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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1-6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2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4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21ㄴ-33.36-38
그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21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23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24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25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27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28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30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36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7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그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고,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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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의 종을 모태에서부터 부르시어 그를 빚어 만드시고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팔아넘길 것이라며, 베드로에게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은 요한 복음이 전하는 최후의 만찬 장면을 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있음을 알고 계신 스승,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자 홀로 수난과 고통의 잔을 마셔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그리스도, 인간적 번민과 두려움에도 성부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잘 알고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스승님께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라고 답하십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 함께 있던 제자들은 아무도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사가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라고 서술합니다. 밤은 어둠으로 가득 찬 시간, 사탄이 일하는 시간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빛이신 성자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기 전에 어둠과 사탄,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비참한 현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한편 스승님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베드로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고통을 감내하셔야 함을 제자들은 아직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주님을 알아뵙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서에서 메시아의 비밀과 제자들의 몰이해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는 데 필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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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 기억 가운데 한 부분은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기억일 것입니다. 자신의 성공과 이익을 위하여 나의 사랑을 이용한 연인,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걸어갔지만 위기의 순간에 등을 돌리고 떠나 버린 동료, 온갖 좋은 말로 나에게 다가와서 믿고 의지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에 대하여 거짓을 말하는 이중적 태도를 가진 친구. 우리 삶에서 배신과 배반의 경험은 큰 상처로 남아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기가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믿음을 저버리는 배신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더 큰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지금의 사랑에 실망하고 좌절하였기에, 아니면 자신의 사랑이 그보다는 더 크기에 다른 사랑으로 이동하는 것이 배신일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으셨고 사랑하셨고 동행하신 제자들입니다. 물론 제자들도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고, 놀라운 일들과 기적을 목격하면서 그 사랑과 기대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명은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섭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과 입으로 들어오는 넉넉한 빵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돈과 빵에 대한 사랑으로 변해 갑니다. 베드로는 아직까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그 사랑이 베드로 자신의 목숨에 대한 사랑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사랑은 이동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고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그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면서도 배반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위기가 닥쳐오면 더 사랑할 것을 찾아 주님의 사랑에서 돌아서려고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한 번 더 바라보며 돌아설 준비를 멈추었으면 합니다.(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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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임박한 예수님 죽음에 대한 예고에 이어, 성주간 화요일인 오늘은 제자들의 배반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가 펼쳐집니다. 지상에서 마지막 시간들을 제자들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최후 만찬 때에 펼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당신의 몸과 피를 빵과 포도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은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에 예수님 예언의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돈주머니를 맡아 오던 유다가 종교 당국에 당신을 넘기려는 계획과 늘 말이 앞서던 베드로의 약점이 어떻게 스승에 대한 부인으로 이어질지를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알고 계시면서도 두 제자의 배신과 부인이 그대로 펼쳐지도록 허락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 하느님을 굳게 믿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독서인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제자들의 배신과 부인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더 이상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으셨던 이유는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배신자를 친구라 부르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음을 기억합시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14.17ㄴ).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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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오늘 일어났던 세월호 사건과 그 희생자들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서 뽑은 오늘 독서는 모태에서부터 받은 종의 사명, 곧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끌어 모으며, 하느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민족들의 빛이 되는 사명을 들려줍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실 보편적인 구원의 사명입니다.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는 오늘 복음은, 파스카 만찬 예식의 준비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뒤, 산란한 마음을 드러내시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어리둥절할 때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 요한은 베드로의 지시에 따라 누구를 두고 하신 말씀인지 그분께 묻습니다.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주님께서 빵을 적신 뒤 그것을 들어 시몬의 아들 유다 이스카리옷에게 주셨고,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갑니다. 유다에게 빵을 주신 예수님의 행위는 본디 배려의 행위, 곧 유다가 주님을 죽이려는 계획을 제대로 수행하고 그의 야심과 원한으로 깨진 우정을 회복하라는 초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유다가 결정적으로 거부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유다가 밖으로 나갔을 때는 밤입니다. 배신자는 빛이 드러나지 않는 어둠의 본보기입니다. 유다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의 활동은 사악했습니다.
주님께서 예고하신 밤(요한 9,4 참조), 어둠이 권세를 떨칠 때(루카 22,53 참조)가 다가왔습니다. 이때 땅을 덮은 기나긴 밤은 주님께서 부활하시는 날, 이른 아침 여명으로 다가옵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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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고통받는 주님의 종’을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시고,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는 시대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임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요한 1,4 참조).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 계셨지만,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요한 3,19 참조).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배반한 시점은 밤이었습니다. 그 밤은 악의 세력이 기승을 떨치던 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 가운데 누가 당신을 배반할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실망감에 사로잡혀 어둠과 죄악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에게 예수님의 수난은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지 못한 예수님에 대한 실망감, 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대한 애착은 그를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얽어맵니다. 커다란 분노에 사로잡힌 그에게, 악마는 절망에 빠져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히는 것이 그의 운명이라고 속삭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몫임을 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 놓습니다. 결국 그는 그 밤에 진리를 버리고 거짓 지도자에게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인간의 마음은 나약하여 어느 한순간 쉽사리 사탄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밤의 세력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빛의 세계로 나아가는 자녀, 고난 가운데 희망을 지닌 신앙인이 되도록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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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이스카리옷의 배신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을 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3년이나 지낸 사람의 배신행위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와 삶을 적나라하게 전해 주는 시편 55(54)편 14-15절은 ‘하느님의 집에서 정답게 어울리던 벗’의 배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편 41(40)편 10절은 ‘믿어 온 친한 벗, 빵을 나누던 사람’의 배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세상 이치에 밝았고 셈이 참 빨랐나 봅니다. 그는 세리 마태오를 제치고 열두 사도의 돈주머니를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 닥칠 위기를 감지하고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돈을 챙길 방안을 찾습니다. 그는 돈 욕심 때문에 스승을 팔아넘기게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다의 희망은 한순간에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의 열정은 절망의 어둠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허망한 기대에 집착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였지만 회개하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삶과 정반대되는 길을 걸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하느님께 고백하고 용서받는 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다시 돌아가 사랑을 고백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지 못하였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가는 선택입니다. 자신의 죄악에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건너가는 삶이 우리의 길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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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만찬을 함께하시며 당신의 충만한 사랑을 드러내실 때, 인간의 나약함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나타납니다.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배반은 동기에서나 결과에서나 사뭇 다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 하느님 나라 앞에서는 너무나 약한 육신의 징표입니다. 유다의 배반이 돈을 위한 것이었는지, 또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같은 그릇된 열정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로 하여금 악에 대한 저주를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향한 애정으로 가득 찬 열정은 우리를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초대할 수 있을까요? 열정이라면 베드로가 충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도 그 배반의 밤을 이겨 내지 못합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오직 신앙으로만, 그 수난의 밤이 예수님께 영광의 밤이 되고, 십자가의 형틀이 영광의 왕좌가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불가능한” 도식에 들어가야 신앙의 자락을 잡을 수 있습니다.
“때는 밤이었다.” 요한은 시간을 표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유다가 이미 넘어져서 구원의 희망이 없이 어둠의 세력에 넘어갔음을 알려 줍니다. 이제 밤이 되었고, 예수님의 활동도 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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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유다가 주님을 팔아넘기려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여 주며 때는 '밤'이라고 합니다. 밤이 너무 깊어져 낮이 있었음을 기억하기조차 어려울 때, 빛이 다시 비추리라는 것을 기대하는 것마저 포기하려 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파스카 성삼일의 신비를 절실하게 체험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합니다.
유 다를 둘러싼 밤은 그의 마음의 밤이기도 했습니다. 희망을 생각할 수 없게 하는 캄캄한 절망의 밤, 두려움과 위협과 폭력과 악의가 가득한 밤에 자신을 송두리째 넘긴 사람의 마음은 그 자체로 그러한 밤이 되어 버립니다. 유다의 불행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굳게 닫힌 밤 속으로 온몸을 던지는 상황, 그래서 예수님마저 그를 애처롭게 여기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그 완전한 절망의 마음이 두렵습니다. 이것이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는 성경 말씀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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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밤은 차가운 침묵의 밤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세상살이에도 밤과 침묵을 대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밤과 침묵이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도록, 부르짖음은 답 없는 메아리로 돌아올 뿐 아니라 희망은 영원히 차가운 어둠 속에 묻힌 채 질식되는 것이 우리 삶의 숙명이라는 속삭임이 악마의 목소리입니다.
현대의 심오한 영화로 유명한 스웨덴의 영화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은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겨울 빛', '침묵'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영화들에서 '신의 침묵과 인간의 절망'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가톨릭 작가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그의 대작 『사탄의 태양 아래서』라는 책에서, 죄의 무게가 모든 빛을 차단하고 자기 자신을 포기하게 하는 유혹으로 이끄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위대한 예술가들이 예감하였듯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밤과 침묵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부활의 신비를 믿는 사람은 밤에서 빛과 생명을 발견합니다. 부활은 절망과 죽음의 모든 힘을 잃게 하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의 길은 우리가 놓여 있는 밤과 침묵을 통하여 나 있습니다. 그 밤은 결코 빛이 사라진 곳이 아니라 빛을 기다리는 희망의 밤입니다. 침묵은 영원히 답 없는 공허와 절망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겉꾸민 해답이 아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리를 치유하시는 사랑의 주님을 소리 없이 체험하는 자리입니다. 빛에 대한 희망으로 이렇게 우리는 밤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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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두 사람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바로 유다와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유다를 배반자라고 하고, 베드로를 성인(聖人)이라고 합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사실 베드로도 유다도 모두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후회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회개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무리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자신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배반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 고백합니다(요한 21,15-19 참조). 그 반면, 유다는 후회만 하였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깨달은 뒤 절망에 빠져 자신의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맙니다(마태 27,5 참조). 잘못한 줄은 알았지만, 그 잘못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이미 그를 용서하려고 하셨으나, 유다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인’이란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죄에 빠져도 매번 회개하여 새롭게 출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배반자로 남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 역시 죄를 짓고 난 뒤 후회는 하겠지만, 이에 따른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음에도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채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후회하는 것으로 그치는지 회개까지 이어지는지에 따라, 성인이 될 수도 있고, 배반자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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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 무수한 추측과 상상과 신학과 연민을 불러일으켜 온 인물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논쟁거리가 될 인물인 듯합니다.
복음서에 따라 조금씩 강조점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요한 복음에서 분명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수동적으로 배반을 당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유다가 먼저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누가 배반했는지 아시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신 다음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시면서도, 유다에게 그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라고 이르십니다. 또한 빵을 함께 나누는 벗이 배반하리라는 내용은 시편 41편 10절을 암시하고 있어서, 유다의 배반이 이미 구약에 예언되었고 따라서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이런 행동을 막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당신의 수난을 향하여 나아가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에도, 요한 복음에서는 유다가 입맞춤으로 예수님임을 표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 자신을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피해 가려 하지 않으십니다. 당신 뜻을 거슬러 그들이 강제로 죽이도록 당신을 내맡기지도 않으십니다. 또한 끝까지 피하려 하셨다면 피할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의 계획을 막으실 수 없었겠습니까? 당신께서 하고자 하셨다면, 사람들이 요구하던 대로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기에(요한 15,13 참조),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사랑으로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어렸을 때, 어떤 아이를 보고서 너무나 부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와 함께 신나게 놀았는데, 다음날 시험에서 늘 100점을 맞는 친구였습니다. 이 친구는 100점을 맞지 못한 저에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쉬운데 왜 100점을 못 맞아?”
공부하지도 않았는데 좋은 성적을 맞는 친구, 운동을 너무 잘하는 친구, 남들을 웃기는 재주가 있는 친구, 노래를 잘 부르는 친구 등등 제 주변에는 부러운 친구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감이 사라졌고, 늘 소극적인 자세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이 친구들은 모두 평범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공부 잘했던 친구는 장사하고 있고, 운동 잘하는 친구는 공무원입니다. 그 밖의 다른 친구도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능력의 큰 차이가 그 순간에는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았지만, 사실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우리 삶의 장애물 셋을 극복하는 사람만이 특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셋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포기의 유혹. 둘째, 두려움. 셋째, 크고 작은 문제의 연속적 발생.
이를 극복한 사람만이 특별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포기의 삶이 아닌 한 번 더 시도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또 두려움보다 희망을 바라보길 원하십니다. 크고 작은 문제가 계속 다가오지만, 그 안에서도 당신의 손길을 느끼길 원하십니다. 이런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 하는 특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눠주셨고, 유다도 예수님께 빵을 나누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축복받지 못합니다. 유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를 꾸짖기도 하셨지만 소용이 없었지요. 사탄은 유다의 약한 곳을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되는 길을 포기했고, 예수님 팔아넘긴 것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삶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려고도 하지 않았기에 용서를 청하지도 않습니다.
능력과 재주가 많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외적인 환경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만으로는 특별한 삶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삶은 유다와 반대의 삶을 통해서 가능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의 유혹을 벗어던지는 용기 있는 삶을 살 때, 두려움에 좌절하기보다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간직할 때, 문제가 너무 많다면서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발견하는 사람만이 정말로 특별한 삶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특별한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은 그들의 몫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뿐이다(성 암브로시오).
왜 태어났을까요?
한 젊은이가 추운 날 길을 걷다가, 길거리에 한 어린 소녀가 오들오들 떨면서 구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화가 치밀어 올라 하느님께 외쳤습니다.
“하느님! 왜 이런 걸 보고만 있습니까? 대책을 세워 주세요.”
바로 그 순간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대책을 세웠다. 그래서 내가 너를 만들었고, 또 너를 그곳에 보내지 않았느냐?”
우리는 어떤 이유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요? 단순히 어머니 배에서 나온 것에서는 그쳐서 안 됩니다. 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자신의 꿈과 비전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를 찾기가 쉽지 않지요. 바로 그때 사랑의 관계를 떠올려봐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이유가 될 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해도 하느님의 자비를 능가할수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 두 배반자의 명암이 극명하게 비교·대조되고 있습니다. 두 제자의 차이는 딱 한끗 차이였는데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한 제자는 배신의 죄책감에 따른 비참한 자결로 인해 인류 역사 안에 세세대대로 부끄럽고 수치스런 이름을 남겼습니다. 반대로 다른 제자는 절절한 회개를 통한 참 제자로의 거듭났으며, 그를 통해 역사 안에 영원히 존경받는 수제자로 이름을 아로새겼습니다.
그러한 결과가 초래되기까지 유다가 지니고 있었던 치명적인 약점이 한 가지 있었으니...스승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얼마나 관대하고 너그러운 분이신지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크신 자비를 믿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인지를, 흠결 투성이요 죄의 종합셋트인지를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유다나 우리나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머리칼보다 많은 죄속에 넘어지고 또 일어서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한 인간 존재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망각했습니다. 인간의 죄가 아무리 크다해도 하느님의 자비를 능가할수 없다는 진리, 하느님의 자비 앞에 불가능은 없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 말종으로 손가락질 당하던 세관장 자캐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평생 죄란 죄는 다 짓고 살아온 우도의 급회개 앞에 직천당을 확증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자비가 우리 인간의 죄를 훨씬 능가하고 초월한다는 증거는 복음서 여기저기에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스승님의 크신 자비를 믿지 않은 유다의 운명은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유다는 스스로를 셀프 단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단죄하지 않으셨는데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유다 자신을 용서할 기회조차 드리지 않았습니다.
유다와 정반대의 행보를 걸은 행운아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입니다. 그 역시 유다 못지않게 큰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자신의 죄를 뉘우쳤습니다.
베도로 사도는 결정적인 순간 스승님을 세번이나 배반하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절렀지만, 큰 용기를 내고 가슴을 쾅쾅 쳤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록 자신이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스승님께서 자신을 용서해주시고, 다시 한번 제자로 받아주실수 있는 자비하신 분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반면에 유다는 스스로를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단죄해버렸습니다. 가장 큰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스승님께서는 청하기만 한다면 백번 천번이라도 용서해주실수 있는 분인데, 거기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비참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 없었지만, 영원불변의 진리 한가지를 늘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스승님은 자비로 충만한 분이라는 진리를 말입니다. 스승님은 죄인의 회개를 가장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 사도는 세번 배반이라는 참혹한 현실을 딛고 당당히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용서받은 죄인이 된 베드로는 동료 죄인들을 기꺼이 품어안을 수 있는 가슴 넉넉한 수제자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전문가가 되려거든: 맛을 보고 무엇을 넣었는지 기억하는 과정을 반복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리옷 유다의 배신을 요한에게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가리옷 유다처럼 되지 않으려면 다른 사도들처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증가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신앙생활에 발전이 없다면 가리옷 유다의 잘못을 되풀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은 어떻게 증가시켜야 할까요? 믿음은 ‘시험’을 통해 증가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생기려면 한 번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부모를 믿는 이유는 다른 사람은 잠깐 나에게 잘해줄 수 있지만, 부모는 못 해주는 건 잠깐이고 대부분은 나에게 잘해주는 것을 내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안전장치 하나도 없이 손가락 한두 마디로 버텨야 하는 ‘프리 솔로’ 암벽등반으로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975m에 달하는 바위산 ‘엘 카피탄’을 오른 ‘알렉스 호놀드’는 어떻게 그 산을 오를 수 있는 믿음을 얻었을까요?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계획을 세우고 안전장치를 이용해 50번을 등반하고 나서야 그런 믿음이 생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 면허를 따고 운전대를 잡으면 도로에 나가기 두렵습니다. 하지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 지나다 보면 그런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나친 자만심만 아니면 초보 때 두려워할 때보다 훨씬 안전하게 운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앞에 주어진 두 뜻이 있습니다. ‘주님 뜻을 죽이고 내 뜻을 사는 것’과 ‘내 뜻을 죽이고 주님 뜻으로 사는 것’입니다. 두 뜻은 반대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분께서 굳이 당신 뜻을 알려주실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뜻은 내가 살고 이웃을 죽이는 것이고 주님 뜻은 내가 죽고 이웃을 살리라는 것입니다. 내 앞에 놓인 선택은 이 두 개만 구분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뜻인지 살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뜻은 분명 결과가 행복할 것입니다. 행복은 생명력입니다. 행복하면 살고 싶고, 행복하지 않으면 죽고 싶습니다. 가리옷 유다의 선택은 내가 살고 이웃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살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내가 죽고 이웃을 살리려는 아버지의 뜻은 그리스도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두시려는 이유는 이 뜻을 잘 구분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뜻을 잘 구분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면 십자가 앞에서도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되지만, 지금 어떤 뜻을 따르는지 구분하지 못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믿음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여성이 남편을 잃고 딸과 함께 살았습니다. 딸도 대학을 졸업한 지 3년이 되었지만, 취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너무 안 좋아진 상태였습니다. 마침내 어머니는 딸에게 집안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사파이어 원석이 박힌 금목걸이를 돈을 많이 쳐 주는 금방에 가서 팔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딸은 후해 보이는 아저씨가 있는 금방에 들어가서 사파이어 금목걸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주인은 대뜸 “이거를 왜 팔려고 하지?”라고 물었습니다. 딸은 “네, 저희 집안 사정이 좋지 못해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금방 아저씨는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내가 지금 보조가 필요했는데 네가 내 일을 좀 도와줄래? 그리고 미리 가불을 해 주면 그것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이것은 나중에 팔아도 되잖아.”
