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들의 몸에 걸친 경사옷들은 노래 소리에 따라 한 겹씩 벗겨져 나갔다. 불빛은 땅 위에 그녀들의 길고 균형잡힌 다리를 빠짐없이 비춰줬다. 그녀들의 춤은 이제 산만해져서 춤이라고 할 수 없고 단지 원시적인, 그리고 간간히 가락이 불규칙한 동작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동작은 세상 그 어떤 무희의 춤보다 더 뇌살적이었다. 이 일련의 변화는 이 귀기어린 음산한 전장을 순식간에 생기발랄한 나락의 지대로 빠르게 변모시켰다. 남자라면, 피가 있고 살이 있는 남자로서 이런 신음소리를 듣고, 이런 춤을 보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생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심랑이 바로 그러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는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그 곳에 멍하니 서서 잠꼬대하듯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녀란 말인가?#어떻게 그녀란 말인가?" 쾌활왕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척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낮은 중얼거림은 이들 소녀들의 뇌살적인 신음소리에 묻어 버리고 말았다. 신음소리는 점점 더 심해지고 춤도 점점 더 격해졌다. 소녀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고 얼굴은 불덩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들은 땀방울조차도 요염했다. 이 땀방울은 마치 남자들의 원시적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효능이 있는 듯했다. 또 남자들의 본능적인 잔혹한 학대성을 만족시켜 주는 것 같았다. 쾌활왕도 눈을 휘둥그래 뜨고 있었지만 대체 무엇을 바라보는지, 아니면 넋놓고 생각에 빠져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가 대체 무엇을 생각하는 지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갑자기 소녀들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사지를 비틀고 떨면서 땅에 쓰러졌다. 그들은 매끈하고 부드러운 피부를 거칠은 흙과 정신없이 마찰시켰다. 그녀들은 마찰하고 발버둥치며 비틀고 떨고#. 마치 자신들의 몸을 갈갈이 찢으려는 듯 했고 또한 사람들에게 깔린 생선같기도 했다. 갑자기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사지를 쭉 뻗고 땅에 누워 있었는데 가슴을 들썩이며 계속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들은 마치 마지막 남은 힘까지 전부 다 내뿜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녀들은 더이상, 다시는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들은 괴이하게도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들이 지금 이 순간에 괴멸이 된다 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사방에는 단지 그녀들의 소리만 남았다. 귀여운 아가는 드디어 팔 뒤꿈치로 몸을 받치고는 쾌활왕을 바라 보았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물었다. "대왕께서는 만족하셨나요?" 쾌활왕은 수염을 쓰다 듬었다. "귀여운 녀석들!" 귀여운 아가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저희 같은 여자들이 분명히 당신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나요?" "하, 하, 그대가 이미 증명을 했는데 본왕이 어찌 믿지 않겠느냐?" "그럼 대왕께서는 저희들을 거두어 주세요. " "너희들을 거두어 달라고?" "호, 호, 저희 궁주께서 저희들을 이 곳에 버리고 가신 것을 보면 이제 저희들이 필요없게 됐나 봅니다. 그녀. 그녀는 어차피 여자이지만 대왕께서는 남자이시기에#저희들을 죽이지는 않겠죠?" 쾌활왕이 약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보니 너희들은 자신들의 몸으로 목숨과 바꾸려는 것이었구나. " "대왕께서도 어차피 남자시잖아요. " 쾌활왕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호쾌하게 웃었다. "본왕이 어찌 너희들을 죽일 수 있겠느냐? 너희 같은 어린 소녀들도 놔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하의 영웅이 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심랑과 같은 귀재를 승복시킬 수 있겠느냐?" 그는 갑자기 손을 내저으며 외쳤다. "모두 가거라!" 귀여운 아가는 애원하듯 말했다. "대왕#. 께서는 저희들을 원치 않나요. ?" "하, 하, 하, 너희들은 스스로를 매우 유혹적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본왕의 눈에는 아직도 다 자라지 않은 어린애에 불과하니 어찌 너희를 거둘 수 있겠느냐?" 귀여운 아가는 더듬거리며 말을 못했다. "당신#. 당신#. " "하, 하, 너희들이 방금 췄던 춤들은 모두 헛거다. 어서들 옷이나 입고 얌전히 집으로 돌아 가거라. 다음에 다시 올 때는 잊지 말고 기저귀도 함께 갖고 오도록 하고. " 귀여운 아가는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지더니 땅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한 조각의 경사를 줏어서 몸을 가리고는 얼굴을 붉히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외쳤다. "이 늙은 여우야, 넌#사람도 아니야, 사람도 아니야#사람도 아니야. " 그녀는 몸을 돌려 나는 듯이 달아났다. 마치 채찍질에 도망치는 작은 토끼처럼. 다른 소녀들도 얼굴을 붉히고 비틀거리며 가는데 이들에게서는 더이상 뇌살적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쾌활왕은 앙천대소를 하고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작고 왜소한 인영이 갑자기 연기처럼 솟아 나와서는 절을 했다. "소인에게 분부하실 말씀이 있나요?" 몸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 바로 어제 저녁에 심랑들을 위해 패를 돌리던 그 작은 요정이었다. 이 왜소한 난장이의 경공이 이렇게 놀라우리라는 것은 심랑도 생각못했다. 쾌활왕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들의 뒤를 밟아서 그들이 머물고 있는 거처를 알아낸 뒤 즉시 돌아와서 내게 보고하거라. " 작은 요정은 절을 하더니 '네'하는 대답과 동시에 튕겨 나갔다. 이 짙은 저녁에 단지 반짝하고는 이미 사라진 것이다. 그의 빠른 신법은 마치 암흑 속의 요정같았다. 심랑은 내심 감탄을 하였다. '쾌활왕의 문하에는 과연 가볍게 볼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이제 그의 안색에는 전혀 조금 전과 같은 멍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는 쾌활왕의 악으로 다가서서 허리를 굽혔다. "대왕의 호기로운 흉금과 응변하는 기지는 당금 천하에서 누구도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겁니다. 저는 단지 작은 소녀조차 잡지를 못했으니 참으로 대왕을 뵐 낯이 없군요. " "하, 하, 그 유령여귀의 용모가 심랑으로 하여금 마음을 약하게 하다니 아마도 천하 절색의 가인임에는 분명하겠군. 단지 안타까운 것은 본왕이 그녀를 볼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야" "그녀는 이미 대왕의 손 안에 든 물건이 아니옵니까?" "하, 하, 하, 심랑아! 심랑아! 그대는 나를 이해 할 뿐만 아니라 나를 구했으니 어떻게 보답해야 하지?" 심랑이 씁쓸하게 웃었다. "만약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그녀들은 이미 대왕의 포로가 됐을 텐데 대왕께서 아직도 그렇게 말씀하시니 심랑은 낯을 들 수가 없군요. " "만약 자네가 아니었다면 본왕은 그 술을 마셨을 테고, 지금 아마도 나는 그녀의 포로가 됐을 것이네. " 심랑이 약간 미소를 지었다. "대왕께서는 정녕 술에 독이 있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본왕이 알았다면 어찌 마시려고 했겠는가?" "대왕께서는 비록 잔을 들었지만 절대 입에는 대지 않았습니다. 대왕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바로 저 심랑이 과연 이 계책을 알아차릴 안목이 있는지를 시험하시려던 것 뿐입니다. " 쾌활왕이 박장대소 하였다. "심랑은 과연 내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구나#. 심랑은 과연 내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어#. " 쾌활왕은 언제나 그의 곁에서 목숨을 걸고 그를 보호하던 독고상이 아직도 생사를 모른 채 땅에 누워 있는데도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심랑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제 대전(大戰)도 끝났으니 본왕이 그대를 특별히 치하하는 뜻으로 후궁들을 보여주지. " "대왕의 후궁들은 분명히 속세에서 보기 드문 절세 가인들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극히 추하게 생긴 남자입니다. " "김무망인가?" "대왕께서는 과연 대단하십니다. " "본왕은 자네가 이미 그를 잊은 줄 알았네. " "일생을 통털어 가장 좋은 친구를 어찌 잊겠습니까?" "그대가 김무망과 서로 지기가 된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더구나 감히 내 악에서 김무망과의 우정을 인정하는 것 또한 정녕 쉽지가 않지. " "대왕께서 진심으로 저를 대해 주시는데 제가 어찌 숨길 수 있겠습니까?" 쾌활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좋아, 지금 그를 만나고 싶나?" "저는 너무 오래토록 기다렸습니다. " "좋아, 지금 그를 불러주겠네. " 그가 다시 손뼉을 치자 곧 한 사람이 자단목으로 된 작은 나무 상자를 들고 큰 걸음으로 걸어 왔다. 그 자는 훤칠하게 큰 키에 잘생긴 소년이었지 김무망은 아니었다. 심랑은 갑자기 한기를 느끼며 안면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소년이 자단목 상자를 양손으로 올려 바치자 쾌활왕은 상자를 치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그를 보고 싶다면 그 상자를 열어보게. " 심랑은 여태까지 위험한 일들을 수없이 많이 격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두려운 적은 없었다. 찰나지간에 그의 손과 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와졌다.
