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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기서 이대로
信天함석헌
성경 요한복음을 읽은 거는-난 본래 요한복음을 좋아합니다. 성경 말씀의 어디에다가 문헌을 둬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내게는 요한복음이 좋습니다. 벌써 오래됐습니다만, 다른 어느 복음보다도 많이 읽습니다. 한마디로 그 이유를 말씀드린다고 할 것 같으면 예수님의 행적을 말하는데 다른 복음이 셋이 더 있지만 또 다 마찬가지 제목을 가지고 말씀 하는데도 그 특색이 다분히 내면적인 예수, 정신적인 면에서 본 예수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세 복음이 눈에 나타나 보이는-예수의 하신 일, 하신 말씀 그린 걸 소개하는 게 그 주목적인데, 반면에 이 요한복음이란 책은 주로 예수님이 속으로 어떻게 그 변화가 있었나 그런 걸 우리에게 될수록 알려 주려고 한 게 그 주목적이 아니었나 생각되어집니다.
물론 이런 걸 구절 구절 풀어서 말씀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체로 그런 걸 맘에 두시고서 오늘과 내일에 걸친 두 시간 동안에 말씀을 해볼까 합니다. 한마디로 쉽게 표어를 붙인다면 ‘이제 여기서 이대로’라고 붙여보고 싶어요. 우리가 평화운동을 하는데, 평화운동이 필요한 것은 사실인데 그럼 ‘어떻게 하느냐’하는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생각이 아주 어지러워져요 급한 일은 많은데, 어떻게 할 줄은 모르는 것 같고.
그래, 그런 걸 생각하면서, 또 내 심정이 그러니까 그런 걸 발표해 봤습니다.〈이제·여기서·이대로〉다!
물론 이 말은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뭐 말이 똑같지는 않지만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따온 것입니다. 지금은 톨스토이 소설을 읽는 분이 많은지 적은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젊었을 때는 거개의 웬만한 젊은이들은 다 읽었었는데, 거기 재미있는 얘기가 많잖아요?
그의 소설에 나오는 얘기들도 그렇지만, 또 그이의 생애가 역시 많은 걸 말해주고 있어요 여기 누가복음에 나왔던 것 모양으로 다 내집어 던지고 방탕에 빠졌다가 이제 거기서 돌아오려고 해서, 마지막에는 가정조차도 버리고 참다운 삶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되잖아요 그의 가정은, 세상말로 해서, 너무도 잘살던 귀족들의 집안이었으니까 ‘이웃을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왼통 다 버리고 민중의 한 사람-씨-이 되는 거길 들어가야 한다’하고 늘 오랫동안 두고 두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게 어려워서 못하다가, 나이 팔십이 돼서야 그 생각을 실천을 하게 되는데,정말 신앙을 위해 떠났을 때는 정작 몇 발자국 나가지도 못한 채 ‘야스아나폴리스’에서 그만 죽고 말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내 자신을 생각해도 그렇고, 현실의 모양을 생각해도 문제가 있기는 있는 데 그걸 어떻게 할지를 몰라 하는 게 우리들의 오늘 이 현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가운데 재미있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아요. 옛날에 한 임금이 있었는데, 정치를 해보니 잘 되지를 않아. 그래 말년에 가서는 ‘어느 시간이 정말 내게 필요한 시간인가?’ 또 ‘어떤 사람이 내게 참 요긴한가?’ 그리고 ‘내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세 가지 의문이 났어.
그래 그걸 누가 가르쳐 주면 좋겠다 해서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대답을 해주는 신하가 아무도 없어. 그래 그 임금이 화가 나서 “이놈들아, 이 날까지 내가 주는 녹(祿)을 먹으면서 나라 일을 한다고 해왔는데, 그래, 내가 정말 문제가 돼서 묻는데 그 대답도 하나 못한단 말이냐”하면서. 그렇다면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어느 늙은 신하가 대답을 하길 “제발 한 번만 참아 주십시오. 어느 지방에 가면 숨어 있는 훌륭한 성인이 있는데, 그이가 참 지혜롭다고 하니 거기 가서 한 번 물어 봅시다. 그래도 안되면 그땐 죽여도 좋습니다.” 그랬어. 그래 임금님이 행차를 차려가지고 신하들을 거느리고 그 하아미티지 (hermitage) ᅳ ‘은자의 집’을 향해 갔어요.
한참 가는데 도중에 임금을 죽이려는 놈이 숨어 있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요. 그래서 숨어 있던 놈이 신하들의 칼을 맞고 도망을 가는 일이 벌어져요. 그런 뒤에, 마침내 은둔자, 그 숨어있는 성인한테 갔어요. 가니까, 백발이 다 된 나이 많은 노인이 저 산골 속에서 사는데, 땀을 뻘뻘 흘리고 숨을 헐떡이며 힘들게 일을 하고 있어요. 그래 거기 가서 물어보는 거야요
“제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어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얻으려고 이렇게 왔습니다.”
“거 뭐냐?”
“나에게 있어 가장 요긴한, 놓쳐서는 안될 시간이 언제입니까? 그리고 나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또 내가 꼭 해야 될 일이 뭔지 그런 것을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늙은이는 대답은 안하고, 일만 수굿해서 자꾸 해요. 그래 몇 번을 더 물어요.
그런데 몇 번을 거듭해서 질문을 하게 되니까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또 그만 둘 수는 없고……. 그래 임금님이 “여보시오. 제가 좀 대신 일할랍니다.”하고, 자기 옷을 벗어 놓고는 대신 곡괭이질을 해요.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참인데, 갑자기 웬 사람이 “사람 살리라”고 고함을 치면서 피를 줄줄 흘리며 도망을 와요 상처를 입어서 피를 줄줄 흘리는데 참 위태로워요 그래 임금이 일을 하다가 말고 상처를 만져주고 수건으로 싸매줘서 피를 멎게 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엎드려서 “참으로 죽을죄를 졌습니다. 아까 임금님을 습격했던 놈이 바로 접니다. 임금님은 우리 아버지를 죽인 원수였습니다. 그래 임금님이 오늘 어디로 간다고 그러기에 아버지 원수를 갚으려고 칼을 품고 도중에 숨어 있다가 당신의 부하들에게 잡혀서 이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러한 나를 죽이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이렇게 간호해 주고 싸매 줘서 살려주니까 이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원수 갚을 생각일랑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시면 임금님의 충성스런 백성이 돼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러는 거야. 그런데, 그러노라니 이미 날이 저물었어.
그래 돌아가기 전에 그 성자에게 한 번만 더 물어봐야지 해서 “미안한 말씀이지만 아까 제가 물었던 것에 대해서 대답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하고 청했어요. 그랬더니 그 성인의 대답이 “대답 내가 이미 다하지 않았어?” 그래요 “아, 거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 한마디 말씀도 듣질 못했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시간이고, 당신에게 가장 요긴한 사람이란 저 사람이고, 또 당신이 해야 할 일이란 저 사람을 아주 힘껏 간호해서 살려주는 일입니다. 그러니 내 대답이란 이게 다가 아니고 뭐요”
이상이 톨스토이 소설의 대강 줄거리인데, 톨스토이가 그때 그런 얘기를 한 것은 자기가 느껴 깨달은 게 있어서야요.