딸은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보석상의 보조를 하며 보석을 감정하는 기술을 익혔습니다. 딸이 그 일을 매우 좋아했으므로 보석 감별 능력도 뛰어나게 발전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딸에게 보석을 감별해 달라고 부탁하러 그 가게에 들렀습니다. 이런 때 보석상은 말했습니다.
“자, 이제 가보로 내려오는 사파이어 목걸이를 팔아야 하지 않겠니?”
그녀는 어머니에게 가서 목걸이를 팔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걸이를 보았는데, 좀 다르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목걸이는 순금이 아닌 도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파이어도 미세한 금이 가 있어서 값이 나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보석상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그때 보시고 이 목걸이가 값이 나가지 않는 것임을 아셨을 텐데 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걸 말해주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니? 난 네가 스스로 그 값어치를 분별할 수 있는 수준이 되기를 기다렸던 거야. 그러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다 좋은 것 아니겠니?”
[출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유튜브 채널, ‘책읽는 다락방 J’]
예수님도 제자들을 뽑으시고 누가 어떤 사람인지 말씀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따름이, 곧 사랑을 따름이 더 행복이고, 더 행복하다면 그 길이 영원한 생명의 길임을 분별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리옷 유다는 그 분별 능력을 키우지 못했습니다. 그 원인은 자신이 선택할 때 어떤 뜻을 선택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분이 좋을 때는 나의 선택으로 기분이 좋은 것이라 여기고 나쁠 때는 예수님을 따르니 그런 것이라 여겼습니다.
믿음을 증가시키려면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훌륭한 요리사는 어떤 재료 때문에 이런 맛이 나는지 명확히 알아서 조금씩 재료와 조미료, 조리방법을 바꿔가며 음식을 완성해 갑니다. 우연히 아주 맛있는 음식이 나왔는데 조리법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음식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도 시험하며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은 ‘뜻’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뜻은 내 뜻과 주님 뜻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매우 쉽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보면 됩니다. 당연히 이웃을 행복하게 하려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나중엔 더 큰 행복이 온다는 결과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항상 똑같습니다. 결과가 안 좋다면 그것은 내 뜻인데 주님 뜻으로 위장하여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소금을 넣었는데 맛이 달아질 수 없고, 설탕을 넣었는데 짜질 수 없습니다. 항상 결과를 보고 무엇을 넣어서 그런 맛이 나는지 살피는 과정을 반복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이 지속 되면서 오직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만이 참 행복이요 생명임을 구분할 수 있는 믿음의 전문가가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나라가 무너지는 원인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더 강한 나라의 침략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동에서 생겨났던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르시아는 새로운 강대국이었습니다. 거침없는 침략으로 주변의 나라들을 무너트렸습니다. 남미에 있던 원주민들의 나라는 총과 대포를 앞세운 유럽의 침략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전쟁으로 인한 비극입니다. 내부의 부정과 부패로 인해서 나라가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람 앞에 촛불의 신세가 된 나라는 주변 국가의 손쉬운 먹잇감이 됩니다. 세계를 호령했던 나라들이 종이호랑이로 전락하였고,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극심한 자연재해와 같은 환경의 변화로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연재해를 극복하지 못해서 사라진 고대문명이 있습니다.
교회의 공동체는 좀처럼 분열되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교구라는 조직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구는 인사이동을 통해서 사제를 공동체에 파견하고, 파견된 사제는 임기가 정해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오는 사제를 환영합니다. 사제가 개인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직무수행으로 파견되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주어진 임기동안에 소임을 다하고, 공동체는 사제가 임기를 잘 마칠 수 있도록 협력하게 됩니다. 이주민 사목에서 가끔 어려움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온 사제가 현지의 상황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식으로 사목하면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현지의 상황에 따르라고 지나치게 요구하면 역시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함께 대화하고, 고민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 많은 어려움을 해결 할 수 있습니다.
2,000년 역사의 교회는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들의 배반을 예고하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고 했던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스승이신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사랑하시던 제자들은 모두 숨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십자가를 지고 가셔야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300년이 넘게 심한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노예가 되기도 했습니다. 원형 경기장에 사자의 먹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재판 없이 죽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숨어버렸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고, 로마는 새로 시작된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민족들의 빛이 되는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들도, 예수님을 배반했던 사람까지도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절망을 버렸습니다. 마음 안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용서를 받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부활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제 죄의 상태에서 돌아서서 다시금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과 허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정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로 우리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으며,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지만 부활하셨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였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배반도, 외부의 박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하였습니다. 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어둠에 빛이 되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현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때는 밤이었다’(요한13.30)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이태리의 작은 마을, 이른 아침 야채와 꽃 시장이 열린다. 채소의 신선도는 물론이고 무농약 청정재배는 수많은 소비자들을 시골마을로 불러 모은다. 로컬푸드 생산자들은 언제나 소비자들을 기억하며 일한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 신뢰도가 마을을 부유하게 행복으로 이끈다.
우리는 과연 어떤가? 먹는 것 가지고 장난질 하고 차액의 이익을 어김없이 챙긴다. 이런 경우는 이 부분 뿐 아니다. 사람들은 약삭빠르게 인기있는 브랜드를 이용해 불법으로 이익을 챙기며 살다가 스스로 끝없는 불신을 자초한다. 그리고 꼬리가 잡히기라도 하면 죽지 않으려고 손에서 미꾸라지 빠져나가듯 안간힘을 쓴다. 결국 재생의 힘을 잃어 죽음에 이른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13,21ㄴ-33.36-38참조)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 이스카리웃은 예수님을 생계수단의 도구로 팔아 넘길 생각에 이르고 그리고 으뜸 사도가 될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늘을 사는 많은 이들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을 생계수단으로 삼아 팔아 먹고 살아간다. 복음 속 유다 이스카리웃만 그런 것이 아님을 묵상해 본다. 역시 나도 우리도 살아가며 예수님을 팔며 살아간다, 으뜸 사도가 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나는 횟수의 정도를 넘고 산다. 나에게 고난이 닥치고 죽음에 직면하기라도 하면 내가 기꺼이 지고 살아가야할 나의 십자가 마져 외면하고 눈 딱 감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살아간다.
살다보면 ‘때는 밤을 맞는다’ 유다 이스카리웃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비참함만 있을 뿐이다. 이와는 다르게 이율배반적 모순에서 통렬히 뉘우치는 베드로의 주님께 대한 애원이 있다. 고해성사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영혼을 만난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만남에서 베드로는 영혼의 아름다움이 있다. 죄인 다윗에게서 빛나는 성왕의 모습을 다시 묵상하게 된다.
<때는 밤이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때는 밤이었다
너는 보이지 않고
나는 또렷해지는
때는 밤이었다
너를 애써 지우고
나를 곱게 품는
때는 밤이었다
너의 아픔은 잊히고
나의 쉼이 달콤한
때는 밤이었다
너는 사라지더라도
나는 있으려하는
때는 밤이었다
너를 잊고 버리기에
나마저 있을 수 없는
때는 밤이었다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주간 화요일>(2021. 3. 30. 화)(요한 13,21ㄴ-33.36-38)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요한 13,21-22).”
1)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는 예수님 말씀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은 것과 그의 이름을 언급하시지 않은 것은 유다 자신이 자유의지로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은, 십자가 수난은 힘이 없어서 ‘당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당신의 목숨을 빼앗긴 일이 아니라, 내주신 일입니다.(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2) 제자들은 배반자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저는 아니겠지요?” 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마태 26,22; 마르 14,1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배반자가 바로 나일 수도 있다.” 라는 생각은 제자들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과 열성에 대해서 백 퍼센트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이것은 또,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유다의 발도 씻어 주셨습니다. 또 유다는 완전히 떠나기 전에 ‘성체’를 받아먹었습니다. (루카 22,21).
그러나 한 번 떠나버린(차갑게 식어버린) 유다의 마음을, 예수님의 사랑도, ‘성체’도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힘도, 성사의 은총도, 인간의 죄를 자동적으로 막아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사랑과 성사의 힘이 부족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죄는 인간이 스스로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유다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라고 장담했습니다(요한 13,37).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고 말한 뒤에 이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은 앞뒤가 다른, 또는 모순된 일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는 당시 상황이 그만큼 혼란스러웠음을 나타냅니다. 어떻든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그렇게 장담했으면서도 나중에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함부로 큰소리치면 안 됩니다. 언제나 항상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어쩌면 유다도 어느 시점까지는 자신이 배반자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고, 자기는 절대로 배반 같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자만심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만일에 유다가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했다면 배반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5-27)”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요한 13,30).”
1) 여기서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라는 말씀을, “그 사람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제자들 가운데 하나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분명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사랑을 덜 받아서, 또는 안 받아서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는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가 배반한 것에 대한 아픔과 안타까움이 들어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빵을 주신 일을, 그에게 사랑을 주신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빵을 주셨기 때문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라, 유다가 빵을 받은 일이 먼저 있었고, 사탄이 그에게 들어간 일은 그 다음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먼저 주어졌고, 사탄의 유혹은 나중에 다가왔습니다. 사탄이 먼저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서 예수님의 사랑을 가로막은 것이 아닙니다. 만일에 유다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반대로 했습니다.(유다가 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예수님을 배반했는지, 우리는 그 이유나 원인을 모릅니다. 어떻든 예수님을 배반하라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유다 자신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일입니다.)
3)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라는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나를 배반하려는 너의 계획을 어서 실행하여라.” 라고 그를 밀어내시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네가 해야 할 일을 어서 하여라.”로 생각한다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회개하여라.” 라고 타이르시는 말씀이 됩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배반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때는 밤이었다.” 라는 말은 유다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 유다 자신도 자기 마음이 짙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을 텐데, 이미 마음이 ‘악’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그는 ‘빛’을 거부하고 ‘어둠’을 향해서 갔습니다(요한 3,19-20).
인간이 자기주제파악 못하면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전지 전능의 전지 즉 뭐든 다 아시는 예수님 참 안쓰럽다 생각합니다.
모르는 걸 아는 척하는 것보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하기가 더 힘듭니다.
세상오신 예수님은 하느님이신데 인간으로 사시기 참 힘드셨을 겁니다.
하느님이 인간육체로 죽음의 고통을 받아야 하니 참 한심했을 겁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했으면 구하시려고 육화까지 하셨겠어요.
인간인 제가 한 마리 일개미 되어 여왕개미 모시는 것 상상이 안가요.
인간이 도리어 하느님이라면서 독재자로 천지호령하니 환장할 일이죠.
정말이지 인간이 자기주제파악 못하면 하느님이 등 돌릴 것 빤합니다.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서는 주님의 종 두 번째 노래를 들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종에게 소명의 말씀을 내리시고 종은 대답합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이사 49,3)
그리고 이어서 하느님께서 종에게 소명의 말씀을 내리십니다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6절)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의 때가 바로 다가 오자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으십니다.
제자들과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산란하신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드러내 놓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예기치 못한 이런 말씀은 제자들에게 당황함을 만들어 줍니다.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가 베드로의눈짓을 받고 스승께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25절)라고 질문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시지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주님께서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건네십니다.
요한 복음 저자는 그 광경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
그리고 이어서 저자는 유다가 주님께서 주시는 빵을 나가니 밖으로 나가니 ‘밤이었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 시간이 그대로 밤일 수 있지만 어둠의 세계, 사탄이 지배하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가 떠나고 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31-32절)
그리고 주님께서 이어서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십니다.
주님의 삶에서 정점을 이루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 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는 마지막 만찬에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죽음에서 일어나신 부활이고요. 제자들과 함께하는 만찬의 자리에서 스승이신 주님께서는 한 제자의 떠남의 아픈 순간을 맞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신뢰하는 또 한 제자의 변심을 예언해야 하셨구요. 아주 단순한 식사에서 당신의 몸과 피를 기억하는 성체성사를 세우십니다.
시간적으로 짧은 저녁의 몇 시간이지만 제자들과의 나눔이면서도 이별의 시작이기도 하지요.
겟세마니에서의 제자들과의 기도 시간은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고통과 슬픔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짧은 삼일이 주님의 일생을 마무리하며 예언의 성취의 ‘때’이기도 합니다. 성주간을 보내는 우리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순간이지만 주님과 함께 하는 자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게으로고 편안한 삶으로 익숙해진 우리가 좀더 깨어서 기도하고 우리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를 통해서 부활의 새로움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소중한 은총의 시간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 주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에 노하시고 그의 사악함에 동요하심을 의미한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25절)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빵을 받았으나, 축복받은 빵을 먹지 못했고 생명의 잔도 마시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들에게 갔고, 축성된 잔을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유다가 다른 이들과 생명의 성사를 받지 못하도록 사탄이 그를 그곳으로부터 떠나게 하였다. “때는 밤이었다.”(30절)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행하며 나아갈 때 그 자체가 언제나 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가 사탄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31절)고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 했을 때, 그를 높이 들어 올리셨다. 이렇게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면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영원하신 말씀이 취하신 인성도, 즉 그 인간이신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 안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32절)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33절) 하신다. 주님은 수난 때까지만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며, 당신이 가시는 곳에 제자들은 올 수 없다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이 영광으로 옮겨가시는 것임을 알려 주신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37절) 베드로가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8절) 베드로는 여기서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말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이룰 능력이 없었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했다.
우리 안에도 유다와 같은 탐욕이 있어 주님을 버리고 어둠을 향해 나가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또한 베드로와 같은 두려움 때문에 주님께 대한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분의 식탁에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항상 마시며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이 빛과 어두운 밤을 넘나드는 삶의 연속이다. 베드로는 그렇게 세 번이나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섰고 주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에 빛 속에 살 수 있었다. 유다는 빛 속으로 다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고 말았다. 우리의 실수로 어두운 밤에 떨어졌더라도 즉시 빛을 향하여 머리를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사랑의 등급>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이사야서 말씀이나 복음에서 주님 말씀은 우리를 혼란케 하고, 어떻게 보면 우리의 믿음을 흔듭니다. 이런 말씀들이지요.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말씀하셨다."
주님의 종 입에서 그러니까 예수님의 입에서 헛고생이나 헛심 같은 말이 나와서야 되겠는가?
예수님은 언제나 마음의 평화가 있어야 하는데 혼란이 있으면 되는가?
이런 혼란과 의구심이 이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래서는 안 되는 겁니까?
그런 것이 무슨 결격사유라도 되는 겁니까?
그런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와 같아지시고 그래서 우리와 같으신 예수님은 위안과 힘이 되어 주시지요. 우리도 종종 헛고생만 했다는 허무감이 들고,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는데 그때 주님도 그러시다는 것은 위안이 되지요.
그런데 위안만 되면 안 된다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힘이 되어야 하고 주님처럼 끙하고 다시 일어나 가야겠지요.
사실 일어나 가지 않고 위안만 받는다면 그것은 실패에 안주하는 것이고 그것이 진짜 실패요 헛고생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헛고생만 했다고 하시고 심란해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당신의 사랑이 제자들의 배반 특히 유다의 배반으로 끝난 것 때문인데 당신 사랑이 배반당한 것으로 인한 분노와 사랑의 실패로 인해 상처를 받아 심란하신 건가요?
이런 이유로 심란하신 거라면 그런 주님은 우리의 주님이 아니고, 이런 주님은 우리가 믿고 따를 필요도 없겠습니다.
제자들의 배반은 오늘 복음에서 배반할 거라고 예언하신 것처럼 이미 예상하신 것이고 각오하신 바이고 그래서 배신이 주님께 분노를 일으키지도 사랑의 실패나 사랑의 상처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미래와 운명을 내다보며 심란해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아무리 제자들이 주님 사랑에 배신을 했어도 주님 사랑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배신을 당했다고 해서 사랑이 실패한 것이라면 사랑을 많이 할수록 실패도 많은 법이고 주님은 최고의 사랑 실패자라고 해야 하겠지만 사랑의 실패 여부는 대상이 아니라 나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패에 등급을 매기자면 사랑이 자기 안에 없는 것이 최대의 실패이고, 있는데도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다음의 실패이며, 사랑에 실패하고 더 이상 사랑하기를 그만두는 사랑, 다시 말해서 새로운 사랑을 하지 않은 것이 그다음 실패이고, 사랑을 하되 끊임없이 보상을 바라는 사랑이 그다음의 실패이지요.
한 마디로 사랑은 포기할 때 실패하는 것이지 사랑을 하는 한 사랑은 실패하지 않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지치지 않고 사랑을 하는, 새로운 사랑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맞이하실 영광의 결정적 순간 앞에서 제자들이 각자의 방향을 향하고 있음이 보입니다. 영적 여정 안에 있는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지요.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요한 13,30)
이 대목에서는 빛과 어둠의 대비가 극명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할 유다는 빛의 공간인 주님 현존 장소를 떠나 밤의 현실로 들어갑니다. 그가 다가올 주님 영광의 순간을 위해 쓰인 아픈 손가락일 수도 있습니다. 그의 판단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 여쭈어 보게 하였다."(요한 13,24)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요한 13,37)
이 일화만 보면 예수님의 수석 제자인 베드로는 그분과 그다지 친밀한 밀착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 않는 듯 보입니다. 몹시 궁금하면서도 직접 묻지 못하고 한 다리를 거치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 목숨을 걸 수 있다고 자신하지요. 이 피상적 호언장담은 고의적인 허세라기보다 아직 자신을 잘 모르는 착각에 가까울 겁니다. 어쩌면 예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믿는 것 같아 보이지요.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요한 13,36)
사람마다 때가 있고 자기에 알맞는 고유한 자리도 있지요. 베드로의 때는 회피와 추락과 통회의 용광로를 거쳐 금처럼 정련된 뒤, 그제서야 빛이신 주님을 담아 그 빛을 내는 도구로 거듭나게 됩니다.
"나중에는"
그의 때와 가능성을 너무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언제까지라도 그를 기다리실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허공에 흩어질 맹세라도 그분께는 귀합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우리 안에서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채 빛을 보길 기다리는 완성태를 관상하십니다. 그래서 늘 우리를 기대하고 기뻐하십니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 물었다."(요한 13,23.25)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 누군가에 의해 당신이 팔아넘겨지신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으로 제자들을 긴장시키십니다.
식탁에 둘러앉은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 유독 예수님 곁에 더 가까이 있었던 듯합니다. 스승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니 그만큼 친밀한 관계였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물리적으로 사랑하는 이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는, 영적으로 보면 그분의 품 안으로, 그 뜨거운 심장 안에까지도 파고들어갈 수 있는 거리로 가늠됩니다.
감히 스승을 팔아넘길 이가 누구인지 다들 묻기조차 두려운 질문이 그 제자에게는 가능했나 봅니다. 베드로의 고갯짓에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묻지요. 이 제자와 예수님의 거리는 점점 더 친밀히 좁혀지고, 이윽고 예수님의 속내가 흘러나옵니다. 이 제자와 예수님의 일치는 머지않아 보입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입니다.
