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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제2차 공세시 국군 제1군단지역 철수 작전(합수.청진-흥남 철수)
1. 작전 개요
합수.청진-흥남 철수작전은 합수 및 청진 북쪽까지 진출한 국군 제1군단이 중공군 제9병단의 제2차 반격으로 공격을 중단하고 1950. 12. 1일 철수로 전환한 후 흥남항을 출항하기 직전인 12월 16일까지 성진을 경유하여 흥남으로 기동한 철수작전이다.
이 작전은 초기, 즉 1950. 12. 1일부터 12일까지는 국군 제1군단이 단독으로 실시한 합수.청진-흥남간 철수작전이고, 이후부터는 미 제10군단이 주도한 흥남 동북 외곾의 교두보 확보작전이다.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국경을 향해 진격할 무렵,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 제9병단 예하의 3개 군단은 낭림산맥을 타고 남하한 후 장진호를 중심으로 서쪽에 20군단, 동쪽에 26군단, 북쪽에 27군단을 위치해 미 제1해병사단을 위협하였다.
이에 앞서 중공군은 제13병단 예하의 제42군단을 만포진과 강계를 경유하여 장진호 남쪽으로 잠입시켜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10군단의 연결작전을 차단하고 있었다.
한편 국군 제1군단은 진격작전을 통해 청진 북쪽과 합수에 주력을 두면서 일부가 혜산진에 도달했을 무렵, 군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4군단 예하의 제41사단과 제507여단, 단대호 미상의 해안경비대가 주력을 허ㅚ령과 무산일대에 집결시켜 재편성 주에 있었다. 그리고회령부근에는 10월 말 편성도딘 북한군 제8군단 예하의 제5사단과 제6사닺, 제7사단이 전열을 강화하면서 남침을 준비하는 한편 일부가 제41사단과 함께 부령과 부거에서 국군 수도사단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구군 제3사단 정면의 상황은 미 제7사단의 혜산진 점령 당시에 적의 주력이 국경을 넘어 도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 백암 동북쪽에 미처 후퇴하지 못한 상당수의 병력이 머물고 있었다. 이들은 패잔병을 비롯해 내무서원, 당원,으로 구성된, 합수독립대대와 백암독립대대, 무산사단, 원홍독립중대, 송경독립여단 등이다.
2. 작전 경과
1950. 11월 27일 저녁, 중공군은 제2차 공세의 일환으로 장진호 부근의 미 제1해병사단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유엔군의 총공세에 따라 압록강을 향해 북진하던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 제9병단 예하의 3개 군단의 반격을 받고 장진호 계곡에서 포위되는 상황이 야기 되었다. 급변한 상화에 대처하기 위해 맥아더 원수는 11월 28일 미 제8군사령관과 미 제10군단장을 동경으로 불러 전략회의를 열고 전선의 모든 부대에 대한 철수를 결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11월 30일 오후 예하 모든 부대에 적과의 접적 유지및 함흥-흥남선으로 철수토록 명령하였다.
이에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수도사단은 12월 1일 철수를 시작해 북청과 이원을 목표로 전진하고, 제3사단은 함수-길주 선에서 수도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공세 방어를 실시한 후 축차적으로 부대를 성진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하였다.
가. 혜산진. 길주-성진 철수전('50. 12. 1~12. 6)
철수 명령이 하달될 무렵 군단의 좌일선인 제3사단은 선두부대가 미 제7사단에 이어 혜산진까지 진격하였고, 일부는 수도사단의 후방인 나남으로 진출해 청진 서북족 지역에 대한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제23연대는 나남-경성에서 수도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는 한편 길주로 철수할 준비를 갖추었다.
또한 주력을 합수 일대에 두고 있는 제22연대는 혜산진에 진출한 제1대대 3중대를 백암으로 복귀시키고 길주부근으로 철수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 무렵 제3사단은 지휘소를 나남에서 길주로 이동하였고, 사단 주력은 합수-길주 선에서 공세적인 방어를 실시하며 수도사단의 철수를엄호하였다.
한편 부령 및 부거 남쪽 4km 지점가지 진격한 수도사단은 제18연대가 부령 남쪽 장흥동에서, 제1기갑연대가 부거 남쪽 토막동에서, 제1연대가 청진시 농포동에서 제3사단의 엄호를 받으며 주을로 철수하였다. 이때 이미 미 제10군단 예하의 미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이 장진호 및 혜산진-신갈파진에서 함흥을 향해 이동을 개시하였다.
결국 12월 3일, 제3사단의 엄호 아래 명천-길주로 축차 이동한 수도사단이 다음날 제1연대와 제1갑연대가 성진에 집결하고 길주에서 이동한 제18연대가 12월 5일 15:00시에 성진에 집결하였다. 이후 제1기갑연대는 이원을 향해 육로 행군을 개시하였다.
한편 성진항에 집결한 수도사단 지휘부 및 참모부와 2개 중대는 12월 6일 08:30분에 미 해군 LST로 서호진으로 출항하고, 전날 육로행군을 시작한 제1기갑연대는 이원을 경유하여 홍원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3:50분에 제1연대가 열차편으로 흥남을 향해 출발하였다.
수도사단이 육로와 해상으로 흥남을 향해 철수를 하고 있을 때에 제3사단은 제22연대장의 지휘아래 일부 선발대가 육로로 흥남을 향해 출발하여 다음날 이원에 도착하였다. 온수평 일대에 급편진지를 구축하고 경계 임무중인 제22-1대대는 대대 전방에 나타난 적을 40여 명을 사살하였고, 학성동에서 방어하고 있는 제23연대 정면에도 12월 6일부터 적이 출현하여 공군의 지원포격으로 격퇴하였다.
나. 성진-흥남 철수전(1950. 12. 7~12. 16)
점점 북한군의 공격징후가 높아가는 가운데 국군 제3사단은 제22-1대대가 길주로 집결하고 제23연대는 학성동에서 성진으로 축차 이동하였다.
한편 홍원으로 이동한 수도사단 제1기갑연대는 흥남의 서호진 부두까지 이동 집결하였고, 전날 열차로 성진을 출발한 제1연대는 퇴조역에서 하차하여 부대정비에 들어갔고, 그리고 사단장을 비롯한 잔류인원과 제18연대 주력이 성진항에서 미 해군 함정으로 서호진을 향해 출항하였다.
수도사단이 육로와 함정으로 퇴조 및 서호진으로 기동을 완료하자 제3사단은 제22연대와 제23연대가 해상기동을 위해 길주에서 성진으로 이동하여 미 해군 LST에 승선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리고12월 9일 성진항에서 미 해군 세인트 읜드호에 승선하여 출항하였다.
군단 직할인 제26연대는 북청에서 성진-단천-이원-북청가도를 고수하며 성진에서 흥남으로 육로이동하는 최종부대를 수용하고 있었다. 12월 9일 06:00시를 기해 철수를 단행하려 할 때에 200명의 적이 나타났으나 격퇴하고 북청을 출발하여 흥남으로 향하였다.
이시기에 미 제1해병사단은 고토리-진흥리간 돌파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흥남항에서 정박하며 대기하던 제3사단은 전황의 급변으로 당초의 상륙계획을 바꿔 12월 10일 15:00시에 부산을 향해 출항하였고, 제18연대도 부산으로 출항하기 위해 내항에서 승선을 대기하였다.
국군 제1군단은 제3사단을 제1제단으로, 수도사단을 제2제단으로 편성하였고, 군단사령부 직할의 모든 부대는 군단사령부 제단으로 편성하였으며 이에 따라 제1제단인 제3사단이 미 해군 LST로 출항하여 12월 12일 2일간의 항해로 부산과 구룡포에 도착하였다.
한편 미 제1해병사단이 12월 11일 22:30분에 함흥-흥남간 집결지에 도착하였다. 미 제10군단은 제대별 철수 우선순위를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군단-이어서 미 제7사단과 미 제3사단 순이였다.
12월 13일, 중부와 서부 전선의 아군은 철수를 계속하여 대체로 38도선 부근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고, 이와 병행에 동부전선의 38도선 북쪽에도 신편된 제9사단과 제5사단을 배치하여 차단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같은 날 12월 13일, 국군 제3사단 지휘부는 서호진에서 승선하여 묵호를 향해 출항하였고 제26연대는 마전리에서 흥남시 신전리로 이동해 진지를 점령하였다.
이 무렵 함흥-흥남 일원에는 흥남교두보를 압박하기 위해서 중공군 3개 군단이 주공을, 북한군 제4군단, 제5군단이 조공을 담당하여 12월 14일 5개 사단을 동원해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으나 해. 공군의 입체적인 작전에 그드릐 파상공격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12월 14일, 수도사단 지휘소와 제1연대, 제1기갑연대가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하는 한편 군단 지휘소와 제3사단 잔류부대가 승선을 완료하였다. 16일 제1연대가 승선하고 이어서 제1기갑연대와 제26연대가 승선하여 12월 17일 새벽에 흥남항을 떠나 동해안 묵호로 항진하였다.
다. 동부지역 작전
1) 원산-함흥
유엔군의 38도선으로의 철수
시변리 김화
철원 중42군
중40군 화천저수지
연천 화천 양구 북2군단 수도사
중66군 북5군단 인제 소양강 양양
중50군 중39군 중38군
개성 고랑포 국8 국3
국1 국6 미24 미2 국5
미25
문산 덕정 가평 춘천 국9
터 봉일천 의정부 홍천
인천 서울 양평
횡성
경안리
수원 원주
제 1 절 작전 개요
유엔군의 38도선으로의 철수작전은 1950년 11월 24일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총공세를 개시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반격, 즉 1950년 11월 25일부터 단행된 중공군 제2차 공세로 인해 청천강 일대 및 함흥-흥남 지역에서 철수작전으로 전환하여 38도선상에서 방어선을 형성할 때까지의 작전을 일컫는다.
중공군은 제2차 공세를 통해 국군 및 유엔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국군과 유엔군을 38선 이암으로 몰아내면서 지속적인 소모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역량을 소모시킨다는 방침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중공군은 주공방향을 서부전선의 안주-평양-개성 축선과, 보조 공격방향을 장진호-함흥-원산과 헤산-북청, 청진-함흥 축선에 두고 모든 전선에서 강력한 반격으로 전환하였다.
한편 중공군의 제2차 공세에 눌려 숙천-순천-성천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한 미 제8군사령관은 제2차 청천강 전투에서 의외로 큰 피해를 입어 현 싯점에서 중공군을 격파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대적인 부대정비를 위해 결정적인 전투를 회피하면서 축차적인 지연전을 전개하게 된다.
이에 따라 '50.12.1일에 발표된 미 제8군의 목표는 모든 전선에서 적과의 접촉을 단절하고 신속하게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이후 미 제8군이 청천강선으로부터 철수하는 첫 번째 단계에서의 주요 목표는 주 철수로인 평양-서울간 도로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 제8군은 평양으로의 접근로 경계임무를 미 제187공정연대전투단에 부여하였고, 국군 제2사단과 제5사단을 평양-서울간 도로의 동쪽 측면에 배치하였다.
한편 미 제8군의 축차방어선 중 임진강 하류에서 38도선을 따라 동해안으로 연결되는 B선 지역의 지형은 서부지역에는 천연적인 장애물 활용이 가능한 임진강과 한강이 있고, 중부지역은 적이 접근로로 이용할 수 있는 산악지형을 따라 남쪽과 남서쪽으로 흐르는 한강 지류들이 있었다.
