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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상제께서 어느 날 말씀하시되 “너는 나로 하여금 오래 살기를 바라는도다” 하시고 글 한 수를 외우셨도다.
稚子哭問母何之 爲道靑山採藥遲
日落西山人不見 更將何說答啼兒
또 다시 남원(南原) 양진사(楊進士)의 만사를 외워주시니 다음과 같으니라.
詩中李白酒中伶 一去靑山盡寂寥
又有江南楊進士 鷓鴣芳草雨蕭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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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께서 외워주신 남원(南原) 양진사(楊進士)의 만사를 보니 성사께서 외워주신 다른 시가 생각난다.
6. 또 어느 때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步拾金剛景 靑山皆骨餘 其後騎驢客 無興但躊躇
를 외워 주시니라.
(참고) 進=晉
35. 진(晉)
【傳】 晉은 序卦에 物不可以終壯이라 故受之以晉하니 晉者는 進也라 하니라 物无壯而終止之理하니 旣盛壯則必進이니 晉所以繼大壯也라 爲卦 離在坤上하니 明出地上也라 日出於地하여 升而益明이라 故爲晉하니 晉은 進而光明盛大之意[一作義]也라 凡物漸盛爲進이라 故彖云 晉은 進也라 하니라 卦有有德者하고 有无德者하니 隨其宜也라 乾坤之外에 云元亨者는 固有也요 云利貞者는 所不足而可以有功也라 有不同者는 革漸이 是也니 隨卦可見이라 晉之盛而无德者는 无用有也니 晉之明盛이라 故更不言亨이요 順乎大明하니 无用戒正也라.
진괘(晉卦)는 〈서괘전(序卦傳)〉에 “사물은 끝까지 장성할 수 없으므로 진괘(晉卦)로 받았으니, 진(晉)은 나아감이다.” 하였다. 사물은 장성하고서 끝내 멈추는 이치가 없으니, 이미 장성하면 반드시 나아가니, 진괘(晉卦)가 이 때문에 대장괘(大壯卦)를 이은 것이다. 괘(卦)됨이 이(離)가 곤(坤)의 위에 있으니, 밝음이 지상(地上)으로 나오는 것이다. 해가 땅에서 나와 올라가 더욱 밝으므로 진(晉)이라 하였으니, 진(晉)은 나아가 광명하고 성대한 뜻이다. 무릇 사물은 점점 성함을 진(進)이라 한다. 이 때문에 〈단전(彖傳)〉에 “진(晉)은 나아감이다.” 하였다. 괘(卦)에는 덕(德)이 있는 것이 있고 덕(德)이 없는 것이 있으니, 그 마땅함에 따른다. 건(乾)·곤괘(坤卦) 이외에서 ‘원형(元亨)’이라고 말한 것은 원래 갖고 있는 것이요, ‘이정(利貞)’이라고 말한 것은 정(貞)은 부족하지만 공(功)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같지 않은 경우는 혁괘(革卦)와 점괘(漸卦)가 이것이니, 괘(卦)에 따라 볼 수 있다. 나아감이 성한데도 덕(德)을 말함이 없는 것은 있을 필요가 없어서이니, 나아감이 밝고 성하기 때문에 다시 형통함을 말하지 않았고, 크게 밝음에 순종하니 바름을 경계할 필요가 없어서이다.
晉은 康侯를 用錫馬蕃庶하고 晝日三接이로다.
진(晉)은 나라를 편안히 하는 제후(諸侯)에게 말을 하사(下賜)하기를 많이 하고 낮에 세 번 접견(接見)하도다.
【傳】 晉爲進盛之時하니 大明在上而下體順附는 諸侯承王之象也라 故爲康侯하니 康侯者는 治安之侯也라 上之大明而能同德以順附는 治安之侯也라 故受其寵數하여 錫之馬衆多也라 車馬는 重賜也요 蕃庶는 衆多也라 不唯錫與之厚라 又見親禮하여 晝日之中에 至於三接하니 言寵遇之至也라 晉은 進盛之時니 上明下順하여 君臣相得이라 在上而言則進於明盛이요 在臣而言則進升高顯하여 受其光寵也라.
