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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보는 두 가지 시선 (막3-11)
2024년 5월28일(화요일)
찬양 : 오늘 집을 나서기 전
본문 : 막2장13-17절
☞ https://youtu.be/84454ZCFntg?si=wR6ygeI-8EQST0Xx
어제 강원도 화천에 있는 교회를 심방했다. 늘 부지런함으로 섬기시는 목사님이시다. 지역의 아이들에게 다가서고자 디지털대학에 입학하여 3년째 영어를 공부하고 계시며, 교회 주변에 예쁜 화단을 조성하고, 서울의 초현대식 교회처럼 구석구석 얼마나 깨끗하게 단장해 놓으셨는지 ~
거기에 교회 뒤편의 산을 개간하여 텃밭 100여평 만들어 먹거리를 조성하셨다. 아내의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을 엄청나게 다니시면서 그 모든 일을 다 감당하신다. 그럼에도 새벽에 하나님앞에 엎드리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시며 당당하게 지역에 스며들며 전도하고 계셔서 내가 다 뿌듯할 정도다. 주님, 축복하소서.
새벽 일찍 출발해서 만나고, 종강 부흥회에 참석하고자 바삐 달려와 조금 늦었지만 두 번의 부흥회를 참석했다. 김윤선 목사님의 은혜로운 찬양 인도와 김성일 목사님의 뜨거운 말씀 증거로 저녁 12시까지 집회가 이어졌다.
10기, 11기생들의 섬세한 준비와 박종오 사관장과 김명현 목사님의 섬김으로 푸짐하고 행복하고 따뜻한 식사와 차와 나눔, 거기에 성령의 기름부으시는 충만한 은혜의 시간으로 채워진 종강 부흥회 ~ 오늘 점심까지 이어지는 모든 시간 주님의 충만한 은혜와 그리스도안에서의 사귐으로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고, 진짜 목사로 세워지기를 기도한다.
오늘 저녁에는 청년 세대를 섬기시는 전웅제목사님과 함께하는 <예플루언서> 모임이 진행된다. 다음세대 예배를 기획하고 각 교회의 환경에 맞도록 연구해 가는 모임에 주님의 특별한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본문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주님이 다시 갈릴리 해변에 오셔서 그곳에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시다. 13-14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큰 무리가 나왔거늘 ... 가르치시니라>
<지나가시다가 ...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 따르니라>
동일한 내용의 다른 성경을 비교해 보면 여기 나오는 레위는 세리 마태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다시 제자를 부르신 것이다.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에 앞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과 본문에 반복되어 겹쳐지는 두 단어가 보인다.
<지나가시다가, 보시고>
활동적인 사역의 현장에서 세워지셨고, 특히 주님은 제자들이 일하시는 현장을 보시며 부르셨다는 것이다. 당대 알아주는 일이 아니었고, 심지어 세리란 직업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비난받는 일이었음에도 주님은 보셨다.
메시지 성경은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번역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자기 일터에서 세금을 걷고 있는 것을 보셨다.>
사기치고 협박하는 모습이었을까?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누구도 인정하지 못하는 매국노라 칭함을 받고 심지어 회당에 나갈 수도 없으며, 증인의 자격조차 부여되지 못하는 신분이었지만 그는 주어진 자리에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 최선을 경주하는 모습을 보신 것이 아닐까?
성경이 자세하게 무엇을 보셨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주님의 부르셨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리적 추론을 해 보면 나름 자신의 자리에서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셨을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자리가 되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 ~ 그러니 돈이라도 더 벌어야지 하면서 더 백성을 약탈하고, 더 잔인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세리 레위 즉 마태는 그들과 달랐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세리라는 직업을 하게 되었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미워하고 유대인으로 당연히 누려야 할 회당에도 들어갈 수 없었고, 가족들도 다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자신이 해야 할 바른 일을 묵묵히 감당하였던 것이다.
주님은 오늘도 온 세상을 두루 다니시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위해 보시는 분이심을 찬양한다. 세상은 우리의 진심을 왜곡하고, 잘하려는 우리의 마음을 몰라주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 중심을 오늘도 보신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신다. 할렐루야 ~ 아멘.
중심을 보시는 주님과 대비되어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안타까운 이들이 본문에는 대조되어 등장한다. 15-16절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주님은 세리의 중심을 보시고 부르셨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이란 타이틀을 보면서 예수님을 비난할 조건으로 보고 있다.
