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각보살장 삼관과 초수방편
원각경은 전체가 12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제11장이 원각보살장이다. 삼관은 위덕자재보살장에 있고, 변음보살장에도 있으며, 또한 이 원각보살장에도 있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이 원각장을 취하여 삼관을 말할까? 위덕자재장에 이르기를,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청정한 원각을 깨닫고자 하면 청정한 각심으로 적정을 취하고 수행할지니라.”(善男子 若諸菩薩悟淨圓覺 以淨覺心取靜爲行)라고 하니, 이는 보살의 분상이고, 중생은 그림의 떡이다. 중생은 청정한 각심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위덕자재장의 삼관은 보살만 있고, 중생은 없으며, 원각장의 삼관은 중생만 있고, 보살은 없다. 이 때문에 범부중생은 문수장을 의지하여 신문信門을 성취하고, 이 원각장의 삼관을 의지하고 수행해야 비로소 관문觀門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보안보살장의 신학보살新學菩薩 사마타행이 또한 초학자를 위한 관문이기 때문에 함께 공부하고자 한다. 이 글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1. 안거와 삼관의 교차
2. 삼관 중 첫째 사마타
3. 보안보살장의 사마타
4. 삼관 중 둘째 삼마발제
5. 삼관 중 셋째 선나
6. 삼관의 초수방편
7. 결어
1. 안거와 삼관의 교차
경문: “선남자여, 만일 저 말세에 수행하는 중생이 보살도를 구하려 세 가지 기한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는 그 들은 일체경계가 아니면 끝까지 취하지 말지니라.”(善男子 若彼末世修行衆生 求菩薩道入三期者 非彼所聞一切境界終不可取)
해설: 원각장은 안거와 삼관을 설했다. 위 글은 안거를 끝맺으며, 동시에 삼관의 구경을 남음이 없이 설파했다. 이는 곧 “그 들은 일체경계가 아니면 끝까지 취하지 말지니라.”(非彼所聞一切境界終不可取)라는 구절이 그러하다. “그 들은 바가 아니면 일체경계를 끝까지 취하지 말지니라.” 이 구절의 일체경계는 앞뒤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서 그 호오가 달라진다. 바로 선경계도 되고, 다시 악경계도 된다. 위 번역은 전자를 취했다.
함허설의: 이른바 “세 가지 기한에 들어가는 이”는 예컨대 내가 가르친 바, “먼저 삼칠일 예불하고 참회하며, 삼칠일을 지나도록 한결같이 일념을 섭수하면 곧 선경계를 만나서 마음의 경안을 얻으리라.”라고 한 것과 같으니, “그 들은 일체경계가 아니면 끝까지 취하지 말지니라.” 곧 “세 가지 기한에 들어가는 이”와 “그 들은 일체경계가 아니면”의 두 구절 사이에 위와 같은 허다한 뜻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바로 총괄하여 표기한 것이고, 아래는 곧 따로 배열한 것이다.(謂入三期者 如我所敎 先三七日禮佛懺悔 過三七日一向攝念 則遇善境界得心輕安 非彼所聞一切境界終不可取 卽知入三期者 與非彼所聞兩句之間 含如上許多意也 此則摠標 下乃別列也)
해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 수행은 반드시 삼매에 들어간 이후의 일이다. 곧 삼매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올바르게 수행할 수 없다. 수행 입문의 제일보는 바로 삼매이다. 경안輕安은 불교의 전문용어라 세간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리하다는 경리輕利와 편안하고 쾌적하다는 안적安適의 앞 글자를 취하여 경안이라 한다. 그 뜻만 취하면 가볍고 편안하니, 심신의 컨디션이 최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원각경의 경안은 범부 경계가 아닌 삼매의 별칭이다.
감산직지: 이는 실수를 방지하고자 제시한 것이다. “그 들은 바”라는 것은 곧 앞 장에서 “삼관을 홑으로 쌍으로 셋을 원융하여 스물다섯 가지 정륜定輪을 닦고, 그리고 육근과 육진 육식의 경계가 낱낱이 청정하다.”라는 등이니, 바로 정관正觀이다. 또 “그 들은 일체경계가 아니면 끝까지 취하지 말지니라.”라는 것은 마치 능엄경의 쉰 가지 음마陰魔와 기신론 중에 설한 마사魔事와 같으니, 모두 취해서는 안 된다. 이는 사도에 떨어지는 실수를 염려한 것이다. 처음 두 질문이 있었다. 하나는 안거를 물었고, 둘은 “세 가지 정관淨觀 중에 무엇을 첫째로 삼습니까?”라고 물었다. 위에서 안거를 답변하여 마쳤고, 다음은 초수방편을 답변한 것이다.(此示妨悞失也 所聞者 即上三觀單複圓修二十五輪 及根塵識界一一清淨等 乃正觀也 若非所聞一切境界皆不可取 如楞嚴五十重陰魔及起信論中所說魔事 皆不可取 恐墮邪誤也 初有二問 一問安居 二問三觀以何爲首 上答安居竟 下答初首方便)
2. 삼관 중 첫째 사마타
경문: “선남자여, 만일 모든 중생이 사마타를 닦고자 하면 먼저 지정至靜을 취하고 사념思念을 일으키지 말라. 적정이 지극하면 바로 깨닫느니라. 이와 같이 최초 적정이 일신에서부터 일세계에 이르나니, 청정각도 이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만일 청정각이 일세계에 편만한 이는 일세계 중에 어떤 중생이 한 생각 일으킴이 있는 것을 모두 알 수 있고, 백천 세계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그 들은 일체경계가 아니면 끝까지 취하지 말지니라.”(善男子 若諸衆生修奢摩他 先取至靜不起思念 靜極便覺 如是初靜從於一身至一世界 覺亦如是 善男子 若覺遍滿一世界者 一世界中有一衆生起一念者 皆悉能知 百千世界亦復如是 非彼所聞一切境界終不可取)
해설: 위 문단은 “적정이 지극하면 바로 깨닫느니라.”라는 구절을 기준하여 전후로 양분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주안점을 둔 곳은 전자 곧 범부중생의 입문이다. “만일 모든 중생이 사마타를 닦고자 하면 먼저 지정을 취하고 사념을 일으키지 말라.”(先取至靜不起思念) 지극히 적정하면 사념은 일어날 곳이 없다. 곧 사마타는 지극한 적정, 곧 지정뿐이다. 어떻게 지정에 이를 수 있을까? 이는 범부중생의 영원한 주제이다.
함허설의: 공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적정寂靜과 청정淸淨이라는 두 마디를 여의지 않는다. 적정이 지극하면 문득 청정하고, 청정이 지극하면 광명이 통달한다. 이른바 청정각은 사념을 여읜 지혜이기 때문이니, 곧 이른바 광명이다. 지혜는 명경과 같고, 사념은 먼지나 때와 같다. 명경이 만일 때가 있으면 비록 가까워도 나타나지 않고, 명경이 만일 때가 없으면 원근의 사물이 모두 나타난다. 지혜가 사념을 여의지 못하면 만나는 일마다 담장을 대면하는 것 같고, 지혜가 만일 사념을 여의면 만법을 모두 비춰준다. 몸은 지혜의 그림자이고, 국토도 또한 그러하다. 지혜가 청정하여 그림자인 몸을 밝게 하면 사사가 무애하기 때문이다. 정관靜觀의 묘용은 안에서 적정경안을 일으킴에 있다. 만일 이 경계가 아니면 곧 당연히 취해서는 안 된다.(功夫始終不離靜淨二字 靜極便淨 淨極光通達 所謂覺者離念之智也 卽所謂光也 智如明鏡念如塵垢 鏡若有垢雖近不現 鏡若無垢遠近皆現 智不離念觸事面墻 智若離念萬法俱照 身爲智影國土亦然 智淨影明事事無碍故也 靜觀之用在於內發寂靜輕安 若非是境卽不應取)
해설: 함허스님은 경문의 지정至靜을 적정寂靜과 청정淸淨으로 나누어 해석했다. 이를 계승하여 “적정이 지극하면 문득 청정하고, 청정이 지극하면 광명이 통달한다.”(靜極便淨 淨極光通達)라고 변용한 것이다. 전자의 원형은 “적정이 지극하면 문득 깨닫는다.”(靜極便覺)라는 것이다. 그러나 함허스님이 변용한 삼단논법은 매우 탁월하다. 이 원각경은 청정각상을 위시하여 시종 청정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적정이 시각이라면, 청정은 본각이고 구경각이다. “정관의 묘용은 안에서 적정경안을 일으킴에 있다.” 사마타의 귀결처는 어떻든 적정을 벗어나지 않는다. 적정이 지극한 곳이 바로 적정경안이다.
