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_ 난 인정 못 해!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우리 집 앞에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문을 열어준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랬더니 남희가 복도에 서 있었다.
"어, 에릭? 금방왔네? 마침 잘 됬다. 혹시 택배같은 거 시켰어?"
"택배?"
"응, 방금 엄청 큰 택배가 여러개 와서... 혹시 에릭이 시킨 걸까... 하고."
설마.... 다래의 짐인가?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도착할리가.... 그 마루라는 녀석, 여기까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건가? 알면 알 수록 무서운 녀석이다. 분명 내 머리로써는 그녀석에게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거다.
"아, 그거 말이지..."
"안녕하세요!"
다래가 갑자기 우리 사이에 튀어나왔다.
"우와악!"
남희가 놀라서 뒤로 자빠졌다.
"어..어라? 그렇게까지 놀래킬 생각은 없었는데... 헤헤."
나는 그녀석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야야야!!"
"(너말야, 내가 남희앞에서는 능력 쓰지 말라고 했잖아?)"
"아..하하. 나도 모르게 무심코. 에헷."
다래가 주먹을 쥐고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무심코 가 아냐, 이 멍청아! 조심하라고 했잖아!)"
나는 다래의 양 볼을 잡아당겼다.
"아야야야야, 아하효, 에익.... (아파요, 에릭....)"
".... 저기, 에릭.. 그 여자애는 누구야...?"
"응? 아아, 이녀석?"
"설마.... 에릭이 전에 말했던 남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짓이라는 것이... 혹시나 했지만 진짜였을 줄이야.. 이런 예쁜 여자애가 아무 이유 없이 에릭을 따라 집까지 들어올 리가 없어...."
"뭣..? 아니아니! 잠깐! 그런 게 아니라고! .... 근데 지금 뭐하고 계시는 겁니까?"
남희가 핸드폰을 들고 뭔가 누르고있다.
"114에 전화해서 경찰서 번호를 물어보려고... 아... 114 번호가 뭐였더라... 아하하하.. 에릭, 혹시 알아?"
어이, 눈동자가 공허해. 초점이 없다고. 지금 이녀석, 혼란해서 제정신이 아니야..
"정신 차려! 어이!"
나는 남희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어..어라? 에릭? 난 무엇을..."
남희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잘 들으라고. 이 여자애는 내 먼 친척이야. 얼마 전에 집에 큰 불이 나서 당분간 우리집에서 살게 됬어. 아주머니도 허락하셨으니까, 아마 내 방에서 지내게 될거야. 최대한 폐 안끼치게 조심할게. 그치?"
"넵, 당연하죠!"
".... 나한텐 그런 말 한마디도 안했으면서."
"미안... 잊어버렸어. 원래 전화하려 했었는데..."
"거기다 뭔가 수상해.... 이 애, 왜 에릭한테 존댓말을 써?"
"응? 아..아아. 그건 말이지.."
"오빠 라고 부르는 것도 아니고 에릭이라고 이름을 부르면서 존댓말을 쓰다니.. 저 애 동갑인 거 아냐? 혹시 에릭이 그런 플레이를 강요한거야?"
"그런 플레이라니?! 이녀석이 멋대로 그렇게 부르고있는 것 뿐이라고."
"그리고 에릭 방에서 함께 지낸다고? 아무리 친척이라도 구분 할 건 해야지!"
"아, 정말... 남는 방도 없고 그렇다고 소파에서 재울 수도 없잖아. 일단 같은 집에 사는 식구가 된 건데."
"나는 아직 이 애를 식구로 인정한 적 없어."
"그럼 남희 네 방에서 재워줄래?"
"...... 그건 싫어."
"그치? 것 봐. 그냥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그건 절-대 안돼! 안된다면 안되는거야!"
"아와와와..."
다래가 사이에 껴서 어쩔 줄 몰라한다.
"그럼 이렇게 하자. 다래를 내 방에서 재우고 내가 거실에서 이불 깔고 잘게. 그럼 됬지?"
"싫어! 왜 이런 여자애때문에 에릭이 쫒겨나야 돼?"
"아니, 있잖아...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아... 저기.."
다래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저는 거실이든 소파이든 어디서 자든 좋으니까 두 분, 싸우지 마세요오~...."
"흥! 저것 봐, 아무데서나 자도 상관 없다잖아? 에릭이 쓸데없이 신경쓰는 것 뿐이라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여자앤데 저런데서 자게 할 수는 없잖아?"
