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는 봄을 가장 빨리 알리는 꽃의 하나다. 얼마나 도도한지 선비들이 즐겼던 꽃이라 할 수 있다. 또
절개 굳은 기녀를 나타내는 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꽃의 수식어는 대단히 많다. 피어 있는 매화(梅花)꽃 위로 눈이 내리면
설중매(雪中梅)라 하고, 달 밝은 밤에 하얗게 피어있는 매화는 월매(月梅)라 한다. 또 옥같이 곱다 해서 옥매(玉梅)라 하고, 향기(香氣)를
강조하기 위해 매향(梅香)이라고 한다. 이른 봄에 처음 피어나는 매화를 찾아 나서는 것을 심매(尋梅) 또는 탐매(探梅)이다. 매화(梅花)는 보는
각도에 따라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이 주어진다. 퇴계 이황 선생은 '매화는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라는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오늘은 몇 개월 만에 보고 싶었던 매화(梅花) 같은 해피 가족을 만나는 날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들을 보았을 때 얼마나
많은 기쁨과 행복이 쏟아질까?
해피 가족은 산에 가는 택일도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잡았다. 하늘이 차츰 맑아지고 따뜻해지는 시기로
일 년 24절기 중 다섯 번째 절기인 오늘은 4월 4일 청명(淸明) 일이다. 또 내일은 한식(寒食)날이기도 하다. 청명 일답게 파란 하늘엔 몇
점의 흰 구름이 둥실둥실 정처 없이 떠다닌다. 임이 보고 싶어 어디론가 떠나는 새들도 외로운지 구름을 벗 삼아 함께 날아간다. 필자는 잎이
피어나고 꽃이 피는 봄의 신비로움과 만물을 감상하며 오솔길을 따라 정상을 향해 걷는다. 때로는 봄의 신비로움을 감상하다 보면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을 때 어느 곳은 매화(梅花)보다도 더 아름다운 진달래꽃이 웃으며 반긴다. 바위틈에 요염하게 홀로 피어 외로워하는
진달래꽃도 본다. 생명력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저렇게 바위틈에 홀로 피어있을까? 그것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런데 어찌
그리도 아름다운지 그 꽃을 보는 순간 반하고 만다. 어릴 적 코흘리개 때 뒷동산에 피어있는 진달래꽃을 따서 먹던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참을 걷다 보니 아차산 2보루(阿且山 2堡壘)가 나타난다. 아차산 주 능선에서 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줄기가 돌출하여 생긴 작은
봉우리(해발 276.2m)에 있다. 둘레 50m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작은 보루이다. 이곳은 미사리와 암사동 등 한강 일대를 내려다보기 좋고,
동쪽은 암벽이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 최근에 만들어진 돌탑 바로 남쪽에는 성벽 3단이 노출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흙으로 덮어 보존하고 있다.
성벽 안쪽과 유적 주변에서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토기로 꼽히는 몸통 긴 항아리 조각들이 지표면에서 발견되었다.
아차산 3보루(阿且山
3堡壘)가 보인다. 아차산 줄기의 6개 보루 중 가장 가운데 (해발 296m)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쪽의 아차산 2보루와 한강 이남은 물론,
서쪽의 용마산 보루들을 바라볼 수 있는 요충지이다. 성벽 둘레 약 450m 내부면적 약 6,500㎡로 추정되어, 아차산 일대의 보루
중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5년에 일부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배수로와 여러 개의 건물 기단, 성벽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다른 보루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디딜방아의 볼씨로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어, 아차산 3보루가 아차산 일원 병사들의 식량 지원 기능을 하였으리라
추측되기도 한다. 나머지 구역이 마저 조사된다면 아차산의 다른 보루들과 관련하여 이곳이 어떤 기능을 하였는지 좀 더 분명하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아차산에 산재한 약 20여 개의 보루는 각각의 위치에 따른 저마다의 기능이 있다. 가장 북쪽의 수락산 보류에서는 남쪽의
아차산 일대가 잘 보이며, 임진강 유역으로부터 양주 분지, 중랑천, 한강 유역에 이르는 고대 교통로를 감시하기에 적당하다. 망우산 보루에서는
북쪽 의정부에 이르는 길목까지 볼 수 있고, 용마산 보루들은 중랑천 일대를 방어하기에 적당하며, 아차산 줄기의 보루들은 왕숙 천변을 방어하기에
유리하다. 한강 변의 낮은 구릉에도 지금은 사라졌지만, 구의동 보루와 자양동 보루가 있어 아차산 일대와 한강 변 평지를 조망할 수 있었다.
*보루(堡壘) = 보루는 적군을 막거나 공격하기 위해 흙이나 돌로 튼튼하게 쌓아놓은 진지를 가리키는 군사용어다.