자기도 귀족 집안에서 자라났는데 그 당시 재정 러시아가 타락이 잔뜩 돼 있고, 또 톨스토이는 러시아 사람만은 아닙니다. 그는 인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문명이란 것도 자꾸 잘못돼 가기만 하고……. 그래 이런 꼴을 보고는 그럼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떡하면 되겠느냐 하는 스스로의 속에 있는 의문을 생각하다가 그 대답을 발표한 거야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문제 해결을 하는 데는 별거 없다. 어디 멀리서 구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여기서 나우 앤드 히어 (Now and here) 그리고 ‘나대로 이 부족한 대로나마 나대로 하는 거다’ 하는 깨달음을 말한 거야요.
물론 톨스토이의 말에는 ‘이대로’ 라는 조건은 안들어 있어요. 그냥 ‘지금 이 시간에, 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 하는 거다’하는 그거야요. …(중략)
톨스토이 자신이 체험한-물론 그도 완전히 체험했다 그럴 수는 없을는지 모르지만, 어느 정도 상당히 체험한 것이 있어서 한 거야요
그러니까 나이 팔십이 되서야 겨우 마지막 용기를 떨쳐가지고 출가를 했는데 불과 몇 발자국도 못간 야스아나폴리스 역에서 죽었으니 그거 참 기막힌 일이 아니야요?
이제 우리의 형편을 생각하면 어느 땐가는 우리 속에 평화에 대한 그 확신이 들어와야겠는데 확신을 내가 참 체험까지는 못하고 “아무래도 이게 옳지 하는 정도만으로는 안 돼도 참 체험의 길로 나가는 사람은, 제가 분명 제 몸으로 겪은 사람은 세상없어도 ‘난 이것이 진리다’ 하고 진리를 위해서 자기가 죽는 그 자리, 순교의 자리까지 가는 사람은 헤프게 말은 아니 하는 법입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아직도 자신은 체험에 가지도 못한 사람.
사람이란 체험에는 못 갔으면서도 이성이 있기 때문에 남이 한 체험을 “야아! 이거 참 좋은 말인데. 그거 참 좋은 말인데!” 할 수가 있어요.
그럼 그게 좋은 말이라고 해서 나가서 자꾸 떠들어 대기만 하면 그 일이 되느냐 하면 그렇게는 안돼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데, 특히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물론 그렇게 되는 데는 훌륭한 복음을 받았다 싶어서 “내가 이 복음을 알았으면 다른 사람에게 전해줘야지”해서 그러지만, 이 복음이 제 속에서 미처 체험이 되기도 전에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과일이 좋다고 해서 그것이 채 익기도 전에 참지 못하고 따먹는 것과 마찬가지야요.
참 과일을 먹으려면 먹고 싶은 걸 잘 참고 참아서 잘 익었을 때 먹어야, 또 먹어서만 먹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간이 오면 무르익어서 향기나는 열매를 먹어야지. 과일이란 건 처음에는 요만한 것이 열어서 쓰고 신 맛이 입에 넣을 수도 없지만, 그때부터 몇 달을 두고 그걸 날마다 날마다 지켜보면서 거름을 주고 약을 주고 하는 그게 다 먹는 그 일이 아니야요?
그런데 어찌 생각하면 사람의 이성이라는 거는 일의 결과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어떻게 요럭하면 나도 될 수 있지 않나’하고 생각하게 마련이야. 그러나 그건 생각의 동기는 옳은 것 같으면서도 잘못된 데가 있는 것 아닐까?
형상화된 하나님 - 거짓 하나님
아무튼 오늘날 우리나라의 세상 돼가는 모양도, 세계의 살림살이 모양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여기 이 시점에서 어떻하면 될까 하는데 매달려서 씨름을 하노라면 그 ‘어떻게 하면’을 생각하는 동안에 그만 세월 다 가고 사람 다 놓치고 또 할 일 다 잃어버리고 말아요.
사실 정말로 우리 맘속에 딱 옳은 생각이 들기만 했다면「이제」이 시간에, 나 있는 「이 자리에서」,또 내가 부족하지만「이대로」하는 거야요. 왜냐하면 일을 해도 내가 하는 게 아니니까.
일을 하는데 있어 내가 하면서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내가 하기는 하면서도 내 전체를 들어서 하지 내 몸 어느 한 부분이라도 내버리지 않고 내 자신으로 하는, 그래서 이만하면 어지간히 했지 하는 이런 따위 시시한 생각들이 안 나게끔 되는 그 점이 어려운 거야요.
그러나 어렵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거고, 또 그렇게 하는 게 정말 ‘순교’요 정말 ‘운동’ 이야요.
우리 맘이 그런 자리에까지 가게 될 수 있는 데는 한편으로 하면 수련을 쌓아야 되기도 하지만, 또 수련만 쌓는다고만 되는 것도 아니야. 그래 이 말이 이렇게 길어서는 건 “우리가 참의 그 자리를 바로 드려다 봤다면 이런 따위가 어려워서 그러고 있을 것이 아니다. 아직도 한가한 생각이 있으니까 이러고들 있지” 하는 내 그 기분을 고백하려니까 그러지, 본래는 말을 안하는 거야요.
노자의 말이 옳아요 ‘지자불언이요 언자부지(知者不言, 言者不知)라, 아는 사람은 말 아니하는 거고, 말하는 사람은 뭔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거는 아직도 채 몰라서 그런 줄을 알아요. 또 현실의 모양이 이러니까 말 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 말하게 될 때는 아직도 내가 부족하니까 그 죄 값을 당하느라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내세우시지 하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을 하게 되는 게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잘못한 죄 값에 이러는구나. 그래 어떤 때는 이렇게 말하려 나서게 될 때는 또 십자가를 져야지 그런 소리를 해요.
십자가란 소리를 하면 우리 선생님 생각이 나요 우리 선생님, 한 2년 전에 돌아가신 훌륭한 선생님 계십니다만, 아침이면 냉수마찰을 해요. 그래 아침에 냉수마찰을 하러 나가면서 이 어른이 “또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지” 그러셔서 우리가 다 함께 하하 웃었어요.
냉수마찰 하나를 하는 것도 십자가를 질 그런 각오를 하고서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걸 보면 ‘참’으로 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걸 알 수가 있어요-이제 이런 얘기는 그만하고 오늘 할 얘기를 합시다.
오늘은 ‘국가와 종교’에 대해서 말해봅시다. 왜 ‘국가와 종교’인가 하면 우리 현실 문제를 요약하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거야요.
사람이라면 누구나「나라」라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 없잖아요? 또 ‘종교’,종교 믿지 않는 사람 없어요. 사람인 다음에는 종교 안 믿을 수가 없어요. 무신론자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 ‘무신론’ 이라는 종교를 믿을 뿐이지, 그 사람종교 없는 것이 아니야요, 종교가 없다면 아마 그 사람들 ‘무신론’소리도 안 할 겁니다.
