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이 책으로 말을 꺼내어보려고 정했다가 곧 후회가 되기 시작했어.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사실 할말도 별로 많지 않았거든. 질겅질겅 오래 씹어대며 맛나게
먹어 내 살을 찌울만한 빼어난 연출이나 흥미진진한 사건의 이야기구조도 드러나지 않아. 그렇
다고 이 책이 별 매력을 가지지 못했다거나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은 아니야. 이 책은 보고 또
봐도 참 좋거든. 아주 좋아.
책은 제목에서부터 너무 순진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말하고 있어. 나무는 좋다고.
어디, 나무가 싫고 귀찮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나? 어떤 이야기를 시작할 때 처음부터 저렇게 아
무 속셈 없이 말해버리면 좀 그렇잖아. 김이 빠져버린다고나 할까? 감추는 것이 적당히 있어야
궁금증도 생기기 마련인데. 그래서 간혹 제목에서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조
금 더 자극적인 말을 붙이잖아. ‘나무는 꿀돼지다’라거나 이런 식으로 고정관념을 흔드는 기
발한 제목 말이야. 하지만 어디에서나 쉽게 들을 법한 말을 제목으로 쓴, 소박하고 꾸밈없는 모
습이 바로 이 작가가 말하는 방식이야. 그것은 또한 그이의 삶의 방식이기도 하겠지.
모리스 센닥의 담당 편집자이며 처음 이 책을 낸 하퍼 콜린스 출판사의 편집자인 어슐러 노
드스트롬이 밝힌 책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재미있어. 처음 이 원고를 본 출판사 검토자는 짧
은 리포트에서 비웃으며 이렇게 썼대.
“나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어떤 여성이 쓴 2쪽 짜리 원고가 있다. 새가 나무에 앉았다. 소가
그 밑에 누워 있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아마 지나치게 싱거운 원고라고 그 출판사 검토자는 보았고 원고를 반려하거나 보내진 원고 철
에 처박아 두려고 했겠지. 그러나 이 리포트를 본 편집자에 의해 원고가 다시 읽혀지고 책으로
나왔다고 하네. 초고를 보고 그 가능성을 발견하는 편집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다
시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야.
‘나무는 매우 좋다. 나무는 하늘을 한가득 채운다.’
책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해. 그 뒤에 이어지는 글도 비슷한 투야.
나무는 강가에도, 계곡에도, 언덕 위에서도 자라고, 나무는 숲을 이루고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
게 하고, 딱 한 그루밖에 없다 해도 좋고,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면 낙엽 속에서 놀고, 갈퀴로
긁어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저 먼 데까지 둘러볼 수 있어서 좋고, 그 나
무가 사과나무라면 사과를 딸 수 있어서 좋고, 고양이는 나무 위로 올라가 개를 피해서 좋고,
떨어진 잔가지로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좋고, 나무에 그네를 매달 수 있어서 좋고,
꽃바구니를 걸 수 있어서 좋고, 일하다가 쉴 때 괭이를 걸쳐놓을 수도 있어서 좋고, 날씨가 더
울 때는 소들이 나무 그늘에서 쉴 수 있어서 좋고, 나무 그늘에서 소풍을 즐길 수 있어서 좋
고, 그늘을 드리워 집을 시원하게 해서 좋고, 지붕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바람을 막아주어
서 좋고, 나무는 심을 수 있어서 좋대. 심은 나무는 조금씩 자라고 나무를 심은 아이는 “저 나
무는 내가 심은 거야” 하고 말하고 다른 아이들도 나무가 심고 싶어져서 집으로 돌아가 저희들
도 나무를 심는대.
그림책을 만들어보겠다고 짐짓 골머리를 싸매면서 끈질기게 욕심 내는 일이 있는데 그건 바로
치밀하게 장치되어 있다가 책을 여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독자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이끌고 가는 치밀한 연출이었어. 오래 공들여 세운 도미노가 점진적으로 줄줄이 넘어지
면서 만들어내는 그림과 글씨들을 보는 것처럼 말이야. 마치 책 한 장이 하나의 도미노 조각처
럼 작용하면서 앞 장면의 작용이 뒤로 이어지고 뒤에 넘어진 조각이 앞에 넘어진 조각을 완성시
키는 구조 말이야. 혹시 도미노 조각 하나라도 빠뜨려지거나 잘못 넘어지면 다 어그러져 버릴
정도로 철저한 인과관계가 작용하는 그림책. 또는 어릴 때 뚜껑 열어본 손목시계 속 세상처럼
치밀하고 조밀하게 장치된 책.
요즘 쏟아져 나오는 대개의 문화상품들이 다 그렇잖아. 돈이 될지 안될지의 계산에서는 두 말
할 필요도 없고, 작품과 예술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도 얼마나 치밀해?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지
무지하게 많은 나사와 못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보이는 구조거든. 교묘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말
이야.
그런 상품들에 줄곧 노출되다가 이런 책을 보면 얼마나 개운하고 즐거운지 몰라. 이 책이 읊조
리는 음색은 양념이 많이 들어가지 않고 재료의 제 맛을 살린 담백한 음식 같아. 내가 만들어보
고 싶은 도미노 같은 책도 물론 재미있겠지만 이렇게 맑고 즐거운 책도 중요해.
