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더운 여름을 덥게 그리고 건강히 나시고 계신지요?
우리의 정신도 건강히 돌아보는 시간가지기를 기대합니다.
수요일에 뵙겠습니다.
예민할수록 좋아!
문은희_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 소장, 심리학박사, 계간 「니」 편집장
<예민한 건 나약한 것, 나약한 건 나쁜 것?>
예민한 것을 걱정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자기가 예민해서 상처를 쉽게 받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이들이 그렇다고 걱정하는 어머니들도 꽤 자주 만난다. 그럴 때마다 “예민한 것은 좋은 특성이니 더 예민하도록 키워줘야 한다”고 대답한다.
예민하다는 것에 대한 오해가 있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예민한 사람은 여리고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튼튼한 것의 반대말같이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마음의 건강함을 이야기할 때 예민하다는 것은 자신의 느낌을 정확하게 알고, 다른 사람의 느낌과 상황을 정확하게 잘 알아주는 바람직한 특성을 말한다.
지난 4월 16일 미국의 한 조용한 마을의 대학(버지니아 텍)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예방하지 못한 것도 우리 모두 예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다 건너 멀리, 생판 모르는 사람의 일이라고 우리는 그 사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손을 씻을 수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하고 배제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모범생이고, 숙제도 잘 하고, 부정행위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서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해서 소외시키는 일에 두드러지게 앞장서지는 않더라도 속으로 은근히 따돌리고 있지 않은가? 영어발음이 다르다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조롱하는 철없는 미국아이들과 우리가 얼마나 다른가? 포도원에서 아침부터 아홉 시간이나 일한 사람들이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과 같은 품삯을 받는 것에 불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우리도 생각하지 않았던가? 포도원 바깥에서 포기하지 않고 일자리를 기다리는 시간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예민함이 건강한 것이다.
모태신앙을 자랑하며 먼저 믿을 기회를 가졌다고 예수님을 알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하고 소외해서는 안 된다. 아직까지도 예수님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의 십자가 곁에 나란히 못박혀 구원받을 사람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자신과 타인에게 예민하지 못하면 오해 속에서 살아간다>
피터 팬 이외에 모든 이들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다. 그런데 ‘그림자 같은 존재’로 실체가 없는 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인식된 조승희 같은 사람을 우리는 짓밟고 지낸 것이다. 무심하게 그의 그림자를 밟듯이 그의 실체에까지 무심했던 것이다. 어느 한 사람 귀하지 않은 존재가 없는데 말이다. 자신과 타인에게 예민하지 않으면 서로에게 무심하여 서로 돼지에게 던져진 진주 꼴이 된다.
조승희의 누나가 동생에 대해 한 말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뜻이 깊다. “이 아이가 나와 함께 자라고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을, 나는 모르는 사람같이 느낀다.” 우리도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내면의 세계를 볼 안목이 없어 제대로 들여다볼 생각도 못하고, 자기 식으로 짐작하면서, 오해 속에서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혼인해서 부부로 수십 년 동안 아들 딸 낳고 살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모르고 사는 경우를 종종 접하곤 한다. 내면을 모른 채 살면서 각각 주어진 도리를 해내는 역할만을 하며 살게 된다. 남편은 돈을 벌어들이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아내는 철저하게 살림 잘하면서 ‘현모양처’가 삶의 목표라고 믿으며 잘 해냈음을 은근히 인정받고 싶어한다. “나 만한 남편 있으면 나오라고 해!” “나 만한 아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하지만, 사람다운 삶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돈’과 ‘살림살이’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어서 허전해한다.
“뭐가 불만이냐”하면서도 서로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불만이 쌓인다. 막연히 서로를 원망하고 탓하면서 자기의 마음도 정확하게 모르고 배우자의 마음도 알 수 없다. 서로 눈치보며 살면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으니 헛짚어 오해하는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오래 살고도 그렇게 모르느냐?”는 말이 잦아지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예외 없이 자기 내면의 세계에 대해서 존중감이 없는 사람들이다. 자기의 삶이 따로 없이 온통 자기를 희생하며 다른 사람 중심으로 살거나, 돈과 힘이 중요한 사람들이다. 앞의 경우는 주로 주부들에게서 볼 수 있고, 뒤의 경우에는 남편들에게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집안에서 자란 자녀들은 내면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자라게 된다. 부자들은 부자대로 재산이 중요해서 형제자매 사이에 애틋하게 사랑을 나누지 못하게 되고, 결국 재산분쟁으로 남 같아진다. 돈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난한 이들은 돈 벌기에 매달려 자녀들의 내면을 키워주지 못하고 주눅들게 만든다. 많이 가진 사람을 원망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품게 한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일률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포도원 주인에게 받은 대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균등한 것이 공평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땀흘리며 오래 일한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할 기회를 먼저 가진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인데, 일의 보상으로 물질의 크기가 정해진다는 생각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릇되게 판단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강자에게 예민한가, 약자에게 예민한가?>
건강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주리고 목마른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에 예민하여, 적합하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주고, 간호하고, 찾아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보살핌을 받을 사람이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부득부득 자기 마음대로 해주는 것은 예민하지 못한 처사다. 아픈 아이는 어머니가 곁에 있어주기만 바라는데 아이를 사랑한다는 어머니는 아이를 위해 곰국을 끓여오려고 왕복 네 시간 걸리는 집에 다녀온다면 예민한 것이 아니다.
힘있고 중요하고 큰 사람이 아니라 눈에도 잘 띄지 않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예민한 것’이 건강한 표지이다. 힘있는 어른의 필요에는 예민하면서 힘없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에게 무심하다면 건강한 예민함이 부족하다 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예민하면 건강하게 예민하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남들이 외면하고 지나치는 강도 만난 사마리아사람의 필요에 예민하게 응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가족, 자기 교회 울타리 속에서만 예민하게 보살핀다면 성숙되지 못한 것이다. 아홉 시간 일한 사람들끼리 편을 만들어 한 시간 일한 사람들을 배척하지 말아야 하듯이 편 가르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포도원 안팎에 다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만 하나님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건물 바깥에도 하나님나라가 있다. 교회 안에서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도 우리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딘지 예민하게 살피고 적극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러기에 예민함은 나약한 것이 아니다. 힘없는 사람을 부축할 힘이 있어야 한다. 몸으로 부축하는 몸의 힘도 있어야 할 터이지만 마음으로 부축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들어주고, 이해하고, 함께 아픔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있어야 한다. 예민함은 사람 사이의 사랑을 심고, 자라게 하는 데 절대로 필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예민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마음이 튼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