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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사도 18,23-28
복 음 : 요한 16,23ㄴ-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기도와 삶
-기도가 답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6월 예수성심성월 첫날이자 2세기 중엽에 순교한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2세기는 순교영성의 시대라 할 만큼 순교자들이 많았습니다.
‘성 유스티노와 그 동료들의 순교사기’에 나오는 내용을 일부 소개합니다.
배교를 강요하며 심문 설득하는 로마 총독에 대한 유스티노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답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문당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귀하가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상에게 제사 지내지 않겠습니다.”
거룩한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형장으로 나아갔고
구세주께 대한 신앙과 사랑을 고백하면서 순교자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결정적 믿음과 사랑의 표현이 바로 순교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3)는 말씀처럼
주님이자 친구인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랑의 순교자들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의 순교입니다. 사랑의 기도입니다.
신학공부 많이 해서 신학자가 아니라 기도 많이 하여
주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룬 이가 참으로 신학자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순교자들은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했던 예수 성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성심 성월, 바로 순교자들의 예수성심의 사랑을 기리는 달입니다.
얼마 전 피정자들에게 ‘기도’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새삼 기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배웠습니다.
가르치면서 깨닫고 배우게 됩니다. 믿는 이들에게 기도는 전부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이며 사랑처럼 아무리 배워도 기도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가며 하나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에게 기도 빼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여 하느님을 찾는 일인 기도는 우리 수도자의 주업이며,
기도에는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혹자는 기도에는 신비가가 되고 일에는 전문가가 되고 성서에는 학자가 됨이 분도회 수도자의 성소라 합니다.
평생 배우고 실천해야할 기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간절히 절실히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제 받은 카톡 일부입니다.
“신부님, 저좀 살려주세요.”
“신부님, 감사합니다. 용기를 내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시간에 신부님의 전화로 저는 살았습니다.”
“신부님, 부족하지만 참아 주십시오. 언젠가 큰 인물이 되겠죠.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최저 시급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요즘 넘 힘들어서 약속도 못 지켰습니다. 주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길 빕니다. 기도 좀 부탁합니다."
이분들 기억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인용했습니다.
그나마 하느님 믿음의 끈을, 하느님 사랑의 끈을, 희망의 끈을, 기도의 끈을 잡고 있기에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새삼 하느님의 사람, 기도의 사람으로서의 수도자의 분발을 촉구하는 구원을 갈망하는 메시지들입니다.
관상 수도공동체는 비록 그 대부분이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막강한 사도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함께, 평생, 날마다,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의 위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 모두 간청의 기도를 바칠 것을 권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다 청하라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꼭 필요한 것을 내 이름으로 청하라 하십니다.
사실 진실히 기도하다 보면 하느님이, 또 내가 누구인지 점차 알아가게 되고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바로 그것을 청하게 되며 받게 됩니다.
그대로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이름으로 청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청할 것도 없이 다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선물이 충만한 기쁨입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저절로 솟아나는 다음 행복기도입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극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문득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일화가 생각납니다.
경당에서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위해 참 많은 글을 썼다. 너에게 뭐를 해 줬으면 좋겠나?’ 물었을 때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 당신만을 원합니다.' 답변했다는 성인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하느님 사랑만으로, 예수님 사랑만으로 행복했고 만족했던 성인들입니다.
참으로 청해야 할 꼭 필요한 하나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처럼
우리의 전부이시며 기쁨이신 예수님 한 분뿐일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을 때 성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께 드리는 진실한 기도는 그대로 응답될 것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하면 그 누구도 바오로 사도를 능가할 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기도와 열정의 사도 바오로의 3차전도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여기서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이 아폴로입니다.
아폴로가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유다인들에 대해 논박하는 모습을 통해
그의 예수님께 대한 지식과 사랑을 짐작하게 됩니다.
아폴로는 성서에 정통한 학자이자 기도의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은 교회 학자들의 필수 자질이며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수 성심의 사랑 안에서
기도와 사랑 실천에 충실하고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고 원두커피를 갈아서 준비했습니다.
물이 너무나 뜨거워서 입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커피가 식기를 기다렸습니다.