감산직지: 이는 삼관 중에 최우선인 공관空觀의 방편을 답변한 것이다. “사마타를 닦고자 하면 먼저 지정至靜을 취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지관의 지止를 전방편前方便으로 삼는 것이다. 지정이라 말한 것은 곧 천태대사의 삼지三止 중에 체진지體眞止이다. 이른바 정체定體가 진공에 계합하기 때문에 지정이라 이른 것이다. 일념도 생기지 않기 때문에 사념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고, 적정이 지극하면 광명이 생기기 때문에 문득 깨친다고 이른 것이다. “최초 적정이 일신에서부터 일세계에 이른다.”라는 것은 이른바 안에서는 몸과 마음을 벗어나고 밖에서는 세계를 보내버리면, 안팎이 평등하고 적연부동하여 신심과 세계가 탕연한 일공一空이니, 곧 일체와 더불어 융합하여 일심이 되고, 일체세계가 합하여 일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무릇 중생의 기심起心과 동념動念이 바로 자기 심중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니, 무릇 일념을 일으키면 분명히 알지 않음이 없다. 이른바 “청정이 지극하여 광명이 통달하고, 공적한 관조는 허공을 머금었도다. 되돌아와서 세간을 관찰해보건대, 또한 꿈속의 일만 같구나.”라는 것이니, 이는 공관의 극칙極則이다. 이와 같아야 비로소 정관正觀이라 일컫는다. 그 들은 바가 아니면 모두 취해서는 안 된다.(此答三觀初首先空觀方便也 言修奢摩他先取至靜者 以止爲前方便也 言至靜者 即天台三止中體眞止 謂體合眞空 故云至靜 一念不生 故不起思念 靜極光生 故云便覺 初從一身等者 謂內脫身心外遺世界 內外平等 寂然不動 以身心世界蕩然一空 則與一切融爲一心 一切世界合爲一界故 凡衆生起心動念 即從自心中現故 凡起一念 無不了知 所謂靜極光通達 寂照含虛空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此空觀之極則也 如此方名正觀 非彼所聞 皆不可取)
해설: 초수初首는 최초이고, 초수선初首先 삼자도 하나의 단어로, 초는 최초이고 수선은 최선最先이니, 이를 최우선最優先이라 번역했다. 강조하고자 세 글자를 함께 붙여놓은 것이다.
만공스님은 7일 동안 정좌하고 나서, 제자 보월스님한테 견후소각見後燒却의 도리를 답했다고 한다. 감산스님도 5일 동안 정좌한 다음에 “청정이 지극하여 광명이 통달하고, 공적한 관조는 허공을 머금었도다. 되돌아와서 세간을 관찰해보건대, 또한 꿈속의 일만 같구나.”(靜極光通達 寂照含虛空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라는 오도송을 읊었다. 되돌아왔다는 것은 삼매에 들었다가 일상으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각설하고, 경문으로 되돌아간다. “만일 모든 중생이 사마타를 닦고자 하면 먼저 지정을 취하고 사념을 일으키지 말라.”(若諸衆生修奢摩他 先取至靜不起思念) 사마타는 지止 또는 지적止寂이라 하고, 적정寂靜이나 정행靜行이라 하며, 또한 최초 삼매에 들어가는 방편이기 때문에 초수방편이라 말하기도 한다. 어떻든 수행인은 최우선으로 친근해야 할 법문이 사마타이다. 이를 원각경 보안장에 의거하여 그 관문을 더욱 넓고 깊게 확장하고자 한다. 아래와 같다.
3. 보안보살장의 사마타
경문: “선남자여, 저 신학보살과 말세중생이 여래의 청정한 원각묘심을 구하고자 하면, 응당 정념으로 모든 환화를 멀리 여의어야 하느니라.”(善男子 彼新學菩薩及末世衆生 欲求如來淨圓覺心 應當正念遠離諸幻)
해설: 사홍서원만 하면 말세중생도 또한 신학보살이 될 수 있다. 응당 정념으로 모든 환화를 멀리 여의기만 하면 바로 말세중생도 신학보살과 함께 여래의 청정한 원각묘심을 구할 수 있다.
함허설의: 멀리 유랑하던 나그네가 본국으로 나가고자 하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바른길을 구해야 하고, 습기習氣에 미혹한 무리가 원각을 증득하고자 하면 반드시 근원으로 돌아가는 요결을 알아야 한다. 이른바 정념이란 것은 바로 수행의 묘문이고, 환화를 여의는 정방향이며, 근원으로 돌아가는 요결이란 것이다. 이 정념이 아니면 수행을 일으킬 빌미가 없고, 마침내 환화를 여의고 증각證覺에 나아갈 기약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르기를, “여래의 청정한 원각묘심을 구하고자 하면 응당 정념으로 모든 환화를 멀리 여의어야 한다.”라고 하시니, 이른바 정념이고, 바로 이른바 정관이다.(遠遊之客欲向本國 要求還鄕之正路 迷習之輩欲證圓覺 須識還源之要術 所謂正念者 乃修行之妙門 離幻之正方 還源之要術者也 非此無由起修 終無離幻趣證之期也 所以云 欲求如來淨圓覺心 應當正念遠離諸幻 所謂正念 卽所謂正觀也)
감산직지: 이는 질문한 뜻을 총괄하여 답변한 것이다. 보안보살이 비록 수행의 점차와 사유 주지 등을 물었지만, 이 취지는 단지 환화를 여의는 초심방편일 따름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도 수행의 첩요捷要로 답변하시고, 오직 정념을 최초 착수하는 공부로 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르기를, “응당 정념으로”라고 하신 것이다. 이 정념이란 무념이다. 이 때문에 무릇 일어나는 마음과 동요하는 생각이 원각의 체상 중에 있고, 모두 환화이다. 그 대의는 일념불생一念不生에 있으니, 바로 모든 망념이 저절로 없어진다. 이 때문에 이르기를, “모든 환화를 멀리 여의어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이전에 이르기를, “갖가지 환화가 모두 여래의 원각묘심에서 나온다.”라고 하니, 이 때문에 반드시 사념을 여의면 바로 상응할 수 있다. 기신론에 이르기를, “사념을 여읜 경계는 오직 증득해야 상응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이를 최초방편으로 삼는 것이다.(此總答問意也 普眼雖問修行漸次思惟住持等 然主意 單問離幻初心方便 故佛答以修行捷要 只是以正念爲最初下手工夫 故云應當正念 然正念者 無念也 故凡起心動念 在圓覺體中 皆爲幻化 意在一念不生 則諸妄自滅 故云遠離諸幻 以前云種種幻化皆生如來圓覺妙心 故須離念乃得相應 論云 以離念境界唯證相應故 此以爲最初方便也)
경문: “먼저 여래의 사마타 정행靜行을 의지하되, 굳게 금계를 지키고, 대중처소에 편안하게 거처하며, 정실에서 연좌하라.”(先依如來奢摩他行 堅持禁戒安處徒衆宴坐靜室)
해설: 불교를 공부하고자 하면 용어와 친밀할 필요가 있다. 이 연좌宴坐는 국어사전에 “조용하게 앉아서 참선함”이라 한다. 연宴자는 잔치, 즐기다, 즐겁다, 안락하다, 편안하다 등의 뜻이 있다. 이를 의거하면, 즐겁게 앉는다, 앉기를 즐긴다, 편안하게 앉는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좌선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이를 연좌燕坐로 쓰는 곳도 있다. 두 개의 연좌와 좌선 안선安禪은 동의어이다.