적은 제2차 공세를 통해 청천강 선을 돌파하고 평양을 점령함으로써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을 완전히 양분하였다.이후 적은 서부지역에서 개성과 금천까지 진출하였고, 동부지역에서는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미 제10군단이 해상철수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제 2 절 작전 계획
1. 유엔군의 작전계획
가. 작전 배경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유엔군이 공세에서 방어로 전환하였으나, 병력의 열세로 강요에 의한 철수는 불가피하다고 역설하며 추가적인 병력증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미 합동참모본부는 추가병력 증원보다는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을 통합하여 평양-원산을 연결하는 선을 점령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대해 맥아더 원수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거론하며 이 제안에 반대하였다. 첫째,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을 통합해도 평양-원산 선의 정면이 250km에 달해 전선이 신장되고 종심이 짧아 중공군에게 돌파될 위험이 높다. 돌째, 지역 내에 위치한 태백산맥이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의 협동작전과 군수지원에 걸림돌이 될 수 있으며, 특히 해상 병참선이 갖는 이점마저 상실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그는 미 제10군단을 함흥에 계속 주둔시킴으로써 적의 측방을 위협함은 물론 이 간격을 통해 대부대의 후방진출을 저지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병력의 증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미 합참은 맥아더 원수의 미 제10군단 운용방안이 산악 기동력이 우수한 중공군에게 오히려 넓은 기동공간을 제공할 것이라 우려하였다.
미 합참과 유엔군사령부 간의 의견 의견 대립이 심각하게 표출되자,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이 12월 4일 도쿄를 방문해 전략회의를 가져, 조기에 병력 증원이 불가함을 통보하는 한편, 현 싯점에서 최우선적인 것은 유엔군의 병력보존이 최우선적인 고려요소이며, 따라서 유엔군을 해안교두보로 이동하려는 맥아더의 전략에 동의한다는 점을 피력하였다.
이에 따라 12월 7일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을 통합한 후 단계별 방어선을 설정하여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부산으로 철수한다는 계확에 최종 합의하였다. 여기에 9개의 방어선이 설정되어 있었고, 서울을 중점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서울 북쪽에 4개의 방어선을 설정하고, 최종 방어선은 개전 초기의 낙동강 방어선이었다.
이 계획은 '50.12.8일 작전명령으로 전군에 하달 되었다.
나. 신전략의 채택
이러한 유엔군의 평양철수 계획은 결국 유엔에서도 철수문제를 적극 검토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전쟁 전의 38도선 부근에서 휴전을 모색하는 안으로 압축되어 갔다.
그런데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워커 중장의 뒤를 이어 등장한 리지웨이 신임 유엔군 사령관은 부산으로의 철수를 주장하던 워커와는 달리 "미 제8군은 한반도에서 물러너지 않고, 부대를 신속히 재정비하여 공세를 재개할 것임"을 강조 한다.
이 무렵 미 제8군의 작전방침은 38도선에서 부산까지의 공간지역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축차적인 지연전으로 적의 출혈을 강요한 후 공세작전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6개의 방어선을 설정하였다.
1) 제1통제선 : 38도선 진지로 임진강 하구에서 양양에 이르는 주저항선
2) 제2통제선 : 수원-양평-홍천-주문진을 연하는 선으로, 평택-삼척선의 방어를 준비하는데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선
3)제3통제선 : 평택-안성-삼척을 연하는 선으로,ㅡ 한반도에서 가갖 방어정면이 협소하여 방어에 유리한 지역
4)제4통제선 : 금강선으로, 금강 남안과 소백산맥을 연하는 방어선
5)제5통제선 : 소백산맥선으로, 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준비흐는데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선
6)제6통제선 : 낙동강 방어선으로, 유엔군이 최대한의 저항을 시도할 진지로 방어선이 와해 되면 유엔군은 일보능로, 국군은 연안도서로 철수시킬 계획이었다.
물론 이에 대하여 신임사령과 리지웨이는 이 선의 개념에 대해 물런나기 위한 선이 아니라 "최대한 중공군의 출혈을 강요하고, 기회를 보아 즉시 반격으로 전환하기 위한 선이다"라고 강조하고 "국군과 유엔군은 37도선 아래로 절대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리지웨이는 전방 부대들이 서을 남쪽으로 철수할 경우, 이를 엄호하여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서울 북쪽에 중간 통제선인 교두보선을 설정하였다.
2. 공산군의 작전계획
가. 작전기도 및 방침
중공군은 청천강 이대에 이어 평양을 점령한 후 38도선을 향해 남진을 계속하여 유엔군을 38도선 이남으로 축출하는 전략적 방침이었다.
중공군의 전략적 빙침은 국군과 유엔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반격으로 전환하여 국군 및 유엔군을 38도선 이남으로 몰아내면서 지속적인 소모전으로 국군 및 유엔군의 역량을 소멸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작전방방침은 주공을 서부전선에 지향하고, 전 전선에서 강력한 반격으로 전환하여 제2전선부대와의 긴밀한 협동작저늘고 청천강과 장진호, 함흥, 청진 일대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기본 집단을 포위 소멸하고 신속히 남으로 전과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주공방향을 기동여건이 유리하고 반격집단이 신속히 전선으로 진출해 국군과 유엔군의 종심으로 전과를 확대할 수 있는 서부전전으로 택하고 안주-평양-개성 방향에 두고, 보조공격은 장진호-함흥-원산과 헤산-북청, 그리고 청진-함흥 방면으로 지향하였다.
나. 작전 계획
중공군과 북한군은 공격작전으로 전환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부대를 분산 및 각개 격파하고, 유엔군이 후퇴할 경우 차후 서을 점령하고 이어서 가평과 춘천을 점령하다는 것으로, 이를 위해 적은 화천을 경계로 서쪽은 중공군이 그 동쪽은 북한군이 담당하여 38선을 돌파한다는 게획을 수립했다.
주공으로 서울 방면을 담당한 중공군 제38군단과 제39군단, 그리고 제40군단과 제50군단의 임무는 전곡-축선을 공격하여 고랑포 -영평을 돌파하여,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으로 격멸하고, 철수할 경우 남쪽으로 공격을 확대하여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제42군단과 제66군단은 영평-화천을 돌파, 국군 제2 및 제5사단 섬멸 후 가평-청평방향으로 전과확대 및 경춘가도 장악이었고
이때 북한군 제1군단의 임무는 양동작전으로 개성-문산 방면을 공격하여 미 제25사단을 고립시키고 전곡-서을 축선을 공격중인 주공의 우측방을 엄호하는 것이었다. 제2군단 및 제5군단은 양군 좌우측에서 국군 제1및 제2군단 방어진지 돌파하여, 국군 수도사단, 제3사단 및 제9사단을 고립시키고 양구-홍천방향으로 주공을 지향하여 국군 제7사단과 8사단을 격멸하고 중공군 66군단과 협동작전을 실시하도록 임무를 부여받았다.
제 3 절 유엔군의 철수와 38도선 방어선 형성
1. 양측의 상황
가. 적상황
1) 전투 편성
북한과 공공의 연합군은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으로 분할하여 서부는 청천강 지역, 동부는 장진호 지역에서 연합 집단을 형성하엿다. 즉 서부는 중공군 제13병단과 북한군 제1군단으로 공격집단을 편성하였고, 동부지역은 중공군 제9병단과 북한군 제3군단. 제4군단 그리고 제5군다으로 공격집단을 형성한다.
2) 전투준비태세
작전기간 중 적의 공격방향은 제13병단이 주공으로 개성-서울 축선과 의정부-서울축선에서, 북한군이 조공으로 화천 이동 지역을 담당하여 부대를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양군은 첫째로 연합작전을 위한 연합사령부를 12월 초순에 설치하고 작전범위 및 전선에 관련되는 모든 활동을 결정하였다. 돌째로 참전이 결정된 제19병단을 1951년 3월경 전선에 도착하도록 계획을 추진하였다. 셋째로 보급문제의 개선을 위해 보급창고를 증설하고, 여러 지역의 철도와 도로, 교량 등을 수리 및 복구하였다. 또 북한정부의 협조하에 3만 톤의 식량을 현지에서 ㄷ조달하였다. 네째로 12월 27일경 지정된 공격지점으로 병력을 배치완료한다. 다섯째로 진지를 공격할 경우 절대적으로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집중하여 돌파구를 열도록 준비하고 공격개시일은 12월 31일로 결정하였다.
3) 전투력 수준
중공군의 공세작전은 주로 단기전으로 전개되었고, 지속일자도 대체로 20일 이상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이는 보급체계와 기동수단, 그리고 화력운용의 츼약성에 있었다. 병참선의 신장, 유엔공군의 폭격으로 도로봉쇄 및 파괴, 겨울철의 적설 등 영향으로 수송 및 기동수단은 전혀 기동화 되지 못하고 있었다.
도한 중공군의 화력은 박격포와 기관총, 수류탄에 의존하고 있엇으나 충분한 탄약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고, 여기에 야간 기습과 같은 탄약소모가 많은 작전으로 인해 38도선에 이르렀을 때는 탄약이 고갈상태에 이르럿고 추위와 배고품으로 사기가 저하되고 계속되는 공세의 장기화로 휴식과 정비 및 보충이 시급한 상태였다. 더욱이 장티푸스 및 감기 환자의 속출이 공격작전에 많읁 차질을 불러왔다.
나. 아군 상항
1 )배치 현황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현 상태로는 중공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단지 지연작전만이 유일한 방책이라 생각하였다. 따라서 미 제8군이 중공군에 포위되기 전에 현 전선에서 남쪽 전선으로 이동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은 성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엇고, 북한군과 북한군 유격대가 성천 동쪽 25마일 지점에서 양덕에이르는 평양-원산 도로 남쪽에 저지진지를 설치하고 있었다. 적이 측면에서 평양으로 진격해 미 제8군을 포위 섬멸하려 하자. 워커 중장은 이에 앞서 평양을 포기하고 후퇴를 결정한다.
1950년 12월 2일 숙천-성천 선에서 후퇴를 시작한 미 제8군은 3일 후 평양 북방 20마일 지점의 잠정적인 방어선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12월 4일 전부대를 평양 남쪽으로 후퇴시켜 대동강 하류의 겸이포로부터 예성강 상류의 곡산에 이르는 진지를 점령핝다. 그리고 다시 해주로부터 신계를 지나 임진강 계곡의 이천을 지나는 선으로 이동준비를 명한다.
한편 미 제24사단을 배속받은 미 제9군단은 33번 국도로 이동하여 미 제8군의 동측면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2군단을 지원하였다. 또한 미 제1군단은 1번 국도의 이서 지역을 맡아 후퇴하는 한편 평양을 통과할 때 시내에 남겨진 아군 물자의 파괴를 담당하였다. 후방 경비부대가 대동강의 마지막 교량을 파괴하고대동강 남쪽의 평양을 최종적으로 폭파하였다.
1950년 12월 6일 중공군이 평양에 입성하였고, 12월 8일 워커는 전부대를 해주-신계-이천으로 후퇴할 것을 지시하고 이 선을 동쪽의 김화까지 연장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가장 우려했던 것이 중공군이 미 제10군단의 후방지역을 통괗여 미 제8군을 포위할 가능성이었다. 워커는 이러한 중공군의 능력에 대처하기 위해 12월 6일 한반도 전역에 횡으로 전 부대를 전개시켰다.