책에 너무나 빠져 있었을까요?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커피는 완전히 식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뜨거워서 못 마시겠더니, 이제 마실 만하겠다 싶으니 금방 식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식고 나면 마시고 싶은 생각이 줄어들고 맙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열정이 넘칠 때에는 어떻습니까? 이 열정을 다루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열정이 식어버리고 나면 다루기는 어렵지 않은데 그만큼 관심이 줄어들지 않습니까?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갖게 되는 처음의 열정도 식어버리면 사랑의 마음이 줄어들게 됩니다.
결국 열정이 있을 때가 좋을 때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열정이 너무 뜨겁다고 식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너무 차갑게 식어버리면 안 됩니다.
열정에 늘 집중하고 또 내 안에 간직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열정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요?
명나라의 관료인 원료범은 운명을 고치는 책이라는 ‘개운서’를 지었고
이 안에 요범사훈(了凡四訓)을 남겼습니다.
이를 사행습인운(思行習人運)라고 하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생이 바뀌고,
인생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바로 생각이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의 전환이 바로 내 열정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생각의 전환이 아닌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보다는
불신과 의심으로 주님을 대할 때가 많았습니다.
불신과 의심으로 인해 생각의 전환도 이루어지지 않고
늘 미지근한 마음으로 힘없이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힘주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열정이 청하는 것을 받을 수 있게 하며 우리의 기쁨도 충만하게 만듭니다.
사람은 100% 믿을 수 없지만, 주님은 100% 믿을 수 있습니다.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자!
그냥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16,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기도는 다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의 기도라는 말에는 주님의 뜻에 맞는 청원이라는 뜻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기만 하면 다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기도를 하지 않기 바랍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 매달린다고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청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합니다. 그 때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토마스 아 겜피스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문제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면서 가난할지언정
주님을 떠나 부요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을지언정
주님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이요,
주님을 떠난 그 자리가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르짖으며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외에 저를 도와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간절한 기도를 하되 믿음으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이는 "기도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곳에 그 이름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우리의 몸이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면역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무균실에서 지내지 않는 한 우리의 몸은 세균과 바이러스의 위험에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우리의 신앙도 많은 도전을 받고, 위기를 체험합니다.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이런 신앙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릴 정도로 유혹과 고통이 심했습니다.
세균과 바이러스를 완벽하게 없앨 수 없다면
세균과 바이러스를 이겨내는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면역력을 키우는 방법은 3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올바른 생활습관을 갖는 것입니다.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것입니다.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가진 걸 나누는 사람은 면역력이 강해진다고 합니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운동하고, 영양분을 섭취해도 면역력이 약해진다고 합니다.
면역력은 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면역력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지면 외부의 위험이나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이 사라진다고 하지만 또다시 새로운 고통이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악의 유혹이 없어지도록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영적인 면역력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역력은 무엇으로 키울 수 있을까요?
첫째는 ‘갈망’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의무감으로 일하는 사람은 갈망으로 일하는 사람을 넘어서기가 어렵습니다.
의무감은 책임을 지는 것이지만 갈망 모든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갈망, 소경의 갈망, 하혈하는 여인의 갈망, 자캐오의 갈망은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의 놀라운 표징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바쁜 중에도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영적으로 충전시키는 힘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아서 삶의 시련이 와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아서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기도가 그치지 않는 가정, 공동체, 본당은 활기가 넘치고, 하는 일이 모두 잘 될 겁니다.
셋째는 ‘실천’입니다.
그림의 떡만 보면 결코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계명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만 담고 실천하지 않으면 가식과 위선으로 남을 것입니다.
씨는 뿌려져서 썩어야만 열매 맺습니다. 행동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던 주님처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청하면서 삶이 뒷받침되는 신앙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행복했던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20년간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였습니다.
라헬과 레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14년간을 일하였습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올 수 있는 복을 받았지만
큰 노력을 함께 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께 청하면서 삶의 터전에서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도들은 주님과 함께하려는 갈망이 있었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고, 그들의 삶을 통해서 신앙을 증언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황무지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듯이, 믿음의 결실들이 아시아의 각 지방에서 맺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름으로 청하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까지라도 가주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사랑과 정의, 기쁨과 행복이 자라나게 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019년도 반이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6월의 첫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면역력을 높여서 시련과 아픔을 이겨내면 좋겠습니다.
갈망, 기도, 실천이 조화를 이루는 신앙이 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시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한 부잣집 아들이 시력을 잃게 되어 절망에 빠졌습니다.
