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신> 적절한 시어(詩語)는 어떤 것인가 / 임보 (시인)
로메다 님, 시에서 사용하는 언어 곧 시어가 따로 있는지 물어왔군요. 이 질문은 그림을 그리는 색채가 따로 있는가를 묻는 것과 흡사합니다. 로메다 님, 그림 그리는데 사용되는 색채가 따로 있습니까? 모든 색채는 그림 그리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어떤 색채이거나 그 색채를 필요로 할 경우 당연히 사용되는 것이지요. 시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언어가 시어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비록 평소에 잘 사용되지 않는 궁벽(窮僻)한 말이라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 말을 필요로 하는 시상(詩想)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화가들에게도 그들이 좋아하는 특별한 색채가 없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초록색을 좋아하고, 또 어떤 이는 노란색을 선호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시인의 경우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 즐겨 사용하는 시어가 없지 않습니다. 어떤 시인은 정감 어린 섬세한 시어를 좋아하는가 하면, 또 어떤 시인은 활력 있는 웅장한 느낌의 시어를 편애하기도 합니다.
모든 소리가 음악을 만드는 훌륭한 재료가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시에서도 꺼리거나 선호하는 언어가 따로 없지 않습니다. 우선 다음의 글을 읽어볼까요?
시어(詩語)
균형과 조화를 지향했던 고전주의자들은 시에 구사된 말 곧 시어(詩語)를 일상어와는 달리 귀족적인 우아한 말[雅語]로 한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개성과 감정을 중요시하는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거부된다. 시어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굳이 시어와 일상어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근자에 와서 해체론자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아어(雅語)보다는 오히려 속어(俗語)나 비어(卑語)들을 즐겨 쓰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시어와 비시어를 구분하여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시어와 비시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휘가 한 작품 속의 특정한 자리에서 적절하게 쓰이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가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특정 어휘가 A라는 작품 속에서는 능률적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B라는 작품 속에서는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잘못 받아들여 오늘의 시어(詩語)는 제한이 없는 것이니 아무 것이나 마음대로 갖다 써도 무방하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모든 언어는 시 속에 사용될 수 있지만 시인들이 보다 즐겨 사용하는 시어들이 따로 없는 바가 아니며, 또한 보다 능률적인 시어를 생각할 수 없는 바도 아니다. 그렇다면 능률적인 시어란 어떤 특성을 가진 말들일까 생각해 보도록 하자.
첫째, 보다 다양한 내포적 의미를 지닌 말
C. B. Wheeler는 시적 언어의 특성을 한마디로 이중성(doubleness)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산문은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글이므로 의미가 단순 명료할수록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시는 복잡다단한 정서를 전달하는 글이기 때문에 분명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은근한 울림을 담고 있는 것을 선호한다. '내 마음은 고요하다'라는 표현보다는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시구가 더 은근하다. '고요하다'에 담겨 있는 의미는 단순하지만 '호수'가 지니고 있는 내포적 의미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호수'는 '고요함'뿐만 아니라, 넓음, 시원함, 맑음, 깊음 등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능률적인 시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딱딱한 말보다는 보다 부드러운 말
어떤 이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저항적이고 투쟁적인 내용의 시를 쓰자면 오히려 부드러운 말보다는 딱딱한 말이 강렬한 느낌을 불러일으켜 보다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지도 모른다. 시인도 그릇된 세상을 비판하고 불의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시를 통해 행해질 때는 격정적인 선전문이나 자극적인 구호문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시의 힘은 직설적인 독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감화에 있다. 시는 용맹스런 장수의 포효보다는 인자한 어머니의 손길과 같아야 한다. 그것이 보다 큰 감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는 산문과는 달라서 운율이라는 신비로운 가락으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글이다. 그 운율 형성에 효율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언어는 역시 부드러운 쪽이라 하겠다.