진(晉)은 나아가 성한 때가 되니, 크게 밝음으로 위에 있고 하체(下體)가 순히 따름은 제후(諸侯)가 왕(王)을 받드는 상(象)이다. 그러므로 강후(康侯)라 하였으니, 강후(康侯)는 다스려서 편안하게 하는 제후(諸侯)이다. 위가 크게 밝은데 덕(德)을 함께 하여 순히 따름은 치안(治安)하는 제후(諸侯)이다. 그러므로 총애와 예수(禮數)를 받아서 말을 하사(下賜)함이 많은 것이다. 거마(車馬)는 중한 하사(下賜)이고 번서(蕃庶)는 많음이다. 하사하기를 후하게 할 뿐만 아니라 또 친애(親愛)와 예우(禮遇)를 당하여 낮 가운데에 세 번 접견(接見)함에 이르렀으니, 총애와 대우가 지극함을 말한 것이다. 진(晉)은 나아가 성한 때이니, 위가 밝고 아래가 순하여 군(君)·신(臣)이 서로 맞는다. 상(上)의 입장에서 말하면 광명(光明)함이 성대(盛大)한 데 나아가고, 신하(臣下)의 입장에서 말하면 높고 드러난 지위에 나아가서 그 영광과 총애를 받는 것이다.
【本義】 晉은 進也요 康侯는 安國之侯也라 錫馬蕃庶, 晝日三接은 言多受大賜而顯被親禮也라 蓋其爲卦 上離下坤하여 有日出地上之象과 順而麗乎大明之德이며 又其變이 自觀而來하여 爲六四之柔 進而上行하여 以至于五하니 占者有是三者면 則亦當有是寵也라.
진(晉)은 나아감이요 강후(康侯)는 나라를 편안히 하는 제후(諸侯)이다. 말을 하사(下賜)함이 많고 낮에 세 번 접견(接見)한다는 것은 큰 하사(下賜)를 많이 받고 친애(親愛)와 예우(禮遇)를 드러나게 입음을 말한 것이다. 괘(卦)됨이 위는 이(離)이고 아래는 곤(坤)이어서 해가 지상(地上)으로 나오는 상(象)과 순히 하여 대명(大明)에 붙는 덕(德)이 있으며, 또 그 변(變)이 관괘(觀卦)[ ]로부터 와서 육사(六四)의 유(柔)가 나아가 상행(上行)하여 오(五)에 이름이 되니, 점치는 이가 이 세 가지 덕(德)이 있으면 또한 마땅히 이러한 은총이 있을 것이다.
彖曰 晉은 進也니,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진(晉)은 나아감이니,
【本義】 釋卦名義라.
괘명(卦名)의 뜻을 해석하였다.
明出地上하여 順而麗乎大明하고 柔進而上行이라 是以康侯用錫馬蕃庶晝日三接也라.
밝음이 지상에 나와 순히 하여 대명(大明)에 붙고 유(柔)가 나아가 상행(上行)한다. 이 때문에 나라를 편안히 하는 제후(諸侯)에게 말을 하사(下賜)함이 많고 낮에 세 번 접견하는 것이다.”
【傳】 晉進也는 明進而盛也라 明出於地하여 益進而盛이라 故爲晉하니 所以不謂之進者는 進爲前進이요 不能包明盛之義일새라 明出地上은 離在坤上也라 坤麗於離하여 以順麗於大明하니 順德之臣이 上附於大明之君也라 柔進而上行은 凡卦離在上者는 柔居君位하여 多云柔進而上行하니 噬嗑, 睽, 鼎이 是也라 六五以柔居君位하여 明而順麗하니 爲能待下寵遇親密之義라 是以爲康侯用錫馬蕃庶, 晝日三接也라 大明之君은 安天下者也라 諸侯能順附天子之明德하니 是康民安國之侯也라 故謂之康侯라 是以享寵錫而見親禮하여 晝日之間에 三接見於天子也라 不曰公卿而曰侯는 天子는 治於上者也요 諸侯는 治於下者也니 在下而順附於大明之君은 諸侯之象也라.