우선적으로 워커는 맥아더 사령관의 동의하에 해주 남방 40마일 지점인 예성강 입구에서부터 시변리를 통과해 철원과 화천 그리고 양양을 거쳐 동해안에 이르는 방어선을 설정하였다. A라인으로 명명된 이 방어선은 거리가 약 150마일로 국군 제2군단 예하의 2개 사단을 비롯한 5개 사단으로 동부지역을 담당하도록 하고,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A방어선의 서측을 방어토록 했다.
12월 7일, 도쿄에서 맥아더 사령관과 콜린스 합참의장, 공군 및 해군. 해병대 주요 지휘관이 모여 주요 계획에 합의한다. 그 내요은 신속히 미제 10군단을 흥남에서 해상으로 철수시켜 남동쪽에 상륙시킨 후 미 제8군에 합류시킬 것과 필요하다면 후퇴를 부산까지 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12월 8일 유엔군사령관 명령 제5호로 발효시켰다.
12월 7일 맥아더 장군은 미 제10군단의 제8군 예속에 관한 준비명령을 하달하였으며, 이에 워커 장군은 12월 8일 B선을 설정하였으며, 이 선은 화천을 중심으로 동쪽은 A선과 일부 중복되고 화천 이서지역은 임진강과 한강 하류 제방을 따라 예성강 남쪽으로 20마일 떨어진 선이었다.
워커 사령관은 12월 22일까지 점진적으로 미 제8군의 전선부대를 남쪽으로 후퇴시키는 대신 국군을 북상시켜 B선을 따라 배치하기로 한다.
2) 전투준비태세
주저항선에 편성된 국군과 유엔군의 방어진지는 참호와 개인호로 이룽어졌고, 서부전선의 경우에는 나무와 흙으로 구축되어졌다. 그리고 전선 전방 200~300M 구간에는 철조망과 기타 장애물은 물론 지뢰지대를 설치하였으며, 38선 지역의 방어편성은 전반적으로 종심이 얕고 방어진지도 허술하였다.
3) 전투력 수준
1950년 12월 1일 현재 국군은 121,000명, 미 육군 153,000명, 한국군 배속부대 일명 카츄사가 23,000명, 미 제1해병사단이 25,000명 등 총 342,000명이었다. 하지만 미 육군은 인가병력보다 65,000명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러나 중공군 제2차공세로 인해 미 제8군의 철수가 결정될 무렵, 유엔군은ㄴ 미 제2사단과 터키여단이 전투력을 상실하고 군우리에서 후퇴하여 재정비 중에 있었고, 국군 제6사단과 7사단, 그리고 8사단 또한 전투력이 50%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2. 서부지역 작전
가. 평양철수 작전('50.12.2-4)
1) 작전 개요
중공군의 공세로 인해 청천강 남안으로 철수한 미 제8군은 평양 북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미ㅏ 제10군단과의 연결을 통해 평양-원산 선을 확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미제8군 워커 사령관은 11월 28일 우익인 제2군단을 성천-양덕 일대로, 중앙의 제9군단을 안주ㅡ군우리 일대로, 그리고 좌익인 제1군단을 신안주 일대로 철수시켜 차지작전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반면에 적은 북한 제1군단과 중공군 제50군단 및 제60군단이 정주-태천-영변 축선으로, 중공 제38군단과 제39군단, 제40군단 및 제42군단이 덕천-영원 축선으로 나하하여 미 제8군의 우측방을 압박하였다. 11월 29일과 30일 청천강 북안을 목표로 지향한 중공군은 구장동-덕천-영원을 점령한 후 개천-삼소리-싱창리를 연하는 방향으로 우회하며 아군의 퇴로차단을 기도하였다.
2) 작전 경과
미 제8군은 중공군의 남진을 저지하고 평양 방어를 위해 숙천-순천-성천-양덕 선의 방어진지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적은 묘향산맥과 언진산맥이 서남으로 뻗은 지형적 잇점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남하한 반면 아군은 기동장비의 상실과 화력지원의 결여 등으로 적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적이 12월 2일 계속 순천 동남쪽으로 진출하자, 미 제8군은 방어선을 축차로 이동하며 일부는 평양으로 철수를 단행했다. 이 무렵 적은 평양을 동남쪽에서 포위하기 위해 성천을 점령하고, 평양 동쪽의 산악지대에서는 북한군 패잔병으로 구성된 유격대가 출물하기 시작했다.
이에 맥아더 사령관은 현재의 여건에서 중공군을 격퇴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보고, 12월 3일 미 합참의 승인을 얻어 축차적으로 38도선으로 철수를 개시하도록 하였다.
3) 작전 결과
12월 5일에 미 제25사단과 국군 제1사단은 평양 시내 시설물에 대한.파괴임무를 수행하고 12월 7일 국군 제1사단은 사리원에서 남천으로 이동하였고, 미 제25사단은 중화 부근에서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토산을 목표로 남하를 시작한 제8사단은 도중에 북한군 패잔병으로부터 도로차단 기도를 물리치고 12월 7일 목적지에 집결하였다. 한편 대동강을 도하한 적은 12월 10일과 11일에 곡산-수안-신계를 점령한 가운데 북한군 제1군단의 일부가 사리원 일대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의 산악지대에서는 북한군 패잔병이 출몰해 유엔군은 이들을 격퇴하고 철수해야만 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은 12월 11일 06:00시에 남천을 출발하여 제11연대와 제12연대의 엄호하에 고랑포를 거쳐 임진강을 도하하여 19:00시경 신산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제11연대는 다음날 구화리 북쪽에서 아군의 철수를 저지하는 북한군 패잔병의 소탕작전을 실시하고 12월 14일 고랑퐁에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12월 13일 위천리로 철수한 제12연대는 임진강을 건너 행산리로 이동하였고, 제15연대는 다음날에 법원리로 철수하였다.
미 제1군단 주력의 철수가 완료되자 14일 제11연대를 고랑포, 제15연대를 법원리, 제12연대를 신산리에 배치하였으며 6개월 만에 전쟁 개시 전의 진지를 다시 점령했다.
3. 동부지역 작전
가. 미 해병사단의 하갈우리에서 고토리 철수작전
1) 전반적인 상황
유담리의 2개 연대 전투단은 12월 4일 하갈우리 진지에 철수를 완료했다.
12개 사단을 보유한 중공군 제9병단 입장에서는 도로를 차단하고 단 한번의 포위공격으로 섬멸하려던 그들의 야욕은 실패했다. 중공군은 12개 사단 중에 유담리와 덕동고개 일대에 제59, 79, 89사단을, 장진호 동안의 신흥리에 제80사단을, 하갈우리 공격에는 제58사단을 투입했으나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따라서 이번만은 실수없이 섬멸하고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불태웠다.
중공군은 하갈우리-고토리-진흥리간의 모든 교량을 폭파하고 도로상에 장애물을 설치중에 있엇다. 고토리 남쪽에 단애에 가설되어 있던 중요한 교량이 폭파되었다는 사실이 4일 오후에 가서야 판명되었다. 유담리에서 철수와는 달리 많은 차량을 동반한 해병대에게는 이들 교량의 파괴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2) 준비와 계획
하갈우리에는 스미스 사단장이 지휘하는 약 1만명의 병력이 있었다. 미 해병대 외에 1,500명의 군단 직할부대, 385며의 육군 페이스부대의 생존자, 125명의 영국 해병 코만도대원, 소수의 한국 경찰관, 그리고 차량이 약 1천대가 있었다.
이 무렵, 하갈우리를 방문한 한 여자 종군기자, 마가렛드 허킨스양의 당시 해병대의 상황에 대한 그의 저서 "한국전쟁"에 기술된 내용을 조금 알아보변 다음과 같다
〔나는 하갈우리에서 저투에 지친 장병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을 때, 과연 그들이 중공군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여 그곳을 빠져 나갈 만한 힘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장병들의 군복은 너덜너덜하고, 그 얼굴은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으로 부어올라 있었다. 장갑도 뚫어져 실이 풀려 있었으며 방한모가 없어서 동상으로 귀는 시퍼렇게 변색되고, 동상에 걸린 발은 부어 군화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맨발로 군의관이 있는 천막까지 걸어온 병사도 있다.....
제5연대장 머레이 중령은 너무나 야위어 마치 망령과도 같았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던 당시 제5연대를 지휘하던 그의 면모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송
12월 4일, 북경방송은 "미 제1해병사단의 섬멸은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발표했다.
가)) 환자의 공수 후송
당시, 하갈우리에는 약 5천명의 부상자가 꽉 차있었다. 이 많은 부상자들과 함께 포위망을 뚫고 긴 애로를 돌파하여 해안
까지 탈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고 생각 되었다. 또한 앞으로 작전 중에 떠 발생할 것을 고려하면 차량마저 부족해 수용할 수가 없었다.
바로 이러한 점을 고려해 사단장은,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여 작전 초기에 사단 공병으로하여금 활주로를 건설하도록 했던 것이다. 따라서 공수에 의해 부상자 후송을 결정한 사단은 5일간에 걸쳐 수송기와 헬기 등을 이용한 수송으로 4,400명을 수송했고 6일의 작전간 발생한 137명도 후송하였다.
또한 해병사단은 부상자뿐만 아니라 137명의 전사자도 후송하게 되었는데 미 제10군단 사령부는 전사자 후송은 중단토록 하였으나 사단장은 전사자를 차마 남겨 둘 수가 없다고 고집를 해 후송했다.
나)) 보급과 보충
이미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철수 작전이 진행 될 때에 사단 군수참모부는 사단이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로 철수 작전간 필요한 보급품을 판단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전투수송기로 탄약이나 유류 등을 공중투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식료품은 70~80%, 유류는 70%가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고, 포병탄약은 40%가 대파되고 불과 25%가 진지에 도착하고 소화기 탄약은 45%가 사용할 수가 있었다. 물론 이중에는 중공군 진영에 투하 된 것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투하된 보급품이 절대적으로 작전간 공헌하게 됨으로서 이 사단 작전이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들 수송기는 보충병도 수송하여 1일부터 5일까지 537명의 보충병이 보충되었다.
다) 철수냐 공격이냐?
많은 각국의 종군기자들이 하갈우리에 들어와 상황을 너리 각국에 보도 하였다. 미 TV 기자들도 당시 상황을 촬영하여 본토에 방영하였다. 그런면서 사단장 스미스 소장의 인터뷰 내용이 보도 되었다.
"철수라니 당치도 않다, 다른 정면에 대해서 공격하는 것이다."
(Retreat, hell. We are attacking in a new dilection)
철수는 적의 강요에 의해 우군의 후방지역을 향하여 이동하는 거시지만 분작전에 있어서는 후방도 적이 장악하고 있다. 또한 적을 격파하는 것도 우리의 목적의 하나이다. 따라서 우리는 철수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방향에 대하여 공격을 가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라)) 공수철수 제안
12월 5일, 전투수송 코만도의 사령관 단나 공군 소장이 하갈우리에 날아와 C-47기에 의한 전병력 공수철수를 제안했다. 그러나 스미스 소장은 이를 거부하고 전사단을 육로로 철수시킬 결심을 밝혔다.
"우리는 중장비나 보급품의 대부분을 파괴 소각해야 한다. 더구나 최후까지 활주로를 엄호하기 위해서는 1개 중대 이상의 병력이 남겨져야 한다. 또한 고토리의 1개대대도 혼자 힘으로 황초령을 탈출하기란 극히 곤란하다. 모두 전멸 할 것이다. 아군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는다"라는 해병대의 전통을 손상시키는 것이 된다.
