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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3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 사도 19,1-8
복 음 : 요한 16,29-33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29 말하였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30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33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참 좋은 영원 유일한 버팀목
-예수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19세기 말엽 순교한 22명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마침 반갑게도 케냐에 파견된 선교 수녀님이 우간다 진자 수녀원을 방문하여 소식을 보냈습니다.
우간다는 아프리카 내륙국은 호수와 강이 많습니다.
마침 방문한 진자 수녀원은 케냐와 탄자니아 국경지대에 있는
우간다에서 가장 큰 빅토리아 호수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수녀원 내에는 참 오래된 망고 나무도 있었고 큰 빅토리아 호수 안에는 여러 섬도 있다 합니다.
“나일강의 발원지發源地 빅토리아 호수의 물이 솟는 곳!”
빅토리아 호수 사진과 더불어 윗 메시지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아, 길고도 긴 아프리카의 젖줄 같은 나일강도 빅토리아 호수로부터 시작되는 구나!
마치 우리 삶의 강의 발원지인 예수님 호수로부터 솟아난 각자 사랑의 강이
하느님 바다를 향해 흐르는 이치와 같구나!’하는 깨달음과 더불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 좌우명 셋째 연이 생각났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그렇습니다. 예수님 호수로부터 시작되어 하느님 바다를 향해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같은 인생들입니다.
어제 만났던 두 자매님과의 대화도 잊지 못합니다.
본당 성체조배회 회원 50명이 단체피정을 왔고 1시간 이상 ‘기도’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분도회 영성을 소개한 후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기도시 팜프렛을 나눠준후 함께 낭송했습니다.
끝난 후 한 자매님이 “마음이 짜릿했습니다. 너무 좋은 시입니다.
남은 몇 장 가져다 몇 분과 나누고 싶습니다.”하여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또 매달 방문하여 고백성사를 받고 매일미사를 청하는 자매님 역시
“하루하루 주님의 전사로 살아갑니다” 고백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매일 출근하는 모습이 흡사 전장戰場에 출전하는 전사의 모습을 방불케 했습니다.
저 역시 병원에 갈 때 출퇴근 시간이 겹칠 무렵 환승이 이뤄지는 지하철역에서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흡사 전장에 출전하는 모습들에서 인파人波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언젠가 수도 전우戰友와의 대화도 생각납니다.
늘 느끼는 바이지만 제 집무실은 흡사 ‘야전사령부’같습니다.
수도원은 밖에서 볼 때 편안한 천국같이 보이지만 안에 들어와 보면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입니다.
이런 말을 했더니 수도 전우는 “야전 병원입니다.” 대답했고 공감했습니다.
제 야전사령부 집무실은 영적전쟁 중 상처 입은 무수한 영적 부상자들이
치료차 찾아오는 야전 병원이기 때문입니다.
생각 없이 인파에 휘말려 살다보면 십중팔구 자기를 잃기 쉽다는 자매님의 말에 공감했습니다.
하여 매일 제 강론을 읽고 퇴근 시에는 꼭 성당에 들려 잠시 주님 안에 머물러 삶의 중심을 잡는다 했습니다.
날마다 치열한 영적전쟁의 현장에서 ‘살기 위하여!’ 삶의 중심을 잡는 일은 얼마나 절대적인지요.
“감사합니다. 신부님! 매일미사은총으로 체력적으로 버거운 학교생활을 하루하루 잘 버티고 있습니다.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메시지의 내용이 고백상담중에도 나왔고, 새롭게 와닿은 참 좋은 ‘버티다’라는 말마디였습니다.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면 안 되기에 정신 차리고 온힘을 다해 버티어 내는
주님의 전사들인 형제자매들입니다.
자매님이 갈 때는 “주님의 전사인 자매님의 ‘무용담武勇談’을 잘 들었다.”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상담고백성사 시 형제자매들의 무용담의 보고를 듣는 느낌이 들 때도 많습니다.
여기서 연상된 말마디가 ‘버팀목’입니다.
그러고 보니 믿는 우리들에게 참 좋은 유일한 버팀목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복음 마지막 말씀은 바로 세상 끝날까지 믿는 우리 모두의 버팀목이 되겠다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바오로 사도의 안수로 성령을 충만히 받은
열 두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이 그들의 참된 버팀목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혼자의 외로움과 고독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 아버지가 유일한 버팀목이 되었기에 가능했음을 봅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가 예수님의 유일한 버팀목이라는 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의 유일한 버팀목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겪어내고 버티어 낼 수 있는 것도
세상을 이긴 예수님을 버팀목으로 삼았기에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버팀목으로 삼을 때 고난중에도 평화와 안정, 기쁨이 있고,
우리 역시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이긴 주님의 전사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예수님을 버팀목으로 삼을 때 비로소 영적전쟁의 승리자가 될 수 있음을 배웁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마다 우리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주시어
우리 모두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삶의 강의 발원지인 호수와 같은 미사로부터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복된 하루를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할아버지 두 분이 공원 벤치에 쓸쓸이 앉아 있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을 나란히 앉아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으시다가 한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누가 충고를 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 그래서 이 꼴이 되었어.”
