위, 두텁바위, 궤바위 ...
이 바위들은 모두 서울 남산 자락에 있던 바위들이다. 이 중 용산쪽의 바위로는 두텁바위가 유명하다. 두꺼비 모양으로 생긴 두텁바위. 그래서 그 아래 동네 이름까지 두텁바위가 되었고 이것이 한자로 기록되면서 후암동(厚岩洞)이 되었다. ‘두텁’은 ‘두꺼비’의 옛말.
후암동 이야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해방촌이다.
해방촌에는 108계단이 있다. 용산고등학교 뒤편, 후암동 옛 종점에서 남산의 남쪽으로 오르는 언덕에 놓인 긴 계단이 그것이다. 108이란 숫자는 불교의 108번뇌를 상징한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 월남한 실향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이 지역에 촌락을 이루게 되면서 해방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이후 도시가 발전하며 이촌향도한 이주민들이 다시 한번 많이 들어와 동네를 형성한다. 이 동네는 어엿한 행정구역상 명칭이 따로 있지만, '해방'이 들어간 상호들이 여기저기 많이 보인다.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중 한 곳이어서 한때는 서울시에서 이곳을 녹지화한다는 계획도 있었지만, 반발이 부딪혀 무산된 바 있다.
108계단 옆으로 나 있는 골목길은 해방촌으로 오르는 중심 도로다. 꼬불꼬불하고 비탈이 심해 마을버스조차 힘겹게 다닌다. 다니기 만만치 않은 좁은 이 길은 본래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었다. 도로를 따라 해방촌 언덕을 거의 다 올라갈 즈음에 남산타워(N서울타워)가 골목 사이로 보인다.
후암동에는 한일합방 전부터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면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지금의 한강로와 삼각지, 남영동, 원효로, 용문동 일대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은 이 후암동쪽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다. 일인들이 들어와 그들의 주택들이 가득 들어서 일놈인촌을 연상케 항 정도였다. 현 후암동 1번지 일대에는 일본인 거류민단 묘지까지 있었다.
후암동에는 전생서(典牲署)터가 있다. 이 기관은 꽤 역사가 있다.
고려시대의 장생서(掌牲署)를 계승해 1392년(태조1) 전구서(典廐署)를 설치했고, 1460년(세조6) 전생서로 개칭되었는데 그 관서를 서울의 남대문 밖 남산 남쪽 둔지방(屯智坊) 즉 지금의 후암동에 설치하였다.
후암동에 있었던 옛 마을로는 두텁바위 외에 임당말, 양지말, 번말 등이 있었다. 남산의 냉정골짜기로는 웃냉정약수, 큰우물(어수물), 번말우물, 웃우물, 계묵재약수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지금 후암동에는 독일문화원, 남산도서관, 용산도서관, 삼광초등학교, 후암초등학교가 있고 노후화된 주거지구와 고급 단독주택, 상가 등이 모여 혼재한다. 최근에는 이 일대 일부를 재개발해 제2의 아스테리움을 만드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브라운스톤아파트 근처에 후암시장이 있고, 근처 후암초등학교 근처의 두텁바위로에서 남산도서관이 있는 소월로로 가려면 급경사의 계단을 올라가야 했으나 엘리베이터를 갖춘 전망대가 생기면서 이용이 쉬워졌다. ///
배우리의 용산 땅이름 순례 (6) 용산지역 을축년 장마
을축년 장마와 물바다 용산
한강로 일대와 원효로 일대가 온통 물에 잠겨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6월 중순에서 7월 하순의 여름에 비가 계속 내리는데 이를 ‘장마’라 한다. 비구름 무리가 남북으로 오르내리면서 많은 비를 한동안 내리는 현상을 장마라 하는데, 이 말 외애 오래 내린다고 해서 ‘오란비’라 하기도 한다. 긴 기간 비가 내린다고 구우(久雨)라고도 하고, 임우(霖雨), 매우(梅雨)라고도 한다. ‘큰물’이 진다고 해서 홍수(洪水)라고 한다. 북한에서는 ‘장마’라 하지 않고 ‘큰물’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태풍까지 겹쳐 피해를 키우기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백 년 전인 1925년에 전국에 큰 비가 왔다. 그 해가 을축년이어서 ‘을축년 장마’라 한다. 그 해 7월 7일부터 9월 초까지 비가 이어졌다. 을축년 대홍수 장마 기간에 태풍도 네 개나 지나갔다. 이 때 서울에서는 한강물이 넘쳐 지금의 시청 일대를 넘어 광화문 앞까지 들이닥치고, 용산철도청 관사 1층 천정까지 물이 찼다.