김무망이 혹시 죽음을 당한 것인가? 이 상자 안에 혹시 김무망의 머리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심랑은 더이상 생각할 용기가 없었다. * * * 그것은 작은 나무 상자였다. 길이는 사척(四尺)이 안됐고 너비는 이척(二尺)이 안됐으며 자금(紫金)으로 된 고리장식이 달려 있는 매우 정교하고 고아한 것이었다. 심랑의 손은 그 튼튼하고 윤택한 나무에 닿자 떨려옴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천근의 솥도 들 수 있었으나 지금은 이 작은 나무 상자의 뚜껑조차 열 수 없을 것 같았다. 쾌활왕은 냉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길게 탄식을 흘렸다. 상자의 뚜껑이 드디어 열렸다_____쾌활왕이 직접 열어준 것이다. 상자 안에 사람의 머리는 없었다. 대신 편지 한통이 들어 있었다. 심랑은 한시름 놓았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속하는 비록 대왕을 위해 목숨 바칠 각오는 되 있으나 이미 수족(手足)을 다쳐 현실적으로는 더이상 대왕을 위해 힘을 쓸 수 없게 됐습니다. 대왕께서 국사(國士) 대우로 저를 대해주셨는데 속하가 죽음으로써 대왕께 보답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속하는 이제 세상 어디로든 떠돌아 다니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해와 같은 은혜와 원수를 한 몸에 지닌 이상, 저 또한 자포자기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다시 복수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면 반드시 대왕의 휘하로 돌아와 죽을 때 까지 대왕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 심랑은 그 편지를 다 본 후, 온 몸의 피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쾌활왕은 탁자를 내리쳤다. "은원이 분명하고 죽을 때까지를 기약하니 김무망은 역시 보기드문 대장부야. " 심랑은 침울하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소망이 이루어 지고 은원이 다 해결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 "하, 하, 하, 하, 본왕의 부하로는 사사(四使)가 있었지. 그러나 지금 죽을 사람은 죽고 갈 사람은 갔으니 이젠 아무도 남지 않았네. 하지만 본왕은 여전히 기쁘게 웃을 수 있는데 자네는 뭣 때문인지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 "그것은 바로 자네가 있기 때문이네. 자네 한 사람은 그들 네 사람을 대신하고도 남으니까. " 그는 우뢰와 같은 큰 웃음소리를 날리며 심랑의 손을 끌고 내실로 갔다. * * * 만약 쾌활왕의 내실이 얼마나 고아한 가를 묘사하려고 형용사를 찾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헛일이다. 왜냐하면 그 곳은 이미 언어로서 형용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내실에는 십여 명의 절세의 소녀들이 있었다. 비스듬히 눕거나 맵시있게 서 있었고, 몸에는 바닥까지 닿는 경사를 걸치고 또는 백설같이 하얀 다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내실의 고아함처럼 그녀들의 아름다움과 매력 역시 정말 형용하기 어려웠다. 그녀들은 쾌활왕이 한 청년을 대동하고 들어오자 놀란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들은 심랑을 뚫어지라고 주시했는데 마치 심랑의 얼굴에 꽃이라도 핀 것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이 밀실에 남자가 들어오다니, 이는 전에 없었던 일이다. 이 청년이 대체 누구일까? 어째서 대왕조차도 그를 이렇게 중시하는 것일까? 이 남자를 이 밀실로 데리고 오느라 그의 손까지 잡고 말이다. 이 청년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어째서 그의 얼굴에 감도는 미소는 저리도 사랑스러울까? 또 어찌 그리도 얄미울까? 이가 간지러울 정도로 얄미우면서도 또 마음 속까지 사랑스러움이 느껴질까? 쾌활왕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남자가 미녀를 봤을 때만 얼이 빠지는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여자도 미남자를 보면 이렇게 얼이 빠지는군. " 소녀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떨구고 키득키득 거렸다. 그러면서도 몰래 고개를 들어 심랑을 훔쳐보는 것이었다. 쾌활왕은 심랑의 어깨를 '탁'치더니 물었 ... 파본....
