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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 5,7-9>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 복음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부속가)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9,25-27>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어머니의 고통을 거울 삼아>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이어서 그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는 이제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의해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이제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많은 고통을 안고 사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님의 잉태를 예고 받지만,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시대 상황으로 볼 때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루카 1,38).
그리하여 한동안 약혼한 요셉으로부터 간음한 여인이라고 오해를 받으셨습니
다(마태 1,19).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누우실 한 평 방이 없어서 마구간 말구유에서 해산을 했고(루카 2,7), 또한 이집트로의 피난길에 나서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율법에 따라 출산 후 40일 만에 정결례를 거행할 때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를 봉헌하면서 시므온의 예언을 접하게 되었는데, “품에 안긴 아기가 많은 사람의 반대 받는 표징이 되어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카 2,34-35)이라는 고통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실현을 30년 이상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축제 때에는 예수를 잃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건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여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루카 2,41-52) 그 구원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사실을 알렸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외면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평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일찍 남편 요셉을 잃고 홀어머니로서 가정을 꾸려야 했거늘 아들도 집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홀로 버려졌습니다.
어느 날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았으나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마르 3,33-35)라는 말을 흘려들어야 했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고,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시며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아들과 함께 십자가를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제자들과 새로운 자녀 관계를 맺어주며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을 침묵 속에 받아들이고 끝내는 피에 엉긴 아들을 무릎에 눕혀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부활의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 뒤늦게 알아야 했던 어머니는 인간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고통에 묻혀버린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셨습니다.
성모님께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주님께 온전히 희생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
(교부 푀멘)
힘들고 어려울 때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위로가 될 것입니다.
<참고>
성모통고 신심은 14세기 초에 나타났으며 복음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 신심은 처음에 예수께서 올리브동산에서 피땀 흘리시는 장면에서부터 수난 전체로 묵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성모 칠고로 발전되었습니다.
또한 '성모 칠고' 신심이 보편화되면서 점차 수많은 묵상과 기도문 그리고 시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심을 더욱 고취시켰습니다.
복음서에 근거를 둔 '성모 칠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시메온의 예언 (루카 2,34-35)
2. 이집트로 피난 가심 (마태 2,13-21)
3. 삼일 동안 예수를 잃으심 (루카 2,41-50)
4. 갈바리아로 오르심 (요한 19, 17)
5.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심 (요한 19,18-30)
6. 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심 (요한 19,40-42)
7. 예수, 무덤에 묻히심 (요한 19, 40-42)
예수님의 수난이 곧 성모님의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돈만 많이 주면 출산율이 높아질까?>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받으신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모님의 고통을 보답해 주시는 것처럼 요한을 당신 아들로 주십니다.
십자가 신학에서는 예수님은 교회의 신랑이시고 성모님은 신부이시며 요한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여 교회를 낳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라 불림을 받으십니다.
이것은 성모님께서 고통받으신 것의 보답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편하게 지내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여 하느님 자녀들을 낳으셨습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당신 자녀들을 보시며 참으로 행복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에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 더 큰 행복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녀를 더 낳으라고 하면 어머니들은 ‘당신이 키워줄 겁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만큼 한 자녀를 더 낳는 것은 큰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출산율은 전 세계 최하위입니다.
2020년 우리나라 출산율은 0.84명입니다.
OECD 국가 중 출산율 1.0 이하인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현 속도로 가면 2100년경 총인구는 1650만 명대로 쪼그라들고 2300년경이면 100만 명도 안 돼 사실상 국가의 소멸입니다.
옥스퍼드 인구문제연구소 데이비드 콜먼 박사는 우리나라 저출산 문제를 연구하고 코리아 신드롬이란 말을 썼습니다.
그리고 “한국이 지구촌에서 사라지는 최초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우리나라가 극도로 아기를 낳지 않는 이유를 대부분은 돈이 많이 든다는 것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주택정책과 교육을 위한 재정지원 정책으로 어마어마한 액수가 매년 투자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집값만 더 오르고 사교육비는 더 증가합니다.
그리고 출산율은 계속 곤두박질칩니다.
그런데 유럽 나라들은 이런 정책들을 하지 않을까요?
합니다.
다만 우리나라는 효과가 없고, 외국은 효과가 있다는 그 차이입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은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고통이었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이 아닌 성모님께선 이런 고통을 감내하시길 원하셨을까요?
