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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30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사도 18,1-8
복 음 : 요한 16,16-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7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18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주님의 집
-영원한 정주처, 안식처, 피신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자유롭게 묵상을 나누고 싶습니다.
가끔 생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갈 곳이, 가고 싶은 곳이 없습니다.
만날 분이, 만나고 싶은 분이 없습니다.
하여 요셉 수도원에 만 31년 동안 정주한 이후 휴가 안간지가 수십 년이 됩니다.
이젠 휴가란 말도 잊었습니다.
갈 곳이란 오직 지금 머물고 있는 주님의 집인 요셉 수도원뿐이며,
만날 분은 오직 주님의 집에 계신 주님뿐입니다.
오늘은 우리 요셉 수도원 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13년 전 2006.5.30. 성전 봉헌식 날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우여곡절迂餘曲折, 천신만고千辛萬苦의 어려움 중에 지어진 성전입니다.
이 성전이 세워진 후 전례도 제대로 꼴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큰 성전에 큰 제대에 서서 복사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고
독서대도 분리되어 성전전례중 독서도 따로 나와서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모두가 감격스런 변화였습니다.
얼마나 수도원을 사랑했던지 성전 봉헌식 날은 무려 300명 이상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제 즐겨 부르는 시편 구절입니다.
특히 뒷부분의 시편 성구는 5년 전 2014년 안식년중 산티아고 순례여정 중 가장 많이 불렀던 성구였습니다.
산티아고 대성전이 가까워질수록 힘차게, 기쁘게 뛰다시피 발걸음을 재촉했던 추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또 이 성구는 제 사랑하는 주님의 집 요셉 수도원 성전을 향해 곧장 나있는
수도원 길, 하늘 길을 걸을 때마다 가장 많이 부르는 성구이기도 합니다.
이 하늘길 수도원 길을 사랑하여 매일 주님과 함께 걸으면서 휴대폰으로 사진 찍기도 합니다.
아무리 봐도, 아무리 걸어도 늘 새롭고, 늘 좋은 주님의 집에 이르는 하늘길, 수도원길입니다.
주님의 집, 수도원에는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한 결 같이 수도원에 봉사하는 두 분이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분이 수도원을 통과해 갔지만 이 두 분은 30년여 동안 한 결 같이 주님을 섬기듯 수도원을 섬긴 분입니다.
큰 축일 때마다 꽃꽂이를 해준 자매와 성전 청소에 제의방 성작수건과 주수 수건을 빨아 준 자매입니다.
참으로 사람이 아닌 주님을 사랑하여 섬기는 마음이었기에 이런 항구한 봉사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예전 에버랜드 소풍 때의 깨달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진짜 에버랜드는 주님의 집, 성전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수도원이라는 것입니다.
하여 고향집을 찾듯이 무수한 이들이 끊임없이 찾는 진짜 에버랜드 주님의 집인 수도원입니다.
많은 분들이 늘 찾아 봐도 늘 그립고 보고 싶은 수도원 아버지의 집이라 고백합니다.
오늘 성전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떠오른 생각들입니다.
주님의 집인 성전은 믿는 우리들에겐 영원한 정주처요 안식처요 피신처가 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가시적 주님의 집인 성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주님의 성전 사랑도 뜨거웠습니다.
성전을 속화하는 주변 분위기를 정화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세상을 성화시켜야 할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성전의 속화보다 더 큰 재앙은 없습니다.
성전 사랑은 그대로 하늘 아버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아버지의 집인 성전을, 성전 전례를 사랑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뜨거운 성전 사랑에서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 삼킬 것입니다.” 라는 성경 말씀을 상기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아버지의 집인 성전 은총을, 성전 전례 은총을 상징합니다.
창세기의 비전이 새롭게 표현되고 있으며 묵시록에서도
다시 우리의 영원한 꿈이 실현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시작된 생명의 강이 세상 곳곳 흘러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납니다.
강가 양쪽에는 잎도 시들지 않고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습니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그대로 이 거룩한 성전 미사 전례 은총을 상징합니다.
성전 전례 미사은총이 생명의 강이 되어 세상 곳곳으로 흘러갑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자 약인 말씀과 성체를 모십니다.
