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힘겨운 시간이었다. 그는 매우, 그리고 너무도 조심스럽게 했다. 하지만 쾌락왕은 도박의 늑대였으니 그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기회는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심랑은 연달아 다섯 번을 상대의 제의를 따르지 않아 이만오천 냥을 잃었다. 심지어 그는 상대방의 패가 뭔지조차 구경도 못했고 또 감히 보지도 못했다. 한 번은 분명히 쾌락왕의 패가 절대로 다섯 점을 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의 손에는 여덟 점이 쥐여져 있었다. 그러나 결코 따라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자신감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한 자신이 없으면 다시 도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약 밑천을 다 잃는다면 다시 일어설 기회가 없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그는 '잡오'대 '천공'으로 두 번을 이겨서 삼만 오천 냥을 만회하여 밑천이 약간 늘었다. 하지만 쾌락왕이 또 연달아 '삼점'으로 그의 '일곱점'을 겁주어 이겼고 또 '호두'로 그의 '잡구'를 이겼다. 심랑이 만약 다시 '천공'으로 이기지 못했다면 그의 밑천은 거의 반 이상이 나갔을 것이다. 오만 냥은 절대로 부족했으나 구만 냥은 그런대로 액수가 됐다. 주사위가 접시 위에서 청아한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고 있었고 은자와 패도 소리없이 탁자 위를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동안 이 기나긴 밤은 이렇게 흘러갔다. 그러나 쾌락왕의 눈빛은 더욱 빛나만 갔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전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심랑만이 내심 피로를 느꼈는데 그것은 너무 얻어맞았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남에게 내색을 할 수 없었고 또 절대로 남에게 들켜서도 안 된다. 지금이 바로 그의 생사의 갈림길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이 남은 짧은 시간을 잘 이용해서 이기지 못하면 절대로 반전할 기회가 없을 거라는 것은 너무나 뻔했다. 그에게 드디어 좋은 패가 와 주었다. 그 얼마나 갈망하며 기다렸던가! 첫번째 그가 쥔 것은 '아대'였고 두번째는 '천구'였다. 심랑은 이 두 번에 비록 많이 따지는 못했지만 쾌락왕의 침착하고 예리한 눈빛에서 그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이야말로 반격할 가장 좋은 기회라는 판단이 섰다. 그는 이제 다시 한 번 좋은 패를 쥘 수만 있다면 반드시 그를 죽음으로 몰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쾌락왕도 초조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거의 쓰러져가던 상대가 끝끝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심랑에게 기회가 다시 왔다. 이번이 그의 마지막 기회였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는 영원히 반격할 기회가 없어진다. 심랑은 지금 오로지 좋은 패를 바랄 뿐이다. 오직 좋은 패 하나만을! 그는 정신을 집중해 자신을 억제하여 손이 떨리지 않게 했다. 그는 가볍게 패를 겹치고는 첫번째 패를 보았다. '매화'였다. 이것은 괜찮은 패였다. '매화'가 아직 나온 적이 없으니 또 한 장의 '매화'가 나올 확율이 컸으며 그렇지 않다고 해도 단지 팔구 점의 패만 있어도 그의 승산은 매우 큰 것이다. 천천히 첫번째 패를 옆으로 제끼자 두번째의 패가 보였다. 그는 손바닥에 땀이 베이는 것을 느꼈다. 작고 정교한 골패가 마치 천 근처럼 무거웠다. 두번째 패는 '지'였다. '두 점'이다. 단지 두 점뿐이다. 사람 환장할 두 점인 것이다. 빨간 두 개의 점은 마치 두 개의 심연처럼 그가 빠져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마치 비웃는 듯한 두 개의 눈처럼 허무하게 그를 노려봤다. 그는 첫판에서도 '지'패를 받았었다. 똑 같은 두 개의 붉은 점이었지만 지금의 이 두점과는 왜 이렇게도 다르게 느껴질까? 아까는 이 두 점짜리 패가 그에게 행운을 안겨 줬지만 지금은 불행을 안겨다 줬다. 그가 첫판에 이 패로 시작했듯이 막판에도 이 패로 끝내야 한단 말인가? 모든 사람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마치 더이상 당길 수 없을 때까지 당긴 활처럼 긴장감이 팽배했다. 염향은 이제 거의 숨도 쉬지 못했다. 쾌락왕이 한 웅큼의 은표를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 "삼만 냥을 걸겠소." 심랑은 약간 주저하면서 악에 놓인 은표들을 세더니 말했다. "나도 다시 삼만 냥을 더 걸겠소." 쾌락왕은 거의 생각도 않고 말했다. "난 다시 삼만냥을 걸었소." 이렇게 오천 냥이 한꺼번에 구만 냥으로 껑충 뛰었다. 중인들의 마음도 함께 공중으로 떠올랐고 염향의 심장은 이미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녀는 심랑이 이미 악서 수차례 잃었기 때문에 단지 육칠만 냥 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번이 그의 마지막 밑천임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잃는다면 다시는 회생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녀는 심랑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이렇게 애걸하는 듯했다. (당신의 패가 좋지 않으면 그만 해요. 육칠만 냥을 남기더라도 회생할 기회를 엿볼 수 있잖아요.) 심랑은 그러나 마지막 한 뭉치의 은표도 전부 내밀었다. "삼만 냥에다 다시 삼만오천 냥을 걸겠소." 염향은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다시 생각해보고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심랑은 분명히 좋은 패를 쥐고 있을 거야. 아마 '지존패'를 쥐고 있을 지도 몰라! 그의 패가 좋지 않다면 감히 저렇게 전부를 걸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감히 자신의 마지막 밑천으로 단판 승부를 걸지는 않을 것이다. 도박에 대해 전혀 모르지 않는 한 말이다. 염향은 미소를 금치 못했다. 그녀가 만약 지금 심랑이 쥐고 있는 패가 단지 두 점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 지금쯤 기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쾌락왕은 심랑을 주시했는데 아마도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아 도대체 그가 허세로 모험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려는 듯했다. 심랑은 전혀 움직이지도 않고 마냥 쳐다 보게 했다. 드디어 쾌락왕이 말했다. "날 겁나게 할 수는 없을 거요. 그대는 기껏해야 사오 점밖에는 안 될 테니." "그래요?" "이미 계산이 다 나왔네." 심랑이 자신있게 물었다. "그럼 왜 계속하시지 않습니까? 혹시 일이점 밖에 안 됩니까?" "흥!" 그가 손뼉을 치자 그 뒤에서 한 사람이 즉각 상자를 들고 왔다. 쾌락왕은 상자째 내밀었다. "거기에다 난 구십만 냥을 더 걸겠소." 사방에서 갑자기 소동이 일기 시작했다. 용사해, 주천부도 어느새 이 경천동지할 도박판에 이끌려 난간 밖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용사해의 눈은 동전만큼 크게 떠졌고 주천부의 코에서는 계속 연기가 났다. 심랑은 단지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는 손끝으로 골패만 만지작거렸다. 쾌락왕이 물었다. "어떤가? 계속 걸 텐가?" "방금 잊고 묻지 않은 것이 있는데 만약 밑천이 모자랄 때는 지는 겁니까?" "밑천이 모자라오?" "누구든지 구십만 냥이라는 그 많은 밑천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대왕께서도 잘 아실 텐데요." 쾌락왕은 마치 독수리처럼 심랑을 노려봤다. "현찰이 없다면 저당도 되오." "저 분 주 형조차도 구십만 냥 가치의 저당물이 없을 텐데 하물며 난...... 난 몸에 값나갈 만한 물건을 지닌 것이 없소." 쾌락왕의 두 눈에 냉혹한 미소가 살짝 스쳤다. "다른 사람의 몸에는 구십만 냥 짜리의 물건이 없을지라도 그대의 몸에는 있지." "있다구요?" 갑자기 심랑은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하였다. "대왕께서는 혹시 저보고 목숨을 저당 잡히라는 말씀인가요?" "귀하께서 자신의 목숨을 겨우 구십만 냥 짜리로 본다면 너무 자신을 얕보는 거요." 심랑이 웃음을 멈추더니 물었다. "그럼 대체 뭣이죠?" "손가락이오." 