‘진진야(晉進也)’는 밝음이 나아가 성한 것이다. 밝음이 땅에서 나와 더욱 나아가 성하므로 진(晉)이라 하였으니, 진(進)이라고 이르지 않은 까닭은 진(進)은 전진(前進)하는 것만 되고 광명성대(光明盛大)의 뜻을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출지상(明出地上)’은 이(離)가 곤(坤)의 위에 있는 것이다. 곤(坤)이 이(離)에 붙어 있어 순함으로써 대명(大明)에 붙어 있으니, 순덕(順德)의 신하(臣下)가 위로 대명(大明)의 군주(君主)를 따르는 것이다. ‘유진이상행(柔進而上行)’은 무릇 괘(卦)에 이(離)가 위에 있는 것은 유(柔)가 군위(君位)에 거하여 ‘유진이상행(柔進而上行)’이라고 많이 말하였으니, 서합괘(噬嗑 卦)와 규괘(睽卦)와 정괘(鼎卦)가 이것이다. 육오(六五)가 유(柔)로서 군위(君位)에 거하여 밝고 순히 따르니, 아랫사람을 대함에 총애하고 예우하고 친밀(親密)히 하는 뜻이 된다. 이 때문에 나라를 편안히 하는 제후(諸侯)에게 말을 하사(下賜)함이 많고 낮에 세 번 접견(接見)함이 되는 것이다. 대명(大明)의 군주(君主)는 천하(天下)를 편안히 하는 이이다. 제후(諸侯)가 천자의 밝은 덕(德)에 순히 따르니, 이는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편안히 하는 제후(諸侯)이다. 그러므로 강후(康侯)라 이른 것이다. 이 때문에 은총과 하사(下賜)를 누리고 친애(親愛)와 예우(禮遇)를 받아서 낮 사이에 세 번이나 천자를 접견하는 것이다. 공경(公卿)이라 말하지 않고 후(侯)라 말한 것은 천자(天子)는 위에서 다스리는 이이고 제후(諸侯)는 아래에서 다스리는 이이니, 아래에 있으면서 대명(大明)의 군주(君主)를 순히 따름은 제후(諸侯)의 상(象)이다.
【本義】 以卦象卦德卦變으로 釋卦辭라.
괘상(卦象)과 괘덕(卦德)과 괘변(卦變)으로 괘사(卦辭)를 해석하였다.
象曰 明出地上이 晉이니 君子以하여 自昭明德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밝음이 지상(地上)에 나옴이 진(晉)이니, 군자(君子)가 이로써 스스로 밝은 덕(德)을 밝힌다.”
【傳】 昭는 明之也라 傳曰 昭德塞違는 昭其度也라 하니라 君子觀明出地上而益明盛之象하여 而以自昭其明德이라 去蔽致知는 昭明德於己也요 明明德於天下는 昭明德於外也라 明明德은 在己라 故云自昭라
소(昭)는 밝힘이다. 좌전(左傳)에 이르기를 “덕(德)을 밝히고 잘못을 막음은 그 법도(法度)를 밝힘이다.” 하였다. 군자가 밝음이 지상(地上)으로 나와 더욱 광명성대(光明盛大)한 상(象)을 관찰하여 스스로 밝은 덕(德)을 밝힌다. 가리움을 제거하고 앎을 지극히 함은 밝은 덕(德)을 자신에게 밝힘이요, 명덕(明德)을 천하에 밝힘은 밝은 덕(德)을 밖에 밝히는 것이다. 명덕(明德)을 밝힘은 자신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스스로 밝힌다고 말한 것이다.
【本義】 昭는 明之也라.
소(昭)는 밝힘이다.
初六은 晉如摧如에 貞이면 吉하고 罔孚라도 裕면 无咎리라.
초육(初六)은 나아가거나 물러감에 정(貞)하면 길(吉)하고 믿어주지 않더라도 여유로우면 허물이 없으리라.