다른 할아버지 역시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기랄, 나는 남의 말만 들어서 이 꼴이 되었어.”
별 다른 일 없이 이렇게 공원에 앉아 있는 모습을 좋게 보지 않나 봅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금 상태를 과거의 어떤 행동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회가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한 명은 남의 말을 듣지 않아서, 다른 한 명은 남의 말만을 들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들으면 삶이 변화가 이루어질 것 같았지만,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이렇게 살아도 후회가 되고, 저렇게 살아도 후회가 남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차피 후회가 될 삶이니까 그냥 막 살고 볼까요? 아닙니다.
먼저 지난 삶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후회가 남을 수도 있지만, 후회를 한다고 한들 바꿀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후회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난 삶을 통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받아들으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걸어온 삶.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야.’라고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혼자의 힘만으로는 만들어 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아시고 이렇게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 세상을 이긴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우리 역시 세상의 고통과 시련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생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을 이긴 주님의 힘을 기억하면서 다시금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살아도 후회하고, 저렇게 살아도 후회할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또한 주님께서 길을 매순간 가르쳐주시기에
후회보다는 기쁨을 간직하게 되고, 절망보다는 커다란 희망을 만들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람의 약점 중에 하나가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입니다.
안 그런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되는 것을 보면 인간은 분명 의지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위 줄서기를 잘못하면 낭패를 봅니다.
굶주릴 때는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인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고 신앙을 고백하자마자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흔들릴 것을 아셨기에
당신이 유다인들에게 체포될 때 제자들이 도망갈 것이라고 미리 예고하신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여 감동을 하더라도
손발에 머물러 증거하거 하기 까지는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믿음은 아직도 더 무르익어야만 합니다.
이제 곧 모두가 다 각자의 유익한 곳으로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혼자가 아니십니다.
아버지께서 항상 그분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살며 아버지와 하나입니다.
요한 복음 10장38절에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듯, 제자들과 예수님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 길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언젠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하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시며
시련에 굴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정신을 잃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세상을 이긴 예수님을 바라보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용기를 내어라’고 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용기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하느님도 계십니다.”(성 도미니꼬).
춥다고 버리지도 말고 배부르다고 떠나지도 마십시오!
흔들림 없는 믿음과 소신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굳건한 믿음은 시련 속에서 빛납니다.
“조금만 더 참고 이겨내면 하느님의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얻기 전에 하느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찾아나서는 일부터 해야 할 때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1784년에 시작된 한국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은 것은
한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1886년에 맺은 조약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시작되고 100년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외견상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때부터 한국 정부는 신앙을 가진 사람을 박해하지 않았고, 잡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의 자유는 100년간의 박해와 시련을 이겨낸
순교자들의 피와 땀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사제가 없는 시기가 50년이나 되었지만, 사제를 기다리며 사제를 영입하려고 노력했던
신자들의 기도와 갈망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고향에 사시는 친척 형님이 전화하셨습니다.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를 보러 온다고 합니다.
형님들은 시간이 되면 가족이 함께 봉고차를 타고 전국 성지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강화도에 있는 성지를 방문하면서 어머니께 들린다고 합니다.
구교라고 하면서, 몇 대째 천주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신앙생활도 소홀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의 명예, 권력, 재물로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아픈 가족을 찾아보고, 성지를 순례하는 형님들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본당에서 단체로 성지순례 가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이 함께 가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산업화, 도시화, 핵가족화를 거치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가정 교회가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꽃 한 송이도 쉽게 피는 것은 아닙니다. 줄기는 추운 겨울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가지는 비와 눈을 맞았습니다. 뿌리는 어두운 땅속에서 양분을 찾았습니다.
신앙이 식어가는 신자들에게 율법과 계명을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선조들의 뜨거운 신앙과 갈망을 전해주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습니다.”
고난은 무엇일까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어떻게 져야 할까요?
어깨에 메고 가는 사람, 머리에 이고 가는 사람, 끌고 가는 사람, 바퀴를 달고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진정한 의미는 품에 안고 가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하는 것은 아이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어머니는 자녀를 품고 젖을 먹입니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짐으로 생각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면 부활의 기쁨을 얻기 어렵습니다.