심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손가락?" "맞소, 귀하의 손가락마다 모두 사오십만 냥의 가치가 있소." "본인은 오늘에서야 내 손가락이 그런 가치가 있는 줄 알았소." 쾌락왕은 냉랭하게 말했다. "귀하가 이긴다면 이 탁자 위의 모든 돈은 다 당신 것이 되는 것이오. 하지만 귀하가 진다면 단지 두 개의 손가락만 잘라주면 되오." 그는 짧게 냉소를 흘리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손가락은 열 개가 있으니 두 개를 자른다 해도 별 상관은 없을 것이오." 그들 두 사람이 한 마디씩 대화를 주고받을 때마다 중인들의 안색도 그들의 대화내용에 따라 붉어졌다 파래졌다 하고 변했다. 염향은 만약 난간을 잡지 않았다면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이 얼마나 참혹한 도박판인가? 세상에, 멀쩡하게 피가 끓고 있는 몸체를 하찮은 판돈에 비교하다니? 심랑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왕께서 저의 엄지손가락을 자른다면 전 영원히 검을 쥘 수 없게 될 것이고, 저의 식지와 중지를 자른다면 전 평생토록 혈도를 누를 수 없게 되니 이제 생각해 보니 두 손가락의 용도가 상당히 많군요." 쾌락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용기가 없다면 그만 두시오." 심랑은 그를 주시하며 약 한 잔의 차 마실 시간을 보내더니 말했다. "하겠소." '하겠소.'라는 말이 떨어지자 중인들은 마치 목이 조이는 듯이 갑자기 숨을 멈췄다. 쾌락왕 역시 몸을 약간 떨더니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하겠다고?" "하겠소." 쾌락왕이 무섭게 물었다. "그대는 어떤 패지?" "좋은 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나쁜 패도 아니오." 그는 미소 지으며 패를 펼쳤다. 두 점이다! 세상에 두 점이라니! 중인들은 멈췄던 호흡을 이때서야 크게 내쉬었다. 사람들은 감히 방자하게 굴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약간의 소동은 여전히 남아돌았다. 염향은 '탁'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끝났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 심랑이 죽고 싶어 환장한 거야! 겨우 두 점 갖고! 두 점으로 감히 맞서다니! 소동 속에서도 쾌락왕은 석상처럼 여전히 어두운 곳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그의 냉혹하고 예리한 눈이 갑자기 공허해졌다. 그는 허망한 듯 그 두 점의 패를 보더니 천천히 뇌까렸다. "그대는 겨우 두 점이었군. 좋아. 단지 두 점 뿐이라니." 그의 음성은 더욱 공허해져서 대체 좋아하는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렇소. 단지 두 점이오." 쾌락왕이 매섭게 다그쳤다. "그대는 어째서 그런 모험을 했지?" "그것은 대왕의 패가 절대 두 점을 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쾌락왕이 냉소를 쳤다. "그대는 어떻게 알았지? 매우 궁금하군." "첫째, 대왕의 수법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수법 말인가?" "대왕께서는 패가 좋으면 조급해하지 않고 오히려 조용히 남들이 미끼를 물 때까지 기다리고 있죠. 하지만 패가 아주 나쁠 때는 아주 화끈하게 큰 돈을 걸어서 상대를 겁주어 쫓아내더군요." "흥, 그리고?" "그래서 전 이 함정을 파놓은 것입니다." "함정이라고?" "저는 일부러 은표를 세는 척하면서 밑천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일부러 대왕께 보여 드렸죠. 대왕의 '투기심'을 유인한 것이오. 대왕께서는 밑천이 적은 사람은 자신없는 싸움은 절대 안 하고 또 감히 모험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지요. 대왕께서 '투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겠죠?" "이 기회는 자네가 일부러 조작한 거란 말인가?" "그렇소. 대왕께서는 역시 유혹에 넘어 가셨고 대왕께선 제가 큰 액수를 거는 것을 보고는 내심 단지 겁주려는 것으로 아셨지요." "그렇게 자신이 있었나?" "그렇습니다." 쾌락왕은 냉소를 날렸다. "내가 송장이 아닌 다음에야 수법을 바꿀 수도 있었지 않나?"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었죠. 하지만 개인의 습관은 이미 깊이 부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긴장된 상황일수록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인 수법이 나오기 마련이니까요." "본 대왕도 일부러 연막을 쳐서 그대로 하여금 내가 이러한 수법은 쓴다는 것을 미리 알려 도리어 그대를 함정에 집어넣으려고 했을지도 모르지." "그럴 가능성도 물론 있겠지요. 하지만 일이 이지경까지 됐으니 모험을 안할 수는 없었소. 무슨 도박이라도 모험은 꼭 따르는 법이니까. 단지 그 모험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오." 쾌락왕이 갑자기 만족한 듯 크게 웃었다. "좋아. 아주 좋아. 어디 무슨 패인지 직접 보게." 미친 듯한 웃음을 남기며 그는 홀연히 고개도 안 돌리고 그냥 걸어 나갔다. 중인들은 아직도 그의 손에 대체 어떤 패가 쥐여져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대체 점수가 클까, 작을까? 그들은 눈만 멀뚱히 뜨고서 넓은 장포를 입은 인영(人影)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봤다. 심장은 두근반 세근반 하면서 불안하게 뛰고 있었는데 쾌락왕과 겨뤘던 사람이 자신들인 양 긴장했던 것이다. 그 패가 설마 두 점보다 작을까? 아니! 그건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야. 모든 사람들의 손은 떨렸고 그 패가 뭔지 가서 펼치고 싶은 충동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한 사람도 감히 손을 내미는 사람이 없었다. 심랑이 입을 열었다. "대왕께서는 이미 가셨으니 이 패를 내가 펼쳐 보겠소." 그가 막 손을 내밀려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손이 나와 그 패를 눌렀다. 단지 가볍게 누른 것뿐인데도 패가 탁자에 완전히 박혀 들어갔다. 이 손이 바로 아까 허공에서 손짓만으로 하원원을 밀어낸 손이며 소패왕을 내던진 손이었다. 중인들은 얼마 후에야 겨우 그 손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 손은 깡말랐는데 손등에는 군살 한 점 안 보여 완전히 고목나무로 깎아 만든 손 같았다. 곧이어 어색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패는 볼 것도 없어." 심랑이 부드럽게 물었다. "왜요?" "내가 이미 봤다. 그것은 두 점보다 큰 세 점이다." "응? 그럴까?" 그 음성이 진노하였다. "네가 감히 내 말을 믿지 않느냐?" 그의 말이 끝나자 중인들의 안색이 변했다. 심랑이 만약 '아니오'라는 대답을 한다면 그 사람은 즉시 공격을 할 것이다. 심랑이 근래에 명성이 자자하긴 해도 나이가 아직 어리니 어떻게 이 관외 제일의 적수와 감히 맞설 수 있겠는가? 하물며 심랑으로서도 이 사람과 대적을 하면 계획이 전부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랑이 보지도 못하고 패배를 시인한다면 누가 승복을 하겠는가? 한동안 중인들은 마음 속으로 심랑을 위해 긴장을 했다. 심랑이 이 손을 패에서 옆으로 비키게 하는 것은 하늘로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심랑은 담담하게 웃었다. "난 이미 귀하의 무공을 다 구경했소. 과연 대왕 휘하의 제일고수답구려. 귀하는 이것이 뭔지 알겠소?" 그의 손에는 뭔가가 쥐어져 있었다. 그 손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어 받았는데 펼쳐보니 그것은 주사위였다. 그는 갑자기 화를 냈다. "이 주사위가 뭐가 잘못됐다는 말이냐?" "이 주사위가 잘못 된 것은 아니오. 단지 이 패가 뭔지는 봐야겠다는 거요." 호탕한 웃음과 함께 심랑의 손바닥이 가볍게 탁자의 면을 누르자 탁자 면에 완전히 박혔던 패가 갑자기 위로 튀어 올라왔다. 가볍게 눌러서 골패를 탁자에 박히게 한 장력은 굉장한 것이다. 하지만 가볍게 눌러서 이미 박혀있는 골패를 튀어 오르게 한 공력은 더욱 놀라운 신기였다. 중인들이 갈채를 보냈다. 심랑의 손이 골패를 막 잡으려는 찰나에 갑자기 '칙, 칙'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팍, 팍'하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두 개의 골패는 공중에서 완전히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튀겨져 나갔다. 이등용은 미처 피하지 못하여 어깨에 파편을 맞았는데 뼛속까지 아팠다. 곧 두 개의 물체가 탁자 위에 떨어졌는데 아까 그 손이 갖고 있던 주사위였다. 견고한 골패는 이미 산산히 부서져 가루가 되었지만 이 두 개의 주사위만은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이 사람의 손 힘은 정말이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중인들은 어깨를 들썩였다. 