마))작전계획
사단은 하갈우리-고토리-진흥리-오노리-함흥을 잇는 도로를 따라 신속히 함흥을 향해 전진한다. 하갈우리에 있는 병력을 제5연대전투단, 제7연대전투단으로 두개의 그룹으로 편성하고 고토리에 도착하면 제1연대 전투단을 후위로 한다.
제7연대 전투단이 남진을 개시함과 동시에 제5연대 전투단은 동쪽 산을 공격, 이를 탈취하여 사단의 남진을 엄호한다. 고토리에 이르는 도로의 좌우측 00미터의 구역 내의 중공군은 보병이 격퇴한다,포병은 축차적으로 전진하며 간단없는 하력을 지원한다. 보급품과 장비는 전량 휴대한다. 휴대할 수 없는 물자는 모두 소각 도는 파기시켜 중공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한다. 공격 개시는 12우러 6일 06시로 한다.
제5연대 전투단(제1연대 3대대 및 영 제41코만도 배속) : 12월 5일 정오부터 하갈우리 방어를 담당한다. 공격 개시일 아침 일찍 동쪽 산을 공격하여 탈취함으로써 제7연대의 남진을 엄호하고 사단의 후방을 방호한다.
제7연대 전투단(육군, 임시편성대대 배속) : 사단의 선두로서 전진한다.
제1연대 전투단(3대대는 전방 제7연대에 배속되어 하갈우리에 있었음) : 고토리와 진흥리간을 확보하여 사단 주력의 도착과 통과를 엄호한다. 사단 주력이 통과한 후에는 후위가 되어 후방을 엄호한다.
그리고 기상을 고려하되 항공기의 근접지원하에서 최대한 기동하게 되며 항공지원은 한국전쟁 전기간을 통해서 최대규모의 것이였다.
당시 행군대열에 포병은 제11연대 1대대 105밀리 곡사포 3개 포대, 제2대대 D포대(105밀리), 제3대대 105밀리 2개 포대, 제4대대 155밀리 4문형 2개 포대와 고토리에 제2대대 105밀리 1개 포대가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포병은 항상 2개 포대 이상이 사격진지를 점령하고 지원이 되도록 계획했다.
하갈우리에 있는 부상자는 모두 비행기로 후송이 되었다. 이후의 부상자 발생은 활주로가 운용될 때까지는 하갈우리로, 그 후는 침낭에 싸서 차에 실고 고토리로 수송하도록 하였다.
바))작전개시의 준비
12월 5일 정오 : 제5연대 전투단이 하갈우리진지의 방어책임을 인수하고 3개 보병대대와 배속된 제1연대 제3대대를 전면방어진지에 배치하였다. 특히 제5-2대대가 동쪽고지 공격 준비를 했다.
하지만 5일 밤에도 중공군은 하갈우리에 대해 공격해 오질 않았다. 그들은 6일 밤에 공격할 계획이었고 하갈우리-고토리-진흥리간 도로 차단을 강화하고 황초령 하단의 급경사면에 가설되어 있는 수문교를 이미 파괴하고 이를 통제할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짜기 5일 야간 20시 10분경에 선회비행하던 미군 B-26기 두대가 하갈우리를 폭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중에 밝혀지지는 안했지만 아마도 중공군이 노획한 미군 무전기를 사용하여 거짓 명령을 내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갈우리의 포병은 5일밤부터 6일 아침가지 하갈우리-고토리 도로 주변에 포격을 가했다. 남아 있는 여분의 포탄을 모두 소모하였다.
사)) 미 제7연대 전투단의 남진
사단의 선두에서 진로를 개척하며 전진하는데 포병의 약 300명도 보병대대에 편입시켰으며 총원이 2,200명으로 정원 3,900명의 56.4% 수준이었다.
12월 6일 아침, 04시30분에 사단 우측방 엄호 임무를 띠고 있는 제1대대가 전진에 앞서 조내리 서남방 언덕을 공격하여 졸고 있던 중공군 24명을 사살하고 점령했다.
06 : 30분, 드디어 50m 전진 중인 F중대에 중공군의 맹열한 사격이 가해졌다.
"전진하라, 멈추지 말고 전진하라" 중대장 아벨 중위와 소대장들이 소리를 친다
"윽, 소대장님~"
"부상자를 바로 비행장에 보내라"
"예스"
중공군이 F중대와 전차소대를 약 2km 통과 시킨 후에 대대적인 공격으로 선두인 제1대대의 진출은 잠시 멈추게 되었다. 부대대장, D. E 중대장이 부상을 당하고 F중대의 덕동고개전투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단 한명의 단 소위도 전사했다.
이 사이에 제5연대 전투단이 동쪽고지에 대해 공격을 개시하여 14시 30분에 점령했다.
정오 무렵, 개미떼 같은 중공군이 동쪽고지에서 도로방향으로 전진해 오고 있었다. 이것은 중공군 제60사단과 교대하고 새로 하갈우리-고토리간 도로를 담당하려는 제26군단 예하의 병력이었다.
아마도 중공군은 미군 병력이 도로상과 방어진지에 분산되어 있을 때에 미군의 측면을 공격을하여 일거에 격멸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미군의 항공 폭격, 빈약한 수송수단, 불충분한 보급, 혹한, 험준한 산길 등의 문제로 제26군단 에하 4개 사단중에 5일에 하갈우리에 도착한 사단은 제76. 77사단이고 , 제78. 88사단은 늦어지고 있었다.
도로 동쪽고지를 전진 중이던 중공군은 미 해병 항공기의 공격으로 골짜기에 숨어있다 전진하는 등 계속적인 기동을 하다 땅거미가 지면서 드디어 1,200m가까이 미 해병에 접근, 공격하여 측위를 유인 격멸하려 했다.
그러나 측위는 700m까지만 엄호하도록 했기에 그 이상 깊숙하게 공격을 하지않아 유인격멸은 실패했고 야간에고 미군은 행군을 계속하여 선두가 드디어 7일 05시 45분에 고토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긴 행군로상에서 중공군 제26군단과 미 제7연대 전투단과의 전투는 계속되고, 제5연대 전투단은 하갈우리에서 전투를 계속했다.
6일 밤, 연대의 차량종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이 맹렬하게 진행되면서 21시경에는 수류탄 투척거리가지 육박해 왔다. 그래서 제7-3대대장 해리스 중령(미 제1해병항공단 사령관 해리스 소장 아들)은 소총 2개 중대를 차량 주위에 산개시켜 중공군을 제압하고 1개 중대로 1182고지의 중공군을 공격하여 소탕했다.
6일 밤, 02시경 교량 복구작업으로 연대본부가 정지하고 있을 때에 가장 치열한 공격을 받은 연대본부를 엄호하기 위해 혼전을 벌이다 해리스 중령이 행방불명 (나중에 전사로 판명)이 되었다.
"사리반 중위의 칼빈소총이 총알이 아닌 총이 날아가 중공군 병사 가슴에 곶혔다"
7일 17시, 제7연대 전투단 전원이 고토리에 들어왔다. 그러나 뒤이어 들어오는 제1지원부대는 6일 16시에 하갈우리를 출발하여 계속하여 도로상에서 접근하는 중공군에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다. 중공군의 일부는 사단 사령부 지휘반에 돌입하여 수류탄을 투척하며 돌격해 왔다. 지휘반의 사리반 중위는 6척 거구였다.
"물러 서지 말라"
"이 양키들아 고향으로 가라"
"우린 자유를 지키려 왓다. 용서하지 않으리~"
"총을 버려라, 너희는 죽었다"
"뭔 소리여, 누가 죽어, 철커덕, 철커덕~!" 6척 거구의 사리반 칼빈총에 총알이 떨어졌다
"헤헤헤, 우리 살람 미국 사람 좋아해, 총알이 없지롱?"
"그래 총알이 없다, 이 뙤놈들아" 사리반 중위의 착검된 칼빈총이 달빛 속에 번쩍하고 날라갔다
그리고 "으악"하고 중공군 가슴에 총대가 그대로 꽂혔다. 모두 경악스런 모습에 놀라 중공군이 도망쳤다.
"비록 포로라도 부상자에게 식량, 의약품을 주어 하갈우리에 남겨주었다"
사단에는 총 160명의 포로가 있었다. 하지만 다 호송하기는 부상 등이 심해 곤란했다. 그래서 걸을 수 있는 포로만 헌병중대 호위하에 압송하고 나머지는 식량도 주고 의약품도 주어 하갈우리에 남겨 주었다. 그러나 전진 중에 중공군이 다가오자 엎드려 있던 포로들이 일어서 도주하려 하는 바람에 이걸 미군으로 오인한 중공군이 사격하고 탈출을 막으려 미군이
사격하여 100여 명이 죽었다. 결국 지원부대도 7일 10시에 고토리에 도착하였다.
아)) 미 제5연대 전투단의 전투
제5연대 전투단의 임무는 하갈우리를 확보함과 동시에, 동쪽고지를 탈취하여 제7연대 전투단의 작전을 엄호함한 후, 그 뒤를 이어 고토리로 전진하는 것이였다.
"해병대답게 철수 한다"
제5연대 전투단의 편성부대는 제5연대, 제1연대 3대대, 영 제41코만도였으며 제5-2대대가 동쪽고지를 탈취하게 하였다.
6일 07시, 동쪽고지에 대한 공격개시 작전이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11월 29일부터 정상을 점령하여 진지를 강화하고 있었기에 격렬한 저항을 하였다. 그러나 포병과 항공기의 간단없는 지원에 힘입어 14시 30분에 동쪽고지를 점령했다.
미 해병사단장은 아침부터 공격을 지휘하고 14시에 헬기로 고토리로 향했다. 중공군은 역습과 동서남북 전면에서 하갈우리에 대해 공격을 해왔으나 막강한 화력앞에 실패하게 되며 동쪽고지 앞에는 800명의 전사자가 확인되었다. 또한 연대 정면의 제1대대 정면에고 460명의 중공군 시체가 확인되었으며 대대는 전사자 10명과, 부상자 43명이 발생하였다.
12월 7일 새벽, 제5연대 전투단의 선두가 전진을 개시하였다. 미 해병사단은 하갈우리로부터 철수하기에 앞서 모든 물자와 시설을 폭파 또는 소각함으로써 중공군의 이용을 방지하였다.
동쪽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5-2대대가 철수하여 출발하기에 앞서 갑자기 하갈우리 부락에 대폭발이 생겼다. 이는 공병이 폭발시킬 물체에 시한신관을 장착했는데 이것이 오작동하면서 20분 먼저 터지며 일대 장관을 이루게 되었다.
"미군 추적보다 물자를 확보하기에 바쁜 중공군"
갑작스런 폭발에 위기를 맞이한 미군이지만 중공군은 물자를 챙기기에 바빠 부락에서 물자를 찾아내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폭파부대가 모든 교량을 폭파하고 유기차량을 소각하면서 전진이 시작되는데 엄청난 인원의 피난민이 남녀노소, 부녀자, 소년소녀 등이 정처없이 미군의 뒤를 따라 교량폭파시에는 피해자도 발생하였다.
"누가 중공군은 인민을 위한다고 했는가?"
하갈우리로부터 피난민 행렬에 현지 주민들도 끼여 같이 행군하는 꼴이 되었다. 미군에 대한 중공군의 사격은 피난민에게도 무차별로 가해졌다. 이때의 상황 하나를 로버트 핵키 기자의 "영광으로의 행진'에서 알아보고자 한다.