".... 여자애? 나는 평소에 여자애 취급도 안해주면서 지금까지 얼굴도 모르고 살던 처음보는 애는 여자애라고?"
"아니, 난 딱히 널 여자애 취급을 안한 게 아니라... 그리고 그건 지금하고는 상관 없잖아."
"상관 있어! 에릭 맨날 나 여자 아니라고 무시하잖아! 그리고 같은 방에서 자면 에릭이 무슨 짓 할지 어떻게 알아?"
"얼마전까지 무방비하게 내 방에 와서 태평히 자던 놈이 할 소리냐..."
"....! 그.. 그건.."
"아무튼 이녀석은 어떻게든 침대에서 재워야겠어. 네 방에 재워 줄 생각이 아니라면 내 방에서 재울테니, 그렇게 알아."
".... 마음대로 해. 난 몰라."
남희는 그대로 자기방으로 올라갔다.
화가 난 건가? 아니, 하지만 내가 다래에게 무슨 짓도 하지 않을 거라는 건 저녀석이 제일 잘 알텐데,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저기, 에릭... 혹시 저 때문에 두 분이 싸우신 건...."
"아니, 그건 아니야. 신경쓰지 말고 오늘부터 내 방을 쓰도록 해. 나는 거실이든 바닥이든 아무데서나 잘 테니까."
"그래도... 제가 이렇게 대접받아도 좋은 걸까요... 어찌됬던간에 저는 에릭을 감시하러 온 입장이고 에릭으로써는 그다지 달갑지 않을텐데요.."
"물론 달갑다고 하면 거짓말이야. 하지만 넌 어쨌든 내 손님이고 난 손님에 대해 최대한의 배려를 할 필요가 있어. 날 믿고... 아니 믿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에게 널 맡긴 녀석에게도 그게 예의라고 생각하고."
"에릭... 저 감동받았어요..."
"감동받을 틈이 있으면 빨리 짐이나 옮기라고. 저거 언제까지 현관을 막고 있게 둘 생각이야."
"아, 그렇네요! 지금 당장 정리할게요~"
다래의 짐은 약 1미터는 되어보이는 커다란 백팩과 작은 캐리어가방 몇개에 담겨있었다. 나는 그 가방을 들어올리려고 했다.
"일단 이걸 2층으로 옮기... 어.. 어라?"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것보다 뭔가 쇠붙이같은게 철그렁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저기... 이 안에 대체 뭐가 들어있는 거야?"
"글쎄요.... 아마 제가 저쪽에서 쓰던 물건이 들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 열어봐도 돼?"
"아, 네. 속옷이나 개인 용품은 이쪽 가방에 들어있으니까 상관 없어요~ 뭐, 이쪽가방도 열어보고 싶으시다면 상관은 없지만..."
"아니... 사양할게.."
나는 배낭의 지퍼를 열었다. 그랬더니-
"...... 뭐지.. 이건?"
스패너같은데? 이런게 왜 여자애의 개인물품에?
그 뒤로 나온 것들은 망치, 핸드드릴, 나사, 드라이버.... 각종 공병용구들이었다.
이녀석, 대체 저쪽에서 뭘 하고있었던 거지?
"아, 그거요? 무기라던가 헬기나 전차 수리용 도구들이에요. 전 모든 무기와 차종 수리 자격증을 가지고있거든요."
..... 혹시나 해서 옆에있던 다른 가방을 열어보았다.
거기엔 권총, 소총, RPG.... 이딴게 들어있었다.
탄창을 꺼내보니 진짜 총알이 들어가있었다.
"이건... 뭐냐?"
"그건 글록, 그 옆에 소총은 M4A1하고 K2 소총이고...."
"아니, 이름을 묻고있는 게 아니야! 이런 위험한 걸 니가 왜갖고있는데!?"
"이래봬도 전 정보수집 겸 호위를 담당하고 있거든요. 이정도는 당연하죠. 엣헴."
"당장 갖다놓고 와."
"에에? 그럼 혹시라도 위험이 닥쳐왔을 때 에릭을 지킬 수가 없어요!"
"무슨 위협!? 것보다 이것들은 대체 어디서 구한거야?"
"인터넷에서 샀어요. 에헤헤."
어이, 인터넷에서 그런 걸 팔리가 없잖아.
"하아...."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될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위험한 걸 집 안에 갖고 들어가게 할 수는 없어. 당장 버리고... 아니, 함부로 버렸다가 누가 주우면 큰일이지. 원래 있던 데다가 놓고 와."
"흐엥.."
"우는 척해도 안돼."