이등용은 어깨를 어루만지며 입을 벌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는데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 건지 갈채를 보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음성이 냉랭하게 말했다. "세 점이 두 점을 이기니 그대가 졌어." 심랑은 그래도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만 지었다. "정말로 세점이오?" 그 손이 탁자 위에서 갈무리하자 곧 나머지 삼십 개의 패가 전부 그의 손에 들어갔다. 그 손은 몇 번을 비비고 또 문질렀다. 다시 그 손이 펼쳤을 때는 삼십 장의 골패가 이미 가루가 되어 있었다. 이제 그 두 개의 골패가 과연 세 점이었는지는 더 이상 증거가 없었다. 그 음성이 냉소를 쳤다. "내가 세 점이라고 하면 세 점이야." 심랑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맞아, 내가 믿지 않으려 해도 안 믿을 수 없겠군." 그 음성이 큰 웃음소리를 냈다. "이제 자네도 승복을 해야 할 때야." "하지만 귀하께서는 잊은 것이 있소." 그 음성이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 "뭔데?" 이번에는 심랑이 통쾌하게 웃었다. "바로 이것이오." 그의 두 손은 어느새 탁자 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팍'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탁자의 중간 부분이 갑자기 위로 튀어 올랐다. 심랑이 탁자 밑에서 살짝 치자 견고한 탁자의 중간 부분이 떨어져 나왔는데 그것은 바로 아까 그 두 골패가 박혀 있었던 부분이었다. 심랑은 그것을 번개같이 받아서는 골패가 박혀 새겨진 그 부분을 불빛에 비추었다. 모두에게 아주 똑똑하게 '톡' 튀어나온 열 개의 점이 보였다. 왼쪽의 하나는 '육 점'이었고 오른쪽의 것은 '사 점'이니 합치면 바로 가장 재수없다는 열 점 '망통'이었다. 그 손은 자신이 모든 골패를 가루냈으니 완벽하게 증거를 없앴다고 생각했겠지만 이 두 개의 골패가 박혀 있던 곳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 증거는 바로 그 손, 그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중인들은 입을 쩍하니 벌리고 눈을 크게 뜬 것이 마치 너무나 놀란 것도 같고 칭찬하는 것도 같았다. 심랑이 말했다. "두 점은 망통을 이기니 당신이 졌소." 어둠 속의 그 손은 꼼짝도 않고 단지 그 늑대처럼 냉혹한 두 눈으로 심랑을 노려보고 있었다. 심랑의 눈은 웃음을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중인들은 계속되는 긴장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마침내 그 음성이 가볍게 숨을 내쉬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좋아, 당신이 이겼어." 이번 결투에서 심랑은 백만 냥을 땄다. 은자는 중인들의 찬사와 부러움 속에 밖으로 운반됐다. 동녘이 서서히 밝아왔다. 심랑은 사지를 뻗더니 다시 편안한 그의 의자에 앉았다. 입가에는 미소만 감돌 뿐, 여전히 모든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그 태도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염향은 다시 침상에 웅크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말을 걸었다. "당신은 정말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요. 아까 하마터면 당신 때문에 놀라 죽을 뻔했어요." "정말로 죽지 않은 것이 아깝군." 염향은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봤지만 그래도 웃음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 "아까 당신은 정말로 이길 자신이 있었나요?" 심랑은 담담하게 웃었다. "세상에는 완전한 승산이란 없는 것이오." "하지만 당신이 이겼잖아요." 그녀는 탁자 위에 가득 쌓인 은자를 보더니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어쨌거나 이제 당신은 부자가 됐군요. 아, 백만 냥이라면 보통 사람들은 한평생을 일해도 벌 수 없는 돈이죠." "응? 그런가?" "당신은 이 백만 냥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아세요?" "뭘 할 수 있다는 거요?" 염향은 눈을 지그시 감더니 서서히 읊었다. "백만 냥으로 산 집은 난주 전체의 사람들이 지낼 수 있고요, 백만 냥의 돈으로 산 식량은 감소성의 모든 사람들이 일 년을 먹을 수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계속 이어갔다. "백만 냥의 돈이라면 천 명의 노비들로 하여금 그들의 주인을 배반하게 할 수 있으며 백만 냥의 돈으로는 천 명의 정결한 소녀들의 정조를 살 수 있지요." "하지만 이 백만 냥은 아무데도 쓰이지 못한 채 그냥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오." "사라져......? 불가능해요. 절대 불가능해요. 당신이 정말로 이 백만 냥을 강물에 던져 버린다고 해요. 적어도 난주의 반 이상 사람들이 강물에 뛰어 들어 찾으려 할 걸요?"
"가능해, 절대로 가능하지." "당신과 입씨름하지 않겠어요. 당신께 묻겠는데 이번 첫번째 결투에서는 당신이 이겼지만 다음에는 어쩌죠? 설마 이곳에서 쾌락왕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겠죠?" "내가 그를 찾으러 가면 되지." 염향은 대경실색했다. "그를 찾아 간다구요?" 심랑은 대답도 않고 갑자기 높은 소리로 외쳤다. "춘교 아가씨는 들어오시오." 춘교는 스스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천첩이 막 문을 두드리려고 했는데 심 공자께서는 벌써 알고 계셨네요." 염향은 춘교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자 냉소를 치며 비꼬았다. "어차피 문을 두드리는 습관이 없으니 문을 두드리나 마나 한 것이지." 춘교는 감히 염향을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고 그녀의 말을 받을 용기도 없어 그저 심랑을 향해 웃음을 보냈다. "공자께서는 천첩에게 무슨 분부하실 일이 없으신지요?" "나도 마침 당신을 찾으려고 했었소." 춘교는 안색이 변하면서 물었다. "심 공자께서......절 찾으셨다구요?" "수고스럽지만 난주성에 가서 가장 좋은 진주를 사다 주셔야겠소." 춘교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곧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건 어렵지 않지요. 공자께서는 얼마만큼의 진주를 원하시는지요?" "백만 냥으로 다 사오시오." 춘교와 염향이 동시에 소리쳤다. "백만 냥이라구요?" "너무 적은가 보군. 그럼 백삼십만 냥 만큼 사오시오." 염향은 멍하니 그냥 서 있었으나 춘교는 간신히 더듬거리며 물었다. "백삼십만 냥이라니....... 너무 많은 것은 아닌지요?" "보통 진주를 사라는 것이 아니오. 제일 좋고, 제일 큰 진주를 사라는 것이오. 모든 진주의 크기는 큰 포도알만 해야 하오. 그 정도 크기면 백삼십만 냥으로도 그리 많이는 살 수 없을 것이오." 춘교가 말했다. "하지만...... 그런 진주는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텐데요." "은자가 있는데 설마 못 구하겠소?" 춘교는 겨우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가격이......." "가격이 얼마래도 괜찮소. 싯가보다 배가 비싸도 상관없소. 하지만 오늘 안으로 꼭 사와야 하며 늦어도 자정을 넘기지는 말아야 할 것이오." 염향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백삼십만 냥으로 전부 진주를 사다니 당신...... 당신 미쳤어요? 그 많은 진주를 사서 뭘 하시려구요?" "물론 쓸 곳이 다 있지." 춘교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알았어요. 공자께서는 분명히 선물로 쓰시려는 거죠?" 염향이 다시 물었다. "아! 혹시 쾌락왕에게 주려는 것이 아닌가요?" "왜 꼭 쾌락왕에게 준다고 생각하는 거요? 당신들에게는 줄 수 없단 말이오?" 춘교와 염향은 서로 마주 보더니 얼이 빠지고 말았다. 심랑이 유쾌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 진주는 구하기 어려우니 어서 가 보시오." 춘교는 정신을 차리더니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았다.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그리고......." "공자께서는 또 무슨 분부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수고스럽지만 몇 자 정도 적어서 초청장도 준비해 주시오. 네 장이면 될 거요. 남들도 우리를 초대했으니 우리도 마땅히 그들을 초청해야 하지 않겠소?" 