"모태에서부터"(이사 49,1.5)
예언자는 부르심이 모태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반복해 이야기합니다. "모태"는 단순히 어머니의 태 안이라는 의미를 넘어 창조의 순간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과 주님의 종이 맺은 관계의 출발처럼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시작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모태에서 부르심을 받고 이름을 받아 세상에 나옵니다. 그런데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버렸다."(이사 49,4)고 탄식하는 순간도 지나야 합니다. 세상 눈으로는 처참히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인생일 수도 있지요. 참 예언자들도 그랬다고 성경의 갈피마다 증언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용광로, 그 광야를 거쳐 다시 주님 품으로 돌아가지요. 근원을 향한 회귀입니다. 이 근원이 있어 우리는 스텝이 꼬이고 길을 잃어도 멈추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론 안개 속을 헤매는 듯, 때론 스스로 눈먼 이인 듯, 때론 온통 폭풍과 들짐승에 둘러싸인 듯 두려워도 다만 멈추지 않는다면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온전한 일치를 향해 그분 품으로 파고들 수 있습니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그분에게서 나왔다가 온전히 그분에게로 돌아간 영혼, 온전히 자신이 됨으로써 그 자신이 평화가 된 이는 주님의 빛이 됩니다. 빛이신 주님과 하나되어, 빛이신 주님을 그대로 투영하는 빛입니다. 부족하고 죄인인 우리가 주님 안에서 빛이 되면, 세상은 그 빛을 보고 주님께로 나아와 구원의 길로 들어설 것입니다.
"더 다가가 물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한 것처럼, 모호하고 막막하며 두려운 순간일수록 주님 가슴 깊이, 더 깊숙히 파고듭시다. 그리고 그분께 여쭙시다. 어떤 질문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여쭙는 모든 질문이 그분 심장을 두드리고 애간장을 뒤집어놓아 우리를 당신 안으로 와락 받아들일 자비를 흔들어 깨울 테니까요. 사도 요한처럼 예수님 품에 기대어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승리. - 절망은 없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즘 극단적인 대립상태에 있는 진보의 좌파와 보수의 우파를 보며 얼핏 느껴지는 소감은 좌파는 아마추어처럼 낭만적이고 방어적이며 정의롭고 착하나, 약하고 무능해 보이고 디테일에 약하며, 우파는 프로처럼 현실적이며 공격적이고 잡초처럼 독하고 악착스러워, 집요하고 끈질겨 생존력이 강하며 유능하고 디테일에 강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더불어 좌파는 분열로 망하고 우파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때로 선善하고 무능無能하기 보다는 악惡해도 유능有能했으면 하는 유혹도 들고, 무질서의 혼란한 선보다는 질서의 악을 선택하고픈 유혹도 들곤 합니다. 이런 무지의 유혹에 빠질 때 독재자의 탄생입니다. 참으로 올바른 분별을 위해 깊고 넓고 긴 시야에 깨어 있어야함을 절감합니다.
아무리 주방장이 착해도 무능해 음식맛이 없다면 손님들은 점차 떨어질 것이고, 아무리 의사가 착해도 무능하여 환자를 잘 치료하지 못하면 환자들도 점차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정말 좌파든 우파든 선善하면서도 유능하고 현실적이며 디테일에 강했으면 좋겠고, 분열도 부패도 없이 국정을 운영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 파스카의 영성에 파스카의 삶을 사는 이들이라면 선하면서도 유능하고 디테일에도 강할 것이며 분열도 부패도 적을 것입니다.
예전 김수환 추기경님의 정부 당국자들에 대한 탄식도 생각납니다. “대화가 될 만한 사람은 힘이 없고, 힘있는 사람은 대화가 안되고---”, 대화도 되고 힘이 되는 사람이야말로 파스카의 영성을 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죽음같은 겨울에서 생명같은 봄으로의 파스카의 계절, 봄입니다. 정말 전례시기에 잘 맞는 우리나라의 계절같습니다. 벌써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만개하기 시작한 무수한 봄꽃들, 살구, 매실, 산수유, 목련, 개나리, 진달래 등 나무꽃들에 이어 민들레, 냉이, 꽃다지, 제비꽃, 수선화 풀꽃들입니다. 모두가 겨울을 이겨낸 파스카의 봄꽃들이라 더없이 청초합니다. 아마 일년중 가장 꽃들이 많이 피어나는 계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승리를 상징한 봄꽃들같습니다. 참으로 절망은 없음을 웅변하는 봄꽃들입니다. 늘 강조하지만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하느님의 좋아하시는 바,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 구원의 삶입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단어가 절망입니다. 정말 믿는 이라면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의 삶이 아닌,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의 삶을 살 것입니다. 지난 성지주일 교황님도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지 감동할 수 있는 ‘놀라움의 은총’을 청하자는 요지의 강론 말씀을 하셨습니다. 놀라움의 감동을 잃고 있는 현대인들같습니다. 예전에 써놨던 시 세편을 소개합니다.
-“겨울 지낸 개나리!
햇빛 환한 봄날도 너무 어두워
샛노란 꽃 초롱들 가득 켜 들고
대낮의 어둠 환히 밝히고 있다”-2001.4.11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자리 탓하지 말자
그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자리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회색빛 죽음의 벽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내린
연보라빛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구나
절망은 없다”-2001.4.18.
약해 보이나 한없이 질긴 개나리, 민들레, 제비꽃 모두가 절망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기쁨을 전하는 대표적 파스카의 봄꽃들입니다. 20년전 보다 무려 보름쯤은 빨라진 봄임을 깨닫습니다.
결론하여 ‘절망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처지가 참으로 곤궁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말그대로 절망적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최측근들인 열두 제자중 두 제자의 배신에 직면한 예수님은 참으로 고독하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팔아 넘길 유다가 빵을 받고 나가는 장면의 묘사가 절망 상태의 어둠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유다는 빵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바로 이 어둠의 절망의 순간 터져 나오는 주님의 파스카의 승리의 환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어둠 넘어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 구원 섭리의 깊고 넓은 시야에서 전체와 부분을 조망하시는 예수님의 파스카의 시야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시야를 지니셨기에 베드로의 배신을 예고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유다와는 달리 그의 회심도 내다봤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가 그대로 복음의 예수님 고백처럼 들립니다. 사실 초대 교회 교우들은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고백을 그대로 파스카 예수님의 고백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주님은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이사야서의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라는 예언 말씀이 그대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를 통해 점차 실현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결론하여 파스카 예수님의 신비를, 영성을, 기쁨을, 승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절망은 없다는 결론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파스카의 기쁨과 승리의 삶을 살게하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71,5-6ㄱㄴ). 아멘.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남창현 T.아퀴나스 신부님
우리는 어릴 때는 얼른 대학생이 되길 원하고 대학생일 때는 직장인이길, 직장인일 때는 결혼을 결혼 후에는 안정적인 미래를 꿈꿉니다. 젊었을 때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나이가 되기를 기다립니다. 은퇴를 앞두고는 노후를 걱정합니다. 그리고 나이 들어서는 또 반대로 젊었던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되돌릴 수 없는 지나간 과거와 잡히지 않는 미래에 끊임없이 손을 뻗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릴 때는 어릴 때가 아니면 배울 수 없는 것이 있고, 성인이 되어서는 성인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입니다. 노인이 되어서는 젊은 시절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을 배우고 알 수 있는 법입니다. 병 들었을 때는 병이 낫기만을 기도하기 보다 병들었을 때에만 깨달을 수 있는 바를 깨닫기를, 마음에 상처를 얻었을 때는 마음에 상처를 얻었을 때에만 깨달을 수 있는 바를 깨닫기를, 배신당했을 때는 배신당했을 때에만 깨달을 수 있는 바를 깨닫기를, 가난할 때는 가난할 때에만 깨달을 수 있는 바를 깨닫기를, 나이들어 약해졌을 때는 나이들어 약해졌을 때만이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것을 깨닫기를, 깨지고 넘어지고 무너졌을 때는 그때가 아니면 결코 깨닫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함승수 신부님
미래에 어떤 행동을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영어 표현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will”이고, 다른 하나는 “be going to”입니다. 먼저 “will”은 주체가 나름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계획이나 정확한 시간을 확정하지 않고, 그저 막연히 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수준이지요. 그에 비해 “be going to”는 언제 어떤 일을 할지 구체적인 계획을 확정하고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노력하는 과정까지를 포함합니다. 아무래도 주체가 그 일을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기에 계획한 그대로 실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다가 “be going to”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언제 어떻게 팔아넘기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사제들로부터 이미 배신에 대한 ‘대가’까지 받은 상태였지요. 그랬기에 그 계획이 잘못된 것임을 잘 알면서도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관차처럼, 종착역을 향해 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계획을 다 알고 계셨음에도 미리 말리지 않으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미 결론까지 다 내고 온 유다가 제 고집을 꺾지 않을 것임을 잘 아셨기에, 그를 ‘배신자’로 낙인 찍어봐야 제자단에 혼란과 분열만 초래하게 될 것을 아셨기에, 그의 잘못과 부족함까지 기꺼이 끌어안으신 겁니다. 유다가 그런 주도면밀함과 강한 추진력을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에 사용했다면 참 좋았을텐데…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한편, 베드로는 “will”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막연한 결심만 갖고 있었을 뿐,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자신의 부족한 점과 약점은 무엇인지, 그런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들을 해야할지를 제대로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늘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만 가졌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서는, 자기는 ‘예수라는 사람을 모른다’며 그분과의 관계를 세 번이나 부정하는 죄를 짓고 맙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계획과 실질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고싶다는 막연한 바람만으로는 고통과 시련을 극복할 수 없고, 세상의 유혹들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나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손을 놓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구원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노력을 통해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가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주님을 바로 보고 따르자<요한 13/21-33.36-3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님의 뒤를 보고 따르는 사람은 주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한 것에서 시작합니다. 유다스의 배밴 과 베드로의 배반은 주님을 따라 산다고 하면서 바로 따르지 못한 사람입니다.
유다스는 주님을 따라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더 많은 이익을 보라라 생각하고 권력을 잡으면 한자리 할것으로 생각하고 따랐지만 맨날 죽은 다 하고 희마이 보이지 않아 적들과 대면시키면 힘을 내어 싸위 승리할줄 알았는데 생각이 잘못되어 십자가 형을 받고 죽음으로 끌려 갈 때 실망하고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만 믿고 나는 믿음이 강하다 죽기를 향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생각하였지만 두려움에서 주님을 피해 도망가면서 주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였습니다. 주님은 이 두 사람의 뒷일을 다아시였지만 시대에 남을 일이라 버려두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뒤를 따르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시였습니다.
1. 세속적 이익을 탐하여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 물질적 손실이 있으면 주님을 떠나고 등을 돌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니자로의 집에서 정성드리는 것을 “돈으로 보고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면.“ 하듯이 뒤만 보는 행위 우리도 믿으서 손해 보는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손해보면 믿음을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믿음은 앞만 보고 나가야 합니다.
2. 믿음은 두려움을 없이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엄밀이 말해서 살기위한 믿음이 아니라 죽기 위한 믿음이며 결국은 죽음으로 이세상은 끝을 맺는 것을 알았으면 베드로사도는 결고 약한 생각을 하지않고 요감이 주님의 제자이다 하고 내세웠을 것입니다. 역시 세상을 위한 미련으로 주님을 완전히 따르지 못하고 모르는 사람이다 하고 부정 하였듯이 세싱의 많은 고난이 밀려오면 믿음을 버리는 사람이거나 자기에게 아무런 보증이 없으면 믿음을 버리고 안전을 찾아 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유다스에게는 “ 네가 하려는 일을 하여라.” 하시며 알고 있지만 버려두시고 나중에 자기 죄를 죽을 만금 뉘우처 저는 용서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사도는 뉘우처 용서를 청하고 다시 시작한 것은 “ ” 내가 가는 곳에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니중에는 따라 오게 될 것이다.“ 하심 같이 버리지 않고 살아 있는 우리를 가르키고 빛으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죄인을 위한 것이여서 뉘우치는 사람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뉘우처 다시 구우너의 대열에 들도록 서두러 믿음으로 주님을 보고 뛰어가 따르도록 합시다. 세상의 이익만 탐하는 마음은 버리고 두려움 없이 주님의 십자가의 갈로 들어서 모두 손을 잡고 함께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며 잘못 가는 방향을 주님에게로 돌이는 날입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 한 사람, 곧 유다가 당신을 팔아넘길 것을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에게 너무나도 초연하게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유다의 계획 속에는 자신이 꿈꾸는 세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꿈은 아마도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꿈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꿈이었으리라 추측이 됩니다. 결국 유다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 마지막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죄악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이 꿈꾸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스스로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잊지 말이야 할 것은 우리가 꿈꾸는 세계가 인간적인 욕심의 꿈일 때 그 욕심은 채워지더라도 결국엔 그 마지막은 죽음뿐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과 같은 꿈을 꾸게 될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살아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어디로 가길 원하시나이까?
인영균 클레멘스 신부님
오늘 최후만찬석상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그 유명한 소설의 라틴어 제목 ‘꿔바디스’(‘Quo vadis, 어디로 가십니까)이 이 물음에서 나왔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은 우리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우리도 주님 뒤를 따라가야 하는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가시는 길을 잘 아는 제자라면 주님께 이렇게 바꾸어 물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십니까?”라고. 그러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가는 그 길을 내가 함께 걸어 간다”고.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걷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걸어가는 길의 동행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독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그분은 절대로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걷도록 원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지만 우리를 인도하시면서 이끄십니다. 올바른 길로 가도록 여러 방식으로 지혜를 주십니다.
오늘도 길을 걸으면서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이 물음이 우리를 주님이 가시는 길로 자연스럽게 걷도록 이끕니다. 시편 말씀이 떠오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편 23,4). 우리의 목자이신 그분이 옆에 계시니,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주신 그분이 함께 계시니, 정녕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참 든든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사람은 태어나 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부모님 품 안에서 행복하게 삽니다. 그러다가 집 밖으로 나와 이웃을 만나고 사회를 접하면서 자신이 세상의 최고가 아니며, 그저 그런 사람 중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보다 우월한 이들이 있음을 알게 되고, 자신이 남보다 더 많은 부와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원의와 관계없이 많은 차별과 손해와 속임도 당하고 삽니다. 그래서인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른이 된다고 모든 것이 다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도 모르게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만 같은 사회에서 강한 사람에게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 강한척하며 피해자요 가해자로 살아갑니다.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면, 살아가면서 이래도 저래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달래기가 어렵고, 어딘지 모르게 자신이 손해 본듯하고 자신의 행복을 빼앗긴 듯한 패배 의식과 피해의식마저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는 사이에 자신의 내부에서 느끼게 되는 허전한 마음을 불특정한 누군가에게 향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대체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치 악에 빼앗긴 듯한 부자유하고 불편한 감정들을 키우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는 인생의 피해자요 패배자인 듯한 감정으로 허망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일깨워 주십니다.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이사 49,1-3) 이 말씀을 들으면 내가 결코 혼자가 아니며, 그냥 그렇게 세상에 버려진 듯 내던져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줍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지켜봐 주시고 지켜 주고 계신다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도우심과 함께하심을 느끼면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신앙의 빛을 던져 주십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4절) 세상 피조물에게서는 내 허전함과 채워지지 않는 갈망을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일러주시는 듯합니다. 내 보상은 주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내 갈망과 내 허전함과 나를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사라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내 생애의 순간순간을 어떻게 함께해오셨는지를 신비스럽게 알려 주십니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5절)
그리고 드디어 오늘 삶에 지치고 힘겹던 우리에게 새 희망의 빛을 비춰주십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6절) 그리고 그 희망의 문을 나에게 열라고 부르십니다. 내가 주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를 느끼고 이해하며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 지금까지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이제 나를 통해 주님 구원의 나라를 계속 지으시어 완성해 나가실 것입니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요한13,25)
이민락 라우렌시오 신부님
+찬미예수님
성경에 가슴 아픈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예수님을 따르고자 모였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 둘 배신을 합니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요한13,25)라고 물으며 자기는 결코 배신하지 않을 것이며 목숨까지 내 놓겠다는 베드로는 그 후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닌 사람입니다. 기쁘고 좋을 때는 “주님, 주님!” 하지만 시련 과 고통 앞에서 주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반문합니다.
무용지용 (無用之用)이란 말이 있습니다.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입니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산에 있는 나무는 사람들에게 쓰이기 때문에 잘리어 제 몸에 화를 미치고, 등불은 밝기 때문에 불타는 몸이 된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베어지고, 옻나무는 그 칠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잘리고 찍힌다. 사람들은 모두 유용(有用)의 용(用)만을 알고 무용(無用)의 용(用)을 알려 들지 않으니 한심한 일이다.“
세상에 쓸 만한 것들은 그것의 가치 때문에 잘리고, 불태우고 베어지고 사용이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 쓸 만한 것들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에 쓸모없이 보일지라도 그 나름대로 가치와 쓸모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의 무용의 용입니다. 쓸모라는 것은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쓸모 론으로 말하면 쓸모가 상황에 따라 변하겠지만 변하지 않는 쓸모 들이 있습니다.
장자의 무용지용 론에는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하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장자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 장자는 두 가지로 대답합니다.
하나는 권력이나, 지위, 돈 등, 자기 바깥에 있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고 성취하는 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두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유용의 용으로서 상황에 따라 변화됩니다.
또 하나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참된 자아”를 깨닫고 실현하는 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무용의 용으로서 상황에 따라 변화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성취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지 않는 참된 자아와 참된 삶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믿음은 유용의 용이 아니라 무용의 용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님을 찾고 쫓아 다녔지만 그가 추구하고 구하고자 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 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고 추구했던 쓸모가 예수님을 통해 아님을 알자 은전 30냥에 스스럼없이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유용의 용만을 추구한 결과 죽음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배신을 하게 만든 상황이 너무나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은 온데 간데없이 상황적인 모면만을 벗어나기에 급급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해있을 때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평상시 우리가 하는 기도와 믿음의 삶이 무용이 아니라 유용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깊이가 깊을수록 믿음의 높이가 높아집니다. 그것이 나를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깊이를 만듭니다.
내가 하는 생각이나 말, 행동 하나 하나가 나를 만들어갑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주님을 향한 생각이나 말, 행동이 믿음의 사람을 만듭니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성 주간에 나에게 믿음을 더해 주시길 겸손 되이 주님께 청합시다. 아멘.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요한 13,31)
이근상 시몬 신부님
'유다가 나간 뒤', 주님의 '영광'은 무엇일까? 유다가 나간 뒤란 믿고 의지하였던 이로부터의 배신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순간이고, 철벽같이 차가운 등을 보는 때이니 이걸 영광이라 말하는건 깜깜한 어둠을 두고 밝다고 말하는 식이다. 거짓이 아니라면 미치도록 간절한 절규?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 당신이 고백하는 '영광'은 확신에 찬 순한 반복.
