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잠정적이고 덧없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인 가치와 의미를 두기에는 이 세상은 순식간에 덧없이 흘러갑니다.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 역시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변하고 지나가고 사라집니다. (전 1:2; 사 40:8; 요일 2:17)
따라서 이 세상 안에 고정점(固定點)을 찾는 것은 각주구검(刻舟求劍)과 같습니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은 움직이는 배에 표시를 새겨 칼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룻배를 타고 있다가 칼을 떨어뜨렸습니다. 빠뜨린 칼이 찾기 위해 배전에 빠뜨린 자리를 표시해 놓았습니다. 칼을 찾을 수 있을까요? 찾을 수 없겠지요. 배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그곳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각주구검은 융통성이 없거나 어리석음을 꾸짖는 데 사용합니다. 하지만 각주구검은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으려는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고사성어(故事成語)일 겁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르키메디안 포인트(Archimedean Point)의 가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견고하고 움직이지 않는(firm and immovable) 받침돌과 긴 막대기만 있으면 지구를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견고하고 움직이지 않는 받침대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왜? 모든 것이 잠정적이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은 “견고하지 않습니다. 잠정적일 뿐입니다. 덧없습니다, 흘러갑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집니다, 뒤돌아보지 않고 지나갑니다.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허무합니다. 때론 모순적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모든 것들은 시들어버릴 것입니다. 때론 구역질 나는 썩은 냄새를 풍길 것입니다.” 이것을 전도서(코헬렛)에서는 "헤벨(הֶבֶל)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하여 표현합니다. 입김이나 수증기, 안개를 뜻하는 이 단어의 일차적 의미는 “잠정적이다, 지나간다. 사라지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과 그의 속한 모든 것은 결국 썩음과 무덤과 시신의 냄새로 끝을 맺습니다. 너무 염세적인가요? 글쎄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Memento Mori) 이 세상에서의 삶을 돌아다 보아야 합니다. 달리 말해,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 궁극적 가치와 목적을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세상도 언젠가 지나갈 것이고, 이 세상이 갈망하는 것들도 지나갈 것이다.”(요일 2:17a)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짧은 순간의 이생을 허무하게 덧없이 보내지 않으려면 지나가는 것들을 잡으려 하지 말고 영원한 것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 지역에 있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아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사도바울의 이 말은 세례의 문맥(baptismal context)에서 하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먼저 자신들이 받은 세례의 의미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즉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리심을 받게 된 것을 지시하는 가시적 증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누구인지 누구에게 속한 존재인지, 즉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세례를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하신 나라, 거기로부터 시작되는 주님의 다스림을 “이 땅”(이 세상)에서 갈망합시다. 어떻게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다스림을 갈망할 수 있을까요? 그분께서 성령님을 통해 지상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듣고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래 전 예언자 이사야가 헛된 것(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 곧 우상. 참조 사 41:18-26)을 추구하다가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바벨론 포로 공동체에 이렇게 말씀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을 실로 풀이로다.” 허망한 것을 추구했던 인생을 뜨거운 열기에 시들어버리는 풀에 비견했던 이사야는 그것으로 끝을 맺지 않습니다. 시드는 풀과 대비되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성을 노래합니다. “풀을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을 반향(反響)하기라도 하듯이 신약의 요한 사도가 이렇게 외칩니다. “이 세상도 언젠가 지나갈 것이고, 이 세상이 갈망하는 것들도 지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요일 2:17). 하나님의 뜻에 따라 먹고 마시고, 울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걷기도 하고 실려 가보기도 합시다. 그렇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을 힐끗 보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 “똑바로 우아하게” 걸어보려고 기를 쓰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옮긴글>
[출처] 코헬렛의 세상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