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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정지용의‘향수’를 향해
<아직도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나그네 설움'이 절로 입에서 튀어 나온다. 한데 어제 정말 만가운 분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협회 회원인 부산 거주 K교수. 선배라, 몇번이나 말씀을 낮추라고 강권(?)을 했는데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오늘도 뜻밖에 L형이 옛날식으로 표현하자면 다이얼을 돌렸으니, 고맙기 그지없다. 국방부 유해발굴단장으로 있었던 유차영 대령 번호를 눌렀는데, 러시아란다. 귀국하면 바로 만나기로 했다. 그는색소폰 연주가이자 수필가, 가요연구가다. 적군 묘지에 가서 '꿈에 본 내 고향'을 부르는 문제 그와 의논하련다. 당연지사로 알았는데, 파주 사건이 나를 고민에 빠지게 했다. 故 구상 시인에게도 물어 봐야겠다.그분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꿈에서 만날 수 있다. 어깨가 아파 몇 달째 고생이다. 군부대에 책 30권씩을 넣은 배낭을 짊어지고 몇 번이나 오르내렸으니 인대가 안 늘어나면 이상하다. 그럴수록 나는 그걸 은혜로 생각한다. 색소폰 무게도 만만찮더라. 6월 20일에 옥천에 간다.>
오늘은 6월 20일이다. 바로 ‘향수’로 대변되는 정지용 선생의 탄생 117주년 되는 날이다. 대전 변두리에 사는 권태무 전 지방(地方)신문 문화부 기자는 아침부터 바쁘다. 부산에서 친구들이 다섯 명 KTX 열차 편으로 오면 그들을 자신의 승용차에 싣고 옥천 정지용 생가로 가야 한다.
그리고 기상천외의 독창 겸 색소폰 독주를 겸한 행사를 치러야 하는 것. 곡목은 역시 ‘향수’ ! 청중들과의 인터뷰도 계획되어 있다. 보도는 <실버넷뉴스> 편집국장 몫이다. 아래에 오늘이 있기까지의 약사(略史)를 적는다.
태무는 오랜 기간 B 일보사에서 근무했고, 정년퇴임한 이후에는 아르바이트 수준의 교열부 기자로 있었다. 그는 시쳇말로 가방끈이 짧았다. 부산중학교 졸업을 끝으로 회사(신문사)에서 사환으로 들어가서 궂은일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2년 만에 대학입학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수습기자가 되었다. 문화부였다. 그런 뒤 다시 어깨 넘어 배운 이런저런 지략을 동원하고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여 문단(소설)에 데뷔한다.
초등학교 기능직으로 있는 아내의 봉급으론 살림이 빠듯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문화부에서 물러나 교열부 말석에 앉아 있으려니 쑥스럽기 그지없었다. 어느 날, 야간 업소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는 후배 김치현이 찾아왔다.
“형님, 기운이 없어 보입니다. 지난 세월 잊어버리세요. 제가 쓰던 색소 폰을 하나 드릴 테니, 연습 한 번 해 보시지요. ”
태무는 물을 커피포트에 올려 끓였다. 이윽고 2인용 다기를 내서 매만지고, 녹차를 넣어 우러날 때까지 기다렸다. 치현이 말을 이었다.
“약간 무겁긴 한데 형님의 체격이나 덩치로 봐서 오히려 제격일 겁니 다. 형님은 풀피리 연주 대가잖아요? 노래와 풀피리! 문인협회 야유회 때 그 두 가지 재주를 맘껏 뽐내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아 참, 향우 회 때 저도 형님의 모습을 먼발치서 보았습니다.”
“원, 이 사람이 이것저것 미두알고주알 다 밝히네그려. 자네 말을 따라 해 볼까? 하지만 풀피리 부는 게 색소폰 연주에 도움이 된다니 미심 쩍기도 하고. 하여튼 귀가 번쩍 뜨이긴 하네. 고마우이.”
“아이고 형님, 오히려 제가 고맙지요. 앞으로 색소폰은 십 년은 더 불 수 있습니다. 생각건대 형님은 이 색소폰 하나로 빛나는 일을 큰 흔적 하나를 남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형님, 파이팅!”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무기력하이. 정신과에 갔더니 우울증 초기라나?”
“그럴수록 힘내세요. 몇 달만 제가 일러 드리는 대로 따라하시면 오케 이! 교습료는 안 받습니다. 하하.”
“아, 치현이 아우. 아니 스승님 감사합니다.”