당초 무신론이라고 해서 핏대를 올려가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그러면 그건 굉장한 종교의 열심에서 그렇게 하는 건데, 나라 없는 사람 없고, 종교 안 믿는 사람 없고-. 그래서 벌써 수십 년 전에 한 말입니다만 ‘존재하는 종교’란 말을 해봤어요. 철학에 실존철학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그말 할 적에는 아직 실존이란 말이 나오기 전인 1947년에 그 말- ‘존재하는 종교’라 그래 봤습니다.
그때 ‘존재하는 종교’라 그랬던 것은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사람이란 다 믿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해서 그랬던 겁니다. 하나님을 믿거나 부처님을 믿거나 참으로 믿는다는 것은 주격을 붙일 수도 없고 목적격을 붙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도 그거는 거짓말이고, 또 ‘내가’ 믿는다 그래도 그건 잘못이고-.
왜냐하면 참으로 믿는 자리는 하나가 되는 자리,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되는 자리기 때문입니다. 나 따로 하나님 따로가 돼서 서로 건너다보고 있는 자리라면 그걸 어디 믿는 자리라고 그럴 수가 있어요? 말로 하니까 내 ‘신앙’이라 그러고,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지만 참 의미에서,자기가 정말 정말 믿는 자리에 갔으면 ‘나 믿는다’하는 그 생각조차도 없어질 것 아니냐!
우리가 보통 ‘하나님’ 이라고 그러지만 내가 내 생각 나름으로 해석을 해서 말하는 하나님 그건 참 하나님은 아니야요
‘우상’이라고 그러지만 나무로 깎아 세운 것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깎아 세운 우상은 그것보다 얼마나 더 많은지,얼마나 더 지독하게 단장을 하는지, 얼마나 더 지독하게 우리를 속이는지 몰라요 사람이란 사람인 다음에는 생각을 할 때는 무슨 형상을 그리지 않고는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 생각을 할 때 좀 반성을 해보시오. 조금 생각을 해보시는 분은 알거야요"
그런데 생각이란 것은 거기 그림이 붙을 수가 없는, 무슨 표상이란 것이 거기 붙을 수가 없는 것인데 사람은 생각을 할 때는 표상을 내놓고는 생각을 못한단 말이야. 그렇지만 그림으로 하는 그 생각은 아직도 진짜 생각은 못되는 거. 구경자리에 도달하고자 할 때 중가운데 뭐가 거치장거리는 게 있는 것과 같지요. 우리가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쓸데없는 생각을 다 버리고 참 생각을 생각해 보도록 노력을 하면 할수록 누구든지 다 경험 해 보시는 걸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런 걸 생각하는 인간, 사람은 생각하기 때문에 귀한 것이지만, 생각한 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자꾸만 거짓에 속아버리는 거야요. 참이 아닌 것에, 내 생각에서 나오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참인 것처럼…… 내 속에서 나온다고 할 때는 벌써 참 그대로의 모양이 아니야요 내가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할 때는 그것은 벌써 하나님이 지녀가지고 계신 자죽이지, 하나님은 아니야요 참으로 하나님을 느끼려면 그 자리를 내가 말로 할 수도 없고, 또 형상으로 할 수도 없고 하는 무슨 거길 도달해 봐야 돼요.
그런데 우리가 체험이라고 하는 자리가 또 따지고 보면 그렇고 그런 그 자리가 아니야요? 그러니까 깊은 이들은 사람으로 세상에 났으니까 말 안할 수 없어 하기는 하는데, 자기의 체험한 것을 말로 하지는 않아요.
말로 하면 받는 사람이 그걸 옳게 받아야겠는데 옳게 받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예수님이 비유가 아니고는 말씀을 안 하셨다 그랬어요.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나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걸 보고 들은 것 외에는 내가 하는 것이 없다 하는 것을 실지로 삶으로는 그대로 나타내 보일 수가 있지만 그걸 말씀으로 하시면 예수님의 마음 그걸 그대로 표현해 보일 수가 있는가 하면 그건 아니야요 그걸 말로 해놓으면 들을 때는 다 아는 것 같은데 듣는 이는 다 제 나름대로 제 정도를 벗어나지 못해요. 그러니 그건 어쩔 수가 없는 거야요
성현의 말씀도 성현이 살고 간 삶의 찌꺼기
장자에 나오는 유명한 얘기가 있어요 장자 ‘천도편(天道)’에 나오는 얘기지요.
환공독서어당상, 륜편착륜어당하, 석추착이상, 문환공왈, 감문공지소독자, 위하언야? 공왈, 성인지언야 왈, 성인재호? 공왈, 기사의. 왈, 연즉군지소독자 고인지조박이부. 환공왈, 과인독서,륜인안득의호. 유설측가, 무설측사. 륜편왈, 신야이신지사관지. 착륜서 측감이불고, 질측고이불입. 부서부질,득지어수, 이응어심. 구불능언. 유수존어기간 신불능이유신지자. 신지자역불능수지어신. 시이행년칠십이노착. 고지인. 여기불가전야사의. 연즉군지소독자,고인지조박이부
桓公讀書於堂上. 輪遍斲輪於堂下, 釋椎鑿而上. 問桓公曰,敢問公之所讀者,爲何言? 公曰,聖人之言也. 曰, 聖人在乎? 公曰, 已死矣 曰,然則君之所讀者,古人之糟魄已夫. 桓公曰,寡人讀書,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無說則死. 輪扁曰, 臣也以臣之事觀之. 斲輪徐, 則甘而不固. 疾則若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而應於心,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間,臣不能以喻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年七十而老斲. 古之人與其可傳也死矣. 然則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莊子 天道〉
이건 무슨 말인고 하면, 제나라 환공이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 할 수 있을까 해서 옛날 성인의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뜰 아래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던 늙은 목수가 환공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서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그 책이 아무리 성인들의 말씀을 적어놓은 책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인 자체는 아니며 다만 그들이 살다가 간 허울뿐이니, 그걸 읽고만 있는다고 해서 어찌 일이 제대로 되겠느냐 하는 뜻의 말이지요. 참 재미있는 글이지요.
환공이 성인의 글이라고 열심으로 읽고 있는 것을 보고 뜰 아래서 수레바퀴를 다듬던 늙은 목수가 연장을 터억 놓고는 물었어요.
“거 뭘 읽고 계십니까? ”
“이놈아. 성인의 말씀이다”
“성인이 지금 살아계십니까?”
“다들 가셨지.”
“예에. 그럼 그거 다 살고난 찌꺼기로군요/"
그래 화가 난 환공이 “이놈아. 네놈이 목수인 주제에 성현의 말씀을 읽고 있는데 뭐가 이러고 저러고 잔말이 많으냐! 네놈이 만약 그 잔말에 대한 근거를 댈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모가지가 날아갈 줄 알아라!” 그랬어요 그랬더니 이 늙은 목수가 뭐랬는 줄 아세요?