【本義】 晉如摧如니,
【본의】 나아가다가 꺾임이니
【傳】 初居晉之下하니 進之始也라 晉如는 升進也요 摧如는 抑退也니 於始進而言하되 遂其進, 不遂其進에 唯得正則吉也라 하니라 罔孚者는 在下而始進하니 豈遽能深見信於上이리오 苟上未見信이면 則當安中自守하고 雍容寬裕하여 无急於求上之信也라 苟欲信之心切인댄 非汲汲以失其守면 則悻悻以傷於義矣니 皆有咎也라 故裕則无咎하니 君子處進退之道也라.
초(初)는 진(晉)의 아래에 거하였으니, 나아감의 시초이다. 진여(晉如)는 올라감이요, 최여(摧如)는 꺾여 물러남이니, 처음 나아갈 때에 말하기를 “나아감을 이루거나 나아감을 이루지 못하거나 오직 정도(正道)를 얻으면 길하다.” 한 것이다.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아래에 있으면서 처음 나아가니, 어찌 대번에 윗사람에게 깊이 신임(信任)을 받겠는가. 만일 윗사람이 믿어주지 않으면 마땅히 중도(中道)를 편안히 여기고 스스로 지키며 옹용(雍容)하고 관유(寬裕)하여 윗사람의 신임을 구함에 급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만일 믿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급급히 그 지킴을 잃지 않으면 행행(悻悻)하여 의(義)를 상하게 되니, 모두 허물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유로우면 허물이 없는 것이니, 군자가 진퇴(進退)에 대처하는 도(道)이다.
【本義】 以陰居下하여 應不中正하니 有欲進見摧之象이라 占者如是而能守正則吉이요 設不爲人所信이라도 亦當處以寬裕則无咎也라.
음(陰)으로서 아래에 거하여 응(應)이 중정(中正)하지 못하니, 나아가고자 하다가 꺾임을 당하는 상(象)이 있다. 점치는 이가 이와 같은데도 능히 정도(正道)를 지키면 길(吉)하고, 설령 남에게 신임(信任)을 받지 못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관유(寬裕)함으로 처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象曰 晉如摧如는 獨行正也요 裕无咎는 未受命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진여최여(晉如摧如)’는 홀로 바름을 행함이요, 여유로우면 허물이 없음은 명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傳】 无進无抑이요 唯獨行正道也라 寬裕則无咎者는 始欲進而未當位故也라 君子之於進退에 或遲或速이 唯義所當이니 未嘗不裕也라 聖人이 恐後之人不達寬裕之義하여 居位者廢職失守以爲裕라 故特云 初六裕則无咎者는 始進에 未受命當職任故也라 若有官守에 不信於上而失其職이면 一日不可居也라 然事非一槪니 久速唯時요 亦容有爲之兆者라.
나아가거나 물러감을 막론하고 오직 홀로 정도(正道)를 행하여야 한다. 관유(寬裕)하면 허물이 없다는 것은 처음 나아가고자 하여 지위를 담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자가 진퇴(進退)함에 혹 더디게 하고 혹 빠르게 함을 오직 의(義)에 마땅하게 하니, 일찍이 여유롭지 않은 적이 없다. 성인(聖人)은 후세(後世) 사람들이 관유(寬裕)의 뜻을 통달하지 못하여 지위에 있는 이가 직책을 폐하고 지킴을 잃는 것을 유(裕)라고 여길까 염려하였다. 그러므로 특별히 말씀하기를 “초육(初六)이 여유로우면 허물이 없다는 것은 처음 나아감에 명령을 받아 직임(職任)을 담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관수(官守)가 있는데 윗사람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여 직분을 잃는다면 하루라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은 한결같지가 않으니, 오래하고 속히 함을 오직 때에 맞게 하여야 하고 역시 혹 할 수 있는 조짐을 하여야 한다.”
【本義】 初居下位하여 未有官守之命이라.
초(初)가 하위(下位)에 거하여 관수(官守)의 명령이 있지 않다.
六二는 晉如愁如나 貞이면 吉하리니 受玆介福于其王母리라.