묵시록의 비전은 얼마나 아름답고 환상적인지요. 이런 천상 비전을 앞당겨 사는 우리들입니다.
“그 천사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 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입니다.”(묵시22,1-2).
바로 이 거룩한 성전 미사전례를 통해 앞당겨 체험하는 천상 비전입니다.
다달이 열매가 아니라 우리는 매일 열매를 받아먹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가시적 성전이 전부가 아닙니다.
가시적 성전이 빛나는 것은 바로 미사전례가, 주님의 몸인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본기도 말씀에 더욱 공감합니다.
“주 하느님, 주님의 교회에 성령의 선물을 더욱 풍성히 내려 주시어,
주님의 백성이 천상 예루살렘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게 하소서.”
주님의 몸이, 미사전례가 빠진 건물만의 성전이라면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뿐이라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가시적 성전을 거룩한 살아있는 성전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 덕분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이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새로 세우겠다.”
바로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우리가 바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시적 성전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으로,
그리고 마지막 지점이 우리 각자가 주님의 성전이라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열화 같은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며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을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코린3,16-17).
우리 각자가 주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참으로 자신을 잘 가꾸고 돌봐야 할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함부로 막살며 절망의 자포자기로 자기를 방치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우리의 존엄한 품위의 근거는 바로 우리 각자가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우리가 바로 주님의 성전이자 성체임을 입증합니다.
그러니 미사 중 가난한 빈손으로 성체를 모시며 “아멘!” 할 때의 감격과 은총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장 진실하고 겸손한 본래의 내가 되는 순간이자 주님의 성전으로 새롭게 변모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모심으로 성령의 성전이, 은총의 성전이 되게 하십니다.
끝으로 우리의 소망을 담아 기도로 바칩니다.
“하느님, 교회를 통하여 저희에게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저희가 은총의 성전, 성령의 성전이 되어, 거룩한 생활로 주님 영광의 빛을 드러내게 하시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겸손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 겸손의 덕을 완벽하게 갖추기란 사실 쉽지 않습니다.
벤저민 플랭클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겸손이라는 미덕을 완전히 습득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겸손한 척하는 법을 배웠다.”
겸손을 가장한다는 것, 어쩌면 진정성이 없기 때문에 가짜 겸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플랭클린은 우리가 쓰는 가면으로 인해서 진짜 자신도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제대로 익히기 힘들지만 그런 시늉들이 반복되면서 점차 내면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이 말에 예전의 제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제 모습은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머니가 깨워주기 전에는 일어나기 힘들었고, 청소나 방 정리도 하지 못했습니다.
게을러서 미루기 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신부님이 되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으로 인해서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앞서서 하려고 했고, 성실한 모습을 보이려는 척을 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살다보니 어느 순간 사람들이 제게 성실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현재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고 있으며, 20년 가까이 매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불러만 준다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강의를 합니다.
예전의 게으른 모습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실한 척 했던 삶이 저의 원래 모습인 것처럼 비춰집니다.
지금의 자기 모습에 대해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척 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때 자기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원하는 모습이 고개를 내밀면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불가능한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죽음이 부활의 영광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미리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로 자신감을 잃지 않게 하려는
그래서 고통과 시련에 대해 좌절하지 않고
항상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을 누리게 하려는 주님의 배려였습니다.
자신감을 잃는다는 것은 내 인생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그러한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이렇게 항상 배려해주시고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합니다.
평생 이별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한다 할지라도
때가 되면 이별을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사랑의 관계가 참되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잠시잠깐의 만남을 기뻐하고 어떤 이는 좀 더 오랜 만남을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기왕이면 떠날 때 떠나더라도 가슴에 남는 만남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16,16. 20). 하고 말씀하시며
세상을 떠나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게 됨을 제자들에게 거듭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자들은 십자가에 무참하게 처형된 예수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겪은 후에야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면,
“조금 있으면...‘.보지’ 못하고...나를 ‘보게’ 될 것이다”
앞의 보다는 ‘테오레오’라는 단어로 구경거리를 보는 일차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뒤의 보다는 ‘호라오’라는 단어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본다는 이차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시선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보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이 다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인 것처럼 생각하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 이해한 다음에 수용하겠다는 것도 꼭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머리가 아니라 먼저 가슴으로 따르고 비로소 논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알아듣지 못해도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그때 아는 것은 이미 있었던 진리를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오기까지 제자들은 함께 해산의 진통을 겪어야 합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그러므로 스승과의 깊은 신뢰를 쌓고 스승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스승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 참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스승은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어서 스승입니다.