"중공군의 탄환에 맞은 한 부인이 길가에 쓰러졌다. 그 부인은 갓난아이를 트럭쪽으로 밀어내고 한국말로 뭐라고 호소했다. 트럭의 운전병은 핸들을 잡고 전진을 계속했다. 빙판인 도로를 필사적으로통과해야만 했다. 이때 발에 동상이 걸려 차에 올라타 있던 몸집이 큰 중사가 몸을 구부려 갓난아이를 안아 올렸다. 부인은 일어서려고했으나 일어설 수가 없었다. 위생병이 뛰어내려 그 부인을 치료해 주었다. 마침내 흔들리는 트럭 위에서 중사의 품안에 갓난아이가 막 잠이 들려고 하였다."
드디어 12월 7일 24시까지 제5연대 전투단 후미가 고토리에 들어왔다. 이때 엄청나게 많은 피난민이 고토리진지의 북쪽에 몰려 왔고 용케도 추위를 참아가며 눈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자)) 하갈우리-고토리전투에 관하여
미 해병사단은 600여 명의 손실을 보았으나 거의 모든 장비를 가지고 9개소나 되는 도로 차단지점을 통과하여 고토리로 철수할 수가 있었다.
이 성공에 크게 기여한 것은 하갈우리에 보급기지와 활주로가 있었다는 것과 제1연대 전투단, 전투근무지원 시설과 병력이 사전에 천막을 설치해 놓는 등의 사전 준비가 되어 유담리에서 철수한 병력이 짧은 시간이라도 휴식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상병 4,400명을 비행기로 후송하여 사지진작과 차량의 적재능력에 많은 기여를 했다.
또한 항공기의 엄호 효과는 절대적이어서 중공군은 주간의 부대 집결이 불가능 했기 때문에 분산하게 되어 결국은 네이팜탄으로부터 피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중공군은 이에 대해 수송수단과 수송을 담당하는 병력이 부족하여 보급추진이 곤란하여 굶주리고 찬 음식을 먹어야 했고 이틀동안에 감자 몇개 밖에 먹지 못한 자도 있었고 따라서 체력유지도 어려웠고 부상자를 후송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이번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전사 83명, 전상자 20명, 실종 7명, 부상 506명 등 총 616명이었고 가장 피해가 많았던 부대는 사단 제1지원부대였다.
나. 고토리에서 진흥리로
1) 상황
사단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고토리에는 미 제1연대 2대대를 기간으로 하는 부대들이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고, 제1연대 전투단 지휘소도 여기에 있었다.
중공군은 11월 27일부터 공격을 해았으나 12월에 들어서는 가끔 소화기와 박격포 사격을 가하는 정도로 미군에 큰 피해는 없었다. 그간 고토리에서 중공군 피해는 전사 646명, 부상 622명으로 미군은 추정하고 있었다.
12월 1일, 미 제7사단 제31연대 제2대대가 고토리에 도착하여 제1연대 지휘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날 중공군이 황초령을 점령했기 대문에 이 대대가 황초령을 넘어 북상해 온 미작막 부대가 되었다. 고토리에 부대는 보급로가 두절되어 모든 것이 수송기로 투하하였다.
"1,081고지"
고토리에서 진흥리까지는 직전거리 10km, 표고차는 730m, 특히 황초령에서 고개 밑 보후장역까지는 직선거리 3.5km로 표고차는 640m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고지는 이 꼬불꼬불한 U자형 도로를 감제관측하는 1,081고지로, 이고지를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는 한 미군의 통과는 불가능하였다.
산기슭에 전면방어진지를 확보하고 있는 제1연대 제1대대장 슈먹 중령은 군단 정보처로부터 그 고개 일대의 항공사잔을 입수하여 연구한 결과 1,081고지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12월 2일(이날은 미 제5/7연대 전투단이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혈로를 개척하고 있었음) 이른 새벽, 슈먹 중령은 정찰반을 이끌고 1,081고지군 일대를 정찰했다. 정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다른 1개 소대를 편성하여 케이불카 선로를 따라 전진토록 하고 본 정찰대는 다른 경로를 이용하여 정찰을 실시한 후에 그곳에 포병사격을 실시한 후 돌아왔다.
이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진흥리의 방어를 육군부대와 교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문교(인공호수인 장진호에서 지하 배수로를 통해 내려온 물이 네개의 큰 강철관으로 흘러들어가 비탈 아래의 발전용 터어빈에 급경사를 이루고 떨어지도록 장치가 되어 있다. 이 파이프가 도로를 횡단하는 지점에는 파이프 위에 일차선 교량이 가설되어 있고 산쪽으로 큰 콘크리트로돈 수문이 있다. 이 교량이 단애상에 가설되어 있어 일단 파괴되면 우회로를 만들 수도 없고 차량 통행은 불가하다.)"
이 다리를 사단 공병참모겸 제1공병대대장 패트리지 중령이 강도 50톤으로 강화해 놓았으나 2,3일후에 중공군이 파괴시켰고 다시 제10군단 73공병대대가 즉시 강철제의 M2조립교(탱크 통과가능한 조립식 교량)를 가설했으나 12월 4일 항공정찰결과 이 교량이 파괴되어 있었다.
이에 스미스 사단장은 패트리지 공병대대장에게 교량보수 명령을 내렸다.
2) 중공군의 작전준비와 계획
미 해병사단의 주력이 12월 7일 아침에 고토리에 들어오고 있는데, 이때가지 중공 제26군(제76.77.78.88사단은 하갈우리-고토리간 도로의 동쪽지역에 남하하여 그고세 있던 제60사단과 교대하여 제76. 77사단을 고토리 근방 도로 연변에 배치하고 기타 2개 사단을 예비로 보유하고 있었다.
중공 제60사단은 고토리 남쪽으로 남하하여 황초령 남쪽의 고갯길을 제압할 수 있는 1,081고지등 요지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특히 1,081고지에는 1개 연대 규모가 점령하고 수문교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도 병력을 배치하여 미군의 가교작업을 방해하고 있었다. 중공 제89사단은 고토리 서남방으로 남하중이엇고 그 일부가 고토리와 그 남쪼게 대하여 소규모 공격을 실시했다.
특히 중공군 수뇌부는 1,081고지와 수문교를 필히 고수해야한다고 제60사단에 임무를 부여하였다.
3) 미군의 작전준비와 계획
스미스 사단장은 주력에 선행하여, 6일 오후 항공편으로 고토리에 도착하여 지휘소를 개소하였다. 고토리의 제1연대장 풀러 대령은 부상자와 함께 많은 병력이 집결하는 문제점을 예견하고 이미 경비행기 활주로 공사를 실시하여 8일에는 530m를 만들었다. 사단주력이 도착했을 때에 병력이 약 14,000여 명, 차량은1,400대였으며 활주로를 이용하여 부상자는 모두 후송하였다.
당시 고토리진지에는 제5/7연대 전투단, 제1연대 전투단(제1대대 결), 육군 제31연대-2대대, 육군임시편성대, 영국 제41코만도, 사단정찰중대, 제1전차대대 등으로 미 해병이 11,686명, 육군 2,353명, 영국군 150명, 한국 경찰 40명이었다.
12월 7일, 미 해병대는 우선 남쪽으로 진격하여 주요고지를 점령하고, 수문교를 가설한다. 가교 온료 후, 제7연대 전투단의 어호하에 사단의 제1. 2지원부대가 다리를 건너 진흥리로 전진한다. 이어서 제7. 5. 1연대 전투단 순으로 전진한다.
한편 진흥리로부터 보병 1개 대대로 북쪽으로 공격하여 1081고지 일대를 점령하고 사단 주력의 애로지역 통과를 엄호하고 사단 후방을 방호하도록 하였다. 공격개시는 12월 8일 08:00시였다.
다. 최후의 전투
1) 가교준비
12월 6일,패트리지 고병대대장은 자신이 직접 항공정찰 을 실시한 후 수문교 가설을 위해 M2조립교 4개가 필요함에 따라 공중 투하시 파손등을 고려하여 8개를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은 연포비행장에서 실제 낙하시험과 부족한 대형낙하산을 일본에서 급송하여 7일 09시 30분부터 정오까지 고토리진지에 조립교를 투하했으며 중공군 지역에 떨어진 1개를 제외하고 모두 회수하여 공병 2개 소대가 제7연대 전투단 대열의 선두에 위치하여 전진하게 되었다.
2) 1081고지 탈취
"제3-7-3대대를 포함한 독구 대대 편성"
1081고지 탈취를 위해 미 제1연대 1대대장 슈먹대대는 전투를 하지않아 피로도도 적고 사기도 충천해 있었다. 사단장은 군단장에게 슈먹대대와 본토 방어를 위한 보병 대대를 7일까지 진흥리에 투입해 줄 것을 요청하엿고 이에 따라 원산의 미 제3사단 제7연대 3대대. 제29장갑야포대대. 공병.통신병.고사포병 등으로 "독구 대대"를편성하여 부사단장 지휘하에 출발시켜 차단된 도로를 돌파하면서 7일 저녁에 진흥리에 도착, 슈먹대대와 교대했다.
그리고 제7-1대대는 1081고지로 향했다.
눈보라가 휘날리고 한치앞도 보이지 않느 상황에 길은 얼고 미끄럽고 산길은 더욱이 설한지(20cm 적설)라 진출이 어려웠지만
바로우 대위가 이끄는 A중대(인천상륙작전 후 영등포 시가지 점령 기여 부대)가 선봉에서 적진을 돌파해 나가 시계가 불량하여 미군의 진격을 알아채지 못한 중공군은 호속에서 허겁지겁 격퇴당하게 되어 한 진지에서는 60명이 죽어갔다.
물론 중공군도 일부는 절대로 물러서지않고 앉아서 죽어가는 용맹성도 보여 대대는 13명의 전사와 부상 17명이 발생하고 67명이 동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악조건이 계속 되었다.
결국 A중대는 1081고지를 탈취하고 B중대는 U자형 도로 일대를 감제하는 기타 고지군을 점령하였으며 사상자 47명, 동상자 190명이 발생했다.
하지만 중공군은 그들의 전매특허인 야간전투도 못해받고, 역습도 없이 이 중요한 거점을 빼앗기고 말았다. 곧 미군위 승리였다. 그 이유는 극한지역에서 1개월여에 탄약, 식랴의 보급다운 보급을 받아보지 못하여 체력저하와 사기자하로 직결되어 어느 호안에서는 아예 총을 붙들고는 있으나 쏘지도 못하고 , 일부는 얼어서 그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포로가 되기도 했다.
) 사단주력의 전투
제7연대 전투단장의 작전구상은, 2개 대대로 도로 양측의 요충지인 목표 A. B를 점령하고 그 엄호하에 1개 대대를 도로를 따라 남하시키고 그 뒤를 이어 예비대대와 연대 직할대를 따르게 하는 것이다.
8일 08시, 제3대대가 목표 A를, 육군대대가 목표 B를 공격해 가고 제1대대는 남진을 개시했다.
14시, 가교 자재를 적재한 2대의 트럭이 미 제7연대 1대대 뒤를 이어 출발했으나 제1대대가 수문교를 탈취하지 못한데다 중공군의 박격포가 가까이 떨어지는 바람에 전차진지 내에서 밤을 세웠다. 그런데 그중 한대가 표면이 얼어있어 미그져지면서 수렁에 빠져 끌어낼 수 없어 자재운반 차량이 한대로 되었다.
