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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8 주일오전예배
순간을 버리고 영원을 붙잡다
성경/ 룻1:11-18
할렐루야! 주님의 날을 맞아 예배하러 나온 여러분들을 주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함께 인사 나누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시어머니를 따라나선 며느리들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살펴본 대로 유다땅 베들레헴에 살던 한 가정이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이민을 갔었습니다. 거기서 10년이 훌쩍 지나는 동안 남편이 죽고, 설상가상으로 모압 여인들과 결혼했던 두 아들도 자식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과부가 된 시어머니와 두 며느리가 남았는데, 시어머니 나오미는 떠나왔던 고향 땅에 흉년이 그치고 풍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두 며느리도 나오미를 시어머니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기로 합니다. 길 가는 도중에 시어머니는 간곡하게 두 며느리들에게 자기를 따라가지 말고 각자 친정으로 돌아가 새 출발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며느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룻 1: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하지만 나오미는 재차 며느리들에게 돌아가도록 설득합니다. 자기에게는 더 이상 남겨진 소망이 없다고 합니다. 나오미에게 만일 다른 아들들이 있었다면 대안이 있습니다. 구약 율법의 규정에 따르면, 자식 없이 남편이 죽게 된 경우 그 형제가 형수를 취하여 자식을 낳아 죽은 형제의 이름으로 대를 잇게 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문이 끊어지지 않고 기업도 보존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오미에게는 자식이 없고 더 이상 자식을 낳을 가능성도 없습니다.
11절 이하에 이렇게 말합니다. “(룻 1:11-13)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지금 당장 내가 혹시라도 자식을 낳는다고 해도 그 자식이 클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신 것이므로 애꿎은 너희까지 이런 고통을 당하게 하니 마음이 더욱 아프다고 합니다.
오르바의 선택
이 말을 듣고 또 과부 세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생각하며 대성통곡을 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오르바는 자기 민족에게도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룻 1: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오르바는 나오미와 작별인사를 하고 친정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시어머니와 작별한 오르바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오르바는 나름대로 할 만큼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극구 돌아가라고 등 떠민 것입니다.
하지만 오르바는 자기 나름대로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하겠지만, 최고의 선택을 한 것은 아닙니다. 오르바는 이 땅에서의 짧은 시간의 행복을 위해 영원한 것을 버렸습니다. 오르바와 달리, 룻은 더욱 시어머니 곁에 착 달라붙었습니다. 끝까지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 부리는 룻에게 말합니다. “(룻 1: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오르바의 선택은 단지 자기 동족에게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신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모압 족속은 그모스신을 섬기는 민족이었습니다. 오르바는 그 신과 민족에게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원래 이방민족이었는데 비록 세상을 선택하고 떠나왔던 가족들이었지만 믿음의 뿌리가 있었던 시어머니 나오미를 만났습니다. 아마도 나오미는 모압지방에 살면서도 늘 여기가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데,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내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백성인데 하는 의식을 기지고 살았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비록 그 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교회를 향하여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부목사로 섬겼던 교회에서 수요일마다 설교를 했었는데, 그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낯선 여자 성도가 수요일 저녁 예배에 좀 늦게 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자마자 예배를 드리는 동안 뒷자리에 앉아서 하염없이 우는 것입니다. 나중에 예배가 다 끝나고서 인사를 하는데 알고 봤더니, 이분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아주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신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시가 쪽이 완고한 불교집안에다 교회를 싫어해서 교회를 수십년동안 다니질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계기가 되어서 그날 교회를 나오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마음에는 늘 교회에 가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하지 못하고 결국 자포자기 신세가 되어서 교호 가는 것을 포기했었는데 그날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당에 들어와 앉는 순간부터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입니다. 너무 오랜 시간 떠나있었던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비록 몸은 하나님의 약속이 깃든 땅과 백성들을 떠나있었지만 늘 마음 한구석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며느리들은 나오미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시어머니로부터 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가정에 큰 불행이 닥쳐서 몰락한 가정이 되었는데, 이제 나오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기로 굳건히 결심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앞으로 어떻게 도리 지 알 수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그동안 나오미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을 믿고 살 것이냐, 아니면 돌아설 것이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것입니다. 오르바는 결정했습니다.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룻의 선택
이제 선택권은 룻에게 있습니다. 나오미가 인사치레로 돌아가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룻이 돌아간다고 해서 미안해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룻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우리 16절-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룻 1:16-17)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한 마디로 죽어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의 문장 구조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 나오미: 돌아가라
B 룻: 떠나라 하지 마소서
C 어머니 계신 곳에 나도 가고
D 어머니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리이다.
E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
E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D 어머니의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고
C 어머니 장사되는 곳에 나도 장사되리이다
B 룻: 죽음 이외에는 어머니를 떠나지 않으리다
A 나오미: 돌아가라 말하지 않음(침묵함)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맨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지금 그 말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 핵심을 요약해 보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룻은 이 언약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런 신앙을 고백하면서 자기는 어머니와 함께 죽는 데까지라도 같이 가겠다고 말합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결코 이 충성의 맹세와 신앙의 고백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고백-언약의 하나님을 붙듦
이방여인 룻이 하나님에 대하여 언약백성 나오미를 향하여 이런 맹세를 합니다. 나는 언약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할 것이요, 언약의 하나님은 곧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제가 지금 어머니와 함께 가려는 것은 단지 인간적으로 어머니와 정이 많아 들었기 때문이 아니예요. 어머니가 믿는 그 하나님을 나도 믿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가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라는 말과도 같아요. 저는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을 떠날 수 없어요.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룻은 하나님께 돌아가기로 굳게 결심한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도, 팔자를 고치고 평안한 삶이 약속되었다고 해도, 나는 그것보다 언약백성과 함께 살고 죽는 일이 더 소중합니다. 세상에서 천 날보다, 하나님의 궁정에서 한날이 더 소중히 여기고, 세상에서 잠시 얻는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신앙고백이 있습니까?
