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신> '무의미 시'란 무엇인가 ― 김춘수 시인을 애도하며 / 임보
로메다 님, 원로 김춘수 시인이 타계했다는 소식이 오늘 아침 매스컴을 통해 크게 보도되고 있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향년 82세니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고, 생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의 기림과 추앙을 얻었으니 천복을 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시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복된 한 생애를 살았던 분입니다. 오늘은 그의 서거를 애도하면서 그가 거의 한평생 심혈을 기울여 작업했던 소위 '무의미 시'라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무의미 시라고 하면 마치 의미가 없는 시인 것처럼 이해되기 쉬운데 그렇진 않습니다. 그림과 비교하면서 시를 설명하는 다음의 내 글을 우선 읽고 이해해 보도록 하십시다.
무의미(無意味)의 시
세상 만물이 다 그렇지만 시도 시대와 사회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해 간다. 신라의 향가와 오늘의 현대시는 그야말로 천양의 차이가 있다. 아니 1920년대의 시와 1930년대의 시가 같지 않다. 동일한 시대에서도 또한 지역에 따라 한결 같지 않다. 동양의 시와 서양의 시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같은 서구라도 영국의 시와 독일의 시가 또한 다르다. 같은 종의 생명체도 풍토에 따라서 그 생김새와 성질이 서로 다르듯 시도 그것이 뿌리박고 자라난 역사적 사회적 여건에 따라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니며 또한 끊임없는 변모를 계속하고 있다.
미술의 경우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애초 그림은 사물의 모방에서 출발한 것이다.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실물처럼 그럴 듯하게 그린 그림이 훌륭한 그림으로 평가받았다. 솔거(率居)의 「노송도(老松圖)」가 그렇고, 미켈란젤로나 L.다빈치의 그림들이 또한 그렇다. 그런데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예술성을 화가의 사생력(寫生力)에서가 아니라 작가의 감성과 개성에서 찾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인상파가 등장하고 세잔, 고흐, 고갱 등의 거장들을 낳게 된다. 그 뒤 미술은 대상을 극도로 단순화하려는 추상화, 평면 예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입체화, 지상적(地上的) 질서와 일상적(日常的) 논리를 무너뜨리는 초현실주의 그림 등을 거쳐 드디어는 대상 자체를 거부하는 비구상화(非具象畵)에 이르게 된다. 비구상화는 대상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그리고 싶은 선을 그리고, 칠하고 싶은 색을 칠하면 그만이다. 그것은 무엇을 그린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그렸을 뿐이다. 거기에는 아무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 비구상화가들은 자기들의 작업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창조라고 말한다.
우리의 시문학도 미술과 비슷한 경로를 밟으면서 발전해 왔다. 이성(理性)이 주도한 고전주의로부터 감성(感性)과 개성(個性)을 존중한 낭만주의,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했던 상징주의 등을 거쳐 초현실주의에 이른다. 한 마디로 초현실주의란 심층심리를 대상으로 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는 과거 현재 미래의 복잡다단한 이미지들이 뒤엉켜 있는 심층심리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브르똥(A. Breton)은 시 쓰는 방법으로 '자동기술법'을 제시했다. 아무런 구상(構想)과 퇴고(推敲)도 없이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그대로 언어로 옮겨 놓는 기법이다. 그러니 거기에는 지상적 논리도 일상적 질서도, 어법도 무시된다.
현대시에서도 미술의 비구상화와 같은 시도를 해 본 적이 있다. 시도 비구상화처럼 대상을 떠나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언어 구조를 만들어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술에서의 선이나 색채와는 달리 시의 매체인 언어는 원초적으로 의미를 달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의미를 벗어난 언어 구조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독일의 구체시(具體詩, konkrete poesie)가 시도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얀들(E. Jandle)은 언어로부터 의미를 제거하기 위해서 알파벳을 무의미하게 흩어놓는다든지, 하나의 동일한 단어만을 반복해서 늘어놓는다든지, 의미가 없는 전치사들만을 이어놓는다든지 등등의 실험을 한 바 있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작품에서도 문자를 뒤집어 놓는 등 이와 유사한 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시에서의 이러한 시도들은 비구상화와 같은 순수한 무의미 세계를 성공적으로 구축해낼 수는 없었다. 여기에 언어 예술의 한계가 있다.
시가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대상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의미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대상 깨뜨리기'를 시도한다. 그렇게 해서 시가 대상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이것이 곧 '무의미의 시'라는 것이다. 무의미 시의 대부(代父)인 김춘수(金春洙)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자유연상의 기법을 원용한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자연스럽게 늘어놓는데 그 이미지들이 서로 결합하여 일상적 의미를 형성하려고 하면 의도적으로 그것들을 처단한다. 다음 「처용단장(處容斷章)」의 한 부분을 보도록 하자.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軍艦(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죽은 다음에도 물새는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海岸線(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이 시에 나타난 시간적인 배경은 겨울이고 공간적인 배경은 바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품 속의 겨울은 눈이 내리는 일상적 겨울이 아니라 비가 오는 겨울로 설정되어 있다. 즉 '겨울+눈'이라는 일상성을 '겨울+비'라는 낯선 정황으로 바꾸어 놓는다. 바다 역시 물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사물인데 여기서의 바다는 물이 없는 바다다. 즉 일상적 바다에서 물을 제거한 낯선 공간이다. 거기 물 없는 바다에 주저앉은 군함과 죽은 물새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죽은 물새에게 생명을 부여하여 다시 살리고 있다. 죽음과 삶의 간격을 뭉개버린 즉 생사(生死)가 공존하는 곳이다. 더더욱 기상천외의 구조는 죽은 바다가 한 사나이의 한쪽 손에 매달려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대상의 파괴와 대상들의 낯선 결합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은 이 지상의 어느 곳에도 있지 않은 이 작품 속에서만 존재한다. 순수한 창조적인 세계다. 그러니까 무의미의 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가 아니라 일상적인 논리와 의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다. 시를 무의미한 말놀이로 생각한다.
시는 계속 변모해 가고 있다. 전통적인 시의 틀을 거부하는 해체시 혹은 포스트모던의 시들이 여러 가지 실험들을 계속하고 있다. 어느 시대나 기존의 것을 거부하는 새로운 시도는 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가 건실하고 긍정적인 것일 때 그것은 새로운 전통을 형성하는 요소로 기여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폐습을 조장하는 공해물(公害物)로 남게 되고 만다. --[엄살의 시학] pp.105-108
로메다 님,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의미의 시란 '자유를 추구한 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대상으로부터의 자유, 이념으로부터의 자유, 세계로부터의 자유…
내 개인적으로는 '무의미 시'를 별로 달갑게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유'가 지나쳐서 '방종'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는 사물과 세계를 만신창이로 파괴하기도 하고, 이질적인 사물과 사물들을 폭력적으로 결합하여 낯선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 '자유'는 세계에 대한 부정―곧 허무정신에 닿아 있습니다.
내 개인적인 기호와는 상관없이 김춘수 시인이 시도했던 무의미 시의 작업은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영역을 확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시사(詩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은 무의미 시가 마치 시의 전범(典範)인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일입니다. 무의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김춘수 시인만을 맹종한 나머지 그의 시풍을 잘못 모방하는 아류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치 시는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으로 써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상한 풍조가 우리 시단에 생겨난 것도 같습니다.
해체시의 시도는 이상(李箱) 한 사람으로 충분하듯이 무의미 시 역시 김춘수 한 사람만으로 족합니다. 그를 흉내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로메다 님, 누구의 모방이 아닌 자신만의 시풍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운을 빕니다.
- 임보 교수 시창작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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