돈을 많이 줘서였을까요?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자녀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고통을 함께할 어머니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고통에서 자녀를 많이 낳게 만드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이나 마더 데레사와 같은 분들은 많은 하느님 자녀를 낳으신 분들입니다.
그들은 왜 그런 고통을 감내하셨을까요?
단순합니다.
하느님을 알아 행복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정글 지역에 있는 개신교 학교에 매우 보기 흉한 소녀가 찾아왔습니다.
흉한 몰골의 그 소녀는 코가 없는 기형아였고 심지어 지적장애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학교의 교감은 그를 환대하고 학교에서 지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학교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래 몇 마디를 배우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코 없는 소녀가 가진 유일한 소질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되지 않아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의 반대로 더는 소녀를 가르칠 수 없었고 그래서 교감은 그 소녀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녀는 슬퍼하며 다시 정글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렇게 소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졌습니다.
2년 후, 한 선교회에 정글 마을로부터 복음을 전해 달라는 간절한 호소의 편지가 왔습니다.
선교회는 그 마을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선교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언덕에 모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오자 몇몇 사람들이 그를 맞이하여 주민 가운데로 인도했습니다.
선교사는 먼저 찬양을 하나 가르치기로 하고 간단한 합창을 하나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300여 명의 원주민은 “우리도 아는데요.”라고 말하며 찬양을 함께 불렀습니다.
선교사는 너무나 놀라 다른 찬양을 불렀는데 역시 그 찬양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배우셨나요?
내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는 한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에요.”
선교사는 놀란 듯이 그들을 쳐다보았고, 그들은 한 사람을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바로 학교에서 쫓겨난 후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진 그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지적장애인이었지만 자신을 받아준 학교에 대한 감사를 느꼈고 자신이 외운 찬송가를 자기 마을에서 매일 부르고 다녔던 것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든 그날그날의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누구는 그 같은 고통 속에서도 아이를 더 낳고 누구는 낳지 않으려 합니다.
어쩌면 나와 똑같이 불행한 아이를 더는 낳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게 하려면 나라가 나서서 내가 낳는 자녀가 나처럼 행복한 사람이 될 확신을 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도 자녀를 낳지 않으면 이율배반이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현재 어느 나라가 가장 출산율이 높을까요?
항상 우리나라와 비교되는 이스라엘입니다.
2018년 기준으로 이스라엘이 3.09명이고 그다음이 멕시코 2.13명입니다.
그리고 터키가 1.99명, 프랑스가 1.84명입니다.
꼴찌에서 두 번째가 스페인인데 1.26명이고 한국이 당시 0.98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2위 멕시코와의 격차도 상당합니다.
이렇게 가면 이스라엘은 미국처럼 커지고 한국은 지구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복지가 좋을까요?
당연히 좋습니다.
정년이 68세이고 아기를 더 낳으라고 갖은 장려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와 문화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자존감이 있습니다.
그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문화 안에서는 자신만 그 행복을 누리고 그래서 또 다른 하느님 백성을 낳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텔아비브에 유학해 23년째 거주하는 한국 여성 정자은 씨(44)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아이가 삶에 중요하다는 종교적 믿음이 있고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은 수치스러워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출처: ‘출산율 이스라엘 1등, 한국 꼴찌 왜?’, 김세형, 매경 칼럼)
내가 낳은 자녀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서 영광스럽게 빛나게 될 것을 믿는다면, 그런 확실한 태몽을 꾸었다면 그 아이를 낳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도 그렇게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자녀를 낳는 고통을 거부하는 이유는 고통 자체를 원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 고통에 대한 확실한 보답이 있을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녀를 낳아봐야 나처럼 고통만 받으며 살 것 같고, 자녀가 왜 나를 낳았냐고 원망을 할 것 같으니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한 사람만이 자신과 같은 행복한 사람을 낳기 위해 고통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은 ‘자존감’과 비례합니다.
출산율을 높이려고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부어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으로 자존감이 높아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냐는 정체성으로 높아집니다.
이는 진화론이 팽배한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진화론 안에서 우리는 그저 유전자를 나르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낮은 자존감과 행복감 안에서는 나의 생존이 우선이지 나의 불행을 이어받을 자녀를 낳기 위해 고통을 감내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아무리 선교를 강조해도 선교하지 않을까요?