이 때의 홍수로 전국적으로 사망자가 647명, 가옥 유실 6363호, 붕괴 1만 7045호, 침수 6813호의 피해를 냈다. 피해액은 1억 300만 원에 달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전체 예산의 약 58%에 해당되는 엄청난 액수였다.
너무도 큰 규모의 홍수라 ‘대홍수(大洪水)’라 했다. 이 을축년 대홍수 때. 1925년 7월 16일부터 18일까지 불과 사흘 동안에 서울에 300mm 이상의 비가 내렸다. 이 비로 한강이 넘쳤다. 넘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주위를 온통 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서울 중에서도 한강을 끼고 있는 용산 지역이 그 피해가 컸다.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그 시기에 용산의 일본 가옥들이 거의 모두 물에 잠겼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흐르는 한강물에서 떠내려가는 집 지붕에 올라 살려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았단다. 다행히 용산 지역 중에서도 지금의 용산성당이 있는 용산의 언덕쪽은 좀 높아서 여기로 피신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의 한강로 일대는 어디가 뭍이고 어디가 강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고 원효로 일대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당시 용산의 용문동이나 효창동에 사는 사람들은 지대가 높은 효창원쪽으로 몸을 피했다.
원효로가 있는 구용산 만초천의 내 양쪽으로 둑을 쌓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 만초천 주변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아 당시 일본의 공무원들이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잊혀진 얘기가 되었지만, 배수 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구용산이나 신용산 일대는 침수가 잦아 당시에 유일한 교통수단이던 전차가 멈추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원효로와 힌강로 일대 사람들이 심한 불편을 겪었다.
원효로4가와 산천동 낮은 지역에도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물이 들어오는 때가 많아 일시적으로 배를 띄우기까지 했다. 당시 집들이 물에 잠긴 모습을 보려고 물가로 나온 사람들도 많았다. 이러한 ‘물구경’은 여름철이먄 늘 있는 행사처럼 되었다.
만초천이 한강에 합수되는 여울목, 성심여고 아래쪽의 형제우물, 원효로3가의 미나리깡, ... 이런 지역들도 해마다 여름철이면 물 속에 갇혀 고생하는 슬픈(?) 역사를 써 가야 했다. ///
새용산신문 `청패 `배다리 `효창동 `효창원 `능개천 220715
배우리의 용산 땅이름 순례 (5)
효장동과 효창원
김구 선생 묘, 애국지사 묘역 등 있어 참배객이 늘...
● 효창원과 능개천
사람이 사는 공간(집)은 양택(陽宅)이고 죽은 이가 잠들어 있는 공간(묘)은 음택(陰宅)이다.
조선시대 무덤은 무덤 속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능(陵), 원(園), 묘(墓)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을 때는 이렇게 구분하지만 주인을 알 수 없을 때는 총(塚), 분(墳)으로 구별힌다.
용산에는 '효창원'이란 능터가 있다. 능터라지만 정확히 말하면 왕가의 무덤이다. 그래서 '효창능'이라 하지 않고 ‘효창원’이라 한다. 지금의 효창동이란 동명도 이 효창원으로 인해서 나온 이름이다. 조선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인 효창원(孝昌園)이 있었다. 문효세자는 1792년에 태어나 4살이 되던 1786년에 홍역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여기에 묻혔다. 사람들은 이곳을 ‘아기능’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아기능은 일제 강점기에 서오릉으로 옮겨갔다.
지금은 임정 요인이 묻혀 있는데, 공원화되어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곤 한다.
이 효창원 북쪽으로 한양 우백호의 산줄기가 지난다. 그 산줄기가 계속 서쪽으로 뻗어나가 한강까지 다다른다. 그 강 근처에서 불쑥 머리를 솟군 산이 용산(龍山)이다.
이 효창원에서부터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데, 이를 능개천이라 했다. 이 물줄기는 금양초등학교 앞을 지나 용문동을 거쳐 전자상가쪽의 큰 개울인 덩굴내(만초천)로 들어간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 물줄기는 장마 때에 물이 크게 넘쳐서 아 일대를 물바다로 만들어 놓곤 했다. 지금은 배수시살이 잘 되어 그런 일은 없게 되었다. 능개천 아래쪽은 모두 복개되었다.