는 바닥까지 닿는 경사를 걸치고 또는 백설 같이 하얀 다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내실의 고아함처럼 그녀들의 아름다움과 매력 역시 정말 형용하기 어려웠다. 그녀들은 쾌락왕이 한 청년을 대동하고 들어오자 놀란 듯이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녀들은 심랑을 뚫어지라고 주시했는데 마치 심랑의 얼굴에 꽃이라도 핀 것으로 착각한 것같았다. 이 밀실에 남자가 들어오다니, 이는 전에 없었던 일이다. 이 청년이 대체 누구일까? 어째서 대왕조차도 그를 이렇게 중시하는 것일까? 이 남자를 이 밀실로 데리고 오다니. 그의 손까지 잡고 말이다. 이 청년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어째서 그의 얼굴에 감도는 미소는 저리도 사랑스러울까? 또 어찌 그리도 얄미울까? 이가 간지러울 정도로 얄미우면서도 또 마음 속까지 사랑스러움이 느껴질까? 쾌락왕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남자가 미녀를 봤을 때만 얼이 빠지는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여자도 미남자를 보면 이렇게 얼이 빠지는군." 소녀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떨구고 키득키득 거렸다. 그러면서도 몰래 고개를 들어 심랑을 훔쳐보는 것이었다. 쾌락왕은 심랑의 어깨를 ‘탁'치더니 물었다. "자네 보기에 저 애들 어떤가?" "모두 하나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요염하군요. 아까 대왕께서 귀녀들에게 눈길조차 주시지 않은 이유를 알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으면 말해 보시게, 내가 자네에게 보내 줄테니." "그것만은 사양하겠습니다." "하, 하, 자신이 아끼던 첩을 선사하는 미담(美談)은 옛고인들로부터 천 년 동안 전해내려 온 것이네. 본왕이 흉내내지 못 할 이유가 없지 않나? 하물며 요 계집애들이 이렇듯 자네를 훔쳐보는데. 만약 그녀들이 홍불(弘拂)처럼 야반도주하는 일을 당하기 전에 본왕이 먼저 손을 써야겠네. 자, 누구라도 괜찮네, 어서 말만 하시게나." 심랑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안했다. 그는 이들 절세가인들을 보면서 또 이들의 길고 균형잡힌 다리를 보면서도 마치 나무토막을 보는 듯했다. 쾌락왕은 뚫어 질 듯이 그를 보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허풍 떠는 것이 아니라 황궁의 비빈(妃嬪)들이라 해도 이만큼 예쁘지는 않을 걸세. 정말로 단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애가 없단 말인가?" "화장품이 아까울 따름입니다." 쾌락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호쾌하게 외쳤다. "심랑아! 심랑아! 눈이 정말로 높구나." "대왕께서 아까 그 유령여귀의 모습을 못 본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자네는 그 여귀가 정말로 천하 제일의 미녀라고 생각하나?" 심랑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좋다. 본왕이 직접 자네에게 진정한 미녀의 모습이 어떤지 견식을 넓혀 주겠네." "미녀는 얻기 쉽지만 절세의 미녀는 얻기 어렵습니다." 쾌락왕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본왕이 지금 자네를 데리고 한 사람을 만나러 갈 것이네. 그녀를 본 후에도 여전히 유령여귀가 천하 제일의 미녀라고 한다면 기꺼이 승복하겠네." 그는 다시 심랑의 손을 끌어 잡으며 말을 이었다. "제발 그녀를 보고나서 절대 넋이나 빠지지 말게. 그리고 본왕의 모든 것은 다 자네에게 줄 수 있지만 그녀만은......." 그는 말을 멈추고는 앙천광소(仰天狂笑)를 날렸는데 그 득의양양한 기색이 말과 표정에 넘치고 있었다. 심랑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만 그녀가 저를 보고 실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의 말 속에는 다른 깊은 뜻이 있는 듯했지만 아깝게도 쾌락왕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밀실 속에 또 하나의 밀실이 있었다. 심랑은 쾌락왕을 따라 겹겹이 늘어진 휘장을 지나갔다. 희미하게 그 소녀들이 불만을 토하는 소리, ‘쳇'하며 비웃는 소리,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쾌락왕이 아깝다는 듯 말했다. "심랑아! 심랑아! 자네는 그녀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했네. 이렇게 거들떠보지도 않고 간다면 그녀들이 얼마나 상심하고 실망하겠는가." "전 원래부터 여색을 밝히지 않는 남자라 대왕처럼 다정하지가 못합니다." "여색을 밝히지 않는 남자라......." 그는 크게 터뜨리려던 웃음을 멈추더니 낮게 속삭였다. "쉿! 소리를 낮추게. 발걸음도 가볍게 하고. 그녀는 몸이 약하니 절대로 놀라게 하면 안 되네." 심랑은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웃음이 나왔다. (천하의 쾌락왕이 이토록 그녀를 아끼다니, 삼천 궁녀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부차가 서시(西施)를 사랑하던 것도 쾌락왕에 비하면 별 것이 아니겠군.) 그는 생각을 다시 해봤다. (설마 그녀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녀란 말인가?) 깊은 휘장 안에 또 하나의 작고 정교한 문이 나타났다. 심랑은 여태까지 각양각색의 문을 본 적이 있었다. 즉, 목제(木製), 동제(銅製), 벽돌, 혹은 황금으로 만든 문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문은 그가 이제까지 봤던 문들과는 전혀 달랐다. 이 문은 생화(生花)로 짠 것이었다. 수천 송이의 색상이 각각 다른 생화로 아주 교묘하게 짠 것이라 그 선염한 색채가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힐 정도로 현란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두 명의 계집종이 마침 문 악에서 낮은 소리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쾌락왕을 보자 동시에 사뿐히 절을 하고는 요염하게 웃으며 합창했다. "대왕께서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두 소녀의 눈길이 어느 새 심랑의 얼굴 위를 몇 바퀴를 돌았다. 이들의 나이가 비록 어렸지만 눈치만큼은 매우 빨라 꼭 여우같았다. 쾌락왕이 말했다. "오늘 일찍 온 것이 아니라 어제 늦게 온 것이다." 오른쪽의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계집종이 말을 받았다. "맞아요. 대왕께서는 언제나 아침에 아가씨를 보러 오셨었죠. 단지 오늘 밤, 아니, 어제 저녁이라고 해야겠죠. 아가씨는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대왕께서 오시지 않자 얼마나 애를 태우셨는데요." "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애를 태우며 본왕을 기다렸단 말이냐?" "정말로 애를 태웠다구요. 대왕께서 저 앵아(鶯兒)의 말이 믿기지 않으신다면 연아(燕兒)에게 물어 보세요." 연아가 거들었다. "연아는 아가씨가 애를 태웠는지 아닌지는 잘 모릅니다. 단지 아가씨가 기다리면서 손에 쥔 말린 꽃으로 만든 공을 하도 문질러서 부서진 것은 압니다." 쾌락왕은 웃음이 막 입 밖으로 나오려는 찰나에 멈추더니 낮은 소리로 물었다. "아가씨는 지금 주무시고 계시냐?" 앵아가 대답했다. "아까 반 잔의 인삼탕을 드신 후 겨우 잠이 드셨습니다." "아......!" 쾌락왕의 얼굴에는 뜻밖에도 실망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그렇다고 그녀를 깨울 엄두는 나지 않았다. 앵아가 말했다. "대왕께서 먼저 가셔서 한 잔 하고 계시면 아가씨가 깨어나신 후 앵아와 연아가 다시 대왕을 모시러 가는 것이 어떨까요?" 쾌락왕의 안색은 매우 부드럽게 변했다. 아무리 봐도 일세를 풍미하는 효웅패주(梟雄覇主)의 기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그냥 살짝 들어가서 그녀를 보면 안 될까?" 앵아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대왕께서 들어가신다면 누가 감히 막겠어요?" 연아도 역시 입을 삐죽 내밀었다. "단지 대왕께서도 아시다시피 아가씨께는 절대로 안정이 필요합니다. 아가씨가 주무실 때는 절대로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은 대왕께서 하신 것인데요?" "그럼...... 그렇다면......." 그는 고개를 돌려 심랑을 보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본왕이 요런 계집애들에게조차 신용을 잃을 수는 없겠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우리 그냥 가세!" "가시죠." 이렇듯 일세를 풍미하는 쾌락왕이 이토록 한 아가씨에게 고분고분할 줄이야! 심랑으로서는 상상도 못한 모습이었다. 