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노동
남초쌤침
"졸라 아니다. 콜라도 아니다. 촐라 제국이다!"
발리우드에서 한 댄스하게 생긴 이 분은 촐라 제국 전성기의 지배자 라젠드라 대왕이다.
인도 역사관련 지도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고대 마우리아 왕조도, 이후의 굽타 왕조도, 근대의 무굴제국도
인도 남부를 끝내 정ㅋ벅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사실상 인도를 통일한 왕조가 영국의 윈저 왕가라는 드립이 나오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근데 왜 북인도의 패자들은 남인도를 정복하지 못했을까?
"ㅋㅋ 넘을 수 있다면 넘어보시게~ ㅋㅋ"
첫번째 요인은 데칸 고원이라는 드러운 자연환경 때문이다.
인도 중남부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데칸 고원은 평균 해발 600미터에,
삼국지의 파촉 지역에 맞먹을 정도로 지형이 험난했다.
더구나 일부 평야와 해안 지역을 빼면 농업 생산량도 보잘 것 없으니,
억지로 정복해도 수지타산이 안나오는 동네였다.
"거기다 우리 타밀족은 졸라 강하지 ㅋㅋ"
두번째 요인은 남인도의 타밀족이 무시 못할 기반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 인도 인구의 20%를 차지혹 있는 타밀족은
아리아인들이 남하하기 전부터 인도의 토착민족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언어나 문화적인 자주성도 상당히 강하고, 경제력 또한 만만찮은 수준이다.
이러한 문화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탄생한 나라가
오늘 소개할 졸라, 아니 촐라 제국이다.
촐라 왕조의 유산 브리하데쉬와라 사원
전승에 따르면 촐라 왕조는 기원전 7세기까지 올라간다고 하지만,
실제 발견되는 유물이나 비문 기록을 보면 대략 기원전 3~2세기에 탄생한 나라로 추정된다.
촐라는 북인도 마우리아 제국의 아쇼카에게 정복당하지 않았으며,
아쇼카가 정복 전쟁을 끝낸 후에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로 지냈다.
당대에 제법 국제적인 나라였기 때문인지,
그리스의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의 기록에도 촐라 왕조에 대한 언급이 남아 있다.
"바다로 나가자! 바다가 우리의 살길이다!"
후대 바이킹들이나 대항해시대 포르투갈 처럼,
본국에 농토와 자원이 부족했던 촐라 왕국은 적극적인 해양 진출에 나섰다.
이들은 대외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동남아시아 지역에 힌두교와 인도 문화를 전파하는데 선봉장 노릇을 했다.
이러한 경제력과 영향력은 8세기 제국을 선포하는 바탕이 되었으며,
11세기 라헨트라 대왕 통치 시기에 최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진격의 촐라 제국군.
전성기에 60만의 대군과 다수의 상병부대, 그리고 막강한 해군력도 갖추고 있었다.
라젠드라 대왕은 북인도 갠지스강 지역의 팔라 왕조와 뱅골의 오디샤 왕조를 정복하였고,
실론 섬을 평정하였으며, 동남아시아의 패자 스리비자야 왕조까지 굴복시켰다.
엄청난 해양 제국을 건설한 라젠드라는 당시 중국 송나라에도 사신을 보내 존재감을 드러냈다.
동남아시아 동쪽 끝자락인 필리핀에도 촐라의 영향력이 뻗쳤다.
필리핀은 7세기부터 인도 문화의 영향권에 들어갔으며, 인도계 해양국가가 들어서기도 했다.
우리나라 가야 건국 신화에 인도계 이민자 허황옥이 등장하는 데도
촐라의 해양 진출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허황옥이 북인도 아요디아가 아니라 남인도 출신이라는 썰도 존재한다.
촐라 왕국의 주류 민족인 타밀족은 북인도와 달리 벼농사를 지었다.
그래서인지, 벼농사와 관련한 우리나라 말 중에는 타일어와 유사한 것이 꽤 된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쌀은 타밀어로 Sal, 벼는 Biya, 밥은 Bab이라고 발음한다.
뿐만 아니라 엄마는 Amma, 언니는 Anny라고 발음하는 등,
유사한 단어들이 300~400개 정도 된다고 한다.
촐라는 문화적으로도 졸라 번성했다.
촐라의 전성기에 다수의 타밀어 작품들이 나왔고, 우수한 예술품이나 건축물도 많이 남겼다.
더구나 이들은 힌두교를 숭배하고 카스트 계급제를 도입했으나, 북인도와 다른 면모를 보였다.
뭐가 다르고 하니 이들의 카스트는 레벨업이 가능했다!
"뭐시라? 카스트가 레벨업이 돼? 뭔 개소리를 쌈박하게 하니.
브라만은 언제나 브라만이고 수드라는 항상 수드라인게지..."
"할매요, 남쪽에선 달라요. 수드라든 달리트든 능력이 있으면 출세가 가능해."
해양국가로 개방적이었던 촐라 제국은 능력이 있는 자는 계급이 상향되는 게 가능했다.
물론 천민인 달리트에서 브라만이 되는 벼락 출세는 드물다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한두 단계씩 상향은 가능했다. 반대로 상급 계층도 나락탈 수도 있었고...
당연히 계급간 통혼도 가능했고, 브라만이 아니더라도 사원을 관리하는 것도 가능했다.
거기다 딱히 지배층이 아니라도 돈만 있으면 상인이든 농민이든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돈 벌고 힘 키워서 출세하는 자본주의적인 문화가 촐라에선 익숙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인 면에서는 몰라도, 타밀족의 경제적인 영향력은 현대 인도에서 상당하다.
뿐만 아니라 개방적인 사회답게 촐라 제국에서는 여성의 권리도 높은 편이었다.
결혼은 일부일처제가 보통이었고, 여성에게도 상속권이 보장되어 있었으며,
인도에서 잘 알려진 악습이라 할 수 있는 사티도 이 동네에선 성행하지 않았다.
인도 환빠들에게 동남아시아 영유권 명분을 준 촐라 제국...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촐라 제국은 13세기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남인도의 새로운 패자로 판디아 왕조가 등장한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쇠퇴하는데,
라자라자 3세 집권 시절에는 카다바의 족장에게 왕이 인질로 잡히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후 판디아 왕조의 압박에 라젠드라 3세가 패배하면서 촐라 제국은 막을 내린다.
허나 촐라 제국의 후예들은 이후에도 남인도와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호족으로 군림했다.
그들은 남인도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일원이 되어 북인도의 이슬람 왕조들과 싸우기도 하고,
마젤란이 오기 전까지 필리핀 세부 섬을 통치하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페락 왕가의 라자 출란(1869~1933)
동남아에서는 촐라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이들은 대개 촐란 혹은 출란이라는 성씨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정체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믈라카 술탄국의 왕실도
촐라 제국의 황제가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자처할 정도라고 한다.
첫댓글 와 진짜 재밌다~! 흥미있게 잘봤어
우와 진짜 재밌게 잘 읽었어 말레이시아 왕족으로 이어져내려왔네!
존잼이다 ㅋㅋㅋ 살, 비야, 밥 이런 단어 비슷한 것도 신기해
존잼
너무 재밌다ㅜㅜ ㅋㅋㅋㅋㅋ 고마워 쌀 밥 이거진짜신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