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Gypsi
Gipsy라고도 씀. 집시어로는 Rom. 인도 북부지역에서 기원한 코카서스 인종의 한 집단.
현재는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며, 피부색은 짙은 편이다. 대부분 인도 북부에서 사용하는 인도 유럽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집시어(Romany)를 쓰며, 거주지역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집시는 계속적인 이주를 통해 인도를 떠나 11세기에는 페르시아에, 14세기초에는 유럽 남동부에,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서유럽에 거주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후 20세기 후반에는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에까지 퍼져나갔다.
순수한 집시는 스스로를 Rom('남자' 또는 '남편'이라는 뜻)이라고 부르는 반면에 집시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 gadje('시골뜨기', '촌놈', '미개인'이라는 경멸적인 뜻으로 쓰이는 배타적인 말)라고 부른다. 집시들의 방랑벽, 이들에 대한 공식적인 인구통계표가 없다는 점, 흔히 다른 유목민들과 함께 분류된다는 점 때문에 집시의 전체인구를 추산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우나 약 200만~3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산발적인 연구만으로는 집시의 실태에 관해 중요한 통계자료를 얻을 수 없으나, 현재 집시는 특히 중남부 유럽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시들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라는 고정관념이 있기는 하나 실제로는 순수 이동생활을 계속하는 집시의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집시들의 방랑생활은 그들만의 고립성에서 나왔다.
집시는 혈연 또는 종족 집단들끼리 계절의 변화에 따라 국경선을 넘어 미리 정해진 길을 따라 이동한다. 집시들의 방랑 기질은 거듭되는 추방으로 더욱 심해졌다. 15세기에 서유럽으로 처음 이주한 후 80년 만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추방당하게 되었으나 그러한 계획적인 추방이나 해외로의 이송에도 불구하고 집시들은 쫓겨났던 나라에 다시 나타났다.
떠돌이들이 모두 속죄양이 되기 쉽듯이, 집시들의 경우에도 살고 있는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으레 많은 재난이 그들 탓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그런 비난이 있은 후에는 공식적·법적인 박해가 뒤따랐다. 집시가 머물고 있는 나라의 당국과 집시들 간에는 반목이 계속되었다. 가끔 집시의 정착과 융화를 목표로 한 공식적인 포고령이 있은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잠시 머물 장소를 허락하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아리아인을 보존하려 했던 나치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약 40만 명의 집시를 아주 조직적인 방법으로 학살했다. 프랑스 법은 집시들에게 텐트 장(場)을 허용하지 않고 경찰의 감독을 받도록 규정했지만, 사실상 집시들은 일반 시민들처럼 세금을 내고 징병되기도 했다. 스페인과 웨일스에서는 집시들이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지만 정착할 수 있었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집시의 이주를 막기 위해 강제적인 정착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시행해왔다.
전통적으로 집시들은 사회 주변에서 떠돌이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해왔다. 남자들은 가축중개인· 동물조련사·흥행사· 땜장이(대장장이·수리공)· 음악가였고, 여자들은 점쟁이·약장수· 걸인예능인 등이었다. 수의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많은 농부들이 가축의 건강이나 사육에 대하여 집시 가축중개업자에게 조언을 구했으며, 부서진 주전자, 냄비, 금속 용기를 집시 땜징이에게 맡겨 수선시켰다. 집시들은 지금도 이동하면서 살지만, 현대 문명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이들은 자동차·트럭·트레일러를 이용하여 이동하며, 가축거래 대신 중고차와 중고 트레일러를 판매한다.
