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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의로움을 추구하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 6,2ㄹ-12>
사랑하는 그대여,
2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3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부합되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4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습니다.
이러한 것에서부터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못된 의심과
5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 갑니다.
그들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6 물론 자족할 줄 알면 신심은 큰 이득입니다.
7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9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10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11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그 대신에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12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 복음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8,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여성 봉사자는 사제의 오른팔인가, 그리스도의 왼팔인가?>
오늘 복음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신다.
2.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3. 여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이런 구조로 볼 때 예수님의 협조자는 제자들이고, 제자들의 협조자는 여성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차별을 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왜 여성들은 사제가 될 수 없고 수녀님으로서 사제의 협조자 역할만 해야 할까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잘못일까요?
그래서 일각에서는 여성 사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안타깝지만 이미 논의가 끝난 이야기입니다.
사제는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대리하기에 여성이 사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시대적 상황이 그래서 당시는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없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처럼 여성도 당당히 제자들과 함께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협조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공회는 여성 사제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성체를 나누어 줄 때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대리해야 하는 사람이 여성일 때는 신자로서는 아무래도 헛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의 협조자들인 여성도 여성이기에 맡은 역할은 다르지만, 남성과 같은 영광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 교회에서는 수녀님들이 사제들처럼 영광을 받을까요?
아무래도 사제들이 영명축일 같은 행사는 더 크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제들은 어쩌면 신자들이 주는 영광을 피상적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자녀들과 더 가까워 자녀들의 감사를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직접 받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수녀님의 묵상글입니다.
“그 전 본당에서 작년 겨울 소임 이동을 준비하고 떠나기 직전에 좀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평소에 열심히 기도하시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초에 대한 집착이 있으셔서 지난 해에도 다 쓴 제대초를 대부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제대회에 봉헌금을 내고 짧아진 제대 초들을 택시를 동원하여 받아가십니다.
그런데 잘은 모르겠지만 신자분들이 이 할머니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열심히 기도하시고 초에 대해 그렇게 오래전부터 집요한 애착을 두고 있어선지 그분들 사이에서는 약간 무시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할머니의 그런 모습과 주위 분들의 그런 태도에 별 신경 안 쓰고 그냥 편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른 곳으로 소임을 떠난다고 하니 할머니께서 저를 조용한 곳으로 잠깐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따라갔는데 저보고 의자에 앉으라고 하셔서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것 같아 같이 의자에 앉자고 말씀드리니 굳이 일단 의자에 앉아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의자에 앉으니 할머니께서 갑자기 맨바닥에 엎드려 제게 절을 하시는 거예요.
저는 너무 놀라 당황했는데 절을 하시면서 저에게 '수녀님, 저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는 할머니의 절을 받고 제가 갑자기 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가 저를 꼭 껴안으시며 죽을 때까지 저를 못 잊을 거라고 하셨어요.
할머니는 자식들 데리고 제가 떠나는 부임지로 꼭 한번 찾아가겠다고 하시면서 손을 못 놓으셨어요.
저는 그날 밤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큰 표징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할머니가 마치 하느님과 같이 느껴지면서 그 할머니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저에게 2년 동안 이 본당에서 그래도 헛되이 살지 않았고 위로와 사랑을 주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런 체험이 또한 그저 평범하고 약한 이들 안에도 역시 숨어 계신 하느님의 존재와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소중한 신앙 체험으로 제 마음에 간직되고 있습니다.”
여성이 가진 어머니의 모성과 사랑을 남성은 쫓을 수 없습니다.
여성들은 성당에서 이런 역할을 합니다.
사제들이 하지 못하는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여성이 사제가 되려는 것이 여성의 권위를 향상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여성의 권위를 더 높이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교회에서 점점 여성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 수녀님이 줄어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성모회도 사라지는 곳이 많고 자모회도 예전만큼 힘이 있는 단체가 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성당에 갔을 때 수녀님이 안 계신 성당은 왠지 좀 삭막한 것 같다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오늘 복음의 여성들과 비견할 복자품에 오른 분이 계시는데 ‘강완숙 골룸바’입니다.
이 분은 ‘한국 천주교 초대 여성회장’이셨습니다.
이분의 역할은 그분이 숨겨주셨던 주문모 신부님 못지않았습니다.
강완숙 골룸바는 서첩의 자녀로 태어나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오라버니들의 어깨너머로 글공부를 하였으나, 오라버니들보다 더 뛰어난 학식으로 영특한 여성이 되었습니다.