춘교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네, 옳습니다." "서두르는 것이 좋으니 아예 오늘 밤 자정으로 정합시다." "그럼 소첩은 공자님을 위해서 주안상을 준비하겠습니다." "주안상은 필요없소." 춘교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 "주안상도 없이 초대를 하시다니? 공자님께서는 뭘 대접하시려는 거죠?" 심랑은 신비스럽게 미소지었다. "물론 그들에게 먹을 수 있는 것을 대접할 거요." 모든 사람 악에 술 잔이 하나씩 놓여져 있었다. 이것이 심랑이 이들을 초대해서 대접한 음식의 전부였다. 그것은 확실히 좋은 술잔이었다. 금으로 만든 것이었고 크기도 매우 컸다. 술잔에 담긴 술도 역시 매우 좋은 술인 듯했다. 하지만 단 한 잔의 술로 손님을 대접한다는 것은 뭔가 말이 안 될 듯 싶었다. 정난주, 용사해, 주천부, 심지어 소패왕 시명까지 다 모였다. 그들은 눈을 휘둥그래 뜨고서 술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쾌락왕은 어디 있을까? 쾌락왕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그는 물론 느지막하게 올 것 같았다. 정난주만은 술잔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을 뿐 전혀 놀라움이나 불만스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마 이 한 잔의 술에 심랑이 뭔가 수작을 걸었음을 안 것 같았다. 용사해도 역시 웃음을 머금고 있었는데 그 웃음 속에는 놀라움 외에도 어떤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심랑이 손님을 초대하면서 겨우 이 한 잔의 술만 준비했을까? 주천부는 콧잔등과 이마를 잔뜩 찌푸리면서 두 눈으로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기다리는 것은 쾌락왕이 아니라 술상인 것 같았다. 소패왕 시명은 탁자 위에다가 열 개의 은자덩이로 탑을 쌓고 있었는데 탑이 제대로 쌓아지지 않자 탄식만 하고 있었다. 염향은 내심 고소함을 금치 못했다. 소패왕은 지난 밤 혼쭐나더니 오늘은 아주 얌전하게 굴었다. 옷도 정결하게 입었고 손도 아주 깨끗이 씻었다. 그의 여패왕은 같이 오지 않았는데 아마 어제 너무 놀란 나머지 병이 났나 보다. 심랑은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감도는 그의 미소는 언제나처럼 그렇게 우아했다. 자정은 이미 지나 창밖 하늘 가득히 별이 보인다. 소패왕이 침묵을 깼다. "대왕께서는 오지 않으시려나 보군요." 심랑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소패왕이 다시 물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심랑의 대답은 여전했다. "글쎄요." 주천부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더이상 지체되면 안에 준비되어 있는 음식들이 식을 텐데." 염향이 그에게로 눈길을 돌리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식지는 않을 거예요." "응?" 염향은 배시시 웃었다. "처음부터 주안상은 없었으니까요." 주천부는 잠시 멍청해진 듯있다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손으로 심랑을 가리켰다. "당신이 그렇게 절약하는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소." "난 항상 절약하죠." 염향이 히죽 웃으면서 거들었다. "그는 금광도 캐지 않았으니 당연히 절약을 해야죠."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 안에 떠돌던 웃음이 멈추면서 순간 모두의 눈은 문쪽을 향했다. 문쪽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문은 꽤 높았지만 그 사람은 그 문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그의 몸이 바로 문 악까지 걸어오자 그의 머리가 문미(門眉)에 걸렸다. 염향은 단지 그의 대나무처럼 깡마른 몸체만 볼 수 있을 뿐 그의 머리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몸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 속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그가 입은 옷은 검고 번지르한 가죽 옷이었는데 그의 깡마른 몸에 꼭 끼인 듯 보이는 것이 마치 뱀가죽처럼 보였다. 그 사람은 독사와 같이 시시각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매 순간 순간 사람을 습격할 기회를 엿보는 듯했다. 그의 깡마른, 독사 머리와 같은 손은 거의 무릎까지 닿았는데 남들은 삼 척 밖에 닿지 못할 것을 그는 오 척 밖에 있는 사람도 다치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전적으로 사람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고 또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심랑이 반색을 하며 일어나더니 포권을 하며 말했다. "기사(氣使)께서 이렇게 왕림해 주시다니, 어서 들어오셔서 한 잔 하시지요?" 어색한 음성이 문 밖으로부터 냉랭하게 들려왔다. "난 독고상(獨孤傷)이라고 하오." "독고 형이셨군요." "독고(獨孤) 성씨는 형제가 없소." "네, 그렇지요. 독고 선생께서는 들어 오시지요." 독고상은 코웃음을 쳤다. "마침 그대에게 술 한 잔 얻어 마시려고 왔소." "더왕께서는 언제 행차하시는지요?" "이곳에 왕림하시려 했지만 갑자기 친한 친구가 찾아오시게 됐소. 만약 그곳에서 기다리다 그 친구의 심장을 파내지 못하면 오히려 그 친구께서 실망을 하실 테니 오늘 이곳에 못 오신답니다." 사람의 심장을 도려낸다는 말을 그는 아주 일상적인 것처럼 말했지만 듣는 사람들은 모골이 송연해지며 닭살이 돋았다. 심랑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대왕께서 시간이 없으시니 독고 선생께서 대신 오신 것도 마찬가지죠." 독고상은 또다시 코웃음을 치더니 갑자기 옷소매에서 금줄을 날려보냈다. 그의 머리는 비록 문 밖에 있었지만 마치 손에 눈이 달린 듯했다. 금줄은 반짝이더니 어느새 술잔을 휘감아 그의 손으로 가져갔다. 독고상은 단숨에 다 마셨다. "좋은 술이오." 손을 다시 펼치자 금잔이 다시 날아가더니 원래의 자리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놓여졌다. 그 술과 술잔은 적어도 두 근은 되었는데 부드러운 금줄로 휘감는 그 완력과 정확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더구나 금잔을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는 그 신기에 가까운 무공은 더할 수 없이 어려운 것이었다. 중인들은 그가 이 한 수를 펼치자 모두들 숨을 죽였다. 언뜻 불빛이 반짝이면서 그림자가 한 번 떨리니 입구에 서있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용사해가 긴 탄식을 내뱉었다. "정말 무섭군." 심랑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 사람 손의 실력은 아마도 관외제일(關外第一)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용사해가 되물었다. "관외제일?" "그렇소. 관내에는 적어도 그보다 강한 사람이 셋이나 된다오." 정난주가 갑자기 끼어 들었다. "이번에는 심 형이 틀렸습니다." "네?" "관외에서도 그는 제일이라고 할 수 없소." 심랑이 미안한 듯이 말했다. "전 단지 대막초원(大漠草原)에서는 수많은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있으며 관외 고수들의 거의가 기세(氣勢)에 강하다는 말만 들었소. 한데 이렇듯 수공력(手功力)이 절묘한 사람이 또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한 것 같군요." "심 형께서는 혹 ‘귀조착혼(?爪捉魂)’이라고 들어보셨소?" " '귀조착혼'이라면 혹시 옛날에 외가사파(外家邪派) 무공 중에서 가장 신비하고 음독(陰毒)한 '백골유령장(白骨幽靈掌)'의 별칭(別稱)이 아닌지요?" 정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과연 심 형의 견식은 해박하시군요." "하지만 '유령문(幽靈門)'의 귀인(?人)들은 이미 삼십 년 전에 심천군(?天君)대협이 칠대 검파의 장문인과 연합하여 음산일전(陰山一戰)에서 전부 소멸하지 않았습니까? 또 소문에 의하면 '유령문'에는 이제 더이상의 제자가 없다고 하던데 어떻게 아직 관외에 있다는 말씀인가요?" 정난주가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심 형께서는 모르시는 게 있습니다. 비록 '유령문'이 전부 소멸됐지만 그들의 무공을 연마할 수 있는 연공비법(?功秘法)이 적혀 있는 비보(秘譜)는 남았지요. 그것이 어찌된 영문인지 관외로 흘러왔다는 것이오." 심랑은 안타깝다는 듯 한탄을 했다. "음산일전 이후 아직도 이러한 여파가 남아 있다니......, 심 대협과 칠대 장문인이 구천지하에서 이 일을 아시게 된다면 아마 편히 쉬지는 못하실 것 같군요." 이 말을 할 때의 그의 표정은 무척 침중했다. 