함허설의: “먼저 여래의 사마타 정행을 의지한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무릇 수행은 삼학을 벗어나지 않는다. 계를 인하여 정을 내고, 정을 인하여 혜를 내니, 이는 배우는 차서이다. 정은 계가 아니면 이루지 못하고, 혜는 정이 아니면 일으키지 못한다. 이른바 정념은 곧 지혜이니, 이러한 생각을 하고 몸과 마음을 관찰하라는 것이 이것이다. 이른바 지계는 계이고, 연좌는 바로 정이니, 사마타 정행이 바로 이것이다. 정이 없이 관에 들어감은 진혜眞慧가 아니고, 계가 없이 정에 들어감은 진정眞定이 아니다. 만일 정념으로 관찰하고자 하면 먼저 반드시 정에 들어가야 하고, 만일 정에 들어가고자 하면 먼저 금계禁戒를 지켜야 하니, 계를 지키고 정에 들어감이 진실로 사마타 정행이라 이른다. 먼저 이 정행을 의지하고, 항상 이러한 생각을 하며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는 정념이라 하는 이유이다. 이와 같이 정념으로 관찰하고, 바야흐로 몸과 마음이 필경 체상이 없는 줄을 아니, 모든 환화를 멀리 여읠 수 있다. 이른바 “응당 정념으로 모든 환화를 멀리 여의어야 한다.”라는 것은 이는 총괄하여 표시한 것이다. 이른바 먼저 마땅히 정념으로 사유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모든 환화를 멀리 여읠 수 있는 것이다.(先依如來奢摩他行等者 大凡修行不出三學 因戒生定 因定生慧 此爲學之序也 定非戒而不成 慧非定而不發 所謂正念卽慧也 作念觀察是也 所謂持戒戒也 宴坐卽定也 奢摩他行是也 無定而入觀 非眞慧也 無戒而入定 非眞定也 若欲正念觀察 先須入定 若欲入定 先持禁戒 持戒入定 眞所謂奢摩他行也 先依此行 作念觀察 此所以爲正念也 如是正念觀察 方知身心 畢竟無體 而能遠離諸幻也 所謂應當正念遠離諸幻者 此摠標也 謂先當正念思惟然後 方能遠離諸幻也)
“먼저 여래의 사마타 정행을 의지하되,”에서부터 “항상 이러한 생각을 하라.”(先依如來奢摩他行 堅持禁戒安處徒衆 宴坐靜室恒作是念)에 이르기까지의 문단은 정념이라 하는 이유를 제시한 것이고, 또 “바로 알아야 하느니라. 이 몸은 필경 실체가 없지만”에서부터 “필경에는 반연한 마음도 찾아볼 수 없느니라.”(即知此身畢竟無體 ... 畢竟無有緣心可見)에 이르기까지는 환화를 여의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이른바 “먼저 여래의 사마타 정행을 의지하라.”라는 것은 먼저 반드시 계를 지키고 정에 들어가며, 진실로 사마타 정행을 수행한 연후에 이러한 생각을 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어찌 사마타를 앞세운 연후에 바야흐로 계를 지킨다거나, 혜를 앞세운 다음에 정에 들어간다거나, 정을 앞세운 다음에 계를 지켜야 한다고 이르겠는가. 이러한 이치는 없다.(先依奢摩他 至恒作是念等文 示所以正念也 卽知此身畢竟無體 至畢竟無有緣心可見 示所以離幻也 所謂先依者 先須持戒入定 行眞奢摩他行然後 作念觀察也 豈謂先奢摩他而後 方持戒也 先慧而次定 先定而次戒 無有是理也)
이른바 “굳게 금계를 지키고, 대중처소에 편안하게 거처하며, 정실에서 연좌하라.”라는 것은 바로 계를 지키고 정에 들어가는 것이니, 진실로 사마타 정행을 수행하는 것이다. 변음보살장에 이르기를, “마땅히 범행을 지니고 적정히 사유하라.”라고 하니, 범행은 계이고, 적정은 정이며, 사유는 혜이다. 바로 이는 이른바 “굳게 금계를 지키고, 정실에서 연좌하라.”라는 것이니, “항상 이 생각을 하고 몸과 마음을 관찰한다.”라는 뜻이다.(所謂堅持禁戒安處徒衆宴坐靜室 乃持戒入定 行眞奢摩他行也 辨音章云當持梵行寂靜思惟 梵行戒也 寂靜定也 思惟慧也 卽此所謂堅持禁戒 宴坐靜室 作念觀察之義也)
감산직지: 이는 사념을 여의는 방편을 제시한 것이다. 범어 사마타는 여기 말로 이르면 그칠 지止이다. 이 수행은 반드시 사마타 지止를 으뜸으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 중생은 한결같이 망상을 반연하는 마음으로 알고, 염념이 생멸하여 잠시도 멈출 때가 없다. 지금 일단 사념을 여의고자 하지만, 어찌 여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먼저 사마타 지를 닦는 정행을 최초공부로 삼고, 입선入禪의 방편으로 삼는 것이다. 말한 바 지관의 지止란 것은 무엇인가? 천태대사에 의거하면. 지止는 세 가지 지가 있다. 이른바 체진지體眞止와 방편수연지方便隨緣止 이변의 분별을 멎게 하는 지(息二邊分別止)이다. 이 세 가지 지를 선도자로 삼고, 연후에 공관과 가관 중관의 삼관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원각경의 지는 오직 체진지일 뿐이다. 만일 이 지를 닦고자 하면, 먼저 몸과 마음의 안팎을 동시에 내려놓고, 내려놓은 것도 또 내려놓으며, 내려놓되 내려놓을 것이 없는 곳에 이르면, 바로 모든 상념이 그만 없어지고 안팎이 일공一空이다. 이 공적한 곳을 여의지 않고 즉시 진심眞心에 체합體合할 수 있고, 망상이 생기지 않으면 바로 상념을 저절로 여읜다. 이 때문에 이 지를 정념으로 삼는 것이다. 만일 정념이 현전하면 곧 모든 망상이 갑자기 없어지니, 이 때문에 이르기를, “모든 환화를 멀리 여읜다.”라고 한 것이다. 이는 선에 들어가는 절요이니, 학자는 응당 알아야 한다. “금계를 굳게 지켜야 한다.”라는 것은 이는 바로 능엄경의 세 가지 점차이다. 먼저 네 가지 중계를 지키면 맑고 밝기가 빙상氷霜과 같으니, 이 때문에 굳게 지킨다고 이른 것이다. “정실에서 연좌하라.”라는 것은 수행인이 일향으로 동란動亂하는 경계 가운데 있으니, 좌선이 아니면 마음을 섭수할 수 없다. 이로써 증명한다. 이미 동작하지 않으면 곧 홑으로 체진지만을 닦을 뿐이다. 그러나 반드시 “대중처소에 편안하게 거처하라.”라는 것은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견해를 함께하고 수행을 함께함을 취하며, 의지할 뿐이니, 결택하여 수행인으로 하여금 쉽게 성취하게 하는 것이다.(此示離念之方便也 梵語奢摩他 此云止也 然修行必以止爲首者 以衆生向認妄想攀緣之心 念念生滅無暫停時 今欲一但離念 豈可得耶 故先修止行以爲最初工夫 爲入禪之方便也 所言止者 按天台止有三止 謂體眞止 方便隨緣止 息二邊分別止 以此三止爲前導 然後可入空假中之三觀 今經之止 但是體眞止也 若修此止 先將身心內外 一齊放下 放下又放下 放到無可放處 則諸想歇滅內外一空 即此空處 便能體合眞心 妄想不生 則念自離也 故以止爲正念 若正念現前 則諸妄頓滅 故云遠離諸幻 此爲入禪之切要 學者應知 堅持禁戒者 此正楞嚴三漸次 先持四重皎如氷霜 故曰堅持 宴坐靜室者 以行人向在動亂境中 非宴坐不能攝心 以此證之 既不動作 則單修體眞止耳 然必安處徒衆者 非要多人 但取同見同行爲依止 決擇使行易成耳)