“예. 내가 지금 그 말씀드리는 것은 내 하는 일을 보고 느낀 게 있어서 하는 겁니다. 내가 수레바퀴를 깎아서 쇠테에 맞춰 넣어야 하는데, 요놈을 좀 푹 깎으면 홀가와서 빠져 버리고 또 좀 빠듯하게 깎으면 되차서 들어가지가 않습니다. 홀갑지도 않고 되차지도 않게 꼭 알맞게 깎는 것은 내 손이 하는 것인데 내 손이 하면 알기는 알겠는데 그걸 말로는 당초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걸 말로 해서 알아들을 수 있다면 자식놈이 벌써 나한테 물어봤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내 나이 칠십이 되도록 이 노릇을 해먹는 거는 내가 알기는 경험해서 알겠는데 이걸 말로 할 수가 없어서 아직도 이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그 성현의 말씀이란 것도 그 성현들이 살다가 간 찌꺼기일 뿐이지 그게 곧 성현 그대로는 아닐 겁니다.” 그랬어요
장자의 말대로 한다면, 이거 아주 못 할 말이지만 여기 ‘모세오경’이 있다면 그건 모세가 살다간 찌꺼기지, 모세는 아니야요 또 ‘요한복음’이 있다면〈 ‘요한복음’은 요한이란 사람이 예수를 살고 난 찌꺼기지 그 ‘요한복음’이 곧 예수는 아니야요. 이런 말로 본다면 요즘 글이란 것들은 더구나 형편이 없는 거야요. 요즘 글 쓰는 이들 가운데 이 글을 쓰면 내 명예가 좀 올라가지 않을까, 또는 원고료는 얼마 나올까하는 이런 따위 생각 없이 글쓰는 사람 어디 있어요? 명예와 타산을 않으면 권력과 타산을 하고, 권력과 타산을 않으면 돈과 야합을 하고…… 그러니 요즘 글 쓴다는 것들 그 마음이 어디 순수한 지경엘 갈 수가 있겠어요? 어느 정도 접근을 해서 뭣이 희미하게 보이는 게 있기는 할런지 몰라도 그게 구경의 참 그 자리는 아직도 못간 거.
그런데 사람이란 또 참 자리 거기까지는 아직 채 못 갔으면서도 뭣을 어렴풋이는 알 수가 있잖아요. 그래 이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다는 데에 또 문제가 있어요 어느 의미로 하면 어렴풋이나마 안다는 건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모를라면 차라리 아주 모르는 게 나아요 왜냐하면 아주 모르면 답답은 해도 그래도 참는 지경은 나오겠는데 어중간 하게 알아놓으면 거 참는 지경조차 없어져버려요. 가령 우리가 예수를 믿는데도 그래요 목사님들이 예수님을 참으로 체험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기도 아닌 비슷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니까 우리가 그만 거기 깜박 속아서 잘못되곤 해요. 믿는 사람들이 “아, 나 우리 목사님 좋아, 우리 목사님 한 대로 나도 하면 되겠지” 그래서, 목사님이 기독교가 제일이라 그러니까 나도 그냥 덩달아 기독교 제일이라 그러고 말아요. 기독교가 제일이라면 왜 그게 제일인지를 내가 참으로 체험을 해서 몸으로 겪어서 알아야겠는데, 우리 믿음이 지금 그렇질 못해요.
그러니 이때껏 믿어온 것이 잘못 알고 요 목사를 믿었지, 목사라고 하는 그 거짓말장이 허 울을 믿었지,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란 말야.
도대체 지금 세상에 이렇게 안 된 종교가 어디 있을까, 이렇게 안 된 신앙이 어디 있을까, 이렇게 안 된 국가가 어디 있을까? 이런게 현실의 우리 아주 딱한 문제라 그 말이야.
비교적 나도 생각을 하노라 하니까, 또 이제 죽을 날도 가깝고 하니까, 이제 저기가 차차 조금은 내다보여요 아주 완전치는 못하지만 젊을 때보다는 조금 가까워졌어.
그러니까 삼십년 사십년 전부터 하는 말입니다만 우리 살림살이란 게 온통 어릿광대-광대 중에서 참 광대도 못되고 어릿광대 짓이야요. 그렇지 못해서 그렇지, 참 그 자리엘 갔다면 소위 이런 따위 말이 끊어질 거 아니냐! 끊어지자고 해서 끊어지는 게 아니라 저절로 끊어질 거야요. 저절로……
‘저절로’라는 게 중요한 거야요 내가 정말 참 하나님을 믿는다면-하나님이 주신다는 건 내 속에 받는 줄 모르게 오는 거. 그거 중요해요
세상에서 받는 거는 대통령한테서 받은 거라면 대통령한테서 받았다든지, 국무총리한테서 받은 거라면 국무총리가 줬다든지, 누가 줬는지를 분명히 알아요. 준 저도 알고, 받은 나도 알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해가지고는 그거 참 준 것도 아니고 참 받은 것도 아닌, 협잡이 왼통 거기서 나와요
왜? 주는 게 그 사람이 줬나, 그 사람이 숭배하는 명예란 게 있어서 그 명예란 게 줬지, 또 받을 때 내가 그 사람보고 받았나, 그 사람 지위를 보고 받았지.
세상에서 주고받는 걸 보면 그 중간에 속이는 엉뚱한 게 있어요. 사탄이라고도 하고, 마귀라고도 하고, 욕심이라고도 하는 여러 가지 말로 그럽니다만 그런 게 거기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것조차 미처 생각을 못하고 있을 때가 많아요.
일과 일이 지닌 뜻과는 서로 다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제 얘기를 ‘국가와 종교’라고 둘로 요약해서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현실 문제를 접근해 가는데 있어, 그것이 비록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비교적 문제에 가까이 접근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일본 분들이 참 여러분이 오셨어요. 그러니까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지, 내 아주 이상한 것이 있어요. 지금 이 자리에 나와서 말할 때 내가 일부러 마음을 지어먹고 이러니 그럽니다만, 왜 그런지 요새는 생각이 일본 말로 나와요 요즘이야 뭐 일본말로 된 조그마한 잡지들을 더러 뒤적거리기는 합니다만, 그전 일본시대 같이 그러지는 않는데 ……
일본시대 때는 물론 내가 사상을 해도 일본 말로 했어요. 생각하길 일본 말로ᅳ. 왜? 교육을 다 그걸로 받았으니까.
그러나 그동안 수십 년을 안했는데, 일본 분들이 오신다, 그러니까 왜 그런지 요새는 일본 말로 생각을 하고 있어.
그래서 요즘 내가 ‘왜 이러지’ 그랬는데, 하여간 여러분들이 이렇게 오셨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만나서 무슨 말을 했다는 거 아니라 온다고 하는 사실 그게 큰일이야. 왜 왔지?
그런데 사실은 ‘무슨 생각’ 따위는 문제 안 삼아도 괜찮아요, ‘뭘 할려고 왔지’ 그것쯤은 문제 안 삼아도 괜찮아요.
그렇지만 어쨌거나 여길 십여 명 사람이 오셨다는 것, 우리로 봐서는 별치도 않은 이 모임인데, 저분들이 여길 참석했다는 사실 그걸 우리 피차가 생각할 점이야요. 왜냐하면 어떤 일이 됐다면 거기 그 됐던 과정에 뉘 손가락이 들어갔던가는 문제가 돼. 된 일은 ‘다 하나님이 하신 거다’ 난 이제 그렇게 믿는 사람이야요. 거기에 ‘잘된 일’ ‘못된 일’하는 게 없어요. 믿는 사람인 담에는 무조건 믿어야 돼. 난 무조건 믿어요.
