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초상 외 1편
오정국
저 어처구니와 우두커니와 막무가내는
뭉툭한 손을 등 뒤에 감추고
가슴팍의 막대기 무늬 하나로
땅을 짚고 서 있다
강의 오른쪽엔
장맛비가 밀쳐놓은 돌덩어리들
왼쪽은 물결 찰랑대는 자갈밭이다
달싹대던 입술을 뭉개버린
돌의 형상들
이마에 새겨진
천둥 벼락의 순간들이
시커먼 흉터로 얼룩져 있다
일찌감치 손 털고 일어설 자리를 놓쳤다
무심결에 발을 헛디딘
저 오랜 노숙의 일평생
비바람 굽이치면
천둥 번개 환한 길을 더듬어갈 듯한데
장맛비 쓸려간 나뭇가지엔
신발짝과 옷가지와 비닐조각들
여울목의 물살은
희고 맑게 흐르고
돌밭의 막대기 무늬들
이젠 손짓하여 말 할 게 없고
그 어디에도 기댈 데 없는
절름발이와 청맹과니와 백수건달들
목발 짚고 한세상 바라보고 있다
흙의 시간 속에서
나는 이 풍경 속에서 일치감치 재를 꺼내온 것이라
꽃의 시간,
나무의 시간,
흙의 시간을 뒤적거렸지
숨이 차오르도록 헐과 할을 반복하면서
새벽녘에 잠을 깨면
벽시계를 보지 않았어
냉장고 불빛에 얼굴을 펼쳐놓고
쩌억쩌억 금이 가길 기다렸지
얼음덩어리의 푸르스름한 숨결을 따라
내 핏줄 굽이치던 노래가 있었다고 믿었던 거라
현관문이 열리면
도어락 저편으로 사라지는 4608#처럼
액정화면의 타임캡슐에 봉인되긴 싫었어라
나는 이 풍경 속에서
진흙바닥을 뒹굴고 춤추고 노래했지
나의 기억은
폐지와 의류, 쇠붙이로 분류되고
유리병과 플라스틱으로 재활용되는데
분리수거는 일주일에 한번
토요일, 토요일을 끝없이 중얼댔어
나는 이 풍경에 휘감기고 뒤섞이고 흩날렸지
비바람에 흩어지고
폭설에 휩쓸리며
악천후의 후일담으로 남겨진 것이라
컨테이너에 말라붙은 칡덩굴처럼
전봇대 귀퉁이의 입간판처럼
오정국
1956년 경북 영양 출생. 1988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눈먼 자의 동쪽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외 5권,
시론집 현대시 창작시론 : 보들레르에서 네루다까지 야생의 시학 외 2권 출간.
한서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역임. 지훈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