십자가를 남에게 떠넘기려는 사람도 부활의 기쁨을 얻기 어렵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소중하게 지고 가야 합니다.
베로니카 성녀처럼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아 드려야 합니다.
그런 소중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런 십자가는 우리를 부활의 기쁨으로 인도하는 다리가 될 것입니다.
예전에 듣고서 큰 위로를 받았던 성가가 있습니다.
제목은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네.’입니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마음이 외로워 홀로 남았을 때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를 얻나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마음을 그대 홀로 있지 못함을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새로운 한 주간입니다.
이 세상에 오직 나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누군가 날 위해서 기도하고 있음에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세상을 이기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거리에서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이 70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살을 한 것이었습니다.
앰뷸런스가 와서 할머니는 곧 병원으로 실려 갔고 뒤이어 달려온 경찰들이 사람들을 해산시키고는
자살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할머니의 아파트로 올라갔습니다.
실내는 온갖 고급 도구와 사치스런 장식품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왠지 썰렁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이 정도 살림으로 보았을 때 경제적인 어려움은 아닌 것 같고,
혹시 건강상의 이유나 불치병 때문일지도 몰라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주치의는 할머니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건강했다고 말했습니다.
골똘히 고민하던 경찰관은 책상을 뒤져 보았습니다.
할머니의 작은 수첩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수첩을 펼쳐보는 경찰관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 하고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머니의 수첩엔 365일 동안 똑같은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늘도 아무도 나에게 오지 않았음.”
왜 할머니는 자신이 누군가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매일 다른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만 있었을까요?
고독했기 때문입니다. 고독하면 누군가를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다시 고독해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고독한데 고독하고 싶지 않아 만남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식당에서 활개를 치고 다닌다면 분명 어딘가에 부모가 앉아있을 것입니다.
혼자 있다면 두려워 활개를 칠 수 없는 것입니다. 혼자라는 고독감이 더더욱 자신을 방에 가둡니다.
누군가를 만나러 나갈 수 있으려면 혼자되는 두려움을 극복해야합니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혼자되는 것이 두려우면 세상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세상은 인간이 외로워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아서 돈이나 명예, 친구들이 필요하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렇게 외로움은 세상의 지배하에 살게 만듭니다.
그러나 수많은 친구가 있어도, 인기가 많아도 여전히 고독한 사람은 고독합니다.
이는 돈을 주고 애정을 사서 외롭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국의 문인 부르크가 미국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부두에는 전송객으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전송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서운함을 느낀 부르크는 부두에서 놀고 있는 한 어린아이에게
“얘야! 내가 네게 6실링을 줄 테니 내가 저 배를 타고 떠날 때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6실링을 받은 아이는 정말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르크는 “돈 받고 흔드는 손을 보고 나는 더욱 고독을 느끼게 되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를 군중속의 고독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많은데 늘 외로운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외롭기 때문에 군중 속에서도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외롭지 않은 사람입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아야 세상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어야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체홉은 “고독이 두렵다면 결혼하지 마라.”라고 했습니다.
결혼 배우자를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는 도구가 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려면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고독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키에르 케고르는 “내가 고독할 때 나는 가장 고독하지 않다.”고 말했고,
도오로우는 “나는 일찍이 고독만큼 사이가 좋은 벗을 본 적이 없다.”라고 했으며,
펄 벅은 “내 안에는 나 혼자 살고 있는 고독의 장소가 있다.
그 곳은 말라붙은 마음을 소생시키는 단 하나의 장소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이 당신을 버리고 떠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을 안심시킵니다.
이미 알고 있으니 괜찮다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으면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계시니 걱정 말라고 하십니다.
이렇듯 세상 애정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고독 가운데 더 나와 친밀하게 함께 하심을 믿어야합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봐야 합니다. 그래서 외로울 수 없어야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세상을 이기는 법입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다.(요한 16, 32)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다시 힘을 내어
십자가를 지게하십니다.
항상
처음처럼
아버지 하느님을 신뢰하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를 평화로 이끄십니다.
하느님
현존의 핵심은
평화입니다.
평화는
거짓된 자아의 껍질을
십자가로 부수어 냅니다.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 안에
참된 평화가 있습니다.
제 갈 곳으로 갔던 우리들이
평화 안에 다시 모이게 됩니다.
평화를 제외하고는
십자가의 고난을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평화로
사랑하는 법을
다시 가르쳐주십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평화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끝내 사랑을 완성하신다는
참된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이 있기에
용기를 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
주님께서
십자가로
세상을 이겼기에
평화롭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사라지지 않을
평화를 주십니다.
뒤따라가야 할
평화의 여정입니다.
평화는 아버지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