수없이 많은
산을 다녀 보았지만, 아차산처럼 유물과 유적지를 많이 품고 있는 산은 거의 없다. 이 산은 가는 곳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산 전체가
보물덩어리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정상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서울시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이곳엔 수많은 시민이 모여 재미있는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이곳은 자연과 서울시가 어우러져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정상이다. 넓은 분지엔 대부분 젊은 연인들이 넋을 놓고 사방을
바라보며 오묘한 자연에 취해 사랑을 구가(謳歌)한다. 우리는 그 틈바구니에 자리를 잡고 둘러앉아 집에서 싸 온 음식을 즐긴다. 음식을 즐기며
회원 간의 사랑스러운 대화는 웃음꽃으로 변해 향기 되어 흐른다. 언제 이렇게 향기로운 대화를 맛보았던가!! 남녀 간에 사랑의 대화도 이처럼
애정과 사랑이 넘치는 대화가 흐르지는 않을 것이다. *구가(謳歌)= 거리낌 없이 즐겨 누린다는 뜻
행복의 대화를 여운으로
남기고 용마산을 향해 올라간다. 가는 길목엔 진달래가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반긴다. 힘겹게 올라가다 보니 저만치 용마봉이라고 쓰여있는 정상 석이
보인다. 그 밑에 해발 348m라고 쓰여있다. 너무도 기뻐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정상석은 필자를 보곤 사랑하는 임이 왔다고 반가워한다. 그런데
그곳엔 젊은 남녀가 줄을 서서 사진을 찍기 바쁘다. 내 차례가 오기까지는 조금 기다려야 했다. 잠시 기다리다 내 차례가 왔다. 너무도 반가워
정상 석과 포옹을 했다. 비록 딱딱한 돌덩어리지만 사랑스러운 애인을 끌어 않은 느낌이다. 필자는 몇 번 용마산을 다녀갔지만, 정상에 오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애인처럼 사랑스러운 정상 석에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사진을 찍었다. 날씨가 더워 이마에선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젠 사랑스러운 임을 두고 하산해야 한다.
하산하다 보니 고구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게 쓰여있다. 고구려 평원 왕(25대) 때 마음씨 착한 온달은 집이 가난하여 동냥으로 어머니를 봉양했다.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평온 왕은 어린 공주가 울어대자 크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였다. 훗날 공주가 자라 왕이 상부 고 씨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자 공주는 어렸을 때 들었던 왕의 말을 내세워 왕명을 거역한다. 왕의 노여움을 사 보물들을 싸 가지고 궁을 나온 공주는 온달의 집을 찾아가
온달과 어머니를 설득하여 결혼하였다. 공주는 온달에게 말 고르는 법을 가르쳐주어 병든 나라 말(馬)을 사 오게 한 뒤 말을 잘 먹여 튼튼하게
기르고 무술을 닦게 했다. 그 뒤 온달은 왕이 참석한 제천행사에서 두각을 나타내 왕을 놀라게 했다. 온달이 후주와의 싸움에 큰 공을
세우자 왕은 온달을 사 위로 맞아들이고 대형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양원왕이 왕에 오르자 온달은 신라에 빼앗긴 계림현과 죽령의 서쪽 땅을
회복하겠다며 출정한다. 온달은 신라군과 아단성(구리시 아차산)에서 싸우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으며, 장사를 지내려고 하자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아단성에 와 관을 어루만지면서 온달의 넋을 위로하자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아단성: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여 축조된 백제의 성을 아단성이라 한다. 그 기능은 백제 왕성인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을
방어하는 시설로 말발굽 산성이지만 그 규모가 크다.
하산하며 고구려정(高句麗亭)을 보았다. 알림판에 의하면 광진구 아차산은
고구려, 백제, 신라 고대 삼국시대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던 아차산성과 고구려 군사 보루가 있는 우리 민족 역사의 현장으로서, 도도히 흐르는 한강과
어우러진 수도 서울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이곳에 1984년 콘크리트 건축구조로 팔각정을 건립하였다. 팔각정은 그동안 많은 주민과
등산객의 사랑을 받아왔으나 노후로 인해 건물 전체가 기울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여 정밀진단 후 2008년 1월에 철거하였으며, 남한 최대의 고구려
유적, 유물이 산재한 이 터에 고대사 연구 역사학자들의 철저한 고증과 자문을 거쳐 2009년 2월에 착공했다. 같은 해 7월에 준공하였으며
명칭을 팔각정에서 고구려 정으로 변경하였다. 이 고구려 정의 기둥은 고대 그리스 도리아식과 비슷한 기둥 가운데 부분이 불룩한 고구려 전통양식의
배흘림 식으로, 자재는 3백 년 이상 뒤틀리거나 변하지 않는 금강송이며, 기와는 고구려 궁궐인 평양 안학궁터와 아차산 홍련봉보루에서 출토된
기와의 붉은 색상과 문양을, 단청문양은 쌍영총과 강서중묘 등 고구려고분벽화에서 표현된 문양을 참고하여 남한에서 최초로 고구려 당시의 건축양식을
재현하였다. 이 고구려 정과 아차산성 및 송파구의 한성백제박물관, 강동구의 암사선사유적지와 연계하여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나아가 관광 상품화함으로써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 또한 고구려정 준공과정에서 이 고구려정 터가 아차산에서 가장 기(氣)가
왕성한 곳임이 확인되었고, 이러한 역사적 명산의 기(氣)가 왕성한 장소에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한다.
아차산(阿嵯山)은 고구려 유적을 간직한 보고(寶庫)이다. 남한에서 고구려 유물이 출토된 곳은 오직 아차산이라고 한다. 아차산은
이래서 우리가 가꾸고 보살펴야 할 보물덩어리 산이다. 해피 가족과 함께 고구려의 문화와 삼국시대의 많은 것을 배워가는 하루였다. 해피 가족의
건강한 모습을 모처럼 대하니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