책을 읽어주려고 고용된 여자들에게 손찌검을 하고 물건을 집어던졌습니다.
그런 그에게 삶의 빛을 줄 한 여자가 나타납니다.
그녀는 백색증 환자로 할머니처럼 백발로 태어났고
허옇게 뜬 얼굴도 못생겨 처음부터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얼굴과 몸에는 상처투성이였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도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했습니다.
그녀만이 성질 더러운 부잣집 도련님을 제압할 수 있었고 책을 읽어줄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촉각과 청각, 후각 등을 이용하는 법을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
루벤은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한 마리를 사랑하게 됩니다.
마리도 어차피 자신의 외모를 보지 못하는 루벤에게 생전 처음으로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수술하여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은 루벤에게는 기쁨이었지만 마리에게는 절망이 되었습니다.
젊고 잘생기고 부잣집 외아들인 그가 늙고 못생긴 자신의 얼굴을 보고 계속 사랑할 리가 없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편지 한 통을 써 놓고 루벤을 떠납니다.
새 눈을 갖게 된 루벤은 가장 먼저 마리를 보고 싶었지만 마리는 이미 그 집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끊임없이 마리를 찾던 중 우연히 도서관에서 그녀를 만나게 됩니다.
마리는 어차피 자신을 못 알아볼 것이라 여겨 그의 곁을 스쳐가지만
그녀의 체취를 알고 있었던 루벤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집으로 함께 가자는 루벤의 말에 마리는 버려지는 고통을 감내할 수 없어 그를 또 떠납니다.
루벤은 마리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시선이었습니다. 눈을 가진 어떤 사람도 자신을 아름답게 보아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나설 용기도 없었던 그녀가 루벤의 시선을 감당할 수는 더더욱 없었던 것입니다.
루벤은 자신에게 마리가 다가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눈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벤은 정원에서 차가운 고드름을 발견합니다. 고드름 두 개를 잘라 자신의 눈에 박습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이젠 마리가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젠 마리가 더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블라인드(2007)’의 줄거리입니다.
현실의 고달픔 속에 살아온 마리는 동화 같은 사랑의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루벤은 자신의 눈을 스스로 잃게 만듦으로써 동화가 현실이 되게 했습니다.
누군가의 동화 같은 희생으로 생긴 믿음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사랑이 실현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죄의 부끄러움으로 괴로워하는 인간을 위해 당신의 눈인 아드님을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장님이 되어 인간도 하느님과 한 집에서 살 수 있음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의 이사악이 장님이 되어 자신을 에사우라고 믿게 된 야곱에게 상속권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상속권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 더 이상 야곱은 신분상승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사악은 야곱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에사우를 자신의 눈에서 빼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이들에게 자신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모든 재산에 대한 상속권을 가집니다.
모르는 사람이나 하인이 청하면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자녀가 청하면 들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
당신 이름으로 청하라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며 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격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 하느님의 눈과 같은 분이셨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젠 나의 어떠한 부족함도 보지 않겠다고 하느님께서 심판의 눈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내가 그리스도라 믿으며 아버지께 청하면 모든 것을 받게 되고
그러면 기쁨에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느님은 나의 모든 죄와 나의 인간적인 본성을 눈감아주려고 당신 눈을 못 박으셨습니다.
이제 믿기만 하고 청합시다. 그러면 무엇이든 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런 믿음 없이 청하니 아무 것도 받아낼 수 없었고 삶이 우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라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삶이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우리의 삶이란
다시 돌아가기 위한
믿음의 여정입니다.
익숙한 것을 떠나야
본래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녕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아버지 하느님이심을
일깨워주십니다.
이와 같이
모두가 따뜻하고 밝은
한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마중 나오실
따뜻한 아버지 하느님의
차고 넘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만이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여정이
우리를 위한 여정이기에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 24)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쁘게
기쁜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회개의
예수 성심 성월 되십시오.