경문: “항상 이러한 생각을 하라. ‘나의 지금 이 몸은 사대가 화합한 것이다. 이른바, 머리카락과 털 손톱 이빨, 피부와 살 근육 뼈, 뇌수 등의 더러운 색상은 모두 땅으로 돌아가고, 침과 눈물 고름 피, 타액 군침 담즙 정액 대소변 등은 모두 물로 돌아가며, 따뜻한 기운은 불로 돌아가고, 움직이는 것들은 바람으로 돌아간다. 사대가 각기 나누어지면 지금 허망한 이 몸은 어느 곳에 있는가?’ 바로 알아야 하느니라. 이 몸은 필경 실체가 없지만, 화합하여 형상이 이루어진 것이라 진실로 허깨비와 같으며, 네 가지 반연이 임시로 화합하여 거짓으로 육근이 있느니라.”(恒作是念 我今此身四大和合 所謂 髮毛爪齒皮肉筋骨髓腦垢色皆歸於地 唾涕膿血津液涎沫痰淚精氣大小便利皆歸於水 暖氣歸火 動轉歸風 四大各離今者妄身當在何處 即知此身畢竟無體 和合爲相實同幻化 四緣假合妄有六根)
감산직지: 이는 관觀에 들어가는 방편을 제시하고, 점차와 사유의 질문에 답변하시니, 먼저 가관을 현시한 것이다. 이 보안보살의 점차와 방편 사유의 질문은 대체로 문수장을 기인한다. 문수장에 이르기를, “무턱대고 사대를 자기 몸의 법상法相이라 인정하고, 육진의 연영緣影을 자기 마음의 진상眞相이라 한다.”라고 하고, 다시 이르기를, “이 몸과 마음이 공화인 줄을 알면 곧 윤회가 없다.”라고 하며, 또 보현장에 이르기를, “환화인 줄을 알면 곧 여의니, 방편을 지을 것이 없다”라고 하니, 이는 바로 돈오 돈증이다. 다만 중하의 근기는 돈입頓入할 수 없음을 두려워했고, 이 때문에 이러한 청원이 있는 것이다. 세존은 먼저 사마타 지止를 닦는 방번을 제시하고 전방편을 삼는 것이고, 이제 관觀에 들어가는 방편을 제시하고자 바로 사유의 질문에 답변하시며, 먼저 가관의 방편을 제시한 것이다. 처음 몸을 관하는 방편을 가르치시고, 차례로 분석하신 연후에 마음을 관하게 하시니, 이는 점차의 방편을 제시한 것이다. 이 관도 또한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공관과 가관 중관이다. 지금 능엄경의 여환如幻 삼마발제에 의거하면, 먼저 가관에서 공관에 들어가고, 다음 공관과 가관에서 중관에 들어감을 바로 제시하니, 마음을 닦는 점차를 바로 드러낸 것이다. 이는 먼저 몸을 환화와 같다고 관하니, 이 때문에 가관이다. 삼관은 일심을 원만하게 갖추고 있으니, 이 모두는 앞 보현장의 “환화인 줄을 알면 곧 여읜다.”라는 알 지知자 하나를 해석한 것이다.(此示入觀之方 以答漸次思惟之問 先示假觀也 今普眼漸次方便思惟之問 蓋因文殊章云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且云知是空華即無輪轉 又云知幻即離不作方便 是乃頓悟頓證 第恐中下根人不能頓入 故有此請 世尊先示修止爲前方便 今示入觀 正答思惟之問 先示假觀之方 初教觀身 次第分析 然後觀心 此示漸次之方也 然觀亦有三 謂空假中 今依楞嚴如幻三摩提 乃示先從假入空 次從空假入中 正顯修心之漸次 此先觀身如幻 故爲假觀 三觀圓具一心 總釋前知幻即離一知字)
경문: “육근과 사대가 안과 밖에서 합하여 이루어지면 거짓으로 반연한 기운이 있고, 그 가운데 쌓여서 모이면 반연한 형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니, 가명으로 마음이라 하느니라.”(六根四大中外合成妄有緣氣 於中積聚似有緣相 假名爲心)
감산직지: 이는 관심의 방편을 제시한 것이다. 육근은 안이 되고, 사대는 밖이 되며, 곧 육진을 이루는 것이고, 육근과 육진이 화합하여 육식이 그 가운데서 생기니, 이 때문에 “합하여 이루어졌다.”라고 말한 것이다. “거짓으로 반연한 기운이 있고” 이하는 마음이 가상임을 보인 것이다. 이른바 앞에 나타난 마음은 바로 망상일 따름이고 진심이 아니다. 어떻게 이를 아는가? 이 육식은 전오진을 반연하여 소멸하는 잔영이고, 그 반연한 기운이 모이고 쌓이면 임시로 가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바로 망상의 그림자이며, 가명으로 마음이라 한다. 중생이 나날이 쓰지만, 단지 이 가상의 잔영을 마음이라 알고 있을 따름이다. 이제 이 마음을 살펴보건대 육진을 여의면 실체가 없다. 만일 가상을 진심이라 여기지 않기만 하면 곧 망상이 저절로 소멸하고, 바로 망상이 소멸하는 곳에 진심을 구하지 않아도 진심이 저절로 돌아온다. 이 때문에 가관假觀의 방편이 되는 것이다.(此示觀心之方便也 六根爲內 四大爲外 即所造六塵 以根塵和合 識生其中 故云合成 妄有下 示心假也 謂現前之心 乃妄想耳 非眞心也 何以知之 以是六識攀緣前五塵落謝影子 以緣氣聚積似有假相 乃是妄想影子 假名爲心 以衆生日用 但認此假影爲心耳 今觀此心離塵無體 苟不認假爲眞 則妄想自消 即妄想消處 不求眞而眞自復 故爲假觀之方便也)
경문: 선남자여, 이 허망한 마음은 만일 육진이 없으면 곧 남아 있을 수 없고, 사대를 나누고 쪼개도 육진을 얻을 수 없느니라. 이 가운데 반연한 육진이 제각기 흩어져 없어지게 되면 필경에는 반연한 마음도 찾아볼 수 없느니라.”(善男子 此虛妄心若無六塵則不能有 四大分解無塵可得 於中緣塵各歸散滅 畢竟無有緣心可見)
감산직지: 이는 가관이 공력을 성취함을 제시한 것이다. 앞 장에서 이르기를, “무턱대고 사대를 자기 몸의 법상이라 인정하고, 육진의 연영을 자기 마음의 진상이라 한다.”라고 하니, 만일 단지 “환화인 줄을 알면 곧 여읜다.”라고 하면. 갑자기 여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먼저 이 몸의 사대는 가상임을 관하게 하면, 제각기 흩어져 그 본처로 돌아간다. 안의 육근이 이미 없어지면 곧 밖에도 또한 대대할 육진이 없다. 육근과 육진이 이미 사라지면 바로 연영의 마음도 또한 없어지니, 이러한 마음도 또한 가상이다.(此示假觀之成功也 前云 妄認六塵緣影爲自心相 若但知幻即離 不能頓離 故教先觀此身四大是假 各歸散滅 內根既無 則外亦無塵可對 根塵既消 則緣心亦滅 此心亦假也)
해설: 범부중생은 “무턱대고 사대를 자기 몸의 법상이라 인정하고, 육진의 연영을 자기 마음의 진상이라 한다.”라는 강력한 국집이 있다. 이 국집이 있는 한, “환화인 줄을 알면 곧 여읜다.”라는 일승법문이 귀에 들어와도, 갑자기 여읠 수는 없다. 단지는 만일의 가정을 더욱 강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경문: “선남자여, 저기 중생은 환신幻身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심幻心도 또한 없어지고, 환심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진幻塵도 또한 없어지며, 환진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멸幻滅도 또한 없어지고, 환멸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화가 아니면 없어지지 않느니라. 비유하면 거울을 갈아서 때가 다 없어지면 밝게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응당 몸과 마음은 모두 환화나 때와 같은 줄 알라. 때의 형상이 영원히 없어지면 시방세계가 청정하느니라.”(善男子 彼之衆生幻身滅故幻心亦滅 幻心滅故幻塵亦滅 幻塵滅故幻滅亦滅 幻滅滅故非幻不滅 譬如磨鏡垢盡明現 善男子 當知身心皆爲幻垢 垢相永滅十方清淨)
해설: 여기 중생은 범부이지만, 저기 중생은 이미 범부가 아니다. 보리살타는 각유정이라 번역하는데, 정각중생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십일지 등각위도 또한 중생이라 말할 수 있다. 원각경의 기본 취지가 그러하다.