태무와 색소폰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고 나서 며칠이 지나갔다. 그날 오후에도 태무는 먹물이나 먹었다는 젊은 기자들의 맞춤법 실력을 보고 혼자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학교에서는 뭘 가르치나? ‘오랫만에’를 그냥 넘겼네. 이러고 서도 기자 노릇을 하다니.‘오랜만에’라고 하면 잡아먹히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쯧쯧! 이건 또 뭐야? 대통령이 북한군의 사열을 받는다면, 주객이 전도된 건데. 완전 개판이고말고.‘대통령이 북한군의장대를 사열했다고 쓰지 못하다면 기자 자격이 없는 거지. ”
그럴 때 치현이 들어선 것이다. 어깨에 짊어진 게 있다. 색소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태무는 그를 반겨 맞으며 다시 녹차 달여 내놓았다.
치현이 조금 있다 케이스를 열었다. 그에게 10여 년간 밥벌이를 시켜 준 상징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 마감 시간이 끝나 사무실 안은 여기저기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치현이 입을 떼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색소폰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알토, 바리톤, 테너, 그 리고 소프라노. 브랜드로 일제 야마하, 프랑스의 셀마 등을 손꼽구요.”
“한데 나 같은 갑남을녀가 색소폰이라 개발에 편자는 아닐까? ”
“아니 형님. 어지간한 성악가 수준의 가곡 실력을 가지신 분이 형님입니 다. 북구 문화제 때 경찰악대 반주에 맞춰,‘떠나가는 배와 ‘도라지’를 불렀고, 고신대학교 오충근 교수가 지휘하는 ‘부산어머니오케스트라’ 와 협연을 했지요. 삼랑진 오순절 평화의마을에서….‘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와‘사랑으로’였지요. 그날 눈물겨운 이야기 하나. 무척 미인이긴 하지만, 정신분열증(조현병)을 앓는 전직 음악 교사라는 자매가 눈물을 흘리던데요. 형님, 아자!”
“과찬은 말게나. 어쨌든 소리 내는 법부터 가르쳐 주지 그래.”
레슨은 이렇게 그날부터 실시되었다. 악기를 조립해서 메고 치현이 일러 주는 대로 소리를 내어 봤다. 오른손 네 손가락과 왼손 세 손가락을 주로 쓰는데, 과연 권 부장은 음악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지,‘도레미파솔라시도’를 무리 없이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아니 무엇보다 풀피리 연주 기능이 전이된 듯한 느낌을 가졌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라 하자.
여기까지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 둘은 자리를 옮겼다. 10분가량이면 닿을 수 있는 부산진 시장으로. 주인인 태무의 처제 옥천댁은 둘을 반겨 맞았다. 소주 한 병과 돼지 수육 한 접시, 국밥 두 그릇을 시키고 둘은 마주앉았다.너무 이른 저녁 시간이라 시장은 한산하였다.
여섯 시가 좀 넘어 둘은 일어났다. 한데 치현이 태무 소매를 잡고 끄는 게 아닌가? 자기를 따라 오라는 거다. 색소폰은 김치현이 짊어졌고.
신문사 맞은편에 부산진역 광장이 있다. 둘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그리로 발길을 옮겼다. 옛날에는 구포나 물금 삼랑진 등지에서 통학(통근)하는 학생과 회사원이 많아 무척이나 붐비던 기차역이었다. 권태무의 말.
“자네 생각나는가? 지금은 옛날과 달리 한산해서 매주 토요일 오후 천주 교에서 운영하는 봉사단에서 저녁밥을 대접하는 장소로 이름이 났다네.”
“부산 교구 선교 사목국장의 권유에 따라 형님이 가끔 여기서 노래 부르 신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저도 목격했구요.”
태무는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말했다. 가톨릭 신자인 그가 어느 날 부산교구 사목국장 전동기 신부를 만났다는 것이다. 전 신부의 말이 이랬다. 부산진역 광장의 무료 급식 운영을 들먹이더니, 거기 잠깐 노래를 불러 줄 수 있겠느냐는 것. 태무는 바로 즉각 동의했다. 아무래도 토요일은 좀 일찍 일과가 끝나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대상자? 거의 노인이나 노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몇 번 거기 나가서 배식판을 들고 그들 앞으로 들고 가서 전해 주는 일을 하다가 이상한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토요일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구포까지 가는 등산객들이 많다. 그들은 무궁화호를 이용, 원동에 내려 산에 잠시 오른 다음 귀가하는 길 부산진역에서 다시 하차하는 것이다. 마침 저녁 시간이라 그들은 삼삼오로 무리지어 공짜로 저녁을 얻어먹는 사실!