요한 복음은 수난과 십자가를 일관되게 영광으로 고백한다. 하느님의 뜻이 밝고 밝게 드러난다는 뜻이다. 깊고 검은 어둠 속에서 빛을 고백하는 것. 부활의 빛이 스며나오지 않아도 괜찮은, 오로지 마음 만으로 볼 수 있는 까만 빛. 희망이라고도 하고, 사랑이라고도 하는. 하지만 말로는 도무지 담아낼 수 없는 영, 겪어낸 이들만이 아는 빛. 절망해 보지 않은 자가 가늠할 수 없는 빛. 죽지 않는 자, 두려움이 없는 자는 고백할 수 없는 희망.
"닭이 울기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 3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신뢰와
배신 사이에
완벽하지 못한
우리가 있다.
그 어떤 것도
과신하거나
자만할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십자가의
여정에는
배신의 시간도
있다.
반박할 수 없는
배신의 마음이다.
환상이 깨어지고
거짓이 부서진다.
단단함이
부드러움으로
바뀌는 시간이다.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기까지
나약한 우리는
많은 여정을
지나간다.
그만큼
우리의 뜻을
내려놓기가
힘든 것이다.
이러한
우리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이
성주간의
은총이다.
힘들어도
십자가를 향해
나가야한다.
배신한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분또한
주님이시다.
변덕스러운
우리를 다시
받아주시는
분또한
주님이시다.
배신과
배신 사이에
배신을 비추는
십자가가 있다.
우리의 삶
전체를
비추어주는
거울이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고
우리는 수천번
수만번 배신하고
회개한다.
십자가를
알기까지
우리의
배신이 있었고
십자가를
사랑하기까지
주님의
은총이 있었다.
배신과
은총 사이에
성주간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다.
제가 사는 강화에는 늘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입니다. 그래서 주말이면 도로가 꽉 막히기도 합니다. 이렇게 도로가 막힐 때 급한 일이 있어서 성지 밖으로 나가게 될 때면 어떻게 빨리 이 교통 체증 구간을 통과할 것인지를 궁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로지 앞만을 바라보며 운전하게 됩니다(물론 요즘에는 관광객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강화대교에서 발열채크를 하다 보니 역시 많이 밀립니다).
며칠 전, 외출했다가 다시 성지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어서 마음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날도 차들이 많아서 교통 진행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젼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차들의 흐름에 맞춰서 앞으로 가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새로 생긴 가게들이 보였고, 새로 출시된 차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변을 보면서 전혀 지루하지 않게 성지에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여유로움이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해 줌을 깨닫습니다.
오늘 하루 보았던 풍경,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기억하십니까? 풍경과 사람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순간을 만족스럽게 살 수 있는데, 너무 바쁘게 앞만 보며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작지만 소중한 행복을 놓치며 사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중요하다면서 정작 행복해질 수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는 나 자신은 아니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십니다. 바로 자신을 배반할 유다 때문인 듯,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유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꾸짖으셨지만, 유다는 자신의 약한 곳을 공격하는 사탄에게 향합니다. 유다의 약한 곳은 물질이었습니다. 복음에서는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돈을 가까이하면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유다도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요. 그러나 희망을 잃어버리고 용서를 청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베드로의 용감한 단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하는 헛말이 되었습니다.
그 모든 사실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실까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지금에 충실하지 못하고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만 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과연 환하게 웃으실 수가 있을까요?
더는 주님의 마음을 산란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주변의 작지만 소중한 행복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제는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야 할 때입니다.
질투는 언제나 타인과의 비교로 인해 생겨나며, 비교가 없는 곳에는 질투도 없다(프랜시스 베이컨).
지금을 잘 살 수 있는 길.
인생의 정답을 찾지 마시길. 정답을 만들어가시길.
내일을 꿈꾸지 마시길. 충실한 오늘이 곧 내일이니.
남을 부러워 마시길. 그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시류에 휩쓸리지 마시길. 당대는 흐르고 본질은 남는 것.
멘토를 맹신하지 마시길. 모든 멘토는 참고 사항일 뿐이니.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단지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이시길.
그리고 당신 마음속의 올바른 재판관과 상의하며.
당신만의 인생을 또박또박 걸어가시길.
당신이란 유기체에 대한 존중을 절대 잃지 마시길.
박웅현 작가의 ‘여덟 단어’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내 마음, 내 행동, 내 말을 다시금 되돌아보면서 지금을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께 아픈 손가락 같았던 존재, 유다 이스카리옷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복음 13장 21절)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 이후, 제자들은 깜짝 놀라면서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혹시?’ 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긴박하면서도 미묘한 분위기 속에 두 제자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사람은 최후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앉아있는 제자입니다. 요한 복음 사가는 이 제자에 대한 실명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합니다. 그 제자는 요한 사도로 추정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품에 기대어!’ 이런 행동은 연인 중에서도 연인들이나 하는 행동입니다. 통상적인 시선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장면입니다. 솔직이 남자들끼리 좀 ‘거시기’한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제자들의 눈총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저 친구는 시도 때도 없이 대체 뭐하자는거지? 이 긴박한 상황에 저러고 싶을까? 차라리 영화를 찍어라. 영화를!’
그러나 요한 사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승님을 향한 애정을 온 몸과 마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향한 요한의 존경과 애정이 컸습니다. 요한는 자나깨나 예수님, 앉으나 서나 예수님, 사나 죽으나 예수님 뿐이었습니다.
이런 요한 사도였기에 목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골고타 언덕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그 이유는 언제나 예수님께 ‘딱!’ 붙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예수님 가까이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세상적, 통속적인 사랑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구세주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았음에서 오는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됨에서 오는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반면 다른 제자 유다의 행동을 한번 보십시오. 유다는 제자단의 총무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혜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감사의 표현으로 예수님께 예물을 드렸겠지요.
예수님은 받은 예물을 즉시 총무인 유다에게 넘겼습니다. 그리고 제자단의 숙식이라든지 생필품 구매를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견물생심이라고 막대한 돈을 만지게 되자 유다의 머릿속에 엉뚱한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스승님을 통해 꿈꾸던 지상 왕국, 그에 따른 물좋은 자리, 지상에서의 복락, 이런 것들이 물건너가버리게 되면, 그때 내 청춘, 내 인생은? 그래! 혹시 모르니 미래를 위해 비자금을 좀 챙겨두자!’며 조금씩 조금씩 공금을 빼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다는 자연스레 스승님 앞에서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늘 멀찌기에서 서성거렸습니다. 결국 말만 제자였지 이미 그는 제자직을 버렸습니다.
그런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처신이 특별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유다의 배신과 부정 행위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 저 같았으면 공개석상에서 혼쭐을 냈을 것입니다. 제자단에서 축출하거나, 총무 직무에서 뺏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유다의 개인적 자유 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끝까지 인내하시며, 유다의 배신 행위를 공개하지 않으십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곰곰히 묵상해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애초부터 유다에게 배신자의 운명을 부여하셨을까? 유다의 회개 가능성은 없었을까? 예수님께서도 유다의 운명을 아시고 그가 배신하도록 그냥 방관하신 것일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유다는 예수님에게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였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속담처럼 유다 역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였습니다. 당연히 유다도 예수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의 고백과 회심, 새생활과 구원을 인내롭게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신 행위에 대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다른 제자들에게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실명을 거명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끝내 빛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갔고, 결국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아있었던 것이라고는 철저한 배신과 그에 따른 참혹한 후회, 비참한 죽음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시면서도 무지하고 불충실한 제자들과 오늘 우리들을 걱정하시는 사랑과 인내의 주님이십니다.
신앙도 속도보다 방향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속도보다 방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산인 줄 알고 열심히 올랐는데, “저 산이었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요? 가만히 있는 편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방향을 잃으면 다 잃은 것입니다.
유럽에서 공부하는 저희 교구 유학생들은 한곳에 모여 성탄절과 새해를 함께 지냅니다. 한 번은 독일에 모여 스키를 탄 적이 있습니다. 리프트를 타고 오르고 또 오르니 정상이 나왔습니다. 정상에 올라가니 그곳은 오스트리아였습니다. 워낙 스키장이 큰 것입니다. 즐겁게 놀다 보니 리프트 시간이 다 되어 마지막으로 내려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스키를 잘 탈 줄 몰랐던 로마에서 온 우리는 조심조심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먼저 내려가신 어떤 신부님이 끝까지 다 내려와서 잠깐 길을 잘못 든 것입니다. 리프트로 다시 올라올 수 없어서 그분은 끝까지 내려갔습니다. 나중에 한 명이 사라진 것을 알고 전화로 통화하여 그분을 모셔왔습니다. 마지막 잠깐 길을 잘못 들었는데 차로 몇 시간 떨어진 곳에 가 계셨던 것입니다. 정말 속도가 10이 중요하다면 방향은 90이라 할 것입니다.
저도 대학 때 친구와 지하철을 거꾸로 탄 적이 있습니다. 저는 시골 사람이라 전철을 많이 타보지 않아서 지하철 지도를 잘 볼 줄 몰랐습니다. 친구가 당연히 지하철을 잘 탔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방송이 나오는 것을 몇 번 듣더니, “아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황급하게 다음 역에서 뛰어내려야 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는 더블린에서 개최되는 대영 학술협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탔는데 연착하여 더블린에 도착했습니다. 회의 시간이 매우 촉박했습니다. 그래서 기차역에서 나오자마자 마차를 타고 마부에게 “빨리 달려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한참을 달리던 중 헉슬리는 목적지를 말하지 않은 것을 기억하고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요?”라고 물었습니다. 마부는 “모르겠는데요? 그냥 시키신 대로 빨리 달리고만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집니다. 신앙은 하나의 여정입니다. 어디서 출발하여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모르는 여행자는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하나의 여행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출발점과 시작점을 알아야 합니다. 성당만 나온다고 전부가 아닙니다. 각자의 목적지는 각자가 정하는 것입니다. 방향은 자신이 잘 정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당을 열심히 나오면 방향을 잘 정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주님 해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성당에 나오는 것은 우리가 가져야 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성당에 나와서 내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두 제자의 방향이 극명하게 구별됩니다. 가리옷 유다와 베드로입니다. 유다는 어둠으로 나아가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려 합니다.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을 3년씩이나 따라다녔지만 계속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방향과 반대로 가려 했습니다. 성당에 나오는 것만이 목적인 사람도 자칫 가리옷 유다처럼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묻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당에 나와 예수님께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간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죄를 이기는 복음삼덕이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실질적인 신앙의 출발점은 죄로 이끄는 세 욕망인 ‘삼구’이고 그 목적지는 죄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복음삼덕”인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만 따랐고 베드로는 이 복음삼덕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게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몸으로만 따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교만과 육욕과 소유욕에서 탈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하기 직전 그 순교를 피해갈 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도 오늘처럼 또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 십자가를 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십자가 순교의 영광으로 나아갑니다.
갈멜 수도회를 개혁했던 두 분이 계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입니다. 이분들은 얼마나 힘든 회칙을 주장하였던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같은 수도회 수녀들에게도 미움을 받았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수사들에게 몇 달 동안 갇혀 심한 박해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쓴 첫 회칙은 너무도 엄격하여 그의 제자들이 불태워버렸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실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으면서 여전히 삼구에서 머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 신자들 가운데서는 지옥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보다 안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신앙생활의 방향을 잃고 있는 지금입니다. 이 세상에 머물며 영화를 누리는 것이 신앙의 목적인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세계관은 이 세상에서 탈출하여 십자가로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지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어디론가 향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예수님의 십자가 삶과 가까워짐을 의미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저지에 있는 뉴튼 수도원엘 다녀왔습니다. 피정 하는 분들을 위한 강의, 고백성사, 성체강복이 있었습니다. 한번 가고 싶었는데 하느님께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수도원 입구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식수가 있었습니다. 뉴튼 수도원은 문재인 대통령이 방문할 특별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바로 수도원에서 평생을 살았던 마리너스 수사님입니다. 수사님은 1950년 화물선의 선장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22일 14,000명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탈출했습니다. 선장은 그 뒤로 미국의 뉴튼 수도원에 입회했고, 200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도원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당시의 상황을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배에서는 한 아이가 탄생했고, 4명의 임산부가 더 있었습니다. 14,005명은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날은 12월 24일 성탄 전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 14,005명이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사람 중에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님이 있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68년이 지난 2018년 6월 1일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 1950년 겨울, 기적의 항해, 마리너스 수사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라는 이름으로 기념식수를 하였습니다. 수도원 뒤뜰에는 수사님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잠시 들러 한국인들을 탈출시켜준 수사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성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외로운 ‘항해’를 하십니다. 곳곳에 암초가 있습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한사람이 죽은 것이 많은 사람이 죽는 것보다 낫다.’라는 말로 예수님의 죽음을 합리화 시키려 했습니다. 빌라도는 손을 씻으면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호했던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어서 밤을 새워 기도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인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인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무서워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홀로 지고 외로운 항해를 하십니다.
저도 사제가 되면 열심히 기도하고, 겸손하게 봉사하고, 성사를 성실하게 집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된지 29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처음 먹었던 그 마음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족들의 빛이 된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베드로는 서로 다른 인격체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격 안에, 베드로의 인격 안에 모든 것이 함께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욕심과, 나의 이기심을 먼저 생각하면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베드로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면 우리는 또한 언제나 민족들의 빛,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곧 성삼일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을 생각하며, 주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십자가를 지고 간다면, 우리가 누군가의 아픔에 동참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시몬과 베로니카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할 산성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보루시옵니다. 저의 하느님, 악인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
<나의 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은
나의 일을
막지 않으신다
나의 일
내가 하려는 일
내가 하고픈 일
내가 하고프지 않은 일
내가 해야만 할 일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할 수 없는 일
많은 이가 아는 나의 일
그분과 나만 아는 나의 일
수많은
나의 일을
그분은 막지 않으신다
막지 않으심이
나의 일에 대한 그분의
부드러운 동의일 수도 있지만
단호한 거부일 수도 있다
막지 않으심이
나에 대한 그분의
따뜻한 격려일 수도 있지만
매서운 질책일 수도 있다
내가 하고자 하면
당신이 막으실 수 없을 만큼
그분은 나에 대해 무기력하시다
내가 무엇을 하든
당신 스스로 감내하실 수 있을 만큼
그분은 나에 대해 절대적이시다
무기력하시면서
절대적이신 그분께서
나의 일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시고
나의 일을 당신의 일로 만드신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에게 너무나도 초연한 모습으로 그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때로는 그것이 성공할지 실패할지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당신의 일의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우리 인간이 바라보기에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실패를 통해서도 당신의 일의 완성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요즘 우리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으면서 수많은 걱정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사태를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분명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시며 우리 모두를 진정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닭이 울었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13,38)
위기에 처해보라. 살려고 발버둥친다. 부정에 부정이 쌓여간다. 한번은 양념으로 아주 쉽게, 두번째는 양심을 갖고 생각해 보다가, 세번째는 양심도 없이 완강하게 부정한다. ‘나는 그를 모르오’라고 답하고 회피한다. 잘못했을 때 실을 끊으면 쉽게 해결된다. 그런데 어디 그런가? 끊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며 실이 동아줄이 된다. 실일 때 끊지 못했는데, 동아줄은 더 꾾기가 어렵다. 자기 스스로 우물을 파고 어려운 일로 만들었다. 끝으로 체념하고 모든 일을 부정하고 망친다.
새벽이 밝아온다. 새벽이 오기 전에 회개해야 한다. 아침기도를 해야했다. 잠을 자다가 기회를 놓쳤다. 제자 중 하나는 스승 예수님을 팔았고, 또한 제자는 ‘나는 그를 모르오’ 세번 부인했다. 닭이 울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기고 오리무중 같은 밤을 맞이하고 있었고(요한13,30),베드로는 닭 울음 소리에 놀라 깬 새벽을 맞이한다. 배드로는 깨어나 아침기도를 했다. 삼 세 번 ‘모른다’고 하며 실을 동아줄로 만들고 있었지만 베드로는 아침기도 덕분에 부정의 부정인 동아줄을 끊어내고 있었다.
<배반자 유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알고 뽑으셨을까? 모르고 뽑으셨을까?
그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사도로 뽑으셨다면, 예수님의 수난과 유다의 배반은 마치 잘 만들어진 각본대로 진행된 일처럼 되어버리고, 유다에게는 배반의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됩니다.
또 모르시고 뽑으셨다면 하느님의 전지전능과 모순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사도들을 뽑으실 때의 일은, 우리는 알 길이 없는 영원한 수수께끼(신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유다가 배반했기 때문에 생긴 일일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의 배반과 상관없이, 또 그가 배반하기 전부터, 예수님을 죽이려는 박해자들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유다의 배반은 예수님의 죽음을 초래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 편에 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유다가 배반하기 전에 그것을 막지 않으셨을까?
또 그가 배반한 후에도 왜 그를 타이르거나 설득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의 사도인 유다를 구원하지 않고, 그가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내버려두셨을까?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유다를 꾸짖으시거나 타이르시지 않고 내버려두신 것은,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유다의 배반이 하느님의 계획에 속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를 내버려두신 것은 아닙니다. 유다의 배반은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걸림돌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회개하기를 바라셨는데, 회개란 전적으로 그 자신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고, 그래서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으로 기록했는데,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는 말은 유혹을 했다는 뜻이지 유다의 자유의지를 빼앗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일은 전적으로 그 유혹을 받아들인 유다 자신이 자기의 자유의지로 행한 일이고, 따라서 배반의 책임도 그 자신에게 있습니다. (사탄에게는 유혹한 책임이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왜 유다가 배반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배반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왜 적극적으로 그를 막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 당시에는 사도들의 공동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유대감이 약한, 느슨한 공동체였을 것입니다.
“누가 더 높은 사람인가?” 같은 문제로 사도들이 서로 다투는 모습이 그 공동체는 별로 친밀하지 않은 공동체였음을 잘 나타냅니다. 그래도 유다가 혼자서 따로 떨어져서 돌아다니는데도 다른 사도들이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랬던 사도들이 성령 강림 후에는 완전히 한 몸이 되는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배반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사도들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일이 급박하게 전개되어서,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유다를 원망할 틈도 없이,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달아났으니...)
도대체 유다는 왜 배반했을까?
예수님을 배반한 대가로 유다가 돈을 받았고(마태 26,15), 또 평소에 공금을 횡령하던 도둑이었다는 말이 있어서(요한 12,6), 일반적으로 그가 돈 때문에 배반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꼭 돈 때문만은 아닐 것이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유다는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또는 ‘메시아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나라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서 실망했을 가능성도 있고,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 때문에 믿음이 흔들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십자가 수난을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을 말릴 때(마태 16,22), 어쩌면 유다도 베드로 사도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또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와 고난을 예고하시는 말씀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유다는 사탄의 유혹도 받았고, 돈을 밝히는 사람이었고, 박해와 고난을 감수할 마음도 없었고, 그래서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예수님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배반자 유다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길, 돌밭, 가시덤불’에 모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유다는 언제 예수님을 배반할 생각을 했을까?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줄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때(마태 10,1), 유다도 그 권한과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마태 10,5), 유다도 파견을 받아서 복음 선포 활동을 했습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배반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고, 예수님께서 자주 기적을 행하시던 활동 초기에는 자기가 장차 누리게 될 영광 같은 것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 시기에는 자기가 나중에 변절해서 배반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유다가 마지막에 자살한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될 줄을 몰랐는지, 사형 선고 후에 자기 잘못을 뉘우쳤습니다(마태 27,3).