룻의 이러한 결단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룻의 이런 신앙의 결단은 아브라함의 신앙과 견줄만 합니다. 룻이 자기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났듯이, 지금 룻은 자기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알지 못하던 민족의 땅으로 지금 룻은 떠나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관점으로 볼 때 룻은 지금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룻은 가족의 끈끈한 울타리도 포기하고, 민족적인 본성(신분)도 포기하고,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시어머니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들었던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근거로 하여 룻은 개인적인 신앙의 결단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깨 너머로 배운 신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신앙이 룻의 마음 깊이 뿌리박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굳은 신앙의 고백을 듣고 더 이상 나오미는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선택이며 결단이며 분명한 자기고백이다
룻은 순간의 행복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붙잡았습니다. 룻은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걸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뒤의 이야기를 알고 있어서 그렇지 지금 룻은 모든 것을 나 포기하고 내려놓겠다는 결단입니다. 평생 다시 결혼 못하고 시어머니 봉양하면서 사는 고생길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이라면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말이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성경에 잠깐 지나가는 인물로 언급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하나님나라의 구원역사에 큰 역할을 하는, 즉 메시야 다윗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도 인생에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무엇을 근거로, 무엇을 기존으로, 무엇 때문에 선택을 해오셨습니까? 인생이 무엇을 바라보며 가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 시대는 더욱더 눈에 보이는 물질 외에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자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꿈입니다. 요즘 아이들의 장래 희망의 제1순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옛날에는 대통령, 의사, 판사, 외교관 뭐 이런 것을 꿈으로 말했습니다. 무언가 국가나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겠다면 막연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의 꿈은 온통 건물주가 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나 목적 같은 것보다 그냥 부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것같아 안타깝습니다. 얼마 전 팟 캐스트와 유튜브 방송에 나왔던 한 젊은 여성의 꿈과 계획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의식을 잘 말해줍니다. 동영상으로 한번 보겠습니다.
안그런 친구들도 잇겠지만, 이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표준적인 생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건물을 가지고, 좋은 외제 스포츠카 타고 다니면서 돈을 쓰고 싶은 대로 폼 나게 쓰는 것 이외에는 별 생각이 없습니다. 어디 젊은이들만이겠습니까? 정말 걱정입니다. 주님께서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실 때 먹고사는 일 외에는 별관심이 없고 영혼에 대한 근심이 없는 현상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점점 그런 시대의 풍조를 보는 것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순간을 버리고 영원을 붙잡다
짐 엘리엇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명문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교수직도 제안을 받고 성공이 보장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짐 엘리엇은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29세의 나이로 남미 에콰도루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외부인들이 들어오면 다 살해해 왔던 폐쇄적이고 잔인한 아우카족(와다니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짐 엘리엇을 포함한 다섯 명의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러 아마존 정글의 어느 해변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1956년 1월 8일, 다섯 명 모두 창과 도끼에 의해서 순교당했습니다. 그들을 파송한 선교본부는 이들의 소식이 끊기자 실종신고를 하였고, 결국 수색당국에 의해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들의 주머니에 권총이 그대로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돌에 맞고 창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총을 끝까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원주민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 채 죽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짐 엘리엇은 아우카족에게 제대로 복음도 전하지 못했고 성경책 한권도 전해주지 못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 죽음입니까? 그래서 당시 언론에서 크게 이 문제를 다루기도 했습니다. 헛된 죽음 같이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 열매는 매우 컸습니다. 순교자들의 부인들이 간호사 훈련을 받고 아우카 부족에게 선교하러 들어갔습니다. 이 종족은 여자들은 죽이지 않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수년동안 그곳에서 아주 헌신적으로 봉사했습이다. 아우카족의 추장이 어느 날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이고 우리를 위해 이렇게 애써서 수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5년 전에 당신들이 죽인 그 남자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부족은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고, 선교사들을 살해한 3명이 와오라니 교회의 담임 목사와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원주민들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순교자 짐 엘리엇의 부인이 남편이 생전에 오랫동안 기록해왔던 일기장 등을 중심으로 전기를 썼습니다. 그 책의 이름이 [전능자의 그늘]입니다. 그 책 가운데 짐 엘리엇이 죽기 얼마 전 자기의 일기장에 남긴 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두고 두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것입니다.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어차피 지킬 수 없는 영원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 The Journals of Jim Eliot 중에서. 짐 엘리엇은 영원한 것을 붙잡기 위해 순간의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고후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여러분은 지금 영원한 것을 붙잡고 사십니까? 아니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붙잡고 사십니까? 이 땅에서의 짧은 순간을 위해 사십니까? 아니면 영원한 것을 위해 사십니까?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순교자 집 엘리엇의 말,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본문 말씀의 룻의 고백처럼 순간을 버리고 영원을 붙잡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