태무는 아연 실색하고 말았다.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배식판을 드는 것까지는 좋은데, 앰프로 없는 그 너른 광장에서 트로트까지 부른다? 그래 한 달이 지난 뒤 포기하고, 급식소 책임자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대신 다른 임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몇몇 봉사자들과 수녀들을 따라 사무실까지 가서 설거지까지 거들었는데, 누가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권 기자님, 말씀의 취지를 잘 알겠습니다. 대신 이러면 어떨까요? 시각 장애 복지관이 여기서 가까운 데 있어요. 거기 한 달에 한 번 가서 노래를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풀피리 연주 솜씨도 보여 주시고요.”
그 말에 그만 귀가 솔깃해진 태무는 망설임 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설명을 듣고 태무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 옛날 가라는 학교는 안 가고 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2본 동시 상영 영화를 보던 철도문화관이 생각이 나서였다. 부일 시네마라는 영화관도 거기 가까이 있었다. 태무는 회억했다. 그 철없던 시절,‘오케이 목장의 결투’‘공중트라피즈’ 등을 통해 버트 랭카스터와 커크 더글라스의 팬이었었지….
까까머리를 하고 방황하던 텍사스 거리를 거쳐야 올라갈 수 있다는 판단을 하니 섬뜩한 느낌조차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못된 짓을 골라 했던 그 시절에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약속을 한 터였다. 이튿날 일요일 당장에 시각 장애복지관에 발걸음 했다. 조건은 이랬다. 매월 마지막 일요일 열 시 미사에 참예(參詣)하고 난 뒤, 한 시간 정도 그러니까 열두 시까지 4층 별실에서 노래를 지도한다. 풀피리를 부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들을 대상으로 웃음 치료를 돕는다. 모든 건 무료다.
태무는 좋다고 동의했다. 미사가 끝나고 자리를 4층으로 옮겼다. 모인 장애인들은 스무 명이 조금 넘었다. 그러나 당장 장애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지닌 재주인 특유의 막춤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한번도 파안대소를 이끌어 내지 못해 진땀만 흘렸다. 그들이 앞을 못 본다는 사실 앞에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이번엔 노래 차례. 태무는 애창곡인 ‘고향의 그림자’를 혼신의 힘으로 불렀겠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수박등 흐려진 선창가 전봇대에 기대서서 울 적에/ 똑딱선 프로펠라 소리가 이 밤도 처량하게 들리네/ 물 위에 복사꽃 그림자 같이 내 고향 꿈이 어린다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얼른 보아 마마 자국이 심한 자매가 입을 열었다.
“선상님요, 지도 한 번 불러 보면 안 되겠십니꺼?”
자매의 말대로 ‘고향의 그림자’번호를 반주기에서 찾아 눌렀다. 그러곤 태무는 뒤로 나자빠질 만큼 놀라고 말았다. 그가 여태껏 ‘고향의 그림자’를 그처럼 잘 소화시키는 사람을 보지 못해서였다. 태무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러자 맨 앞자리에 앉은 어느 자매의 귓속말
“놀랐지예? 저 자매는 본래 부산에서 자랐는데, 광주로 시집을 갔다 캅 디더. 물론 남편도 시작장애인이었고 사별한 뒤 돌아왔어예. 저 자매는 광 주 육교 위에서 앰프 시설 하고 노래 불렀다 카데예.”
첫날 태무는 그렇게 일정을 마감하고 씁쓰레한 기분으로 귀가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기가 죽었다 하자. 다만 풀피리로써는 거기 가족들을 조금은 들뜨게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가 죽어서는 안 되는 노릇, 그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월요일 오후 보수동 헌책방에 들러 샅샅이 뒤져 노래책을 여러 권 샀다. 덕분에 70년대 후반에 출판한 1300페이지나 되는 희귀본도 구할 수 있었다. 정말 거기엔 빠져서는 안 될 각종 노래가 들어 있었다. 물론 조잡하기 하지만…. 그날부터 그는 풀피리와 노래로 그것들을 익혀 나갔다.
그로부터 3년 동안 그는 거의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복지관엘 다녔다. 거기서의 일화 혹은 잊을 수 없는 얘기 몇 개.