"전쟁터에서 태어나는 아기"
하갈우리에 이르는 도로를 폭파해서 진지 북쪽을 방어하고 있는 제1연대 2대대 D중대는 이곳에서 피난민들이 진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었다.
죄없는 피난민들이 진지밖에서 미군으리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지만 미군은 어떠한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일부 의약품이나 약간의 치료를 해주는 수준인데 이날밤 해군 위생병의 도움으로 두명의 아기가 탄생하였다. 피난민은 9일 아침에는 3,500명에 이르렀다.
"전우야, 미안, 조금만 기다려~!"
8일, 미군은 전사자 117명을 현지에 매장했다. 비행기와 차량에 전사자를 적재할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전후 후송됨)
"호안에서 싸우지안고 얼어있는 중공군"
9일, 제7연대 1대대는 수문교를 감제할 수 있는 고지를 공격해 올랐다. 그러나진작 올라서 호속을 보니 약 50명의 중공군이 웅크리고 앉아서 있을 뿐 저항하려하지 않았다. 그 병사들은 얼어 있고, 굶주림과 추위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중공군 제60사단은 수문교를 확보하려는 의도는 있었으나 그 조치가 불충분하여 결국 미군이 확보 하였다.
해병대와 함께 걷고 있는 피난민은 하갈우리에서 해병 CIC와 한국 경찰의 조사를 받은 후 해병대와의 동해이 허가된 사람들이 아닐가 한다. 이는 미군에 협조하는 민간이나 북한군에 의해서 숙청이 염려가 되는 민간인을ㄹ 선별해서 특별히 보호햇던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기부 업!"
10일 02시 45분, 미 제7연대 1대대의 선두가 진흥리에 도착했다.
3천여 명의 피난민은 최후미의 전차에 되도록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이 중에는 중공군 병사도 섞여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래서 하케트 중위는 피난민에게 가급적 멀리 떨어지도록 했다. 전차 종대가 전조등을 켜고 천천히 진출하는 과정에 수문교 로부터 2km지점에서 전차 한대가 브레이크가 얼어붙어 정지하면서 9대의 전차와 하케트소대는 정지하고 말았다.
이때 피난민을 헤치고 5명의 중공군이 나타나 영어로 "기부 업"하고 외쳤다. 하케트 중위는 아묫드 하사에게 엄호를 지시하고 앞으로 나갔다. 갑짜기 선두 병사가 비켜서며 뒤에 4명이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공격해 왔다.
"전차 9대중 7대 손실, 2대만 정지했다"
전차부대는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전진하여 진흥리로 향했다. 드디어 마지막 전차가 통과하고 수문교를 폭파할 시간이 되었는데 피난민이 쇄도하여 세 번이나 점화를 중지하고 11일 02시에 폭파했다.
미 해병제1사단은 원산에 상륙한 10월 26일부터 흥남에서 출항한 12월 15일까지 전사 604명, 전상자 114명, 실종 192명, 부상 3,504명으로 총 4,148명의 손실이 있었다.
중공군은 확인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제27군의 교훈에 장진호 부근에서 비전투 손실이 1만명 이상이라는 점에서 얼마나 큰 피해가 있는지 가늠이 간다.
미 해병대는 중공군의 손실을 지상작전으로 전사 1만 5천명, 항공부대에 의한 전사 1만명으로 추산했다. 부상병 또한 1만 2천여 명으로 판단했다.
다. 원산-함흥 전투('50.12.3-15)
1) 전투 개요
1950년 12월 2일 중공군 제9병단의 개입에 따라 미 제1해병사단이 철수를 시작한 이래로 동부전선의 국군 및 유엔군은 흥남과 원산일대의 교도부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한국 해병대는 주력이 원산을 방어하고 제3대대가 동양까지 전진했으나, 전황의 급변으로 12월 2일을기해 사령부를 비롯 제2.5대대는 함흥으로 이동하였다. 다음날 제3대대는 마전리로 이동한 후 다시 원산으로 이동하여 제1대대와 합류하였다.
한편 원산부근의 적정은 북한군 3,00며이 덕원군 일대에서 원산을 위협하였고, 1개 사단의 북한군과 중ㄱ우군 혼성부대가 내륙산악지대로부터 마식령가지 접근하면서 세력이 날로 증강되고 있었다.
2) 전투 경과
작전이 전개되는 싯점인 '50.12. 3일, 함흥에 사령부를 설치한 한국 해병대는 미 제10군단의 예비로일선에 이르는 주보급로와 군단의 후방지역을 방어하던 미 제3사단으로부터 작전통제를 받고 있었다. 이 무렵 한국 해병대는 함흥 교두보 남쪽을 방어하고, 미 제3사단 제7연대(국군 해병 제5대대를 배속시킴)의 이동을 엄호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12월 5일부로 미 제10군단장은 함흥지역의 교도부 확보를 위해 함흥과 흥남을 중심으로 종북쪽은 국군 제1군단이, 서쪽은 미 제7사단이, 서남쪽은 미 제3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이 방어하고 한국 해병대는 미 제3사단의 통제아래 지경 남쪽을 담당하는 명령을 하달 하였다.
전황이 급변하는 가운데, 12월 7일 미 제3사단장의 철수명령에 원산부두로 이동하여 대기 중이던 국군 해병 제3대대가 대기하고 있던 LST845함편으로 16:30분에 부산으로 출항한다.
그러나 갈마반도 비행장을 방어하던 국군 해병 제1대대는 원산지역의 최종방어부대가 되었다. 야간에 침입한 적이 12월 8일 10:00시경 원산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마지막까지 아군의 이륙을 엄호하면서 16:00시경 명사십리 해안으로 집결하여 LST898함과 973함 편으로 20:30분에 원산만을 출항하였다.
한편 함흥지역은 중공군의 포위를 돌파한 미 제1해병사단이 집결, 제1연대가 지경에, 제5/7연대가 연포비행장 부근을 점령한다. 미 제10군단장의 명령으로 국군 제3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이 12월 11일 탑승을 시작했다.
한편 국군 해병대사령부는 제2대대가 진지를 미 제7연대에 인계하고 12월 14일에 연포 서쪽의 서흥리로 이동하여 방어하고 제5대대가 미 제3사단으로부터 배속해제 되어 복귀하여 연포비행장에 집결하여 미 항공기편으로 출발했다.
3) 전투 결과
원산 철수작전은 최종방어부대인 해병대 제3대대가 12월 7일에, 제1대대가 이틀 후에 원산을 출발하여 12월 12일에 부산에 입항함으로서 종료되었다.
한편 함흥지역에서는 해병대 주력이 12월 15일 연포비행장을 이륙한 후 미 제3사단의 마지막 해안방어부대가 흥남해안을 떠났다. 또한 연포비행장을 이륙한 국군 해병대 사령부와 제2대대 및 제5대대는 부산의 수영비행장에 도착하여 제1,2대대와 합류한다. 다음날 선편으로 부산을 출발한 해병대는 진해로 이동하여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을 실시하며 차기 작전에 대비하였다.
라. 흥남철수작전('50.12.14-24)
1) 작전 개요
미 제10군단의 철수계획
오로리 미 제7사
함흥
미 제3사 국군 제1군단
지경리
서호진
흥남
연포
흥남철수작전은 사부전선의 미 제8군이 중공군의 반격에 밀려 38도선으로 철수하던 '50.12월 14일부터 24일가지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흥남에서 해상으로철수하여 38도선에 병력을 재전개시킨 철수작전이다.
이 작전은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계곡에서 철수작전을 전개하여 중공군 제9병단의 진출을 지연시키고 있는 동안, 흥남지역으로 집결한 국군 과 유엔군이 함흥 외곾에 타원형의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미 제1해병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는 한편 해상철수를 개시하여 12월 24일 마지막 철수부대가 승선할 때까지 약 20일간 실시되었다.
2) 작전 경과
'50.12. 9일 맥아더 원수는함흥-흥남 일대에 집결한 "미제10군단 및 국군 제1군단에 흥남에서 부산과 마산 및 울산으로 해상철수하여부대를 집결시키고 미 제8군사령관 지휘 하에 들어가라"고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흥남을 중심으로 반경 10km 외곾선을 타원혀으로 연결하는 전초선을 견고하게 구축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원거리에서 저지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전초선을 강화할 무렵, 중공군 제9병단은 예하 20군단 및 제27군다늬 5개 사단 병력으로 함흥 북쪽에 집중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미 제1해병사단은 흥남에서 부대정비를실시한 후 12월 14일 승선을 완료하고 출한을 대기하였다가 12월 15일 새벽에 흥남항을 출항하였다. 미 제3사단은 중공군의 파상공격에 대비한 교도보 진지강화에 착수하였다.
한편 병력증강 요청에 트루먼 미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와 동원령을 선포한 가운데 12월 15일 중공군 제9병단 주력은 전날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또 다시 강력한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강력하 ㄴ함포사격 지원과 근접항공지원으로 적의 함흥진출을 강력하게 저지하였다.
흥남 동북 외곾의 신흥리 일대에서진지를 점령하고 북한군 주력을 견제하던 국군 수도사단은 철수 순서에 따라 제1연대-제1기갑연대-제26연대 순으로 부대를 기동하여 12월 16일 야간을 기해 전 병력의 흥남집결을 완료하여 자정무렵 출항준비를 완료하고 해상대기에 들어갔다.
한편 해상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동안 , 태백산-오대산-설악산 일원에 북한군 제2전선 유격부대가 출몰하고 있었다. 이에 국군 수도사단을 38도선 남쪽 묵호에 상륙시키기로 결정하고 묵호상륙작전으로 북한군 정규군과의 합류를 용이하게 하려는 적의 기도를 사전에 무산시키기 위해 전개되었다.
'50.12. 17일 새벽 수도사단 주력은 묵호를 향해 출항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15:00시경 접적 없이 묵호에 상륙하여 양양으로 북상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로써 미 제10군단 예하 각 사단 중 3개 사단이 흥남철수를 완료하였고, 잔류 중인 미 제3사단과 미 제7사단이 흥남교도부작전에 참가하였으나, 미 제7사단도 이후 승선준비를 시작하였다.
한편 흥남부두에는 공산치하로부터 벗어나려는 북한 주민들이 모여들이 시작하여,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은 피난민 수송을 위한 최선의 방안을 강구하였고, 이에 따라결국 LST 1척당 5,000명, 화물선 1척에 12,000명을 승선시키는 계획을 강구하여 안전지대인 거제도 등 부산부근과 제주도까지 후송되었다.
12월 18일, 미 제3사단이 축소된 흥남교두보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은 북한군 2개 사다을 선봉으로 한때 교두보 정면을 돌파하지만, 이내 함포사격과 근접항공지원 사격에 밀려 진출이 차단되고 만다. 이에 중공군은 주간공격대신 야간공격으로 전환하지만 아군의 연신된 화포로 적 후방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함흥 서북쪽의 적 탄약고를 파괴하자, 중공군 제9병단은 북한군 제4군단및 제5군단과 연합으로 12월 19일 총공세를 가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아군의 육해공군의 합동화력에 후퇴로까지 차단되자 돌파를 단념하고 병력을 재정비에 들어간다.
사단의 철수작전이 예정대로 진행되자, 12월 20일 알몬드 소장은 참모들과 함께 마운트 맥킨리호에 승선해 기동함대에 함류하는 한편 흥남방어임무를 기동함대에 인계하였다. 이날까지 순양함 2척과 구축함 7척, 로켓발사함 3척 등이 총 34,000발의 포탄과 12,000발의 로켓포를 발사하며 근접지원포격을 실시하였다.