".... 알았어요... 어쩔 수 없죠.. 혹시라도 무슨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제 몸을 날려서 에릭을 지킬테니까요."
"아니, 그렇게까진 안해도..."
"흑흑, 여자애를 방패로 자신의 목숨을 연명해나가는 에릭을 위해서라면 저 하나쯤 희생해도..."
"......"
"마루, 미안해... 난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래도 역시 맨몸으론 무리가 있을 것 같아.... 그동안 나 보살펴줘서 고마워..."
갑자기 사망플래그를 세우려하지 마.
"아.... 모르겠다. 알아서 해. 갖고있던지 말던지. 대신 그걸로 위험한 짓은 하지마."
"와, 허락해주는 거예요?"
"대신 위험한 짓 하면 집에서 내쫓아버린다."
"당연하죠~ 그런 거 할 리가 없잖아요~"
너가 아까 현관에서 한 짓을 봤을 때 니 말은 신용이 없어.
"일단, 이것들부터 빨리 다 옮기자."
"옛설~"
약 한시간 뒤.
"후아... 겨우 다 옮겼네.."
나는 짐을 전부 내 방으로 옮기고 방바닥에 퍼질러졌다.
"히히, 에릭, 수고했어요. 어깨라도 주물러 줄까요?"
"아니... 됬어. 남희가 보면 분명 오해할 거고."
"혹시 두 분은 사귀고있는 건가요?"
"뭐? 아니야, 저런 애가 뭐가 좋다고.."
"왜요? 상당히 귀여운 편이신 것 같은데. 이 기회에 잡아보시는 건 어때요?"
다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만 둬, 저녀석과는 이제 거의 십년째 아는 사이야. 그동안 아무것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거야."
"으음... 에릭은 솔직하지 않군요. 저렇게 귀여운 여자애하고 한 지붕 아래 살면서 덮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니... 아니면 혹시 에릭은 고자인 건가요?"
"뜬금없이 뭔 개소리야?! 그리고 덮치는 건 고자가 아니라도 안한다고! 범죄야, 그건!"
"호오.. 그럼 이제 에릭은 제가 가져도 된다는 소리군요. 후후."
"..... 그건 또 뭔 소리냐?"
"설마 제가 아무런 이유 없이 에릭 집으로 순순히 온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미리 물어두는데 그 이유를 먼저 알려줘도 될까?"
"그야, 당연히 밤에 에릭이 자고있는 틈을 타서.... 으흐흐.."
"자, 그럼 넌 오늘부터 거실 소파에서 자. 난 침입자에 대비해서 방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자야겠어."
"에에? 아까까지는 같은 방에서 지내도 된다면서요!"
"생각이 바뀌었어. 원래 돌발상황이라는 것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야."
"흐..흥! 밖으로 쫓아내고 문을 걸어 잠가도 저는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구요! 제가 통과하지 못하는 문 따위는 없으니까!"
"......"
아, 맞다. 이녀석 순간이동을 할 수 있었지... 잊고있었다... 제길...
"역시 마루에게 전화를 걸어서 너를 다시 돌려보내야 겠어.... 아무래도 우리 집 안에 두기엔 너무 위험한 것 같아.."
나는 전화기를 들고 예의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와아아! 에릭! 미안해요! 절대 안그럴게요! 약속해요!"
다래가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내가 널 어떻게 믿냐?"
-안녕하십니까....
"한번만, 한번만 믿어줘요! 아, 여보세요? 잘못걸었어요! 이만!"
다래가 내 전화기를 뺏더니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아..."
"하아아...."
둘이서 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조금 장난친 것 가지고 에릭은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니깐요.."
"네 눈이 전혀 장난같지가 않았잖아! 누가봐도 진심으로 보였다고!"
"후후, 전 언제나 솔직한 여자랍니다. 에헷?"
"언제나 솔직하단 건 아까 그 말도 다 사실이란 거지? 역시 전화를..."
"와아아아! 아니예요!"
"하.. 정말 뭐하자는 건지..."
이 녀석이 오고나서 내 평온한 일상이 박살나고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시계를 보니 벌써 9시가 넘었다.
"난 어제오늘로 너무 피곤한 일을 겪어서 일찍 자야겠어. 내일 학교도 가야 하고. 이틀안에 한달동안 쓸 운동에너지를 한꺼번에 쓴 기분이야. 넌 알아서 이불깔고 자. 이불은 벽장안에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알았어요..."
다래는 더 이상 군말하지 않고 벽장에서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