순천에서 아내와 자녀가 있었던 사람과 혼인하여 시모와 전처 자녀를 성실히 키웠습니다.
처음에는 불교에 입문하여 열심히 불경을 공부했으나 그에 충족하지 못하고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서학을 알게 되어 심취하게 됩니다.
남편은 박해가 심해지자 자신의 아내가 천주교를 가까이함을 알고 배교하기를 바랐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니 집에서 내쫓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강완숙 골롬바는 시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한양으로 이사합니다.
얼마나 어르신을 잘 모셨으면 시모와 전처소생인 아들까지 같이 한양으로 상경했을까요?
이때 중국에서 선교사로 오신 주문모 신부님을 모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주 신부를 찾고 있을 때라 시모께서 아실까 봐 광에 모시고 대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3개월 정도 지내다 골룸바는 단식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일을 굶으니 시모님께 왜 식음을 전폐했는지를 물으시고 마음의 병으로 그렇다 말하니, 시모가 여러 사정을 물으며 당신도 같이 식음을 전폐하고 2일이 흘렀다고 합니다.
총 5일을 금식하신 복녀는 그제야 자신의 사정을 시모님께 아뢰었고 시모님께서 그러한 마음의 병은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주문모 신부님을 댁으로 모시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렇게 주문모 신부는 골룸바 집에서 6년간 사목합니다.
주 신부 입국 당시 겨우 4,000명에 불과했던 신자 수는 5년 만에 1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골룸바의 활약으로 여신도의 수가 절대다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총회장으로서 주위 아낙네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부는 주 신부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고 골룸바는 주 신부를 피신시켜 체포를 면하게 하였습니다.
주 신부 체포에 혈안이 된 포도청에서는 갖은 고문으로 강완숙에게 주 신부의 행방을 다그쳤으나, 함구하여 밝히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로 인해서 수많은 신자가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음을 가슴 아파한 주 신부가 자수하여 처형당하자, 이를 옥중에서 전해 들은 강완숙은 자기 옷을 찢어서 그동안 주신부가 조선에서 활동한 경과를 적어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지만 이것을 전해 받은 어느 여교우의 부주의로 말미암아 그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모진 형벌인 주뢰(周牢)를 여섯 번이나 받으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으므로 형리들도,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하였습니다.
이렇듯 옥중에서 갖은 고난을 겪은 지 만 3개월만인 그해 7월 2일, 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나가는 길에서도 강완숙은 다른 4명의 여교우들을 격려하고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였습니다.
즐거운 낯빛으로 제일 먼저 목숨을 바치니, 그때 나이 41세였습니다.
이러함에 누가 강완숙 골룸바 복자가 주 신부보다 뒤처지는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 신부가 해야 할 역할이 있었고 강완숙 골룸바가 해야 할 역할이 있었습니다.
골룸바가 없었다면 주 신부는 머물 곳이 없고 사목할 곳도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성별의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다만 성별에 따른 역할만 다를 뿐입니다.
주문모 신부도 자신을 고문하는 이들에게 ‘신’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모세도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 때 자신 대신 말해줄 사람이 없다면 들어가지 않겠다고 끝까지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론을 붙여주셨습니다.
이 아론의 역할이 여성의 역할입니다.
남자가 여자가 아니면 자녀를 낳을 수 없고, 예수님은 교회가 아니면 복음을 전할 수 없듯, 사제들도 여성의 도움이 없다면 어쩌면 무용지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오른팔이 사도들이었다면 왼팔은 여성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의 오른손이 그리스도요, 왼손이 성령이셨던 것과 같습니다.
여성들이 사제의 오른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성 제자들과 여성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오른팔과 왼팔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줄어든다는 말은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줄어든다는 말과 같습니다.
교회가 잘 될 수가 없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자기들의 재산으로>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그에 걸맞은 응답을 해야 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하게 되면 더 큰 감사를 할 기회가 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논리입니다.
사랑은 베풀면 베풀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는데, 제자들과 막달라 여자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도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일찍이 악령과 질병에 시달린 사람도 있었는데 주님을 만나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악령과 고통이라는 시련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고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했기에 모두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주님과의 만남이 더 깊어졌고 나중에는 십자가 곁에도 설 수 있었고(루카 23,49) 천사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소식을 듣고 이를 사도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루카 24,10).
여인들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행복했고 자기의 것을 내놓음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베풀었지만, 보답을 바라지 않았고 자기네 재산을 바쳤지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숨은 공로자들입니다.