승선을 안료하고 대기하던 미 제7사단은 12월 21일 새벽에 부산을 향해 출항하여, 흥남항에는 미 제3사단 제7.15.65연대 등 3개 개 연대전투단과 전차부대, 그리고 6개의 포병대대와 대공포대만이 최종방어부대로 남았다. 계속하여 가용함선으로 포병부대들이 준비되는 대로 출항하고 이제 미 제3사단만 남았다.
최종철수 하루 전 12월 23일, 중공군의 간헐적인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미 제3사단을 동시 승선을 위해 조치가 이루어지고 7개 지점에서 승선 및 탑재가 이루어져 12월 24일 08:00시에 지상 및 해상에서의 철수준비가 완료되어 승선이 시작되었다.
이 당시에 중공군의 접근은 함포지원전단과 함재기들이 출격해 집중 포격으로 초토화 시키고, 함흥 서쪽의 적 사령부도 폭격하였다.
수송선단의 모든 출항 준비가 완료되자, UDT 대원들이 부두의 주요시설과 해안가에 방치되어 ㅇ있는 400톤의 다이너마이트 및 50만 파운드의 폭탄에 대한 폭파가 이루어지고 수륙양용주정이 출동함으로써 흥남첡수 작전을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
한편 흥남부두에서는 피난민 후송작전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LST 2척과, 빅토리아호 등 상선 3척이 추가 하여 50,000여 명을 안전지대로 수송하여 총 100,000여 명을 수송하였다.
3) 작전 결과
중공군 제9병단은 흥남철수 완료일로부터 만 3개월이 지난 1951년 3월 중순 제5차 공세 당싱중부전선에 출현하였다.중공군 제9병단은 장진호부근 전투에서 흥남교두보 작전에 이르는 동안 장진호 부근에서 50-50$, 흥남교두보에서 20-30% 정도의 병력ㅇ 손실을 보았다. 특히 제26군단의 경우 90% 정도가 동사에 걸리고, 제27군단의 비전투손실도 10,000명에 달했다.
반면에 아군은 육해공군의 입체적인 합동작전과 교두보를 효과적으로 방어하여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으로 철수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를 획득한 것이 성고의 요인이었다. 이 작전에서 중공군 제13병단을 15일 동안 동부전서네 고착시킴으로서 서부전선의 제13병단과의 협동작전에 차질을 가져와 38도서을 조기에 장악하려는 그들의 의도는 좌절되었다.
4. 38도선 방어선 형성
가. 개요
12월 8일, 유엔군사령부는 축차방어 전략 개념의 일환으로 38도선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 명령에 따라 미 제8군은 김포반도-임진강-화천-양양을 연하는 선을 주저항선으로 선정한 후 포천-김화 도로를 주임으로 중서부 전선은 미군이, 동부전선은 국군이 전담하여 방어하도록 하였다.
철수작전 상황하에서 미 제8군은 다음과 같은 5개의 방어선을 선정하였다.
A선 : 임진강 하구에서 문산경유 38선을 따라 양양까지 연결
B선: 고양에서 시작하여 의정부-가평-자은리를 경유 동해안 동덕리 연결
C선 : 영등포에서 한강 남안을 따라 양평-횡성-강릉으로 이어지는 선
D선 : 수원에서 이천-원주-평창-삼척을 연하는 선
E선 : 37도선을 따라 평택-충주-삼척을 연하는 선
이에 따라 미 제8군은 김포반도-임진강-화천-양양을 연하는 선을 주저항선으로 설정하였다.
나. 각 전선 상황
1)서부전선 상황
38도선으로 철수한 미 제1군단은 김포반도에 터키여단(서울 서쪽 염하구-김포)을, 개성-문산도로를 가로지르는 임진강 하류에 미 제25사단(서울 북방 임진강 하류 제방)을, 고랑포-적성일대에 국군 제1사단으로 주저항선을 편성하고, 영 제29여단은 군단예비로 고양 신둔리에 집결토록 하였다.
한편 신계에서 철수하는 미 제9군단은 국군 제6사단을 전곡일대(주월리-양문)에, 미 제24사단은 영평리 일대에, 영 제27여단을 예비로 덕정에 집결시켰다.
여기서 국군 제6사단은 12월 11일 , 시변리 일대에서 지연전을 펼치다 시변리-삭령-연천 도로에 패잔병이 출몰하여 시변리-구화리-연천 도로로 우회하여 철수하였으며, 제7연대를 한탄강 남쪽에, 제19연대를 백의리에 배치하고 제2연대는 예비로 동두천에 집결시켰다.
미 제8군사령관은 얕은 방어종심, 넓은 배치공간, 국군 부대들의 과도한 방어정면을 보강하기 위해 군예비인 미 제1기병사단을 퇴계원에 배치하여 춘천에서 서울로 진출하는 적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때 군우리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영등포에 집결중인 미 제2사단(제천-홍천 : 프랑스/네덜란드 대대 배속))을 충주로 이동시켜 중앙이나 동쪽에서 적이 국군 담당지역을 돌파하면 이를 저지하고, 만약 서부전선에 미 제1,9군단이 철수할 경우 그 우측방을 엄호하도록 하였다.
미 제187공정연대(태국 대대 배속)는 군포비행장에 위치하고 , 지난 12월 중순에 한국에 도착한 캐나다 경보병대대, 12월 31일에 도착 예정인 뉴질랜드 제16야전연대 등이 있었으며 미 제10군단(미 제3.7. 제1해병)은 부산 일원에 있었다.
2) 중부전선 상황
국군 제3군단(제9, 11사)은 12월 10일 후방지역 공비토벌 작전을 종료한후 제9사단과 제11사를 육본에 원복시키고 양평으로 이동하여 제2, 5, 8사단을 배속받아 군단 창설 이후 최초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 무렵 국군 제2사단과 제5사단은 11월 27일부터 육본 통제하에 낙동강 전선에서 낙오 되었다가 태백산맥을 통해 북으로 도주하여 철의 삼각지대에 집결한 북한군 패잔병을 소탕하고 있었다.
국군 제2사단(제31연대:제5사단에 배속)은 가평에서 제17연대를 철원부근에, 제32연대를 의정부부근에, 그리고 배속된 제5-35연대를 구화리부근에 배치하여 소탕작전을 실시하였다.
국군 제5사단(제35연대:제2사에 배속)은 춘천으로 이동하여 제27연대를 청평 호명산 일대에, 제36연대를 가평 북쪽 지암리 일대에, 사단에 배속된 제2-31연대를 홍천에 배치하여 병참선 확보와 소탕작전을 실시하였다.
국군 제3군단이 양평에 도착한 12월 13일을 전후하여 제2, 5사단은 패잔병 소탕작전을 중단하고 배속부대들은 원대복귀하였다. 군단장 이형근 소장은 제2사단을 좌전방 가평 방향에, 제5사단을 중앙의 춘천 북쪽에, 제8사단을 춘천 동쪽에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형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우전방의 제8사단의 진출이 지연되어 방어진지 편성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 제8사단은 신계를 경유하여 12월 5일 시변리에 도착하여 4일동안 휴식과 부대정비를 하였다. 이 무렵 항공정찰결과 시변리-연천간 도로가 항공폭격으로 차량의 통행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제16연대장에게 사단 주력의 이동을 일임하고, 사단본부와 중장비, 환자, 보급품을 실은 차량제대를 이끌고 시변리-개성도로를 따라 먼저 출발하였다.
"제8사단의 이상한 전투행동 두가지?"
사단 본부가 출발하자 제16연대장 유의준 중령은 연천을 목표로 도보 이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주력이 철수할 도로 좌우측은 고지군으로 북한군 패잔병이 2개 대대규모가 독동일대에 배치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연대장은 임진강 서측 감제고지인 520고지를 공격하여 확보하면서 철수를 감행하여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후에 연천으로 철수한 후에 원주에서 제3군단으로 배속이 전환되어 화천저수지 남쪽으로 이동하여 전선에 투입되었다.
첫째 이상한 행동 :그러나 이 시변리 전투결과로 사단장이 처벌을 받게 되는데, 당시 군단장인 유재흥 장군은 "사단이 우회하더라도 고랑포 쪽으로 철수하도록 하였으나 연천통로가 차단되었음에도 돌파를 강행한 것은 잘못이고, 더구나 사단장이 주력부대를 두고 차량제대를 이끌고 철수한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회고하였다.
한편 육군본부는 12월 15일부로 제3군단의 방어종심을 보강하기 위해 증원부대로 운용하기 의해 홍천에서 정비중인 국군 제7사단을 춘천으로 이동시켜 육군예비로 하였다.
돌째 이상한 행동 : 초기 전투시 강릉지구 전투 후에 철수하여 7월 2일 제천에 집결하였다. 여기서 육본의 명에 따라 7월 4일 충주로 이동하라는 명을 받고 지친 병사들을 고려 열차로 안동-대구를 거쳐 올라가려고 7월 5일 열차편으로 안동, 영천까지 이동하였으며, 여기서 사단장이 직접 육본에 찾아가 확인결과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열차편으로 제천으로 올라오는 소풍놀이를 해야 했다. 여기서 이틀이란 엄청난 시간이다. 지금 중앙선 을 타고 원주. 횡성에서 적이 제6사단을 따라 남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3) 동부전선 상황
동부전선을 담당하게 된 국군 제2군단은 미 제8군이 청천강에서 철수할 무렵인 11월 28일 그동안 덕천전투에서 지연전을 펼친 국군 제6사단을 미 제9군단으로 배속 전환하였다.
국군 제2군단은 강동일대에서 재편성하고 평양 동측방을 엄호하다 이후 신계-곡산으로 이동하여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의 배치공간을 차단 하던 중에 다시 육본 명에 따라 이천-평강-김화 선을 보강하기 위해 12월 5일 시변리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12월 8일 유엔군의 38도선 방어계획에 의거 군단은 다시 화천 동쪽의 방어진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하지만 북한군 제2전선 부대인 제2, 5군단이 평강-김화-화천 도로를 차단하여 군단은 부득이 연천을 경유하여 철수하게 되었다.
군단이 38도선으로 철수하는 동안 동부전선에는 대구에서 공비토벌작전 중에 올라온 제9사단이 12월 8일 긴급히 원주, 강릉으로 이동하여 춘천 동북방 내평리에서 동해안의 인구리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이때 제28연대는 소양강 남쪽에, 제29연대는 현리 일대에, 제30연대는 인구리 일대에 각각 배치되어 1개 연대 방어정면이 약 30km나 되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제2군단은 12월 14일 원주에 도착, 육본 명에 따라 청천강 교두보와 시변리에서 고군분투한 제7사단을 육본 직할로, 제8사단을 제3군단에 배속전환하고 대신 제9사단과, 함흥에서 배로 구룡포로 철수한 제3사단을 배속받았다.
그러나 바로 육군본부의 조치에 따라 흥남에서 철수하여 묵호로 상륙한 국군 제1군단이 동해안을 담당하게 되어 제9사단을 제1군단으로 배속전환하여 홍천으로 진출한 제3사단만으로 인제 남쪽의 부평리-관대리 지역을 방어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제3사단장 최석 준장은 제18연대는 제8사단 제16연대가 방어하던 홍천고개와 하수내리-수리봉지역을, 제22연대는 제9사단 제28연대가 방어하던 음양리-수리봉 지역을, 사단에비인 제23연대는 홍천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전투경찰과 경비대대로 측방경계를 강화하였다.