그러나 회개하지는 않고 자살해 버렸습니다(마태 27,5). (유다의 이야기를 통해서 ‘뉘우침’과 ‘회개’는 구분되는 다른 일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것은 회개의 시작일 뿐이고, 회개의 완성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완전히 머무를 때 이루어집니다.)
도대체 유다는 왜 자살했을까?
아마도 자기는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용서받기를 포기했을 것이고, 그래서 자살했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하고 단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사실 유다의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자살’입니다.
회개하기를 포기하고 용서받기를 포기하고 구원받기를 포기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살아서는 못가는 하늘의 영광에.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감명적입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라틴어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영광스러운 그곳!
죽어야 영광이 있는 하늘나라로 간다는 말씀이 감명 깊게 압박해옵니다.
사람들은 살아서만 영광 받는 줄 알지만 예수님은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를 도망치다 예수님께 쿼바디스 도미네 하고 또 묻습니다.
그 때에 ‘너 대신 로마로 죽으러 간다.’고 하시는 감명 깊은 영화였어요.
지금 코로나19재앙을 피해 어디로 도망가려는 인간심리 잘 드러납니다.
기왕 도망가려면 죽어서 하늘영광 참여할 하느님가족 되는 길 택하시죠.
세상을 위한 죽음이 하나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도 하나입니다.
성 대 바실리오 주교의 ‘성령론’에서(Cap. 15,35: PG 32,127-130)
우리 구세주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계획은 인간을 타락으로부터 다시 불러 불순종으로 인해 생긴 소외 상태에서 하느님과의 밀접한 친교에로 되돌리는 일입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세상에 오시어 복음서가 묘사하는 삶의 길을 보여 주시고,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구원된 사람들이 본래 누리던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다시 되찾을 수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완전한 생활을 하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생애에서 보여주신 온유와 겸손과 인내의 모범을 본받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방자인 바오로가 “나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 자체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처럼 죽을 수 있겠습니까?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혀야 합니다. 그러나 이 묻힘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이 본받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선 우리는 과거의 생활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 말 자체가 분명하게 밝혀 주듯이, 다시 태어나는 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이전의 생활을 끝맺어야 합니다. 경기장에서 한 번 달리고 나서 두번째로 달리기 전에 잠깐 휴식 시간을 갖는 것처럼, 삶의 변화에 있어서도 죽음은 두 가지 삶 사이에 개입하여 과거의 상태를 끝내고 앞으로의 새 삶을 시작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음의 명부에 내려가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묻히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세례 받는 이의 몸은 어떤 면에서 물 속에 묻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례는 육정이 빚어내는 일을 끊어 버린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합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세속적인 육체를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형식이 아닌 진정한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습니다.” “나를 씻어 주소서. 눈에서 더 희어지리라.”라는 시편의 말씀처럼, 세례는 어떻게 보면 육신의 정욕으로 인해 쌓여 온 오염을 영혼으로부터 씻어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세례는 구원을 가져다 주는 세례입니다. 세상을 위한 죽음이 하나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도 하나입니다. 세례는 이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자비심은 용서로부터 시작한다. <요한 13, 21ㄴ-33. 36-3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비로우심 같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만일 세상에 자비심으로 용서가 없다면 너무나 삭막하여 살아남을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아침 주님은 자기를 배신하여 악당들에게 팔아넘긴 유다를 용서하셨을까? 지옥에 처넣으셨을까? 성주간 셋째 날 용서에 대한 묵상과 실천 방안을 세우는 날입니다. 오늘 만찬 석상에서 주님은 당신을 팔아넘길 사람을 대하는 부드러운 자세는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이르시는 말씀으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주님은 “원수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하십니다. 용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자비심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배신자는 멀리 있지 않고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까이 있는 사람을 잘 관리하고 서로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지간도 어느 날 원수가 되어 등을 돌려 복수심으로 가득 차고, 형제간에도 돈 때문에 원수가 되어 서로 만나지 않고 남보다도 못하게 사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란?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막말이나, 지나친 농담이나, 하대 말은 버릇없는 일입니다. 상하 관계나 선후배 관계나 부자와 가난한 관계에서 서로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항상 긍정적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안 돼” “저리 가” “싫어” “말 안 해” “틀려먹었어” 오늘 주님은 유다를 대하면서 빵을 물에 적셔준 것은 급히 먹다가 목에 매일까 걱정되어 비밀을 지키시는 모습도 자비심의 표현이며 십자가상에서 “저들이 하는 바를 저들이 모르니 용서해주세요.” 하시고, 베드로 사도도 세 번 배반하였지만,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듣습니다. “저런 사기꾼, 저런 몰상식한 사람, 나를 해치려는 사람” “온갖 비난을 하면서 외톨박이로 만드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라는 말입니까?” 하면 저는 “그런 마음이면 어떻게 주님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시며” 기도하는 사람은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영광은 하느님의 자비심이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심을 전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원수를 용서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고 영광이 빛나게 합니다. 당신이 힘들다고 하는 용서는 인류의 행복이며 영광이 됩니다. 최고의 자비는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용서할 때 드러납니다.
하느님 앞에서 항상 영광스럽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누군가의 배신으로 고통을 겪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누군가를 배반하고 나서 괴로워하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지만, 마음이 산란하여 그 속내를 감추지 않고 표명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베드로가 예수닝의 사랑받는 제자에게 눈치를 주어,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25절) 하고 묻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정작 자기 자신은 제외시켜 놓고 다른 제자 중 누가 배반할 것인지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듯이 제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모두 배반하고 도망칩니다. 유다는 직접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외치고,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박해를 받을까 봐 두려워 모두 숨고 도망치며 배반해 버립니다.
유다 이스가리옷을 비롯한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예수님 성찬의 식탁에서 매일 빵과 포도주를 나눠 먹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미사성제에서 성체성사를 나누고 모시며, 우리의 일상에서 주님 말씀에 따라 사랑을 이루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저하고, 외면하고, 피하면서, 배반하고 있습니까?
'호언장담'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너를 닭이 울기전 세번이나 나를 모른다고'(요한 13장21~33ㄴ.36~38)
자신있게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한 베드로가 배반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
연약하고 변변치 않은 우리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날입니다.
확실하다!! 제일 완벽하다는 말들이 주는 허상을 알때 온전하신 예수님의 뜻을 겸손히 받아들일 수 있죠.
'배반했다가도 되돌아올 나를 기다리십니다.'
기다리시는 사랑
정성윤 베드로 신부님
가끔 교우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유다의 배신을 미리 아셨다면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게 막아주실 수 없었나요?” “그랬다면 유다가 더 나쁜 길로 빠져드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질문 속에는 유다가 더 나쁜 길로 빠져든 것에 대한 책임을 일부분 예수님께 돌리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다가 죄를 짓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라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고 당신께 돌아오도록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억지로 하느님께 데려다 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하느님께 돌아와야 사랑과 자비로 인내로이 나를 기다리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회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우리가 세속적 욕망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갈등할 때,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십니다. 참된 사랑은 강제가 아닌 온전한 자유의지로만 가능함을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더 깊은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자 우리의 자발적 선택을 원하고 기다리십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께서 모든 것을 우리의 선택에 맡기신 것, 이것이 그분의 전지전능하신 사랑입니다.
맑은 햇빛 쏟아지는 은총 가득한 세상이다.
최민석 신부님
아침에 눈을 뜨면 날마다 하느님은 어둠의 빗장을 여시고 금빛 눈부신 모습으로 당신의 하루를 수놓으신다. 그 고운 빛은 풀잎이슬처럼 맑고 영롱하여 당신의 숨결을 느끼는 이마다 선하고 아름다운 품성으로 변화 받아 희망의 하루를 열어젖힌다.
빛과 같이 밝은 마음으로 빛과 같이 참된 모습으로 누구에게나 다정한 미소 따뜻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여신다. 감히 우리의 작은 시야로는 바라볼 수조차 없는 빛의 하느님께서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이에게 새벽이슬 같은 순실함으로 어둠을 밝히신다.
4월하고도 맑은 햇빛 쏟아지는 아침이다. 아침 햇살로 주위가 환해지고 은총 가득한 세상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랑의 전령사 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마당에서 마주친 민들레에게 “좋은 아침!”이라며 인사를 전한다.
마주치는 것들마다 다 나와 자신이 같은 존재임을 깨닫는다. 민들레도 나와 똑같이 물을 필요로 하고, 바람에 흔들리고, 서리에 몸을 움츠린다. 그리고 겨울에는 존재계로 돌아갔다가 새봄에 다시 등장한다. 명칭과 성별과 종을 잊으면, 인간과 식물이라는 구분을 버리면 우리 모두가 같은 생명이다.
창문을 열어놓고 가슴을 열어놓으니 모두가 한 생명이다. 하늘 문 열어놓고 봄 마중 나가니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시고 봄바람에 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내린다. 깨어난 풀꽃들은 여기저기서 기지개를 편다. 점점 세력을 넓혀가는 풀꽃세상 마당 한 구석을 차지하더니 바야흐로 꽃들의 축제다.
산골 아침 어디선가 산새 울음이 들린다. 산이 밤을 세고 여린 연록의 잎들이 윤기가 난다. 풋풋한 풀냄새 이름 모를 풀꽃들 아~ 자연은 이렇듯 아름답구나. 산길을 지나 작은 호수엔 부지런한 강태공이 세월을 낚는다.
이층 방에서 보이는 멀리 산중턱 작은 밭에서 일하는 사람이 보인다. 아마도 그는 저 멀리에서 누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다. 그가 자기를 보고 있는 나에 대하여 그랬듯이, 나도 나를 지켜보시는 주님의 존재를 모른 채 오랜 세월을 살았다.
하지만 지난 세월은 이미 없는 것!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고 하늘 제 품으로 지나가는 구름을 지켜보듯이, 나를 한 순간도 빠뜨리지 않고 지켜보심을 알게 하시니 고맙다. 다만 나의 이 앎이 너무 자주 끊어지는 바람에 주님의 현존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내가 오늘을 산다고 해서 오늘이 나의 것은 아니다. 내가 오늘을 산다고 해서 오늘 하루를 확실히 소유한 것 같지만 그건 아니다. 오늘은 모두의 것이며, 어제의 생명들이 그나마 채 먹지도 못하고 내게 알뜰히 남겨주고 간 것이다.
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오늘인가. 어제 먼저 살다간 생명들이 내게 주고 간 이 생명, 순간순간 오늘 하루가 얼마나 감사한가. 실상은 오늘의 현존 속에 나의 인생 전부가 들어 있다. 어제 생명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생명들이 내게 남아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오늘을 살고 싶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나갔다. 내가 사는 오늘은 어쩌면 그들이 살아야 할 오늘이다. 오늘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인생의 오늘이라고 해서 나의 것이 아니다. 어제를 살다 간이들의 고귀한 선물이다. 그 선물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또 나누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의 현존이 내 삶의 전부다. 당신의 현존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 느낌에서 오는 생명 에너지로 춤추며 살아가는 이 순간이 어제 죽은 이들이 그토록 그리던 순간이다. 지금 서로 돕고 사랑하는 순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지금 싱싱한 아침에 내가 당신께 하고 싶은 말은 창문을 활짝 여는 일이다. 앞뜰의 꽃송이와 이슬방울에 매달린 우리의 언어가 같아 우리가 하나임을 확인하는 일이다. 지금 돋아오는 햇살 아래서 내가 당신께 하고 싶은 말은 이 생명 끝 날까지 서로 사랑하며 살자는 이야기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 3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만개한
꽃들속에서
모순으로 얼룩진
제자신을 봅니다.
사랑하기에
많이 아프고
아픈 성주간입니다.
무너지는
시간은 언제나
한순간입니다.
가장 무서운
존재는 늘
사람이라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사랑이
되기까지
수 많은 고개를
넘고 넘습니다.
회개는
배신속에서
탄생하고
배신은
망각속에서
탄생합니다.
배신의
고통을 안고
마지막 길을
걸어가십니다.
베드로의
배신속에서도
사랑의 길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에
십자가를
새겨주십니다.
변심과
배신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하느님마저
배신하는
우리들임을
아프게 반성합니다.
우리자신을 위해
울 수 있는
성주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신앙은
장담하는
입술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은
사랑하기에
찔리는 고통마저
받아안고
하느님을 향하는
용서의 눈물임을
믿습니다.
베드로의 눈물
예수님의 눈물이
십자가에서 다시
뜨겁게
만날 것입니다.
프랑스의 잔 루이즈 칼망( Jeanne Louise Calment)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할머니께서는 90세가 되었던 1965년에 유일한 자식이었던 딸이 마흔도 되지 않는 나이에 병으로 잃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손자 역시 자손을 남기지 못한 채 교통사고로 사망해서 상속을 해줄 가족이 없게 된 것입니다. 할머니께서는 같은 동네의 48세 변호사에게 아파트를 매매하기로 계약했습니다. 단, 조건이 있었는데 본인이 살아있는 동안에 매달 2,500프랑(한화로 50만원)씩 지급하고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에 아파트 소유권을 받는다는 것이었지요.
이 조건을 변호사는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할머니의 나이가 자그마치 90세나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자신은 훨씬 젊은 48세밖에 되지 않았으니, 분명히 아주 싼 가격에 집을 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그 후로 자그마치 32년을 더 사시면서 공식적으로 출생 및 사망 시기가 입증된 인물 중 최장수 기록을 갖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그 변호사는 1995년에 78세로 사망해서 자그마치 30년이나 매달 2,500프랑씩을 지급하고도 아파트를 넘겨받지 못했습니다. 그때까지 지불한 액수는 원래의 집값보다 2배 이상이었다고 하네요.
누가 이런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하느님의 일도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을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가장 큰 겸손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으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러한 겸손을 보여주셨는데,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만을 내세우면서 교만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라고 말하면서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쓴다고 판단을 했던 유다 이스카리옷,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을 했던 베드로를 떠올려 보십시오.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던 이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다는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기고,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 역시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뿔뿔이 흩어집니다.
예수님과 직접 뽑으셨고 언제나 함께 했던 제자들조차 이렇게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직접 보지도 못하고, 직접 대화를 나누지도 못하는 우리는 어떨까요? 어쩌면 우리가 더하면 더했지 제자들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임을 기억하면서, 내 생각의 틀에 메이는 삶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겸손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를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명언: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귀로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하여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더 훌륭한 사람이다(유일한).
스트레스 조절 장애를 막는 방법
스트레스 조절 장애를 막는 방법으로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규칙적인 신체 활동.
둘째, 마음 챙김을 기반으로 한 스트레스 완화.
셋째, 사회적 지원과 통합.
특히 세 번째의 방법에서 큰 공감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스트레스는 전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가 스트레스 없는 밝은 사회라면 사람들 모두가 그런 모습을 갖출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트레스 받고 있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전염되어서 스트레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남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일까요? 혹시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누군가가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받는 스트레스에 주목하기보다, 내가 주는 스트레스에 주목하면 어떨까요?
유다 이스카리옷은 떠나갔지만, 시몬 베드로는 돌아왔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때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조만간 펼쳐질 당신의 미래와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의 머릿속은 참으로 산란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순간 참으로 큰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저 묵묵히 함께 동반해주는 사람, 그의 걱정과 고민에 함께 가슴아파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큰 위로와 격려가 될것입니다. 예수님과 3년 세월 동안 동고동락했으며, 심혈을 기울여 교육시킨 사도들이 그런 존재가 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깨달음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던 사도들이 보인 모습은 참으로 미성숙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재무 담당이란 중책을 맡고 있던 유다 이스카리옷을 한번 보십시오. 그는 호시탐탐 난파선 같은 제자단에서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그는 제자단을 떠나기 전에, 나가서 먹고살 방도를 마련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제자중의 으뜸인 수제자 시몬 베드로 역시 도진개진이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그가 비장한 각오로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요한 복음 13장 37절)라고 외치고 있지만, 조만간 주님을 세번이나 배반할 정도로 믿음이 약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피비린내가 풀풀 풍기는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셔야 할 시간인데, 수제자라는 사람은 배반 예정자, 제자단의 총무라는 사람은 이미 배반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도들 역시 오십보 백보였습니다. 그 어떤 존재로부터의 위로나 공감도 받지 못한 채, 철저하게도 홀로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뒷모습이 참으로 슬퍼보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 절박한 순간에도 끝까지 배반자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십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신을 이미 명확하게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만일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최초로 알게된 순간, 즉시 불러 사정없이 야단을 쳤을 것입니다. 당장 그간 해먹은 돈 게워놓고 제자단을 떠나라고 밀어붙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신 행위에 대해 철저하게도 함구하십니다. 혹시라도 그가 다시 마음을 바꿔먹을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십니다. 놀라운 사실 한 가지 마지막으로 유다가 뛰쳐나갈 순간까지 다른 사도들은 유다의 배신행위에 대해 몰랐던 것입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시몬 베드로는 돌아왔고, 유다 이스카리옷은 떠나갔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 역시 돌아만 왔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의 결단입니다. 우리 역시 수시로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우리의 회심을 기다리십니다.
어쩔 수 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 우리들입니다. 살다보면 본의아니게 그분을 떠나갈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도 배신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처럼 영원히 떠나가서는 안되겠습니다. 가던 걸음 멈추고, 다시 한번 주님께로 돌아서야겠습니다. 시몬 베드로처럼.
힘이 들 때 꼭 누군가와 나누십시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막 마라톤이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과 싸우며 밤낮으로 사막을 달리는 경기입니다. 사막을 달릴 때 가끔 사람이 죽기도 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이유는 수분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쓰러져있는 사람을 보면 수통에 아직 물이 충분한 것입니다. 사람이 물이 없어 죽는 것이 아니라 물을 마실 시간을 갖지 못해 죽는 것입니다. 목표에 빨리 도달하려는 마음 때문에 물 마시는 것도 잊고 달립니다. 그러나 워낙 사막이 건조하다보니 수분이 빨리 빠지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몇 걸음을 걸었는지 측정하는 기계를 차고 몇 보 정도 뛰었으면 목이 마르지 않아도 반드시 수분보충을 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규칙적으로 물을 마시는 시간을 가져야합니다. 정신없이 달리다보면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리고 큰 병이 걸리거나 우울증이 심해져 자살충동을 느낄 때까지도 자신을 방치합니다. 사막을 달리며 수분이 부족해지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과 마음을 정비하기 위한 시간을 갖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쓰러져 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마음이 산란하셨다고 합니다. 이는 자아의 뜻과 하느님의 뜻이 싸울 때의 혼돈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안 되는 줄을 알면서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마음이 산란해집니다. 예수님도 유혹 때문에 산란하셨습니다.