그들은 “은혜를 베푼 것은 모래밭에 새기고 은혜를 입은 것은 돌 판에 새겼습니다.”
재산은 이웃과 나눌 때 비로소 가치를 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도직 단체의 구성원이 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궂은일을 도맡아 합니다.
때로는 오해를 사고 무시당하는 일도 있지만 '하느님은 아시니까' 하면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숨은 공로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
(1디모 6,8-9)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화가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누가 부자 되었다 해도, 그 가산이 늘었다 해도 너는 두려워하지 마라.
죽을 때면 아무것도 지니고 갈 수 없으며, 영화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하리라.”
(시편 49)
따라서 여인들이 자기네 재산을 주님의 일에 쓴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
(성 알퐁소)
그리할 때 우리 모두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로자가 됩니다.
지금 감사하십시오!
절대 미루지 마십시오!
그러면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만날 것입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한다면, 주님께서 반드시 활동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에 대한 야욕으로 가득 찼던 전도양양했던 유다 청년이자 차세대 지도자로 촉망받던 사울의 회심과 그 이후에 펼쳐진 신앙 여정은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당시 사울이 지니고 있었던 유일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유다 고위층 인사들의 눈에 들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눈에 띄어 한 자리 차지하고 승승장구하며 초스피드로 부와 권력을 손에 쥘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환으로 사울은 당시 정통 유다인들 입장에서 볼 때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자 신흥 사이비 집단이었던 그리스도교를 박멸하는 데 최일선에 앞장서게 됩니다.
그리스도교를 향한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던 사울의 귀에 다마스쿠스에 그리스도교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는 즉시 체포 영장을 발부받아 전속력으로 다마스쿠스로 달려가기 시작하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계획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선포자로 앞장서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철저한 반 그리스도교인이었던 사울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찐 그리스도인으로 환골탈태시키십니다.
안테나가 오로지 세속적인 출세와 성공에로 향해 있던 사울, 그리스도교에 대한 철저한 박멸을 통해 자신이 꿈꾸던 장밋빛 미래를 활짝 펼쳐보려던 사울이었는데, 주님께서는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켜버리셨습니다.
회심 이후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티모테오 1서 6장 7~8절)
이어지는 말씀은 더욱 은혜롭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티모테오 1서 6장 11~12절)
바오로 사도의 회심 여정을 묵상하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원판 불변의 법칙을 굳게 믿으며 ‘이 나이에 무슨 변화?’하지만,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좀 더 마음을 활짝 연다면, 우리가 이웃들을 향해 좀 더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다면,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한다면, 주님께서 반드시 활동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실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삶의 중심인 예수님 -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인 삶>
오늘은 중세기 독일 출신의 베네딕도회 수녀인 성녀 힐데가르트 동정 학자 기념일입니다.
생몰(生沒) 연대를 보니 만 81세, 그 옛날이 병약한 몸으로 이 정도 사셨으면 정말 장수한 것입니다.
새삼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성녀는 수녀원장으로 있으면서 예술가, 작가, 카운슬러, 언어학자, 자연학자, 과학자, 철학자, 의사, 약초학자, 시인, 운동가, 예언자, 작곡가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성녀는 여러 수도원을 세웠으며,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2012년 그를 성녀이자 교회박사로 시성했습니다.
현대의 전기작가는 성녀를 만물박사로 묘사하는데 공감이 갑니다.
한 사람 안에 어쩌면 이런 무궁한 만능의 재주를 지닐 수 있는지 하느님의 솜씨에 경탄하게 됩니다.
성인들만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귀한 선물입니다.
또 우리들 하나하나 예외없이 각자 고유의 참나의 성인이 되라고 불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성소이자 의무입니다.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성인이 되라고 우리를 북돋우는 성인 축일입니다.
성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이 성인입니다.
그러니 성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 삶을 살면서 참나를 실현한 분들입니다.
하느님의 꿈을 현실화시킨 분들이 바로 성인들이며, 성인들 자체가 하느님의 존재 증명이기도 합니다.
성인들이야말로 하느님 은총과 인간의 부단한 노력의 산물입니다.
저절로 성인들이 아니라 한결같은 불굴의 믿음과 사랑을 지니고 노력했던 분들입니다.
요즘 수도원 주변을 산책하면서 곳곳에 무수히 산재해 있는 거미줄을 보면서 그 신비로움에 감탄합니다.
얼핏 보면 보이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 봐야 무수한 빛살같은 아주 정교하고 질서 있으며 수겹의 복잡한 긴 거미줄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지을 수 있나 참 신비로울 뿐입니다.