지금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심을 믿고 여기서 기쁨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매 순간 그분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선택하게 될 때 주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에 제자들은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여정도 한 결 같이 좋기만 할 수도 없고 한 결 같이 힘들고 어려운 것만도 아닙니다.
기쁨을 희망하는 만큼 아픔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식사를 마치면 동네 산책하는 것이 운동이고, 취미입니다.
길가의 꽃도 보고, 생각도 정리하고, 기도하면 1시간 30분 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며칠 전부터 상도동 넘어가는 고개에 현수막이 많이 걸렸습니다. 재개발 사업이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현대건설, 롯데건설, 대우건설, SK 건설, GS 건설 등이 재개발 확정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재개발에 함께 참여하겠다는 현수막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계산이 빠른 것 같습니다.
이왕 시작된 재개발이니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되면 좋겠습니다.
26년 전 용산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아파트로 사람들이 입주할 때였습니다.
본당 신부님과 함께 새로 입주한 교우들의 가정을 방문했었습니다.
새로 오신 분들 중에 봉사자를 만날 수 있었고, 구역과 반을 새롭게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초대교회의 뜨거운 열정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들은 모이면 함께 기도하였고, 헤어지면 선교하였습니다.
걸림돌이 있으면 디딤돌로 만들었습니다.
할례, 음식, 율법의 규정들이 이방인들에게 문제가 되면 성령의 도움을 청하면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외부의 박해가 있었고, 내부의 신학적인 논쟁이 있었지만 사도들의 뜨거운 열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직업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하면서도 일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사도는 특별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모범을 보여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초대교회 신자와 사목자들도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한국의 사도행전입니다.
앵베르 주교님, 모방 신부님, 샤스탕 신부님의 순교는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순교와 순직은 한국교회의 큰 자랑이며, 사제들의 귀감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굳센 신앙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걱정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걱정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사제라는 자리에 안주하려고 한다면,
사제에게 주어지는 특권에 연연하려고 한다면,
복음을 말하지만 실천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걱정으로 바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면,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려는 결심으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모든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면
지금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도 기쁨으로 가는 디딤돌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이 되신 그분의 겸손입니다.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섬기러 오셨다는 그분의 희생입니다.
자신의 역할이 끝났지만, 협조자를 보내시려는 그분의 책임감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는 그분의 열린 마음입니다.
힘든 일, 어려운 일은 앞장서서 하시고 영광은 하느님께 돌리는 그분의 양보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족, 친구, 이웃, 직장, 성당에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곳에서 원망과 불신이 자라난다면, 분열과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면,
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공동체는 세상의 가치와 질서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웃음이 꽃핀다면, 그곳에서 사랑이 열매 맺는다면,
그곳에서 더 오래 머물고 싶다면 그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행복한 기분으로 이끄는 말 한 마디, “내 탓이오!”
전삼용 요셉 신부
내성적이었고 소심했던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잠깐 다니다 결혼하였습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남편의 잇따른 사업 실패로 평생 갚아도 못 갚을 엄청난 빚더미에 파묻혀버렸습니다.
아이들은 크고 사채업자들이 밤마다 찾아왔습니다.
앞길이 막막해 몇 번이나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미웠고 남편 가족들, 남편 친구들까지 모조리 미웠습니다.
아이들 분유 값이라도 벌어볼 양으로 옆집 아주머니에게 토큰 세 개를 빌려 찾아간 곳이 화장품 회사였습니다.
처음 영업사원 교육 때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내 생각이 머무는 곳에 내 인생이 있습니다.
현재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내 탓입니다. 남을 탓하는 습관부터 버리세요!”
이 말이 어찌나 정곡을 찔렀는지 교육 도중 그녀는 화장실에 달려가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로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첫 보름 동안 단 한 개의 화장품도 팔지 못했지만
입사 12년 만에 그 화장품 회사의 부회장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당시 연봉이 12억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회사는 그녀를 권고해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도 이겨냈습니다.