그 형제자매들 중에는 뒷날 비례대표 시의원이 된 자매도 있다. 이정예. 이화여대 사범대학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와 잠시 강단에 섰으나, 포도막염이라는 병에 걸려 실명을 한 미인(美人)이다. 참으로 아까운 재원이다. 당시만 해도 그 자매는 부산시 시각 장애 복지관장과 점자 도서관장을 맡고 있었다. 옷의 색깔이며, 디자인이 일반인들이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빼어나서 그 곁에 가면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향기를 느껴야만 했다. 그는 그런 어떤 꼬집을 수 없는 기속력(羈束力)을 지녔다고 하자.
서라벌 예대(초급)를 졸업했다는 박도석 형제도 빠뜨릴 수 없다. 색소폰 연주를 잘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걸 들고 올 수 없어서 사람들 앞에서 폼만 잡는다고 했다. 두 눈동자가 다 없는 걸로 보아 크게 다친 모양이었다. 탱고를 정말 멋지게 불러서 인기를 독차지했다.
내친김에 한마디 더 말하자. 거기 가족들 중에서 노래를 잘 못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의 지론이다.
“앞을 못 보니까 라디오를 곁에 두고 항상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따라 한다. 해서 우리는 전부 가수다, 아니 가수보다 노래를 잘 부른다!”
뉘가 있어 그 명제에 이의를 달 것인가? 정말 그들 모두의 노래 솜씨는 빼어났더라. 모르는 노래도 없었다. 나아가 이렇게 개사(開詞)해서도 부르고. 하필이면 박정희라는 이름이라 쓴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밤 내무반 이불 밑에서/ 빤쭈 벗고 이를 잡는 육군 일등병/ 큰 이는 어디로 가고 쌔가리만 살살 기느냐/ 넓적다리 싹싹 긁으며 이를 잡는 홀아비 신세
그러면 다른 가족들은 박장대소(拍掌大笑)로 화답(?)했다. 그 시간만은 거기 가족들이 모든 근심 걱정을 잊는 것 같았다.
때맞추어 기적 소리가 들린다. 창가로 다가가 내려다보니 저만치 자리 잡은 부산역에서 기차가 들어오고 출발한다. 권태무는 반세기 전의 악동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그의 입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쏟아져 나왔다. 역시 개사한 건데, 거기 가족들에게서 반은 배웠던 것.‘짠짜라짠짠짠 짠짜라짠짠 짠짜라짠짠짜라라라’의 전주(前奏)로 분위기를 띄우고 나서다.
서울 가는 새(혀) 빠질 넘아/ 외상값이나 갚고 가거라/ 밑천 없는 장사에다 식구가 일곱 명이다/ 외상을 먹는 덧도 한두 번이지/ 어느 때 영자 씨와 마주 앉아서/ 술 한 되 까자 한 근을/ 웃어가면서 먹지 않았나/ 외상값이나 갚고 가거라
그 정도에 이르면 난장판(?) 수준이다. 자기 모습을 못 보니 스스로의 실력도 가늠할 수 없는 그들 특유의 ‘자연 춤’을 그대로 선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태무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점자(點字)’로부터였다. 거기 가족 중 1/5쯤은 점자 <성경> 이나 주보를 무릎 위에 얹어 놓고 손가락 끝으로 짚어 나가며 진지한 표정으로 읽어 나가는 거다.
이런 일도 있으니 더 강조해 무엇 하랴! 소피아라는 세례명을 가진 자매가 넷이었는데, 그 중 어느 누구가 전례부장이었다. 해서 그는 항상 해설자 자리에서 서서, 미사 중의 주의 사항 등을 일러 주곤 했다. 어느 날, 빛조차 분간할 수 없는 소피아가 폭탄선언(?)을 하는 게 아닌가?
“오늘 영성체할 때 부를 노래는 성체 성가는 496번‘주님은 우릴 사랑하 셨네’입니다. 흑인 영가이지요.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혹독한 노동에 시 달리면서 고향 아프리카를 생각하면서 부른 노래지요. 도중에 메조피아 노, 포르테, 리타르단도 등이 나옵니다. 유의해서 부르세요. 다시 말해 메조피아는 ‘조금 세게’, 포르테는 ‘세게’ , ‘리타르단도’는 ‘점점 느리게’로 부릅니다. 자, 연습!”
소피아 부장은 가차 없이 틀린 곳을 지적했다. 몇 번이나 그걸 반복 연습했다. 태무는 귀신이 곡이라도 할 소피아 전례 부장의 그 음악 실력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를 보고 주임신부가 말을 건넸다. 점자 악보가 있는데, 소피아는 그걸 익혔다는 것.