물론 누구 못잖게 ‘이놈의 세상이 왜 이렇지’하고 탄식도 하고, 또 서울을 어서 탈출해서 시골로 내려가야겠다. 그런 생각이야 왜 없겠어요?
그렇지만 참뜻을 말하면 ‘왜 이러지?’ 그러면 그건 ‘잘돼 가느라 그런거요, 옳게 돼 가느라 이러는 거요.’ 그래야 된다는 거요 그렇다고 이걸 또 ‘그렇게 믿어야지’ 하고 억지로 생각해서 그러는 거는 잘못이야요. 억지로 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냐? 정말 믿는다는 것이 뭐냐?’그 생각을 하다보면 자연히 그런 자리엘 갈 거야요.
우리가 믿는다는 것의 목적은 우리 마음이 바로 이런 자리에 가도록, 완전히는 안될지 모르더라도, 돼 가는 일은 내 마음에 맞잖고 꼴사나운 일이 많지 만일의 뜻을 생각을 하면 일이 바로 되느라고 그러는 거다 하는 자리까지 가자는 거야요. 그러니 일 하고 일이 가지고 있는 의미 하고는 혼돈하지 마시오.
다른 동물이나 다른 물건들한테는 일이 있으면 일 그대로 있을 뿐이야요.ᅳ 가령 비가 오 면 저 나무한테는 ‘비가 왔다’는 그 사실만 있을 뿐이지만,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비가 왔다’는 그 사실도 알지만 ‘이렇게 되면 수해가 나겠다든지 곡식에게 피해가 많겠다’ 하는 사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가 와서 태풍이 온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냐 하는 것까지 캐는 거야요.
우리는 역사를 가지는 사람들이라 ‘역사’란 사건을 단위로하지만, 당한 다음에는 ‘그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나’ 그걸, 그 의미를 찾기 시작을 하면 한이 없어요. 그건 무한한 거야요 그 의미를 나는 어떤 때는, 물론 그게 부족한 말인 줄이야 알면서도 일부러 해보는 말입니다만, 그걸 ‘하느님’ 이라 그래봅니다. 또 때로는 하나님을 ‘의미, 뜻’ 이라고도 표시를 해 봅니다. 아무리 무신론자라 그래도 그 사람이 종교를 믿는다고 하는 건 바로 그거야요. 사람이란 뜻이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물론 어느 편으로 보면 먹기 위해 사는 것 같기도 하지요 그래 죽은 자식을 안타까워하는 어머니가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하고 죽었구나” 그랬어. 그거 얼마나 불쌍하게 살았으면 그랬겠어요? 그것이 현실이지만, 그래도 거기 맛있는 것도 한번 먹어보지도 못했구나 하는 어머니의 생각이 정말 먹는 것을 ‘하늘’로 삼아서 그러느냐?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 어머니도 자기도 모르게 그 뒤에 가 있는 데가 있어요. 그 여자는 자기의 그 말을 다 속임 없이 말했겠지만 듣는 사람으로서는 그것을 어떻게 듣는가가 있어요. 그 말을 바로 들었느냐, 제대로 못 들었느냐가 있어요. 듣는 그것이 중요해요 그걸 공산주의자들이 들으면 ‘그 사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죽게 된 것은 그 사람이 잘못이라기보다 이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이 사회가 얼마나 나쁜 사회냐?” 그렇게 생각 할 거야요. 또 가령 요새 우리나라 모양으로 칼을 들고 전쟁하는 걸 주로 생각하는 군인들이 이걸 보고서 생각한다면 “그건 다 우리나라 사람이 전쟁에 졌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 이제라도 군대를 강하게 해가지고 원수 놈들을 바로 해치워야 한다.”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사람이란 일을 당하면 그 일만이 아니라, 그 ‘뜻’이 뭐냐 하는 게 중요해요. 그런데 그 뜻의 깊이가 한이 없어요. 그 깊이를 느끼게는 게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야요. 내 마음의 생각, 내 믿음의 깊이가 얼마냐에 따라 천차만별이야요.
우리가 생각이 부족하니까 “몰라요, 우리 뭐 그저 이렇게 살아가면 그만이지요” 그러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몰라서 자신을 내버리는 생각이고, 사람이 사람인 담에는 “왜지? 이거 어째 금년에도 이렇지?” 그 뜻을 파고 들어가야 해요 그 뜻을 파는 데는 뭐 비단 우리만이 아니라, 저 니콰라가이라든지 볼리비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도 그걸 생각지 않을 수가 없어요. 남의 나라라고 해서 그 일이 남의 일이 아니야요
지나간 일이지만, 얼마 전에 미국에서 리비아에 우리나라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하는 말이 있었는데,나는 그때 “또 우리가 월남에서 모양으로 이번에도 잘못하지 않을까”하고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파견하지는 않았어요.ᅳ 그런데 그런 때에도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번만은 참 잘됐다” 그러더군요. 그런데 월남파병 때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조차도 반대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일이란 그 결과를 놓고는 누구나 다 그 잘잘못을 구별할 줄 알아요. 그러나 그 일이 시작되려고 할 때 그 일이 할일인지 아닌지 그 의미를 아는 그게 정말 의미를 아는거야요 예언자라는 사람이란 게 그거잖아요? 일이 되기 전에 그 의미를 미리 아는 거 그게 예언자의 일이란 말이야요.
물론 지나간 일이라고 하드라도 그 일의 의미를 캐보는 것이 캐지 않는 것보다야 좋지만, 될 수 있으면 사전에 그 일의 뜻을 옳게 파악해서 역사의 의미를 붙잡는 것이 좋은 일인데, 지금의 우리에게는 이런 것이 많이 흐려져 있어요.
그래, 우리의 삶에서 일의 뜻을 캐보자는 겁니다.
경직화된 ‘국가’ 와 ‘종교’ -현대의 문제
지금 우리의 사는 걸 놓고 그 뜻을 캐보자고 한다면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국가’와 ‘종교’의 두가지야요 이 두가지가 오늘날이 시대 이문명의 모양인데, 이 문명은 어떻게 된 문명이며, 어디로 가는 것이며 또 무슨 의미로 하는 거냐 하는 걸 우리가 사람인 담에는 그 생각이 있어야 돼.
그런 걸 생각하다보면, 세상은 아주 발달이 돼서 굉장히 진보됐다고 그러는 세상인데도, 그러나 이 문명의 의미를 생각하는 점에 있어서는 옛날 사람들보다 요즘 사람들이 훨씬 뒤 떨어져요. 수적으로 보거나 그 깊이에서 보거나 간에.
아무튼, 국가와 종교의 문제에 대해 한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도대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종교가 네 종교 내 종교만이 아니라도 대체 이 인류의 종교라는 것, 그리고 이 국가라는 게 틀려먹었다 그겁니다.
사람이란 안팎으로 된 존재인데, 그 살림살이를 바깥에서 보면 ‘국가’이고, 안에서 하면 ‘종교’ 야요.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제도화, 인스티튜션날리제이션(Institutionalization)하지 않을 수 없지요.