산란한 마음을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입니다. 하느님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로 이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그렇지만 최후의 만찬 때도 무언가 하셨습니다. 바로 당신을 배신할 사람을 노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당신 자신을 이해할 제자가 한 명이라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끝까지 유다에 대한 비밀을 숨기려고 하셨다면 요한까지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위로를 드릴 제자는 한 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가리옷 유다가 당신을 팔아넘길 사람인지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에 당신을 이해해 줄 사람이 한 사람 늘어나게 되었고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갈 때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 골고타 언덕까지 올라갔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위로가 필요하셨습니다.
물론 누구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 사랑에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노아가 술을 마시고 알몸으로 누워있을 때 그것을 덮어주는 아들들은 축복을 받았지만 그것을 들추어낸 이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아들이 함이고 가나안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함이 아버지의 치부를 들추어 낼 때는 마음이 산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해 아버지까지도 웃음거리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들어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에게 해가 되는 악이 무엇인지 드러내신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그리고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기에 유다를 놓아주신 것입니다.
만약 사막을 달리던 가운데 자신이 쓰러졌을 때 재빨리 물을 마시게 해 줄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그 사람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 사람이 없더라도 그냥 물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갈증이 해소될 수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누군가에게 그 유혹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객관화할 수 있고 타인의 도움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어디로 갈지 몰라 쩔쩔매면서 자존심이 있어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차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것은 현명한 행위가 아닙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밝혀야 도와줄 사람이 생깁니다.
예수님도 마음이 산란하실 때가 있으셨습니다. 하물며 우리야 얼마나 이 영적인 싸움이 어렵겠습니까? 마치 자신은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을 찾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그 자존심 때문에 영영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그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사는 것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사람들의 이해를 바라셨습니다. 말할 사람이 없거든 적어도 고해성사 때 말해야합니다. 규칙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은 규칙적으로 물을 마셔주는 것과 같습니다. 고해성사를 보면 하느님이 이해해주십니다.
유다 배반에 대한 예고
곽승룡 비오 신부님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 21)
유다의 배반 문제에 관해 많은 논란이 있다.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결정적 역할을 하였나? 지상생활에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설교하는 동안 이미 주님을 체포하려고 했었다. 그래서일까 그리스도께서는 늘 몸을 피하곤 하셨다. 아직 그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옳은 순간에 순순히 당신 몸을 맡길 것이다.
이에 관한 토론은 유익하지 못하다. 무익한 토론으로 방향전환을 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의 지평 곧 섭리를 이해하도록 찾아야 한다. 왜 예수님은 이 길을 선택하셨을까? 그는 당신 고통 안에서 오해받고 박해받는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살기 원하셨다.
예수님은 가장 가까이 있는 자에게 배반당하고 모든 이들로부터 버림받은 최고의 아픔을 겪으셨다. 예수님은 거룩하게 되기 위해 이렇게 살기를 원하곤 하셨다. 주님은 절망에로 내몰리는 인간들을 당신 인격을 통해서 받아들이길 원하셨던 것이다.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13, 26)
만일 유다가 빵과 포도주 축성 순간에 함께 있었고, 또는 먼저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 전 최후의 만찬에 존재했는지도 논란은 있다. 루마니아 어느 수도원의 성화그림들에서 영성체를 나타내는 최후의 만찬 모습이 종종 발견되는데, 그 그림은 유다가 나가서 구토하는 모습을 따로 때어서 보이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었지만 그의 몸속에 주님의 몸을 모실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이 그림들은 외경의 전승을 반영하고 있지만 유다에 관한 참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접촉을 통해서 영성체에서 그분과 함께 참 신원이 드러난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확실함을 가지고 있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배반함으로서 이 관계가 의지적으로 단절된다. 구토한 사람은 생명을 그에게 내어준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것을 뜻한다. 유다는 결국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고 만다. 우리도 역시 매번 우리 자신을 배반하고 있다. 우리도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을 결정하곤 한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 27)
예수님 스스로 유다가 배반하도록 교사를 하였을까? 그것을 멈추게 하고, 꾸짖고, 알아듣도록 할 수는 없었을까? 이 모든 것 역시 무익한 질문들이다. 우리는 하느님 섭리의 지평에서와 같이 적어도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낼 수 없다.
악의 문제에 관해서 적어도 우리는 돌아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저지하시지 않기 때문이며, 죄를 범하기 시작하는 사람을 막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인간들의 마음속을 읽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약간의 대답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이다. 만일 악으로부터 커다란 선이 오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악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유다의 배반은 내면의 세계를 구원하시는 데 중심이신 그리스도의 고통을 모자이크한 역할을 한다.
유다의 인격은 그의 죄와 함께 있을까? 하느님께서는 모든 특별한 결정 속에서 선을 위해서든 악을 위해서든 인간자유를 존중한다. 너무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 스스로는 악에서 나오는 긍정적인 것을 지킬 수 있다. 자유롭게 악을 선택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선으로 돌아가고, 그의 죄악들을 보속할 수 있다. 보속 역시 세상구원을 위한 본질 부분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 하느님은 참으로 온전히 인간을 사랑하신다. 사랑은 조종하거나 구속하지 않는다. 다만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뿐이다.
세월호 5주기되는 오늘 세상을 떠난 모든 학생들, 선생님 등을 위해 보속하는 마음을 갖는다. 또한 무엇보다 진실이 드러나길 기도한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의 수난과정에 있어서 주님을 배신하게 될 두 제자와의 대화, 즉 전반부에서는 유다와 예수님의 대화, 그리고 후반부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있음을 예고하셨고, 이어서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말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와 유다 두 제자는 나중에 똑같이 주님을 배신하게 됩니다. 한 제자는 주님을 팔아넘겼고, 다른 한 제자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하면서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제자의 결말은 정말 극과 극의 차이로 벌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어쩌면 절망과 희망의 차이였습니다. 즉 유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시자 바로 절망과 좌절에 싸여 목을 매고 자살을 하고 맙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주님께서 부활하시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배신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면서 결국 주님을 세상 속에 증거하는 참된 사도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많은 순간 주님께 크고 작은 배신을 드립니다. 자신이 나약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주님을 계속해서 배반하는 것이 어쩌면 슬픈 현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첫째, 회개를 통해 다시금 일어서는 모습, 그리고 둘째, 늘 주님께 대해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진정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늘 주님께 대해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참된 부활의 영광을 맞이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세월호 희생자 제5주기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다시는 세월호의 희생참사는 없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세월호 해상참사를 왜 막지 못했는가? 충분히 구할 수 있는 넉넉한 시간임에도 힘없이 꽃다운 학생들을 수장시킨 구 정권(박근혜)의 무책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우익 극보수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세월호는 하나의 단순한 해상사고” 일 뿐이라고, 이런 막말이 어른들 입에서 나오는 나라가 진정한 나라일 수 없다. 이는 무책임한 어둠의 자식들이나 하는 소리이다.
유다 이스카리웃이 빵을 받아 먹을 때, 사탄이 들어갔다. “때는 어두움의 때였다” 어둠의 사람들은 탐욕의 빵을 받아 먹는다. 유다 이스카리웃은 예수님 제자중 요직을 맡은 사람이지만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다.(요한13,26-30참조)
‘세월호 희생자 제5주기’인데도 꽃다운 학생들을 수장시킨 사람 중에 한명 밖에 책임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희생자 5주기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러고도 아무런 반성없이 또 득세하려 하고 있음이다. 이 사람들이 여전히 어른 행세를 하고 있음이다. 탐욕의 빵을 먹은 그들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지만 유다 이스카리웃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촛불혁명이 어둠을 밝혔다. 세월호 관련 감춤 7시간이 전 정권을 탄핵하게 했다면 이제 전 정권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야 한다.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란데 여전히 득세하려고만하고 야비하다. 이 나라의 위정자들의 몰상식을 상식으로 바뀌도록 기도해야겠다. 고위관료들은 유다 이스카리웃이어서는 안 된다.
최후만찬 읽으니까 그랬나보다 하지만.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우리는 예수부활 승천 다 알고 최후만찬 읽으니까 그랬나보다 하지만.
최후만찬은 준비, 발 씻음, 빵-몸, 술-피, 칼, 배반 등 와! 심각했네요.
요한 사도님도 참, 고발자 알아서 뭐하게요. 베드로 사도도 그렇고요.
만찬 때 예수님의 심각한 말씀들과 행동들에 제자들 벙벙했을 거였죠.
특히 베드로 사도는 정신 나갔었고. 목숨 바치겠다는데 배반할 거라니.
이제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고 따라오지도 못한다는 심각한 말씀 등.
아,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상황 꿰뚫어 보시며 최후정리 하셨던 거구나!
죽음 준비하지도 않고 사는 우리 예수님을 배워 한 번 정신차려봅시다.
성주간(聖週間·hebdomada sancta)
윤종식·허윤석 신부님 (가톨릭 전례학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근본 되는 시기
●예수님의 수난·죽음·부활의 구원사건 기념하는 때
●성주간 전례 지나치고 부활 미사만 참례 안타까워
어렸을 적을 생각하면, 요즘처럼 집안에 달력이 그리 많지 않았다. 흰 바탕에 날짜가 크게 적힌 그런 달력이었다. 이발소에 가면 그림이 있는 달력이 걸려 있었다.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누구 생일, 어느 분 기일이라고 적혀있었다. 이렇듯 가족들의 중요한 날들인 생일과 기일, 그리고 결혼기념일 등이 가족들을 묶는 의미 있는 시간일 것이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의미 있는 시간을 2000년이라는 역사의 흐름 안에서 기억하고 기념하는 종교 중에서 가장 잘하는 곳이 바로 가톨릭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신론을 펼치면서도 기성 종교의 장점을 피력하는 「무신론 2.0」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책을 보면 가톨릭교회의 우수성과 힘에 대해 말하면서 전례주년을 손꼽고 있다. 주기적으로 무엇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것은 인간 본성과 영혼의 활동에 적합하며 사건을 현재화하는 힘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창립초기부터 전례주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전례력에 대한 의미와 전례교육에 철저했다. 성주간의 의미, 특히 성삼일에 진행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구원사건을 자신의 삶과 연결해 순교의 시기도 부탁했다. 그 예로 다블뤼 주교(1818~1866)님은 서울 의금부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훌륭한 호교론을 펼치셨다.
그분은 사형이 결정돼 충청도 보령(保寧) 수영(水營)으로 이송됐다. 그분은 죄수복을 입고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이송되는 도중, 처형 예정 날짜인 3월 30일 성 금요일인 처형일이 다소 연기될 기미가 있음을 알고 “성 금요일에 죽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해 소원대로 3월 30일 성 금요일에 수영(水營)에서 약 10리 떨어진 ‘갈매못’에서 순교의 영예를 차지했다.
이렇듯 예수님의 구원 신비가 절정에 이르는 성주간의 중요성을 목숨으로 증거한 다블뤼 주교님의 모범은 어느 시기에나 필요하다. 그렇다면 성주간에는 어떤 일들을 기념하고 또 어떤 예식들을 통해서 구원의 신비를 현재화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사순시기의 마지막 주간인 ‘성주간’(聖週間·hebdomada sancta)은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로 드러나는 구원 신비가 펼쳐지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주간을 처음부터 잘 기념했던 곳은 그 사건들이 벌어졌던 예루살렘이다.
성지주일부터 부활까지의 사건들을 다루는 전례가 풍부하게 발전했고, 이에 대한 자료를 4세기 말에 ‘에제리아’라는 여인이 자신의 여행기를 통해서 전해주고 있다. 이 당시에는 복음사가들이 묘사한 사건들을 재현하는 예루살렘의 전례를 모방하기 위해서 서방전례는 이와 비슷한 예식들로 구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성주간의 기원이다. 중세에는 성주간을 ‘고난주간’이라 불렀으며 예수의 수난을 신비 안에서 기념하기보다는 극화(劇化)함으로써 고통과 감상적인 연민의 측면을 부각했다. 그래서 예수 수난의 구원론 측면과 죽음에 대한 승리, 부활의 측면들이 희미하게 됐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서 본래 성주간의 구원 신비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전례로 쇄신했다.
성주간은 ‘성지주일’ 또는 ‘팔마주일’로 알려져 있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 시작한다. 비록 사순시기의 마지막 주간이기는 하지만 전례는 이전의 사순시기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성지를 흔들며 행렬을 하는 동안 승리의 기쁨을 느끼며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재현한다. 예수님을 왕으로 공경하는 이 승리의 행렬에 모든 교우가 참석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님이 우리의 왕임을 확인한다. 이날 전례의 중요한 두 예식은, 4세기경부터 예수 부활 한 주 전 주일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렬’과 서방교회에서 5세기경 이
마지막 준비 주일을 수난주일이라고 해 ‘수난복음’을 봉독했던 예식이다. 이 두 예식은 9세기경에 통합돼 기본적인 틀을 형성했다.
성주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기는 ‘파스카 성삼일’(Triduum sacrum)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이미 성 암브로시오가 이날들에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시고 안식에 드시고 부활하셨다고 전해주었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신 지극히 거룩한 삼일”이라고 말했다. 파스카 성삼일은 성 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로 시작하고 부활 대축일 저녁기도로 끝난다.
성 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는 예수님께서 수난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거행한 최후 만찬과 그때 설정된 성체성사를 기념하기 위해 거행되는 미사이다. 예식의 특이한 것은 대영광송 때 성당 종과 제대 종을 치고, 그 후 부활 성야 미사의 대영광송 전까지 타종하지 않고 대신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사용한다. 수난 시기에 십자가와 성상들을 보자기로 가리는 것을 ‘눈의 재(齋)’를 지키는 것으로 생각한 것처럼, 이 기간에 타종과 오르간 연주를 하지 않는 것은 ‘귀의 재’를 지키는 것으로 여겼다. 성삼일 기간 동안 오르간 연주에 대한 지침에 변화가 있었다.
1958년 경신성은 ‘성음악과 거룩한 전례에 관한 지침 De Musica’에서 악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할 시기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면서 그중에 사순시기와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는 성주간을 포함시켰다. 이 규정은 몇 번의 변화를 하다가 2002년 반포된 로마미사경본 제3판에서는 성삼일 동안의 타종은 금지하면서 “성가를 도와줄 목적인 한 오르간과 다른 악기들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해 반주를 위해서는 허용하고 있다.
주님 만찬 미사가 끝나고 성체를 ‘수난 감실’에 모시고 성 금요일까지 철야를 하며 성체조배를 한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고뇌와 수난을 통한 지극한 사랑을 묵상하고 감사드린다.
성 금요일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해 ‘요한의 수난 복음(18-19장)’을 입체낭독하고 십자가를 경배하는 예식을 거행한다. 이날 단식을 한다.
성 토요일에는 아무런 예식도 없는 날이며, 이날 밤에 모든 성야의 어머니인 ‘예수 부활 성야 미사’를 한다. ‘빛의 예식’, ‘말씀 전례’, ‘세례 및 세례 갱신식’, ‘성찬 전례’ 등 4부로 이루어진 장엄한 미사로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고 기뻐한다.
가톨릭교회의 전례주년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근본이 되는 시기인 성주간에 대한 교우들의 의식이 예전 같지 않다. 세상의 바쁨과 여가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문화 안에서 성주간 전례를 지나쳐 버리고 부활절 미사만 참례하는 의식이 확대되고 있어서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바래지지 않을 다섯 해의 다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 세월호참사 5년 다짐시
(예수님, 유다와 베드로, 세월호 그리고 나를 돌아봅니다.)
2019년 4월 16일
삼백 네 분의 벗들이
내게 옵니다
오랜만이에요
잊지 않으셨죠
괜찮아요
오늘 하루만이라도
곱게 기억해주시니 고마워요
2019년 4월 16일
삼백 네 분의 벗들이
내게 말을 겁넵니다
잘 지냈어요
잊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미안해요
매일 기억하지는 못했네요
그래도 잊지 않고
날 찾아주시니 고마워요
2019년 4월 16일
삼백 네 분의 벗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내가 뭐라고
나에게까지 애써 찾아와주는
삼백 네 분의 벗들이 고맙습니다
삼백 네 분의 벗들은
나에게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게 머물 뿐입니다
잠시 마음의 눈을 돌리면
삼백 네 분의 벗들은
아무런 아쉬움 없이
괜찮아요 라며 떠나십니다
그리고 또 건네는
4월 16일 새해 인사
그래서 정녕 그래서
삼백 네 분의 벗들에게 미안합니다
다섯 해 전에
네 해 전에
새 해 전에
두 해 전에
아니 바로 한 해 전에
미안하지 말자고
미안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삼백 네 분의 벗들은
언제나 그렇듯
나의 곁이 되어 주는데
삼백 네 분의 벗들의
곁이 되어 주지 못한
나에게 애써 찾아와
괜찮아요 건네는 인사에
미안한 마음 대신에
바래지지 않을 다짐을
새롭게 해 봅니다
미안하지 않을게요
미안하지 않아도 되게 할게요
언제든 편하게 오세요
아니 굳이 오지 않아도 돼요
난 언제나 곁이 되어드릴 테니까요.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이번 사순시기에 여러분은 어떤 결심을 하셨습니까? 드디어 내일 사순시기가 끝나는 시점에 와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결심을 스스로 어느 정도 이루셨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어떤 분은 아주 많이 그리고 잘 지키신 분도 있으시겠습니다. 그런가하면 작심삼일처럼 목표는 잘 잡았지만 그간의 습관과 나약한 의지로 인하여 잘 이루지 못하고 전과 같이 평이한 나날을 되풀이한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을 먹은 것이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드는 것같습니다. 저도 사순시기 시작하면서 운동도 하고 찾아뵈어야 할 분들 방문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긴 했는데,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날씨만 괜찮은 날이면 이 신부님과 점심 먹고 걸어다니긴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상에서 희생제사를 바치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13,33) 라고 하신 말마디만 섭섭하고, 여태 주님만 바라고 나중에 왕이라도 되시면 한 자리 차지할 기대로 갖은 고생을 다 했다고 여기고 살아왔는데 그것이 다 물거품이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나 봅니다.
베드로가 참다못해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36절) 하고 묻습니다. 이렇게 화급해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36절) 그러나 베드로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듣지 못한채 그저 떠난다시는 말씀에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시는 듯하여, 섭섭한 마음으로 자신의 확고한 결심과 주님을 따르려는 자세를 큰소리로 외칩니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37절) 그러자 베드로 뿐만아니라 제자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8절)
오늘 복음의 기사를 바라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마음은 안 그렇지만 아니 마음은 간절하지만, 갑자기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에 닥쳤을 때 자신의 결심은 지키지 못하거니와 오히려 정반대로 배반까지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나약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탓하거나 화내거나 나무라지 않으시고, 지긋이 감싸 안아 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36절) 라고 말씀하셨는가 봅니다. 우리가 지금은 약하고 부족하지만, 주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그 말씀을 실현해야할 그 날 그 시간이 다가왔을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님 말씀과 사랑을 외면하지 않고 반드시 실현할 큰 힘을 주시기를 간구하며 나아갑니다.
사랑의 완성 <요한 13, 21ㄴ-33. 36-3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랑은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너에게서 완성됩니다. 자기 사랑 안에 머무르면 생각과 입으로 사랑이 미완성이 되지만 너에게 가면 실천으로 사랑의 완성을 보게 됩니다. 이를 잘 아시는 주님은 “내가 가는 곳에 지금은 따라갈 수 없다.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랑의 완성인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하지만 실천은 한참 후에 로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을 완성한 순교자들의 결실로 다져지고 성숙하게 자라나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데 힘과 열을 가하여 오늘까지 왔습니다.