그 사건은 권태무로 하여금 악보를 소중하게 여기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로부터 코르위붕겐 책을 사서 기초부터 열심히 연습하고, 노래 책을 보면서 가락과 박자를 풀피리에 싣기 시작했으니까. 참 열성을 쏟았다.
그러다가 태무는 거기에서 쫓겨나고 말았으니 그 까닭은 이랬다. 복지관에서는 가끔 야유회를 가곤 했다. 물론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이라 참가하는 가족들은, 반드시 성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지원자들과 일대일로 짝을 이룬다. 하루 종일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이 되어야 함은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다. 그날도 그랬다. 화장실에 가는 게 제일 문제였다. 문을 열고 바지를 내려 고*를 내서 소변기를 향해 조준(?)하는 걸 도와야 하는데, 그게 예사롭지 않았다. 봉사도 프로라야 하는지 모른다 싶었다.
아무튼 한바탕 오락부터 시작했는데, 노래자랑을 겸한 거였다. 사회를 태무가 맡있다. 그런데 도중에 어느 형제가 엄청난 항의를 했다. 자기만 따돌려서, 1절로 끝내게 했다는 것이다. 그의 항변을 다시 들어 보자.
“저 양반은 항상 차별 대우야. 내가 2절까지 다 부르면 어디 덧나나?”
태무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으나 허사였다. 다른 가족들이 제지해도 그의, 아니 그 내외의 화는 끝내 풀어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날 야유회는 망치고 말았다. 더욱 충격을 주는 말들이 어수선하게 들렸으니 그 형제의 말이 맞다는 거다. 태무는 더 이상 버틸 재간도 없었다. 쓸쓸하게 돌아서 나오는 날, 텍사스 골목을 걸어내려 오면서 서영춘의 ‘서울 구경’을 역시 가사를 고쳐서 불렀다. 복지관에서의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시골 할마시 서울 가는 기차를 타는데/ 차표 파는 총각하고 실랑이 벌이네/ 아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 깎아 달라 졸래대니 우짜면 좋겠노?/ 우하하 우하하하 우하하하하하 우하하 우하하하 우하하하하// 기차가 뿌하며 떠날라 카이니까/ 할마시가 깜짝 놀라 돈을 다 내며/ 깎지 않고 돈 다 낼 텡이께 저 기차 잡아 주이소/ 돈 안 깎는다 하지 않능교/ 저 기차 잡아 주이소/우하하 우하하하……
한데 쫓겨난다고 생각하니 약간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눈물도 났다. 짐 하나를 벗었다는 안도감에도 젖어드는 게 아닌가?
“어때 내 얘기 소설 같지 않아? 자넨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하네.”
여기까지 들은 치현도 태무의 가슴 아픈 사연에 웃을 수만은 없었다. 아니 위로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하 많은 장애인들 중에서 가장 자존심이 강한 쪽이 ‘시각(視覺)’이랍 디다. 그 형제에게 마음속으로 사랑을 보내십시오. 색소폰에다 심혈을 기 울이면,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이를 상대할 날이 옵니다. ”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이? 태무는 도무지 말귀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 물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경황이 없어서….
둘은 벤치에 앉았다. 김치현은 재빨리 색소폰을 조립하여 피스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초저녁에서 머뭇거리는 시침을 향해 재촉하듯, ‘해운대 엘레지’부터 뿜어내었다.
일찌감치 호객을 하러 나온 유곽(遊廓)의 아가씨들 몇이 취한 사람마냥 그걸 따라 부르고 있었다. 김치현은 끊임없이 숨을 들이쉬고 내뱉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행인들이 몰려와 구경 아니 감상을 하는 진풍경은 그렇게 연출되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김치현은 바로 이웃한 업소로 출근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태무를 아내가 환한 웃음으로 반겨 맞았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쉿 소리를 자그맣게 내었다. 아내는 딸애가 방금 잠들었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였다. 태무는 알았다는 화답이었고.
태무는 색소폰을 조립하고 짐짓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왠지 우울증이 약간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치현이 건네준 <색소폰 교본>을 펼쳐들었다. 호기심이 온 몸을 휘감았다. 거기 마우스피스와 리드의 각부 명칭이 적혀 있었다. 마우스피스 그림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기다란 엄지손가락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각 부분의 명칭과 운지법을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그걸 죄다 외어 버렸다. ‘선 연주 자세’와 ‘의자에 앉을 때(색소폰을 안 쥐고)’, ‘앉은 연주 자세 사진’이 있어 그걸 흉내 내어 봤다.