이같이 침중한 기색은 심랑의 얼굴에서 결코 흔히 볼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중인들은 괴이함과 신비감에 싸여있는 '유령문'이라는 세 글자에 정신이 팔려 누구도 그의 표정에 일어난 변화를 읽지 못했다. 정난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 "듣기로는 삼십 년 전 관외 무림에서 이 '유령비보(幽靈秘譜)' 때문에 한 차례 살육전이 전개됐다고 하는데 이상한 것은 이 사건이 결코 강호에 멀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에 비보를 쟁탈하려고 노리던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는 데도 이유가 있겠지요. 또 모두가 입을 꼭꼭 함구한 채 암중에 쟁탈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소식이 새어나지 않았을 것이오." "이 사람들은 당연히 누설할 수가 없었소.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중원 무림인들이 이 쟁탈전에 가담하려고 몰려왔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의 기회가 더욱 적어질 테니까요." "그 이유말고도 또 하나의 원인이 있소. 그것은 바로 당시에 이 비보를 쟁탈하려던 자들이 별로 명성이 없었던 때문이라오. 그런 자들의 일이니 자연 남의 이목을 사지 않았으니까요." 심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누구였든간에 이 비보를 얻은 사람이라면 명성도 없고 지위도 높지 않았더라도 결코 평범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바로 그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마지막으로 얻었는지 궁금하군요." "듣기로는 당시 이 비보 쟁탈에 가담했던 몇몇 집안은 서로 죽이고 죽어 밥짓는 한 소녀만 살아 남았다고 하오. 그 '유령비보'는 자연히 그 소녀의 손에 들어갔소." 심랑이 허망한 듯 외쳤다. "그들이 만약 이 결과를 알았다면 당시에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지도 않았을 텐데. 아! 세상 사람들은 어째서 이리도 우둔한 것일까!" "하지만 이 소녀도 이 '유령문'의 무공을 연마하지는 못했소." "아니, 그건 왜지요?" "그 안에 과연 어떠한 내막이 있었는지는 누구도 모르오. 하지만 내가 언뜻 들은 바로는 후에 한 무림고수가 이 비보의 소재를 알아냈다는 것이오." "그렇다면 비보는 그가 빼앗아 갔겠군요?" "그가 그 소녀를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 소녀도 보통이 아니었소. 자신이 비보를 몸에 지녔다가는 필시 화를 불러들인다는 것을 알고는 그 비보를 아주 비밀스런 곳에 숨긴 거예요. 때문에 그 무림고수는 그녀를 죽인다 해도 역시 그 비보를 얻을 수는 없었소." "그럼 그는 손을 뗐습니까?" "물론 그렇지는 않았소." "그가 무슨 방법이라도 강구했습니까?" "그 사람의 심계(心界)는 상당히 악독했습니다. 그는 그녀를 유혹해서 몸을 빼앗았소. 그는 한 여자가 몸을 남자에게 주게 되면 다른 물건도 전부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요." "단지 ‘유령비보'라는 네 글자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박정한 남자들이 꿈 속에서조차 찾아 헤맸지요." "하지만 그 소녀는 그가 상상한 것보다도 똑똑해서 여전히 그에게 비보를 넘기지 않았소. 그 자는 한참을 기다리다가 도저히 참지를 못하고는 서서히 진면목을 드러내보이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그 소녀는 더더욱 그에게 주지를 않았어요." "그 소녀는 의외로 똑똑했군요." 정난주는 미소를 흘렸다. "그 소녀는 자신이 예쁘게 생긴 것도 아닌데 무림고수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요. 그가 단지 그녀의 비보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자기가 비보를 내놓을 경우 비록 자신이 죽지는 않더라도 결국에는 그에게 버림을 당할 것이고, 비보를 내놓지 않으면 그와 오래도록 지낼 수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된거요." "세상에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소녀가 수없이 많은데 이 소녀는 예외로군요. 그 소녀는 그 자를 상당히 좋아하고 있었던가 보오."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사랑에 빠졌던 거요. 하지만 그녀가 사랑하면 할수록 그 자는 더욱 그녀를 싫어하게 되었소. 결국에는 악랄한 고문으로 그녀에게 비보가 있는 곳을 말하도록 핍박하게 됐다오." 잠시 탄식을 한 정난주는 계속 말을 이었다. "소문으로 들은 그의 고문 방법들은 하나같이 잔인하기가 이를 데 없었소. 결국 그 소녀는 그 자의 고문에 의해 사람의 형태조차 잃을 정도였고 눈은 멀고 손발도 못쓰게 됐다고 하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차라리 죽을지라도 그 비보가 있던 곳을 말하지 않았다는군요." 용사해가 갑자기 '펑'하고 탁자를 치면서 분노를 터뜨렸다. "그 자가 대체 누구요? 내가 그를 만나 봐야겠소." 정난주가 답했다. "그 자가 대체 누구였을까요? 아무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결국에는 그 자도 그 비보를 얻지 못하고 빈 손으로 되돌아갔다는 것만 알 뿐이오." "그가 그 소녀를 그냥 놔줬나요?" 심랑의 물음에 정난주가 대답했다. "소문에 그 소녀도 보통이 아니라 비록 병신이 됐지만 그의 주의가 소홀한 틈을 타서 도망을 갔다는군요. 그리고 그 자도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꼭 중원으로 되돌아가야 했기 때문이죠. 그가 돌아왔을 때 그 소녀는 이미 행방이 묘연하여 더이상 찾을 방법이 없어 결국 포기했다고 하오." "그 소녀는......." "그 소녀도 물론 무공을 연마할 수는 없었죠. 하지만 이미 뱃속에 아기가 생겼으니 그녀는 이를 악물고 견디다 여자 아이를 낳았던 겁니다." 정난주는 잠깐 한숨을 쉬더니 계속 이야기 했다. "그 여자 아이가 바로 그 ‘유령비급'의 전인이오." 심랑이 안색을 고치고 말을 받았다. "그런 아이라면 필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원한이 사무쳤을 텐데, 게다가 그런 성격을 가진 자가 잔인하기가 이를 데 없는 그 무공을 배웠다면....... 정말로 소름이 끼치는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소문에 듣기로는 그 아이가 성인이 되어 무공 연마를 끝낸 후 수많은 제자들을 받아 들였다는군요. 옛 '유령군귀(幽靈群?)'들은 비록 죽었지만 새로운 오늘의 ‘유령군귀'들이 다시 태어난 것이오." "그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했는지 들으셨소?" "강호에서는 그 아이의 진면목을 본 사람이 없기에 수많은 추측과 전설이 난무했소.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절색의 가인(佳人)이며 선녀같이 아름다운 소녀이지만 하는 일은 악랄하여 마치 악마 같다는군요." 심랑은 한탄을 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고 남자보다도 열 배는 더 독해지는 법이지요." 염향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건 역시 남자가 나쁘기 때문이죠." 정난주가 말했다. "관외 무림에서 이 ‘유령군귀'의 이름을 들은 것은 최근 몇 년 전이었소. 그러나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유령군귀'에게 패가망신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처참하게 죽었다오. 소문에 이 여자는 사람 심장 먹기를 좋아해서 매번 사람을 죽일 때마다 심장을 꺼내서 먹는다는군요. 그리고 그녀는 항상 남자만 죽이기 때문에 먹는 것도 당연히 남자의 심장이라오." 심랑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의 모친이 남자에게 그리도 처참하게 당했으니 남자들을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염향은 심랑을 흘겨보며 말했다. "심랑, 당신 심장의 맛은 어떨지 정말 궁금하군요." "아마 매우 쓸 거요." "아무리 쓰지만 그래도 맛보고 싶어요. 더구나 당신 심장의 맛을 보고싶어 하는 여자는 나뿐만은 아닐 걸요?" 정난주가 알겠다는 듯 미소를 보냈다. "이제 보니 심 공자께서도 박정한 사람이었구려." 용사해가 큰웃음을 터뜨렸다. " '께서도'라......이 '도'자가 아주 묘하군요." 정난주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소." "무슨 일이오?" "이 '유령군귀'들이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전적으로 쾌락왕한테만 맞서고 있다는 사실이오. 쾌락왕의 부하 중 누구든지 그들의 무리를 벗어나기만 하면 반드시 ‘유령군귀'에게 심장을 먹히게 되는 겁니다." 