이 능개천 아래쪽으로는 하마비(下馬碑)라는 마을이 있었다. 지금의 효창역 근처에 세워져 있던 하마비 돌비석 때문에 나온 마을 이름이다. 근처에 능이 있으니 말을 타고 지나는 사람은 반드시 예를 갖추어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고 하마비를 세웠는데, 지금은 그 비석을 볼 수가 없다.
하마비 있던 곳 근처에는 굴다리가 있었다. 옛 경의선(당인리선) 철도 밑으로 뚫린 굴이다 굴 양쪽에서는 장사치들이 음식을 팔았는데, 학교 아이들이 많이 모이곤 했다. 능개천이 지나는 곳이어서 굴다리 안의 길은 비가 안 와도 늘 질척질척했다.
약 1백 년 전 을축년 장마 때는 물이 효창원 가까이까지 들어왔었다. 옆 동네인 용문동과 원효로 일대의 물 피해도 대단했다.
효창동 근처에는 잘 알려진 고개가 몇 있다.
효창원의 능 근처에 옛날 능에 거둥 다니던 거둥고개가 있었고, 훨씬 아래쪽으로는 용마루고개가 있었다. 하마비가 있던 자리인 사거리에서 마포쪽으로 넘는 고개가 용마루고개인데, 우백호 줄기의 안부(鞍部)가 된다.
이 고개 밑 용문동쪽에서 마포 도화동쪽으로 넘는 '새창고개'가 있는데, 이 이름은 근처에 새 창고가 있어서 ‘새창고고개’라 한 것이 변한 이름이다.
● 효창운동장과 금양초교
효장동에는 효창운동장이 있다. 하마비 터의 위쪽인데, 전에는 서울시의 큰 행사나 체육 경기가 자주 열려 서울 사람들에게는 익히 알려져 있다.
효창운동장은 건설 당시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 자리 때문이었다. 김구 세력과 정치적으로 이견을 보였던 자유당 시절의 이승만 세력은 여기에 묘가 있는 것이 못마땅해 이를 옮기려 했다. 1960년, 묘소를 옮기려는 첫 움직임으로 제2회 아시안컵 결승전 개최를 위해 효창운동장을 만들어 놓았다. 이 운동장에서는 이후 동대문운동장의 리모델링 이전까지 빅매치를 개최했다. 국가대표 경기를 포함한 빅매치를 동대문운동장에 넘긴 이후부터는 실업축구, 대학축구 등이 개최되었다.
뒤에 강남의 잠실운동장이 생기고 모든 체육경기나 행사 등이 여기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효창운동장은 그 구실이 크게 약화되었다. 지금은 조깅이나 축구 연습 정도나 하는 동네 운동장처럼 돼 버렸다.
효창운동장은 60년 역사를 뒤로 하고 얼마 안 있어 사라질지도 모른다. 2024년, 효창공원이 독립기념공원으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공원을 성역화하는 데 있어서 공원 안의 효창운동장이 큰 쟁점으로 뗘오르고 있다. 공원을 공원답게 가꾸자면 이 운동장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지금의 효창동은 일제 때는 금정(錦町)이었다. 여기에 세워진 학교가 금정소학교인데 역사가 깊다. 이 근처 원효로쪽에는 일본인 자녀들만 다니던 원정소학교(元町小學校)가 있었다. 8.15 광복 후에 두 학교는 각각 금양(錦陽)과 남정(南町)이라는 새 이름으로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에 불렸던 용산구 일대의 동명들은 다음과 같다.
원정 元町(현 원효로) / 청수정 淸水町(현 신창동) / 금정 錦町(현 효창동) / 대도정 大島町(현 용문동) / 미생정 彌生町(현 도원동) / 산수정 山手町(현 산천동) / 암근정 岩根町(현 청암동) / 삼판통 三坂通(현 후암동) / 강기정 岡崎町(현 갈월동) ///
새용산신문 `용머리 `벼랑창 220615
배우리의 용산 땅이름 순례 (4)
용머리와 벼랑창
용이 한강쪽으로 입을 내밀어 물을 마시다
자연 경관이 뛰어나고 산수의 형세가 매우 좋았던 용산 지역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그 위치의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빼어난 경치로 인해 귀인들의 별장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삼호정(三湖亭), 함벽정(涵碧亭), 심원정(心遠亨) 등의 정자들이 있었음은 좋은 전망 때문이었다. 이들 정자에서는 조선시대에 명사들의 시회(詩會)도 자주 열렸었다. 용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들이 여기서 많이 나왔다.