거기까지 새 친구를 부둥켜안고 있는데, 웬걸 졸음이 쏟아지지 않는가? 태무는 옳다구나 싶어 5년째 신세를 지고 있던 수면제 할시온(0,250mg)을 거들떠보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숙면에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태무에게는 색소폰이, 친구를 넘어 반려자 수준으로까지 격상되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태무는 색소폰을 몸에서 떼지 않았다. 출근까지 한가로운 시간이 있을 때면 태무는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래 위층에 사는 사람들이 직장인이고, 그 자녀들 또한 학생이라는 걸 아내가 일러 주었다. 어느 시간대에 연습을 하면 항의가 안 들어온다는 사실쯤은 태무도 꿰뚫을 수밖에. 태무의 말대로 이것도 혜안 아닐까?
색소폰은 그렇듯 태무의 삶에 날개를 달아 준 셈이 되었다. 앙부쉬르(악기를 불 때 입이나 턱 근육 등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 방법도 점점 바르게 익혀 나갔음은 물론이다. 점점 까다로워지는 운지 방법도 독습으로 익혀 나갔다. 치현이 가끔 들러 태무에게 칭찬을 쏟아놓고 돌아가곤 했다.
정말 그랬다.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는 태무를 보는 아내도 까무러치게 놀랄 일이라며 감탄했다. 까짓 설거지쯤 안 거들어 주는 게 무슨 대수나며 짐짓 미소 띤 얼굴로 아내는 태무를 포옹해 주기도 했다. 하기야 정신의학과 약까지 끊었으니, 그들 부부에게 더 이상의 은혜가 어디 있으랴.
그러던 5월 초순이었다. 태무를 치형이가 찾아왔다. 그가 하는 말이다.
“형님, 대단하십니다. 몇 달인데, 벌써 대중가요 어지간한 것은 다 소화 시키시다니….형님, Oh Danny Boy 아시지 않아요? 오는 6‧25 한국 전쟁 기 념일에 둘이서 유엔공원묘지에 같이 가서 그걸 연주하는 겁니다.”
“대강 자네 뜻은 알겠다만….그 아일랜드 민요, 전장에 나가는 아들의 무운장구를 비는 노래 아닌가? 내가 그걸 원어로 부를 수도 있으이.”
“바로 그겁니다. 1절은 형님이 노래로 부르시고, 2절은 색소폰으로 저와 형님이 같이 연주하고. 그런 뒤 모인 사람들이 우리말로 ‘아 목동아’를 제창하는 겁니다. 물론 우리 둘의 연주는 계속되는 겁니다. 아 참, 언젠가 죽은 이들과 색소폰 연주 운운한 적이 있지요?”
태무가 고개를 끄덕이고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그 제안이야말로 세상에 둘도 없는 파격이었고말고. 태무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기쁨에 젖어 오히려 안절부절못할 정도의 두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대신 치형이 나간 뒤에 태무는 길길이 뛰었다. 야호 야호 소리를 드높게 지르면서. 잠자리에 들 무렵, 치현이 자신에게 하던 말을 새삼 기억해 냈다. 뒤에 죽은 이들을 위해 형님이 연주할 기회가 있으리라는 그 언질 말이다.
태무는 혼자서 그렇게 쾌재를 부르짖었다. 0h Danny Boy는 그렇게 어려운 곡이 아니라 며칠 새에 완전히 마스터할 수 있었다. 둘이 만나 몇 번이나 리허설을 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당일 오후 세 시쯤, 둘이서 색소폰을 들고 공원묘지에 들렀을 땐 날씨가 흐렸다. 조영조 기자가 소문을 듣고 미리 와 있었다. 장비도 없이 조그마한 앰프 하나만 놓고 기상천외의 Oh Danny Boy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물론 초라했다. 그러나 The pipes the pipes are calling가 터져 나오기 직전 모여 든 사람들이 말을 주고받는 게 아닌가?
“야, 정말 기가 막힌다. 참전 용사 영혼들이 일어나 울겠다,”
“그러게 말일세. 조국의 부모들에게도 큰 메시지가 되겠는 걸!”
몇몇 외국인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곤 둘의 손을 잡고 고마워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는 예외를 좀체 허락하지 않았다. 아래는 그 얘기다.