4) 제1군단의 동부전선 상황
12월 18일 흥남에서 철수한 제1군단은 묵호에 상륙하여 제2군단으로부터 제9사단이 방어중인 관대리-서림-양양을 연하는 방어선을 인수하였다.
군단의 임무는 38선상 방어진지를 점령한 후 태백산맥일대에서 활동중인 적 유격대를 격멸하고 그들이 38선 이남지역으로 침투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다.
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좌전방 관대리-서림에 제9사단을, 우전방 서림-양양에 수도사단을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군단 후방지역에 3개 경비대대(제1.2.3)을 영월, 정선 및 하진부리에 각각 배치하였다.
제9사단은 제30연대가 방어하던 서림-인구리지역을 수도사단에 인계하고, 또 28연대의 부평리-관대리 지역을 제3군단 제3사단에 인계하여 관대리-현리-서림지역을 방어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인접 수도사단과는 1073고지-방대산-구룡덕봉이, 좌인접 제사단과는 길향산-대암산-부봉-가득봉 등의 고산준령이 남북으로 연결되어 전선 연결이 매우 어려웠다. 더구나 사단으 ㄴ지난 10월 25일 창설되어 공비토벌작전만 경험있엇다.
제9사단장 오덕준 준장은 태백산맥을 타고 준동하는 유격대를 차단하고 원통-인제 축선으로 남하하는 주력부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제28연대를 원대리-현리에, 제29연대를 현리-하치전에, 그리고 에비인 제30연대를 창촌에 집결시켜 경계를 맡도록 하였다.
수도사단 송요찬 준장은 오대산 부근의 적 유격대의 후방교란을 판단하여, 양양과 주문진 사이에 제1연대, 제1기갑, 제26연대 순으로 종심깊게 배치하여 제1연대는 남대천 남쪽의 하왕도리, 제1기갑연대는 상광정리, 제26연대는 주문진 남족의 방내리에 집결시켜 오대산 부근의 적의 준동에 대비하였다.
한편 군단이 방어진지를 편성하는 동안 북한군 제69여단은 양양 북쪽에서 재편성을 완료하였고, 또 북한군 제2군단 예하 패잔병들이 인제부근에서 활동하고 있엇다. 특히 2,000여 명이 오대산 일원에서 유격홀동을 전개했다.
다. 동부전선의 불안
아군이 12월 23일경 38도선 방어선을 점령하고 진지강화에 주력하고 있을 때에 신정공세를 계획한 중공군은 주력부대의 공격에 앞서 전선에 배치된 국군 사단들의 퇴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북한군 제2군단(4개 사단)과 제5군단(1개 사단0을 국군 제1, 2군단 전투지경선으로 침투시켜 전술적 요충지인 홍천, 춘천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1) 북한군의 선제 공격
(가) 홍천부근 돌파기도
화천-양구-인제 선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2군단은, 국군 제2군단 예하 제8사단 정면의 오항리, 제3사단 정면의 관대리, 그리고 제9사단 정면의 인제 일대에 각각 1개 연대 규모를 배치하고, 이들 중 일부가 제3사단을 양익포위할 목적으로 좌인접 제8사단과 우인접 제9사단의 전투지경선 부근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12월 23일, 제8사단의 저항선을 돌파한 적의 일부가 홍천고개 부근으로 진출하여 자은리를 위협하였다. 이에 제3-18-1대대는 이곳으로 진출한 제8-10연대와 협동작전으로 714고지의 적을 소양강 북쪽으로 격퇴시켰다.
그러나 제3사단의 좌인접 소양강변으로 진출한 제8-10연대가 적의 역습으로 자은리로 철수하고, 또 제18연대도 지역도 적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제10연대를 배속받아 소양강 남쪽 내평리 일대의 주저항선을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적 1개 연대규모가 야간에 홍천고개로 진출하여 퇴로 차단을 극복하기 위해 에비인 제23-1대대가 제18연대를 증원하였다.
하지만 적은 소부대규모로 계속 침투시켜 우인접 제9사단의 제28연대 지역을 돌파한 적이 제3사단의 우측방을 위협함에 따라 제3사단장은 각 연대들에게 홍천고개-장남리-부봉을 연하는 선으로 철수를 지시하며, 이 과정에서 상수내리에 배치되었던 제18-3대대가 철수과정에 어론리에서 다수의 피해를 입었다.
12월 27일, 군단의 주저항선 회복 명령에 따라 제3사단은 좌측에 제18연대는 제8사단의 증원부대로 군단에서 투입한 제7사단 제8연대와 병진공격하여 소양강 남쪽의 정자동 일대를, 우측의 제22연대는 어론리 북쪽의 하다물리를 확보토록 하였다.
12월 27일 새벽에 공격을 개시했으나 좌측의 제7-8연대의 가리산 북쪽으로의 진출이 지연되는 가운데 북한군 2개 연대 규모가 제18연대 정면의 천촌일대에 집결했다 미군의 항공폭격에 큰피해를 입고 부산되었다.
12월 29일, 결국 제18연대는 적을 소양강 북쪽으로 격퇴하고 정자동 일대를 점령하고, 제7-8연대도 소양강을 통제할 수 있는 물노리 부근에 진지를 제8-10연대에 인계하고 양덕원리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제3사단은 매봉-정자동-어론리를 연하는 주저항선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후 이 지역은 북한군 제10사단이 북한군 제2사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상수내리 부근으로 진출하고, 또 제3사단의 후방인 창봉리에 2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 패잔병이 활동하고 있어 양구-인제 남쪽의 소양강변은 언제 적이 공격을 재개할지 불안한 상황이었다. 수리봉 남전리
소양강 상수내리 신남
내평리 조교리
정자리
매봉 갑둔리 대암산
물노리 714▲
홍천고개 거니고개 김부리
장남리
소뿔산 가마봉 솔봉 상남
가리산 자은리
광암리 괘석리 백암산 가득봉
대룡산 홍천
창봉리
↓
(나) 현리부근 전투
자은리 북방의 소양강변에서 제3사단과 제8사단이 북한군과 접전을 벌이는 동안 현리 북방의 제9사단은 방어지역 일부를 제3사단과 수도사단에 인계한 제28연대를 원대리-현리에, 제29연대를 현리-하치전에 재배치 하고 제30연대는 예비로 창촌에 집결시켜 후방지역 경계를 하도록 하였다.
연대들이 12월 24일 하루종일 부대 재배치에 주력하자, 인제 남쪽의 오대산으로 진출을 기도하는 북한군 제2군단 및 유격부대들이 경계가 취약한 틈을 이용하여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먼저 서림의 제29연대 일부를 공격하고, 연대규모의 적이 현리로 진출한 제28연대 제2대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상남으로 분산철수 하게 되었다.
12월 26일 제9사단은 현리와 하치전에 진출한 적에 대해 경계태세를 강화했으나 적 3개 연대 규모가 매봉산-길향산-대암산을 연하는 산악을 따라 침투하여 제3사단 22연대를 공격하고 , 일부는 상남리 남서쪽 가득봉으로 진출하여 사단의 후방을 위협하였다.
국군 제9사단은 현리를 재탈환하고, 주저항선을 회복하기 위해 공격작전을 개시하였다. 적도 사단 후방지역으로 침투한 적이 광원리, 창촌을 경유 하여 오대산으로 진출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하여 사단은 전후방에서 전투를 펼치게 되었다.
사단은 전황이 불리하여 제28연대 제1,3대대는 현리를 공격했으나 공격이 돈좌 되었다. 그 우측방 제29연대도 감제고지인 872고지를 공격했으나 1개 사단으로 증강된 적에게 포위되고 그들 중 일부가 창촌-광원의 제30연대도 위협하였다.
12월 29일, 이에따라 국군 제1군단장은 수도사단장에게 제9사단을 지원토록 명령하였고 수도사단장은 사단의 좌측방 엄호를 위해 기갑연대 제2, 3대대를 하치전으로이동시키고, 제26연대 제3대대를 갈마곡봉으로 진출시켜 제29연대를 증원토록 하였다.
12월 30일, 제9사단은 수적 열세로 주저항선에서 철수하여 제28연대를 부봉-침교에, 제29연대를 상남리에 재배치 하였으며 이대 제22연대는 좌측의 제3-22연대가 철수하여 측방이 노출됨에 따라 적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격퇴하였다. 그리고 창촌-광원리의 제30연대는 수도사단 제26-3대대의 지원으로 침투한 적과의 전투를 벌이며 진지를 사수하였다.
(2) 미 제10군단의 재배치
아군은 12월 23일까지 38도선을 연하여 방어선을 점령하였지만 국군이 전담한 춘천 동쪽에서 동해안의 방어선은 광정면에 방어 종심이 앝아 취약점이 많았다.
이에 제8군사령부는 충주에서 재편성중인 미 제2사단을 긴급히 홍천-원주지역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미 제10군단은 흥남에서 철수하여 춘천일대로 투입하여, 중동부에 투입된 국군 3개군단의 방어정면을 축소시켜 주려 하였다.
그러나 미 제10군단은 부대별로 전선으로이동하는데 8~10일이 소요되어, 이때 제일 먼저 철수한 미 제1해병사단은 부산에, 미 제7사단은 경주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철수한 미 제3사단은 아직 3/4부대가 해상에 떠 있었다.
따라서 미 제8군은 축차적인 투입을 결정하고 먼저 미 제7사단을 제천 부근으로 이동시켜 미 제2사단과 협조하여 춘천,인제방면에서 횡성-원주로 침투하는 적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미 제10군단에 원주-제천-단양-안동에 이르는 보급로의 경계를 책임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마산에서 집결중인 제1해병사단을 31일 영천-경주-포항으로 이동시켜 제10군단의 예비가 되며, 미 제3사단은 평택-안성으로 이동, 미 제1, 9군단 지역에 투입할 준비를 갖추었다.
5. 미 제8군사령관의 교체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38도선으로 철수한 국군과 유엔군이 안정을 되찾고, 방어진지 편성에 주력하고 있을 무렵인 12월 23일 영 제27여단을 표창하기 윟해 지프차로 서울을 떠나 덕정(의정부 북쪽16km) 부근을 통과할 무렵 에상치 못한 교통사고로 전사하였다.
1950년 12월 26일 새로운 사령관이 "리지웨이 대장"이 대구에 도착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 미 육군에서 훌륭한 용장을 보내주어 우리 국군과 더불어 진심으로 장군을 환영합니다
리지웨이 : 저는 한국에 머물기 위해 왔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있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리지웨이 : 저는 공수부대 출신이며 하상 이런 복장으로 전투에 임해 왔습니다.
6. 조중 연합작전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으로 평양에서 강계로 임시 수도를 정한 북한은 중공군이 참전하자 중공인민지원 사령관 팽덕회와 협의하여 북한군과 중공군의 작전을 통합하기 위한 양군의 장교들로 구성된 연합사령부를 12월 상순에 설치 하였다,.
이 연합사령부의 설치로 양개 군의전술작전에 관한 기본적 의사결정을 연합사령관이 하게 하고 중공군이 최고 지휘권을 맡음으로서 중공군 팽덕회 사령관이 작전통제권을 행사하였다.
[여기까지 요약하고 장진호 철수작전과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회고록을 언급하겠다.]
중국이 본 한국전쟁,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전쟁 회고록을 요약하여 올라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