만약 이 아가씨가 그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아가씨라면 그녀가 부리는 수법은 정말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쾌락왕은 비록 몸은 돌리고 있었지만 눈은 아직도 문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문 안쪽에서 매우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대왕께서 오셨나요?" 쾌락왕은 희색이 만면했지만 입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대는 자구려. 어서 자구려." 앵아가 또 입술을 삐죽거리며 나지막하게 투덜댔다. "자기가 깨워놓고는 다시 자라는 사람이 어딨어?" 쾌락왕은 들은 척도 안했다. "본왕은 잠시 후 다시 들리겠다." 문 안쪽의 부드러운 음성이 가볍게 웃으며 청했다. "대왕께서는 이왕 오셨으니 어서 들어오세요." "들어가면 너무 그대를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그 음성이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대왕께서 오신다면 천첩은 며칠 밤낮을 못 잔다고 해도 즐거울 겁니다." 이 음성은 너무나 부드러웠고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음성에는 은연 중 사람을 감동시키고 또 수줍음을 못 이기는 듯 사람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었다. 심랑은 이 음성이 흘리는 웃음 소리를 듣고는 눈이 갑자기 빛났다. 쾌락왕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본왕은 들어가겠소. 그런데 나 외에 또 한 사람의 손님이 그대를 보고싶다고 해서 함께 와 있는데, 그대의 의견은 어떻소?" "대왕께서 그를 이곳까지 데리고 오셨다면 그는 분명히 출중한 인물임에 틀림없을 테지요. 그런 분을 만나는 것 또한 천첩은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쾌락왕은 심랑의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어때? 저 작은 입은 정말로 사람 애간장을 태운다니까!" 심랑이 미소 지으며 맞장구쳤다. "과연 그렇겠군요." 쾌락왕의 웃음은 더욱 득의양양해졌다. 연아와 앵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꽃문을 열었다. "대왕께서는 어서 드세요." 두 소녀는 비록 입으로는 ‘어서 드세요'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백 번도 아니라고 외쳤다. 그 곳은 정녕 생화의 세계였다. 방 안 가득히 생화들로 꽉 차 있었던 것이다.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고 단지 수천 수만 송이의 꽃들로 매혹적인 세계가 이루어져 있었다. 수만 송이의 화사한 꽃 속에 구름과 같이 긴 머리채와 백설보다 더 흰 옷을 입은 절대가인(節代佳人)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썹, 전혀 화장기 없는 얼굴은 이미 모든 생화의 아름다움을 모은 듯했다. 심랑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심장의 박동수가 점차 빨라짐을 느꼈다. 그녀는 과연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바로 오랫동안 헤어져 소식이 끊겼던 백비비였던 것이다. 물보다 더 부드러운 백비비의 눈길이 심랑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녀의 눈길은 수만 마디의 말보다 더 깊은 뜻을 전하고 있었다. 그 눈길은 마치 원망인 듯, 또는 기쁨인 듯, 책망하는 듯, 또는 용서를 비는 듯했다. 아주 옅은 한이 담긴 듯, 짙은 사랑이 담긴 듯....... 그녀가 던진 이 눈길에 담긴 뜻을 형용하려면 아마도 쉬지 않고 삼일 낮, 삼일 밤을 늘어놓아도 모자랄 것이다. 그녀의 입술이 매우 부드럽게 말했다. "천첩은 도저히 일어설 힘이 없으니 대왕의 용서를 빕니다." 쾌락왕이 서둘러 말했다. "계속 누워 있거라. 계속 누워 있어." 그는 심랑을 악으로 끌어당겼다. "이 분 심 공자께서 계속 그대를 보고 싶어했단다." 이 찰나에 심랑의 뇌리에는 수천 가지의 상념이 스쳤다. 쾌락왕은 내가 그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그녀는 나를 모른 척할까? 나는 그녀를 모른 척해야 하나? 심랑은 평소 매우 과감하고 빠르게 판단을 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쾌락왕의 악에서 절대로 의심을 살만한 실수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백비비가 가볍게 질책하는 듯 물었다. "대왕께서는 천첩이 이미 심 공자와 아는 사이라는 것을 분명 아시지요? 그런데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쾌락왕이 스스로의 머리를 치며 웃었다. "아! 그대가 말한 심 공자가 바로 이 분, 심 공자이셨군." 백비비는 부드럽게 웃음을 흘렸다. "천첩이 강호를 떠돌아다닐 때 만약 이 분 심 공자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저는 대왕을 모실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본왕은 마땅히 그에게 고맙다고 해야겠군" 심랑이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백비비가 말했다. "심 공자께서 오늘 이렇게 이곳에 와주시니 천첩은 너무 기쁘군요." "알려 줄 것이 있소. 이 분 심 공자는 이제 본왕과는 한 식구가 됐다오." 쾌락왕의 말에 백비비는 정말로 매우 기쁜 듯이 활짝 웃음을 보냈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쾌락왕이 답했다. "본왕은 세상 사람들은 다 속일지라도 그대만은 속이지 않는다오." "이는 실로 좋은 일이군요. 천첩은 어떻게 하든 주안상을 마련하겠습니다. 두 분께 축배를 올려야 하니까요." 그녀는 침상에서 내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쾌락왕은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그대는 움직이지 마오. 본왕이 술을 마시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시켜 차리게 할 테니까." "대왕께서는 안심하세요. 천첩은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물며 오늘 두 분, 절세의 영웅을 만난 날인데 천첩이 만약 손수 술상을 보지 않는다면 평생토록 한이 될 거예요." 그녀는 가볍게 쾌락왕의 손을 풀고는 사뿐히 걸어 나갔다. 쾌락왕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더니 안타까운 듯 탄식을 했다. "그녀는 다 좋은데 단지 몸이 너무 약해서 탈이야." 고개를 돌려 심랑에게 물었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심랑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짐짓 탄식을 했다. "미녀에게 이미 주인이 있는데 심랑이 지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심랑아! 심랑아! 혹시 그대는 질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대왕께서는 제가 질투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쾌락왕은 한껏 소리 높여 웃었다. "심랑의 능력에는 만 명이라도 적이 안 되고, 입술에는 만 명일지라도 그의 상대가 안되는구나. 만약 하늘이 백비비와 심랑, 이 두 사람 중 양자택일을 하라고 한다면 본왕은 단연코 심랑을 택하고 싶네." 심랑이 웃으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대왕의 이 한 말씀은 천 마디의 말씀으로 저를 칭찬하시는 것보다 더 감격스럽습니다." 쾌락왕은 문득 웃음을 멈추더니 짓누르는 듯한 눈빛으로 심랑을 바라보았다. 그는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내가 이렇게 그대를 대하니 후일에라도 그대는 나를 절대 배반하지는 말게." 심랑은 정색을 했다. "저를 알아주시는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쾌락왕은 심랑의 어깨를 치더니 통쾌하게 웃었다. "좋아, 일대의 영웅과 미인이 모두 내게 있으니 오늘 본왕은 취하지 않을 수가 없겠구나." 백비비가 사뿐히 걸어 왔다. 펄럭이는 옷을 입는 그녀의 자태는 마치 선녀와 같았다. 연아와 앵아도 그녀를 따라 걸어왔다. 한 소녀는 손에 정교한 팔진반(八珍 )을 받쳐들었는데 그 위에 담긴 안주는 그야말로 산해진미였다. 또 한 소녀의 손에는 말할 것도 없이 금잔과 좋은 술이 들려 있었다. 백비비가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천첩이 심 공자께 드릴 것은 없고 제가 손수 빚은 ‘공작개병(孔雀開屛)'을 들어 보시지요. 이 술은 대왕께서 평소 괜찮다고 하셨지만 심 공자의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심랑이 부드럽게 답례했다. "대왕의 술과 미인을 감정하는 실력은 천하무적이죠. 그러니 대왕께서 좋다고 하시는 술이라면 그야 물론 좋......."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술을 들고 있던 연아가 갑자기 ‘아야'하는 소리와 함께 발에 뭐가 걸린 듯 넘어지며 심랑의 품 속에 안겼다. 심랑은 급히 손을 내밀어 부축했는데 어느 새 그의 손아귀에는 작은 종이쪽지가 쥐어져 있었다.