육이(六二)는 나아감이 근심스러우나 정(貞)하면 길(吉)하리니, 큰 복(福)을 조모(祖母)에게 받으리라.
【傳】 六二在下하여 上无應援하고 以中正柔和[一作順]之德하니 非强於進者也라 故於進에 爲可憂愁하니 謂其進之難也라 然守其貞正則當得吉이라 故云晉如愁如貞吉이라 王母는 祖母也니 謂陰之至尊者니 指六五也라 二以中正之道로 自守면 雖上无應援하여 不能自進이나 然其中正之德이 久而必彰하여 上之人이 自當求之리니 蓋六五大明之君이 與之同德하니 必當求之하여 加之寵祿하리니 受介福於王母也라 介는 大也라.
육이(六二)가 아래에 있어 위에 응원(應援)이 없고 중정(中正) 유화(柔和)의 덕(德)을 쓰니, 나아감에 강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아감에 근심스러울 만하니, 나아감이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정정(貞正)을 지키면 마땅히 길(吉)함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여수여정길(晉如愁如貞吉)’이라 한 것이다. 왕모(王母)는 조모(祖母)이니, 음(陰)의 지극히 높은 이를 이르니, 육오(六五)를 가리킨다. 이(二)가 중정(中正)의 도(道)로 스스로 지키면 비록 위에 응원(應援)이 없어 스스로 나아갈 수 없으나 중정(中正)한 덕(德)이 오래되면 반드시 드러나 윗사람이 스스로 마땅히 구할 것이니, 육오(六五) 대명(大明)의 군주(君主)가 자기와 더불어 덕(德)이 같으니, 반드시 마땅히 구하여 총록(寵祿)을 가하리니, 큰 복(福)을 왕모(王母)에게 받는 것이다. 개(介)는 큼이다.
【本義】 六二中正이요 上无應援이라 故欲進而愁하니 占者如是而能守正이면 則吉而受福于王母也라 王母는 指六五니 蓋享先妣之吉占이요 而凡以陰居尊者 皆其類也라.
육이(六二)가 중정(中正)하고 위에 응원(應援)이 없으므로 나아가고자 하나 근심하니, 점치는 이가 이와 같은데도 정도(正道)를 지키면 길(吉)하여 복(福)을 왕모(王母)에게 받을 것이다. 왕모(王母)는 육오(六五)는 가리키니, 선비(先妣)를 제향(祭享)하는 길점(吉占)이요, 무릇 음(陰)으로서 존위(尊位)에 거한 것이 모두 그 유(類)이다.
象曰 受玆介福은 以中正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큰 복(福)을 받음은 중정(中正)하기 때문이다.”
【傳】 受玆介福은 以中正之道也라 人能守中正之道면 久而必亨이니 況大明在上而同德하니 必受大福也라.
이 큰 복(福)을 받음은 중정(中正)의 도(道)를 행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중정(中正)의 도(道)를 지키어 오래면 반드시 형통(亨通)하니, 하물며 크게 밝은 군주(君主)가 위에 있고 덕(德)이 같으니, 반드시 큰 복(福)을 받을 것이다.
六三은 衆允이라 悔亡하니라.
육삼(六三)은 무리가 믿어주니 뉘우침이 없다.
【傳】 以六居三하여 不得中正하니 宜有悔咎[一作吝]로되 而三在順體之上하니 順之極者也요 三陰이 皆順上者也니 是三之順上은 與衆同志하여 衆所允從이니 其悔所以亡也라 有順上向明之志而衆允從之면 何所不利리오 或曰 不由中正而與衆同이 得爲善乎아 曰 衆所允者는 必至當也라 況順上之大明하니 豈有不善也리오 是以悔亡이니 蓋亡其不中正之失矣라 古人曰 謀從衆則合天心이라 하니라.