심랑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정난주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아까 '기사(氣使)'의 말투로 미루어 보아 오늘 쾌락왕을 찾아오고 또 쾌락왕이 심장을 꺼내려고 기다린다는 사람이 아마도......." 염향은 눈을 휘둥그래 뜨더니 참지 못하고 끼어 들었다. "혹시 그 '유령군귀'의 여귀두목(女?頭目)이란 말인가요?" 정난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기를 바랄 뿐이라오." 심랑이 말했다. "하지만 찾아 온 사람은 분명 그녀인가 봅니다. 그렇지요?" "바로 그렇소." 그렇다는 정난주의 대답이 떨어지자 중인들은 순간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두가 멍하니 그냥 앉아있을 뿐 누구도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한참 지나자 주천부가 침묵을 깨고 일어서며 말했다. "난 무서운 애기만 들으면 곧 배가 고파진다오. 그만 먹을 것이나 찾으러 가야겠소." 심랑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 술은......." "당신이 그렇게 절약하시니 그 술도 당신에게 돌려 주겠소." 염향이 냉소를 쳤다. "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후회하실 텐데요. 당신은 아마 평생토록 이런 술을 다시는 마실 기회가 없을 거예요." 주천부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이 술이 금으로 만든 술이오? 그 정도라면 나 주천부는 매일 석 잔 정도는 마실 수 있는 능력이 있소. 지금 안 마셔도 절대 눈살을 찌푸리거나 마음 아파하지 않을 거요." 염향이 냉랭하게 비웃었다. "금으로 만든 술이라...... 흥, 이건 금으로 만든 술보다 적어도 사오백 배 이상 비싼 술이지요." 주천부는 잠시 멍해지더니 곧 웃었다. "허풍을 떠는 데 밑천은 하나도 필요없지." "귀하께서는 뭐든지 은자로 환산을 하니까 내가 묻겠어요. 이 한 잔의 술에 과연 얼마의 가치가 들어있는지 알겠어요?" "혹시 한 잔에 백 냥이라도 되오?" 염향이 냉소를 쳤다. "사실 난 말 안하려 했지만 당신이 불쌍해서 말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이 한 잔의 술은 적지도 많지도 않은 '은자 십오만 냥' 하고도 '석 냥'이랍니다." 주천부가 놀라 소리쳤다. "십오만 냥...... 하하, 술 한 잔에 십오만 냥이라니, 당신은 나 주천부가 바보인 줄로 알고 있소? 당신은 내가 좋은 술이라고는 전혀 못마셔 본 줄 아시오?" "은자 백삼십만 냥으로 전부 진주를 샀고 또 그 진주를 가루로 내서 술에 탔지요. 그것을 여기 전부 여덟 잔으로 나눴으니 이 한 잔의 술값이 과연 얼마인지는 스스로 계산해 보시죠." 주천부는 선 채로 얼이 빠져 거친 숨을 들이쉬었다. "십...... 오만 냥...... 맞아, 딱 십오만 냥이야." 염향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리고 술값으로 은자 석 냥도 있어요." "마...... 맞소, 십오만 석 냥이오." 그는 만면에 존경스런 기색을 담고 술잔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차 한 잔 마실 동안을 그렇게 바라보더니 드디어 술잔을 들어 꾸역꾸역 뱃속으로 쑤셔 넣었다. 이런 사람들이 유일하게 존경하는 것은 바로 돈이며 돈 이외에는 그의 조상이라해도 소용없는 것이다. 용사해가 '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다음에 주 형을 식사에 초대할 때는 탁자 위에 은자만 놓으면 되겠군요. 그저 은자만 보면 먹으나 안 먹으나 상관없을 테니 말이오." 그는 갑자기 탁자를 '팍'하고 내리치더니 굳은 안색으로 냉소를 쳤다. "하지만 난 개에게 주면 주었지 이런 사람에게는 절대로 안 줘." 주천부는 술잔을 내려놓더니 대노(大怒)하여 소리 질렀다. "뭐라고? 남들은 너 같은 왕깡패를 무서워하지만 난 널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천부는 돼지간 같은 안색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바로 이때, 갑자기 한 가닥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날카롭고 처참하며 괴이했다. 무엇으로 낸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사람이 낸 소리는 아니었다. 사람은 절대 그런 소리를 낼 수 없다. 이 소리는 멀리서 들려왔는데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벌써 근처로 가깝게 왔다. 그 접근하는 속도는 가히 불가사의였다. 역시 절대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빠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것은 바로 귀신의 울음소리였다! 소리가 들리자 중인들은 갑자기 한기가 등줄기로부터 올라오는 느낌이었고 손발도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와졌다. 주천부는 '털썩' 주저 앉았는데 혈색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울부짖는 소리가 하나에서 둘로 변하고, 또 둘에서 넷으로 변하고 순식간에 울부짖는 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사방에서 떠돌았다. 악에서 들렸다 뒤에서 들렸다 하면서 천지가 날카롭고 처참하게 울부짖는 소리로 꽉 차버려 다른 소리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주천부는 떨고 있었는데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되는 듯했다. 이번만큼은 정난주, 용사해의 안색도 변해 있었다. 염향이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유...... 유령귀......." 심랑이 돌연 몸을 일으키더니 걸어나갔다. 염향이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심랑, 당신...... 당신 나가면 안 되요." 심랑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내 이 심장이 어차피 남에게 먹힐 거라면 저 여자귀신에게 먹히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소." 야심한 정원의 숲은 도깨비불로 가득히 밝혀져 있었다. 새파란 도깨비불이 수천만 개의 유성처럼 암흑 속에서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다. 정막했던 정원이 갑자기 형용할 수 없는 음산함으로 인해 가공할 신비를 품은 듯 보였다. 심랑은 큰 걸음으로 나갔다. 갑자기 도깨비불 하나가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심랑의 얼굴을 향해 덮쳐갔다. 심랑은 곧 소매를 열어 이들 도깨비불을 그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것들은 단지 얇은 동편(銅片)으로 만든 호루루기로 매우 강력한 수법으로 던져서 바람을 가르며 울부짖는 소리를 내게 한 것이었다. 도깨비불이란 역시 인광(燐光)에 불과했다. 심랑은 미소를 흘리며 그것을 버렸다. "유령군귀들의 실력도 별것 아니었군." 그는 계속해서 곧장 '철벽헌'을 향해 걸어갔다. '칠벽헌'도 역시 어둠에 싸여 있었으나 단지 회랑 사이의 낮은 탁자위에 등불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옷깃이 해진 옷을 입은 황의인이 등불 아래에서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하늘 가득한 도깨비불을 바라보면서도 표정은 오히려 유유자적했다. 이 수천만개의 괴이하고 음산한 도깨비불은 '유령군귀'가 오직 그를 위해 특별히 내붐는 불 인듯 그의 주흥을 돋구어 주고 있었다. 심랑은 멀리서 이자를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이마는 넓었고 백옥처럼 하얀 얼굴이었다. 심랑은 드디어 쾌락왕을 보게 된 것이었다. 쾌락왕은 양쪽귀에다 금으로 된 고리로 수염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귀하께서 이와 이렇게 오셨으니 본왕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이 어떻소? " (이사람의 이목이 대단히 영민하군.) 심랑은 내심 탄복했다. "난 심랑이라고 하오." "아! 바로 그 심공자였군!" 그의 기다란 눈썹은 마치 누에같았고 두눈은 가늘면서도 길었다. 그가운데에 자리한 오똑하고 살이 많이 붙은 매부리코는 그의 권위와 깊은 심계,비길데없이 왕성한 정력을 상징했다. 심랑은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의 압박하는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비록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감출 수없는 왕자의 기풍이 서려 있었던 것이다. 쾌락왕도 심랑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는데 눈에서 발하는 빛이 더욱 반짝였다. 심랑은 바로 인중지걸(人中之傑)이었던 것이다. 쾌락왕도 심랑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는데 눈에서 발하는 빛이 더욱 반짝였다. 