65장 연환계(連環計)를 잠시 멈추다
심랑은 연아가 손바닥에 쥐어 준 종이쪽지를 몰래 받고는 아무런 내색도 않고 친절하게 말했다. "조심해서 걸어요." "네가 넘어지는 것은 괜찮지만 심 공자의 옷을 더럽혔거나 손에 든 좋은 술을 엎질렀다면......." 쾌락왕이 약간 화가 난 듯하자 백비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천첩이 다시 한 번 조제하면 되니 괜찮아요." 옥수(玉手)로 술주전자를 잡고는 쾌락왕에게 한 잔 따르자 쾌락왕의 화는 즉시 장쾌한 웃음으로 변했다. 그녀는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재주 뿐 아니라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수단 또한 뛰어났다. 그녀는 쾌락왕을 아주 고분고분하게 만들었고 연아와 앵아로 하여금 목숨 바쳐 충성케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본 심랑은 미소를 금치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잔의 술이 뱃속에 들어가자 심랑은 즉시 이 '공작개병'술이 비길데 없이 향기롭고 감미로울 뿐만 아니라 뒷 기운이 이리도 심후한 데에 놀랐다. 이 술 속에는 대곡주, 모대주(茅台酒), 고량주(高粱酒), 분주(汾酒), 죽엽청(竹葉靑) 등의 독한 술 뿐만 아니라 장원홍(壯元。), 포도계원(葡萄桂圓) 등과 같은 약한 술도 섞여 있는 듯했다. 이 십여 종의 술을 한데 섞어서 마시니 어찌 천지가 요동할 정도로 뱃속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을 것인가? 강철로 된 뱃속이라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었다. 게다가 독한 술과 약한 술을 한데 섞었으니 술기운은 더욱 빨리 돌았을 것이고 뒤끝도 상당히 괴로울 것이었다. 심랑은 즉시 조심하기 시작했다. 비록 고개를 뒤로 젖히며 들이켰지만 언제나 반 잔은 남겨뒀다. 백비비도 그에게 술을 따라 줄 때에는 비교적 적게 따라 주었다. 쾌락왕은 흉금을 털어놓고 마음껏 마시는 지라 술을 따르는 즉시 다 마셔버렸다. 그가 아무리 초인이라고 하지만 역시 인간은 기본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酒), 색(色)이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서 과연 몇 사람이나 이 주, 색을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쾌락왕은 술에 취했다. 비록 쓰러질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지만 예리한 눈빛은 이미 풀어졌고 사람을 쳐다볼때 눈동자만으로는 안 되어 고개를 움직여가며 볼 정도이다. 심랑은 손으로 탁자를 짚으면서 짐짓 취한 척했다. "저는 술이 너무 과했나 봅니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쾌락왕이 나무랐다. "취하다니, 누가 취했는데?" "그야 물론 대왕께서는 취하지 않으셨지만 저는 벌써 취했죠." 쾌락왕이 한껏 크게 소리치며 웃었다. "하, 하, 하, 심랑아! 심랑아! 그대는 역시 안 되겠군. 너무 형편없어. 그대가 한 잔 마실 때 본왕이 두 잔을 마신다 해도 자네가 먼저 쓰러질 거야." "네, 네, 네. 제가 어찌 대왕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하, 하, 하, 가지말게, 자, 어서 와서 다시 몇 잔을 더 드세." 그는 또 한 잔을 들어올리더니 단숨에 들이키고는 탁자를 내리쳤다. "술맛 좋다. 술 한 주전자 더 갖고 와. 아니, 여덟 주전자 더 갖고 와." 그는 비록 천하를 밑으로 내려다보고 또 눈에는 아무 것도 뵈는 것이 없는 일대의 효웅(梟雄)이었지만 술에 취하니 그 역시 마차를 모는 마부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는 갑자기 젓가락으로 술잔을 두드리며 소리높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크게 웃고, 돌연 술상에 엎어져 누우면서 중얼거렸다. "백비비, 너는 어찌 이토록 본왕으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며 괴롭히느냐? 본왕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구나. 오늘은 반드시 이곳에서 유(留)할 것이다." 심랑은 백비비를 바라봤다. 이 소녀는 호랑이 굴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쾌락왕조차 감히 그녀를 건드리지 못했다니....... 심랑의 눈에는 기쁨인지 아니면 탄복인지 모를 빛이 반짝였다. 백비비도 동시에 그를 바라다보았다. 그 부드러운 눈길 속에는 마치 못다한 사랑과 못다한 말들이 담겨져 있는 듯했다. 그녀는 마치 심랑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당신은 알고 계시나요? 이 모든 것은 바로 당신을 위해서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거예요.) 두 사람의 눈길은 단지 딱 한 번 부딪쳤지만 그 한 번만으로도 이미 상대방의 마음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백비비는 쾌락왕을 보며 살짝 눈을 흘기더니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심랑도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몸을 일으켰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대왕께서 깨어나시면 심랑은 이미 취했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쾌락왕이 말렸다. "가지 말게, 우리 더 마시세." 그가 심랑의 옷을 붙잡자 심랑은 살짝 그의 손가락을 풀고는 조용히 걸어갔다. 쾌락왕의 말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연아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연아가 공자님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가씨, 고맙소." 연아는 사뿐히 악에서 걸어가면서 말했다. "공자께서 이렇게 부드럽고 예의가 바르시니 우리 아가씨께서......." 그녀는 입을 막으며 '피식'하고 웃더니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겹겹으로 된 휘장을 지나 악면의 방에 도착하니 아까 그 소녀들은 이미 쓰러져 자고 있거나 거울을 보고 머리를 빗거나 또는 자신의 잘 빠진 다리를 보면서 발가락을 다듬고 있었다. 아주 작은 솔로 색깔이 매우 농염한 장미꽃즙을 찍어서 조심스럽게 발톱에 바르고 있었다. 심랑은 비록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지만 결코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소녀들은 '쳇'하면서 여기저기서 투덜거렸다. "흥, 뭐가 그리 잘났다고 저렇게 거만하지? 우리가 그에게 반하기라도 한 줄 아나봐?" "애, 저 사람의 미소 띤 얼굴 좀 봐, 얼마나 얄밉니?" "흥, 왜 저렇게 웃지? 천하의 모든 여자들이 그 미소를 보면 다 기절할 줄 아나?...... 흥! 완전히 자아도취(自我陶醉)에 빠졌군." 연아는 줄곧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마침내 겨우 그곳에서 빠져나오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곧 가볍게 입술을 깨물면서 그들을 욕했다. "대단한 질투꾼들이군."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여자란 질투할 때가 가장 사랑스럽지." 고개를 들자 햇빛은 이미 온 정원을 채웠고 초목에서는 상큼한 향기를 발산했다. 어젯밤의 그 음산하고 괴이했던 여러 흔적들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독고상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만약 죽지 않았다면 지금 아마 매우 상심하고 있을 것이다. 심랑은 길게 허리를 펴며 기지개를 켰다. "아가씨는 이제 그만 돌아 가시오." "당신...... 당신은 왜 이리도 제게 거리감을 두는 거죠?" 그녀는 몸을 돌리자 제비처럼 날쌔게 사뿐히 뛰어갔다. 심랑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한탄했다. "요즘은 아이들이 점점 더 조숙해지는군." 갑자기 연아가 고개를 돌려 외쳤다. "이봐요, 그건 잊지 말고......." 그녀는 자신의 손을 가리키더니 다시 심랑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심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느릿한 걸음으로 햇빛이 가득한 정원으로 나섰다. 지난 밤은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런대로 대가가 있었다. 그는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마침내 쾌락왕의 신임을 얻었지 않았는가! 따뜻한 햇빛 아래, 그는 온몸이 활력으로 충만된 느낌이었다. 지난 밤의 고전으로 인한 피로(疲勞)도 이 정원처럼 햇빛에 의해 흔적없이 사라졌다. 