모든 문학과 이야기의 기본인 기승전결도 없이 무작정 나무에 대한 노래를 흥얼거리잖아. 아주
제 흥에 겨웠어. 그림책을 만들겠다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책의 작가는 나무가 너
무 좋아서 나무를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 같아. 자기 노래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나무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노래야. 마음 속 깊이, 또 일상 속에서 나무
를 좋아해야만 이렇게 구체적이고 자연스러운 생활 속 표현이 나올 수 있을 거야. 그림은 글과
는 또 다른 나름의 목소리를 갖지 않고 글을 충실하게 따라가며 함께 노래해. 그림투도 조용히
노래하듯 소박하고 도드라지지 않아. 세련되거나 매끄럽지 않아도 참 좋아.
이 책을 가만 보면 컬러와 흑백그림이 번갈아 가며 나와. 어떤 책을 보면 컬러그림과 흑백그림
을 이용해서 주인공의 심리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예가 있는데 이 책에서는 아무리 보아도 마땅
한 이유를 모르겠어. 이건 말이야, 순전히 내 추측인데 이 책이 처음 나온 게 1956년이고 다시
손보아서 낸 게 1984년이래. 칼데콧 상을 받은 건 처음 낸 다음해인 1957년이고. 오래 전이잖
아. 인쇄술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한 때이고, 그로 인하여 인쇄비도 만만찮았을 거야. 그런 이
유와 무관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확실한 것은 아니야.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한 짐
작일 뿐이지.
나무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자면 나는 어릴 때부터 나무가 좋았어. 그냥 좋았어. 별 뾰족한 이
유를 대라면 딱히 내세울만한 말은 없지만 무작정 좋더라. 친구네 집에 놀러가서 큰 감나무 아
래 뿌리에서 나오는 감나무 움을 캐다가 화단에 옮겨심기도 했어. 여덟 살 때인지는 친구네 밤
나무 과수원에 가서 이른봄에 나오는 어린 싹을 캐다 밭둑에 심기도 했지. 감나무는 살아나지
못했지만 밤나무는 잘 커서 매 해 가을마다 밤을 많이 주워먹었어. 어머니는
두고두고 그 밤나무를 가리키며 내가 심은 거라고 들먹여 되새겨주었어.
나무는 좋아.
집 뒤란에 있어 봄마다 잎을 따 말렸다가 나물로 먹던 가죽나무, 시원하고 큼직한 이파리가 바
람에 출렁거리는 호두나무도 좋았어. 엄밀하게 말해 나무가 아니라고 하지만 대나무도 얼
마나 좋았게.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 먹을 것이 모자란 선조의 수라상에 도토리묵이 자주
올라 그 이름이 붙여졌다는 상수리나무, 배롱나무·목백일홍·자미·홍미라고도 불리는 매끈한
겉껍질의 간지럼나무, 줄기의 선이 멋스러운 소나무, 잔가지 늘어뜨린 은행나무, 순을 꺾어먹
는 찔레, 이른 봄 따먹는 진달래, 가을에 검붉게 익어 열매 주워 먹던 팽나무, 동구 밖 느티나
무, 죽죽 늘어진 버드나무, 입술 검게 물들이며 오디 따먹던 뽕나무, 껍질이 거칠거칠한 느릅나
무, 열매가 달큼하고 달디단 다래나무, 성질머리 꺼드럭거리는 두릅나무, 샛노란 꽃만 보아도
입안이 시큼한 산수유나무, 이른 봄 학교 운동장에서 화사한 분홍색 눈을 날리던 벚나무, 사뭇
위엄 있는 엄나무, 분바르는 솔같이 생긴 꽃이 신기한 자귀나무, 움쑥움쑥 오동나무, 반지르르
동백나무, 몽실몽실 측백나무, 아이 시어 살구나무, 단물 주르륵 자두나무, 진물 난다 복숭아나
무, 앉은뱅이 사과나무, 칭칭 감아 포도나무…….
다 좋잖아. 나무만큼 깊은 아름다움을 가진 생김새도 드물어. 작고 여리면 작은 대로, 크고 우
람하면 큰 대로.
에이, 그림책 공부가 되는 말은 없고, 나도 덩달아 나무가 좋다는 너스레만 늘어놓고 말았네.
미안. 그래도 좋을 걸 어떡해?
*꿀밤나무 3호에서, 어슐러 노드스트롬이 쓰고 신수진씨가 번역한 '그림책 편집자가 쓴 에
세이 한 편', 『어린이책을 편집한다는 것』에서 일부 따옴.
첫댓글 또 한 사람이 상받을까 무셥네요. 이거슨 시련. ㅠㅠ
그 수많은 나무들이 다 내게로 와서 나뭇잎을 부비며 속살거린다....천천히...쉬임없이 그렇게 사랑하며 살라고. 나무를 사랑하듯이 세상을 사랑하라고.
빨강밥이 노이로제 걸렸다.. 걱정마시어요, 그런 컬럼으로 상주는 데 아직 없어요
어! 남원이면.....반가운 곳이다.....좋은곳에서 태어나셔네여....
에휴~, 다행이네요.
ㅎㅎㅎㅎ, 윽, 미쳐, 하여간, 으으으, 왜 그래, 성! (쪽팔리게시리...) ((복펌이 성이었니?))
빨강밥. 제발 성전환수술 좀 하세요. 아바타가 아직도 여자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