한 번 거둬낼까 하다가도 온 정성을 다해 지은 집을 허물 수 없어 손대지 않고 그냥 보기만 했습니다.
거미줄에는 무수한 작고 큰 곤충들이 망에 걸려 죽어 있었고 왕거미가 그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정말 웬만한 곤충이 아니곤 거미줄망에 걸리면 탈출은 도저히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곳곳에 널린 거미줄이 상징하는 바 세상 곳곳에 산재해 있는 유혹의 현실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도 보이지 않는 거미줄같은 유혹이 있을 수 있고 그 누구든 죄악의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광야인생 중 유혹에 빠져 무수한 중독에 폐인이 되거나 괴물이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무수히 산재한 유혹의 그물망들입니다.
무지에 눈이 멀 때, 유혹에 떨어지는 사람들입니다.
무지로 인해 눈뜬 맹인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이래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은총으로 눈이 열려야 올바른 분별로 유혹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요, 이래서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오늘 제1독서 티모테오에게 보낸 바오로의 첫째 서간은 이단과 탐욕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그에 대한 적절한 처방을 줍니다.
무지로 인한 이단과 탐욕, 교만의 유혹의 그물망에 걸려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가르침을 소홀히 함으로 이런 무지의 유혹에 떨어진 상태에 대한 묘사들 들어 보십시오.
유혹의 거미줄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지에 눈멀 때 우리 마음 안에도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습니다.
이러한 것에서부터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못된 의심과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갑니다.
그들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재앙 중의 재앙입니다.
진리를 잃어버려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괴물이나 폐인이 된 사람들, 그대로 지옥같은 유혹의 거미줄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실제 이런 사람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탐욕의 무지의 피해가 참으로 큽니다.
오늘날 기후 위기의 근원 역시 바로 인간의 무한한 탐욕에 있음을 봅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가 이런 무지의 탐욕에 대한 처방을 제시합니다.
참으로 기본에 충실한 시의적절한 지혜로운 삶을 위한 처방입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는 귀한 가르침입니다.
“자족할 줄 알면 신심은 큰 이득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하느님의 사람들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오늘날 물질주의와 탐욕에 중독된 사람들을 일깨우는 말씀이요, 한마디로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추구하는 주님의 전사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최소한도의 의식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이들이 진짜 내공의 깊은 내적자유를 누리는 영적 부자이자 지혜로운 자들일 것입니다.
어제 방문했던 어느 자매의 지혜로운 처신에 전적으로 공감했던 나눴던 내용을 나눕니다.
“결혼 전 사윗감에게 말했습니다.
내 딸하고 결혼하려거든 1. 세례받고, 2. 몸무게 감량하라고 두 조건을 제시했고, 사위는 이에 응답하여 세례를 받고 체중도 20kg 감량했기에 결혼을 시켰고 다음 주 출산 예정입니다.”
“참 멋지고 지혜로운 제안이었네요.
영적, 육신적 두 필수 조건을 충족시켰으니, 이제부터 영적으로 신앙생활 잘 하고, 육신적으로 건강관리 잘하면 되겠습니다.
영혼 건강과 육신 건강은 함께 갑니다.”
본질과 비본질적인 것이, 핵심적인 것과 부수적이 것이 뒤바뀐 주객전도의 현실을 수없이 목도하는 우리들입니다.
요즘 추석을 앞두고 선물을 받으면서 곧 쓰레기로 버릴 값비싸고 화려한 포장지에 개탄합니다.
먹으면 없어질 것들에 쌓이는 쓰레기 때문에 흡사 먹는 것이 편치 않고 죄를 짓는다는 느낌도 듭니다.
오늘 복음은 참 짧지만 귀중한, 믿는 이들 공동체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열두 제자들과 부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일종의 대가족 공동체가, 그대로 예수님 중심의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를 상징합니다.
그대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질서 잡힌, 균형과 조화를 이룬 하늘나라 공동체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 선포와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담당하고 부인들은 자기네 소유로 예수님 일행을 섬기니 참 이상적인 역할 분담이 이뤄진 안정과 평화의 공동체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시고 각자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 삶을 살기에 가능했음을 봅니다.
이런 공동체의 시스템이라면 세상 무지의 탐욕이나 그릇된 이단의 유혹이 스며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 수도공동체를 통해 입증되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 삶을 살게 하시며 더불어 아름다운 하늘나라 공동체 건설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이 오늘 강론을 요약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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