그는 어떠한 난관에 부딪쳐도 다 해결할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비록 그의 마음 속에 몇 가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조용히 몰래 소맷 속에 감췄던 종이쪽지를 꺼냈다. 그는 곧 오늘 모든 문제들을 풀었다는 것을 알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염향은 심랑에게 안겼다. 그녀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옷도 흐트러진 채였고 아름다운 눈은 발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간밤에 한잠도 못 잔 듯했다. 그녀는 심랑을 껴안고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하늘이여, 감사합니다! 당신...... 당신 정말 아무 일도 없었죠?" "아무 일도 없었소." "몸도 아직 괜찮죠?" "이렇게 좋은 적이 없었을 정도로 좋소." 염향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작에 사람을 시켜 통지를 해주셔야 했어요. 당신...... 당신...... 당신은 제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세요? 전...... 전 간밤에 한잠도 못잤어요." "지금 자도록 해요." 염향이 고개를 드니 그녀의 눈동자는 사랑으로 가득했다. 그녀가 가벼운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잠자는 복은 없는 듯하오." "당신이 안 자면 저도 자지 않겠어요." 심랑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뭣 때문에?" 염향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당신이 안 자면 저도 잠이 안 와요." 심랑은 더욱 씁쓸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그대가 나를 만나기 전에는 잠을 잔 적이 없다는 건가?" "당신...... 당신은 정말 감정도 없군요." 갑자기 염향은 그에게 덮치더니 목을 아주 세게 물었다. 심랑은 목을 만지면서 씁쓸한 웃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웃는 것밖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너무나 많은 여자들에게 싸여 너무도 많은 여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매우 번거롭고 고통스런 일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가 아예 없는 것보다도 더욱 번거로운 일이었다. 심랑은 차를 한 잔 따라서 막 마시려고 하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춘교가 또 놀란 도둑처럼 문 악에 서 있었다. 그녀의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고 눈도 빨갛게 충혈된 것으로 보아 역시 간밤에 한숨도 못잔 듯했다. 심랑은 그녀를 노려보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오?" 춘교는 고개를 숙이고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별...... 별 일은 없어요. 천첩은 다만...... 다만 심 공자께 문안을 드리려던 참입니다." "그대도 내가 쾌락왕에게 목이 베였을까봐 걱정을 했단 말이오?" 춘교는 옷자락을 만지면서 억지로 웃었다. "천첩의 마음도 매우 불안했습니다. 다만...... 다만 공자께서 소인을 가엽게 여겨 용서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제보니 그대의 마음도 불안할 때가 있었군." "심 공자, 제 잘못을...... 용서......." "내가 만약 그대를 벌하려고 했다면 지금까지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오." 춘교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 공자, 감사합니다." 심랑이 갑자기 얼굴을 굳히더니 말했다. "하지만 다음에 또다시 도둑처럼 내 방문 악에 서 있는 것이 발견된다면 난......." 염향이 뛰쳐 나오더니 발을 동동 굴렀다. "네가 다시 또 우리를 방해하고 몰래 엿듣기만 해봐라. 네 년의 귀를 자르고 네 눈알을 파내고 또 네가 바람을 피운 것도 이등용에게 말해 버릴 테니." 춘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네, 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갑자기 심랑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춘교는 몸을 한 차례 떨었다. "공...... 공자께서 무슨 분부라도 있으신가요?" "어서 빨리 한 시루의 게알로 만든 만두, 노랗게 잘 구운 게알 한 접시, 아주 진하게 잘 끓인 고깃국 한 그릇, 또 아주 연하게 부친 계란 세 개, 아주 달콤한 참외 등을 보내 주시오. 지금 내게 다른 생각은 전혀 없소. 단지 잘 먹고 싶을 뿐이오!"
찬란한 햇빛으로 가득한 정원을 악에 두고서 심랑은 천천히 풍성한 아침식사를 만끽했다. 국물은 과연 진했고 계란도 연했으며 참외 역시 꿀처럼 달았다. 그가 조용히 다 먹고나자 뒤에서 염향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여, 감사합니다. 그녀는 드디어 잠에 빠진 것이다. 심랑은 눈을 감고 그 종이쪽지에 쓰인 글을 다시 한 번 음미했다. "오랜만이군요. 그동안 정말로 보고 싶었습니다. 오늘 정오에 조용한 정원에서 뵙고 싶습니다. 공자께서 이곳으로 걸음을 옮기시어 서쪽으로 오시면 천첩이 그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지금 막 정오에 접어들었다. 정오는 과연 이 쾌활림에서 가장 조용한 시간이었다. 긴긴밤을 술로 지새운 사람들은 이제 가장 달콤한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인 것이다. 심랑은 느릿한 걸음으로 서쪽을 향해 걸었는데 사방에는 전혀 인기척이 없었다. 심지어는 새들의 지저귐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미풍이 이 수림(樹林)을 스쳐지나며 간간히 내는 부드러운 소리는 마치 베갯 머리 맡에서 들리는 사랑하는 이의 숨소리 같았다. 약간 떨어진 곳에 한 늙은 나무가 마치 덮개같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는데 그 아래 하얀 옷의 인영(人影)이 서 있었다. 미풍은 그녀의 옷자락과 머릿결을 휘날렸다. 그녀의 눈길은 심랑이 오는 길에 고정되어 있었다. 심랑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내심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일어났다. 근심인지, 기쁨인지? 그녀는 매우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자이다. 하지만 또한 기이하고 신비한 여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마치 갓난 아기처럼 순결하고 천진하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녀의 진정한 속마음을 알지 못했다. 그녀를 보면서 심랑은 갑자기 주칠칠이 떠올랐다. 버릇없고 제멋대로이고 장난꾸러기지만 강하고 사랑스러우면서도 또 가장 얄미운 주칠칠! 명랑하고 시원하며 때로는 교만하지만 어떤 때는 부드럽기가 마치 물 같은 주칠칠! 가련하고 얄밉고 또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주칠칠! 주칠칠과 백비비는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 형인가? 두 사람은 마치 두 극단(極端)과 같았다. 하나는 불같이 뜨겁고 하나는 얼음처럼 찼다. 하지만 어찌됐건 이 두 여자 모두 사랑스러웠다. 심랑은 이 두 여자보다 더 사랑스러운 여자는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비록 입가에 미소는 머금고 있었지만 그는 내심 한탄을 금할 수 없었다. 왜 이 두 사랑스러운 여자는 하나같이 불행하고 비참한 운명을 타고 났을까? 백비비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마치 선녀 같은 웃음이 번졌는데 그것은 햇빛보다 더 찬란했다. 그녀는 살짝 손을 흔들더니 버들가지 같은 허리를 살짝 굽혀 짙은 그늘로 걸어갔다. 사방에는 인적이 없었고 멀리서는 매미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꽃은 피어 봄의 기운은 점점 더 짙어가니 금년 봄은 그리 늦지 않게 온 듯했다. 짙은 그늘은 백비비의 옷을 엷은 벽록색으로 물들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그 곳에 앉아 있었는데 길게 자란 속눈썹은 살짝 눈을 가렸다. 그녀가 앉은 곳은 약간 밑으로 파여진 바위였다. 사방에는 등나무들이 마치 휘장처럼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더욱더 아름다웠다. 심랑은 조용히 걸어서 그녀의 악으로 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아무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의 숨소리는 세상의 모든 달콤한 말보다 더 달콤했다. 