셋째, 거친 말보다는 아름다운 말
시는 언어 예술이다. 즉 말로 빚어낸 아름다운 작품이다. 만일 어떤 시가 아름다운 요소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도 무방하리라. 시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이 전제되어야 한다. 요즘 해체론자들 가운데는 왜 아름다운 시만 고집하느냐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그러한 주장을 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류(自己流)의 언술(言述)에 대한 명칭을 시(詩)가 아닌 다른 것으로 새로이 명명하라고 권하고 싶다.
넷째, 저속한 말보다는 우아한 말
시는 단순히 아름다운 말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정신이 담긴 글이다. 시정신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것은 간단하지 않지만 나는 그것을 승화된 소망(세속적인 욕망의 정화) 곧 진(眞), 선(善), 미(美) 그리고 절조(節操)와 염결(廉潔)을 추구하는 선비정신과 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인은 단순한 언어의 기능인만이 아니라 고고한 정신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수도자(修道者)로 보고자 한다. 그러한 시인의 생각을 담고 있는 시어가 어찌 정화된 우아한 말이 아니겠는가. 만일 어떤 시인이 상습적으로 저속한 시어들을 즐겨 구사한다면, 설령 언어를 부리는 재주가 인정된다손치더라도 그는 아직 시인의 자질을 원만히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으리라.
다섯째, 가급적 표준어를 어법에 맞게
토속적인 정서를 실감나게 드러내기 위해서 사투리를 즐겨 사용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사투리가 때에 따라서는 구수하고 정감 어린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시에 표준어와 사투리를 아무 제한없이 혼용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가능하면 표준어를 사용할 일이고 어법에 맞도록 쓸 일이다. 시에서는 비문법적인 표현도 경우에 따라서는 허용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마지못해 그렇게 된 것이지 그것이 시의 능사는 아니다. 시의 이상적인 문장이란 산문과 마찬가지로 표준어를 어법에 맞도록 쓴 것이다. 표기도 정확해야 한다. 그런데 적잖은 시인들이 표기법 같은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 예술가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표기법이나 문법부터 착실히 습득해야 할 일이다.
여섯째, 외래어보다는 순수한 우리말을
소위 글로벌 시대라고 해서 외래문화들이 거센 물결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이에 따라 시인들의 작품 속에도 외래어가 무분별하게 범람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물론 문화가 서로 섞이다 보면 외래어도 언젠가는 한자어들처럼 우리말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 마치 우리의 순수성이 유린당한 것처럼 느껴져서 개운치가 않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우리의 얼과 문화를 잘 가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얼과 문화의 바탕이 되는 것이 언어이고, 언어를 가장 사랑하고 지키는 이가 곧 시인들이 아니겠는가. 위대한 한 시인의 탄생은 바로 그 민족어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고 역사는 일러주고 있다. 세익스피어가 그렇고 괴테가 그렇다고 하지 않던가. 시인은 민족어의 연금술사이며 또한 수호자들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일곱째, 언어 외적인 매체들
시가 언어 예술의 한계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경향이 꼴라쥬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림, 도형, 사진 등의 문자외적 매체를 시에 끌어들이는 경우다.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는 절실한 정황을 시각 매체의 도움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그려냈다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시라는 이름으로 부르려면 어디까지나 언어 매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그 작품은 다른 장르의 명칭으로 불러야 하리라. 시는 언어 예술이므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면 이미 시라고 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엄살의 시학』(태학사, 2000) pp.44-48
로메다 님, 모든 말은 시에 사용될 수 있지만, 시에서 보다 능률적으로 작용하는 말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시는 압축된 말이며, 운문이며, 심미성을 지향하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다 내포적이고, 부드럽고, 아름답고, 우아한 말을 선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어의 일반적 경향을 지적하는 설명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행마다, 아니 매 구절마다 그 시상(詩想)을 형상화하는 최선의 시어들이 있게 마련인데, 시인은 그것을 선별하는 안목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메다 님, 어떤 시인은 한 개의 적절한 시어를 찾기 위해 몇 년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 한 작품을 놓고 평생을 퇴고하는 시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시어에 제한이 없다는 것은 시어의 폭이 넓다는 뜻이지 아무런 말이나 시에 끌어다 써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건필을 기대합니다.
- 임보 교수 시창작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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