본문을 가만히 펼쳐서 묵상해 본다. 세리 레위 즉 마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자 곧바로 만찬을 베풀었다. 그는 다른 많은 세리도 불렀다. 그러니 이 잔치는 매우 성대했을 것이다. 바래새인과 서기관들까지 이곳에 모인 것을 보면 그 규모가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리의 일을 하면서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기에 이렇게 공개적인 만찬을 만드는 일은 그에게 넘기 힘든 장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에 기뻐하며 잔치를 마련하였다. 그는 주님이 누구신지를 안 것이다. 자신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사랑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전도축제가 아닌가?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어떻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가? 하며 비난의 화살을 날려버린다.
이들의 비난은 죄인과 함께함으로 죄로 더럽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깡패를 이용하기 위해 만나는 정치인쯤으로 치부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죄에 더럽히지 않도록 하는 율법에 매우 신중했다. 이것은 중요하다. 죄에 더럽혀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의 그런 율법적 한계에 갇힌 생각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신다. 17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죄인들을 이용해 죄를 짓기 위해 만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죄로 물든 인생을 건지시기 위해 그들을 만나시는 분이시라는 말이다. 세상은 죄를 씻고 새롭게 할 능력이 없어 죄를 피해다니며 살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죄악을 씻으시고 구원하시며 세리를 제자로 만드시는 구원자라고 하신다.
오늘도 교회가 된 많은 성도가 죄를 피해다니기 급급할 때가 많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간 예수님을 비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에게 그런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리는 알았다. 그분의 보심과 부르심을 통해 자신의 죄악을 씻으시고 자신을 새롭게 하시는 그 능력을 맛보았다. 그래서 사람들을 초대해 그분의 씻으심을 드러내고 또 많은 다른 사람들도 그 어떤 것으로도 할 수 없었던 죄씻음의 은혜를 함께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할렐루야 ~
오늘 이 아침 주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주님은 오늘도 제자를 찾으시기 위해 우리 삶의 현장을 보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환경 탓, 사람 탓, 능력 탓하는 사람을 찾지 않으시고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자리에서라도 몸부림을 치며 충성됨으로 살아내는 사람을 찾으신다.
그리고 주님은 죄인들과 함께하며 죄로 더럽혀지는 분이 아니라 죄인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죄를 씻어주시는 죄인을 부르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세상은 끼리끼리 모이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이 편하다. 안전하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외치신다. 의사가 건강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병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처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마나욧선교회를 통해 작은교회를 섬기라고 부름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내 안에는 작지 않은 교회를 만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내가 무엇을 위해 보냄을 받았는지 다시금 주님은 물으신다.
그리고 주님이 보시고 계심을 기억하라 하신다.
오늘이란 삶의 자리는 주님이 보시는 자리다. 죄인과 죄로 타락된 세상을 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주님은 오늘도 죄인을 구원하여 당신의 뜻을 맡기실 제자를 찾고 계신다. 바로 현장에서 말이다. 생각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 부조리한 세상, 불편한 세상,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이지만 최선을 경주하며 몸부림치는 사람을 보신다.
오늘, 겹쳐진 피곤함과 재정의 결핍, 생각처럼 되지 않는 현실 등 다양한 문제 현장에 주님이 보심을 기억하며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주어진 사명의 자리를 살아가며 주님의 눈에 발견되는 날 되기를 다짐한다. 주님 ~
주님, 저의 이 하루 세상이 보여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주님이 보시고 계심을 기억하게 하소서. 죄와 사단의 밀려옴에 두려워 떨지 않게 하시고, 당당히 죄를 도말하며 죄인을 구원하는 자로, 작은교회를 만날 수 있게 하소서. 오늘도 저의 힘으론 할 수 없지만 나의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죄인을 정죄하는 세상이 되지 않게 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신 주님의 제자로 서게 하소서.
<중보기도 제목>
1. <웨이브리즈> 플랫폼에 적합한 사람을 보내주사 주님 뜻 이루게 하소서.
2. 목회사관학교를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3. 100명의 새로운 후원자와 3억의 출자금이 공급되게 하소서.
4. 박정제 목사와 팀원들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하소서.
5. 스페이스 알 사역을 통해 젊은 세대 사역자를 일으키게 하소서.
6. 땡스기브가 세운 틴케이스 공간이 소중히 쓰임받게 하소서.
7. 2024년 작은교회 부흥을 이루는 해가 되게 하소서.
8. 충주 라마나욧이 세워지는 과정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