갑자기 그녀는 심랑의 품 속에 안겼다. 심랑은 구름같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 듬었다. 아주 오랫동안......! 바람은 더욱 부드러워졌고 봄은 더욱 깊어갔다. 심랑은 갑자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령궁주, 안녕하시오?" 백비비는 고개를 들어 상큼한 미소를 보냈다. "당신은 제 이름도 잊었나요?" 심랑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주시했다. 이 얼굴에는 당황하거나 악의는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단지 달콤한 사랑이 술처럼 짙게 깔려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달콤했고 눈동자는 부드러웠으며 은근하게 품에 안긴 그녀의 몸에서는 향내음이 풍겼고......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가 어떻게 사람을 마구 죽이는 마두(魔頭)란 말인가? 심랑은 다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그대의 이름을 잊을 수 있겠소?" 백비비가 눈동자를 굴리며 재촉했다. "그럼 제 이름이 뭔지 말해주세요." "비비, 백비비, 당신은 정말로 총명한 여자요." 백비비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럼 당신은 왜 저를 유...... 유령궁주라고 불렀죠?" 심랑이 담담하게 말했다. "백비비가 그럼 유령궁주가 아니란 말이오?" 백비비는 가볍게 그를 밀치고는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사랑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그를 주시했는데, 이 시선에는 약간의 화도 깃든 것 같았다. 그녀는 앵두 같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유령궁주가 대체 어떤 사람이죠? 당신은 왜 자꾸 그녀의 이름을 꺼내는 것이죠? 혹시 그녀...... 그녀가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인가요?" 심랑은 시선을 먼 곳으로 던지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소.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여자라오. 그리고 매우 총명하고 또한 일신에는 매우 고강한 무공도 지니고 있소." 백비비는 고개를 숙이더니 가볍게 탄식을 흘렸다. "당신이 그녀를 그토록 칭찬하는 것을 보니 그녀는 분명히 저보다 더 나은 것 같군요. 하지만 제발 제 악에서는 다른 사람을 칭찬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매우 악랄한 여자이기도 하오. 다른 사람이 하지도 않고 또 감히 못하는 일들도 그녀는 할 수 있었소." 백비비가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그녀를 봤나요?" "난 그녀를 봤소. 바로 어젯밤에...... 비단 그녀를 봤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 겨루기도 했었소." "그녀...... 그녀는 어떻게 생겼던가요?" "그녀의 얼굴은 면사포로 가려져 있어서 누구도 그녀의 진면목을 볼 수 없었소. 하지만 난...... 난 결국 그녀의 면사포를 제낄 수 있었소." 그는 눈빛을 갑자기 날카로운 칼처럼 빛내더니 또박또박 천천히 내뱉었다. "나는 그제서야 그녀가 바로 당신이란 것을 알았소. 당신이 바로 유령궁주란 것을...... 그래서 나는 더이상 공격을 하지 않았소." 백비비는 뒤로 세 걸음 물러서며 자지러질 듯이 놀랐다. "제가...... 당신이 잘못 봤겠죠?" "아니, 난 당신을 잘못 볼 리가 없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얼굴로는 변장을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당신의 그 눈동자는...... 당신의 그 눈동자는...... 당신 외에는 그 누구도 그런 눈동자를 가질 수 없소." 백비비는 전신을 떨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신은 내가 바로 그 악랄한 유령궁주라고 단정하시는 건가요?"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소." 백비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제가 유령궁주라면 어떻게 강남으로 떠돌 수 있었으며 또 어떻게 남들에게 노비로 팔려지도록 가만히 있었을까요? 당신 말대로 제가 만약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면 어떻게 항상 남들의 괴롭힘을 당하기만 했지요?" 그녀는 눈언저리가 붉어지더니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심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오." 백비비는 얼굴이 온통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당신...... 당신은 저를 조금도 믿지 않나요?" "나도 당신을 믿고 싶소. 하지만 나의 눈을 더 믿지 않을 수가 없소." "직접 눈으로 본 일이 때때로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심랑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중얼거렸다. "그래...... 직접 눈으로 본 일이 때때로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지." 백비비는 얼굴을 가리고 울먹이면서 간간히 말했다. "저는 고아라 어릴 때부터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랐어요. 세상에 어느 누구도 저에게 진심으로 잘 대해준 사람이 없었어요. 단지 당신만이...... 단지 당신만이......." 그녀는 다시 심랑의 품 속으로 안기면서 서럽게 울었다. "하지만 이제 당신도 저를 믿지 않으신다면 전...... 전 이제 살아서 무슨 소용이 있나요?" 심랑의 표정이 무척 암담해졌다. "내가 당신을 믿을 수 있겠소?" 백비비가 고개를 들자 아름다운 그녀의 머리결이 파도처럼 밑으로 늘어졌다. 그녀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제가 그토록 악랄한 여자같이 보이나요?" 심랑은 온통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처참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탄식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그럼 당신은 저를 의심해서는 안 돼요." "만약 그 유령궁주가 당신이 아니라면 세상에 어떻게 그리도 똑 같은 두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제게 어쩌면 쌍동이 자매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단 그녀는 저보다 좋은 팔자를 타고 나와서 저는 남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그녀는 오히려 남을 괴롭힌다는 것이 틀리겠죠." 심랑은 멍하니 되뇌었다. "쌍동이 자매?" "제 말이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세상에는 이보다 더 공교로운 일들도 많이 있어요. 그러니 이런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그렇죠?" "글쎄......" "하물며 어젯밤에 당신은 창졸지간에 잠깐 본 것이지요. 더구나 어둠 속이었는데 당신은 정말로 확실하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심랑은 고개를 숙였다. "난......." 백비비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당신이 확실히 단정할 수 없었다면 당신은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했어요. 당신은 제 일생의 행복이 전부 당신에게 달렸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이렇듯 냉정하게 저의 행복을 망가뜨릴 수 있나요?" 심랑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가볍게 그녀의 머릿결을 만지면서 사과했다. "내가 잘못했소. 내가 잘못했소. 당신은 나를 탓하지 않소?" 백비비는 매우 행복한 듯이 심랑의 가슴에 기대며 부드럽게 말했다. "저의 모든 것은 다 당신의 소유이니 당신이 저를 죽인다 해도 저는 당신을 탓하지 않을 거예요." 바람은 부드럽게 대지의 위를 스쳐갔다. 이토록 온유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자신의 품에 안고 부드러운 언어로 나지막하게 담소를 나누고 또 이토록 사랑스런....... 심랑이 아무리 강철로 만든 사람일지라도 녹아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드러움이란...... 영웅들이 영원히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한참이 지난 후, 심랑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여태까지 당신은 어떤 일을 겪었소? 