종교라는 거는 바로 우리의 속 살림의 Institutionalization 이며, 국가란 것은 우리의 겉살림을 제도화한 거야요.
물론 ‘제도’가 없으면 좋지만, 우리가 다들 부족한 탓으로 그것이 전혀 없을 순 없으니까 퀘이커(Quaker)같은 사람들, 또 무교회 같은 사람들이 서로 일치하는 점은 될수록은 그 제도를 간략하게 하자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제도가 한 번 굳어지면 그 다음에는 적응을 못하니까 자꾸 폐해가 생겨요. 만들 때는 아주 훌륭하게 만들어도, 또 훌륭하게 만들면 훌륭하게 만들었을수록 시대에 적응을 해서 고쳐나가야 될 것을 고쳐나가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렇게 되면 또 그렇게 될수록 그 폐해가 아주 많아져요. 역사에서 가톨릭이나 성공회의 경우를 봐서 우리가 그걸 알 수가 있어요.
내 말에 의문이 날줄도 압니다만, 그래도 이런 점ᅳ국가주의에 문제가 있다는 이걸 생각을 못하고 있다는 것은 크게 잘못이야요. ‘나라’가 옛날에도 이랬는가 하면, 그거 그렇지는 않았어요. 동양도 그랬고 서양도 그랬고, 막연한 복고주의가 아니라, 옛날로 올라 갈수록 그때 정치는 참 좋았어요. 잘살고 못살고 하는 차이도 그리 심하지는 않았고, 임금이요 신하요 그러지만 거기 권력의 차이가 심하지도 않았고, 또 전쟁을 해서 사람을 많이 죽이는 때도 있었지만 전쟁을 하는 때는 전쟁을 하더라도 평상시의 살림이 전쟁하는 것처럼 늘 이렇지는 않았어요.
전쟁이란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소리지만, 옛날에는 전쟁하는 때는 전쟁을 하지만 평상시 에는 그렇지가 않았어요. 그러나 요즘은 어디 그래요? 요즘은 전시거나 평시거나 왼통 우 리 살림살이가 전쟁만 하는 시대가 되버렸어요. 그럼 오늘날 국가의 꼴이 어째서 이렇게 됐나?
그걸 한마디로 한다면 소위 이놈의 ‘세속화’ 라고 하는 것 때문이야요.
인본주의 - 사람이 곧 역사의 주체란 자각
이 ‘세속화; Secularization’것은 17,18세기에서 비롯되어 19세기에 들어와서 자리 잡기 시작한 거야요.
이 ‘세속화’-인류가 모든 가치관을 세속화 시켜가는 과정에서 큰 것은 ‘인간의 발견’이란 거야요
그전에는 사람들이 “우리는 사람이다. 나도 사람이다”하고 사람으로서의 자기 주체성을 내세우는 그런 건 없었어요. 오늘은 뭐 ‘인간’이란 말이 하도 유행이라서 철학에서도 ‘인간철학’ 또는 ‘인간학’ 그러더니, 요센 뭐 ‘인간공학’이란 말까지 있습니다만, ‘인간’이란 소리 그전에는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어요. 19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인본주의’ 란 말이 나돌게 됐고, 그리고 그 ‘인본주의’라고 하는 말이 내 청년시절인 1차 대전 때까지만 해도 대단히 좋은 뜻으로 쓰인 말이었지요.
왜 그런고 하니, 도대체 1차 대전이란 것이 뭐냐하면 소위 거 ‘제국주의’란 것을 신봉하는데서 터진 싸움인 거지요 욕심 때문에, 강한 나라들이 자기네 식민지를 서로 먹으려고 하던 데서 나온 싸움이거든요.
그럼 제국주의가 어째서 서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리게 됐느냐 하면, 물론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는 역사는 곧 국가의 흥방에 관한 기록이었다는 역사관 때문에 ‘어쨌든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강대해져야만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그럴 수 있어요.
그래 이런 1차 대전을 겪어보고 나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아니다. 역사의 주체는 사람이지, 나라가 아니다”해서 이제 인본주의가 나오게 된 거야요.
그래 자연히 모든 걸 사람에다 초점을 맞추게 됐지요 철학에서도 그전에는 하늘이 어떻다든지 임금이나 제왕이 어떻다 또는 저세상이 어떻다 하는 그런 걸 주로 제목으로 삼았지만, 인본주의가 나오면서부터는 여기 있는 이 ‘인간’이 문제다 하고, 생각하는 초점이 바뀌게 됐어요.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발견해서 “우리는 사람이다”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참 좋은 일이야요.
그런데 거기 인본주의에 크게 하나 잘못된 것은 ‘인간이 세계의 전부다’하는 쪽으로 흘러버린 거야요. 그래 한 동안은 사람들이 ‘하느님이다, 부처님이다’하는 것들은 “알고 보니 거 모르던 때 무식해서 나온 소리지, 알고 보니 여기 있는 인간 자체가 곧 세계의 주인이다”하고 말하게끔 됐어요. 뭐 ‘인본주의'란 말이 ‘인간’이란 말이 일대 유행이었지요. 그것은 마치 정치에서 ‘데모크라시’가 옳다. 그래서 너도 나도 이것도 저것도 ‘민주주의’라고 하여 마침내는 우리 보기에도 민주주의에는 반대되는 정치를 하는 공산주의자들조차도 다 자기들은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한때는 ‘인본주의’란 말이 어디 안가붙는 데가 없었어요.
뭐 민주주의란 말이 나와서 그런데 이시대의 말씀이 왼통 ‘민주주의’란 말에 집약이 됐어요. 이렇게 된 것은 물론 우리 정신이 그전보다는 높은 데로 올라간 거야요. 민주주의란 것은 글자 그대로 ‘민’ 곧 ‘씨’을 역사의 주체로 본다는 것인데 이건 참 옳은 말이야요. 그러나, 인본주의라고 해서 세계 모든 것이 인간 이외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이야요.
그런데 거기 인본주의에 들어있는 그 잘못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따끔하게 지적해준 사람이 없었어. 그래 이제 그런 것들이 차차 문제가 되고 있단 말이야요.
그렇기 때문에 인본주의란 것이 그렇게 유행처럼 돼서 “아, 하나님은 없다, 기독교 너희가 하나님이라고 그랬던 것 그것 다 미신이다. 우리는 인간본위다. 이거야말로 문명한 사람의 세계관이고, 자각한 인간들의 가치기준이다”하고 큰소리 쳤지만, 그게 불가 수십 년 만에 그만 쏙 들어갔어요. 그래 요즘 인본주의자들에게 묻고 싶은 거는 “이제 인본주의를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또 소위 인본주의로 했다는 세상이 그럼 그이전보다 더 좋은 세상이 됐단 말이냐?”하는 거야요.
사실을 말한다면 오늘의 정치와 종교가 인본주의 처음 나오던 그때보다도 더 비인간적 이 야요.
그럼 이제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며, 또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이 오늘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세속화’란 말이야요.