한국 교회도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보답하고자 목숨 바쳐 신앙을 지키고 전해주었습니다. 선조들의 열성과 봉사 정신을 실천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편리하고 무사안일주의 생각으로 고통을 참지 못하고 희생정신은 없고 자기와 자기 주위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너에게서 사랑이 완성됨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기심과 자기중심적 사고로 수많은 모순을 만들어냅니다. 사랑은 자기를 떠난 행위이며 나는 없고 너만 있어야 하는 절대적 요구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세상 끝날까지 바치시는 표징을 남겨 십자가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나를 위해 사랑의 최고봉인 “벗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에게 벗은 누구입니까? 나로부터 시작하여 너를 위하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입니다. “나중에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심 같이 시간이 있는 한 우리는 주님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며 완성해야 합니다.
이는 피 흘림과 죽음만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가 되어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불러 이리가라고 하면 이리가고 저리가라고 하면 저리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을 위해 장기를 기증하는 사람, 돈 받고 일하는 사람도 무상으로 수고비 없이 필요한 일을 해 주는 사람,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사람, 오 리 가자는 사람에게 십 리도 가주는 사람은 사랑을 완성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해주셨던 것처럼 우리 서로 사랑하여 사랑의 완성된 열매를 먹도록 기도합니다.
삶의 중심. -"너는 나의 종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렵고 힘들수록 삶의 중심을 확인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함이 중요합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삶의 중심을 잃고 세파에 시달리며 두렵고 불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삶의 중심을 잡아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 삶을 살 때 환상이나 허상에서 벗어나 단순하고 진실한 삶,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입니다. 얼마전 나눴던 ‘파스카의 삶’이란 자작시를 나눕니다.
-삶은 엄숙하다/아름답다
눈물겹도록 고맙다/감동스럽다
세월의 나이에 상관없는/영혼의 젊음이다
세월흘러/무너지고 꺽이고 부러지고 삭아 볼품없어도
남은 가지들마다/부지런히 피어내는 청초한 봄꽃들
푸르른 봄새싹들/아, 살만한 세상이다
놀랍다/절망은 없다/하루하루 산다
부활의 봄이다/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이다
오, 주님/당신은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희망이옵니다-
과거는 지났고 미래는 오지 않았고 우리가 살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꺾이고 삭고 부러진 수도원 벚나무 노목의 남은 가지들마다 온 힘을 다해 피어내는 봄꽃들이 감동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영혼들을 상징합니다.
오늘 4월16일 성주간 화요일입니다. ‘4.16 세월호 사건’ 제5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2014년4월16일, 그날은 성주간 수요일이었습니다. 304명의 희생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고 먹먹해지는 느낌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만개한 파스카의 봄꽃들처럼 천국에서 이들을 활짝 꽃들로 피어내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성주간 화요일 제1독서는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이고, 요한복음은 ‘유다의 배신 예고’와 ‘베드로의 부인 예고’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이 그대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모습같습니다. 두 제자의 배신을 예고할 때 예수님의 심정은 참 암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주님이셨기에 즉시 하느님 구원 섭리의 과정임을 깨달으셨음이 분명합니다. 유다가 밤의 어둠속에 사라진후 주님의 즉각적인 고백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었다.”
그대로 이사야서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오늘 이 말씀이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주는 복음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하느님 중심에 뿌리 내린 우리 믿는 모든 이들이 주님의 종, 이스라엘입니다. 바로 주님의 종이 우리의 신원입니다. 하느님 중심에 뿌리내리고 파스카의 삶을 살 때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다음처럼 좌절감을 토로하는 주님의 종의 모습 역시 우리의 모습입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삶은 허무하고 허망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을 삶의 허무와 허망에서 구원한 것은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 중심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확인하며, 하느님 든든한 배경을 확인하며 즉시 일어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유다와 베드로의 배신 예고에도 하느님의 영광을 내다보며 용기백배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입니다. 삶의 중심인 주님과 관계의 뿌리가 깊어질수록 주님의 종으로서 정체성 또렷한 삶에 빛나는 주님의 영광입니다. 이어지는 이사야서 주님의 말씀은 예수님은 물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에 대한 선교 사명을 말해 줍니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삶의 중심인 하느님께 뿌리내릴수록 주님의 영광에 빛나는 파스카의 삶입니다. 이런 파스카의 삶 자체가 복음 선포가 되고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며 나와 내 이웃에는 구원이 됩니다. 어제 화답송 후렴의 고백은 저절로 주님의 종들인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주님의 종되어 당신의 영광에 빛나는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별이 된 아이들
최민석 신부님
수학여행을 가다가 별이 된 아이들이 길을 떠난 지 5년이 다 되었다. 부끄럽게도 4,16 세월호 참사 진상을 아직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 아 !아직도 그 슬픔은 구름처럼 하늘을 덮고 있는데 말이지. 그 슬픔이 아직도 안개처럼 온몸을 휘감는다.
돌려 말할 수가 없다. 온 사회가 세월호였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의 삶이 세월호다. 뿌리부터 가지까지 몽땅 썩어빠진 국가, 바로 그 국가가 아이들에게 푸른 바다의 길로 푸른 꿈을 안고 떠난 수학여행길을 억지로 하늘의 길이 되게 한 것이다. 거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 그날의 죄책감을 아직도 사라지지 않아 잊을 수 없다.
별이 된 아이들을 생각하며 산길을 걷는다. 숲은 아무 말 않고 새소리를 들려준다. 저것이 어치인지 찌르레기인지 소리 떨리는 둥그런 파문 속에서 무명의 귀청을 열게 한다. 숲은 그러자 이윽고 꽃을 흔들어 준다. 어제는 개나리꽃 오늘은 제비꽃 깊은 골 진달래꽃조차 흔들어 주니 내 생 또 얼마나 순해져야 저 맑은 꽃 한 송이 우주 속 깊이 밀어 올릴 수 있을까.
고요한 숲속 문득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다. 때마침 오솔길의 다람쥐 눈빛에 취해 면경처럼 환한 마음일 라야 들려오는 낭랑한 청청한 소리여 이 고요 지경을 여는 소리여 그러면 숲의 침묵이 이룬 외로운 봉우리 하나 이젠 말쑥하게 닦을 수 있을 것 같다. 설령 내 석삼년 벙어리 외로움일지라도 이 숲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다 숲은 다만 시원의 솔바람 소리를 들려줄 뿐이다.
내 나이 어느 새 쉰아홉 인생 한 바퀴 예순이 다 되어간다. 이제 침묵으로 말할 때가 되었다. 그 동안 참 많은 말을 하고 살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내 자신의 말이 예리한 칼이 되어 사람들에게 상처를 낸지도 모르고 내 뱉기도 하고 수도 헤아릴 수 없는 어리석음 말도 서슴없이 부끄러움 없이 내뱉고 살았다. 아 쓸데없이 말만 많은 그 날들이 부끄럽다.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왠지 허허롭고 편치 않다.
지금 여기 산은 고요하다. 산과 들, 논과 밭 그리고 숲들은 요즘 사람들의 눈에는 돈벌이가 안 되는 것이지만 텅 비어 있는 듯 고요한 가운데 온갖 보물이 가득 차 있는 생명의 보물들이 가득 차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하고 소중하고 중요한 보물들은 고요함에 있다. 산에 사는 산사람들은 말이 없다.
산과 들, 푸른 숲에 들어서면 긴 숨을 쉬게 한다. 들판의 논과 밭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고요하고 잔잔하게 하여 안정을 준다. 산 위에는 작고 흰 구름이 세 조각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에 둘러싸인 작은 밭에서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플 때까지 괭이질하며 가끔 그 허리를 녹음이 짙은 산을 향해 쭉 편다.
사시사철을 산책을 하다 보니 말은 점점 없어지고 오관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 같다. 지저귀는 새소리 듣기 좋고 피고 지는 꽃들이 보기 좋고 산이 좋고, 물이 좋고 구름도 좋고 그 많은 것 어떻게 말로 다 하나 그저 빙그레 바라만 본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뿐이다.
입은 바위처럼 무겁게 귀는 대문처럼 활짝 열고 마음은 깃털같이 가볍다. 침묵으로만 속삭이는 들풀처럼 가끔 바람이 불 때만 속삭이며 나도 그렇게 사는 걸 배운다. 나무는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삼가는 것이다. 할 말 있으면 새를 불러 가지 끝에 앉힌다. 새가 너무 말을 많이 하면 이웃 나무의 어깨 위로 옮겨 앉힌다.
진도 팽목항 동거차도 바닷길이 두 눈에 선하다. 이제 내 눈에 수평선이 사라지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 통곡하던 팽목항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던 국민들은 두 손에 촛불을 들었다. 새로운 나라,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자며 서로 손 맞잡아 촛불정부를 만들었다. 그런데도 저 거센 적폐들의 파도를 헤치고 가야 할 길이 멀고도 험하다.
4.16 별이 된 아이들 5주년 기도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별이 된 아이들을 생각하며 자주자주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엔 갑자기 생겨난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가장 일찍 따서 가장 늦게 질 하늘의 아이들아, 욕된 이름 적폐세력들이 지상을 떠날 때까지 그들을 잊지 않고 굽어보고 지켜보고 있을 별을 생각하면 적폐청산은 분명 하늘의 명이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요한 13, 21~22)
김웅태 신부님
+찬미예수님!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십시오.
오늘은 성주간 화요일입니다. 점점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길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요한 13, 21~38)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요한 13, 21)
그러자 제자들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해서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요한 13, 21) 제자들은 예수님은 당신을 팔아 넘길 사람이 누군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 제자들을 어떤 사람인지 다 파악해 놓으신 것이죠.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 동료들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일반 사람들를 뛰어넘는, 사람을 파악하고 사람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는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유다에게 적개심을 갖거나 유다를 왕따시키거나 하시지 않고, 똑같이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유다가 나쁜 생각을 버리고 좋은 생각으로 가도록 기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식탁에 앉으셔서 식사를 함께 나누실 때, 바로 그러한 일로 인해서 마음이 산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드러내놓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 13, 21)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제자들 앞에 이렇게 드러낸 것은 그로 인해 다른 제자들이 유다를 미워하고 공격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다가 마음을 바꾸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드러낸 것은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는 유다애게 마음을 고쳐먹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주님께 잘못에 대해서 용서를 청하였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용서해 주시고, 더욱 더 당신 제자로서 올바른 사람으로 키워주셨을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고, 예수님이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왜 하고 있었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다양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생각을 밖으로 끄집어 내었습니다. 유다는 마음을 들켰기 때문에 대단히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였다면 예수님은 좋은 길로 이끌어 주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게 누구입니까?" (요한 13 25)하고 자꾸 물어보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말씀하시면서 유다 이스카리옷에게 빵을 주었습니다. (요한 13, 26) 그러면서 예수님은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어서 하여라" (요한 13, 27)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식탁에 함께 했던 제자들은 눈치를 못 챈 것입니다. 아마도 유다가 재정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인가 필요한 것을 하도록 분부하셨나보다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하는 그 자리에서 서로의 마음을 알고 대화한 사람은 예수님과 유다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하여라" 이렇게 말했을 때, 유다는 자기의 악한 생각을 반성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청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생각을 들킨 것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실행할 생각을 구체적으로 굳힌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고 "때는 밤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요한 13, 30)
우리는 이러한 것을 보면서 사람에게는 악한 생각과 그것을 실행하는 것 사이에 예수님께서 그 생각을 드러내고 말씀하셨듯이, 자기 마음 속에도 그것을 반성하고 바꿀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선택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악한 생각을 실행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잘못인 것이죠. 사람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는 항상 있습니다. 악한 생각은 자신이 알고 예수님이 아십니다. 예수님이 아시고 자기 자신도 알고 그랬을 때, 그것에 대해서 뉘우치고 용서를 청할 수 있는 시간은 주어지지만, 그 선택은 바로 자기 자신의 것이며, 거기에는 책임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가 파멸을 선택한 것을 보면서 그래서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들려오는 예수님의 말씀, 거기에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때때로 악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올라올 때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합니까?
• 그 악한 생각 중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또 그것을 합리화하고 자는 말도 들려옵니다. 그럴 때 나의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호언장담'(요한 13,12ㄴ~33,36~38)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저는 그곳이 어디든 주님을 따라가겠다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예언하십니다.
너는 새벽닭이 울기전 세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거라고 ~..
호언장담 하지 말라고!
저 분을 따라다니면 뭔가 좋은게 있겠지? 라는 보상심리가 마음에 자리하게 될때 참 잘합니다 ~ 그러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피해가 우려되면 시침 뚝떼고 거짓스런 행동을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천길 물속 같아서 좋은 일을 하면서도 누구를 미워할 수도 있고 환하게 웃고 있으나 속은 울고 있을수도 있지요.
내 마음 나도 몰라~
이 마음이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베드로의 약함이 나의 약함, 배신 또한 여러갈래 마음중에 또 하나라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가 살게 됩니다.
지키지 못한 말
류지인 신부님
사랑하는 사람이 홀로 먼 길을 나설 때, 묵묵히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만큼 복잡한 심정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끝까지 따를 것이며 스승님을 홀로 두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목숨까지 거는 베드로의 확언에는 가식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임시방편으로 스승님의 환심을 얻기 위한 발언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발로로 보입니다. 다만 행동보다 말이 빨랐고 감정적인 확신이 말보다 너무나 앞서 있었습니다. 불같은 성격의 베드로 사도는 현장 상황에 민감하고 즉시 반응합니다.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감정을 전부인 듯 행동으로 옮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자신의 호언을 스스로 배반한 세 차례 부인은 공포에 휩싸여 터져나온 두려움의 표현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외부 자극이 사라지고 감정의 고요가 찾아올 때, 베드로는 비로소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확신과 열정에 차 있던 자아가 무너져 내리는 충격을 경험하겠지만, 아침을 밝히는 닭 울음소리가 베드로에게 진정한 선택의 시간을 제공할 것입니다. 비참하게 끌려가 결박당한 예수님을 보고도 끝까지 따라나설지, 이제라도 포기하고 예전의 어부로 돌아갈지, 베드로의 진짜 고민이 시작되는 셈입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살다보면
극단적인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다른 길도 있습니다.
이것밖에는
길이 없다는 착각이
바로 우리의 지독한
교만입니다.
유다처럼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이리도 힘이 듭니다.
가장 중요한 가치도
한순간에
무너져내릴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믿음도
한순간에 어리석은
바닥에 내팽개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팔고
예수님의 목숨을 파는
모순된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의 욕심으로
사라지고 팔려가는
또 다른 예수님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를 위해
서로를 위해 오신
소중하신 주님을
우리가 팔아넘기는
악순환입니다.
성주간은 이러한 나를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예수님 앞에
우리의 두려움을
내려놓으십시오.
내려놓음이
새로운 시작입니다.
예수님또한
자신의 뜻을
내려놓음으로
우리의 욕망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지금 우리 옆을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팔아넘긴
예수님이 꽃잎처럼
떨어져내립니다.
아파야 할
시간입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참회의 시간이
되어야합니다.
모든 동물이 완벽한 상태에서 태어나는 반면에 인간은 단지 어렴풋이 윤곽만 잡힌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에 키웠던 개가 새끼를 낳았던 것을 기억해봅니다. 보름쯤 지나니까 눈을 뜨고 이빨도 나옵니다. 3주 정도 지나니 걷기 시작하고 스스로 배변까지 합니다. 어미로부터 독립하기까지 3~5개월이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사람은 돌때까지는 특별히 보살펴야 하고,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돌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렇게 인간은 타고난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동식물들은 완벽한 상태에서 태어나게 했는데, 왜 인간은 이렇게 불완전하게 태어나게 했을까요? 바로 완성된 모습을 인간에게 맡기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함께 하면서 서로 도우면서 완성할 수 있도록, 또한 자신의 나약함을 기억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힘을 불어넣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 가운데에 ‘사랑’이 있습니다.
당연히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는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인간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어느 카페에서 사람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중 젊은 청년 한 명이 스마트폰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만 같고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영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카페 주위를 둘러보니 거의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앞에 사람이 있는데도 말이지요. 이런 모습들이 우리 삶 안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사랑을 외면하는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큰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던 주님이십니다. 더군다나 당신을 누가 팔아넘길지를 또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사랑하는 제자들이 어떻게 배반을 하고 또 외면을 할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다 이스카리옷에게는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라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당신에게 다가올 모든 수난을 충분히 피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하시지 않지요. 당신의 그 큰 사랑을 통해 우리 모두가 구원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가 온전히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내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급급하다면 절대로 완성될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랑을 그리고 함께 구원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해서라도 인생의 소박함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세련된 삶의 시작이다(윌리엄 모리스).
나 하나쯤이야(‘따뜻한 하루’ 중에서)
옛날 어느 부자가 자신의 하인 백 명을 한 곳에 불러 모았습니다. 하인들이 모인 자리에는 커다란 항아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부자는 하인들에게 금화 한 닢과 작은 술 단지를 하나씩 나누어 주고 말했습니다.
"곧 큰 잔치를 여는데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특별한 포도주를 연회에서 내놓고 싶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가 준 금화로 각자 다른 포도주를 한 단지씩 사 와서 이 큰 항아리에 한데 섞어 두도록 해라. 여러 가지 포도주를 섞으면 어떤 맛이 날지 매우 궁금하구나."
하인들은 술 단지와 금화를 가지고 각자 포도주를 구하러 떠났습니다. 그런데 한 하인은 주인에게 받은 금화를 자신이 챙기고 자신의 술 단지에는 물을 채워 슬그머니 큰 항아리에 부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큰 술 항아리에 물이 조금 섞인 걸 누가 알겠어. 이 금화는 내가 써야겠다.'
잔치가 열린 날 부자는 포도주를 사러 보낸 하인들을 따로 모아 두고 말했습니다.
"오늘의 잔치는 그동안 고생한 너희들을 위한 잔치다. 오늘 하루는 너희가 사 온 술을 마음껏 마시며 즐기기 바란다."
그리고 큰 항아리에 담긴 포도주를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술을 받은 하인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술잔에 받은 것은 전부 맹물이었습니다. 백 명의 하인들은 모두 나 하나쯤이야 하고 생각하고, 금화를 빼돌리고 물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결국, 하인들은 빼돌린 금화를 도로 빼앗기고 잔치 내내 맹물만 마시고 있어야 했습니다.
'나 하나쯤이야'하고 가볍게 생각하는 그 행동은 당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인지도 잊게 만들어 버립니다.
너그러워지는 길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전에 한 중년 신사분이 찾아와서 아픔을 호소하였습니다.