육(六)이 삼(三)에 거하여 중정(中正)을 얻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뉘우침과 허물이 있을 것이나 삼(三)이 순체(順體)의 위에 있으니 순함이 지극한 것이고 세 음(陰)이 모두 위에 순종하는 것이니, 삼(三)이 위에 순종함은 무리와 뜻을 함께 하여 무리가 믿어 따르는 바이니, 뉘우침이 없게 된 이유이다. 위에 순종하고 밝음을 향하는 뜻이 있고 무리가 믿고 따라준다면 어느 것인들 이롭지 않겠는가. 혹자가 말하기를 “중정(中正)을 따르지 않고 무리와 함께 함이 선(善)이 될 수 있는가?” 하기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무리가 믿는 것은 반드시 지당한 것이다. 하물며 위의 대명(大明)에게 순종하니, 어찌 불선(不善)함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뉘우침이 없는 것이니, 중정(中正)하지 못한 잘못이 없는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계책은 여러 사람을 따르면 천심(天心)에 부합한다.’ 하였다.”
【本義】 三不中正하여 宜有悔者로되 以其與下二陰으로 皆欲上進이라 是以로 爲衆所信而悔亡也라.
삼(三)은 중정(中正)하지 못하여 마땅히 뉘우침이 있을 것이나 아래 두 음(陰)과 함께 모두 위로 나아가고자 하기 때문에 무리에게 신임(信任)을 받아 뉘우침이 없는 것이다.
象曰 衆允之志는 上行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무리가 믿어주는 뜻은 위로 가는 것이다.”
【傳】 上行은 上順麗於大明也라 上從大明之君은 衆志之所同也라.
상행(上行)은 위로 대명(大明)에 순히 붙는 것이다. 위로 대명(大明)의 군주(君主)를 따름은 무리의 뜻이 같은 것이다.
九四는 晉如鼫鼠니 貞이면 厲하리라.
구사(九四)는 나아감이 석서(鼫鼠)[쥐의 일종]이니 정고(貞固)하면 위태로우리라.
【本義】 貞하나,
【본의】 바르더라도,
【傳】 以九居四는 非其位也니 非其位而居之는 貪據其位者也라 貪處高位는 旣非所安이요 而又與上同德하여 順麗於上하고 三陰이 皆在己下하여 勢必上進이라 故其心畏忌之하니 貪而畏人者는 鼫鼠也라 故云晉如鼫鼠라 하니 貪於非據而存畏忌之心이니 貞固守此면 其危可知라 言貞厲者는 開有改之道也라.
구(九)가 사(四)에 거함은 제자리가 아니니, 제자리가 아닌데 거함은 그 지위를 탐하여 차지한 것이다. 높은 지위를 탐하여 처함은 이미 편안한 바가 아니요, 또 상(上)과 덕(德)이 같아서 위에 순히 붙고 세 음(陰)이 모두 자신의 아래에 있어 형세가 반드시 위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에 두려워하고 꺼리니, 탐하여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석서(鼫鼠)이다. 그러므로 ‘진여석서(晉如鼫鼠)’라 말하였으니, 차지할 자리가 아닌 것을 탐하여 두려워하고 꺼리는 마음을 두니, 정고(貞固)하게 이를 지키면 그 위태로움을 알 수 있다. ‘정려(貞厲)’라고 말한 것은 고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本義】 不中不正하여 以竊高位하고 貪而畏人은 蓋危道也라 故爲鼫鼠之象이니 占者如是면 雖正亦危라.
중정(中正)하지 못하면서 높은 지위를 도둑질하고 탐하여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위험한 길이다. 그러므로 석서(鼫鼠)의 상(象)이 되니, 점치는 이가 이와 같으면 비록 바르더라도 위태로울 것이다.
象曰 鼫鼠貞厲는 位不當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석서정려(鼫鼠貞厲)’는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다.”
【傳】 賢者는 以正德하니 宜在高位어니와 不正而處高位則爲非據라 貪而懼失則畏人이니 固處其地면 危可知也라.
현자(賢者)는 바른 덕(德)을 쓰니 마땅히 높은 지위에 있어야 하나 바르지 못하면서 높은 지위에 처하면 차지할 자리가 아닌 것이 된다. 탐하여 잃을 것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하니, 그 자리에 굳게 처하면 위험함을 알 수 있다.