당초 오늘의 문제가 나오게 된 잘못이 어디에 있느냐 그러면 그건 ‘종교개혁’에서 나왔어. 물론 종교개혁 자체가 잘못이란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이 시작될 때는 당연히 나올 것이 나와서 제 해야 할 일을 다 했었어요. 다시 말하지만 ‘종교개혁, The Reformation,다시 reform 한다, 다시 신생한다.’한 것은 참 잘한 거야요.
그러나 Reform의 내용이 문제야요. 다시 신생한 내용이 뭐냐 그러면 사실은 하나님은 세계에서 빼내버리고 오직 ‘사람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이고 사람만이 다시 신생한 거야요.
그래서 한동안은 배웠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건, 이 인본주의란 것은 인간의 자기 발견이다” 그러면서 아주 자랑을 하고, 또 높은 철학으로 생각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1차 대전,2차 대전,그리고 2차 대전 이후 오늘까지 전쟁 아닌 전쟁을-우린 지금 전쟁 속에 살고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전쟁이 아닌 것처럼 속이고 속으면서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 이건 전쟁 아닌 전쟁인데- 이 전쟁 아닌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걸 보고서야 차차 생각이 달라진 거야요.
그럼 이런 것이 다 어디서 나왔나?
그건 바로 인본주의-우리가 하나님이라는 미신 속에 살다가 보니까 문학을 해도 참문학을 못했고 음악을 해도 참 음악을 못했는데, 사실은 인간 자체가 주체요 뿌리니까 이젠 철학을 해도 인간을 위한 철학, 예술을 해도 인간을 위한 예술을 해야 하는 이것이 문명의 첨단을 걷는 것이다 하고 잔뜩 기세를 올려서 떠들었던 결과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중가운데 내 한 말씀 집어넣을 랍니다.
뭐냐하면, 이 앞으로는 달라질 거야요. 종교도 많이 달라질 거고, 정치는 물론 달라져야 하고.
종교혁신-정치혁신을 위한 전제
그런데 정치가 달라져야 하는 데는 종교가 달라지기 전에는 정치가 안 달라질 겁니다. 왜 안 달라지는고 하니, 옛날에는 사람이 일을 하는 데는 사람의 인력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일이 자연의 힘만이 아니라, 거기에 초월적인 어떤 힘을 합쳐져서 된다고 생각했어요.
아닌 게 아니라, 가령 풀이나 나무 또 이 우주의 되어 가는 일은 소위 ‘법칙’이란 것이 있어서 아주 ‘내추럴 (natural)’ 한 ‘프로그래스(progress)’ 로 됩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사람들의 일은 사람들이 요 기계를 발명해내고 난 뒤 부터는, 더구나 핵에 관한 지식이 발달된 다음부터는 물질의 본체 되는 부분까지도 건드려요. 옛날에는 학문을 해도 물질의 본질까지는 알 수가 없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제는 거기까지를 분석을 해가지고는 ‘하나님이란 없다’ 하고 큰 소리를 치기 시작한 거야요.
이런 사고방식을 아주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바로 소련의 우주비행사「유리 가가린」같은 경우야요. 그가 우주선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가보고 하는 소리가 “우주에 올라와보니 하나님이 없다”하고 메세지를 보냈었는데, 그걸 자기로서는 무슨 큰 소리라도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누가 알았겠어요. 그런 따위 생각을 하는 그것이 이 문명이 크게 잘못되는 시작인 줄을-
이제 와서는 그래도 비교적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인본주의란 이름 아래 인간을 제일로만 생각하고 하나님을 내쫓고 보니 우리가 살 수가 없게 됐구나, 하고 생각을 하게 된거야요.
지금 우리가 ‘평화’ 란 소리를 합니다만 이 평화란 것도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지 않고는 안될 겁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 그냥 남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만 한때는 하나님은 죽었다는 ‘신 죽음의 신학’ 조차 나왔다고 합디다.
물론 ‘신은 죽었다’는 말은 괴테가 무슨 생각에서 한 말이지만, 어쨌거나 사람이 “하나님은 죽었다”하고 말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참 건방진 수작이지만, 그 ‘신 죽음의 신학’이 처음 나왔던 그때는 그거 참 깊은 소리 한다 그랬었지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 문명이 이렇게까지 타락하게 된 것은 이제 말씀드렸던 그런 것들이 사람들의 생각을 왼통 휘어잡고 설쳐댄 결과란 말입니다.
그래 지금은 비교적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이제 생각이 차차 달라져 가고 있지요 우리가 업신여겨서 내쫓았던 하나님이 쫓겨나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있다” 하는 소리가 새로 나오게 된 거야요.
이런 걸 놓고 가만히 생각을 하노라면 인도에 있는 설화가 생각나는 게 있어서 이따금씩 그 말을 끄집어내곤 합니다. 옛날, 인도에 한 임금님이 있었는데 세력이 강해서 이웃나라를 얻게 돼서 그 기념으로 커다란 궁전을 하나 새로 지었지요. 그래 낙성식을 하는 날이 와서 만조백관을 모아놓고 음악을 연주하며 흥청흥청 큰 잔치를 열었어요. 그런데 잔치가 한창 무르익는 참인데, 어찌된 셈인지 갑자기 집이 흔들흔들하다가 마침내 부서져 내리는 거야요. 깜짝 놀라서 조사를 해봤더니, 이게 뭐야, 궁궐을 지을 때는 만세 반석을 고른다고 골랐는데 알고 보니까 그 만세 반석이란 게 큰 거북의 잔등이더란 말이야. 그래, 잔치를 한다고 시끌시끌 떠들어대니까 거북이란 놈이 “이거 시끄럽다”하고 몸을 흔들하니까 그 위에 있던 모든 게 흔들려서 무너지고 그랬다는 거야요.
이 얘기를 하면 또 영국의 목사 L.P 잭슨의 말이 생각나요 1차 대전을 겪은 다음 잭슨 목사가 이 인도 설화를 예를 들면서 “1차 대전 이게 뭐냐? 그건 ‘하나님’ 이라고 하는 산 거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산 거북을 죽은 거북인 줄 알고 그 잔등에다 집을 짓고서는 좋다고 뚱땅거리니까 거북이 시끄러워서 등을 이렇게 한번 기우뚱해본 거 아니겠느냐? 그러니까 인류가 이제부터 정신을 차려야 한다”하고 경고했어요.
만약 그때 그 경고를, 등을 한번 기우뚱해 보인 그 경고를 사람들이 들었더라면 아마 2차 대전은 분명 안 났을 거야요, 또 났더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경고다 하는 그 생각을 했더라면 뒤늦게나마 사람들이 깨닫기라도 했겠는데, 일이 그렇게는 안됐어요.
나도 2차 대전이 날 때는 인류의 장래 문제를 생각할 때 이것은 아마 전화위복이 되는 계기가 될 거다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1차 대전의 그 4년 동안의 그 비참한 것을 보더니 사람들에 ‘평화주의’ ‘인도주의’가 아주 고조돼 올라갔어요. 나도 그 시절에 십대와 이십대 초반을 지낸 사람입니다만 소위 요즘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든 일본이든, 다 1차 대전 후에 한창 고조되었던 ‘평화주의’ ‘인도주의’ 사상에서 나온 겁니다. 기독교를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어쩔 수 없이 다 그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야요.