용산 산마루에서 바라보는 주위의 경치들이 용산팔경(龍山八景)으로 나타난다.
<용산팔경>
1경 청계조운(淸溪朝雲)-청계산의 아침 구름
2경 관악만하(冠岳晩霞)-관악산의 저녁 안개
3경 만천해화(蔓川蟹火)-만초천의 게잡이 불빛
4경 동작귀범(銅雀歸帆)-동작나루로 돌아오는 돛배
5경 율도낙조(栗島落照)-밤섬 너머로 지는 해
6경 흑석귀승(黑石歸僧)-흑석동의 돌아오는 스님
7경 노량행인(露梁行人)-노들길의 길손
8경 사촌모경(沙村暮景)-새남터의 저녁 풍경
서울 북쪽 인왕산에서부터 뻗어 온 산줄기가 구불구불 뻗어내려오면서 한강쪽에 이르러 용(龍) 형상의 산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산이 바로 용산(龍山)이다. 그 용산 위에 지금 용산성당이 있고, 여기서 한강쪽으로 더 나아가면 용의 머리같은 용머리(용두.龍頭)가 된다. 여기가 바로 북악(北岳)을 주산으로 하는 한양 우백호(右白虎)의 끝자락이다. 이 용머리 부분은 경치가 좋아 자유당 시절에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한강 중에서도 용산 지역 앞을 흐르는 강을 따로 용산강, 용강(龍江), 용호`
이 용산강에 일제 강점기에 세운 수위측정소가 있다. 정식 이름은 ‘구용산 수위관측소’이다. 한강 수위를 살피고자 한강변 최초의 관측소인데, 1976년 9월까지 관측이 이루어지다가 1977년 폐쇄되었다. 등대처럼 보여 이를 등대로 아는 사람도 있다.
이 관측소 근처의 한강변 비탈을 ‘벼랑창’이라 했다. 군대 별영(別營)의 창고인 별영창(別營倉)이 변한 이름이 벼랑창인데 근처에선 해마다 물사고가 많았다. 그 상류쪽의 여울목(탄항.灘項)에서도 해마다 물사고가 잦았다. 용산강 유역에 부군당들이 많은 것은 마을의 평안과 무사고를 빌기 위함이었다.
용산강으로 흘러드는 덩굴풀내(만초천.蔓草川)는 일제 강점기에 욱천(旭川)이라 했다. 이 내의 하류 부근(지금의 원효로 일대)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나라 일본에서 많이 붙이는 ‘아사이카와’란 이름을 여기에 붙였다. 그 아사히카와의 한자식 표기가 욱천이다.
이 내는 1960년대에 복개되어 한때 농수산물 시장이었다가 그 시장이 가락동으로 이사간 후에 용산전자상가가 되었다. ///
새용산신문 `신용산-구용산 220601
배우리의 용산 땅이름 순례 (3)
신용산과 구용산
-손님, 어디로 모실깝쇼?
-용산으로 가세나.
-어느 용산요? 신용산 말씀이신가요?
-용산이라면 원래의 용산 아뇨? 이젠 구용산이라고 해야능감?
-알았수다, 그러면 손님. 모토마치 방면으로 모실께요.
※모토마치는 지금 용산구 원효로. 당시 원정(元町)의 일본식 발음
일제 강점기, 경성역(서울역) 앞에서 인력거꾼과 손님의 대화를 상상해 본 것이다.
용산권 일대가 지금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중에도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용산공원(현재 조성 중) 일대에 더욱 눈들이 쏠린다.
앞으로 경부선 철도 지하화와 연계해 용산공원 일대가 개발되면 용산역세권이 크게 달라징 것이다. 또, 철도가 지하화될 경우 그 지상 부지에 업무·상업 복합시설이 들어서겠지. 여기서 멀지 않은 코레일의 철도기지창 부지도 크게 힘을 받을 것이다.
경치가 좋았던 용산의 산억덕은 지금은 아파트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완전히 산머리를 가리고 말았다. 이 산이 그 유명한 옛날의 용산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저 산천동 언덕이니 원효로4가 끝머리니 하며 짚어 말한다. 요즘에 와서는 ‘용산’이라 하면 대개 용산역을 중심으로 하는, 그 주위를 우선 떠올린다. 지금의 한강로 일대의 어디쯤이거나 삼각지나 국방부터 일대로 안다.