선교를 강조하며 억지로 고통을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행복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이 행복을 느끼게 하려고 시키지 않아도 선교할 것입니다.
더 많이 낳게 하려면 그 낳는 사람이 태어난 자녀가 자신처럼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확신을 자신이 느끼고 있어야 합니다.
성모님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영혼 기뻐 뛰놉니다.”라고 노래하셨습니다.
이것이 당신 고통을 감내할 충분한 자존감이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모님을 닮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적어도 그 행복감 안에서 더 많은 자녀가 그 행복에 참여하도록 자신들도 자녀를 낳는 고통을 감내할 힘을 가져야 당연할 것입니다.
내가 너무 받아 행복해서 이 행복을 전하지 않으면 부끄러워 아기를 낳고 선교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차라리 내가 대신 저 십자가에 매달렸으면!>
십자가형이 집행되고 있던 골고타 언덕의 상황은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또 다른 두 명의 사형수들이 흘린 피로 사방이 피비린내로 가득했습니다.
사형수들이 극도의 고통으로 인해 내지르는 비명과 신음 소리가 골짜기 전체에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백인대장의 감독 아래 사형을 집행한 로마 군대 소속 병사들은 총 4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형수들의 목숨이 떨어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사형수들이 빨리 죽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겠지요.
그래야 사형 집행에 대한 수고비조로 죄수들이 입고 있던 옷을 일당으로 받아들고 퇴근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는 무심한 얼굴로 옷의 분배에만 골몰하고 있던 네 명의 병사들뿐만 아니라, 또 다른 네 명의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병사들과는 대조적으로 슬픔으로 가득한 네 명의 여인, 그리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애제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이 사람들, 특히 성모님께서는, 극심한 내적인 고통을 겨우겨우 참아내며 끝까지, 용감하게 십자가 아래 서 있었습니다.
차라리 내가 대신 저 십자가에 매달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지금 겪고 계시는 고통에 영적으로 긴밀히 참여하며,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마지막 단말마의 고통을 겪는 순간, 숨이 떨어져가는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아래 서 있는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남겨질 교회와 양떼인 우리를 걱정하십니다.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 감당하기도 힘겨우실 텐데, 자신에게 휘몰아쳐오는 광풍과도 같은 괴로움에 대해서는 일말의 표현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자신이 떠나신 후 남겨질 사랑하는 사람들을 염려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복음 19장 26~27절)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를 새로운 모자 관계로 연결시켜주셨습니다.
남겨질 신앙 공동체를 위해 성모님은 중개자 역할, 즉 교회의 어머니로서 역할을 지속해나가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넘어서서, 사랑하는 제자의 어머니,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 더 나아가서 교회 공동체의 어머니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그분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존재로 인해 모두 한 형제요 한 자매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신앙 안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어머니 안에서 새로운 영적 가족으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부단한 자기비움, 자기초월의 삶 - 축제인생을 삽시다>
“비통의 어머니시여, 기뻐하소서.
당신은 큰 고통을 겪으신후 천상영광으로 구원되시고
온누리의 여왕으로서 당신 아드님 곁에 좌정하셨나이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아침성무일도 즈카르야의 노래 후렴이 은혜롭습니다.
죽음이 아닌 부활이 최종의 답이듯, 고통이 아닌 기쁨이 최종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믿는 우리들의 기쁨은 고통이 없는 값싼 기쁨이 아니라 고통중에도 샘솟는, 피어나는 참된 기쁨, 바로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어제 예수님의 십자가 현양 축일에 이어 오늘 9월15일은 9월 순교자 성월 한가운데에 상징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신심은 아주 오래 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이 기념일로 정하였고, 1721년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보편교회 전례에 들어왔으며, 1908년 비오 10세 교황은 이 기념일을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날인 오늘 9월15일로 옮겨 예수님의 고통과 연계하여 기억하게 했습니다.
역시 유서 깊은 성모 통고 신심임을 깨닫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생애 동안 겪었던 일곱 가지 큰 고통을 일컫는 성모 칠고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1. 시메온이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 훗날 마리아가 예리한 칼에 찔리듯 마음이 아플 것이라고 예언한 일,
2. 헤로데의 눈을 피해 온갖 고생을 하며 이집트로 피난 간 일,
3.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소년 예수님을 잃어버린 일,
4. 십자가 지고 가는 예수님을 만난 고통,
5.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둔 것을 본 고통,
6.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린 고통,
7. 아들 예수님을 무덤에 묻은 고통 등 일곱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고통도 무궁할 것입니다.