스테인리스강(鋼) 주전자나 냄비의 대량 생산으로 땜장이가 필요없어지면서 일부 도시지역에 사는 집시들은 자동차 기계공 또는 차체 수리공으로 일하게 되었고, 이동 서커스단이나 유원지에서 동물 조련사, 구내 매점원, 점쟁이 등으로 일한다. 원래 집시 가정은 부부, 미혼 자녀, 그리고 최소한 1명의 결혼한 아들과 그의 아내 및 자식들로 구성된다. 결혼한 젊은 집시 부부는 보통 남편의 부모와 함께 살면서 남편 쪽 가정의 생활방식을 배우게 된다. 장자가 분가할 때 둘째 아들이 결혼하여 신부를 데리고 와 가족의 구성원을 채운다. 20세기 후반에 와서 크게 쇠퇴했지만, 전통적으로 집시의 결혼은 가족이나 생활을 함께하는 무리의 연장자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다른 가족 또는 부족과의 정치적 관계와 친족관계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결혼할 때 신랑 부모가 신부 부모에게 신부값을 지불했다.
집시들은 문화적·언어적으로 ① 칼데라시(발칸 지역과 중부 유럽에서 온 대장장이들로 가장 수가 많음), ② 히타노(프랑스어로는 Gitans라고 하며, 대부분 이베리아 반도, 북아프리카, 프랑스 남부에 살고 흥행에 뛰어남), ③ 마누시(프랑스어로는 Manouches, Sinti라고 하며, 대부분 프랑스·알자스·독일에 살면서 떠돌이 흥행사나 서커스 단원으로 일함) 등 3개의 주요집단으로 나누어진다. 이들은 또다시 직업적 특성이나 원래 거주했던 지역에 따라 2개 이상의 하부집단으로 나누어진다. 국제 집시 회의가 뮌헨·모스크바·부쿠레슈티· 소피아(1906)와 폴란드의 루브네(1936)에서 각각 열리기는 했지만, 모든 집시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권위체는 그것이 의회의 형태이든 '왕'이든 기록상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집시 왕에 관한 전설은 집시들이 낭만적으로 꾸며낸 이야기일지라도 집시들간에 정치적인 권위를 가진 인물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집시에 관한 글을 쓴 작가들은 '부족'이라는 말을 매우 모호하게 사용했다. 과거에 지역 주민들과 교제하면서 '공작'이나 '백작' 같은 귀족 행세를 하던 집시들은 10여 가구 또는 몇 백 가구의 무리를 이끄는 수령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령은 영향력있는 가족들 중에서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무리를 이끌며, 그 지위는 세습되지 않는다. 수령이 갖는 권력이나 권위는 집단의 크기·전통, 다른 집단들과의 관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수령이 집단 전체의 재무를 관리하며, 이주에 관한 결정을 하고, 지방 시 당국에 대해 집단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
또한 집단 내의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인 푸리 다이(phuri dai)와 원로회의를 통해 집단을 이끌어갔다. 푸리 다이는 특히 여자와 아이 문제에 관해 큰 영향력을 가졌는데, 이는 여자들도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고 영향력을 행사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시의 제도 가운데 크리스(kris)가 가장 강력한 사회 통제력을 가졌는데, 이는 집단의 의식과 재판소 구성은 물론 재판의 기준들과 관습법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집시들의 가장 근본적인 규약은 정치적인 단위조직 내에서의 충성·결속력·상호성이라는 포괄적인 개념들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규약을 위반하거나 분쟁이 일어났을 때 크리스 재판의 가장 엄중한 제재는 무리로부터 추방시키는 것이었다. 때에 따라서 일부 집단활동에 참여할 수 없게 한다든가 천한 일을 시키는 등의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추방되었다가 무리의 연장자들의 합의에 의해 다시 복귀되었을 때는 화해의 잔치가 벌어졌다.