六五는 悔亡인댄 失得을 勿恤이니 往吉하여 无不利리라.
육오(六五)는 뉘우침이 없을진댄 잃고 얻음을 근심하지 말 것이니, 감에 길(吉)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으리라.
【本義】 悔亡하니 失得을 勿恤하면 往吉하여,
【본의】 뉘우침이 없으니, 잃고 얻음을 근심하지 않으면 감에 길하여,
【傳】 六以柔居尊位하여 本當有悔로되 以大明而下皆順附라 故其悔得亡也라 下旣同德順附면 當推誠委任하여 盡衆人之才하고 通天下之志요 勿復自任其明하여 恤其失得이니 如此而往이면 則吉而无不利也라 六五는 大明之主니 不患其不能明照요 患其用明之過하여 至於察察하여 失委任之道라 故戒以失得勿恤也라 夫私意偏任하여 不察則有蔽어니와 盡天下之公이면 豈當[一作得]復用私察也리오.
육(六)은 유(柔)로서 존위(尊位)에 거하여 본래 뉘우침이 있을 것이로되 대명(大明)이어서 아래가 모두 순히 따르기 때문에 그 뉘우침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아래가 이미 덕(德)을 같이 하고 순히 따르면 마땅히 정성을 미루어 위임하여 중인(衆人)의 재주를 다하고 천하의 뜻을 통할 것이요, 다시 그 밝음을 자임(自任)하여 잃고 얻음을 근심하지 말 것이니, 이와 같이 하여 가면 길(吉)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육오(六五)는 대명(大明)의 군주(君主)이니, 밝게 비추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고 밝음을 씀이 지나쳐 살피고 살핌에 이르러 위임(委任)하는 도(道)를 잃을까 염려된다. 그러므로 잃고 얻음을 근심하지 말라고 경계한 것이다. 사사로운 뜻으로 편벽되게 맡겨서 살피지 않으면 가리움이 있으나 천하의 공정함을 다한다면 어찌 다시 사사로운 살핌을 쓰겠는가.
【本義】 以陰居陽하여 宜有悔矣로되 以大明在上而下皆順從이라 故占者得之則其悔亡이라 又一切去其計功謀利之心이면 則往吉而无不利也라 然亦必有其德이라야 乃應其占耳라.
음(陰)으로서 양위(陽位)에 거하여 마땅히 뉘우침이 있을 것이나 대명(大明)으로 위에 있어 아래가 모두 순종하기 때문에 점치는 아가 얻으면 뉘우침이 없는 것이다. 또 일체 공(功)을 계산하고 이익을 도모하는 마음을 버리면 감에 길(吉)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이러한 덕(德)이 있어야 이 점(占)에 응할 것이다.
象曰 失得勿恤은 往有慶也리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잃고 얻음을 근심하지 않음은 감에 경사(慶事)가 있는 것이다.”
【傳】 以大明之德으로 得下之附하여 推誠委任이면 則可以成天下之大功이니 是往而有福慶也라.
대명(大明)의 덕(德)으로 아래의 따름을 얻어 정성을 미루어 위임(委任)하면 천하의 대공(大功)을 이룰 수 있으니, 이는 감에 복경(福慶)이 있는 것이다.
上九는 晉其角이니 維用伐邑이면 厲하나 吉하고 无咎어니와 貞엔 吝하니라.
상구(上九)는 뿔에 나아감이니, 오직 읍(邑)을 정벌하는데 사용하면 사나우나 길(吉)하고 허물이 없거니와 정도(貞道)엔 부끄럽다.
【本義】 貞이라도 吝하리라.
【본의】 바르더라도 부끄러우리라.