이 분은 사회에서 성공하고 존경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자살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보복한 아들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아 손이 부들부들 떨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분은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 달라고 그런 이야기를 하였지만, 저는 ‘오죽했으면 아이가 아버지 앞에서 자살을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분도 아들이 하나이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키워보고 싶은 욕망에 아들을 매우 엄하게 키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이 자살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은 아버지가 제공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성적을 포함한 많은 면에 너무 스트레스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어처구니없는 보복의 방법을 선택한 아들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도 분명히 잘못한 점이 있으니 죽은 아이에게 원한을 갖지 말고 용서해 주고 오히려 용서를 청해야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초나라 장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신하들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낮에 시작한 파티가 밤이 깊도록 계속되자 연회석엔 무수한 촛불들을 밝혀 놓았습니다.
이렇게 연회의 흥취가 무르익고 있을 때였습니다.
왕은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는 허희라는 여인에게 여기 참석한 신하들에게 술 한 잔씩 따라드리라고 했습니다.
왕의 특별한 호의였습니다.
한참 허희가 술을 부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일진광풍이 불어 촛불이 모조리 꺼져버리자 연회석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에 휩싸여 버렸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누가 허희의 가냘픈 허리를 감아 당기는 것이었습니다.
허희는 순간적으로 그 사람의 갓 끈을 끊어 쥐고 몸을 뺀 다음 왕에게로 달려가 이런 일이 있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왕은 불을 켜려는 시종들의 동작을 제지하면서 말했습니다.
오늘은 군신간의 허물없는 즐거움을 위하여 마련한 자리니 경들은 지금부터 거추장스러운 갓끈을 모조리 끊어 팽개치고 마음껏 술을 들자고 권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갓끈을 끊어버리고 마음껏 즐기다가 돌아갔습니다.
그로부터 수년이 흘렀습니다.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봉을 자청한 당교라는 장수의 특별한 지략으로 예기치 못한 전과를 올리자 왕은 그에게 특별한 상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이미 왕으로부터 한없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 더 이상 상을 받을 수 없다며 그 옛날 연회 석상에서 허희의 허리를 안은 사람이
바로 자기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에게 큰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만약 왕이 너그럽지 못하면 신하들은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너그러움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만약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한다면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매우 쉬워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배반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베드로가 하룻밤사이에 세 번씩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도단의 우두머리인 베드로에게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하필 베드로에게 공개적인 창피를 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을 품에 안아야 하는 교회의 반석이 될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참다운 교회의 수장이 될 때 자신과 같은 처지의 많은 죄인들을 용서할 줄 아는 너그러움을 심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양들을 잘 치라고 세 번씩 말씀하시며 베드로의 세 번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세 번이란 말이 곧 법적인 효력을 갖는 숫자입니다.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기시면서 동시에 세 번 배반한 것을 생각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윗사람이 될수록 포용력도 더 커져야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 무서운 고해 신부님들께 몇 번 데어서 고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고해를 줄 때도 가끔 화가 날 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 때면 저도 베드로처럼 생각합니다.
“그래, 나도 죄 지을 것을 미리 알면서도 이겨내지 못하고 죄를 지었지.
알아도 유혹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이 나약한 우리들이야.
누구도 ‘나라면 저 상황에서 죄를 짓지 않았을 텐데’라고 장담할 수 없어.
베드로도 알면서 죄를 지었으니 나도 저 상황이 되면 아마 똑같이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고해주는 것이 매우 편해집니다.
겸손해지기 위해 죄를 많이 지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나도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뻔히 아는 죄도 이겨낼 수 없는 똑같이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은 죄짓지 않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비난 받는 사람은 유다일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난 받는 진정한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반했고, 예수님께서 잡혀가셨을 때 도망을 갔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비난을 받는 것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회개하지 않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용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유다와 유대인을 동일시한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반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전노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이유로 많은 박해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홀로코스트’입니다. 그러나 잠시만 생각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한 사도들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기둥이었던 바오로 사도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습니다. 성모님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회개했다면 반드시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편견과 선입견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안 될 것입니다. 사상, 이념, 세대, 신분이라는 잣대로 타인을 심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다는 하나를 명확하게 알았고, 하나를 몰랐습니다. 유다가 알았던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나라, 복음, 진리는 세상의 기준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갈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도 유다의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힘들다는 것, 때로는 가진 것을 포기해야 하고,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유다처럼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지만 적당히 타협을 하기도 합니다.
유다가 몰랐던 것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그대로 있으면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땅에 떨어져서 죽으면 많은 열매가 맺어진 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며,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잘 모르는 같습니다. 교회가 걸어온 길, 걸어가고 있는 길, 앞으로의 교회의 모습이 그렇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다를 묵상하면서 우리 삶의 좋은 기회와 위험을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유다를 통해서 우리는 수난의 길 한 가운데 계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와 그분의 죽음은 오직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시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역사는 현재現在다. -하느님은 조화調和이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역사는 현재다’, 어제 읽은 글귀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분은 조화이시다(Ipse harmonia est)’, 란 어느 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두 말마디를 그대로 강론 주제로 택했습니다. ‘역사는 현재다’, 말마디를 바꾸어 ‘하느님은 현재다’라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역사도 하느님도 초점은 오늘 여기 지금 현재에 있음을 봅니다. 역사는 하느님의 무대입니다. 끊임없이 역사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겸허한 마음으로 배워야 오늘의 현재를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조화이십니다. 현재를 보되 균형을 잃지 않고 전체를 보는 참으로 조화로운 안목이 필요합니다. 한쪽 문이 닫혀 있으면 한쪽 문은 열려있는 법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오늘 주님의 종,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그 모범입니다. 어제 복음의 주인공 마리아와 오늘 복음의 두 제자인 유다, 베드로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어제 마리아의 크나큰 진정성 가득한 사랑이 예수님께 큰 위로를 준 반면, 오늘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은 예수님께 큰 환멸을 안겨줍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균형잡힌 지혜로운 안목이 조화를 이룹니다. 하느님은 조화이십니다. 하느님의 조화로운 시야를 지니신 예수님은 어느 한쪽의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마리아와 유다와 베드로 전부를 보십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연민을 지니셨음이 분명합니다. 배신자 유다나 베드로에 대한 환멸에 머물지 않고 그 넘어 하느님의 섭리를 읽은 예수님의 깊고도 넓은 시야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었다.”
사탄의 유혹에 떨어진 유다가 밤의 어둠속에 사라지자 마자 이어지는 예수님의 고백은 마치 예수님 어둔 마음을 환히 밝힌 빛의 체험처럼 느껴집니다. 이미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두 번째 노래입니다. 예나 이제나 교회는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드러나리라.”
바로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신원이기도 합니다. 제가 자주 고백성사중 처방전 말씀으로 써드리는 성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늘 이런 빛나는 신원의식속에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다음 주님의 종의 탄식은 유다와 베드로의 배신에 대해 예수님의 심중을 대변하는듯 합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버렸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 삶이라도 삶의 허무가 물밀 듯 밀려올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에 최선을 다한 주님의 종이었다면 곧장 믿음의 탄력을 회복합니다. 다시 균형을 찾아 조화로운 안목을 회복하는 주님의 종은 그대로 예수님의 면모이자 우리의 면모입니다. 새삼 절망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악의 평범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적 상황에서도 곧장 믿음의 빛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느님 믿음의 끈을 놓쳐선 안됩니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그분께서는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나의 구원의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문장의 주어는 ‘그분께서’의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의 종은 온전히 하느님 섭리의 도구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현재요 미래요 희망이십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문장의 주어 역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불러 주셨기에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최선, 최상의 방법으로 오늘 지금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 현재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현재이십니다. 역사는 현재입니다. 현재도 여전히 반복되는 역사입니다. 역사를 필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있습니다. 어제 복음의 마리아, 오늘 복음의 배신자 유다와 베드로 역시 우리 모두의 가능성이자 우리가 만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참으로 균형잡힌 전체를 보는 조화로운 안목이 절실합니다. 이래야 절망하거나 비관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내 삶의 문장의 주어로 하여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내 삶의 중심에 놓고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바로 화답송 후렴 시편의 고백은 내 고백이 됩니다.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시편71,15ㄴㄷ).
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 길은 하느님 찬양과 감사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균형잡힌 조화로운 안목을 지닐 수 있는 길도 하느님 찬양과 감사뿐입니다. 우리의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길 역시 끊임없는 하느님 찬양과 감사뿐입니다.
역사는 현재입니다. 하느님도 현재이십니다. 또 하느님은 조화이십니다. 하느님 찬양과 감사가 답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가 답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현재를 살게 하고 주님을 만나게 하는 하느님 찬양과 감사의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에게 균형잡힌 조화로운 안목을 선물하시며 참 이스라엘인들인 우리 믿는 모두를 격려하십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이사49,3). 아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 다고 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 13,21-33,36-38(성주간 화)
우리는 <성삼일>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도 어둠과 절망이 깊어갑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과 어둠이 더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빛으로부터 떠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배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의 밤이요, 또 하나는 베드로의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캄캄한 어둠이 짙어져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닭이 울기 전, 새벽이 밝아져오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예수님께서는 배반하는 제자를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빵을 적셔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빵을 적셔서 주는 것은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게 끝까지 베푸는 충실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랑을 등지고서 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면밀히 계획한 바를 어둠 속에서 행했습니다.
베드로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새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할 의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순간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 어둠은 밝아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나친 자기 과신 속에서 넘어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넘어질 때는 가장 약할 때가 아니라, 가장 강할 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약할 때는 오히려 강해질 것입니다(2고린12,10).
그렇습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나는 새벽을 만날 것입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 속에 들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그분의 사랑을 만난 자만이 그분의 빛 속을 걷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다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도 더 짙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멸망으로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는 어둠을 헤치고 밝은 빛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곧잘 넘어집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넘어지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일어서는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혹 넘어진 사실을 까달아 알고 뉘우치고 성사를 본다고 해도, 일어선 사람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넘어진 채로 넘어진 자신을 본 것일 뿐, 비록 용서는 받았다할지라도 일어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비록 넘어지더라도 일어나 빛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빛이신 주님, 저를 비추소서! 제가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아멘.
내 안의 유다와 베드로의 그림자를 살피며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배신할 유다와 베드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13,21)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아시고 몹시 고통스러움에도, 우정의 표시로그에게 ‘빵을 적셔주십니다.’(13,26) 그가 회개하도록 사랑을 건네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둠 속에 있던 유다는 밤에 예수님을 팔아 넘겨버립니다. 그는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하려고 그분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제자직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돈의 우상에 눈이 멀어버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돈과 메시아의 허상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끝까지 배반한 유다의 종말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서야 뉘우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마태 28,3-5). 그는 어둠을 택함으로써 어둠 가운데 머물렀으며, 생명을 거부함으로써 죽음을 맞았던 것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질 돈처럼 그는 사라져갑니다.
최근 구속된 전직 대통령은 유다의 가면을 쓴 돈 중독자처럼 보입니다. 구속영장에 적시된 열 여덟가지 피의사실은 빙산의 일각일 뿐 4대강비리와 방산비리, 자원외교비리도 밝혀지겠지요. 그의 눈에는 돈만 보였고, 그에게 대통령직은 국민을 섬기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권력과 국민을 오직 돈을 모으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지요. 그는 유다와 같은 종국을 맞을 것입니다.
한편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13,33)고 하시자,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13,37) 하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것입니다(13,38). 그는 진심으로 주님께 목숨을 바치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자직은 말과 의지만으로 수행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 성주간에 내 안에 유다가 숨어있지는 않은지 살펴야겠습니다. 유다는 돈이면 안되는 게 없다고 속삭이며, 끝없이 돈의 우상을 좇도록 유혹합니다. 유다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않고 살도록 출세해서 권력을 차지하라고 부추깁니다. 유다는 나만 잘 살면 되니 다른 사람의 아픔과 어려운 처지까지 헤아릴 필요는 없다고 꼬드깁니다.
또한 내 안에 베드로와 같은 구석은 없는지 살펴야겠습니다. 내 안의 베드로는 자신의 힘과 의지로 예수님의 길을 따를 수 있다고 자만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 추종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과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 추종은 자만심을 버리고, 사랑으로 일상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며, 불의한 현실을 바꿔나가는 처절한 노력으로 표현되어야겠지요.
우리 모두 주님 곁에 머무는 척하며 시선과 마음을 딴데 두고 살아가는 유다이기를 그만 두어야겠습니다. 말로만 배반하지 않겠다고 힘주어 다짐하는 베드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매순간의 수고로움과 불편함, 고통과 아픔을 받아들이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투신하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최후의 만찬에 함께 한 사람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최후의 만찬을 거행합니다. 제자들은 파스카 만찬을 맘껏 즐기려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만찬이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순간이기에, 십자가의 길을 걷기도 전에 찢기는 마음을 추스르기 힘드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자리에서, 갈림 없는 믿음과 밝은 희망, 그리고 따뜻한 사랑 가득한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싶으셨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차마 열리지 않는 입으로, 떨리는 입술 애써 진정시키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배신할 제자에 대한 분노보다도 제 갈 길 잃은 제자에 대한 연민 서려 있는 슬픈 목소리, 차마 그 제자를 볼 수 없어 초점 잃은 듯 서글픈 눈물 가득 머금은 눈동자, 차마 입 밖에 내기 힘든 말을 하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의 모든 힘을 쏟아낸 후 핏기 잃은 하얀 얼굴빛.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자신들 중의 한 사람이 주님을 팔아넘길 것이라는 충격적인 사실보다, 그가 누구인지가 더욱 궁금했던 제자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까? ‘나는 아니겠지? 나만 아니면 돼.’ 배신당할 예수님은 안중에 없고, 오직 자신의 무혐의만 드러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마침내 유다가 배신의 길을 떠난 후에, 남은 제자들은 어떠한 마음을 가졌을까요? 차마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빠지신 예수님께는 숨기더라도, 속으로는 한 때 친형제와 다름없었던 유다에 대한 온갖 저주와 욕설을 퍼부으면서, 자신은 배신자가 아니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까요? 사랑했던 한 제자를 잃고 극심한 고통에 전율하시는 예수님께 자그마한 위로나마 되어 드리고자, 주제넘은 용기를 자랑하지는 않았을까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며칠 후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시몬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최후의 만찬에 사람들이 함께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실 예수님,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베드로, 자신이 배신자가 아니기 만을 바라는 제자들, 그리고 이들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과연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누구와 함께 하고 있습니까?
김성 신부님
찬미 예수님!
한 남자가 새로 산 스포츠카를 타고 길을 달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닭 한 마리가 엄청난 속도로 차를 추월하여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도 속도를 높여 달렸는데 , 닭은 이 차를 따돌리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남자는 동네를 수소문해 이 닭의 주인을 찾아 말했습니다.
“그 닭을 100만원에 파시오.”
주인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습니다.
“그럼 1000만원에 파시오.”
주인은 고개를 흔들며 대꾸조차하지 않았습니다. 열 받은 남자는
“에잇, 그까짓 닭 한 마리 가지고! 좋아 3000만원에 내 차까지 줄 테니 파시오!”그래도 주인은 고개만 가로저었습니다. 남자는 화가 나서
“도대체 안파는 이유가 뭐요?” 그러자 주인이 말하길
“잡혀야 팔지요.”
오늘 복음은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자들과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시던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신다고 보도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배신할 유다 이스카리옷을 생각하며 마음이 산란하신 것이고 그래서 그 마음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다른 제자들은 유다의 배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특히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배신할 자라고 하시면서 빵을 적셔주자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복음 사가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유다의 배신을 사탄의 조종으로 본다면 우리는 유다를 비판하거나 단죄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가 한 일이 아니라 사탄이 조종한 일이라면 그 배신의 책임은 사탄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 문장처럼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는 표현은 당시에 문학적으로 많이 쓰이던 표현이었습니다. 즉, 사람이 악에 기울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강팍해지는 것을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도 아주 잔혹한 범죄나 믿기지 않는 행동을 하는 이들을 보면 “미쳤거나 무엇에 홀린 것 아니냐?”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모시던 스승, 이 세상의 구세주인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유다의 결심은 이렇게 홀리고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행동이기에 사탄이 들어갔다는 무척이나 강력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문장의 본 뜻은 유다의 마음이 그렇게 배신하기로, 자신이 추구했던 이 지상에서의 승리,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스스로 죽음의 문턱으로 걸어가는 예수에 동조할 수 없었던 유다의 사상, 신념, 그리고 삶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인물. 베드로가 나옵니다. 그 또한 주님이 죽겠다는 그리고 가시겠다는 곳에 무턱대고 쫓아가겠다고 주님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어 놓겠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잘 아십니다. 그리고 그가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할 것을 미리 예견하십니다.
이 베드로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결말이 나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배반하고 슬피 웁니다. 그러나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진정한 신앙의 초대 수제자로 자리매김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유다이지요. 예수님을 고발하고 배신하고 은돈 삼십에 팔아넘기고서 결국 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유다도 마지막에 뉘우치고 자신의 죄를 스스로 자인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삼년이나 주님의 곁에 있던 제자가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갑니다. 어떤 신부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수도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라는 말을 묵상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조금 더 예수님께 다가가고 조금 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수도자라는 해석이었습니다. 유다. 베드로. 그리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오늘의 묵상 주제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믿는 이에게 절망은 없다.<요한 13ㅣ21ㄴ-33,36-3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절망은 희망을 잃은 사람에게 오는 불행입니다. 오늘복음에 똑같이 주님을 배반한 사람둘이 하나는 구원을 받고 하나는 구원을 받지 못한 사건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 안에 빠져 들어간 사람은 죄를 뉘우치고 못하고 용서 해주시는 주님을 믿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하였으며 뉘우치고 믿음을 가지고 용서를 청한 사람은 절망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았습니다.
절망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유다스는 세상의 권력, 재력, 명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돈으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던 사람으로 주님의 일을 보고 권력자가 되겠다. 생각했지만 힘없는 소리나 하신 주님을 돈이나 챙기자 생각했습니다. 이같이 땅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절망에 빠집니다.
절망을 극복하고 죄에서 일어선 베드로 사도는 땅의 영광을 찾지 않고 하늘의 영광을 찾아 주님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함같이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고 개인적 욕심이 없어 자신을 넘어 믿어 일어난 일이여서 죄 중에서 절망 하지 않고 일어서 구원과 모든 자격을 원상 복귀 되었습니다.
절망과 희망은 얼마나 순수하고 깨끗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더럽고 불순하고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죄인들을 위하여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몰입하여 좁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니 절망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믿는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나에게로 와서 나의 온유함과 겸손을 배워라.”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요한 13, 3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무서운 것은 정말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느님을 팔아넘기고
배신을 합니다.
조금만 입맛에
맞지 않아도
외면하고 배신하는
우리들입니다.
십자가의 길위에서도
배신과 배반이 있습니다.
언제나 배반하는 쪽은
나약한 우리자신입니다.
우리의 욕심을 위한
믿음이었음을 아프게
반성하게됩니다.
수 많은 배반의
역사속에서도
부활의 꽃은
피어날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이어갈 수는
결코 없습니다.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 십자가로
여실히 드러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배신한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우리를
끌어안으십니다.
비겁한 변명이 아니라
비참한 자기인정에서
베드로의 굵은 눈물은
믿음의 길을 다시
찾습니다.
믿음의 길을
다시 찾는
성주간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