조선시대만 해도 ‘신용산’이니 ‘구용산’이니 하는 말이 따로 있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새푸리(한강로) 지역에 용산역을 만들면서 그 일대에 새 상권이 형성되어 ‘새로운 용산’이란 뜻으로 이 이름이 붙어 버렸다.
한강물이 드나드는 저지대로, 모래와 자갈, 풀섶이나 있었던 한강로 일대에는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부터 주택지로 탈바꿈하였다. 한강의 모래를 깔아 지대를 높이고 전찻길도 놓고... 이러면서 이 지역은 급속도로 발전해 갔다.
저지대여서 큰물이 자주 들어 지금의 이촌동 지역을 중심으로 주택지가 형성되어 갔다. 을축년(1925) 장마 때는 용산 일대가 거의 물바다였는데, 그 중에 가장 피해를 본 곳이 한강가의 이촌동과 지금 신용산이라고 부르는 이 일대였다.
이촌동이란 이름은 동네가 둘(2)이라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원래 이 지역에는 세 개의 마을로 형성되어 있었다. 동부이촌동, 서부이촌동, 중부이촌동. 그러나 그 중에 중부이촌동은 을축년 장마 때 모두 떠내려가 폐촌이 되어 이름 그대로 이촌동(二村洞)이 되어 버렸다.
황량한 벌판이었던 신용산 일대는 중요 기관들과 함께 주택들이 계속 들어서면서 모습이 크게 변해 갔다.
이제는 용산이 새로운 개발 분위기 속에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용산이란 이름에 걸맞게 용이 높이 하늘로 치솟아 오를 기세다. 이미 신용산 일대는 고층아파트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고 있다. 용산 중에서도 신용산이 주목되는 이유다. ///
새용산신문 `만초천 220515
배우리의 용산 땅이름 순례 (2)
만초천과 용산전자상가
성 밖 서쪽의 젖줄. 일제 때에는 욱천으로 불려
청파대로의 남쪽 끝자락에는 용산전자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용산역의 북쪽인데 옛날에는 냇줄기 한 가닥이 지나가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벌판 사이를 지나는 내의 이름은 만초천(蔓草川). 덩굴내가 우거졌다는 뜻의 이름이다.
이 하천은 조선시대에는 무악에서 발원해 내려온다고 하여 무악천(毋岳川)이라고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인들은 자국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금의 원효로를 원정(元町)이라 했고, 이 하천의 이름은 욱천(旭川. 아사히카와)이라 했다. 욱천은 일본에서 많이 붙이는 하천 이름이다.
이 내는 서대문구의 현저동과 서대문, 서소문릏 거쳐 용산구의 청파동을 지나 지금의 용산전자상가를 거쳐 원효대교의 북단 근처에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지금은 복개되어 도로 밑에 냇줄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도 많다.
복개된 후 농산물시장이 들어섰다가 교통에 큰 불편을 준다 히여 가락동으로 옮겨갔고 뒤에는 세운상가에 있었 전자상가가 여기에 들어섰다.
만초천은 우리 곁에서 멀어져 버린 내이지만, 옛날에는 청ㅖ천과 함께 서울 서쪽 사람들의 좋은 젖줄이었다. 즉, 청계천이 성 안 사람들의 젖줄이었다면 욱천은 서울 성 밖 사람들의 중요한 젖줄이었다. 이 물로 근처 들판에 물을 댔고 이 물에서 빨래를 했으며 물놀이도 즐겼다.
잊지 못할 것이 하나 있다. 옛날에는 이 내에서 밤이면 사람들이 불을 밝혀 게를 잡았다는 사실이다. 게를 잡을 때 불을 밝혔기에 그 게잡이 불빛 광경이 용산팔경(龍山八景)의 하나로도 꼽혀왔다.
<춘향전>에 보면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서울에서 남원까지 내려가는 대목이 나온다. 그 노정을 보면 서울 남대문을 나와 이 만초천을 따라 한강까지 간 것으로 되어 있다.
'청파역졸 분부하고,
숭례문 밖 내달아서
칠패팔패 이문동, 도제골, 쪽다리 지나
청파 배다리, 돌모루, 밥전거리,
모래톱 지나 동자기 바삐 건너, ........'
여기에서의 이문동은 서울역 근처에 있던 마을이고, 돌모루는 지금 남영역 근처에 있었던 마을이다. 밥전거리는 밥을 파는 밥집이 있어 나온 이름인데, 지금의 삼각지 근처로 추측된다. 동자기나루는 지금의 동작대교 부근에 있었던 나루이다.