"내 이름으로!"(요한 16,23)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예수님의 이름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예수"는 "주님(야훼)은 구원(도움)" 또는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의
히브리말 "여호수아"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이를 줄여서 "예수아"로 불린 것을 그리스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예수스"로 음역된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이미 그 안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부르는 동시에 하느님께 믿음과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느님께서 당신 뜻을 전하시려 판관과 임금, 예언자를 무수히 보내셨지만,
우리는 그들의 이름으로, 그들을 통해서 하느님께 청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과 하나이시며 또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이후에
비로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께 청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
예수님은 죄인이고 부족한 우리를 잘 아시면서도 우리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으시기에,
우리의 청이 당신의 가르침과 분리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이런 과감하고 대범한 약속을 하십니다.
비정상적으로라도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 검은 거래와 청탁이 끊이지 않는 세상이지요.
정당하지 않은 잇권을 욕망하는 이와, 불법인 걸 알면서도 알선하고 중개해서 이득을 취하는 이,
자기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이루어 주고는 대가로 더 큰 부를 일구는 이,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이미 각자 서로의 욕망을 알고 이용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가진 헛되고 악한 욕망이 풍기는 악취가 서로를 부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경우, 청을 귀 기울여 듣고 계시는 분이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이시고,
하느님 앞에 우리가 들고 나가는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어느 누가 헛되고 악한 것을 청할 수 있을까요?
개인 영달과 세속적 영화만을 청하는 행위는 엄밀히 말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라기보다,
성삼위 하느님 아닌 다른 존재에게 졸라대는 주술이나 거래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기도는 마음 가득한 바람을 안고 하느님 앞에 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을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예수"라는 이름에 장착된
"말씀"과 "사랑"이라는 필터가 작동하면서 마음속의 욕망은 정화와 정돈의 과정에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결국 영혼의 청원은 더 낮고 더 희생하고 더 품고 더 가난하고 더 나누는 곳을 향하기 마련이지요.
바로 거기에 "아버지의 뜻"이 있고 예수님께서 계시니까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요한 16,27)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당신의 역할을 분명히 하십니다.
당신이 중개자로서 희생 제사를 통해 우리 죄를 사하심으로
우리가 깨끗해져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게 해주실 장본인이 맞지만,
"바로" 아버지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강조하시면서
우리 시선과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게 하십니다.
성삼위 하느님 내부에 흐르는 서로에 대한 겸손과 사랑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기에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라고 하시네요.
우리에 대한 성부 하느님의 사랑에는 성자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다는 뜻이고,
또 아버지께 사랑받는 비결이 당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라고 살짝 귀뜸해 주시는 듯합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성령에 힘입어(로마 8,26 참조),
성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께 드리는 사랑과 찬미와 청원 등이 곧 기도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성삼위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모든 행위가 곧 기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열매는 기쁨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 대목에서는 모처럼 선교의 장이 순조롭게 펼쳐집니다.
그동안 반대와 공격, 박해의 위험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평화롭고 또 생명력이 넘쳐 독서 말씀에 머무르는 내내 마음이 기쁘고 흡족합니다.
바오로는 그동안 예수님의 이름을 씨 뿌렸던 곳들을
"거쳐 가면서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사도 18,23) 주고,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하고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는"(사도 18,24) 준비된 일꾼 아폴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데리고 가서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사도 18,26) 주며
아폴로의 빈 곳을 보완해 채워주고,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사도 18,27) 주지요.
이 모든 움직임을 관상하다 보니, 교회는 어느 한 독보적인 인물에 의해 꾸려지는 영리 집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시켜 부르신 이들이 서로 파견하고 환대하며,
가르치고 배우고, 협력하고 보완하면서, 살이 붙고 혈관이 이어져 가고
뼈가 차오르면서 형성되어 가는 유기체라는 것이 보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 복음 선포를 통한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이들이
자기 안위를 잊고 서로에게 베푸는 선의와 사랑은 그 자체로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은 일의 성과나 사업의 성공, 숫자의 증가나
빛나는 업적이 아니라 교회 지체들 안에 흐르는 충만한 기쁨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가 부르는 예수님 이름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또 우리에게 보내시는 하느님의 응답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삼위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복된 지위에 초대받은 우리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간절히 청할 것은 오직 하나, 하느님이 아닐까 합니다.
그분이 전부이시니 그분을 청해 얻음으로써 모든 것이 뒤따라 올 것이니까요.
마음에 기쁨이 충만해진다면 이미 기도는 시작된 것입니다.
6월 예수성심성월,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벗님의 마음 되시길 기도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