그의 휘하에도 적잖이 뛰어나게 영준한 미남들이 있었지만 심랑에 비교하면 그들은 단지 인중지걸(人中之傑)밖에는 안 되었다. 심랑은 바로 인중지봉(人中之鳳)이었던 것이다. 낮은 탁자 옆에는 또 하나의 금사(金絲)로 된 부들 방석이 놓여 있었는데 그 '유령여귀(幽靈女?)'를 위해 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낮은 탁자 위에 빈 술잔이 놓여 있었다. 심랑은 양해도 않고 멋대로 앉아서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술잔을 채웠다. "오래 전부터 대왕의 술맛은 천하 일품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먼저 대왕께 경배를 올리겠습니다." 술을 단숨에 들이킨 심랑의 입에서 저절로 찬사가 흘러나왔다. "과연 좋은 술이군!" 쾌락왕은 금으로 된 대야에 손가락을 씻으며 말했다. "그 술이 비록 괜찮다 해도 어찌 공자의 백만 냥짜리 진주술과 비교가 되겠소?" 그는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계속 말했다. "하지만 이 게맛은 아주 괜찮소. 사양하지 마시오. 손부터 씻으시고 어서...... 이 게란 자신이 손수 손으로 뜯어 먹어야 맛이 나지 이미 뜯어놓은 것을 먹으려면 마치 초를 씹는 기분이라오." "대왕께선 비단 음식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먹는 법에 대해서도 상당히 조예가 깊으시군요. 이런 음식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이란 졸지에 횡재한 졸부들은 절대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겁니다." 쾌락왕은 앙천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에 지붕 위의 기와까지 들썩이며 진동을 했고 멀리 있던 낙엽조차 날아갔다. 그러나 심랑의 술잔에서는 한 방울의 술도 튕겨 나오지 않았다. "대왕께서는 어찌 그리 웃으시는지요?" 쾌락왕은 여전히 광소를 날리고 있었다. "당금 천하의 모든 강호인들 중에서 심랑이 바로 나 쾌락왕의 강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소? 그런데 바로 그 심랑이 오히려 본대왕과 이렇게 대작을 하고 말끝마다 나를 칭찬하니 어찌 웃지 않겠소. 하하하, 어찌 웃지 않겠소!" 심랑은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같이 앙천대소를 날렸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동시에 울리자 탁자 위의 술잔이 '챙'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으며 술잔 속의 술도 땅에 뿌려졌다. 쾌락왕은 웃음을 멈추더니 물었다. "심 공자는 또 어째서 웃으시오?" "하, 하, 당금 천하무림에서 그 누가 쾌락왕의 이목(耳目)이 온 천하에 퍼져있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쾌락왕께서는 심랑의 내력조차 조사해내지 못하다니 어찌 우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하, 어찌 우습지 않겠습니까?" 쾌락왕이 매섭게 말했다. "본대왕이 그대의 내력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대의 오산일세." "대왕께서는 저에 대해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하, 하......" 갑자기 '칙'하는 소리와 함께 도깨비불이 붙은 짧은 화살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섭전과 같은 속도로 날아왔다. 심랑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젓가락으로 가볍게 잡았다. 그의 동작은 보기에 별로 빠르지 않았는데도 그 도깨비불 화살이 그의 젓가락에 잡힌 것이다. 그는 보지도 않고 그냥 버렸다. "대왕께서는 제 고향이 어딘지 아십니까? 제 내력이 어떤지 아십니까?" "모르네." "하, 하, 대왕께서는 제 무공이 어느 파에 속하는 것인지 아십니까? 또 누가 전수했는지 아십니까?" "흥!" "흥이란 안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모른다는 뜻인가요?" 쾌락왕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모르네." 심랑도 술잔을 들더니 말했다. "대왕께서는 제게 형제가 몇이 있는지 아십니까? 친구는? 또 원수는?" 쾌락왕이 크게 소리 질렀다. "몰라!" "하, 하, 대왕께서는 제 이름이 진짜로 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쾌락왕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모르네. 역시 모르네." 심랑이 큰소리로 웃으며 물었다. "대왕께서는 다른 것은 몰라도 제 이름의 진위여부(眞僞與否)조차 확정지을 수 없으면서 어떻게 제 내력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지요?" 쾌락왕은 눈쌀을 찌푸렸다. "하지만......" 심랑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대왕께서는 제 신상 내력조차 모르시면서 어떻게 제가 대왕의 철천지 원수라고 단정을 하십니까?" 쾌락왕은 단호하게 말했다. "강호의 사람이라면 다 알고있네." "강호의 뜬 소문들을 다 믿으십니까?" "열 명이 말한다면 거짓일 수도 있지만 천 명이 말하면 그것은 분명 사실일 테니 어째서 믿지 못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강호 사람들이 대체 저를 어떻게 말하던가요? 대왕께서는 어떤 이야기들을 들으셨습니까? 지금 저에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쾌락왕이 약간 미소를 짓고는 손뼉을 쳤다. 손뼉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독고상이 나타났는데 심랑의 시력과 청력으로도 그가 몸뒤에 숨어 있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독고 형께서는 쾌락왕의 그림자처럼 항상 곁에 있다고 하더니 과연 사실이었군요." 독고상은 심랑의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흥'하고 코웃음만 치더니 노란색 두루마리를 탁자 위에 놨다. 쾌락왕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본왕은 벌써 알고 있었네. 자네가 오래 전부터 본왕을 정탐했었다는 것을. 심지어 내 일상 생활까지도 아주 자세히 조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일세. 하지만 나도 자네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조사했으니 내 눈을 벗어날 수는 없지." 그는 큰소리로 웃으면서 황색 두루마리 속에서 석 장을 뽑아서는 심랑의 면전에 던졌다. "자네 스스로 보게." 이 석 장의 종이에는 웅묘아, 주칠칠과 심랑이 최근에 행한 모든 행적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심랑이 인의장에서 어떻게 주칠칠을 만나 어떻게 두 사람이 사성고묘에 들어 갔는지, 또 불아이가 어떻게 신비하게 실종이 됐으며 두 사람이 어떻게 웅묘아와 친구로 맺어졌는지...... 이러한 일들이 모두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이 석 장의 종이에는 물론 왕련화도 기록되어 있었다. 왕련화가 어떻게 심랑과 서로 암투를 벌였는지까지 아주 명백하게 쓰여 있었다. 심랑은 다 보고도 얼굴에 내색은 안 했지만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이들에 관한 일들 중에는 그들 세 사람만이 아는 것도 적혀 있었다. 특히 그들 새 사람이 사석에서 했던 말들도 적혀 있었는데 심랑은 쾌락왕이 어떻게 이런 일들을 알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됐다. 설마 그들 세 사람 중에 첩자가 있단 말인가? 그럼 과연 누구일까? 웅묘아일까?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웅묘아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는 쾌락왕과 통신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의 행동은 한 번도 심랑의 이목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주칠칠일까? 그것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주칠칠은 그런 사람이 아닐 뿐더러 부호집안의 출인이라 쾌락왕과는 어떠한 관계가 성립될 수가 없었다. 하물며 그녀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쾌락왕의 휘하인 색사(色使)의 손에 들어가 그토록 곤욕을 치뤘을 것인가? 아무리 그 두 사람을 첩자라고 말한다 해도 심랑은 죽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두 사람을 빼면 바로 심랑 자신밖에 없었다. 그럼 심랑 자신이 스스로의 첩자가 됐단 말인가? 심랑은 도대체 이해도 안 되고 생각도 할 수가 없자 내심 쓴웃음만 짓고는 천천히 그 석 장의 종이를 탁자 위에 놓았다. 