인왕산에서부터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만초천은 지금의 남영역 근처에 와서는 다른 큰 물줄기를 합해 물의 양을 크게 불린다. 남산 서쪽 골짜기에서부터 시작해 후암동, 남영동 일대를 적시고 나온 한 냇줄기가 여기서 합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만초천은 크게 말하면 인왕산의 물과 남산의 물이 합쳐져 흐르는 내이다. 물이 합쳐지는 부분에서 물줄기가 휘어돈다고 해서 ‘돌모루’인데 한자로는 ‘석우(石隅)’리고 했다. ///
새용산신문 `둔지미 220501
배우리의 용산 땅이름 순례 (1)
용산과 둔지산
대통령 집무실 이전으로 주목받는 둔지미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에 따라 ‘용산’이란 이름이 뜨고 있다. 이름 그대로 ‘용의 산’이란 뜻의 용산(龍山)인데, 이 산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용산은 국방부 건물 근처의 산이 아니고 용산구 전체로 보면 북서쪽이며, 마포구와 경계에 있는 산이다. 용산구 원효로4가, 산천동과 마포구 도화동, 마포동 사이에 있고, 산 앞으로는 한강이 휘어돌고 있다. 높이 78m.
용산 산자락 언덕은 일제 강점기 이후 올망졸망 작은 주택들로 덮여 있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덮여 산인지 언덕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가 됐다. 그래도 용산 산마루에 유서깊은 용산성당이 있고, 한강가에 ‘구용산’ 시설물도 있어 여기가 원래의 ‘용산’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한강로쪽에 용산역이 들어서고 일대에 상권이 형성되면서 용산은 구용산(舊龍山)과 신용산(新龍山)으로 구분지어 불려졌다. 지금은 용산이라 하면 용산역이나 한강대로쪽을 생각하지만, 과거에는 용산성당이 있는 쪽을 용산으로 불렀다.
용산은 서울의 주산(主山)인 북악(北岳)을 시작으로 인왕산(仁王山)-추모현(追慕峴)-약현(藥峴)-만리현(萬里峴)으로 이어지는 한양 우백호(右白虎)의 끝자락의 산인데, 마무리 산자락이 마치 물을 먹는 용(龍)의 머리 모습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용산’이란 산이 구용산의 산이라면 ‘둔지산(屯之山.68m)’은 신용산의 산이라 할 수 있다.
둔지산은 서울 남산의 지맥이 한강으로 이어져 용산구 이태원동과 용산동 일대에 솟은 야트막한 산으로, 현재 미8군과 용산 국방부가 들어서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어렵다. 일제 강점기에 둔지산 일대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용산’이란 이름을 단 시설물들이 들어서면서 용산의 위치를 잘못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미군이 주둔한 이 일대에 용산공원이 들어서고 그 한켠에 대통령이 집무할 공간이 마련되면 용산은 더욱 주목을 받을 것이다.
조선시대 이 일대에 군량을 조달하기 위한 둔전(屯田)을 두어 둔지산 이름이 나왔다고 하나, ‘둔’은 땅이름에서 언덕이나 산을 말하므로, 그와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이 산 일대에는 새말, 큰말(대촌.大村), 정자말 등의 마을들이 있었는데, 이 마을들을 모두 아울러 ‘둔지미’라고 불렀다. 일제 때 군 기지가 되면서 이곳의 주민들은 근처 보광동과 서빙고 등으로 강제 이주당하였다.
전국에는 ‘둔지미(둔지산)’란 이름이 많은데, 이 이름들은 거의 ‘산- 언덕’과 관련이 있다. 대개 외따로 따로 떨어진 산, 둥그스럼한 모양의 산들이 이런 이름을 달고 있다. ‘둔지’는 ‘둔-둠-덤-담’ 계열의 땅이름으로, 이런 지명은 산지 에 많이 분포한다. 이와 연관하여 전북의 대둔산(大屯山)과 전남의 두륜산(頭輪山)의 예를 들 수 있는데, 이런 이름들이 ‘둠’계 지명에 해당한다.
둔지산 일대는 토질이 좋아 조선시대에 벽돌을 생산하였고 명동성당의 벽돌도 여기서 생산된 것이다. 둔지산 동남쪽의 서빙고초등학교 근처에는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氷庫)가 있었다. 지금 서빙고니 동빙고니 하는 이름은 여기에 연유한다.
산 남쪽 완만한 평지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용산가족공원이 위치하고 있고, 북쪽 비탈 아래로는 전쟁기념관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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