다시 몇 달이 지난 10월 중순 경까지는, 태무의 색소폰 실력은 일취월장 이었다. 그 무렵 문인협회의 야유회에 가서는 폭스트로트며 폴카 등 빠른 곡으로 회원들을 즐겁게 하기까지 했으니까. ‘바다의 교향시’,‘청춘의 꿈’, ‘빈대떡 신사’ 등등. 물론 너무 힘들면 몇 소절쯤 노래로 대신!
그러다 사고를 당한 것이다. 11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치현이 찾아왔다. 그러더니 오늘 저녁 자기 업소에서 노래 한 곡 부르지 않겠느냐는 게 아닌가? 태무가 마다할 리 없었다. 더구나 그날 밤엔 고향 선배 남백송이 출연한다는 소식임에랴. 이른 저녁을 둘이서 먹었다.
부산진 역 광장에서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덟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둘은 자리를 떴다. 나이트클럽이라는 곳이 이름만 그럴듯할 뿐, 초라했다. 태무는 치현을 따라 대기소에 들어갔다.
아홉 시 조금 넘어 손님들이 본격 입장하기 시작했다. 태무는 처음엔 홀(Hall)로 나가지 않고 대기소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사실 태무는 나이트클럽 같은 데에 자주 가 보지 않아서 오히려 서먹서먹하기도 했던 거다. 하나 마냥 그럴 수만은 없는 노릇. 이윽고 태무는 손님들 속에 섞여 앉았다.
가수들의 노래는 시원찮았다. 하지만 드디어 남백송이 등장하자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는 게 아닌가? 그래도 그럴 것이 그는 KBS ‘가요무대’에 가장 많이 출연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니까. 남백송은 ‘전화통신’을 불렀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앙코르가 터지기도 전에. 남백송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삼랑진 출신 후배가 여기 와 있습니다. 손님들이 거절하지 않는다면, 함께 제 대표곡‘방앗간 처녀’를 부르고 싶습니다!
그건 정말 뜻밖의 제안이었다. 꿈에서조차 생각 못 했던….맨 정신이 아닌 태무는 벌떡 일어나 무대로 올라갔다. 태무는 심호흡을 하고 전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남백송의 사인에 맞춰 목청에 노래를 실었다. 거울 같은 시냇물 송아지 음매 우는/방앗간 내 고향 수수밭 내 고향…
그 순간이었다. 어느 중년 남자가 흔들리는 걸음으로 무대에 올라오더니 치현에게 다가간 것은! 남자는 천 원짜리 한 장을 손에 들고 그걸 치현에게 전하려 했다. 팁이라며….그걸 받을 밴드 마스터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남자가 품에서 잭나이프를 끄집어내는가 싶더니 곧바로 치현을 향해 내민 것이다. 그 끝이 치현에게 닿기 전에 몸으로 막아선 것은 태무였다. 잭나이프를 맨 손으로 움켜쥐려고 한 건 거의 본능이었다. 왼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의식이 몽롱해졌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첫 번째 탁자에 둘러앉은 일행이 시야에 희미하게 들어왔다, 선글라스를 낀 남자와 여자! 바로 태무에게 퇴짜를 놓았었던 시각 장애 복지원 그 부부였다.
태무는 중상(重傷)을 입었다. 급히 침례 병원으로 옮겨져서 응급 수술을 받았는데, 의사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손바닥이 쩍 갈라졌고, 특히 검지 끝마디 살점이 상당 부분 떨어져 나갔으며, 뼈가 드러났다. 상처야 아물겠지만 미세한 신경의 봉합이 문제라는 이야기를 의사들이 했고.
이튿날 오후였다. 태무를 찾아 온 사람이 있었다. 시각 장애복지관의 그 부부였다. 태무는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데다, 어찌하여 지난 밤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부부가 입을 열었다.
“기자님께 매정한 소릴 해서 미안합니다. 양산에서 저희가 생떼를 부린 거….저희도 사과드리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지예. 어젯밤 그 소란 가운 데, 사태를 수습한 청년들이 제 손자와 친구들 아닙니꺼? 그넘들이 군수사 군악대원들이거든예. 외출 나왔다가 사복 차림으로 저희 따라 술 한 잔 하 러 왔다가 그 광경을 본 거 아닙니꺼?”
대신 말을 이은 사람은 아내와 치현이었다. 그들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 두 분과 가족들은 손자 믿고 비교적 거기 자주 가구요. 칼부림이 날 때 곧 뛰어 올라가 제압한 청년들도 바로 손자와 친구들이랍니다.”