【傳】 角은 剛而居上之物이라 上九以剛居卦之極이라 故取角爲象하니 以陽居上은 剛之極也요 在晉之上은 進之極也니 剛極則有强猛之過하고 進極則有躁急之失이라 以剛而極於進이면 失中之甚也니 无所用而可요 維獨用於伐邑이면 則雖厲而吉且无咎也라 伐四方者는 治外也요 伐其居邑者는 治內也니 言伐邑은 謂內自治也라 人之自治 剛極則守道愈固요 進極則遷善愈速이니 如上九者 以之自治면 則雖傷於厲而吉且无咎也라 嚴厲는 非安和之道로되 而於自治則有功也라 復云貞吝하여 以盡其義하니 極於剛進이면 雖自治有功이나 然非中和之德이라 故於貞正之道에 爲可吝也라 不失中正이 爲貞이라.
각(角)은 강(剛)하고 위에 있는 물건이다. 상구(上九)가 강(剛)으로서 괘(卦)의 극(極)에 처하였으므로 뿔을 취하여 상(象)을 삼았으니, 양(陽)으로서 상(上)에 거함은 강(剛)이 지극함이요 진(晉)의 위에 있음은 나아감이 지극한 것이니, 강(剛)함이 지극하면 강하고 사나운 잘못이 있고, 나아감이 지극하면 조급한 실수가 있다. 강(剛)함으로서 나아감에 지극하면 중(中)을 잃음이 심하니, 쓰는 데마다 가(可)함이 없고 오직 읍(邑)을 정벌하는데 사용하면 비록 사나우나 길(吉)하고 또 허물이 없을 것이다. 사방(四方)을 정벌함은 밖을 다스림이요 거주하는 읍(邑)을 정벌함은 안을 다스림이니, 읍을 정벌한다고 말함은 안으로 스스로 다스림을 말한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다스림은 강(剛)함이 지극하면 도(道)를 지킴이 더욱 굳고 나아감이 지극하면 선(善)으로 옮김이 더욱 빠르니, 상구(上九)와 같은 것은 이것으로 스스로 다스리면 비록 사나움에 상(傷)하나, 길(吉)하고 또 허물이 없는 것이다. 엄려(嚴厲)는 편안하고 화(和)한 도(道)가 아니나 스스로 다스림에 공(功)이 있는 것이다. 다시 ‘정린(貞吝)’이라고 말하여 그 뜻을 다하였으니, 강(剛)하고 나아감에 지극하면 비록 스스로 다스림에는 공(功)이 있으나 중화(中和)의 덕(德)이 아니기 때문에 정정(貞正)의 도(道)에 부끄러울 만한 것이다. 중정(中正)을 잃지 않음이 정(貞)이 된다.
【本義】 角은 剛而居上하니 上九剛進之極하여 有其象矣라 占者得之而以伐其私邑이면 則雖危而吉且无咎라 然以極剛治小邑하니 雖得其正이라도 亦可吝矣라.
각(角)은 강(剛)하고 위에 있으니, 상구(上九)가 강(剛)하고 나아감이 지극하여 이러한 상(象)이 있는 것이다. 점치는 이가 이것을 얻어 사읍(私邑)을 정벌하면 비록 위태로우나 길(吉)하고 또 허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강(剛)함으로써 작은 고을을 다스리니, 비록 바름을 얻더라도 역시 부끄러울 만하다.
象曰 維用伐邑은 道未光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오직 읍(邑)을 정벌함에 씀은 도(道)가 광대(光大)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傳】 維用伐邑이면 旣得吉而无咎어늘 復云貞吝者는 貞道未光大也니 以正理言之하면 尤可吝也라 夫道旣光大則无不中正이니 安有過也리오 今以過剛自治면 雖有功矣나 然其道未光大라 故亦可吝이니 聖人言盡善之道라.
오직 읍을 정벌함에 쓰면 이미 길(吉)함을 얻고 허물이 없는데 다시 ‘정린(貞吝)’이라고 말한 것은 정도(貞道)가 광대(光大)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정리(正理)로 말하면 더욱 부끄러울 만하다. 도(道)가 이미 광대(光大)하면 중정(中正)하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지나침이 있겠는가. 지금 지나치게 강(剛)함으로써 스스로 다스리면 비록 공(功)이 있으나 그 도(道)가 광대(光大)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역시 부끄러울 만하니, 성인(聖人)이 진선(盡善)의 도(道)를 말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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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5DtPTto0L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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