함허설의: 원각을 증득하고자 하는 이로 하여금 몸과 마음이 환화의 때인 줄을 알게 하면, 아울러 환진幻塵이 모두 없어지고, 이 진멸塵滅도 또 없어지며, 다시 더욱 없어질 것도 없으니, 환화가 아닌 각성은 본래 환화를 따라 생기지 않으며, 이 때문에 또한 환화를 좇아서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르기를, “환멸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화가 아니면 없어지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비유하면 거울을 갈아서 때가 다 없어지면 밝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라는 것은 대체로 온 시방세계의 성인과 범부, 의보와 정보, 자기와 타인, 몸과 마음 등이 모두 원각에서 환화의 때가 되니, 바로 먼지가 거울의 조명을 가려서 나타날 수 없게 하는 것과 같다. 지금 정념으로 관찰하고, 환화인 줄을 알면 바로 여의기 때문에 때의 형상이 영원히 없어지면 시방세계가 청정하다. 마치 저 고경古鏡에 때가 다 없어져 밝게 나타나면 비춰줌에 장애가 없음과 같다. 그래서 이르기를, “응당 몸과 마음은 모두 환화나 때와 같은 줄 알라. 때의 형상이 영원히 없어지면 시방세계가 청정하다.”라고 한 것이다.(令求證圓覺之者 了身心爲幻垢 幷幻塵而悉滅 此滅復滅 無復更滅 非幻之覺性 本不隨幻生 故亦不逐幻滅 所以云 幻滅滅故非幻不滅 比如磨鏡等者 蓋盡十方界 聖凡依正 自他身心 皆於圓覺而爲幻垢 正如塵覆鏡明令不得現也 今正念觀察 知幻卽離故 垢相永滅十方淸淨 如彼古鏡垢盡明現而無障碍也 所以云 當知身心 皆爲幻垢 垢相永滅 十方淸淨)
감산직지: 이는 가관에서 공관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른바 육근과 육진 육식의 세 경계를 관조하여 모두 이미 소멸하고, 이 소관所觀이 이미 공적하면 곧 능관能觀도 또한 없어진다. 이 때문에 “환멸幻滅도 또한 없어진다.”라고 한 것이다. 앞 문수장에서 “허공과 같은 줄 아는 것도 곧 공화상이다.”라고 하니, 이 때문에 관조도 또한 성립하지 못한다. 이는 곧 능관과 소관 양쪽이 모두 다하고, 대대가 바로 끊어지며, 오직 하나의 원명하고 청정한 진심만 있을 따름이다. 이 때문에 이르기를, “환화가 아니면 없어지지 않는다.”라고 하니, 각심은 동요하지 않는다. 청정은 바로 공空의 이명異名이다. 이 때문에 공관을 거울에 비유하여 이른 것이니, 알 만하다. 이는 공관과 가관에서 중도에 들어가는 것이다. 첫째 문수장에서 이르기를, “모두 청정한 각상을 원조함에 의지한다.”라고 하니, 단지 일심일 따름이다. 이 때문에 중도라 일컫는다.(此示從假入空觀也 謂以觀照根塵識三 俱已消滅 然所觀既空 則能觀亦泯 故云幻滅亦滅 以前云知虛空者即空華相 故觀照亦不立 此則能所兩忘 對待斯絕 唯一圓明清淨眞心 故云非幻不滅 覺心不動 清淨乃空之異名 故云空觀鏡喻可知 此從空假以入中道也 初云皆依圓照清淨覺相 但是一心 故名中道)
해설: 신학보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망상 속에 살고 있는 범부중생일지라도 일단 사홍서원만 일으키면 바로 신학보살의 자격이 있다. 이 신학보살은 청정한 각심이 없기 때문에 위덕자재보살장의 삼관을 닦을 수 없다.
내가 “허공을 아는 것도 곧 공화상이다.”(知虛空者即空華相)라고 번역하지 않고, 어째서 “허공과 같은 줄 아는 것도 곧 공화상이다.”라고 의역하고 있는가? 금강경만 사구게가 있는 것이 아니다. 원각경도 무수한 사구게가 있다. “저 본각을 아는 것도 또한 허공과 같고, 허공과 같은 줄 아는 것도 곧 공화상이다.”(彼知覺者 猶如虛空 知虛空者 即空花相) 전후 문맥의 흐름을 보면 위 해석이 자연스럽지 않는가?
4. 삼관 중 둘째 삼마발제
경문: “선남자여, 만일 모든 중생이 삼마발제를 닦고자 하면 먼저 마땅히 시방여래와 시방세계의 일체보살이 갖가지 문에 의지하고, 점차 수행하고 부지런히 애써서 얻은 삼매를 회상하며, 대원을 널리 일으키고 스스로 훈습하여 부처종자를 이룰지니라. 그 들은 일체경계가 아니면 끝까지 취하지 말지니라.”(善男子 若諸衆生 修三摩鉢提 先當憶想 十方如來 十方世界 一切菩薩 依種種門 漸次修行 勤苦三昧 廣發大願 自熏成種 非彼所聞 一切境界 終不可取)
해설: 삼마발제는 의역하면 등지等至이니, 혼침과 도거掉擧를 멀리 여의기 때문에 등等이라 하고, 마음을 평등 안화하게 하기 때문에 지至라 한다. 혼침을 여의기 때문에 성성하고, 도거를 여의기 때문에 적적하다. 성성적적을 정혜등지라 한다.
함허설의: 갖가지 문은 곧 스스로 수행하고 남을 교화하는 갖가지 수행문이다. 삼매를 부지런히 애쓰는 것은 두 가지 이행利行을 의거하고, 부지런히 애쓰다 넘어지며 닦아서 얻은 삼매이다. 환관을 닦는 이는 마땅히 제불보살이 이와 같이 수행하여 얻은 삼매를 생각하고, 이 원을 세우고 말하기를, “나도 또한 그와 같이 수습하여 삼매를 성취하겠노라.”라고 하며, 이와 같이 염원을 일으키면 “스스로 훈습하여 부처종자를 성취한다.” 환관의 묘용은 안에서 대비경안을 일으킴에 있다. 만일 이 경계가 아니면 곧 마땅히 취해서는 안 된다.(種種門 則自行化他種種行門也 勤苦三昧 依二利行勤修苦倒所得三昧也 修幻觀者 當念佛菩薩如是修行所得三昧 作是願言 我亦如彼修習以成三昧 如是作念 自熏成種 幻觀之用在於內發大悲輕安 若非是境 卽不應取)
감산직지: 이는 삼마발제로 가관 방편을 제시한 것이다. 삼마발제는 그 경계가 환관에 상당한다. “시방여래와 일체보살이 갖가지 문에 의지하고, 점차 수행하고 부지런히 애써서 얻은 삼매를 회상한다.”라는 것은 이른바 제불과 보살이 인지 중에 갖가지 난행과 고행을 닦고 모든 중생을 제도했음을 사유하는 것이다. 삼매 중에 여환관을 일으키고, 자기 몸과 마음으로 그 경계를 스스로 경험하며, 안에서는 그 마음으로 갖가지 경계의 모든 경험이 환화와 같은가를 징험한다. 이 환관으로 중생을 제도할 대원을 일으키고, 오랫동안 훈습하여 부처종자를 성취하며, 오래도록 순숙하면 곧바로 안에서 대비경안을 일으키고, 보살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묘행을 일으킬 수 있다. 이른바 환화와 같은 관으로 환화와 같은 중생을 개시하고, 환화와 같은 불사를 짓는 것이다. 이는 바로 삼마발제이고, 여환을 초수로 삼는다. 저 들은 바가 아니면 끝까지 취해서는 안 된다.(此示三摩鉢提假觀方便也 三摩鉢提義當幻觀 言憶想十方如來一切菩薩種種修行勤苦三昧者 謂思惟諸佛菩薩因中 修種種難行苦行度諸衆生 於三昧中起如幻觀 以己身心自歷其境 內驗其心種種境界備歷如幻 以此幻觀發度生願 久熏成種久久純熟 便能內發大悲輕安 而起菩薩利生妙行 所謂以如幻觀而開幻衆 作如幻佛事也 此則三摩鉢提 以如幻爲首也 非彼所聞 終不可取)
5. 삼관 중 셋째 선나
경문: “선남자여, 만일 모든 중생이 선나를 닦고자 하면 먼저 수문數門을 취하고, 심중에 생주이멸하는 사념을 나란히 배열한 수를 인식하는 것처럼 분명히 알지니라. 이와 같이 두루 미치면, 사위의 중에 분별하는 생각의 수를 분명히 알지 않음이 없느니라. 점차 증진시켜 더 나아가면 백천 세계의 한 물방울의 비까지 알 수 있고, 또한 수용하는 만물을 눈으로 보는 것 같으니라. 들은 그 일체경계가 아니면 끝까지 취하지 말지니라.”(善男子 若諸衆生修於禪那先取數門 心中了知生住滅念分齊頭數 如是周遍 四威儀中分別念數無不了知 漸次增進乃至得知百千世界一滴之雨 猶如目覩所受用物 非彼所聞一切境界終不可取)
해설: 선나는 의역하면 정려靜慮이다. 정靜은 정定이고, 려慮는 혜慧이니, 바로 정혜이다. 분제分齊는 한계나 차별을 뜻하고, 두수頭數는 짐승의 수효를 말한다. 분제두수를 이와 같이 양분하면 뜻이 통하지 않는다. 제두齊頭에 가지런하게 하다, 나란히 배열하다는 뜻이 있고, 이에 제두수齊頭數는 일정 단위의 수, 또는 정수整數라 말하기도 한다. 분分을 분별하다, 분간하다, 구분하다 등의 뜻으로 대입하면, 분제두수는 일정 단위의 수로 나란히 배열하여 인식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정수는 1 2 3 4 5 6 등의 수를 말한다. 심중에 생주이멸하는 사념을 숫자를 세어나가는 것처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는 사마타관이 이루어진 뒤의 경계이다.
이 선나의 수문은 사마타의 정관과 함께 초수방편을 대표한다. 이 수문을 감산스님이 자세히 천명했다. 범부중생의 입장에서는 사마타 정관보다 오히려 선나 수문이 더 앞선 초소방편이 될 수도 있다.