이 얇은 석장의 종이가 갑자기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쾌락왕은 똑바로 그를 주시하면서 물었다. "이 종이에 쓰인 사실에 틀린 점이 있소?" 심랑은 약간 생각을 하더니 되물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대왕께서는 아직도 결정을 못 내렸단 말씀이신가요?" 쾌락왕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아직도 할 말이 있다는 거요?" 심랑은 담담하게 말했다. "종이에 쓰인 것 중에서 단 한 가지 사실이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응? 어느 것이오?" "이 종이에 쓰여진 심랑의 위인됨이 너무도 훌륭하더군요." "그렇게 겸손할 필요가 뭐 있소?" "이 종이에 쓰여진 심랑의 위인됨은 대인대의(大仁大義)하고 공적인 일을 위해서는 사사로운 일을 희생하는 영웅협객으로 형용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심랑이라는 사람은 단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소인일 뿐입니다." "허, 허, 사람이 스스로를 돕지 않는다면 하늘과 땅도 돕지 않는다고 했소. 아무리 영웅협객이라 할지라도 그들 자신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오. 고금을 통털어 만약 누구든 자신의 이익을 생각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바보가 아니면 미친 사람임이 분명하오." 심랑이 웃음으로 수긍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애써 지내는 것도 모두가 다 '명리'를 위하는 것이지요. 성인이신 공자(孔子)조차도 주유천하(週遊天下)하신 것은 역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주인을 찾아 자신의 재능을 펼치려는 것뿐이었죠." "하, 하, 과연 고견(高見)이로군. 본왕이 자네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한 잔 마시겠네." 사방의 도깨비불은 점점 더 늘어났고 울부짖는 소리도 점점 시끄러울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은 이미 눈앞에까지 와 있었지만 이들 두 사람은 여전히 유유자적하게 웃으며 술잔을 비울 뿐 전혀 주위 사정은 돌보지 않았다. 사방의 도깨비불은 음산했고 울부짖는 소리도 처참하게 들렸지만 두 사람은 오히려 상대의 재능이 이들 도깨비불이나 울부짖는 소리보다 훨씬 두렵게 느껴졌다. 독고상이 갑자기 나무라듯 중얼댔다. "귀찮군." 그는 탁자 위에 있는 게 껍질을 벗겨 한 번 문지른 후 밖으로 내던졌다. 열 몇 가닥의 줄기가 날아가더니 곧 이어 '띵띵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눈앞에 가득했던 도깨비불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하지만 이 도깨비불이 워낙 많다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빈 곳을 채우고 말았다. 심랑은 손에 술잔을 들고 말했다. "이 도깨비불들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정말로 귀찮게 구는군요. 저도 독고 형을 돕겠습니다." 그는 술 한 모금을 마신 후 갑자기 그것을 뿜어냈다. 그 한 모금의 술은 하늘 가득히 은색 안개로 화(化)했다. 그 은색 안개가 퍼지자 백여 개의 도깨비불도 전멸됐다. 독고상이 냉랭하게 말했다. "대단한 기공이군." 쾌락왕은 감탄을 했다. "귀하는 가히 내가 최근에 보았던 사람 중 유일한 고수로군. 지금 내가 바로 그대 앞에 있는데 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오?" "허, 허, 제가 왜 공격을 해야 합니까?" "하, 먼저 선수를 쳐야 유리하다는 말을 그대는 모른단 말이요?" "하, 하, 하, 아니, 제가 대왕과 적인지 친구인지를 대왕께서는 아직도 모르신다는 말입니까?" "적인지 친구인지는 각자 생각에 달렸지." 갑자기 멀리서 수십여 명이 웃는 것과 동시에 합창을 했다. "쾌락왕, 명이 짧아, 날 밝기 전에 곧 죽네." 그 웃음소리는 너무도 처참했고 노랫소리도 들리다 끊어지고 하는 것이 마치 귀신들이 울부짖는 듯했다. 쾌락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과 함께 읊었다. "쾌락왕, 명이 길어, '유령군귀' 들이 곧 죽네." 그의 웃음소리는 낭랑하고 노랫소리에도 힘이 담겨져 있어 한 마디 한 마디 멀리 퍼졌다. 노래소리가 그치자 곧 하늘 가득한 도깨비불 속에서 수십 명의 인영(人影) 이 나타났다. 도깨비불 투성이인 인영들은 전신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인영들이 도깨비불 속에서 번뜩거리면서 떠돌아 다니자 마치 지옥의 문이 열리면서 군귀(群?)들이 출현하는 듯했다. 노랫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다. "지옥문이 열리니 유령들은 도깨비불을 만들어 도깨비불로 쾌락왕을 태워 죽이네 !" 노랫소리 속에서 수십 명의 인영이 동시에 손을 펼쳤다. 갑자기 수천 수백 개의 도깨비불이 사람을 오싹하게 하는 음풍을 타고 파도처럼 밀려왔다. 쾌락왕은 여전히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독고는 어디 있느냐?" 독고상이 두 팔을 휘젖자 옷이 부풀어 올랐다. 심랑이 길게 웃음을 남겼다. "이런 도깨비불은 상대할 가치도 없죠." 그는 다시 입을 벌려 한 주전자의 술을 전부 들이마시더니 '훅' 하는 소리와 함께 내뿜었다. 그러자 곧 수천 수백의 은색 비가 이 '훅'하는 소리와 동시에 날렸다. 이 은색 비는 곧 은색 안개로 화하면서 도깨비불들을 소멸시켰다. 하늘 가득 떠돌던 도깨비불들이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쾌락왕이 손뼉을 치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유령군귀'들이 술은 마실 줄 모르는군." 이 한 마디가 끝나자 도깨비불이 또 다시 앞으로 다가왔지만 단지 회랑 근처에서 왔다갔다 회전만 할 뿐이었다. 인광이 번쩍이는 인영도 단지 멀리서 춤추 듯 번쩍일 뿐 감히 또 다시 장력으로 도깨비불을 내몰지는 않았다. 심랑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유령문의 무공은 과연 대단하군요. 비단 경공신법만이 귀신같을 뿐 아니라 장풍 속에도 음산한 귀기가 서려 있으니." 쾌락왕은 냉소를 날렸다. "유령문의 무공을 이들 십중팔구는 일할(一割)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어. 이들 수십 명이 장력을 한데 모은다 해도 결코 심 공자의 일격에는 당하지 못할 걸?"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단지 술기운으로 이득을 봤을 뿐, 진짜 실력으로 본다면 제가 어찌 독고 형의 적수가 되겠습니까?" 독고상이 차갑게 말했다. "그대와 나는 언젠가는 겨뤄야 할 거다." "하, 하, 꼭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대와 내가 적인지 친구인지는 아직 대왕의 일념(一念)에 달렸으니까." 독고상의 눈빛이 번쩍였다. "적인지 친구인지는 대왕의 일념에 달렸다고?" "물론이오. 하, 하!" '물론이오'라는 말과 동시에 심랑은 갑자기 길게 휘파람을 불면서 몸을 일으켜 소매를 떨치자 한 가닥의 강풍이 뿜어져 나갔다.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독고상은 물었다. 비웃듯이 물었다. "그대는 내게 힘자랑을 하려는 것이오?" "어찌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 하!" 독고상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심랑이 방금 떨친 소매바람은 이미 사라졌지만 독고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띵띵'하는 경미한 소리가 들렸다. 이 세 사람의 청력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이 소리를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독고상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입을 꼭 다물었다. 그러나 쾌락왕은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유령문의 이 '무영귀우(無影?羽)'라는 무공은 실로 막기가 어려운 것이라오. 정말 심 공자의 이목이 이리도 초인적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본왕은 지금쯤 이렇게 편안하게 앉아있지 못했을 거요." "이렇듯 보잘 것 없는 재주인데 어찌 대왕께서 손수 출수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대왕의 술을 얻어마신 터에 이것으로나마 갚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 앉아있을 면목이 서지가 않습니다." "그대는 왜 본왕을 도와 출수를 했는지?" "그것은......" 갑자기 멀리서 날카롭고 처참한 휘파람 소리가 길게 들렸다.
첫댓글 즐감했습니다~~감사합니다
재밌게 잘읽었습니다
즐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