한 집단은 모계 또는 부계 친족들로 이루어진 대가족인 비트사(vitsa)로 구성되는데, 많을 때는 200명 정도가 된다. 대규모의 비트사는 우두머리와 협의체를 갖추고 있고,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도 그 비트사의 구성원이 된다. 집단에 대한 충성이나 경제적인 협조는 비트사 단위에서가 아니라 각 가족 단위에서 요구되나 집시어에는 가족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 없다. 경제적 협력을 위해 남자는 가까운 일가 친척들에 의해 만들어진 행동의 규정에 따르는데, 이때 이들 일가 친척은 그와 분쟁관계에 있지 않아야 한다. 집시는 민속 신앙이나 관습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으며, 그들이 정착한 지역 (예를 들면 루마니아)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민족적' 풍습·춤 등을 실제적으로 보존시켜왔다. 또 집시들은 관습과 사상을 전달하고 음악과 춤을 풍성하게 발전시켰으며, 기본적인 수공기술을 발전시켰으나 문학에는 공헌하지 못했다. 플라멩코가 악보에 기록된 음악이 아니듯, 집시어도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은 단순히 문맹 때문만이 아니라 배타적인 문화의 내면세계를 밖으로 내보이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20세기 후반에 와서, 집시들은 차츰 그들 문화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싸워야 했다. 이제는 적대적인 사회에서 가하던 박해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화된 사회 속에서 도시문화의 영향력으로 인해\ 그들의 생활방식이 서서히 잠식되어가는 것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과거에는 집시 음악 속에 전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가족과 집단에 대한 충심 같은 주제가 전통적인 생활 양식의 보수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나, 이제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일부 젊은이들이 외부 세계에서 주는 물질적인 대가에 이끌려 바로 그들이 노래하고 있는 집시 문화의 총체성을 위협하고 있다. 한편 거주지역의 통합, 경제적인 독립, 집시가 아닌 사람들과의 결혼 등으로 집시들의 법이 점차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 집시들이 스스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부 문화의 특성을 선별하여 그것을 자체의 문화에 유익하도록 변형시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2. Bohemian 어원은 프랑스어 보엠(Boh泂me)이며,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 유랑민족인 집시가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15세기경 프랑스인은 집시를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의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방랑자,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예술가 ·문학가 ·배우 ·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실리주의와 교양 없는 속물근성의 대명사로 되고 있는 필리스틴(Philistine)에 대조되는 말이다. ‘보헤미안’이란 영어를 일반화시킨 작가는 사카레이다. 또한 이 말은 집시처럼 방랑하는 방랑자(vagabond)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3.Hippie 곧 업데이트 됩니다.
4.Bohemia (체)echy (독)Bohmen. 중부 유럽에 있었던 역사상의 국가.
남쪽으로 오스트리아, 서쪽으로 바이에른, 북쪽으로 작센·루자티아, 동쪽으로 슐레지엔·모라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몇 세기 동안 하나의 왕국이었으나 1918~39, 1945~4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서쪽 끝의 주(州)가 되었다. 그러나 1949년 1월 1일 주 조직이 해체되고, 체코슬로바키아 국가의 여러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나뉘면서 정치적 독자성을 잃었다. 1968년 보헤미아, 모라비아, 분리자치도시 프라하가 합쳐져 체크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5~6세기경 슬라브계 체크인들이 보헤미아의 비옥한 지역에 굳건히 자리잡았다. 초기 연대기는 리부셰 공주가 밭에서 일하는 농부 프르셰미슬을 보고 그와 결혼했다는 식의 반(半)신화적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처음 몇 세기 동안 체크인들은 외부세계로부터 어떤 주목이나 적대감도 받지 않고 세력을 구축했던 것 같다. 9세기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오면서 학자들에게는 좀더 분명한 역사, 체크인들에게는 좀더 격동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
슬라브어권 민족을 개종하려던 초창기 독일 성직자들의 노력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이웃 모라비아(지금의 체크)에서 온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는 슬라브어로 설교를 하고 슬라브 발음에 맞게 고친 그리스 문자를 이용해 보르지보이 군주를 비롯한 많은 사람을 개종시켰다(873경). 볼레슬라프 1세는 935년 동생 성(聖) 바츨라프를 죽인 뒤 아들 볼레슬라프 2세와 함께 동쪽으로 모라비아, 북쪽으로 슐레지엔과 갈리치아(두 곳 모두 지금의 폴란드에 있음)까지 보헤미아 세력을 확장했다. 이 영토들을 잃고 다시 뺏으면서, 때로는 정략결혼을 통해 통치자들이 독일과 폴란드 군주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외적 분쟁과 내적 싸움의 오랜 역사가 시작되었다. 보헤미아의 영향력은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도 커져 1088년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하사했고, 보헤미아 솔레슬라프 군주는 황제에게 술을 따르는 영향력있는 자리를 얻기도 했다. 1212년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보헤미아 왕의 권력을 증대시키고 제국에 대한 의무를 감소시킨 '시칠리아 금인칙서(金印勅書)'를 발표했다.