함허설의: 마음은 본래 원명하여 그 광명이 법계를 꿰뚫어보지만, 상념이 장애하기 때문에 그 묘용을 얻지 못한다. 비록 정관靜觀을 닦아도 정상靜想이 오히려 남아있고, 설령 환관幻觀을 닦아도 환상幻想이 또한 여전히 없어지지 않으니, 반드시 적관寂觀을 의지하여 그 정상이나 환상을 없애야 한다. 예컨대 해가 중천에서 어두운 곳마다 비춰주지 않음이 없고, 감춰진 곳마다 비춰주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또 마치 현명한 군주가 이미 도둑의 무리를 다스리는 것과 같다. 또한 도둑의 두목이 몰래 숨어있는 곳을 알아내고, 그들로 하여금 은신하지 못하게 하면 바로 다시는 모략을 꾸미고 반란을 일으킬 기약이 없는 것과 같다. 도리어 충신이 되어 좌우에서 보필하면 나라가 바야흐로 다스려져 태평하고 영원히 근심걱정이 없으며, 안팎과 원근이 모두 일인에 귀속되고, 일체 모든 일을 군주가 공지共知하는 바이다. 적관도 또한 그러하다. 수습하여 공력을 성취하고 관지觀智가 분명하면 안의 근신根身과 밖의 기계器界가 모두 지혜경계가 되고, 거칠고 미세한 상념의 형상을 분명히 알지 않음이 없으며, 천차만별의 일체법을 모두 다 알 수 있다. 적관의 묘용은 안에서 적멸경안을 일으킴에 있으니, 만일 이 경계가 아니면 곧 마땅히 취해서는 안 된다.(心本圓明光透法界 爲想所碍不得其用 雖修靜觀靜想猶存 雖修幻觀幻亦未忘 須依寂觀以滅其想 如日中天無幽不燭無遠不照 又如明主旣治賊徒 又知賊主窩盤之處令不得隱 則更無興謀作亂之期 反爲忠臣而爲左右 國方淸泰永無憂慮 中外遠近皆屬一人 所有諸事君所共知 寂觀亦然 修習功成觀智分明 根身器界通爲智境 麤細念相無不了知 差別萬法皆悉得知 寂觀之用在於內發寂滅輕安 若非是境卽不應取)
감산직지: 이는 적관의 초수방편을 현시한 것이다. 선나는 그 경계가 중도일심에 상당하니, 이름을 적관이라 한다. “먼저 수문을 취한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입선하는 최초 공부이기 때문이고, 수선하는 사람이 한결같이 마음에 난잡한 생각이 많으면 적정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니, 먼저 수문을 초수방편으로 삼는 것이다. 이른바 처음 마음을 섭수하고, 먼저 한숨에 돌아가며, 숨의 출입에 의지하고, 헤아려 숨의 출입을 세는 것이다. 하나에서 열에 이르고, 또 열에서 하나에 이르는 것이니, 이와 같이 왕복하라. 숨과 숨이 끊어짐이 없고, 마음 마음이 어둡지 않는다. 생멸하는 숨의 수가 낱낱이 분명하고, 적음에서 많음에 이르기까지 선정력의 심천을 증험한다. 만일 구구하여 순숙하면 숨의 수가 일념불생에 이르고, 그러면 그 숨이 저절로 끊어지며, 적연한 일심이 담연히 안주하니, 이는 정상定相이다. 이와 같이 두루 미치면 사위의 중에 염념을 분명히 알고, 구구하면 백천 세계가 오직 마음이 나타나는 것뿐이다. 나아가 한 물방울의 비까지 분명히 알 수 있으니, 마치 눈으로 만물을 보는 것과 같다. 이는 적정관이 공력을 성취한 것이다. 저 기신론에서 말한 바, “지관을 닦는 자는 기식을 의지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그 기신론은 안에 몸과 마음을 벗어남을 관건으로 삼는 것이고, 여기서 숨을 의지한다는 것은 초기初機가 마음을 섭수함을 방편으로 삼는 것이다. 구경은 숨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숨을 증득으로 삼는다면 곧 사도에 떨어지니, 그 들은 바가 아니다.(此示寂觀方便初首也 禪那義當中道一心 名爲寂觀 言先取數門者 正入禪最初工夫也 以修禪人一向心多雜亂 難得寂靜故 先以數門爲首 謂初攝心 先歸一息 依息出入 爲度數之 從一至十 又從十至一 如此往復 息息不斷 心心不昧 生滅頭數 一一分明 自少至多 以驗定力淺深 若久久純熟 數到一念不生 則其息自斷 寂然一心 湛然安住 是爲定相 如此周遍 四威儀中 念念了知 久則百千世界唯心所現 乃至一滴之雨分明了知 如目覩物 此寂靜觀之成功也 如起信所說 修止觀者 不依氣息 彼以內脫身心爲要 此依之者 以初機攝心爲方便 非究竟依之也 若以息爲得 則墮邪道 非彼所聞也)
해설: 초수방편은 초학자가 수행문에 처음 들어가는 방편을 말한다. 호흡법 중에 수식관이 있다. 위 글을 따라가며 설명하겠다. “이른바 처음 마음을 섭수하고,” 이는 입선하기 이전 몸과 마음의 기본자세를 갖추라는 것이다. “먼저 한숨에 돌아가며,” 이는 이 수문의 구경이다. 한숨 곧 일식一息은 무식無息이니, 일념이 무념인 것과 같다. 먼저 돌아갈 본향本鄕을 밝힌 것이다. “숨의 출입에 의지하고,” 이는 수문의 첫째 절차이다. 출입은 호흡이다.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쉰다.
텔레비전에서 동물의 세계를 보면, 북극의 경우 한겨울을 얼음 속에서 동면하는, 아니 가사상태로 보내는 개구리가 있다. 얼음이 녹으면 전신을 꿈틀거리며 다시 살아난다. 축생도 일식무식의 경지를 체험하는데, 하물며 어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불가능할까? 하지 안해서 그러할 뿐이고,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비록 축생일지라도, 생명의 생존은 위대하다. 삼가 경의를 표한다.
“헤아려 숨의 출입을 세는 것이다. 하나에서 열에 이르고, 또 열에서 하나에 이르는 것이니, 이와 같이 왕복하라.” 이는 수문의 수행 방편이니, 바로 경문 중에 분제두수를 말하며, 곧 “심중에 생주이멸하는 사념을 나란히 배열한 수를 인식하는 것처럼 분명히 알라.”(心中了知 生住滅念 分齊頭數)라는 것이 이러하다. 숨의 수를 셀 때는 내쉬는 숨을 기준한다.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숨을 하복부에 이르도록 들이쉬고, 잠깐 그 상태로 멈추었다가, 다시 천천히 내쉬면서 숫자 하나를 세는 것이다. 생각은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을 따르는 것이 좋다. 이를 수식관隨息觀이라 말하기도 한다. 숨의 수를 세는 관은 수식관數息觀이다. 2개 수식관을 함께 수행한다. 반드시 하나 둘 셋의 1 2 3 4 5 6 7 8 9 10 9 8 7 6 5 4 3 2 1 2 3 등의 차례를 따르되, 도중에 세는 수를 잊어버렸을 때는 지체하지 말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하나부터 시작하는 것이 요결이다.
“숨과 숨이 끊어짐이 없고,” 이는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지극히 고요한 경계를 말한다. 그리고 또한 그 경계를 알아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음 마음이 어둡지 않는다.” 이는 숨과 숨, 그리고 마음과 마음이 일치하여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숨을 분명하게 알아보는 것이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다.
“생멸하는 숨의 수가 낱낱이 분명하고, 적음에서 많음에 이르기까지 선정력의 심천을 증험한다.” 이는 정상호흡을 초월한다. 정상호흡의 일반 정의는 이러하다. “흡기와 호기의 주기적 교대가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심신이 편안하게 쉬고 있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관찰되는 호흡의 유형이다. 동맥에 흐르는 혈액 속의 이산화탄소 분압이 적절하게 유지되어 일어난다.” 1분에 숨이 12번에서 20번의 범위를 정상호흡이라 한다. 어린이는 20번 안이면 정상이고, 노인은 12번 이상이면 정상이다. “적음에서 많음에 이르기까지”는 분당 숨이 열두 번 이하로 내려가서 한 번에 이를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시간당 그러할 수도 있다. 이를 “선정력의 심천을 증험한다.”라고 한 것이다.