화답송 후에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성모통고 부속가를 보십시오.
무려 20절까지 구구절절 고통과 슬픔 가득한 내용들입니다.
비단 성모님뿐 아니라 우리 옛 어머니들은 물론 오늘도 고통중인 어머니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교회의 어머님, 성모 마리아가 계시다는 사실이 천군만마의 힘이 될 것입니다.
시편 90장 10절 고통의 삶을 요약한듯한 성구도 생각납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
요즘 세상이나 신문지면이나 인터넷을 봐도 전쟁과 고통의 바다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명과 희망, 기쁨과 평화보다는 온통 어둠과 갈등과 분열, 쟁투(爭鬪)의 불화한 현실은 그대로 인생고해라 할만 합니다.
때로는 미쳐 돌아가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불가에서는 인생 고해라 하여 여덟 가지 고통을, 소위 인생 팔고를 말합니다.
1. 태어남의 고통인 생고(生苦),
2. 늙어감의 고통인 노고(老苦),
3. 몸아픔의 고통인 병고(病苦),
4. 죽어감의 고통인 사고(死苦),
5.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것들과 헤어지는 애별리고(愛別離苦),
6. 미워하는 사람, 싫어하는 것들과 만나는 원증회고(怨憎會苦),
7. 구하고자 하나 적게 얻거나 전혀 얻지 못하는 구불득고(求不得苦),
8. 온갖 욕망이 불타오르는 오음성고(五陰盛苦),
말 그대로 인생 고해입니다.
그리하여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의 진리를 말합니다.
즉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오는 것이니 집착을 멸하는 도의 경지에 이르도록 해야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나 불교의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상에서 충분히 겪는 인생 고해의 현실입니다.
몇 년 전 선물받은 활짝 웃는 예수님 초상화를 잠시 집무실에 놨다가 곧 치운 일이 생각납니다.
고통과 슬픔에 찌든 예수님의 모습은 절대 아니었겠지만 그렇다 하여 늘 활짝 웃는 얼굴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복음서 어디를 봐도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말은 있어도 웃었다는 말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미리 전제하는 바 우리의 궁극의 답은 고통이 아닌 고통중에도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인생 고해가 아닌 축제 인생을 살아야 함이 답입니다.
우선 그에 앞서 고통의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없이는 부활의 영광과 기쁨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한복음과 제1독서 히브리서는 아주 짧지만 고통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참 깊은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선 성모님과 여인들, 그리고 사도 요한, 흡사 이등변 삼각형 같은 모습의 장면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 곁에 있는 분들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큰 고통을 겪으셨을 성모님은 예수님처럼 완전히 자기비움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우리 믿는 이들 모두를 상징합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성모 마리아의 아들, 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이제 성모 마리아는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우리 이상으로 큰 고통을 겪으셨지만 예수님의 처신은 우리에게는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히브리서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셨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이 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생 고해에 대한 답이자 축제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일상의 모든 고통을 순종과 겸손을 배우는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이래야 쌓이는 스트레스로 병이 생기지 않습니다.
스트레스가 쌓여 불통으로 생기는 병들이기에 이렇게 순종과 겸손의 소통으로 비워내면 분명코 쾌유의 은총이 뒤따를 것입니다.
바로 끊임없는 케노시스(kenosis)!
자기 비움을 통한 자기 초월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역시 자기 비움의 성모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 자기 비움에서 샘솟는 맑은 기쁨, 맑은 행복입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자기 비움의 파스카의 기쁨과 평화를, 행복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울과 심각함은 결코 영성의 표지가 아니며 하느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을 따라 살았던 모든 성인들이 평생 휴식없이 늘 고통중에 살았지만 부단한 자기 비움, 자기 초월로 주님을 닮았기에 기쁨과 유머, 희망과 평화중에 너그럽고 자비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보십시오.
초인적 업무 수행중에도 늘 미소띤 얼굴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부단한 자기비움의 파스카 영성으로 당신을 닮아 참 기쁨과 평화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파스카 영성의 대가, 기쁨의 사도 바오로의 말씀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6-18)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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