보헤미아 국력은 오스트리아 일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헝가리와 영토전쟁을 감행하여 아드리아 해(海)까지 지배권을 넓힌 프르셰미슬 오타카르 2세 치하에서 새로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278년 오스트리아 침공에서 오타카르가 죽은 뒤 보헤미아는 영토범위와 영향력 면에서 곧 쇠퇴하기 시작했다. 왕위계승 문제로 논란이 일어난 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는 카렐 1세로서 보헤미아의 왕을 겸하면서 1348년 프라하대학교를 설립하고 프라하의 경계와 영향력을 크게 확장했다. 이때부터 프라하는 보헤미아의 직접 통치영역인 동시에 유럽 전체의 지식과 예술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카렐 왕이 이룩한 이 평화는 로마 가톨릭교도와 1415년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얀 후스 추종자들 사이의 종교분쟁으로 대부분 깨졌다. 후스주의자거나 로마 가톨릭교도거나 모든 보헤미아인은 독일과 영국 십자군의 계속적인 공격을 받았으나 몇 년 동안을 견뎌냈다. 1436년 보헤미아에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는 협정이 공포되었으나 이것이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왕위계승을 둘러싼 그후의 논쟁에서 귀족들은 왕을 희생시켜 권력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왕실이 항상 지원을 받아온 마을사람과 농민에 대한 권력도 장악했다. 국민들은 많은 자유를 빼앗기고 일부는 농노로 전락하기도 했다. 1526년 보헤미아는 극심한 혼란상태에 빠졌다. 이전의 두 왕은 주로 헝가리에 살았고 오스트리아 대공(大公) 페르디난트 1세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여 보헤미아에 합스부르크 왕조를 세웠다. 로마 가톨릭교도인 페르디난트 1세는 한동안 종교문제를 관대하게 대했으나 결국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대립하게 되고 이 대립관계는 다음 왕위계승자에게까지 이어졌다. 1618년 프라하 대주교가 프로테스탄트 종교의식 금지를 명령했을 때(이것은 페르디난트 1세의 손자 루돌프 2세가 조인한 협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음) 왕의 고문관 2명이 흐르자디차니 성(城)의 창문 밖으로 던져진 사건이 일어났다.
' 프라하의 창문 밖 내던지기'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프로테스탄트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실패하여 결국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추방되고 보헤미아는 거의 완전히 오스트리아에 흡수되었다. 이 상황은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슐레지엔은 프로이센 영토가 되었고 새 통치자는 그래머 스쿨과 대학교에서 독일어를 교육언어로 제정하여 체크의 민족주의 감정은 사라진 듯했다. 체크어는 농민의 언어로 여겨진 반면 상류사회와 공공생활에서는 독일어만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민족적인 감정은 결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1848년 혁명의 시기를 거친 뒤 농노제가 폐지되면서 중산층은 권력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보헤미아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주데텐 독일인)들이 존재함에 따라 체크인의 국민감정은 더욱 깊어졌다. 주데텐 독일인은 대부분 오타카르 2세의 초청으로 13세기에 보헤미아에 이주한 독일 장인(匠人)의 후손이었다. 1880년 체크어에도 독일어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법령이 포고되었으나 독일계 주민은 여전히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체크인들은 내부의 주데텐 독일인보다 외부의 슬라브인에게 더 친밀감을 느꼈고, 러시아인과 특히 모라비아의 슬로바키아인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주데텐 독일인과 합스부르크가(家) 출신 보헤미아 통치자들은 체크의 범슬라브주의에 이질감을 느꼈고, 토마슈 마자리크는 프라하대학교에서 지식인들을 규합하여 체크와 슬로바키아 민족주의 이념을 공표했다. 1918년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1993년 체크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됨에 따라 현재는 체크에 속해 있다. |