“만일 구구하여 순숙하면 숨의 수가 일념불생에 이르고, 그러면 그 숨이 저절로 끊어지며, 적연한 일심이 담연히 안주하니, 이는 정상定相이다.” 이는 삼매를 증득한 경계이다. 일념불생이 곧 무념이다. 일념이 무념이다. “그러면 그 숨이 저절로 끊어지며,” 이는 일식이고 또한 바로 무식이다. “적연한 일심이 담연히 안주하니,” 이는 상각常覺이다. 적연은 적정이고, 담연은 청정이다. 곧 성성적적이다. 상주하고 불변하는 현상을 정상이라 한다. 정상의 극칙 곧 구경은 열반상涅槃相이고, 입문은 입정상入定相이다. 이 정상은 선나관의 체상이다.
“이와 같이 두루 미치면 사위의 중에 염념을 분명히 알고, 구구하면 백천 세계가 오직 마음이 나타나는 것뿐이다. 나아가 한 물방울의 비까지 분명히 알 수 있으니, 마치 눈으로 만물을 보는 것과 같다. 이는 적정관이 공력을 성취한 것이다.” 이는 선나관의 묘용이고, 이 관을 성취한 이후의 일이다. 범부중생의 분상이 아니다.
“저 기신론에서 말한 바, ‘지관을 닦는 자는 기식을 의지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이는 원각경의 수문과 기신론의 기식을 비교하는 것이다. “그 기신론은 안에 몸과 마음을 벗어남을 관건으로 삼는 것이고, 여기서 숨을 의지한다는 것은 초기初機가 마음을 섭수함을 방편으로 삼는 것이다.” 이는 차별상이 곧 차별상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하나는 숨을 의지하지 않고, 또 하나는 숨을 의지하는 차별이 있다. 그러나 그 용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차별이 있지만, 또한 차별이 없다.
“구경은 숨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숨을 증득으로 삼는다면 곧 사도에 떨어지니, 그 들은 바가 아니다.” 이는 숨을 의지하는 경계를 밝힌 것이다. 구경은 구경사이고, 증득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그 들은 바가 아니다.” 이는 불법에는 “숨을 증득으로 삼는” 법문은 없다는 뜻이다. 위에서 말한 기신론의 지관은 아래와 같다.
“만일 지관의 지를 닦는 자라면 정처에 머무르고, 단정히 앉아 그 뜻을 바르게 하며, 기식에 의지하지 않고, 형색에 의지하지 않으며, 허공에 의지하지 않고, 지수화풍에 의지하지 않으며, 내지 견문각지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일체 모든 생각을 일념에 따라 모두 제거하고, 또한 제거한다는 생각도 차견한다. 일체법이 본래 체상이 없기 때문에 염념이 불생이고, 염념이 불멸이다. 또한 마음이 외념경계를 따른 이후에는 마음으로 마음을 제거하지 못한다. 마음이 만일 재빨리 흩어지면 곧 응당 섭수하고 정념에 머무르게 하며, 이 정념이란 것은 응당 오직 마음뿐인 줄을 알아야 한다. 밖에 경계가 없으면 바로 다시 이 마음도 또한 자상이 없으니, 염념에 얻을 수 없다.”(若修止者 住於靜處 端坐正意 不依氣息 不依形色 不依於空 不依地水火風 乃至不依見聞覺知 一切諸想隨念皆除 亦遣除想 以一切法本來無相 念念不生 念念不滅 亦不得隨心外念境界後以心除心 心若馳散 即當攝來住於正念 是正念者 當知唯心 無外境界 即復此心亦無自相 念念不可得)
또한 마음이 외념경계를 따른 이후에는 마음으로 마음을 제거하지 못한다.(亦不得隨心外念境界後以心除心) 여기서도 용어의 설명이 필요하다. 외념경계外念境界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외념경계를 하나의 용어로 놓아두고 다시는 해체하지 말라. 마음은 능관이고, 외념경계는 소관이다. 바로 ‘일념 밖의 경계’이다. 차서가 이러하다. 첫째 “염념이 불생이고, 염념이 불멸이다.” 이는 일념이고, 무념이다. 이 경계가 아니면 외념경계라 한다. 둘째 “밖에 경계가 없으면 바로 다시 이 마음도 또한 자상이 없으니, 염념에 얻을 수 없다.” 이는 이르고자 하는 구경이다. 마음으로 마음을 제거한 경계이다. 이 구경에 이르고자 하면 반드시 “마음으로 마음을 제거해야 한다.”(以心除心) 마음과 마음은 능관과 소관을 말한다. 그런데 만일 “마음이 외념경계를 따르면” 어떠할까? 당연히 마음으로 마음을 제거할 수 없게 된다. 그 뜻이 난해하지만, 그 경계가 이와 같다. 이는 내가 고심한 결과물이다.
6. 삼관의 초수방편
경문: “이는 삼관의 초수방편이라 일컫느니라.”(是名三觀初首方便)
함허설의: 앞 위덕보살장의 삼관은 이미 이 분을 천명했고, 이 원각보살장 중에 천명하는 것은 앞 장보다 더욱더 천명하여 간곡히 중하의 근기를 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우인은 불음佛音을 들어도 상세히 설명해야 바로 알아듣는다. 그렇지 않으면 곧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前之三觀已是分明 此中所明益明於前 曲爲中下故也 蓋愚人聽命詳說乃解 不然則不能解也)
감산직지: 이는 삼관의 이름을 끝맺는 것이다. 앞 장에서는 세 가지 정관淨觀 중에 무엇을 첫째로 삼는가를 질문했기 때문에 모조리 답변하여 마쳤고, 이 장에서는 그 지남指南을 끝맺은 것이다. 이로써 알아야 한다. 앞 장의 스물다섯 가지 정륜은 단지 관상觀相만을 설했을 뿐이지만, 이 세 가지 방편은 바로 최초 착수하는 공부이다. 곧 능엄경에 스물다섯 성인이 낱낱이 모두 최초 착수하는 공부를 설하신 것이 바로 이 경계이다.(此結名也 前問三種淨觀以何爲首故具答已 於此結指 是知 前二十五輪但說觀相 此三方便乃最初下手工夫 即楞嚴二十五聖一一皆說最初下手工功夫 即此義也)
경문: “만일 모든 중생이 세 가지 지관을 두루 닦고 부지런히 정진하면 바로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고 일컫느니라.”(若諸衆生遍修三種勤行精進 即名如來出現于世)
함허설의: 삼관을 모두 닦으면 곧 일체종지를 성취하고, 만덕의 체상을 구족하니 이름을 부처님의 출현이라 한다.(三觀備修則成種智 萬德體具名爲佛出)
감산직지: 이는 삼관의 효험을 제시한 것이다. 이 삼관은 바로 일체여래의 본기 인지이며, 이 때문에 어떤 원근중생은 삼관을 두루 닦을 수 있는 것이니, “바로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고 일컫느니라.” 필경 성취함에 장애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이 승익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수행하기를 권한 것이다.(此示三觀之益也 以此三觀乃一切如來本起因地 故有圓根衆生能徧修三觀者 即名如來出現於世 言畢竟成就無礙也 有此勝益故勸應修)
해설: 승익은 수승한 효험을 말한다. 삼관을 두루 닦을 수 있는 원근중생은 변음보살장의 스물다섯 가지 정륜 중에 마지막 원관圓觀을 원수圓修할 수 있다. “만일 모든 보살이 원각의 지혜로 일체에 원만히 계합하고, 모든 체성과 체상에서 각성을 여읨이 없다면, 이 보살의 그 인행을 ‘세 가지 자성을 원수하여 청정을 수순하는 것’이라 일컫느니라.”(若諸菩薩以圓覺慧圓合一切 於諸性相無離覺性 此菩薩者名爲圓修三種自性清淨隨順) 차보살자此菩薩者의 자者자는 앞 가정문 전체를 이어받고 있다. 만일 이를 허사로 보면, 차보살자가 주어가 되지 못한다. 뜻이 상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문: “만일 이후 말세에 둔근중생이 심중에 불도를 구하고자 해도 성취할 수 없다면 전생의 업장 때문이니라. 마땅히 부지런히 참회하고, 항상 희망을 일으키며, 먼저 증애와 질투 아첨을 끊고, 무상최승無上最勝의 마음을 구하여야 하느니라. 세 가지 정관淨觀에서 일사만 따라서 배우고, 이 관에서 얻지 못하면 다시 저 관을 익히며, 마음을 놓아버리지 말고 점차 증각을 구할지니라.”(若後末世鈍根衆生 心欲求道不得成就 由昔業障 當勤懺悔常起希望 (先斷憎愛嫉妬諂曲 求勝上心 三種淨觀隨學一事 此觀不得復習彼觀 心不放捨漸次求證)
함허설의: 둔근은 부지런하지 않으면 공력을 이룰 수 없으니, 먼저 반드시 죄업을 참회하여 장애를 끊고, 다음에 바로 힘을 따라 서로 익히며, 정진에 태만하지 말고 증입을 구해야 한다.(鈍根不勤功不得成 先須懺罪斷障 後乃隨力互習 精進無怠以求證入)