그럼 지성, 오늘날 우리가 지성이라고 하는 것의 그 근본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찾으면 그건 유럽에 있어요. 이날까지 세계 질서를 유지해온 거,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는 유럽적인 지성, 유럽적인 인텔리젠티어(Intelligentsia)야요.
그런데 이제 그 지성, 그 유럽적인 지성이 한때는 인류의 앞길을 환히 이끌어가는 듯이 보이던 그 지성이 그만 맥을 못추게 돼버렸어요. 그렇게 된 것이 이제 오늘날의 이 우리 문명의 실상이야요.
새 종교-대립된 두 세계를 화해시킬 제3의 시각
그럼 왜 이렇게 됐나? 어째서 인류의 앞길을 밝히던 지성의 불빛이 죽어버리게 됐냐?
그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그건 아까도 잠깐 말하다가 말았지만, 그 근본 원인은 바로 ‘세속화; 세큐라리제이션(Secularization)’에 있어요. 그리고 2차 대전 이후에 있은 기술의 놀라운 진보에도 그 원인이 있어요.
처음 기술이 발달하게 될 때는 그것이 참 좋은 줄만 알았는데, 그 발달이 도리어 인간들을 이렇게 동댕쳐 버릴 줄은 참 몰랐어요.
그래 그 2차 대전이 생기던 그때는 이 전쟁만 지나면 이세상이 이제 근본적으로 달라 질 거다 하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그 전쟁을 참 긍정적으로 봤었지요.
그때 생각으로는 지금 이 자본주의다 공산주의다 하는 그런 따위의 대립만이 아니라 인류의 정신이 온통 아주 새롭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 대립이란 것도 그래요 이 두 생각이 서로 맞서다가 어느 하나가 세력을 잡게 될 것으로는 생각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자본주의가 성해서 공산주의를 몰아내도 못쓰고, 또 반대로 공산주의가 강해져서 자본주의를 쓸어내도 못쓰는 거야요. 소설을 봐도 두 사람이 싸움을 한다면 그 두 사람 가운데 한 놈이 다른 한 놈을 깡그리 몰아내는 식의 소설은 초보자가 하는 짓이지, 참 예술가는 그렇게는 결말을 짓지 않아요. 한 사람이 이겨도 상대방에 원수를 갚아서 이기게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이기지 않고도 이기고, 원수 갚지 않고도 원수를 갚게 쓰는 거야요. 그게 참 능란한 예술가의 솜씨야요.
마찬가지로 이 역사가, 이렇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서로 맞선 이 역사가 자본주의가 강해서 공산주의를 몰아내거나 또 그 반대로 되거나하는 그런 졸렬한 방법으로는 해결이 안 날 겁니다. 보다 높은, 제3의 보다 높은 사상이 나타나서 “공산주의도 좋고 자본주의도 문제 아니다. 이때까지 원수같이 생각했었지만 올라와서 보니까 그것은 하나는 동쪽에서 하나는 서쪽에서 올라온 것일 뿐이구나.”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도록 해결이 날 겁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이렇게 할 수 있는 그 사상이 어디서 발달이 돼 나올 것인가? 그건 종교에 기대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나는 ‘새 종교’가 나오는걸 기대하고 그랬어요.
물론 종교 그 자체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지만, 종교가 발표하는 말씀은 그 시대에 적합하게 새로워져야 해요. 가령 소화불량이라는 병을 놓고 봐도 보리밥 먹어서 된 소화불량이나 고기 먹고 된 소화불량이나 다 같은 소화불량이라는 병이지만 그것을 다스리는 처방은 달라져야 하잖아요?
그래서 옛날부터 있던 종교-모세 오경이 있으면 모세 오경, 또 신약성경이 있으면 신약성경 그것을 줄줄 욀 수는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하면 지금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표시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내게는 제일 문제가 됐어요.
또 같은 종교의 말이라도 사람이 사는 곳에 따라, 또 사람들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표시할 수밖에 없어요. 가령 유대민족 같은 경우를 보면 그 사람들 사는 곳은 사막지방이고 또 그 사람들은 행동적인 사람들이야요. 그렇기 때문에 복잡한 설명이 필요치 않아요. 그저 “하나님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 그러니 이대로 놔뒀다가는 안 된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하고 말하면 그냥 그대로 다 “아침저녁으로 피가 뚝뚝 흐르는 제사를 지내야 용서를 받는다”하면 그만이야요 거기 왜 그렇습니까하는 ‘왜’가 없어요. 그러나 인도라든지 중국에 오면 그 유대민족들과는 달라요 자연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주로 앉아서 자연을 보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요. 인도의 ‘베다’를 보면 똑 같은 아리안족이지만 유럽 사람들과는 달리 자연을 보고 경탄해서 사색적이고 명상적으로 됐어요. 물론 인도에도 인간의 근본문제가 똑같이 있지, 없지는 않아요. 그러나 그 표현은 달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실천적으로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죄, 죄, 죄, 인간의 본래 문제가 해결이 되기 전에는 행복해질 수가 없다’ 그래요, 그러나, 내가 지식이 옅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똑 같은 문제를 생각을 하면서도 인도사람들은 그걸 ‘죄’라고 하지는 않아요. 그 사람들은 “이 무한대한 놀라운 자연에 비하면 인간의 지식이란 요건 뭐 형편이 없지 않느냐? 그러니 어떻하면 이 우주 속에서 우리가 이 거대한 것들을 알 수가 있겠느냐”하면서 보게 되니까, 이 사람들은 실천적이 아니라 사색적으로 되게 됐고, 또 그러니까 “우리가 죽을 죄를 졌으니까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야지”하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이러니까 어떻게 하면 이 우주의 참 깊은 데를 알 수가 있을까”하고 파고들어가는 쪽으로 길이 서로 다르게 표현이 됐어요.
그리고 옛날에는 교통이 오늘날과 달라서 동양이면 동양, 서양이면 서양에서, 난 거기서 그대로 눌러 살다가 거기서 그대로 죽었어요. 그래 서로가 서로를 잘 몰랐어요.
그래서 인도에 났던 저 유명한 영국 시인 키플링 (R. Kipling) 같은 이는 "이스트 이스 이스트, 웨스트 이즈 웨스트 디즈 트인 네버 셀 미트 (East is East, West is West. This twin never shall meet):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다. 그러므로 이 두 쌍둥이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하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아니야요 만나는 때가 있지, 왜 못 만나겠어요? 그전에는 그렇게 봤으니까 그렇지.
문명을 이끌어 나온 정신 자체를 고쳐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때까지는 세계의 질서를 그런대로 유지해오던 지성 ᅳ 거의 대부분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서 이성이 열려서 된 유럽의 지성이 한때는 자기 책임을 다해서 세계질서를 유지해 왔는데, 이제 성과에 그만 교만해져서 이 지성이 타락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자연히 서양문명에 대한 문제가 나올 수밖에 없는 거야요. 그래 한 칠 팔십년 전에 슈팽글러가 처음으로 ‘서양의 몰락’이란 책을 썼고, 그 뒤로 토인비가 나오고 그랬습니다만 현대에 와서 좀 안타까운 것은 그런 식의 문명 비판이 나오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안타까운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