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신> 산문과 산문시의 차이는 무엇인가 / 임보 (시인)
로메다 님, 질문하신 대로 최근에 발표된 어떤 산문시들을 보면 산문과의 한계가 모호한 것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길이만 일반 산문에 비해 짧을 뿐이지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산문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산문시도 시로 불리려면 분명 일반 산문과는 다른 변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하겠지요. 다음의 글이 산문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산문시(散文詩)
현대시를 외형률의 유무와 행의 표기 형태를 기준으로 따져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가) 운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있는 시 나) 산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있는 시 다) 운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없는 시 다) 산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없는 시
가)와 다)는 운율적인 요소 곧 율격이나 압운 같은 외형률을 지닌 시이고 나)와 라)는 그런 외형률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가)는 우리가 흔히 만나는 일반적인 자유시다. 나)는 문체로 볼 때 산문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행 구분이 되어 있다. 김수영(金洙暎)의 「만용에게」라든지 서정주(徐廷柱)의 후기 기행시 같은 작품들이 이에 해당한다. 다)는 운율을 지닌 작품이지만 산문처럼 행 구분이 되어 있지 않는 경우다. 「장미·4」 등 박두진(朴斗鎭)의 초기 작품들에서 쉽게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라)는 운율도 없으면서 행 구분도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이상(李箱)의 「지비(紙碑)」같은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가)와 나)를 분행자유시(分行自由詩), 다)와 라)를 비분행자유시(非分行自由詩)라고 구분해 명명 키로 한다. 산문시는 바로 이 비분행자유시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산문시는 자유시의 하위 개념이다.
운율의 유무 등 그 내적 구조로 따져 본다면 나)가 다)보다 더 산문성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지만, 산문시를 분별하는 기준을 내적 특성으로 잡는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산문성과 비산문성의 한계를 따지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문시는 그 외형적인 형태를 기준으로 규정하는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산문시는 분행 의식이 없이 산문처럼 잇대어 쓴 자유시'라고 정의한다. 한용운(韓龍雲)의 자유시들은 행이 산문처럼 길지만 산문시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왜냐하면 한용운의 시는 분행 의식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용운의 시처럼 그렇게 행이 긴 시들을 장행시(長行詩)라고 달리 부르고자 한다.
그런데 분행 의식을 기준으로 산문시를 규정해 놓고 보아도 역시 문제는 없지 않다. 라)의 산문시와 산문(짧은 길이의)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즉 산문시와 산문의 한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그것이 산문이 아닌 시로 불릴 수 있는 변별성은 무엇인가. 산문시와 산문의 차이를 논하는 것은 결국 시(詩)와 비시(非詩)를 따지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나는 바람직한 시란 '시정신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 글'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러면 시정신이란 무엇이며 시적 장치는 어떤 것인가가 또한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무릇 모든 글은 작자의 소망한 바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시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시 속에 담긴 시인의 소망은 보통인의 일상적인 것과는 다르다고 본다. 훌륭한 시작품들 속에 서려 있는 시인의 소망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격이 높은 것이다. 말하자면 승화된 소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이를시정신이라고 부른다. 시정신은 진(眞), 선(善), 미(美), 염결(廉潔), 지조(志操)를 소중히 생각하는 초연한 선비정신과 뿌리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가 되도록 표현하는 기법 곧 시적 장치 역시 단순한 것이 아니어서 이를 몇 가지로 요약해서 제시하기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굳이 지적을 해 보자면, 감춤[상징(象徵), 우의(寓意), 전이(轉移), persona(가화자)], 불림[과장(誇張), 역설(逆說), 비유(比喩)] 그리고 꾸밈[(운율(韻律), 대우(對偶), 아어(雅語)] 등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들을 한마디로 '엄살'이라는 말로 집약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시는 시인의 승화된 소망(시정신)이 엄살스럽게 표현된 짧은 글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리라. 산문시도 그것이 바람직한 시가 되기 위해서는 시정신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 글이어야만 한다.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랬거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어짐직도 하이 골이 울어 메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묏새도 울지 않아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다려 흰 뜻은 한 밤 이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듸 랸다 차고 올연(兀然)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長壽山) 속 겨울 한밤내 - - 정지용鄭芝溶 / 장수산(長壽山) 전문
「장수산·1」에 담긴 정지용의 소망은 무엇인가. 무구적요(無垢寂寥)한 자연 속에 들어 세속적인 시름을 씻어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이 작품에 담긴 시정신은 '친자연(親自然) 구평정(求平靜)'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욕망을 넘어선 승화된 정신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또한 이 작품에서의 주된 시적 장치는 대구의 조화로운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맨 앞의 '∼하이'로 종결되는 두 문장이 대우의 관계에 있고, 짐승인 '다람쥐'와 새인 '묏새'의 관계가 또한 그러하며, '달'과 '중'을 서술하는 두 문장 역시 그러하다. 또한 의도적인 의고체(擬古體)의 구사로 우아하고 장중한 맛을 살리고 있다. 「장수산·1」은 일반적인 산문과는 달리 시정신과 그런 대로 시적 장치를 지닌, 시의 자격을 갖춘 글이라고 할 만하다.
산문시는 운율을 거부한 시로 잘못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산문시도 율격이나 압운 등을 얼마든지 담을 수 있고, 그런 외형률이 아니더라도 내재율에 실려 표현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여타의 시적 장치들 역시 산문시 속에 어떻게 적절히 구사되느냐에 따라 그 글을 시의 반열에 올려놓기고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산문시는 외형상 산문의 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이지 결코 시에 미달한 글이어서는 곤란하다. ― 『엄살의 시학』(태학사)pp.85-88
로메다 님, 서구에서의 산문시는 정형시에 대한 반발로 19c 중엽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니 분행 자유시보다 먼저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현대시에 있어서도 1910년대 분행 자유시와 거의 동시에 산문시가 출현합니다. 김억, 주요한에 이어 정지용, 백석, 서정주 등을 거치면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어떤 산문시는 시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된 중요한 원인은 첫째, 시와 산문의 경계를 허물려는 해체시의 의도적인 경향과 둘째, 시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시인의 나태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의 경우는 의도적인 시도니까 어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둘째의 경우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산문시도 시로 불리기 원한다면 보통의 자유시와 마찬가지로 시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원초적인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메다 님, 어떤 이는 형태만 보고 분행 자유시보다 산문시 쓰기가 더 쉬울 거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산문시를 쓰는 것이 더 까다롭습니다. 왜냐하면 분행하지 않고 산문 형태 속에 시적 요소들을 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건필을 빕니다.
- 임보 교수 시창작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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