화장품 회사를 설립해 연매출 수백억을 올리는 회사의 CEO가 됩니다.
그녀는 “나를 버릴 때 열정은 타오른다.”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습니다.
박형미 파코메리 회장의 이야기입니다.
진부한 성공신화 중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지만 실천하기 힘든 것 하나는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내 탓이오!”입니다.
내 탓을 하면 열정이 끓어오르고 남의 탓을 하면 죽음으로 가득 찹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 탓과 남의 탓을 선택할 수 있는 스위치는 내가 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1989)에서는
영생을 준다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던 성작(거룩한 잔)을 찾는 과정이 나옵니다.
여러 잔들이 있었는데 악당은 그 중 가장 사치스러운 잔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그 잔에 물을 마셨더니 더 빨리 늙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립니다.
참 인상 깊었던 장면입니다. 죽거나 영생을 하거나 내가 선택하는 잔에 달려있습니다.
내 기분도 어떤 안경을 착용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은 조금 있으면 제자들을 떠날 것이지만,
또 조금 있다가 다시 오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슬퍼할 테지만 그것이 곧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하십니다.
물론 세상은 지금은 기뻐하겠지만 영원한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간단히 말하면 지금 죽으면 나중엔 영원히 행복할 것이지만,
지금 기쁨을 찾으면 영원히 후회할 것이란 뜻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한다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가 기분 나쁜 것이 남의 탓이라고 여기면 그 사람은 살려고 하는 것이고
남의 탓을 하며 살려고 하면 잠깐은 위로가 되겠지만 오랜 고통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의 탓으로 돌린다면 내가 죽는 잠깐의 고통은 지나가고
다시 살아나는 오랜 기쁨이 남을 것입니다.
한 여인은 군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캘리포니아 주 모하비 사막 훈련소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섭씨 45도를 오르내리는 지독한 무더위 속에
시도 때도 없이 모래바람이 불어 입과 눈과 음식으로 들어가기 일쑤였습니다.
뱀과 도마뱀이 우글거리지만 주위엔 사람도 없었습니다.
몇 달 만에 우울증에 걸린 그녀는 고향 부모에게 이렇게 하소연하였습니다.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차리라 감옥에 가는 게 나아요. 정말 지옥이에요.”
그러나 아버지의 답장은 이 단 두 줄만 적혀있었습니다.
“감옥 문창살 사이로 밖을 내다보는 두 죄수가 있다. 하나는 하늘의 별을 보고, 하나는 흙탕길을 본다.”
이 두 줄의 글을 받아들인 그녀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기피하던 인디언들과 친구가 되었고 공예품 만드는 기술과 멍석 짜기도 배웠습니다.
사막의 식물들도 관찰해보니 매혹적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사막의 저녁노을은 신비한 아름다움을 선사했습니다.
그 속에서 ‘빛나는 성벽’이란 소설을 썼는데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사막은 변하지 않았다. 내 생각만 변했다.
생각을 돌리면 비참한 경험이 가장 흥미로운 인생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감정을 우울함에서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스위치가 내 안에 있습니다.
바깥에서 찾아 내 기분을 변화시키려 하다보면 결국 지쳐 쓰러져버리게 됩니다.
내가 이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행복하겠다고 작정하면
감정도 그렇게 바뀌고 그런 감정이라면 안 될 일도 잘 되게 됩니다.
항상 내 마음이 두렵고 우울해진다면 그 책임은 나에게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바꾸고자 한다면 얼마든 그 기분을 좋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음을 믿어야합니다.
기분이 좋아져야 남 탓 안합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나를 도와주게 될 것이고 그렇게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입니다.
미사 때,
“내 탓이오!”만이라도 진심으로 할 수 있다면 매일 매일의 삶이 기쁨과 설렘으로 바뀔 것입니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어디로 우리가
가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가장 아프고
가장 힘든 때
기쁨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입니다.
기쁨은
근심을 뛰어넘습니다.
믿음은
근심을 뛰어넘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주님을 향하는 기쁨입니다.
기쁨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삶의 중심이
기쁨이신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믿습니다.
살리시는
주님이십니다.
꺼지지 않는
믿음의 불씨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근심을
껴안아 주십니다.
믿음으로 보면
이 모든 것은
기쁨을 만나는
여정임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