감산직지: 이는 둔근 곧 업장이 두터운 중생을 말하니, 마땅히 참회하여 업장을 끊는 것을 관건으로 삼아야 한다. 전생의 업장 때문이란 것은 바로 숙습의 종자이다. 지금 수행할 때 훈발하여진 현행이 도연을 장애한다. 이른바 “올바르고자 하지만 진실로 사특하고, 청결하고자 하지만 외곬으로 오염되었다.”라는 것이니, 바로 숙습이 그러하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응당 정근하고 참회하여 숙습의 업장을 소멸해야 한다. 업장이 만일 소멸되면 곧 도연을 갖출 수 있다. “항상 희망을 일으키라.”라는 것은 이른바 희망은 업장을 끊고자 하는 원이다. 이 때문에 아래에서 곧 이르기를, “먼저 증애와 질투 아첨을 끊으라.”라고 하니, 바로 탐진치이고, 승상심이란 아만이다. 이른바 근본번뇌가 이미 끊어지고 현행이 일어나지 않으면, 곧 습기를 제거할 수 있고 관행을 쉽게 성취할 수 있다. “이 관에서 얻지 못하면 바로 다시 저 관을 익히라.”라는 것은 바로 스물다섯 가지 정륜을 표기한 뜻이니, 이 때문에 “점차 증각을 구할지니라.”라고 한 것이다.(此言鈍根障重衆生 當以懺悔斷障爲要也 由昔業障者乃夙習種子 今修行時熏發現行作障道緣 所謂好正而固邪 欲潔而偏染者 乃夙習使然也 故當精勤懺悔消宿業障 業障若消則道緣可辦也 常起希望者 謂希望願斷業障也 故下即云先斷憎愛等 乃貪嗔癡也 (勝上心慢也 謂根本煩惱既斷 現行不行 則習氣可除 觀行易成 此觀不得乃復修彼觀者 乃二十五輪標記之意 故云漸次求證)
해설: “먼저 증애와 질투 아첨을 끊고, 무상최승無上最勝의 마음을 구하여야 한다.”(先斷憎愛嫉妬諂曲 求勝上心)라는 경문에 대하여, 감산스님은 “승상심이란 아만이다.”(勝上心慢也)라고 해설했다. 이를 의거하면, “먼저 증애와 질투 아첨을 끊고, 아만의 마음을 책망해야 한다.”라고 하여, 구할 구求자를 책망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나는 승상을 무상최승으로 해석했다.
7. 결어
달마대사가 전수한 선법을 달마선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달마선은 단적으로 말하면 교외별전의 선지가 아니다. 자기 법문을 능가경으로 증명을 삼았기 때문이다. 달마대사 이전도 그러하고, 또 이후 사조 도신스님의 법문도 또한 그러하다. “나의 이 법요는 능가경의 제불심제일을 의거하며, 또한 문수설반야경의 일행삼매를 의거한다. 곧 염불하는 마음이 부처이고 망념이 범부이다.”(我此法要 依楞伽經諸佛心第一 又依文殊說般若經一行三昧 即念佛心是佛 妄念是凡夫) 아래는 위산스님과 앙산스님의 법거량法擧揚이다. 거양은 게양과 같다. 국기를 높이 매달아 휘날리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하면 중인이 환시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인이 서로 문답하여 현묘한 법을 사부대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도량의 관례로 법거량이라 말한다.
위산스님이 처음 앙산을 보고서 다음과 같이 물으셨다.
“그대는 주인이 있는 사미인가, 주인이 없는 사미인가?”
“주인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 있는가?”
앙산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나아가 섰다. 이에 위산스님은 앙산이 이인異人인 줄을 알고 곧 제일구 법문을 열어 보이셨다. 앙산스님이 위산스님께 여쭈었다.
“어떤 곳이 진불眞佛이 머무시는 곳입니까?”
“사념이 없는 사념의 묘심으로 신령한 불꽃의 무궁을 돌이켜 생각하고, 생각이 다하여 근원에 돌아감으로 성상性相이 항상 머무르며, 사리事理가 둘이 아니어서 진불이 여여如如하니라.”(以思無思之妙 返思靈焰之無窮 思盡還源性相常住 事理不二眞佛如如)
앙산이 이 말씀 아래에 바로 깨닫고서 15년 동안 머무르면서 시봉하였다.
위산스님의 마지막 답변 중에 두 구절만 부연해보고자 한다. 하나는 “사념이 없는 사념의 묘심으로”(以思無思之妙)이고, 둘은 “신령한 불꽃의 무궁을 돌이켜 생각한다.”(返思靈焰之無窮)이다. 이를 감산스님의 원각경직지에 의거하여 해석한다. 전자는 능관이고, 후자는 소관이다.
“일체 여래의 본기인지도 모두 청정각상을 원조함에 의하여 영원히 무명을 끊고 바야흐로 불도를 성취하셨느니라.”(一切如來本起因地 皆依圓照清淨覺相 永斷無明方成佛道) 이 구절은 문수보살장에 있다. 청정각상은 소관이다. 이를 적멸청정한 각체라 말하기도 한다. 다음과 같다.
감산직지: “제불의 인지를 보살 인행의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가르친다고 이른 것이다. 이 때문에 일체 여래가 성불하는 본기의 인지는 다시 별법이 없으니, 모두 이 원각자성의 광명을 의거하여 여전히 적멸청정한 각체를 원조하는 것이다. 각상覺相의 상은 곧 성체이다. 이로써 원만하게 조철하여 남음이 없으면 곧 무명이 영원히 끊어져 법신을 원만하게 증득하는 것이니, 오직 청정각상을 원조하는 이 하나의 법뿐이다.”(以諸佛之因地爲菩薩之行本故云教授 是故一切如來成佛本起之因地 更無別法 皆依此圓覺自性之光明 還照寂滅清淨之覺體 相即性體也 以此圓滿照徹無遺 則無明永斷圓證法身 唯此一法而已 故曰皆依圓照清淨覺相 永斷無明 方成佛道也 然圓照即一心三觀之智 清淨覺相即一心三諦之體 全經但發明此一句而已) 이를 의거하면 능관은 원각자성의 광명이다.
능관 곧 ‘원각자성의 광명으로’=‘사념이 없는 사념의 묘심으로’(以思無思之妙) 소관 곧 ‘청정각상’을 또는 ‘적멸청정한 각체’를=‘신령한 불꽃의 무궁’(返思靈焰之無窮)을 ‘원조한다.’=‘돌이켜 생각한다.’ 이상이 위산스님의 법문에 대한 나의 해석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조사선은 경전의 관법과는 별개이다. 조사선의 지대한 공헌자 중에 한 분이 앙산스님이다. 위 위산스님의 법문은 여래선의 범위를 털끝만큼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 경계가 화엄의 십신의 경계인가, 삼현의 경계인가, 아니면 십성의 경계인가의 여부를 나는 알지 못한다. 이 글의 첫머리에 있는 구절을 다시 인용한다.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청정한 원각을 깨닫고자 하면 청정한 각심으로 적정을 취하고 수행할지니라.”(善男子 若諸菩薩 悟淨圓覺 以淨覺心 取靜爲行)라고 하니, 원각경에서 말하는 모든 보살도 조사선에서 말하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의 경지는 아닌 듯하다.
청량국사는 달마대사의 8세손부터 11세손까지 동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그 어떤 조사도 청량국사를 능가했다는 말을 나는 듣지 못했고, 마조대사와 남전스님 조주스님의 삼대도 또한 그 역량이 혜충국사를 뛰어넘었다는 말을 나는 듣지 못했다. 제이의 서가라 칭송받는 용수보살도 능가경에 의하면 초지 환희지보살이다. 거듭 말하지만, 조사선에서 말하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의 경계와는 거리가 한참, 아니 구만리는 더 떨어져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이 글을 끝맺는다. 수행의 제일보는 삼매이다. 일체 삼매 중에 초수방편 삼마타이다. 바로 정행靜行이다. 일초직입여래지를 구하지 말라. 정행을 취하라.
2022년 5월 28일 74세 길상묘덕 씀
|
첫댓글 찬탄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문을 수정하고 보완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책을 구할수 있나요
눈 빠지는줄 알앗어요 천천히 습득하고 싶슴니다
원래 대방광 원각수다라요의경에 빠짐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쓰고 바로 인터넷에 올리는 중이라, 이상 2편 뿐입니다.
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