내게 말해 줄 수 있겠소?" "그날 객점에서 당신과 웅묘아가 떠나자 주 아가씨는 매우 화가 나있었어요. 저...... 저도 저 때문에 그녀에게 패가 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 속으로 얼마나 괴로웠는지 몰라요." 심랑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그녀는 고의가 아니었을 것이오." "저도 알아요. 저도 알고 있어요. 주 아가씨는 비록 성격이 좀 드세긴 해도 마음씨가 매우 착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또 그녀는 총명하고 시원스럽고 아름답고. 저는....... 저는 정말로 그녀와 비교도 안 되지요." 심랑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당신은 뭐든지 남들의 처지부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당신보다 못하오." 백비비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었는데 마치 진짜 봄꽃이 활짝 핀 듯했다. "정말인가요?" 하지만 이 아름다운 웃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양미간을 찌푸리고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 저는 정말 혼자서 몰래 사라지고 싶었어요. 그래야 주 아가씨의 노여움을 덜 사니까요.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그 가증스런 김......김......." "김불환(金不換)이오." "맞아요, 바로 김불환이 방 안으로 들이닥쳐서는 저의 입을 막고 납치해 갔어요. 그는......그는...... 저를 왕...... 왕 공자의 손에 넘겼어요." 심랑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일들은 나도 알고 있소." "저는 정말 무서웠었요. 저도 그 왕 공자가...... 아주 안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다행히 그는...... 그는 매우 바빴는지라 저를 어쩌지는 않았어요." 그녀는 이 몇 마디의 말을 하느라 너무 많은 기력을 쓴 듯, 창백했던 얼굴이 마치 아침 햇살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발갛게 물든 얼굴을 숙였다. "나중에 그들은 다시 저를 왕 부인이라는 사람의 거처로 옮겼는데 그 왕 부인의 아름다움에는 여자인 저로서도 반할 정도였어요." "그녀는 당신에게 어떻게 했소?" 그가 담담하게 미소지으며 묻는 말에 백비비는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그녀는 저에게 정말로 잘 대해줬어요. 그녀는 마치 천상의 선녀처럼 모든 사람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는 아주 신기한 힘이 있는 듯했어요." "그래서 당신은 그녀의 말을 아주 잘 들었겠군." 백비비가 고개숙이며 말했다. "그녀가 그렇게 저에게 잘 대해주는데 제가 어떻게 그녀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있었겠어요?" "그녀가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소?" "그녀는 저더러 쾌락왕의 소굴로 들어가 그녀를 위해 정탐을 해달랬어요. 사실 처음에는 저도 겁이 났지만 나중에 그 쾌락왕이 바로 당신의 원수라는 것을 알고는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지요." "고맙소." 심랑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자 백비비가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그 한 마디를 듣는 것만으로도 저는 어떤 고생이라도 기꺼이 하겠어요." "당신은 고생을 많이 했소?" 백비비의 표정이 매우 슬퍼졌다. "쾌락왕이 믿게 하기 위해 그녀는 저를 그...... 그 세상에서 가장 가증스런 요괴(妖怪)와 한 곳에 가뒀어요." "흠, 당신은 정말 많이 놀랐겠군." 백비비의 얼굴은 다시 불그스레 물들었다. "저는 독사나 맹수와 함께 갇히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왕 부인을 위해서,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용기를 냈었죠." "당신이 그렇게 용감한 여인일 줄은 미처 몰랐소." 백비비의 얼굴은 더욱 붉게 물들었다. "왕 부인은 나중에 저에게 한 가지 비밀을 말해줬어요. 원래 그 요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비록 그가 여자인 줄은 알았어도 '그녀'의 그 사악한 눈은 보기만해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고 '그녀'의 손이 저의 몸에 닿기만 해도 그냥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어요." "나중에 왕 부인은 당신과 '그녀'를 일부러 도망가게 놓아 줬겠구려." "왕 부인은 '그녀'가 도망갈 수 있다면 분명히 저를 데리고 갈거라는 것을 알았죠. 우리가 도망가는 동안...... 아!......."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주르르 흘리더니 곧 고개들고 웃음 지었다. "어찌됐건 '그녀'는 이제 죽었어요." "'그녀'는 이곳에 오자마자 죽었소?" "문에 들어서자 마자 금방 죽었어요." "어떻게 죽은 것이오?" 백비비는 조용히 말했다. "제가 그녀를 죽였어요." 심랑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당신이?" "그래요. 제가...... 이상한가요?" 그녀는 어지럽게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왕 부인은 저에게 반지를 줬어요. 그 반지에는 극히 미세한 침이 있었고 그 침에는 독하기 이를 데 없는 극독이 묻어 있었죠. 저는 단지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쳤는데 순식간에 '그녀'는 독이 퍼져서 죽었어요. '그녀'는 언제나 저를 독 안에 든 쥐로 취급을 했기 때문에 전혀 방비하지 않았었죠." 심랑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보니 일이 그렇게 됐었군." "제가 살인을 했는데 당신은 저를 탓하지 않나요?" 심랑이 부드럽게 웃으며 위로했다. "누구든지 당신의 입장이었다면 모두 다 그녀를 죽였을 것이오." "그럼 당신은 조금 전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나요?" "아, 난 줄곧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있었소. 이제야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았소." "무슨 일이죠?" "난 전영송(展英松)등이 왜 '인의장'에 들어가자마자 죽었는지 줄곧 이해가 안 됐었소. 이제서야 이 모두가 왕 부인이 반지에 독을 썼기 때문임을 알았소." "하지만 그 반지의 독침은 단지 한 번 밖에 사용할 수 없었어요. 마치 독벌의 침처럼 한 번 사용하면 다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죠." 심랑이 양미간을 찌푸렸다. "아......!" "하물며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죽었는데 그것은 또 누가 죽였을까요?" 심랑은 다시 한참 동안을 생각하더니 곧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야 깨달았소." "대체 어떤 비밀이 있는 거죠?" "왕 부인은 그들을 풀어줄 때 분명히 각각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을 것이오." "무슨 조건을요?" "그것은 바로 그들 개개인에게 모두 한 사람씩 죽여야 한다는 조건이었을 것이오." 백비비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아직도 이해 못하겠어요." "왕 부인은 개별적으로 그들을 불러들인 후, 그들 모두에게 독침을 하나씩 나눠줬으나 그들 서로 전혀 모르게 한 것이오. 그래서 '인의장'에 도착하자마자 갑은 을을 죽였고, 을은 병을 죽였고, 병은 정을 죽였고, 정은 또 갑을 죽여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다 죽게 됐지. 그들을 죽인 사람은 바로 그들 자신들이었소." 백비비는 길게 한숨을 토했다. "정말 악독한 술책이고 악랄한 수단이군요." "아니,비록 수단이 악랄했다지만 전영송 등이 모두 군자들이었다면 왕 부인의 계략이 아무리 악독하다고 했더라도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오." 백비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남도 해치고 자신도 해치는 것이군요." 갑자기 한 사람의 냉소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들도 지금 남도 해치고 자신도 해치고 있는 중이다."
첫댓글 즐감했습니다~~감사합니다.
재밌게 잘읽었습니다
즐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