혹시 현역이라 처벌받는 건 아닌가 걱정했더니 웬걸 부대에서 용감한 용사 표창장을 준다고 했다는 대답이다. 그렇게 그 부부와의 극적인 화해도 이루어졌다. 난동을 부린 청년은 물론 구속되었다. 치료비와 약간의 위자료는 업소에서 부담하기로 합의했다.
한데 예후가 좋지 않았다. 보름 넘어 퇴원했지만, 왼팔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특히 검지가 잘 구부려지지 않았고 손끝 마디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다가 이상하게도 그 부위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고 무엇보다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당뇨 때문인 걸 알고 따로 치료를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마침내 내린 주치의의 선고가 절망 그 자체였다. 절단(切斷)!
눈앞이 캄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이를 악문 채 받아들이는 수밖에. 태무는 가끔 절망하였다. 그리고 장탄식….이제 색소폰 연주를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이 손가락을 못 쓰면 ‘시’음(音)을 못 내는데….치명(致命)이 따로 없군.
누구보다 치현이 미안하게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제 때문이었으니까. 그러나 태무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적잖은 돈을 치현이 태무에게 건네기도 했다.
신문사 교열부 기자도 그만두고 집에 죽치고 앉아 있으려니 솔직히 죽을 맛이었다. 물론 색소폰은 들여다보기조차 무서웠다. 다시 우울증에 빠지는가 싶었는데, 치현이와 그 장애인 부부의 손자 김병첨이 가끔 찾아와 위로를 건넸다. 그러던 어느 날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김 병장이 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애창곡 중 하나가 ‘허공’이잖아요? 그걸 한 번 연주해 보세요. 묘하게도 ‘시’음을 죄다 피해 갔습니다. 교본대로 하면 높은 덴 악기로 연주, 낮은 덴 노래를 부르시면 멋질 겁니다.”
그건 아주 평범한 진실이었다. 다시 기운을 차리는 데 몇 달이 걸렸지만, 적어도 정신신경과에는 가지 않아도 됐다. 혼자서 노무현의 생가가 내려다보이는 부엉이 바위에도 몇 번 다녀왔다. 그럴 때마다 처연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딸애가 학교를 대전으로 옮기는 바람에 손자도 돌봐 줄 겸, 낯선 고장에 와 정을 붙이고 살게 된 것.
타관에서 부산 친구가 그리워 자주 전화를 했다. 정지용 선생 연구를 하여 박사 1호 학위를 받은 양왕용 시인, 교열을 볼 때나 작품을 쓸 때 귀찮게 여기지 않고 일일이 대답을 주던 류영남 한글학회 지회장 등이 대상이다. 물론 김치현도 빠질 수 없고. 우연의 일치라고 변명해야 될까? 넷의 화두가 자연스럽게 ‘향수’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몇 달 전 태무는 참으로 대가인, 다른 한 명의 색소포니스트를 만난다. 용인 동백동에 서일범 조이 실용음악학원 원장이었다. 정지용 생가근처에서 해질 녘에 색소폰 연주를 하고 있는 그 가까이 태무가 다가간 것이 계기였다. 곡목은‘향수’였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제가 만난 색소포니스트 중 세 분을 꼽으라고 누가 주문한다면 부산덕성토요노인대학 김광종 과장, 야간업소에 나가지만 아직 도 현역인 김치현 밴드마스터, 그리고 선생님.”
“과찬이십니다. 한데 말씀하시는 분은 색소폰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태무가 왼손 검지를 내 보이며, 사연을 설명했다. 그는 태무에게 연민의 정이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이윽고 그가 태무에게 건넨 뜻밖의 말이다.
“쯧쯧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낙원 악기 상가에 가서 키를 그만큼 이어 서 늘이면 되는 거 모르셨습니까? 이 악보를 보세요. 권태무 기자님에게 이 노래를 권합니다. ‘향수’. 노래와 색소폰 연주를 번갈아 하던….왕년 의 실력을 한 번 뽐내 보세요.”
그 한마디야말로 태무에게는 복음이고도 남았다. 날짜를 잡아 태무는 서일범 원장을 따라 악기 상가에 들러, 색소폰 수리를 했다. 그러고 나서 태무는 인근 산에 올라가 한 달째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온 거다. 결실을 보는 날이 정지용의 생일인 6월 20일, 옥천 행은 그런 연유로 말미암아 이뤄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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