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명칭 유래비
석야 신웅순
석북 신광수는 1760년 49세 되는 해 가정의 경제난 해결을 위해 관서지방에 간 일이 있었다. 거기에서『관서록』을 썼다. 석북은 그것을 바탕으로 언젠가는 관서의 실경을 실감나게 표현해보고 싶었다. 이를 13년이나 지난 1774년 63세에 와 비로소 번암의 전별시를 통해 쏟아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108수의「관서악부」이다.
남인은 인조반정 후 당쟁에서 패배, 숙종 6년 경신대출척 이후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번암은 갑술환국(1694, 숙종20) 이후 몰락한 남인으로서는 어려운 평양감사에 올랐다. 절친한 친구였던 당대 최고의 시인 석북에게 자신의 부임 축시를 써줄 것을 부탁했다. 평양감사는 재상의 지위라서 남인이 차지하기란 매우 드믄 일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석북은 번암에게 각별히 관서악부에서 우정 어린 부탁을 했다. 석북은 번암에게 미색의 경계와 목민관으로서의 본분을 다해 줄 것을 부탁했다. 108수로 쓴 것은 번암으로 하여금 선가의 수주로 언제나 염념하고 자성하라는 의도때문이었다.
신임 감사는 제일 먼저 관속들의 부임 인사와 기생들의 축하연을 받게 된다.「관서악부」 10번째부터 16번째까지가 감사 도임에 따른 의전과 축하연에 관한 시들이다. 행수기생은 감사에게 천침할 기생을 선발한다. 선발이 끝나면 부임 축하로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읊은 백거이의 노래, ‘장한가’를 부른다. 이 축하연에 비련의 노래가 불리워진 것은 감수성이 예민한 관서인들의 기호에 맞기 때문이다.
初唱聞皆說太眞 처음 부른 창은 양귀비를 노래한 장한가
至今如恨馬嵬塵 지금도 마외역에 남은 한을 슬퍼하네
一般時調排長短 일반 시조에다 장단 가락을 붙인 이는
來自長安李世春 바로 장안에서 온 이세춘이 아니런가
- 관서악부 15
이 시에서 석북은 가곡류 창사를 처음 시조라는 새 곡조에 장단을 붙여, 시조형식으로 부른 인물이 이세춘임을 언급하고 있다. 그로부터 시조라는 명칭이 비롯되었다. 이세춘은 영조때 이름 높은 가객으로 서울의 음악 유행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2014년 10월 30일 충남 서천군 화양면 대등리 석북 신광수 묘역에서 시조명칭 유래비 건립 및 석북 문학제가 열렸다.
시조 명칭 유래비 앞면에는 고체로 쓴 ‘시조명칭 유래비’ 와 ‘관서악부 15원문이 쓰여 있고 뒷면에는 시조 명칭 유래와 참여단체, 명단 등이 적혀있다.
시조라는 명칭은 조선 영조 때 시인 신광수가 쓴 「관서악부 15」에서 ‘일반으로 시 조의 장단을 배한 것은 장안에서 온 이세춘으로부터이다 一般時調排長短來自長安李世 春’라고 한 구절에서 비롯 되었다. 그 후부터 ‘시조’ 라는 명칭이 종종 쓰이다가 근대에 들어오면서 서구 문학의 영향으로 과거에 없었던 문학부류, 창가 ·신체시· 자유시 등이 나타나 이들 시형과 구분하기 위해 음악 곡조 의 명칭인 시조를 문학 분류의 명칭으로 차용하게 된 것이다.
시조는 우리민족의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 자랑스러운 우리 전통 문학의 위상을 높 이는 일과 신광수의 업적을 기리는 일은 문학적으로 매우 뜻 깊은 일이기에, 우리 민 족의 기념비적인 시조명칭 유래비를 석북 신광수 선생의 고향 충남 서천에 세운다.
- 시조 뒷면
시조명칭 유래비는 한국시조사랑 시인협회, 서천 문화원, 고령신씨 숭문회 등 세 단체가 참여해 건립했다. 국전 초대작가인 서예가 석야 신웅순이 글씨를 썼고 국전 초대작가인 명인, 오석 김일환이 돌을 제작했다. 이 유래비는 백승수 시인의 발의로 이루어졌으며 시조 뒷면 글은 시조건립을 주관한 시조사랑 시조협회 재가를 받아 석북 8세손인 국문학자 석야 신웅순이 썼다.
시조 사랑은 나라 사랑이다. 시조명칭은 문을 숭상한 숭문의 고장인 석북 신광수의 시에 비롯되었음을 알리고자 세웠다. 만시지탄이나 외류가 판을 치는 시대에 예향의 고장 충남 서천에 나라의 자존심을 세웠으니 길이 후손에 물려 줄 자랑스러운 기념비가 아닐 수 없다.
- 2023.2.8.(수) 뉴스서천
첫댓글 자존감 높은 글 읽었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제겐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